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거?”소만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호정을 바라보며 평온한 말투로 설명했다.“잘못되었다는 게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거야? 수치 하나하나가 계약서에 다 명시되어 있고 양측은 계약서상의 규칙을 책임지고 지킬 의무가 있어.”호정은 이전에 회사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어서 소만리가 이렇게 묻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하지만 호정이 알고 싶은 것은 소만리가 난처한 상황에 몰리느냐 아니냐였다.잠시 생각하던 호정은 가볍게 입을 열어 말했다.“난 지금 기 씨 집안 사람이니 당연히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 씨 그룹의 상황이죠. 그게 아니면 내가 뭘 묻겠어요?”“기 씨 집안 사람?”소만리는 이 말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입꼬리를 살짝 구부리고 웃었다.호정은 그런 소만리의 모습을 보며 따라 웃었다. 왠지 소만리가 지금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왜 웃어요? 기 씨 집안에 들어오는 걸 허락한 거 아니었어요? 기 선생님도 나를 책임지겠다고 했는데 이래도 내가 기 씨 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예요?”호정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우리 하던 얘기로 돌아가자.”소만리는 화제를 되돌려 놓으며 유유히 입을 열었다.“만약 데이터에 잘못된 부분이 있고 그것이 우리 측 책임이라면 당연히 우리 회사가 책임져야 하지. 배상금에 대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우선은 무엇보다 회사의 명성에 크나큰 영향을 입게 되지.”소만리는 작은 얼굴에 다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막힘없이 말했다.“비즈니스맨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용과 평판이야. 그리고 기 씨 그룹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국적 기업이야. 평판에 영향을 받으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돼. 만약 내 옆에서 열심히 배우고 싶다면 우선 이것부터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소만리는 마지막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호정은 소만리의 말을 진지하게 듣다가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그 영향이 심각하게 좋지 않다면 ...”그녀는 뭔가 깨달은 척하며 말을 이었다.“회사
”이분은...”소만리는 호정을 보며 남자에게 소개했다.“이분은 오늘 처음 저를 따라 향수를 배우려고...”“소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호정이라고 합니다. 저는 기 사장님 사람입니다.”“...”소씨 성을 가진 남자는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소만리는 호정이 일부러 이런 말을 한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미 이 고객이 오해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소만리는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호정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이 아가씨는 나한테 향수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업무상 필요 때문에 지금은 기 씨 집안에서 살고 있구요. 그러니 기 씨 집안 손님이라고 할 수 있죠.”그러자 고객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 그런 거군요.”“네.”소만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정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소만리를 노려보았다.호정은 기모진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소만리의 예리한 말주변 때문에 그 의도가 사장되고 말았다.호정은 소만리의 날카로운 이런 눈빛을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눈빛은 한겨울 살을 에는 듯한 추위처럼 순식간에 상대를 압도했다.호정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용기가 없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입을 오므리고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마냥 소만리 곁에 앉았다.소만리는 소씨 성을 가진 고객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한 시간 동안 고객은 향수를 시향했고 향수가 마음에 흡족한 듯 주문량을 더 늘리겠다고 했다.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기다린 만큼 가치가 있었다며 소만리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다.호정은 옆에서 지켜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 계약은 곧 파기될 것이고 그때 그 책임은 오로지 소만리가 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오후에 소만리가 저장해 놓은 데이터를 그녀가 완전히 조작해 버렸기 때문이었다.그 데이터대로 향수를 생산하게 된다면 처음 시향한 향수과는 완전히 다른 향이 생산되어
소만리는 강단있게 그러나 아주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그녀의 눈에 비친 기세는 마치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소용돌이를 감춘 태풍의 눈 같았다.호정은 냉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만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소만리는 입을 오므리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소만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소만리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그야말로 부잣집에서 곱게 큰 여자라는 느낌이 강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평온하고 담담한 모습을 보아 왔다.그러나 오늘 밤 소만리의 눈빛은 평소와는 뭔가 달랐다.그녀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유난히 매서웠다.호정은 소만리의 이런 기세에 압도당한 자신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아까 당신이 고객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소만리가 차갑게 물었다. 호정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하면서 고객 앞에서 했던 말들을 떠올려 보았다.그녀는 스스로 기모진의 사람이라고 말했다.호정은 마음속으로 약간 조마조마했고 언짢은 표정을 한 소만리를 바라보다가 오히려 과장된 얼굴로 소만리를 경멸하듯 쳐다보며 냉소를 날렸다.“내가 뭐랬길래요? 내가 뭘 잘못했어요? 나와 기 선생님은 원래...”“처음부터 그 일은 네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고승겸과 짜고 내 남편을 덮쳤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일이 성사가 된 후에도 넌 뻔뻔스럽게 스스로를 내 남편의 사람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고 있어.”소만리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그녀의 눈에 경멸의 눈빛이 가득 들어찼고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는 호정에게 시선을 던졌다.“같은 여자 입장에서 난 너 같은 여자 아주 경멸해.”“...”“더욱 낯 뜨겁게 하는 일이 뭔 줄 알아? 회사까지 와서 나한테 그 낯 뜨거운 일을 거들먹거리는 거야. 흥.”소만리는 차가운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들고 호정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설마 네가 정말 우리 기 씨 집안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 나를 이길 수 있겠어? 나를 능가해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소만리는 호정이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소만리는 지금 호정에게 누가 이 집의 안주인이고 누가 기모진의 유일한 사랑인지 알리고 싶었다.기모진은 당연히 호정의 기분 따위 신경 쓰지 않았고 차 안에 또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소만리와 함께 다정한 모습으로 집안으로 들어갔다.기란군은 이미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소만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란군은 너무나 반가워서 달려가며 엄마라고 불렀다.“엄마, 엄마. 방금 여온이랑 통화했는데 여온이가 나보고 엄마, 아빠 보고 싶다고 그랬어.”기란군은 말을 하다가 조그마한 미간을 앙증맞게 찡그렸다.“그런데 여온이 모습이 조금 힘이 없어 보였어. 여온이 아직도 아픈 거야?”힘이 없다.소만리는 기란군의 말을 듣고 여온의 상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그녀는 걱정되는 마음에 가슴이 아렸지만 사랑스러운 미소로 다가온 아들에게 손을 들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여온이가 아마 엄마 아빠 오빠 보고 싶어서 힘이 없나 봐. 누군가가 너무 보고 싶고 하면 그렇게 보여. 그렇지만 집에 돌아오면 바로 힘이 나지.”기란군은 눈을 깜빡이며 소만리가 한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잠시 후 되물었다.“그럼 여온이 병은 어떻게 된 거야? 나은 거야?”“그럼. 당연하지. 며칠 후에 엄마가 일이 끝나면 여온이 데리러 갈 거야.”“정말?”기란군의 예쁜 눈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아이의 환한 미소에 소만리도 덩달아 환하게 웃었다.“그럼, 엄마가 꼭 여온이 데려올게. 약속해.”“너무 잘 됐다!”기란군은 펄쩍펄쩍 뛰며 소만리를 껴안았다.“엄마, 우리 이제 밥 먹으러 가요.”“그래.”소만리는 웃으며 대답했고 아들의 손을 잡고 다이닝으로 향했다.호정은 그들이 다이닝으로 향하는 모습을 본 후에야 천천히 거실로 들어섰다.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기란군까지 단란하고 화기애애한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러 가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자
호정은 공장 주위를 둘러보면서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소만리는 공장 책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이야기가 끝나면 소만리는 공장 안을 둘러볼 것이다.호정은 소만리가 향수가 생산되는 상황을 검사하지 않길 바랐다.그래서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소만리를 보고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시끄럽게 그녀를 불렀다.호정은 어쨌든 시작한 일이니 끝장을 보아야만 했다.“소만리!”소만리는 옷을 갈아입고 공장에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호정이 황급히 안으로 뛰어오는 것을 보고 의심스러운 듯 호정을 바라보았다.“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급하지 않으면 좀 기다려. 나 공장 둘러봐야 해.”소만리가 호정에게 말하자 호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당연히 중요한 일이니까 내가 이렇게 당신을 급하게 찾는 거겠죠.”호정은 초조한 표정으로 말하며 소만리의 뒤를 따르던 상사와 매니저를 힐끔 쳐다보더니 갑자기 눈빛이 바뀌었다.그녀는 갑자기 억울하고 연약한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아가씨, 아니 대표님. 제가 이제야 이해했어요. 저는 대표님과 다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아요. 나와 기 선생님 사이에 일어난 일은 그냥 우연한 사고였어요.”호정은 갑자기 그 일을 언급하며 그녀와 기모진 사이에 일어난 일을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게 되었다.소만리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뒤에 있던 상사와 매니저는 모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호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대표님, 난 기 선생님 하나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경도로 달려왔어요. 나한테 남은 건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경도에서 삼시 세끼 잘 먹고 잘 살고 바람과 비를 피할 곳만 있으면 그걸로 만족해요. 제발 절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기 씨 집안의 하인이 되라고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호정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고 눈에는 눈물마저 반짝이고 있었다.소만리의 뒤에 서 있던 상사와 매니저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어색한 기침을 내뱉었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 그게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거야.”소만리는 설명하기도 귀찮고 호정과 더 이상 다투기도 귀찮았다.“네가 정말 깨달았다면 날 따라와서 열심히 배워. 그렇지 않으면 어떤 자리에서든 함부로 부적절한 말을 내뱉어서는 안 돼. 알겠어? 경고하는 거야.”소만리는 결단력 있고 단호하게 호정에게 경고했고 당당한 눈빛으로 호정의 얼굴을 훑고 난 후 공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호정은 자신이 조작한 데이터를 소만리가 확인하게 될까 봐 얼른 달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소만리, 거기 서요. 소만리!”“이 사람 못 들어오게 해.”소만리는 호정의 말은 무시한 채 공장 문밖을 지키는 보안요원들에게 분부를 내리고는 당당한 발걸음을 이끌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호정은 보안요원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소만리가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호정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녀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문밖에서 기다렸다.소만리가 혹시라도 조작된 데이터를 발견할까 봐 마음이 불안불안했다.30분 정도 지났을 때 소만리는 상사와 매니저를 동행하고 공장에서 나왔다.매니저는 미소를 지으며 소만리에게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주문하신 대로 완벽한 제품을 만들 겁니다. 제품이 납품되는 시기도 대표님이 지정한 날짜에 맞출 테니 걱정 붙들어 매세요.”“그래요. 수고하셨어요.”소만리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돌아섰다.호정은 소만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아무런 행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두 눈으로 똑바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혹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걸까?호정은 묵묵히 생각에 빠졌다.소만리는 호정의 행동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들고나와 회사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호정은 그제야 소만리를 따라 차에 올랐다.공장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안달이 나 있던 호정은 태세를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호정은 소만리와 함께 뒷좌석에 앉
소만리의 강렬한 눈빛에서는 호정에게 한 치의 거짓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혔다.호정은 약간 찔려서 머뭇거리다가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고 고민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무슨 다른 방법이 있어요? 나도 살아야 하니까 타협할 수밖에요.”호정은 달갑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난 당신과 싸울 능력이 전혀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처음에는 너무 순진해서 막무가내로 나갔던 거예요. 기 선생님은 내가 따라갈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어요.”호정은 매우 슬픈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기 선생님은 아주 매력적인 분이에요. 내 신분도 모르고 함부로 불나방처럼 덤볐으니, 아휴...”호정은 이 말을 내뱉으며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소만리는 조용히 호정을 바라보며 그녀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이것 말고 또 있어?”소만리는 의미심장하게 물었다.호정은 어리둥절해하면서 고개를 들었고 소만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예요. 전 아가씨가 나 같은 소인배가 저지른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기 씨 집안에서 지내며 열심히 일을 배울 수 있게 아량을 베풀어 준다면 그저 바랄 게 없어요.”호정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 소만리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담담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다음 며칠 동안 호정은 소만리를 따라 회사를 들락날락하며 퇴근 후에는 기 씨 집으로 돌아왔다.호정은 바지런하게 집안 일도 도우면서 기모진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하지만 기란군은 매우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였다.호정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미소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님을 기란군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소만리 역시 이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있었고 호정에게 기란군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완곡하게 말하면서 맡은 업무만 잘 하면 된다고 일렀다.호정은 말로는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질투심은 더욱더 불타올랐다.호정
호정의 얼굴에선 뭔가 재미난 구경거리를 앞에 둔 사람처럼 비열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고객이 향수를 들어 시향지에 한번 펌핑을 한 다음 시향지를 코끝으로 가져가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지켜보았다.하지만 고객이 시향을 끝내기도 전에 호정은 어디선가 희미하게 맡아본 듯한 향이 주변에서 퍼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희미하고 은은한 이 향은 분명 그날 소만리의 작업실에서 맡았던 향이었다!작업실에서 맡았던 향이랑 완전히 똑같은 향이었던 것이다!“그래, 바로 이거예요. 정말 상쾌하고 좋군요.”감탄사를 연발하는 고객의 반응에 호정은 정신을 가다듬었다.호정은 이 고객이 또 다른 향수를 집어 들고 향을 시험해 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러 개를 시향했지만 품질과 향은 모두 똑같았다.이 향들은 그날 소만리가 작업실에서 만든 샘플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호정은 이런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마음이 점점 불쾌하고 답답해져 왔다.“기 사장님, 그리고 대표님. 이번 제품은 너무나 만족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우선 호텔 식당에 예약을 해 두었는데 같이 저녁 식사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고객은 소만리와 기모진을 극진하게 대우했다.소만리는 눈을 들어 기모진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흔쾌히 응했다.“네, 그러시죠. 그럼 이따 저녁에 뵐게요.”“네, 나중에 뵙겠습니다.”고객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창고를 떠났다.소만리는 선반에 늘어선 상자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성취감이란 이럴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기모진은 그녀의 뒤로 다가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소만리, 평생 당신처럼 현명하고 훌륭한 아내를 얻게 되어서 난 정말 행운아야.”그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소만리의 귓가로 살짝 미끄러져 들어왔다.그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감동의 물결이 그대로 그녀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웃으며 돌아섰고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호정을 바라보았다.호정도 이때 소만리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