”소군연 선배!”소만리가 소리쳤고 기모진은 얼른 달려가 소군연을 붙잡았다.응급실 안에 있던 간호사와 의사가 바로 달라와 그들을 도와주었다.예선과 소군연은 각각 응급실로 들어갔고 기모진과 소만리는 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소만리는 사영인과 예기욱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소만리에게서 소식을 전해 들은 사영인과 예기욱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한달음에 응급실로 달려왔다.영내문의 모친이 또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들끓었다.그러나 지금은 영내문의 모친을 향한 분노보다 예선과 소군연을 향한 걱정이 더 앞섰다.지금 이 순간 예선과 소군연이 무사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예기욱은 원래 자신도 사영인과 함께 응급실 밖에서 예선과 소군연의 소식을 기다릴 생각이었으나 응급실에서 도움을 청해 와서 응할 수밖에 없었다.의사로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당연한 책무였다.예기욱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응급실로 들어갔다.들어가 보니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소군연이었다.예기욱은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예선과 소군연은 왜 이렇게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하는 걸까, 하늘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밤은 속절없이 깊어갔고 응급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영인은 굳게 닫힌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소만리는 그녀에게 티슈를 건네며 말했다.“저도 어머니와 마찬가지 심정이에요. 우리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예선이 분명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우리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요.”사영인은 티슈를 받아들고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소만리는 이렇게 말하며 사영인을 위로했지만 실상은 자신에게 하는 위로이기도 했다.의식을 잃어가던 예선을 떠올리자 소만리는 예선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 감히 상상하는 것조차도 무섭고 두려웠다.“난 오랜 세월 동안 엄마로서 아무런 책임도 다하지 못했어요. 긴 세월이 흐른 후 명예와 부를 얻었고 이제야 겨우 딸과
소만리의 말이 끝나자 사영인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예선의 가장 친한 친구가 건넨 사려 깊은 조언은 사영인의 뇌리에 깊이 박혔고 엉켜 있던 마음속 근심의 실타래가 순간 확 풀리는 것 같았다.바로 그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소만리와 사영인은 일어서서 한달음에 달려갔다.“의사 선생님, 제 딸 어때요? 상태가 지금 어떤가요?”“보호자분 진정하세요.”의사는 차분하게 사영인을 진정시켰다.“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 봤어요. 자세히 검사해 보니 겉으로 보이는 외상 외에 별다른 특이점은 없는 것 같아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고 다만 지금 환자의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어요. 아마도 꽤 오랜 시간 음식을 먹지 못해서 그런 것 같은데 점점 나아질 거예요. 일단 환자가 깨어나면 조심스럽게 식사를 진행하게 될 거구요.”생명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사영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은 의사에게 감사를 표한 후 예선을 VIP 병동으로 옮겼다.예선이 더 나은 치료를 받아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사영인은 혼자 예선의 곁에 남아 딸을 돌보았고 소만리는 예선의 병실을 나와 기모진에게로 갔다.아직 소군연의 수술은 끝나지 않았다.소만리가 도착했을 때 마침 급하게 병원으로 온 소군연의 부모를 만났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군연이 아까 멀쩡하게 나갔는데 왜 갑자기 병원에 있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헐레벌떡 달려왔고 오자마자 바로 이 모든 책임을 예선에게 떠넘겼다.“또 그 예선 때문에 우리 군연이가 이렇게 된 거야? 그 여자는 도대체 왜 그래? 정말 지긋지긋해. 왜 굳이 우리 군연이한테 매달려서 이런 일을 만들어!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군연이 할아버지는 절대 예선이 그 여자를 집안사람으로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결국 그 여자가 단념하도록 만들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소만리에게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을 본 기모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소만리는
소군연의 부모는 기모진과 소만리가 하는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그래서 소군연의 모친은 임남희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았다.소군연의 부모는 갑자기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쪽 방면의 소식통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어보기 시작했다.영내문의 모친은 정말 경찰서에 있었고 수사에 협조하는 참고인 신분이 아니라 용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이 소식을 접한 소군연의 부모는 얼굴이 새하얘졌다.“어떻게 그럴 수가!”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는지 소군연의 모친은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서 물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소군연의 부모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소만리와 기모진을 바라보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해 봐야 스스로를 난처하게 만들 뿐이었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한쪽에 가만히 앉아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한 시간여가 지나자 마침내 수술이 끝났다.첫 번째 수술실에서 나온 예기욱의 표정은 꽤 심각해 보였다.소군연의 부모는 예기욱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그냥 평범한 의사라고만 여겼다.그들은 절박한 표정으로 예기욱에게 달려와 소군연의 상황을 물었다.예기욱은 소군연의 부모가 달려와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소군연의 부모임을 알아차렸다.그리고 소군연의 부모가 자신의 딸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도 알았다.사적인 감정으로 보자면 언짢은 감정이 없을 수 없겠지만 예기욱은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매우 객관적이고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소군연의 현재 상황을 알렸다.“환자는 이전에도 뇌를 다친 적이 있고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요. 그 상태에다가 오늘 외상을 입었고 출혈도 꽤 많았어요. 그러나 안심할 수 있는 점은 생명에 큰 지장은 없다는 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치료할지는 환자가 깨어나 상황을 본 다음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이 말을 듣고 소군연의 부모는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잠시 후 정적을 깨고 소군
소군연의 부모는 이런 자리에서 예선의 친부를 만나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집으로 돌아와 각자 샤워를 했다.온갖 먼지와 피로를 씻겨낸 두 사람은 그제야 편안히 소파에 몸을 기댔다.기모진은 드라이기를 들고 와 조심스럽게 소만리의 머리를 말려 주었고 다정하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그녀의 향기를 맡으니 기모진은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소만리, 당신과 함께 전 세계를 누비며 여행이나 하고 싶어. 짜증 나고 성가신 모든 일들에서 완전히 벗어나 홀가분하게 말이야.”소만리는 손을 들어 기모진의 옆얼굴을 툭툭 쳤다.“이제 은퇴하고 싶구나. 막내 분유값은 충분히 벌어 뒀어? 그리고 기란군과 여온이는 아직 학교 끝마치려면 한참 남았어. 아이가 셋씩이나 있다구요, 기 사장님. 은퇴는 아직 일러요.”“아이들이 다 크면 그땐 우리가 늙어서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도 못 할 수도 있어.”기모진이 갑자기 진지해져서 소만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소만리, 최근 몇 년 동안 우리에겐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어. 난 몇 번이나 당신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어. 그때 내가 느꼈던 초조함과 불안은 말도 못 해. 난 다시는 그런 기분 느끼고 싶지 않아. 평화롭고 평온한 나라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싶어. 더 이상 다른 사람들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일 없이 말이야. 어? 소만리, 내 말 들었어?”기모진의 깊은 뜻을 소만리는 헤아릴 수 있었다.소만리도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지난 몇 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생사를 넘나들긴 제 집 문지방 드나들 듯했다.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그녀는 지금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함을 느꼈고 더욱 소중하고 애틋하게 여겼다.소만리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기모진을 가만히 바라보며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모진, 당신과 함께 여기까지 오기 정말 쉽지 않았어, 그지? 그렇지만 이젠 걱정하지 마. 당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당신 곁
소만리는 위청재가 이렇게 말하자 그제야 뭔가 떠올랐다.최근에 하도 일이 많이 일어나서 그녀는 그 여자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다시피했다.다만 좀 의심스러운 점은 그 여자가 뜻밖에도 자기 발로 집을 떠났다는 것이었다.“왜 떠나는지 말 안 했어요?”소만리는 보온통에 닭고기 수프를 넣으면서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그 여자는 처음부터 우리 모진이랑 뭔가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면서 우리 집에 접근했는데 어떻게 그런 꿍꿍이를 가진 여자를 집안에서 일하게 놔둘 수가 있겠어? 불쌍한 척한 거 그거 다 연기였어. 거짓말이었다구. 너한테 동정을 얻어서 일단 우리 집에 남은 뒤 기회를 틈타 모진한테 접근하려고 했던 거지.”위청재는 호정의 행동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다.사실 소만리도 호정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기억을 상실한 것처럼 행동한 것도 모두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한 연기였던 것이다.그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복수하려는 생각뿐이었다.소만리는 헛웃음이 나왔다.더 이상 이런 쓸데없는 일에 매달릴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그녀는 보온병을 들고 부엌을 나왔다.“어머니, 저 지금 예선이 보러 병원에 좀 다녀올게요.”“그래, 걱정 말고 다녀와. 조심해서 다니고. 또 이상한 사람 만나서 무슨 일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해.”위청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당부했다.“알겠어요. 조심할게요.”소만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 곧장 집을 나섰다.그런데 병원으로 오는 길에 소만리는 수상한 사람들이 자신을 미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주위를 계속 경계하며 병원에 와서 예선이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았다.병실에 들어가 보니 예선은 이미 깨어나 있었고 옆에서 사영인이 예선을 돌보고 있었다.사영인은 소만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손을 들어 눈가의 눈물을 닦은 뒤 미소를 지으며 소만리를 맞았다.“왔어요? 마침 내가 일이 좀 있어서 나가 봐야 하는데 예선이 좀 돌봐줘요.”말을 마친
”소만리, 네가 알다시피 난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없었어. 날 낳아준 사람은 나에게 몸을 주었을 뿐 다른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예선은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며 소만리가 끓여 온 수프를 말없이 먹었다.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에 앉아 예선을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그렇지만 예선아, 객관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네 엄마 아빠 어떤 사람인 거 같아?”예선은 수프를 먹다 말고 꺼림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진지한 말투로 소만리의 물음에 대답했다.“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땐 지적이고 우아하지. 선하고 맺힌 구석이 없는 시원시원한 사업가이고. 그리고 한쪽은 의술과 덕을 겸비한 권위 있는 교수. 두 사람 다 모두 자기 방면에서 최고라고 볼 수 있겠지.”“단지 그것뿐이야?”소만리가 다시 물었다.“그럼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봤을 때 두 분이 널 어떻게 대하는 거 같아?”“나한테? 잘 대해주시지.”예선이 웃었지만 그 미소는 이상하게도 아이러니하게 보였다.“그들은 각자 성공한 후 그들이 쓰레기처럼 버린 딸을 찾아와 지난날의 잘못을 메우려 하고 있지.”소만리는 예선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예상하고 있었다.예선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그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기엔 지난날 자신의 상처가 너무 쓰라린 것이다.온 가족이 함께 모여 따뜻한 정을 느끼는 순간을 누구보다 더 갈망해 왔던 예선이었다.소만리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사영인이 용기가 없어 하지 못했던 말을 직접 예선에게 알리기로 결심했다.“예선아, 사실 당시 네 엄마가 널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쩔 수 없는 고충이 있었기 때문이야.”“고충? 무슨 고충이길래 엄마가 되어서 자신이 낳은 딸을 매정하게 버릴 수가 있는 거야? 넌 아무리 고충이 있었어도 그때 기란군을 지켰어. 그 어떤 힘든 고충이 있었다고 해도 자식을 버리는 고통보다 더 할까?”예선의 말을 듣고 소만리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아마도 육체적인 고통은 내가 네 엄마보다 더 켰을 수도 있어. 하
예선의 말을 듣고 소만리는 미소를 지었다.소만리는 예선이 일부러 더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안다.예선은 이것이 사실이라는 걸 누구보다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예선아, 우리 앞날이 마냥 길지만은 않아. 요즘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잖아. 앞으로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 지금 눈앞에 놓여진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해. 특히 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이야.”소만리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예선도 잘 알고 있었지만 왠지 지금 그녀는 이 순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소만리, 군연은? 군연은 어떻게 됐어? 방금 내가 듣기론... 군연이 날 구하려다 피를 많이 흘렸다던데 괜찮아? 심각한 거 아니야?”“안 그래도 조금 있다 소군연 선배 보러 갈 거야. 걱정하지 마. 소군연 선배한테 무슨 일이 있었다면 네가 방금 말한 그 사람이 너한테 알렸을 테니까.”“...”예선은 소만리가 일부러 사영인을 그렇게 지칭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어찌 되었든 소군연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것으로 족했다.“그럼 소만리, 너 군연한테 좀 가 봐. 난 혼자 생각 좀 해야겠어.”예선은 혼자 있고 싶은 눈치였다.소만리는 당연히 예선의 그런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 그럼 난 소군연 선배한테 가 볼게.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네 몸이 다 낫는 거야.”예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치료 잘 받을게. 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칠 순 없어.”예선이 이렇게 말하자 소만리는 더없이 안심이 되었다.보온병을 치운 후 소만리는 예선의 병실을 나와 소군연을 보러 갔다.소만리가 소군연의 병실 문밖에 도착했을 때 병실에서 나오는 소군연의 모친과 맞닥뜨렸다.소군연의 모친은 무거운 얼굴로 소만리를 쳐다보며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았다.“당신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군연이가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어. 다시
”...”조곤조곤 콕콕 집어 말하는 소만리의 말에는 논리적인 구멍이 전혀 없었다.예선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가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소만리와 예선은 동시에 눈을 들어 문쪽을 쳐다보았다.흰 가운을 입은 예기욱이 머뭇머뭇거리며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본 예선은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예기욱은 예선이 자신을 순순히 들여보내 줄까 짐짓 기대하는 눈빛으로 서 있었다.소만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예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침 예선이랑 선생님 얘기하던 중이었어요.”예기욱은 소만리의 말을 듣자 긴장이 다소 풀린 듯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예기욱은 이렇게 물으며 은근슬쩍 병실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왠지 빙빙 겉도는 눈치였다.예선의 얼굴에 상처가 난 것을 본 예기욱은 아버지로서 마음이 아팠지만 입을 열어 따스한 위로조차 건넬 수 없었다.마치 자신은 딸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소군연 선배 몸 상태는 어떤지 걱정되어서 좀 알아보려던 참이었어요.”소만리는 예선에게 슬쩍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예선은 소만리의 시선을 받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오므렸다.예기욱은 예선이 소군연의 상황이 어떤지 몹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망설이지 않고 바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소군연도 외상만 입었을 뿐이지 다른 문제는 없어. 출혈이 좀 많아서 걱정하긴 했는데 잘 먹고 치료하면 아무 문제없으니까 걱정하지 마.”긍정적인 예기욱의 말에 예선은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하지만 소군연이 피를 많이 흘렸다는 말은 그녀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예선아, 왜? 왜 그래? 어디 불편해? 만약 불편한 데가 있다면 아빠한테 바로 말해... 아, 아니 의사 선생님한테 말해.”예기욱은 자신도 모르게 아빠라는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