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하는 소리와 함께 경호원의 몸이 풀밭에 내동댕이쳐졌다.“아앗.”경호원이 비명을 질렀다.기모진은 마치 왕처럼 높은 곳에서 남자를 흘겨보더니 고개를 돌려 나머지 경호원들을 바라보았다.하지만 다른 경호원들은 기모진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들 역시 그들의 실력으로는 기모진을 당해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뭔가 다른 꼼수를 써야만 했다!기모진에게 내동댕이쳐진 경호원은 기모진의 꼿꼿하고 당당한 뒷모습을 보고 조용히 양복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그는 기모진의 종아리에 총구를 겨누고 기모진의 주의가 소홀한 틈을 타서 방아쇠를 당겼다.그러나 기모진의 관찰력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예리했다.경호원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기모진은 민첩하게 피했다.총알은 기모진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기모진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의 종아리를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앗!”총에 맞은 경호원은 고통에 몸부림쳤고 총을 쏜 남자가 그 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했다.기모진이 몸을 돌려 총을 쏜 남자에게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을 쏘아붙였다.“역시 고승겸의 사냥개답군. 잘난 척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기습적으로 사람에게 총구를 겨누기도 하는군. 당신 주인은 당신한테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하라고 가르쳤나?”“정확히 말하면 기모진은 나의 손님이 아니라 나의 원수지.”고승겸의 목소리가 반대편에서 울려왔다.기모진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유유히 걸어오는 고승겸을 노려보았다.기모진은 고승겸의 뒤를 보며 소만리의 모습을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고승겸 혼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승겸도 기모진의 마음을 눈치채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입꼬리를 찡그렸다.“당신, 소만리를 찾는 거야?”고승겸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기모진이 얼마나 소만리를 걱정하는지 고승겸은 알고 있었다.고승겸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기모진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소만리는 당신 주변에 있어.”고승겸의 말을 듣고도 기모진은 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
고승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기모진, 산비아에 온 걸 환영해. 그렇지만 이번에는 당신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고승겸은 다시 권총을 장전하고 기모진의 심장을 겨누었다.그는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고 있는 기모진의 종아리를 힐끔 쳐다보며 음흉하고 낮은 소리로 웃었다.“많이 아프지? 하지만 그 아픔은 곧 사라질 거야. 곧 모든 감각을 잃게 될 테니까.”그는 시선을 기모진의 몸에 고정시키고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기모진, 지옥으로 떨어져 내 아들에게 속죄해.”“그만해!”고승겸이 기모진을 향해 쏘려고 하는 순간 그를 막는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다.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고승겸은 눈을 들어 2층 베란다를 보았다.남연풍이 휠체어에 앉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남연풍은 긴장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뒷마당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고승겸, 당신이 기모진을 죽인다면 난 지금 여기서 떨어질 거야.”남연풍의 목소리가 유난히 고승겸의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린 고승겸은 더 이상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당신은 나한테서 점점 더 낯선 사람으로 변하고 있어.”남연풍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나도 이제 그런 비겁한 짓을 하지 않는데 왜 당신은 양심에 어긋나는 짓까지 스스럼없이 하는 거야?”“이게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야?”고승겸은 냉소를 터뜨리며 남연풍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남연풍, 당신은 정말 죽은 우리 아이가 안타깝지 않아?”고승겸의 질문이 남연풍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그녀가 어떻게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러나 정말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그 아이는 낳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게다가 남사택과 초요가 죽은 마당에 그녀도 따라 죽고 싶은 마음이었고 아이를 데리고 함께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생각한 것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아이가
고승겸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고 많이 초조해 보였다.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화가 난 듯 그 자리를 훌쩍 떠나버렸다.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은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고승겸의 명령을 따르며 기모진을 방으로 데리고 치료하게 해 주었다.기모진은 자신의 몸을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잠자코 경호원을 따라 방으로 돌아왔다.이윽고 고승겸의 주치의 닥터 육이 도착했고 남연풍도 뒤따라 방으로 들어왔다.기모진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고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완전히 힘이 쭉 빠진 채 녹초가 되어 침대에 기절하듯 누워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남연풍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의사 선생님, 어때요? 부상이 심각한가요?”닥터 육은 기모진의 상처를 살피며 남연풍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연풍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아마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남연풍도 당연히 기모진의 상처가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럼 치료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정상적인 보행에 지장을 줄까요?”“영향이 없지는 않을 거예요.”닥터 육은 솔직하게 말했다.“총상을 입었으니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면 다른 합병증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 앞으로 한 열흘이나 보름 정도는 제대로 걷기 힘들 것 같습니다.”닥터 육의 대답을 들은 남연풍의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열흘이나 보름 동안 걸을 수 없다는 것은 기모진이 소만리를 제대로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소만리가 최면이 풀리더라도 산비아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정말 걱정되는 모양이군.”이때 고승겸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남연풍은 그제야 고승겸이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는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외형적인 모습은 여전히 우아하고 멋있었지만 온몸에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은 전혀 우아하고 온화한 모습이 아니었다.남연풍은 고승겸의 말을 무시하고 담담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았다.정신을 잃고 누워 있
”소만리.”기모진은 문으로 들어오는 소만리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외쳤고 어두웠던 그의 눈동자에 환한 빛이 되살아났다.그는 다시 일어나 앉으려다 너무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다리에 난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앗.”그는 고통스러운 듯 낮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그는 평소 같았으면 이 정도 통증으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을 테지만 소만리를 보고 있노라니 본능적으로 그녀의 관심과 걱정을 갈망하게 되었다.그러나 소만리는 기모진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평온했고 기모진이 아파하는 모습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의 관심과 사랑을 갈망하던 기모진의 마음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것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그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만약에 소만리가 최면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고승겸에게 모든 생각과 사상을 송두리째 세뇌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바로 그를 걱정하고 신경 썼을 것이다.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소만리를 보며 기모진은 눈앞에 그들 사이에 놓인 침묵을 어떻게 깨야 할지 몰랐다.그는 마음속으로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고 싶었지만 최면에 걸린 그녀가 그의 행동에 거부 반응을 보일까 봐 조심스러웠다.그는 그녀가 자신을 배척하고 미워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기모진은 마음속에 수많은 갈등으로 끙끙대고 있었고 결국 소만리가 먼저 말을 할 때까지 잠자코 있어 보기로 했다.그러나 소만리의 시선은 그의 몸에 있지 않은 것 같았다.그녀는 방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야 기모진의 몸에 시선을 던졌다.“승겸이 당신한테 왔었다면서요? 그 사람 어디에 있어요?”“...”소만리가 입을 열어 한 말에 기모진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그의 마음은 이전보다 조금 더 차가워졌다.알고 보니 그녀는 그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떻게 그를 걱정하는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그녀는 단지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찾으러 왔을 뿐이었다.기모진은 마음
”괜찮아요.”소만리는 자연스럽게 기모진의 손을 피하며 물 잔을 집어 들었다.“기 선생님이 몸에 기력이 없어 보이시니 시중을 불러 살펴보라고 할게요.”소만리는 말을 마치며 또 가려고 했다.기모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소만리의 손목을 덥석 잡아당겼다.소만리는 발걸음을 내딛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기모진의 손을 뿌리쳤다.“기 선생님, 이게 무슨 짓이에요?”그녀는 아름답고 날카로운 눈매를 들어 올리며 불쾌함을 가득 실은 눈빛으로 기모진을 쳐다보았다.기모진은 화가 난 소만리의 눈을 바라보다가 낙담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소만리씨, 당신을 보니 누군가가 생각나서 그만... 미안합니다.”기모진은 슬픈 표정을 지었고 가늘고 깊은 그의 눈에는 끝없는 쓸쓸함이 물들어 있었다.소만리는 기모진의 모습을 보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느꼈다.그녀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궁금한 마음이 들어 기모진에게 물었다.“날 보고 누구를 생각하셨는데요?”“당신을 보니 내 아내가 생각났어요.”기모진은 소만리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소만리씨도 아마 믿지 못할 거예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와 당신이 너무나 닮았다는 걸.”“그래요?”소만리는 의아해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기모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다.“혹시 당신 아내 사진 가지고 있어요?”“물론 있죠.”기모진은 소만리가 이렇게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소만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내어 소만리에게 보여 주었다.핸드폰을 넘겨받은 소만리는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번뜩였다.이것은 그냥 닮은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똑같았다.기모진은 소만리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폈고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만리, 바로 당신이잖아. 내 사랑하는 아내.이 세상에서 당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은 절대 없어.당신은 유일한 사람이야.소만리는 사진을 몇 장 보다가 잠시 머뭇
기모진은 눈으로 뭔가 말을 하는 듯한 소만리의 깊은 가을색 눈동자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켜 바라보았다.소만리도 눈을 들어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깊고 매혹적이었다.“기 선생님.”소만리가 입을 열었다.“소만리.”그때 마침 고승겸이 나타나 소만리의 말을 끊었다.기모진의 눈빛에 담긴 기대는 단번에 산산조각이 났다.고승겸은 문 앞에 서서 침대에 앉아 있는 기모진을 돌아보았다.고승겸의 눈은 차갑고 도도한 빛을 띠고 있었고 양쪽으로 말려올라간 입꼬리는 자신감에 가득 찬 승리의 기운을 내걸고 있는 듯했다.잠시 후 고승겸은 기모진에게 쏟았던 시선을 거두며 눈을 낮게 깔고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소만리, 당신 나 찾고 있었어?”고승겸의 말투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기모진은 그런 고승겸을 보고 당연히 그가 다정한 척 연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모진의 눈에는 그것이 아무리 다정하다고 하더라도 거짓된 고승겸의 행동에는 가시가 돌기를 가득 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일 결혼식 때문에 당신과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그랬군. 그럼 서재로 들어가서 이야기해.”고승겸은 말을 마치더니 소만리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녀를 감싸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고승겸의 손이 소만리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기모진의 눈에는 불타는 분노의 눈빛이 이글거렸다.이를 포착한 고승겸은 가볍게 비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올리려던 손을 거두었다.소만리는 고승겸의 이런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방금 자신이 끝내지 못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소만리는 돌아서며 방 문에 손을 갖다 대었다. 순간 그녀의 시선은 저절로 기모진의 몸으로 향했다.그녀의 눈에는 기모진의 눈빛이 유난히 심각해 보였고 심각함을 넘어 뭔가 근심이 드리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걱정하고 있다. 그가 뭘 걱정하고 있는 걸까?소만리는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고승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겸 도련님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고승겸은 앞에 놓인 태블릿 PC를 집어 들고 싸늘한 눈빛으로 힐끔 수행원을 보았다.“내일 현장 진행을 위한 준비는 다 되었어?”“겸 도련님, 걱정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습니다. 제가 두 번이나 점검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수행원은 힘주어 말했다.고승겸은 만족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태블릿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럼 기모진은?”그가 또 물었다. 수행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설령 내일 그가 나타난다고 해도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그래.”고승겸은 그제야 완전히 만족했다.“그럼 절대 실수하지 마. 실수해선 안 돼.”“실수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그럼 됐어.”고승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지경이 서재 문으로 들어왔다.고승겸이 수행원에게 눈짓을 하자 수행원은 눈치 빠르게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다 준비됐어?”“준비 다 됐으니 내일 결혼식만 기다리세요. 이번에는 차질이 없도록 할 거예요.”여지경은 고승겸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설마 그럼 지난번 결혼식도...”“네. 전 처음부터 소만리의 신분 때문에 마음에 들어 했던 거예요. 그녀는 기모진을 견제하는 데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체로도 이용할 가치가 아주 높거든요.”이 말을 듣고 여지경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고승겸은 여지경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어머니도 내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여지경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었다.“이 길이 워낙 쉽지 않은 길이잖니. 지름길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저를 이해해 주셔서 기뻐요.”고승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금 저를 인정해 주시는 분은 어머니뿐이에요.”“연풍이는?”여지경은 남연풍의 상황을 물었다. 고승겸은 안색이 굳어지며 말했다.“여전히 그냥 그래요.”여지경은 고승겸의 말을 알아들었다
친구일 뿐만은 아니다.소만리는 남연풍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의혹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그의 친구일 뿐만은 아니라는 건...”“난 그와 연인 관계였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기도 했어요.”남연풍은 솔직하고 당당한 눈빛으로 소만리의 눈을 마주 보았다.남연풍은 소만리의 눈에 의아한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지금의 소만리는 전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남연풍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그 아이, 나와 그 사람이 지은 죄가 많아서, 그래서... 이 세상에 나올 수가 없었어요.”이 말을 하는 순간 남연풍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남연풍은 그 아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느꼈다.소만리는 남연풍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생각에 잠긴 듯 눈썹을 찌푸렸다.내일이면 자신의 신랑이 될 사람이 눈앞의 여자와 이런 서사가 있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소만리는 묵묵히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상실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잠시 후 비로소 입을 연 소만리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미스 남, 이 말을 해주려고 일부러 여기 온 거예요?”남연풍은 소만리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소만리가 담담하게 웃는 것을 보며 남연풍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만리, 그거 알아요?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진짜 당신의 생각이 아니에요. 지금 당신의 생각은 완전히 고승겸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어요. 고승겸이 당신에게 최면을 걸었거든요.”남연풍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하면서 자신과는 다르게 평온한 얼굴을 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사실 내가 한 번 시도해 볼 수는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그건 당신이 틀렸어요.”소만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들썩였다.소만리의 대답을 들은 남연풍은 어리둥절했고 영문을 몰라 소만리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뭐라구요?”“난 당신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