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선이? 그 여자가 또 왜 왔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소군연의 모친은 얼굴 가득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영내문도 경멸하는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군연 오빠는 지금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겠죠. 그래서 갖은 방법을 써서 군연 오빠한테 접근하려고 기회를 틈타 거짓말을 했을 거예요.”“난 그 여자가 군연에게 접근하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소군연의 모친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그 여자와 군연은 확실히 궁합이 안 맞아. 군연이 그 여자와 함께 있으면 다음번엔 어떤 큰일이 벌어질지 몰라. 이번 사고도 원래는 그 여자한테 일어났어야 하는 거였는데 군연이가 대신 당한 거잖아.”소군연의 모친은 예선에게 모진 말을 했고 그 말을 듣는 영내문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아주 속이 후련했던 것이다.하지만 영내문은 소군연의 모친이 예선을 헐뜯으며 모진 말을 퍼부어 대는 건 아주 마음이 흡족했지만 사실 자신도 마음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생각해 보다 영내문은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소군연의 모친 곁에 다가갔다.“저기 어머니, 사실은 저도 사과드려야 할 일이 있는데요.”소군연의 모친은 의아해하는 눈으로 영내문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인데 그래?”“저기, 제가 예전에 어머니께 드린 선물 말인데요. 그게 글쎄 가짜로 판명이 났대요.”이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갑자기 안색이 확 변했다.“어머니, 저도 이 일이 어찌 된 건지 모르겠어요.”“그게 무슨 소리야?”소군연의 모친은 영내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영내문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어머니, 제가 어떻게 어머니를 속일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전 절대 어머니를 속일 마음이 없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얼마나 절 예뻐하셨는지, 얼마나 저한테 잘 해 주셨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그날 소만리가 감정서를 가지고 와서 제가 어머니께 드린 선물이 모두 가짜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저도 돌아가서
예기욱은 예기치 못한 예선과의 만남에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예선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기쁨을 참지 못했다.그러나 그는 반드시 감정을 들켜서는 안 되었다. 억지로라도 이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예선 씨, 이 병원에는 왜 오섰어요?”예기욱이 물었다. 예선은 입술을 오므린 채 미소를 지었다.“일이 좀 있어서 왔어요. 참, 교수님은 왜 이 병원에 오셨어요?”“병원에서 강의가 있어서요.”예기욱이 말했다.“아, 그랬구나. 이렇게 바쁘신데 내 남자친구를 위해 시간을 내 주셔서 정말 고맙고 죄송해요.”예선은 진심을 담아 감사의 말을 전했다.“죄송하긴요, 내 집안...”예기욱은 하마터면 가족이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지만 얼른 멈추었다.“내 말은 그러니까 의사로서 오랜 세월 동안 환자와 함께 해 오면서 내 가족처럼 보살펴 왔고 그들이 회복되어 완쾌된 모습을 보면 가족 일처럼 기뻤어요. 사명감도 느끼구요.”“예 교수님은 정말 타고난 의사신가 봐요. 사명감이 대단하셔요.”예선이 감탄하듯 그를 칭찬했다.“참, 사실은 저도 마침 교수님께 드릴 말씀이 있었어요. 제가 남자친구와 약속을 잡았어요. 아마 내일 점심시간에 그가 잠깐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교수님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예기욱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그럼요. 그럼 내일 남자친구를 데리고 방금 그 병원으로 오세요. 마침 내일 이 병원에서 반나절 동안 진료를 받을 예정인데 더 잘 됐네요.”“정말 다행이에요!”예선은 기쁨과 흥분을 참지 못했다.“그럼 내일 교수님께 신세 좀 지겠습니다.”그녀는 앞에 보이는 지하철역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예 교수님, 저기 지하철역 앞에서 잠시 세워 주실 수 있을까요? 지하철 타고 가면 되거든요.”“아니 그럴 필요 없이 내가 집까지 바래다 드리죠.”예기욱은 계속 엑셀을 밟으며 말했다.“마침 익현이를 만날 일도 있구요. 어차피 가는 길인데요.”예선은 예기욱의 말뜻을 이해했다.아마도 예기욱은 그녀를 회사 근
예선은 사영인의 미소 띤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오늘 저와 교수님이 저녁 식사하러 올 줄 알고 계셨죠?”예선의 말을 들은 사영인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움찔하다가 그만 날카로운 칼날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선홍색 피가 순식간에 손가락을 덮으며 붉게 물들였다.“앗.”사영인이 아픈 듯 짧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이 광경을 본 예선은 갑자기 죄책감이 밀려왔다.왠지 자신이 방금 그 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손가락에 피를 흘리는 사영인을 보니 예선의 마음이 아파왔다.“구급상자는 어디 있어요?”예선이 다급히 물었다.보통 가정집에는 작은 구급상자 하나 정도는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사영인은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의 아픔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예선이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예선아, 괜찮아. 긴장할 거 없어. 조금 베인 것 가지고 구급 상자는 무슨. 필요 없어.”사영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 부위를 물로 씻었다.사영인의 말에도 예선은 걱정스러운 듯 얼른 거실을 한번 둘러본 후 눈썰미 좋은 눈으로 구급 상자를 찾아내었다.예선은 알코올솜과 반창고를 들고 부엌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사영인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예선은 벌써 알코올 솜을 사영인의 다친 손가락 위로 살며시 얹었다.순간 사영인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오히려 따뜻한 온기가 자신의 가슴을 적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예선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찡그리며 상처를 소독하고 있었지만 사영인은 그런 예선의 모습에 마음이 저릿저릿했다.예선은 사영인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소독한 후 반창고를 붙이고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싱크대로 향했다.“저도 요리할 줄 알아요. 그러니 저쪽에 가서 앉아 계세요.”예선이 이렇게 말하며 부엌칼을 들고 직접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사영인은 싱크대 앞에 서서 채소를 다듬는 능숙한 예선의 손놀림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마치 익숙한 공간에 들어오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었다.마치 원래 이 집에 살고 있던 사람처럼 웃으며 말했다.“오늘 오랜만에 옛 제자를 만나 옛이야기나 나누고 싶었는데 익현이한테 갑자기 중요한 손님이 와서 먼저 자리를 떴어요.”예선은 부엌에서 예기욱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고 방금 완성한 요리들을 식탁에 차리기 시작했다.예기욱은 그제야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예선임을 알아차렸고 갑자기 정신이 멍해진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사영인은 예기욱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오늘 저녁은 모두 예선이가 많든 거예요.”예기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화색을 드러내었다가 이내 곧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우리 딸이 언제부터 요리를 하게 된 거야?”그는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고 사영인에게 고개를 돌렸다.“우리 딸이 항상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 남자친구 때문이겠지?”“예선이가 요즘 확실히 말랐어. 아마도 군연이를 돌보느라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는 건 소군연의 부모예요. 그 영내문이라는 여자가 얼마나 밉살스럽고 악독한지 사람을 써서 예선이 차 브레이크에 손을 대고도 어찌 된 일인지 피해자가 되어 있더라구요.”사영인은 말하다 보니 더욱 화가 났다.영내문이 예선을 타깃으로 한 짓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그 영내문이라는 여자는 악랄하기가 말도 못 해요. 겉으로는 연약한 척하지만 안에는 사악한 독사가 도사리고 있는 듯 얼마나 악독한지 몰라요. 난 그 여자가 계속 이렇게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하도록 놔 둘 수가 없어요.”“나도 인터넷에서 그 일 봤어. 그런데 사고를 당할 뻔할 사람이 우리 딸이라는 사실은 몰랐어.”예기욱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도대체 영내문이란 여자는 뭐하는 여자야? 그런 악독한 여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마음인 거야?”“대부분 돈
예선의 말에 사영인과 예기욱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떻게 예선과 눈을 맞춰야 할지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내 말이 틀린 거 아니죠?”예선은 다시 입을 열었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사영인은 얼른 정신을 추스르며 서둘러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예선아, 그게...”“그때 당신들은 하나같이 날 속이고 길가 노점상 옆에 혼자 내버려두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었죠. 오늘도 그때처럼 날 속이려고 모의하신 거예요?”예선은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비꼬았다.“정말 단 한 번이라도 당신들의 딸로 취급하신 적 있어요?”예선은 실망감이 가득 서린 눈으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사영인과 예기욱은 어쩔 줄을 모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예선아, 엄마 아빠는 널 속이려던 게 아니었어. 왜냐하면...”“이 사람이 그 옛날 무책임했던 아버지라는 걸 내가 알까 봐 그런 거죠? 내가 당신들을 거부하며 반항할까 봐 두려웠어요?”예선은 사영인의 말을 끊고 차갑게 되물었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걱정 마세요. 거부하지도 반항하지도 않을 테니까. 예 교수님이 군연을 잘 회복만 시켜 준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든 나한테는 아무 상관 없어요.”예선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던지고는 과감히 돌아섰다.그녀는 가방을 들고 곧장 현관으로 걸어갔다.“예선아!”“예선아!”사영인과 예기욱이 함께 예선의 뒤를 쫓았다.“예선아, 아빠가 널 일부러 속일 생각은 없었어. 아빠는 처음 아파트 밑에서 널 만났을 때 네가 내 딸이라는 걸 몰랐어. 하지만 널 다시 만나게 되어서 아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다만 널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그게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만...”뒤로 갈수록 예기욱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갔다.“예선아, 아빠는 감히 너한테 용서도 구하지 못하겠어. 너랑 이렇게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며 몇 마디 나누는 것만도 너무 감사해.”현관에 멈춰 선 예선의 뒷모습을 바라보
예선은 자조적으로 웃었다.눈물이 다시 그녀의 눈가에서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소만리는 그런 예선이 너무나 안쓰러워 예선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위로의 말을 하려고 했다.그런데 갑자기 예선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정말 잘 됐어. 우리 엄마 아빠 모두 완전 능력자가 되었으니. 난 내 남자친구도 만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는데 말이야. 정말이지 세상 참 웃겨, 정말 웃겨!”이렇게 말하면서 예선은 다시 술잔을 들고 술을 따르려고 손을 뻗었다.소만리는 급히 그녀의 손을 막았다.“예선아, 그만 마셔. 너무 많이 마시면 몸 상해.”“하지만 소만리, 나 지금 너무 슬퍼...”예선은 울음을 터뜨렸다.“소만리, 나랑 술 한잔하자. 그러면 잠시 나쁜 일들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예선의 말에 소만리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소만리는 가만히 예선의 손을 놓았다.때론 술을 마시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일시적으로 모든 걱정거리를 잊게 해 준다면 그것만으로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막내아들이 이제 단유를 했으니 소만리는 안심하고 대담하게 술잔을 들었다.그러나 소만리는 술잔을 입에 대기 전에 우선 기모진에게 메시지를 남겼다.예선은 기분이 정말 말이 아닌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건강을 해칠까 봐 계속 말렸지만 예선은 고집스럽게 소만리를 밀어내며 계속 술잔을 들이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예선은 술에 취해 소만리의 어깨에 기대었다.소만리는 마음이 아파서 예선의 어깨를 계속 어루만져 주었다.“울지 마, 다 지나갈 거야. 소군연 선배는 곧 회복되어서 널 기억해 낼 거야. 그리고 네 엄마 아빠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믿어야 해. 예전에 널 내버려두었을 때는 분명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야.”예선은 소만리가 한 말을 들은 듯 술 취한 목소리로 흐리멍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군연, 군연은 반드시 괜찮아질 거야. 아빠 엄마, 아빠 엄마. 나한테
소만리는 침대 위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음, 곧 낮 12시야.”“뭐? 벌써? 어떡해!”예선은 정신이 번쩍 든 듯 아픈 머리를 어찌할 새도 없이 손을 뻗어 소만리가 건네주는 옷을 집어 들고 후다닥 욕실로 뛰어들어가 샤워를 했다.“예선아, 천천히 해. 너 방금 깼잖아. 조심해.”소만리가 당부했다.“알겠어. 더 이상 너 걱정시키지 않을게.”예선이 큰소리로 대답했다.소만리는 안심하고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 예선이 먹을 해장국과 밥을 준비했다.예선은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소만리는 비로소 예선이 오늘 소군연을 데리고 진료를 받으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진찰을 맡아줄 사람은 예선의 아버지 예기욱이었다.“얼른 먹고 군연을 만나러 가야 해. 아마 지금쯤 군연은 이미 출발했을 거야. 소만리, 이따가 나 좀 데려다줘.”예선은 해장국을 입에 떠 넣으며 말했다.소만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바보야, 당연히 데려다줘야지. 그러니까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할라.”“늦으면 안 돼. 군연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어. 영내문과 군연의 엄마한테 들키면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예선은 소만리가 직접 끓인 해장국을 단숨에 들이켰고 배부르게 먹고 나니 벌써 속이 다 풀리는 것 같았다.예선은 소만리의 차를 얻어 탄 후 소군연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소군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지난번 그때 예선은 소군연의 핸드폰에서 자신의 번호를 차단 해제했기 때문에 연결이 안 되는 상황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막상 전화가 연결되지 않자 예선은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그때 예기욱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핸드폰에서 그의 이름을 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끝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매우 조심스러워하는 예기욱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예선아, 예선이 맞지? 재촉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말해 두려고 전화했어. 난 이미 외래 진료실에 와 있으니까 군연이랑 천천히 오라고 말하려고 전
거만하고 건방진 이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예선에겐 더 이상 낯설지가 않았다.예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오늘 자신이 계획한 일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마음을 추스른 뒤 냉담한 얼굴로 돌아섰다.영내문은 옷을 곱게 차려입고 명품 핸드백을 손목에 걸친 채 거만한 얼굴로 예선 앞에 서 있었다.“예선, 이건 당신한테 하는 내 마지막 충고예요. 더 이상 내 약혼자에게 접근하지 마세요.”“허어.”예선은 헛웃음이 나왔다.“약혼자? 영내문, 당신 정말 낯짝 한번 두껍군요.”예선은 단도직입적으로 비꼬았고 그녀의 말에 영내문의 안색이 일순 일그러졌다.“예선, 당신이 감히...”“감히 뭐요? 감히 뭔데요? 영내문, 군연의 약혼자가 누군지 당신 똑똑히 알고 있을 거예요. 지금 군연이 기억상실한 것을 이용해서 사실이 아닌 것을 그에게 주입시키려는 거죠? 잘 들어요. 제발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요. 군연은 곧 기억을 회복하게 될 테니까요.”이 말을 듣고 영내문은 불복하는 듯 이를 악물었고 갑자기 사악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군연이 평생 이 상태로 가진 않겠지만 군연이 기억을 회복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이미 당신과는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거예요.”영내문은 붉은 입술을 들썩이며 독기를 품고 말했다.“예선, 당신은 평생 군연과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우리가 아무리 싸워봤자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내가 될 거라구요!”영내문은 거만하게 웃으며 돌아섰다.소만리가 차를 세우고 예선이 있는 곳으로 와 보았더니 영내문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소만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아무리 둘러보아도 꽃집 앞에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예선만 보였을 뿐 소군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소만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소만리가 영내문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영내문은 도도한 발걸음으로 소만리에게 다가왔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