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의 눈에 비친 무거운 슬픔을 포착한 기모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달래주었다.“소만리, 우리는 그 많은 난관들을 다 헤쳐왔어. 이번에도 우리는 반드시 이 위험에서 벗어날 거라고 믿어. 날 믿어.”그가 굳건하게 다짐하며 말했고 긴장한 표정으로 소만리에게 물었다.“참, 여온이 상황은 어때? 고승겸이 여온이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어? 그 놈이 혹시 속인 건 아니야?”이 말을 들으니 소만리의 마음이 또 저릿하게 아파왔다.“그러니까 당신은 당신 딸을 살리겠다고 고승겸의 말을 듣고 여기 혼자 와서 이렇게 갇혀 있었던 거야?”소만리가 이렇게 물었다. 묻고 나니 그녀의 마음이 더욱더 먹먹해졌다.“고승겸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이러는 거야? 고승겸은 절대 믿을 사람이 못 돼.”이 말을 듣고 기모진의 얼굴에 순간 불같은 화가 끓어올랐다.“그럼 고승겸이 여온이의 치료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단 말이야? 여온이 몸에 아직도 붉은 반점이 있어?”기모진은 화가 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한편으로는 아픈 딸이 걱정되었고 한편으로는 고승겸에게 농락당한 것에 화가 났다.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는 기모진의 모습을 보고 소만리는 얼른 설명하기 시작했다.“모진,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온이는 많이 호전되었어.”“정말?”기모진은 반신반의하며 물었고 소만리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이야.”소만리는 강조하듯 힘주어 말했다.“하지만 고승겸이 어떻게 해 준 건 아니야. 그는 단지 여온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남연풍밖에 없다는 것만 알려주었어.”“남연풍?”“고승겸은 아마 여온이가 잠든 틈을 타서 여온이에게 시약을 투여했나 봐. 그 시약을 해독할 수 있는 해독제는 아직 없고 해독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남연풍뿐이래.”여기까지 듣고 나자 기모진은 대충의 자초지종을 깨달았다.결국 고승겸은 기모진을 속인 것이었다.하지만 기모진은 아픈 아이를 위해 이것저것
”여온아. 아빠가 일이 바쁘셔서 당분간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엄마도 아빠한테 가서 좀 도와드려야 해. 일이 다 끝나면 엄마 아빠가 여온이 데리고 집에 갈 거야.”강자풍은 조곤조곤 설명했고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기여온은 강자풍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고 더 이상 엄마 아빠를 찾지 않았다.그런 기여온의 모습이 왠지 강자풍의 마음을 더욱 먹먹하게 했다.“여온아, 엄마 아빠가 여온이 데리러 오면 정말 엄마 아빠 따라 집에 갈 거야?”기여온은 강자풍의 눈에 비친 기대와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작은 손을 내밀어 강자풍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아이의 작은 손에서 온기가 전해져 오자 강자풍의 가슴에는 묘한 설레임이 일렁였다.그는 기여온의 옷소매를 걷어올렸다.여전히 아이의 피부에는 붉은 반점이 뚜렷했고 그걸 보고 있자니 강자풍의 미간이 자신도 모르게 굳어졌다.그때 마침 남연풍이 안에서 나왔고 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남연풍, 연구는 잘 되고 있어요? 언제쯤이면 이 붉은 반점들이 사라질까요?”남연풍은 미간을 찌푸리며 미안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나도 빨리 해독제를 개발하고 싶지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강자풍이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그는 답답한 마음에 옆에 있는 기여온을 안타깝게 쳐다볼 뿐이었다.“이 붉은 반점들이 사라지지 않으면 더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지 않을까요?”“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남연풍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당시에 난 호기심에 이 시약을 한번 만들어 보았을 뿐 어떤 임상 시험도 하지 않았어요. 반제품이라고 할 수 있죠. 죄송하지만 병변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드릴 수밖에 없네요.”“병변?”강자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안 돼요! 하루빨리 해독제를 개발해야 해요. 여온이, 이 어린아이는 이미 너무 많은 고생을 했어요. 난 이 아이가 더 이상 그런 고
”띠리리링...”벨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고 남연풍과 강자풍은 유선전화기를 바라보며 서로 눈빛을 마주쳤다.잠시 후 남연풍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전화기를 들었다.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연풍 바꿔줘.”고승겸은 명령하듯 말했다. 전화기를 쥐고 있던 남연풍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내 말 안 들려? 남연풍 바꾸라니까. 남연풍이 거기에 있는 거 다 알아.”고승겸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재촉했다.순간 고승겸도 뭔가 눈치를 챈 듯 조심스럽게 내뱉었다.“남연풍?”“그래, 나야.”남연풍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고승겸,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내가 말하고 싶은 말이야. 내가 곧 우리 아이를 죽인 사람에게 복수를 하게 될 거라는 거야.”고승겸의 음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투에는 뭔가 음침한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남연풍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고승겸,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조금 있으면 다 알게 되겠지만 그전에 당신 나를 잠깐 만나야겠어.”고승겸에게 연락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고승겸이 먼저 만나자는 제안을 하자 남연풍은 서슴지 않고 바로 응했다.그러나 만나기로 한 장소와 시간을 말한 뒤 남연풍의 마음이 왠지 씁쓸하고 공허했다.그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이 모두 사라진 상실감 때문인지 그녀의 마음은 온통 공허함에 사로잡혔다.고승겸은 남연풍과의 통화를 마친 후 다시 기모진과 소만리가 갇혀 있는 지하실로 돌아갔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빵과 물을 수조 속에 던졌고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승에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두 부부가 배불리 먹고 저승길 갈 수 있도록은 해 줘야지.”이 말인즉슨 결국 고승겸은 기모진과 소만리의 목숨을 끊겠다는 것이었다.그러나 기모진과 소만리는 당황하거나 겁먹거나 하지 않았다.고승겸도 그들이 이런 일로 불안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권세를 상징하는 자리에 앉기 위해 그는 일찌감치 물밑으로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사람은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하늘이 그를 멸망하게 만들지.”고승겸은 소만리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소만리는 지금까지도 저런 말을 내뱉는 고승겸에게 경멸하는 시선을 퍼부었다.“고승겸,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 싸울 수는 있지만 결코 부당한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어.”“왜 안 되는데? 과정 따위는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것은 결과야.”고승겸은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았다.“그러니까 남연풍이 뭘 느끼는지 그녀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당신이 즐거우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야. 맞지?”이 말에 고승겸의 얼굴빛이 싹 변했다.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소만리의 날카로운 눈동자를 쏘아붙였다.“소만리,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못 알아듣겠어? 그러니까 남연풍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 따위는 집어치우라고!”“...”“당신이 진심으로 남연풍을 좋아한다면 그녀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당신 곁에 묶어두면서 이것저것 당신이 원하는 것만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사실 남연풍은 당신이 시키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단지 당신이라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사랑해서 자아를 잃어버리면서까지 당신을 따랐던 거야. 그런데 당신은 어땠어? 오직 결과만을 쫓아 승리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지.”소만리의 송곳 같은 거침없는 말이 고승겸의 아픈 곳을 사정없이 찔렀다.“고승겸,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야.”“그만! 입 다물어!”고승겸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서서 소만리를 노려보았다.“소만리, 여기서 나한테 가르치려 하지 마. 애초에 기모진이 당신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잊었어? 기모진이 당신 기분을 신경 쓴 적 있었어? 지금 당신이 무슨 근거로 날 비난하는 거야? 오히려 그런 면에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 남자
흑강당 건물을 빠져나온 고승겸은 남의 눈을 피해 약국으로 가서 상처를 소독할 수 있는 재료들을 샀고 상가 화장실에 몰래 숨어들어 다친 팔과 다리를 소독했다.총상은 다른 외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고승겸은 아픈 건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총상은 사람을 참 애먹게 만들었다.산비아에서 파견된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화장실에 조심스럽게 몸을 숨겼던 고승겸은 남연풍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렸다가 상가를 빠져나왔다.날이 점점 어두워졌고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이 시간에 서쪽 교외 부두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남연풍은 택시에서 내려 운전기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넨 뒤 휠체어를 타고 약속된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강자풍은 남연풍에게 자신도 함께 고승겸을 만나러 나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남연풍은 거절하고 혼자 나섰다.석양 아래 가로등이 어슴푸레하게 빛나고 있었다.고승겸은 해안가에 서 있었고 그 모습이 그리 멀리 있지 않았지만 남연풍은 마치 천지를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고승겸은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듣고 마음속으로 누가 왔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가까운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남연풍은 그해 초여름 그가 길거리에서 만났던 그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그들은 모두 변했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고승겸, 당신이 요구하는 대로 왔으니 이제 소만리와 기모진의 행방을 알려줘도 되지 않아?”남연풍의 첫마디에 고승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도 겉으로는 철저히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기모진과 소만리를 위해 날 만나러 온 거야?”남연풍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래, 맞아. 기모진과 소만리를 위해서 나왔어. 안 그러면 내가 왜 당신을 보고 싶어 하겠어?”이 말을 듣고 그의 입가를 맴돌던 자조 섞인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남연풍
”경연이라는 이름 당신 잊었어?”고승겸이 웃으며 되물었다. 남연풍은 물론 잊지 않았다.그 당시 고승겸이 경연을 처리해야겠다고 말했을 때 그를 막지 않았다.그러고 보니 그녀도 진작에 이 살인에 발을 담그고 있던 셈이었다.남연풍이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본 고승겸은 손을 들어 찬바람에 싸늘해진 남연풍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그녀의 얼굴에 난 흉터가 황혼 빛에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살았어. 이전에는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너무 지쳤어.”고승겸의 눈빛이 점점 부드러워졌다.“당신 이번에는 산비아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 행적을 신고하지 않은 것 같아, 그렇지?”고승겸은 탐색하듯 물었다.사실 그는 남연풍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며 긴장하던 모습을 본 순간부터 그녀가 무장 경찰들을 불러 그를 잡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남연풍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고승겸은 입꼬리를 잡아당겼다.잘생기고 영민한 얼굴에 오랜만에 부드럽고 애틋한 미소가 떠올랐다.“연풍, 우리에게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난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간다 하더라도 우리 사이는 예전처럼 될 수 없어. 그래서 오늘 밤만이라도 우리의 마지막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고승겸의 말에 남연풍은 그의 단호함을 엿볼 수 있었다.지금 그의 눈빛은 너무나 온화했지만 그 온화함은 사랑과 우정 사이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복잡한 감정을 실은 것 같았다.남연풍의 마음이 지금처럼 안절부절못한 적은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승겸, 당신 돌아올 수 있어.”남연풍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고승겸은 단호하게 부정했다.“나도 더 이상 도망 다니고 싶지 않아. 이젠 너무 지쳤어.”그는 지쳤다고 말했다.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그래서 어쩌려고? 오늘 밤이 지나면 당신 경찰에 자수할 거야?
남연풍이 묻는 말에 휠체어를 끌고 가던 고승겸의 발걸음이 흠칫 멈추었다.석양에 반짝이는 바닷물을 바라보는 고승겸의 눈에는 더 이상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세상을 해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이 세상에 만약이란 없어.”그는 공허한 마음을 가득 안은 채 남연풍에게 되물었다.“만약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로 돌아간다면 내가 또다시 당신에게 손을 내밀 것 같아? 어떨 것 같아?”남연풍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안타까운 듯 자조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녀는 고승겸이 여전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 것이라고 믿는다.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이미 일어난 일은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남연풍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고승겸은 다시 휠체어를 밀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석양이 부서진 바닷가에 어둠이 잔잔히 깔리더니 순식간에 눈앞의 모든 것이 칠흑 같은 적막 속으로 뒤덮였다.겨울밤 매서운 찬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가자 남연풍은 자신의 마음도 조금씩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비록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 사람이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더 이상 어떤 따뜻함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가서 자수해.”남연풍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내뱉었다.고승겸은 못 들은 척하며 남연풍의 휠체어만 계속 밀었다.고승겸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남연풍은 말을 이었다.“당신이 여기까지 온 데에는 내 잘못도 커. 난 지금까지 당신을 막은 적이 없어. 옳지 못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저 맹목적으로 당신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된 거야.”“이 길은 내가 선택한 거야. 당신 스스로 당신을 탓할 필요가 없어.”고승겸은 남연풍의 말을 일축했다.“연풍, 당신은 틀리지 않았어. 당신은 그저 날 끔찍하게 사랑하고 또 사랑했을 뿐이야. 그러니 내가 이 꼴이 되었어도 난 충분히 만족해.”“...”고승겸의 말에 남연풍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을 말없이 걷던 고승겸은
고승겸은 잠시 말을 멈추었고 얼굴색이 갑자기 변한 남연풍을 바라보았다.“내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해? 예전 같으면 내가 이렇게 해도 당신은 날 지지했겠지?”“글쎄. 그랬겠지. 예전 같았으면 심지어 난 당신을 도왔을 거야.”남연풍은 자조하며 말했다. 마음이 복잡하게 엉켜서 생각할수록 괴롭고 또 괴로웠다.그녀는 자신이 마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다 죽인 것 같았다.그래서 결국 그녀 자신도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남연풍은 그를 쳐다보았다.“당신 언제 기여온한테 주사를 놓았어?”“당연히 당신과 그 아이가 깊이 잠들었을 때지.”고승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고 돌덩어리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남연풍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그 아이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그렇지? 만약 우리 아이에게 아무 일이 없었으면 곧 세상에 나와서 우리 곁에 있었을 거야.”순간 고승겸의 눈빛이 아련하게 부서지는 것 같다가 이내 원한으로 휩싸인 눈빛으로 돌변했다.“기모진이 우리 아이를 죽였고 소만리가 내 미래를 무참히 짓밟았어.”“당신은 아직도 잘못을 고집하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어.”남연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고승겸을 응시했다.“마지막으로 물을게. 자수할 거야?”“자수의 끝이 뭔 줄 알아?”고승겸이 되묻고는 스스로 대답했다.“죽는 길뿐이야.”남연풍이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당신이 아까 지쳤다고 한 건 무슨 뜻이야?”고승겸은 천천히 일어나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았다.“난 절대 되돌아갈 수 없어. 앞으로 나가든 뒤로 물러서든 결과는 똑같아. 그러니 차라리 나 혼자 끝내는 게 나아.”“...”고승겸의 말에 남연풍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찬바람이 뺨을 사정없이 때렸고 숨 쉴 때마다 가슴 시린 바람이 그녀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무슨 말이야? 고승겸, 지금 뭘 하려는 거야?”남연풍이 다급하게 추궁하며 고승겸을 끌어당기려 해도 모든 힘을 상실한 두 다리는 아무 도움이 되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