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풍은 낯선 전화번호를 보고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고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고승겸이었다.“난 당신 전화번호를 차단했어요. 더 이상 내가 당신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걸 알 텐데요.”“정말 기모진을 그냥 놔둘 거야? 네 형과 누나의 죽음을 이렇게 아무런 복수도 하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어?”고승겸은 강자풍을 자극하기 위해 부추기기 시작했다.그는 강자풍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에야 전화기 너머에서 강자풍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승겸,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하지만 난 다시는 당신과 연락하고 싶지 않아요. 내 집안 일에도 더 이상 끼어들 필요 없어요.”강자풍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끝내자마자 전화를 바로 끊었다.고승겸은 전화기 너머로 ‘뚜뚜뚜뚜'하는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을 강하게 오므렸다.그의 눈에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흘러나왔다.잠시 후 그는 어딘가로 또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그는 바로 지시를 내렸다.“내일 F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 두 장 빨리 준비해.”말을 마친 고승겸은 점점 어두워지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천천히 잡아당겼다.“기모진, 그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혈육을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똑똑히 느끼게 해 줄게.”그는 차갑게 내뱉고는 돌아서서 남연풍의 방으로 향했다.남연풍은 침대에 앉아 넋을 잃은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고승겸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았다.남연풍은 고승겸이 자신에게 뭐라고 말을 할 줄 알았는데 고승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장 앞으로 걸어가 다짜고짜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무언가를 깨달은 남연풍이 물었다.“당신 어디 가려고? 설마 할아버지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정말 평생 이렇게 숨어 지낼 생각이야?”다짜고짜 물건을 정리하던 고승겸의 손길이 남연풍의 말이 떨어지자 서서히 멈추었고 그는 천천히 남연풍을 돌아보았다.“내가 왜 잘못을 인정해야 하지?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내
기여온은 눈을 깜빡이며 밖을 가리켰다.강자풍은 기여온이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단번에 알아들었다.“여온이가 밖에 놀러 가고 싶은 거구나?”기여온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강자풍은 기여온의 귀여운 손을 잡았다. 갑자기 마음이 아파왔다.사실 강자풍도 매일 방에만 갇혀 있는 기여온의 답답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그러나 기여온의 몸을 생각하면 강자풍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여온의 눈빛을 보며 강자풍은 그의 친구 이반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이반은 흔쾌히 강자풍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었다.“최근 여온이의 상황이 꽤나 안정적이라 외출해도 될 것 같아요. 그렇지만 날씨가 맑아야 하고 바람도 차지 않아야 해요. 30분 이상은 아직은 무리구요.”이반의 말을 듣자 강자풍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그는 기뻐서 기여온의 앞에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작은 머리에 있는 모자를 쓰다듬었다.“여온아, 오빠랑 밖에 나가 볼까?”기여온은 이 말을 듣자마자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여전히 말을 할 줄 모르지만 강자풍은 이런 정도의 반응으로도 매우 만족했다.요 며칠 F국의 날씨는 매우 맑았고 조금 춥긴 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강자풍은 기여온을 조심스럽게 보호하며 그녀를 데리고 밖을 한 바퀴 거닐었다.집안으로 돌아온 후 그는 기여온을 안고 침실로 돌아와 다정하게 기여온을 침대에 눕혔다.나이 지긋한 가정부는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자풍 도련님은 여온양에게 정말 자상하고 배려가 넘치세요. 이런 오빠가 있으니 여온양의 건강은 틀림없이 빨리 회복될 거예요.”가정부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지만 강자풍은 가정부가 한 말을 되새기며 괜한 생각에 잠겼다.오빠.그는 기여온의 오빠일까?아니다.그들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그렇지만 확실히 강자풍은 기여온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이 착하고 천사 같은 아이를 잘 돌보고 싶
전화를 끊으려던 강자풍이 소만리의 말에 멈칫했다.화면 속 소만리의 눈빛은 매우 간절해 보였다.소만리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한 강자풍은 그럼에도 전화를 끊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소만리도 이런 상황을 예상한 듯 입을 열었다.“강자풍, 나 이틀 후에 F국에 한 번 다녀오려고. 그때 나 여온이를 집으로 데리고 오고 싶어.”소만리의 말을 듣고도 강자풍은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그도 이미 예상한 바였다. 아마도 소만리와 강자풍 사이에 놓인 공통의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강자풍은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소만리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그럼 한 번 만나게라도 해 주면 안 되겠어?”소만리가 한발 물러서서 요구하자 강자풍은 잠시 망설인 뒤 입을 열었다.“그때 만나서 다시 얘기해.”말을 마친 강자풍은 얼른 영상통화를 끊었다.소만리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던 기모진을 보았다.“소만리, 너무 걱정하지 마. 적어도 이제 강자풍은 우리와 얘기는 하려고 하잖아.”기모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소만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기모진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여온이 너무 보고 싶어.”기모진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그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 우리를 괴롭혔잖아. 우리 이번에 F국에 가면 기분 전환 좀 하자.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여온이도 집으로 데리고 오고. 그럼 우리 이제 한 가족이 다 모이는 거야.”“나도 당신이랑 기분 전환하고 싶어. 하지만 당신 다리가 아직 다 낫지 않았잖아. 당신을 너무 많이 움직이게 할 수는 없어.”소만리는 근심으로 가득 찬 갈색 눈동자를 들어 기모진을 찬찬히 바라보며 당부했다.“잘 들어. 지금 당신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친 다리를 잘 낫게 하는 거야.”기모진은 손을 뻗어 소만리의 손을 잡고 안타까운 듯 입술에 키스를 했다.
예전에 위청재는 소만리를 이런 태도로 대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소만리를 싫어하고 귀찮아했었다.그러나 지금 위청재는 언제든지 소만리를 보호하려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같았다.정말 인생사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일이다.기모진은 천천히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호정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그녀의 뒤편에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는 기자들이 먹이감을 사냥하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이윽고 기모진의 시선에 소만리의 모습이 나타났다.날씬한 몸매에 가볍게 걸친 그녀의 외투가 우아하고 차분하게 옷자락을 휘날리고 있었다.소만리의 카리스마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빛났고 바람을 가르며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눈빛은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기모진은 매의 시력에 버금갈 정도로 눈이 밝은 탓에 호정이 소만리를 보는 순간 갑자기 표정이 음산해지는 것을 보았다.기모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았고 언제든지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대문 앞.호정은 창백해 보이는 얼굴로 두 눈을 빤히 뜨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소만리는 침착하게 호정에게 다가가 직설적으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목적이 있으면 바로 말해. 시간 낭비하지 말고.”그녀는 몇 발치 떨어져 있는 기자들을 향해 한 번 힐끔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이렇게 추운 날씨에 다들 여기서 찬바람 쐬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말하라구.”호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만리의 대담한 태도를 참고 볼 수가 없었다.호정은 소만리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냉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사실 당신도 지금 이 상황이 엄청 신경 쓰이고 싫죠? 아닌 척하느라 욕보시네요.”호정은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소만리에게 다가섰다.“내 며느리한테 가까이 가지 마!”위청재는 호정의 접근을 막았다.“아니, 너! 기자들을 데리고 우리 집 앞에 온 목적이 뭐야! 너 똑바로 말해 봐! 너 원하는 게 뭐야!”호정은 발걸음을
소만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자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한테 생각이 있어요.”“당연히 난 네가 무슨 생각이 있을 거라고 믿어. 그렇지만 저 여자를 집안으로 들이면 저 여자가 우릴 너무 편하게 볼까 봐 걱정되어서 그래.”소만리는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편하게 보고 안 보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보통 손님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손님?”위청재가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저 여자가 회사 로비에서 그 소란을 피우는 동영상을 내가 보지 않았다면 나도 저 여자를 손님으로 대할 수 있었을 거야.”위청재는 답답한 듯 소만리의 뒤를 따르며 당부했다.“저런 여자랑 자꾸 마주치는 거 좋지 않으니 조심해.”소만리는 눈을 내리깔고 손등에 싸인 거즈를 보며 말했다.“이미 한 번 당했으니 두 번은 안 당할 거예요.”“그럼 다행이다.”위청재는 한숨을 돌렸다. 문 앞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들은 호정이 일을 크게 벌이는 모습을 찍기 위해 온 것인데 지금 소만리가 호정을 집안으로 들여 버렸다.소만리가 호정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지 그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기자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저 문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기 씨 집안 대문을 함부로 침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집 안.위청재는 들어가자마자 가정부에게 소만리의 막내아들을 위층으로 데려오게 했다.소만리는 가정부에게 차와 간식을 준비하라고 일렀다.“호정, 그렇게 오랫동안 소란을 피웠으니 피곤하지? 홍차랑 간식 좀 먹고 기운 차린 후에 우리 얘기하자.”호정은 소만리의 말을 듣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티 테이블 위에 놓인 다과를 힐끔 쳐다보았다.“난 이딴 홍차 따위를 마시려고 온 게 아니에요. 난 내 자신에게 정의를 되찾아 주려고 왔다구요.”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그럼 당신이 원하는 정의가 뭔지 말해 봐.”“기 선생님이 날 책임
소만리가 지금 말한 것은 기모진이 결국 자신을 책임진다는 얘기인 건가?그럼 자신이 기 씨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란 말인가?그 찰나의 순간 호정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의혹이 떠올랐다.모두가 놀란 가운데 호정은 위청재가 소만리를 끌어당겨 한쪽 끝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다.호정은 위청재가 소만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을 보았지만 둘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는 듣지 못했다.“소만리, 무슨 소리야? 지금 저 여자를 여기 데리고 있겠다고 말한 거야?”위청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네, 저 여자가 저렇게 단호하게 모진한테 책임지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일단 저 여자를 집안으로 들이려구요.”“뭐, 뭐라고?”위청재는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도저히 소만리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소만리, 너 미쳤어? 네가 그러자고 해도 모진이 동의하지 않을 거야!”“나도 동의해요.”갑자기 기모진의 목소리가 귓가로 미끄러져 들어왔고 소만리와 위청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언제 내려왔는지 기모진이 계단참 끝에 서 있었다.소파에 앉아 있던 호정은 기모진의 모습을 보고는 벌떡 일어섰다.그녀의 눈에서는 벌써 그를 사모하는 감정으로 달아올라 있었다.“기 선생님.”호정은 기모진을 부르며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기모진은 호정의 시선을 외면하고 소만리의 맑은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기모진과 소만리 사이에는 말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지만 마치 속마음이라도 털어놓은 것 마냥 한순간에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소만리를 향해 깊고 애틋한 시선을 보내던 기모진은 이내 차가운 표정으로 호정을 바라보았다.“그렇게 이 집안에 들어오고 싶다면 그렇게 해줄게.”기모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호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기 선생님, 정, 정말이에요? 정말 날 책임지는 거예요
위청재는 이 여자가 감히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너무 놀라 심장이 벌렁벌렁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소만리는 얼른 위청재를 다독였다.“어머니, 진정하세요. 제가 위층으로 모시고 갈 테니까 좀 쉬세요.”위청재는 손사래를 치며 눈살을 찌푸렸다.“필요 없다. 난 너희들이 당최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도 않아.”위청재는 말을 끝내고는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가려다가 휙 돌아서서 호정을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너희들이 무슨 소란을 피우든 상관하지 않아. 그렇지만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저 여자는 절대 우리 집안에 들일 수 없어!”위청재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화를 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위청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호정은 위청재의 태도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이 이곳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웠다.처음 고승겸의 집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도 고승겸의 저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품이 대단해서 보통 사람들은 발도 들여놓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기 씨 집안은 고승겸의 저택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경도 제일의 귀족 집안이었다.마찬가지로 이 집 대문에 들어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기 씨 집에 기거한 후로 호정은 더 이상 예전처럼 다른 사람 시중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청소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차를 가져다주지 않아도 되었다.반대로 그녀는 일상생활하는 데 항상 시중드는 사람이 있어서 매우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위청재는 정말이지 호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소만리와 기모진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도 몰라서 위청재는 결국 당분간 사화정의 집에 가서 머물게 되었다.위청재는 매일 사화정과 함께 거리 구경을 하며 애프터눈 티도 마시면서 오히려 훨씬 기분이 상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소만리는 이틀 동안 호정
호정은 불만스러운 듯 소만리를 노려보았다.소만리는 날카로운 눈동자를 한껏 치켜세웠다.“내 물건에 손대지 말라니까.”그녀는 차가운 어조로 주의를 준 후 호정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나가. 내 일에 방해하지 말고. 지금 이 시간에 나가면 애프터눈 티를 즐길 수 있을 거야.”소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호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뭔가 소리를 듣게 되었다.소만리가 고개를 돌려 보니 호정은 그녀가 만든 향수에 다시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이것은 현재 유일한 완제품이었다. 바로 오늘 저녁에 고객에게 시향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호정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소만리를 바라보며 그녀가 이 향수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호정은 입꼬리를 구부리고 웃으며 향수를 높이 든 다음 손을 놓으려는 몸짓을 했다.“소만리, 이 향수 되게 신경 쓰이나 봐요?”호정은 거만한 얼굴로 향수 뚜껑을 열었다.시원한 숲 향기가 코끝으로 퍼져나가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향이었다.“이게 바로 고급 조향사가 만든 향수예요? 정말 냄새가 너무 좋은데요. 하지만 내가 지금 손을 놓아 버리면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겠죠?”호정은 소만리를 위협하려는 의도로 말했지만 소만리는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서? 당신은 또 나한테 어떤 조건을 내걸고 싶은 건데?”“나 같은 게 어떻게 감히 당신한테 조건을 제시할 수 있겠어요? 난 당신이 아주 영리하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말인데...”호정은 향수를 한번 쳐다보았다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곧 이 향수가 바닥에 떨어져 물거품이 되는 것을 상상하는 듯했다.이윽고 호정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향수병을 떨어뜨렸다.바로 그때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호정이 달려드는 사람을 똑똑히 보았을 때 이미 기모진은 바닥으로 추락하던 향수병을 손으로 받은 뒤였다.호정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어쩔 줄 몰라하며 기모진을 바라보았다.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