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수의 표정 변화를 감지한 류다희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다른 동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류다희는 점심때 예선이 반지수의 책상 앞에서 한 말을 떠올리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앞에 있는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반지수 씨, 정말 대단해요. 장 사장님은 까다롭기로 유명하잖아요. 처음에 예선 언니가 디자이너로 지정되었는데 예선 언니의 디자인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잖아요. 어쨌거나 반지수 씨 덕분에 연말 보너스 두둑하게 받게 되었네요.”“오늘 예선 씨가 안 와서 너무 다행이야. 왔으면 우리가 좀 어색해할 뻔했어.”“우리가 어색할 게 뭐 있어요? 어색한 건 예선 씨겠지.”가장 자리에 앉은 몇몇 동료들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예선을 언급했다.류다희는 더 이상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언니들,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오늘 점심때 예선 언니가 커피도 쏘고 했는데 어떻게 뒤에서 이렇게 예선 언니 흉을 볼 수가 있어요?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가장 자리에 앉은 두 여자는 이 말을 듣고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며 류다희에게 눈을 흘겼다.“뭐야? 다희 씨, 지금 커피 한 잔 얻어마셨다고 편드는 거예요? 사람이 너무 저렴한 거 아냐?”“...”류다희는 말문이 막혔다. 저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그러자 반지수는 세상 이해심 넓은 사람처럼 수습하려 나섰다.“모두들 다 같은 동료인데 저 때문에 괜히 얼굴 붉히지 마세요. 류다희 씨, 당신이 인턴 때부터 예선 언니를 많이 따랐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 눈에는 내가 좀 거슬리나 봐요.”“난 그런 뜻이 아니에요.”류다희는 해명하려고 했지만 여 과장이 냉랭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막아섰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들, 자자, 오늘은 반지수 씨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예요. 류다희 씨, 이 자리가 불편하면 그만 가도 돼요. 아무도 막지 않아요.”여 과장은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바로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반지수에게 술
”그래요.”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나려다가 시무룩하게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류다희를 보았다.그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다정하게 물었다.“저기 저 직원은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은데 무슨 업무 상 고민이라도 있어요?”류다희는 사장이 자신을 언급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어서 잠시 정신이 멍해 있다가 일어서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사장님께서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업무 상 고민은 없습니다. 단지 이번 디자인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보고 싶을 뿐입니다. 같이 보면 후배들이 배울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반지수 씨가 조금 불쾌해하는 것 같아서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어요.”반지수와 여 과장은 류다희가 어두운 안색을 하고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젊고 잘생긴 사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뭔가 배워보겠다고 하는데 그 정도야 간단하죠.”사장은 여 과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여 과장, 태블릿 PC 가져왔죠?”여 과장이 어떻게 사장님의 지시에 늑장을 부릴 수 있겠는가.그는 부리나케 태블릿을 꺼내어 웃는 얼굴로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사장님, 우리 반지수 씨가 불쾌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들 식사 중인데 흥을 깨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흥흥.”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태블릿 PC를 받아들고 디자인 시안을 찾아서 류다희에게 건네주었다.“모처럼 이렇게 대단한 칭찬을 받는 디자인이 있는데 모두 보고 배울 수 있으면 좋죠. 한 번 보세요.”“고맙습니다. 사장님.”류다희도 정중한 자세로 사장님이 건네는 태블릿 PC를 받았다.화면에 펼쳐진 설계도를 보자마자 류다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녀가 예상한 대로였다.눈이 휘둥그레지는 류다희의 표정을 보며 여 과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그녀에게 다가갔다.“류다희 씨, 당신이 이렇게 배움에 열정적일 줄은 몰랐네요. 앞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요. 나도 당신 같이 열정적인 직원이 있어서
류다희는 그야말로 시원하게 반지수의 표절을 폭로했다. 체면이라고는 조금도 봐 주지 않았다.반지수와 여 과장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고 두 사람의 표정 또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그러나 사장은 여전히 담담한 반응을 보였고 잘생긴 얼굴에는 우아하고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이 디자인이 표절된 거라고 했어요? 무슨 증거라도 있는 겁니까?”“사장님, 그게...”여 과장은 황급히 류다희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돌려 성난 얼굴로 류다희를 쳐다보았다.“류다희 씨, 당신 입 조심해요. 어디서 감히 아무 근거도 없는 사실을 날조하고 있어요! 이 디자인은 반지수 씨가 힘들게 구상한 것인데 무슨 근거로 표절했다고 하는 거예요? 게다가 예선 씨는 요즘 연애하느라 바빠서 업무도 소홀히 했어요. 업무 수준도 계속 떨어지고 있었고요. 예선 씨가 디자인한 걸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반지수 씨가 예선 씨의 작품을 표절할 수 있단 말이에요?”“아무 근거도 없이 사실을 날조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헛소리도 아니라고요.”류다희도 침착하게 반응했다.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에게 입을 다물라고 종용하고 있는 여 과장을 노려보았다.“이 디자인은 예선 언니가 먼저 그린 거예요. 예선 언니는 이미 과장님께 보내드렸고 디자인이 별로라며 과장님한테 거절당했죠. 예선 언니는 이 디자인이 완벽하지 않고 하찮은 것이라고 실망해서 아까 삭제했어요. 삭제할 때 내가 옆에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증인이 어디 있겠어요?”예선의 설계도가 이미 삭제되었다는 류다희의 말에 여 과장과 반지수는 말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류다희 씨, 당신은 당신이 증인이라고 말하지만 예선 씨가 당신 사수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요. 평소에 당신과 예선 씨가 끈끈한 사이인데 어떻게 증인으로 삼을 수가 있겠어요? 안 그래요?”여 과장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동료들도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류다희 씨, 당신이랑 예선 씨가 친한 거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당신 말을 믿고 증거로
류다희는 예선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는 바로 연결되었다.류다희는 단호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예선 언니, 나 지금 레스토랑에서 회식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디자인 설계도를 봤어요. 바로 언니가 여 과장님한테 거절당해서 삭제한 그 디자인 설계도였어요. 그런데 그 설계도가 반지수 씨한테서 나왔네요. 반지수 씨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거라고 하는데 이건 분명히 언니가 디자인한 거잖아요. 언니 지금 잠깐 올 수 있어요?”류다희가 통화하는 것을 듣고 반지수와 여 과장은 긴장한 빛이 역력한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하지만 방금 그들도 들었듯이 예선은 자신이 한 디자인을 삭제했다고 했으니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심호흡을 하고 긴장을 풀려고 했을 때 갑자기 류다희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아, 언니도 친구랑 여기서 식사하고 있었어요? 어머 잘 됐네요. 내가 바로 룸 앞으로 나갈게요. 여기 룸 번호는...”류다희는 말하면서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여 과장은 약간 당황한 듯 반지수를 쳐다보다 사장 곁으로 다가갔다.“사장님, 류다희 씨는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희 회사에 입사한 시간도 그리 길지 않습니다. 평소 조금 특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성격도 좀 유별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쩔 때는 너무 오버해서 곤란한 상황을 만들기도 하구요. 예선 씨 체면을 봐서 그냥 놔뒀죠. 안 그랬으면 벌써 해고했을 거예요.”사장은 여 과장의 얘기를 듣고 약간 불쾌한 듯 눈썹을 일그러뜨렸다.“그래서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지금 류다희 씨가 얼토당토않는 얘길 하고 있다는 거예요. 반지수 씨가 절대 표절했을 리가 없어요!”“그래요?”사장이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되물었다.“하지만 난 류다희 씨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어요.”여 과장은 갑자기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말을 더듬거렸다.“그...사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내 말은..
예선은 살짝 비꼬며 말한 후 반지수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사실 오늘 점심때 커피를 주면서 반지수 씨 책상 위에 있던 디자인 설계도를 보았어요. 그때 폭로할까도 생각했었지만 소란스럽게 만들기 싫어서 그만두었죠.”예선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는 여 과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과장님은 날 생각하는 척하며 집에 가서 며칠 쉬라고 하셨지만 사실은 날 따돌려서 이 일에서 멀리 떨어뜨릴 심산이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요. 여 과장님, 그동안 과장님과 여러 해 동안 함께 일해 왔는데 지금은 과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전 잘 모르겠어요.”“...”여 과장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고 마음은 조마조마했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여 과장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예, 예선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왜 당신을 따돌려요? 요즘 예선 씨가 너무 업무에 집중을 못 하길래 집에 가서 좀 쉬라고 한 건데. 아니, 난 다 예선 씨 생각해 줘서 한 건데 이제 와서 날 물어뜯다니.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요?”“개는 사람을 물기도 하죠. 하지만 난 개가 아니에요. 사람을 물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말한 것은 다 사실이구요.”예선이 침착하게 반격했다.“저는 오늘 저녁 우연히 이 식당에 들른 게 아니에요. 회식 자리가 여기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따라온 거예요.”예선의 말을 듣고 여 과장의 표정은 더욱 얼어붙었고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 있었다.게다가 방금 술을 마셨기 때문에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기름기까지 번들거리자 유난히 더 못생겨 보였다.사장은 여 과장을 힐끔 본 후 미소를 지으며 예선에게 시선을 돌렸다.“예선이라고 했죠?”예선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습니다. 사장님. 디자인팀 소속 예선이라고 합니다.”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예선 씨, 지금 반지수 씨가 설계한 디자인이 당신이 디자인한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확신합니까?”“네, 확실해요. 저건 분명히 예선 언니
예선은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어 화면에 이것저것 누르면서 말했다.“여 과장님, 내가 진작에 말씀드렸잖아요. 장 사장님 디자인 건은 이미 거의 다 완성되었다고. 단지 집에 있는 노트북이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달려와서 작업을 했을 뿐이라고요. 내 설명은 듣지 않으시고 내가 지금 연애 중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일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죠.”“그런데 내가 지금 말씀드릴 것은 안타깝게도 내 노트북이 수리되었다는 거예요. 노트북에는 디자인이 완성된 시점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죠.”“...”여 과장의 입꼬리가 일그러졌고 반지수의 얼굴도 굳어졌다.옆에 있던 류다희는 여 과장과 반지수의 표정을 보고 속이 후련했다.“그럼 그 디자인 시안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사장이 궁금한 듯 물었다. 예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 남자친구가 지금 가지고 오고 있어요. 노트북을 방금 수리했거든요.”그녀가 말을 마치자 룸 입구에서 훤칠하고 늠름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예선은 소군연을 보자마자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류다희는 조용히 사장 곁으로 두어 발자국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로 살며시 그의 팔을 툭툭 건드리며 눈짓했다.사장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소군연에게 시선을 옮겼고 예선이 소군연과 몇 마디 나눈 후 노트북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지금은 모두가 예선의 행동에 온 신경이 쏠린 나머지 방금 류다희가 사장의 팔을 툭툭 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하지만 여 과장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혹이 완전히 사라지고 선명하게 뭔가 보이는 것 같았다!예선은 노트북을 들고 와 익숙한 손놀림으로 파일함에서 디자인 시안을 찾아 화면에 띄워 모두에게 저장된 시간을 보여주었다.반지수는 어쩔 줄 몰라하며 입을 오므렸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일이 이렇게 반전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여 과장은 이미 할 말을 잃은 듯했다.그가 아무리 변명해 본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실은 변함이
”그리고 여 과장님.”류다희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여 과장을 향해 말했다.“과장님은 반지수 씨가 예선 언니의 디자인을 베낀 걸 알면서도 일부러 반지수 씨를 감싸고돌았던 거예요! 그렇죠?”류다희가 감히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비난할 줄은 몰랐다.여 과장은 온몸에서 진땀이 났다.“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고요.”여 과장은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지금은 류다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런 게 아니면 뭔데요?”사장이 갑자기 불쑥 끼어들었다.사장이 추궁하자 여 과장은 류다희와 사장의 관계가 간단치 않음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사장의 말을 듣자마자 여 과장은 사장이 류다희를 뒤에서 확실히 지지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여 과장은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아 내더니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제, 제가 요즘 시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잠시 못 알아봤나 봐요. 그리고 보세요. 이 두 디자인이 사실 좀 다른 점이 있어요...”“이렇게 거의 똑같은데 아직도 변명하실 거예요?”류다희는 예쁜 눈썹을 손으로 한번 쓱 고르더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반지수를 흘겨보며 말했다.“여 과장님, 제대로 말씀해 보세요. 왜 남의 작품을 훔친 도둑을 이렇게 감싸고도는지 설명해 주셔야죠.”“그건...”여 과장은 딱히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결국 반지수가 참지 못하고 울화통을 터뜨리고 말았다.“류다희! 어떻게 감히 날 도둑으로 몰아요! 같은 인테리어 디자이너인데 일을 하다 보면 비슷한 게 나올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굳이 여기서 소란을 피우며 모든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인격 모독해야겠어요? 지금 당장 사과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바로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거예요!”“좋아요. 그럼 당장 고소하세요. 당신이 날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면 난 당신을 다른 사람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죄목으로 고소할 거니까. 누가 유죄 판결을 받는지 두고 보자구요!”류다희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그녀는 더욱 강경하고 기
여 과장은 반지수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급하게 자신의 검지를 입에 갖다 대며 얼른 문을 닫았다.“아유 이 아가씨야! 말조심 좀 해. 지금 우리는 류다희한테 완전히 미움을 샀다구!”“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제 갓 졸업한 신입인데 내가 뭐가 두려워서 말조심을 해요? 방금도 류다희가 버럭 하는 바람에 제대로 한 마디도 못했는데요.”반지수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여 과장은 손을 뻗어 반지수의 어깨에 올렸다.하지만 반지수는 여 과장의 손길이 못마땅하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쳤다.여 과장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손을 뻗어 반지수를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반지수도 피하지 않았다.“말 똑바로 하세요. 류다희가 도대체 뭘 어쨌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그 여자를 무서워하는 건데요?”“아이고 이 아가씨야, 지금 보고도 몰라? 방금 사장님이 계속 류다희 씨를 보면서 류다희 씨 말을 뒤에서 도와주고 있었잖아. 안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처참히 깨질 수 있겠어?”여 과장의 말을 듣고 반지수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떴다.“그 말인즉슨 사장님과 류다희가 뭔가 내통하고 있다는 거예요?”“딱 보면 몰라!”여 과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자기야. 이 회사에 있고 싶으면 내일 나랑 같이 가서 순순히 잘못을 인정해야 해. 안 그러면 우리 모두 회사에서 나가야 돼. 만약 해고된다면 앞으로 무슨 돈으로 자기한테 가방이며 목걸이며 사줄 수 있겠어?”반지수는 예선과 류다희에게 정말이지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돈이 걸린 문제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류다희가 사장이랑 내통하는 사이라니 더더욱 미움을 사서는 안 될 일이었다.하지만 반지수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몸매와 류다희의 몸매를 놓고 보자니 젊고 유능한 사장이 어떻게 애송이 같은 류다희한테 반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튿날 여 과장은 사장실 앞에서 사장이 출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이윽고 사장이 도착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