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선은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재빨리 티슈 통을 들고 미친 듯이 물을 닦아내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왜 그래?”예선의 방을 치워 주고 있던 소군연은 걱정스러운 듯 예선에게 다가왔고 물에 흠뻑 젖은 노트북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키보드 위는 온통 물이 흥건했다.육안으로도 물이 키보드 안으로 스며들어 간 것을 볼 수 있었고 키보드 위에도 물기가 가득했다.예선은 미친 듯이 물기를 닦아내고는 노트북을 켜 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전원은 켜지지 않았다.“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어젯밤에 쓸 때는 멀쩡했는데.”예선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그녀는 어젯밤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일을 끝마쳤다.그동안의 심혈을 모두 쏟아부은 디자인 시안이었다.“예선, 걱정하지 마. 내가 우선 드라이기로 말려 볼게. 효과가 있을 지도 몰라.”소군연은 십여 분 동안 드라이기로 노트북을 말렸지만 여전히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다.“예선, 내 친구 중에 컴퓨터 복구하는 일을 하는 친구가 있어. 지금 바로 도와 달라고 해 보자.”예선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소군연의 친구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소군연을 따라 그의 친구에게 가 보았지만 전문가가 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예선은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돌아가는 길에 예선은 줄곧 차창 밖을 내다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소군연은 예선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중요한 업무 자료가 들어 있는 거 아니야? 일에는 지장이 없어?”소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예선은 갑자기 그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당신이 왜 나한테 사과를 해요? 당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업무 상의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게요.”“그래?”소군연은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만약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한테 꼭 알려줘.”“걱정 마세요.”예선은 소군
영내문.소군연 외에 오늘 집에 온 사람은 영내문뿐이었다.예선은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다시 열었고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아 보았다.키보드에서 은은한 홍차 향이 났다. 그녀가 영내문에게 끓여준 홍차 향이었다.예선은 단번에 모든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다.노트북은 영내문이 고의로 망가뜨린 것이었다!하지만 증거가 없었다.이때 회사 상사로부터 또 전화가 왔다.“예선 씨, 두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 디자인 시안 어떻게 된 거예요? 다 되면 바로 이메일로 보내주세요.”예선은 어쩔 수 없이 핑계를 대었다.“과장님, 방금 우리 집에 손님이 와서 조금 늦어질 것 같아요.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출근하자마자 넘겨 드릴게요.”“손님? 남자친구 말이에요? 아이고, 데이트도 좋지만 일은 해야죠. 돈을 벌어야 데이트도 하죠.”상사가 농담으로 한마디 했다.“암튼 알겠어요. 이제 방해하지 않을 테니 내일은 꼭 넘겨줘요.”“네, 알겠습니다.”예선이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그녀는 바로 회사로 향했다.주말이라 회사에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고 예선 혼자 디자인 전용 소프트웨어를 켜고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다시 해 보았지만 왠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디자인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늦은 밤이 되어 버렸다.그녀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소군연에게서 전화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새벽 두세 시쯤 마침내 디자인 시안은 완성되었고 시간을 확인하려고 무심코 핸드폰을 집어 든 예선은 화들짝 놀랐다.그동안 소군연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와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바로 소군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소군연은 마음이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경찰에 신고를 하고 예선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그때 마침 예선의 전화를 받고 그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예선이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안 소군연은 바로 차를 몰고 그녀를 데리
사실 디자인 시안을 제출할 때 예선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급하게 몰아붙여 나온 시안이라 영감을 받아 그려 나간 첫 번째 설계도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경험 많은 그녀의 디자인 실력에서 나온 결과물이라 여전히 잘 나왔고 고객이 요구하는 모든 세부 사항을 다 충족시켰다.첫 번째 시안만큼 정교하고 완벽하지 않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는 문제없었다.하지만 여 과장은 어두운 얼굴로 태블릿 PC를 테이블 위에 던지며 예선을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내일 장 사장님께 정식으로 디자인을 전달해야 한다는 거 알아요 몰라요? 예선 씨 요즘 근무 태도와 업무 수준이 현저히 떨어졌어요.”“예선 씨, 요즘 연애에 푹 빠져서 아예 일은 안중에도 없는 거예요? 자꾸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더 이상 이 직책이 예선 씨한테 적합하지 않을 것 같군요.”“여 과장님,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건 없는 것 같은데요. 제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것 맞지만 맡은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어요. 사실 이 시안이 조금 늦어진 이유는...”“예선 씨, 설명할 필요 없어요. 다 알아요.”여 과장은 예선의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사실 며칠 동안 디자인 시안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잖아요. 어제 내가 전화를 한 후에야 부랴부랴 회사에 와서 디자인 시안을 그렸기 때문에 이 모양이 된 거예요.”예선은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어제 회사에 온 일을 여 과장이 알 줄은 몰랐다.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은 여 과장이 말한 것과는 다르다.예선은 해명하려고 애썼다.“맞아요. 어제 회사에 왔어요. 왜냐하면 내 노트북이 고장 났기 때문이에요. 게다가...”“됐어요.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어요. 예선 씨가 말한 대로 어제 오후에 회사에 온 거 알아요. 나도 CCTV로 확인했어요. 그런데 예선 씨, 이 디자인은 정말 대충대충 한 것 같은데요. 예선 씨한테 실망했어요.”“...”예선은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왠지 여 과장이 사소한 일을 크게 처리하려는 것 같
”비록 일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예선 언니는 어차피 내 선배니까 많이 배워 볼게요.”반지수는 매우 겸손하게 말하고는 예선의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돌렸다.“예선 언니, 이 디자인 시안 삭제하시게요?”예선은 고개를 돌려 디자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이 디자인 건은 이미 당신한테 넘어간 건데 나한테 있어 봐야 아무 소용 없잖아요.”예선은 말을 마치면서 문서를 깔끔하게 삭제했다.옆에 있던 동료는 예선이 삭제를 하자 아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그러나 반지수의 눈에는 미묘한 빛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예선도 더 이상 이 디자인 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소군연이 준비해 준 아침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시간은 흘러 퇴근할 무렵이 되었고 예선과 동료 몇 명은 퇴근 준비를 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반지수도 예선과 그 동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지만 동료들과 말을 섞지는 않았다.회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예선은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예선.”소군연이 그녀를 불렀고 같이 나오던 동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소군연을 쳐다보았다.마주 오는 소군연을 보고 모두들 놀라워하는 눈빛을 띠었다.반지수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와, 예선 씨. 남자 친구예요? 나 처음 봤네. 너무 멋있어요. 정말.”“만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같아요. 예선 씨 정말 대단하네요!”예선은 소군연이 갑자기 자신을 데리러 올 줄은 몰랐는데다 동료들이 옆에서 놀라워하자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소군연은 예선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꽃을 그녀에게 안겨주고 예선의 동료들에게 인사를 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예선의 남자친구예요.”“어머, 안녕하세요. 예선 씨랑 너무 잘 어울려요.”동료들이 신기한 듯 소군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고맙습니다.”소군연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예선의 손을 잡았
장 사장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예선은 장 사장이 디자인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반지수 씨의 디자인에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뚜렷한 것 같아요. 이렇게 훌륭한 디자인을 신입이 했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는군요.”장 사장이 반지수를 칭찬했고 이어 여 과장의 공도 함께 치켜세우며 말했다.“여 과장님은 정말 안목이 있으십니다. 이렇게 뛰어난 디자이너를 채용할 수 있는 눈을 가지셨다니. 정말 이 회사의 복이에요.”“장 사장님, 과찬이십니다. 전 그저 고객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에요. 안목이 있기로는 장 사장님이 최고시죠. 우리 회사를 선택하셨으니까요.”반지수는 환하게 웃으며 장 사장에게 아부했다.반지수의 말을 들으며 장 사장은 유난히 기뻐하며 껄껄 웃었다.예선은 사과를 베어 물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어쨌든 장 사장의 디자인 건이 잘 마무리된 것 같아 그녀로서도 마음이 놓였다.만약 장 사장이 만족하지 못했다면 계약 위반으로 발생한 손실은 그녀가 부담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예선 언니, 방금 들었어요? 정말 반지수가 이렇게 대단하게 해낼 줄은 몰랐네요. 장 사장님 디자인 건을 해내다니.”예선이 옆에 있던 동료 류다희가 끼어들며 말했다.“이렇게 되면 여 과장님이 분명히 반지수한테 일을 믿고 맡기겠네요. 혹시 이러다가 예선 언니 자리 뺏기는 거 아니에요?”예선은 웃으며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솔직히 난 반지수 씨한테 고맙게 생각해요. 만약 이 계약이 깨졌더라면 아마 난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내야 했을 거예요. 지금 반지수 씨가 무사히 일을 마무리해 줘서 너무 기쁘네요. 커피 살 때 반지수 씨 것도 한 잔 사 줘야겠어요.”예선은 말을 하고 나서 커피를 주문하려고 핸드폰을 켰다.곁눈으로 반지수와 여 과장이 웃으며 장 사장을 사무실 밖으로 배웅하는 모습이 보였다.그들은 다시 사무실 안쪽으로 왔고 오면서도 여 과장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반지수를 칭찬했다.그동안 함께 업무를 추
”예선 언니, 뭐해요? 왜 여기 멍하니 서 있어요?”예선은 그녀의 말에 정신을 다잡았다.“다희 씨, 방금 나 반지수 씨 책상 위에서 뭔가 엄청난 걸 본 것 같아요.”류다희가 의혹에 가득 찬 눈빛으로 물었다.“엄청난 거? 그게 뭔데요?”“내가 삭제한 그 디자인 시안이요.”예선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바로 앞 사무실을 바라보았다.“예선 언니, 반지수 씨의 책상에서 언니가 삭제한 그 디자인 시안을 봤다고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옆에 있던 동료도 영문을 모른 채 눈썹을 찡그리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예선에게 뭐라고 물어보려 했을 때 여 과장의 사무실 문이 열렸다.반지수가 여 과장의 뒤를 따라다니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여러분, 반지수 씨가 아주 멋진 디자인을 설계해서 회사의 이름을 드높였어요. 이 일을 축하하기 위해 오늘 저녁 사장님이 경도에서 가장 큰 식당에서 회식을 열기로 했어요! 그리고 연말 보너스도 두둑 챙겨 주시겠다고 했어요!”“우와, 경도에서 가장 큰 식당에서요? 게다가 연말 보너스가 플러스 된다구요?”동료들이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반지수 씨 대단해요! 우리 회사에 복덩이가 들어왔네!”“장 사장님 디자인 건은 정말 쉽지 않은 거였는데 정말 반지수 씨 대단해. 겨우 입사 3개월 차인데 예선이 하다가 엎은 디자인을 다시 잘 처리해서 마무리까지 하다니, 정말 대단해.”예선은 다른 동료들이 반지수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마음을 찜찜하게 한 것은 방금 반지수의 책상 위에서 본 디자인 도면이었다.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중에 여 과장이 갑자기 다가와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예선 씨, 당신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네요. 내가 이미 사장님한테 당신 연차 신청했어. 며칠 푹 쉬어. 오늘 저녁 회식도 참여하지 않아도 돼. 당분간은 반지수 씨가 책임지고 업무 볼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여 과장의 말을 들으니 이젠 아예 대놓고 예선의 자
반지수의 표정 변화를 감지한 류다희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다른 동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류다희는 점심때 예선이 반지수의 책상 앞에서 한 말을 떠올리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앞에 있는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반지수 씨, 정말 대단해요. 장 사장님은 까다롭기로 유명하잖아요. 처음에 예선 언니가 디자이너로 지정되었는데 예선 언니의 디자인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잖아요. 어쨌거나 반지수 씨 덕분에 연말 보너스 두둑하게 받게 되었네요.”“오늘 예선 씨가 안 와서 너무 다행이야. 왔으면 우리가 좀 어색해할 뻔했어.”“우리가 어색할 게 뭐 있어요? 어색한 건 예선 씨겠지.”가장 자리에 앉은 몇몇 동료들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예선을 언급했다.류다희는 더 이상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언니들,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오늘 점심때 예선 언니가 커피도 쏘고 했는데 어떻게 뒤에서 이렇게 예선 언니 흉을 볼 수가 있어요?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가장 자리에 앉은 두 여자는 이 말을 듣고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며 류다희에게 눈을 흘겼다.“뭐야? 다희 씨, 지금 커피 한 잔 얻어마셨다고 편드는 거예요? 사람이 너무 저렴한 거 아냐?”“...”류다희는 말문이 막혔다. 저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그러자 반지수는 세상 이해심 넓은 사람처럼 수습하려 나섰다.“모두들 다 같은 동료인데 저 때문에 괜히 얼굴 붉히지 마세요. 류다희 씨, 당신이 인턴 때부터 예선 언니를 많이 따랐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 눈에는 내가 좀 거슬리나 봐요.”“난 그런 뜻이 아니에요.”류다희는 해명하려고 했지만 여 과장이 냉랭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막아섰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들, 자자, 오늘은 반지수 씨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예요. 류다희 씨, 이 자리가 불편하면 그만 가도 돼요. 아무도 막지 않아요.”여 과장은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바로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반지수에게 술
”그래요.”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나려다가 시무룩하게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류다희를 보았다.그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다정하게 물었다.“저기 저 직원은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은데 무슨 업무 상 고민이라도 있어요?”류다희는 사장이 자신을 언급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어서 잠시 정신이 멍해 있다가 일어서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사장님께서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업무 상 고민은 없습니다. 단지 이번 디자인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보고 싶을 뿐입니다. 같이 보면 후배들이 배울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반지수 씨가 조금 불쾌해하는 것 같아서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어요.”반지수와 여 과장은 류다희가 어두운 안색을 하고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젊고 잘생긴 사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뭔가 배워보겠다고 하는데 그 정도야 간단하죠.”사장은 여 과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여 과장, 태블릿 PC 가져왔죠?”여 과장이 어떻게 사장님의 지시에 늑장을 부릴 수 있겠는가.그는 부리나케 태블릿을 꺼내어 웃는 얼굴로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사장님, 우리 반지수 씨가 불쾌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들 식사 중인데 흥을 깨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흥흥.”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태블릿 PC를 받아들고 디자인 시안을 찾아서 류다희에게 건네주었다.“모처럼 이렇게 대단한 칭찬을 받는 디자인이 있는데 모두 보고 배울 수 있으면 좋죠. 한 번 보세요.”“고맙습니다. 사장님.”류다희도 정중한 자세로 사장님이 건네는 태블릿 PC를 받았다.화면에 펼쳐진 설계도를 보자마자 류다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녀가 예상한 대로였다.눈이 휘둥그레지는 류다희의 표정을 보며 여 과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그녀에게 다가갔다.“류다희 씨, 당신이 이렇게 배움에 열정적일 줄은 몰랐네요. 앞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요. 나도 당신 같이 열정적인 직원이 있어서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