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뿌옇던 하늘이 석양의 황금빛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어스름이 내려앉은 대지는 소만리의 기분 탓인지 왠지 쓸쓸해 보였다.소만리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자신의 지난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 억울한 마음이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았는데 지금 눈앞에 뻔히 보이는 진실을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마음이 너무 허탈했다.게다가 이 일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일어난 일이었고 예선과 소군연은 모두 그녀의 소중한 친구들이었다.도저히 방관자처럼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소만리는 집으로 돌아가서 기모진에게 이 일을 모두 말했다.기모진의 잘생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영내문이 예선의 차에 손을 댄 진짜 범인인데 경찰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풀어줄 수 있는 거야? 뭔가 수상해.”기모진은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말했다.“이 세상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군.”“모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소만리, 조급해하지 마. 이 일은 우리가 분명 목격했으니 이대로 진실이 묻히는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가서 처리할게.”기모진은 소만리의 손을 잡았고 반듯한 미간에는 그녀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흘러넘쳤다.“그동안 당신이 이 일 때문에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거 보기에 너무 안쓰러웠어.”소만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야. 하나도 힘들지 않아. 오히려 힘든 사람은 예선이지. 소군연 선배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고 말이야. 예선이 매일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이 너무 짠해서 안타까울 뿐이야.”그 일에 대해선 기모진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도와줄 수 있는 건 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소만리를 위로하는 것뿐이었다.“소만리, 의사 말을 믿어. 소군연은 곧 일어날 거야. 우리 아직 소군연과 예선의 결혼식도 보지 못했잖아. 소군연이 지금 이대로 잠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절대 그러지 못할 거야.”기모진의 말에 소만리는 지
기모진의 지시를 받은 육경은 전달된 사항을 바탕으로 조사를 신속하고 철저하게 진행했다.조사가 다 끝났을 때 마침 기모진이 회사에 도착했고 육경은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기모진에게 정확하게 보고했다.“사장님, 조사 다 끝났습니다. 이 건달의 부모는 시골에 있고 여동생 한 명만 경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가족은 최근 며칠 동안 낯선 사람과의 접촉은 없었고 정체불명의 외부 계좌에서 입금된 내역도 없었습니다.”육경의 보고를 들은 후 기모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조사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았다.기모진은 영내문이 남자에게 돈을 주고 매수해서 대신 죄를 뒤집어쓰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건가?기모진은 뭔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여겼고 좀 더 정밀 조사를 해 보려고 생각했을 때 소만리가 왔다.소만리는 황급히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모진, 그게 사실이야? 그 건달이 죄를 인정했다는 게?”기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 남자가 확실하게 죄를 인정했어. 방금 그 남자를 만나고 왔어. 그 남자는 이 혐의에 대해 숨김없이 자백했어.”“갑자기 왜 그렇게 태세를 바꾼 거야? 영내문과 뭔가 내통한 게 분명 있을 거야.”소만리는 단호하게 그 남자와 영내문과의 관계를 의심했다.기모진도 소만리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도대체 영내문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소만리는 이 소식을 예선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난감했다.그러나 달리 숨길 방법도 없고 해서 결국 소만리는 예선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예선도 소만리와 같은 생각이었다.그 건달은 희생양일 뿐 영내문이 분명 뭔가 수작을 부린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것을 밝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그 후 보름 동안 예선은 계속 잠들어 있는 소군연을 돌보는 데 전념했고 영내문은 그 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교통사고 사건은 그 건달이 이미 죄를 인정했기 때문에 기소에 성공했고 법정에 출두할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던 화려하고 빛나는 인플루언서는 어디 가고 어둡고 초췌한 여자가 얼굴에 빛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전예진은 그 건달과 함께 피고인석에 섰고 둘 다 고개를 숙인 채 무기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전예진은 자신이 돈으로 건달을 매수했다고 자백했고 이 건달은 브레이크에 손을 댔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곧 유죄 판결이 내려질 것이다.그러나 유죄 판결을 받고 앞으로 7년 동안 감옥에 있게 된다는 것을 알고 난 전예진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도저히 침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항소합니다! 전 반드시 항소할 거예요!”전예진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난 단지 영내문에게 돈을 받고 사람을 매수해 차에 손대는 척만 했을 뿐이라고요. 저 건달에게 정말로 손대는 척만 하라고 했단 말이에요! 난 저 건달이 정말 브레이크에 손을 댈지 몰랐어요! 난 주모자가 아니에요. 고통사고와도 관련이 없어요. 전 아무 죄가 없어요!”“정숙하세요.”판사가 법관의 망치를 두드렸다.“피고인, 진정하세요.”“제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어요?”전예진이 울부짖었다.“전 죄가 없어요. 기껏해야 돈을 조금 받았을 뿐이에요. 그 돈, 모두 돌려줄 수 있어요!”그녀는 울부짖으며 갑자기 방청석에 시선을 떨어뜨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한 눈빛으로 방청석을 훑었다.방청석에서 영내문을 찾아내 전예진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영내문,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야! 그런데 어떻게 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어! 내가 널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가 있냐구!”전예진이 이렇게 외치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영내문에게 떨어졌다.소만리와 예선도 똑같이 영내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영내문은 예상했다는 듯 미리 준비한 것처럼 담담하면서도 억울한 듯한 눈빛을 보였다.“일이 이렇게 되어서 정말 유감이에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내가 당신한테 이런 일을 시켰어요? 내가 예선한테 좋지 않은 감
소만리는 예선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걱정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예선아, 무슨 일이야?”예선은 소만리를 바라보며 소만리의 품에 와락 안겨 버렸다.“소만리...”“예선아...”소만리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지만 우선 예선을 꼭 끌어안고 어깨를 어루만졌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울어?”영내문은 옆에 서서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승리의 기쁨에 날아갈 것 같았지만 지금 이 순간 예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했다.그러다 갑자기 영내문의 표정이 다시 평온해졌다.예선이 이렇게 슬피 우는 것을 보니 왠지 마음이 후련해졌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영내문이 후련한 감정을 즐기는 것도 잠시였고 갑자기 예선이 감격스럽게 울먹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소만리, 군연이 깨어났어! 군연이 이제 깨어났대!”뭐!군연 오빠가 깨어났다고!영내문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얼른 밖으로 뛰쳐나갔다.소만리도 군연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놀라서 옆에 있던 영내문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예선의 손을 꼭 잡고 기쁨에 찬 눈빛으로 예선을 쳐다보았다.“정말이야? 정말 소군연 선배가 깨어났어?”“응!”예선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어서 빨리 병원으로 가자!”소만리가 예선의 손을 잡고 돌아섰을 때 마침 기모진의 차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예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만리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기모진은 소군연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그는 얼른 병원으로 차를 몰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병원에 도착했다.예선은 소만리와 함께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그 몇 초가 억겁의 시간 같았다.예선은 조바심이 나서 가만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었다.그녀가 계단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소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십몇 층 높이였지만 예선은 하나도 힘들 것 같지 않았다.결국 소만리의 손에 이끌린 예선은 엘리베이터를
소군연이 예선을 사랑했기 때문이다.예선은 눈물을 삼키며 소군연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다가갈 때마다 그녀의 뜨거운 심장에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그녀는 핏기 없는 소군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비록 많이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온화하고 점잖은 모습은 여전했다.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예선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설렘을 느꼈다.“군연.”예선은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운 그 이름 소군연을 불렀다.“군연, 드디어 깨어났군요. 정말 다행이에요.”예선은 몸을 굽혀 소군연의 손을 꼭 잡았다.그러나 그녀의 손길에 그는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뺐다.소군연의 이런 행동은 예선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소만리도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소군연의 모친과 영내문은 말할 것도 없었다.소군연은 분명 예선의 손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군연?”예선은 영문을 몰라 소군연의 이름을 불렀고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서늘해졌다.“군연, 왜 그래요?”소군연은 눈썹을 살짝 비틀었지만 눈빛은 맑은 샘물처럼 투명하게 예선을 바라보았다.“우리, 우리가 아는 사이에요?”“...”“...”소군연의 말에 병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병실 문 앞에 서 있던 사영인은 허탈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예선이 오늘 재판에 방청하러 간다는 걸 알고 좀 일찍 병원으로 왔다.그녀가 병실에 도착해 보니 주치의와 간호사가 모두 병실에 있었다.사영인은 병실에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소군연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러나 소군연의 상태가 좀 이상해 보였다.그는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했다.그뿐만 아니라 사고가 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고 오직 자신의 이름이 소군연이라는 것만 기억할 뿐 다른 것은 기억을
영내문이 언제 왔는지 닭고기 수프 한 그릇을 들고 소군연 앞으로 들이밀고 있었다.소군연은 오른팔에 깁스를 하고 있어서 제대로 팔을 움직일 수 없자 영내문을 쳐다보며 말했다.“고마워요.”그러나 영내문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군연 오빠, 왜 나한테 이렇게 존댓말을 하고 그래요? 우리가 어릴 때부터 함께 보고 자란 세월이 얼만데. 우리 온갖 일을 다 겪었잖아요. 그리고 난 이미 오빠 약혼녀에요. 오빠를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죠.”소만리와 예선은 영내문이 소군연에게 하는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영내문이 이렇게 두 눈 멀쩡히 뜨고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다니.기억을 잃은 소군연에게 이런 거짓말로 세뇌하려는 그녀의 욕심은 뻔했다.화가 난 소만리와 예선이 병실로 들어가려고 하자 소군연의 모친이 갑자기 나타나 그들 앞을 막아섰다.예선과 소만리가 발걸음을 멈추자 병상 옆에 있던 영내문과 소군연이 그들을 바라보았다.예전엔 예선을 보기만 하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소군연의 모친은 웬일인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예선, 그만 가. 더 이상 군연이 방해하지 말고.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어서 가. 이제 너랑 군연이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어떤 여지도 없는 사이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라구.”소군연의 모친은 소만리와 예선에게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병실 문을 쾅 닫아 버렸다.소만리가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으나 예선이 그녀를 말렸다.“일단은 군연이 푹 쉬도록 해 주자.”“예선아, 지금 들어가서 군연 선배한테 분명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아마 군연 선배는 계속 영내문이 하는 말만 믿을 거야.”“아니야.”예선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소만리, 우선은 들어가지 말자. 그동안 내 곁에서 날 지키느라고 너도 개인적인 시간을 못 보냈잖아. 너도 들어가서 좀 쉬어. 여긴 나 혼자 있어도 돼. 모진이 오면 같이 들어가.”예선은 뭔가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지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다.
영내문도 옆에서 거들기 시작했다.“어머니, 됐어요. 이제 우리 그 여자 얘기하지 말아요. 앞으로 군연 오빠랑 편안하고 즐겁게 지낼 날들만 생각할래요.”“그래, 그래. 알겠어. 우리 앞으로 그 여자 얘기는 하지 말자. 만약 그 여자가 다시 여기 찾아와서 떼를 쓰면 경호원을 불러 당장 내쫓으라고 해야겠어.”소군연의 모친은 아주 신이 나서 얘기했다.소군연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얼굴을 찡그렸고 영내문이 들이미는 닭고기 수프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뭔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만약 그 여자가 다음에 또 날 찾아온다면 바로 쫓아내지 말고 나랑 얘기 좀 하게 해 주세요.”영내문과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했다.소군연의 무의식 속에 아직도 예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소군연의 모친은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이참에 아주 분명하게 말해 두고 싶은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군연아, 넌 마음이 너무 약해서 탈이야. 그런 여자한테는 기회를 주면 안 돼. 네가 그 여자한테 그렇게 물렁하게 굴면 그 여자는 옳다구나 하고 너한테 들이댈 거야. 그리고 네가 그 여자를 만나려 한다면 내문이가 정말 마음이 안 좋을 거야.”소군연의 모친은 영내문에게 눈짓을 했고 영내문은 이내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소군연은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탓인지 모친의 말을 듣고 영내문이 실망하는 표정을 하자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도저히 생각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엇.”소군연이 머리가 아픈지 짧은 신음 소리를 냈다.소군연의 모친은 갑자기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군연에게 다가섰다.소군연에게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되었다.걱정되기는 영내문도 마찬가지였다.“군연 오빠, 왜 그래요? 놀라지 마세요. 괜찮아질 거예요.”“머리가 좀 아파서 쉬어야 할 것 같아요.”소군연은 피곤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누웠다.영내문은 가능한 한 소군연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서 애써 보았지만 소군연은 누워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차가운 기운을 가득 품은 소만리의 말을 듣자 애써 침착하려던 소군연의 모친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화를 참지 못하고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그러나 소군연의 모친은 있는 힘을 다해 화를 억눌렀다.아무리 해도 소만리에게 대적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로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비록 소군연의 가문도 경도에서는 내로라하는 집안이지만 소만리와 기모진의 집안과 척을 지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애꿎은 예선에게 화살을 돌렸다.“너, 그렇게 집안 좋은 데 시집가고 싶어? 세상에 좋은 남자는 많고 많은데 왜 하필 우리 군연이한테 시집오려고 하는 거냐? 내가 이미 너한테 분명히 말했잖니. 그런데 왜 내 말 안 듣는 거야, 응?”소군연의 모친은 화가 나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예선을 더욱 격렬히 노려보았다.“똑똑히 들어. 그때는 내가 내 아들 때문에 너랑 사귀는 걸 허락했지만 난 두고 두고 너희들 사귀는 거 마음에 들지 않았어. 군연이가 이런 사고를 당하고 나서 내가 사람을 찾아서 한번 물어봤는데 너희들 궁합이 그리 좋지 않다는구나. 네가 계속 내 아들 옆에 있으면 내 아들한테 더 큰 일이 생긴대!”소군연의 모친은 갑자기 궁합 얘기를 꺼냈다.그러나 소만리는 안다.소군연의 모친이 궁합 얘기를 꺼낸 것은 핑계라는 걸.소군연의 모친에게는 예선과 소군연을 헤어지게 할 핑계가 필요한 것이었다.소만리는 예선이 상처받을 것이 걱정되어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예선은 아주 담담하고 차분한 얼굴로 소만리의 손을 잡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는 건성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았다.“소만리, 나 갑자기 배가 고프네. 나랑 같이 가서 뭐 좀 먹을래?”예선은 소군연의 모친과 쓸데없는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소만리도 예선의 마음을 눈치채고 얼른 가방을 들어 예선과 함께 돌아서려고 했다.“잠깐만요.”영내문이 갑자기 그들을 막아서는 소리가 들렸다.소만리와 예선이 발걸음을 떼자마자 영내문이 곧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