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진은 어디를 가는지 묻지도 않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가는 곳이면 난 어디든 가.”소만리는 눈썹을 아치형으로 구부리고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고 다정하게 기모진의 품에 안겼다.오늘 밤 별은 밝지 않았지만 소만리의 마음은 순간 어느 별보다 밝고 따뜻했다.다음날 아침, 소만리는 기모진과 함께 경찰서에 갔다.경찰서에서 일을 마친 후 기모진은 차를 몰고 고승겸의 집으로 갔다.대문 입구에 있던 경호원들이 소만리와 기모진을 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지만 어떻게 그들이 기모진을 막을 수 있겠는가.고승겸과 여지경은 원래 오늘 남연풍을 데리고 산비아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안나의 모친이 살기를 띠며 들이닥치는 바람에 지금 그들은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이 현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안나의 모친이 목청을 돋우며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자네, 남편 노릇을 어떻게 하는 거야? 자네 아내, 당당한 자작 부인을 개집에 버려? 도대체 내 귀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잘못 들은 거야? 아니면 자네가 미친 거야? 내 천금 같은 딸은 사람이야! 당장 사람을 보내 내 딸 데려와!”안나의 모친 말에 고승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사람? 당신의 천금 같은 딸이 언제 사람의 목숨을 대수롭게 여겼어요? 네?”“...”안나의 모친은 그 말을 듣고 묘한 눈빛을 띠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당신의 천금 같은 딸이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온 두 친구를 단숨에 불태워 죽였어요. 이렇게 악독한 여자를 감옥에 보내지 않은 것만도 큰 은혜를 베푼 거라고요.”고승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갑고 어두운 시선으로 안나의 모친을 바라보았다.“이 여자는 가끔 내 한계를 시험하는 것처럼 나한테 도전하는 짓을 하죠.”“...”안나의 모친은 고승겸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그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 안나의 모친은 오금이 저리는 것 같았다.이번 화재가 안나의 모친이 안나에게 준 아이디어라는 사실을 여기에 있는 사
”내 아내한테 가까이 오지 마세요.”기모진은 아주 차가운 어조로 경고했다.안나의 모친은 갑자기 앞을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더 소만리에게 다가서지 못했다.기모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아우라는 눈빛만으로 안나의 모친을 덜덜 떨게 만들었다.고승겸의 눈빛도 충분히 무서웠지만 지금 안나의 모친은 기모진의 살기 가득한 눈빛이 더 무서웠다.그러나 이미 이 지경까지 왔으니 안나의 모친도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여기서 물러선다면 그건 안나를 방화범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소만리, 왜 내 딸이 불을 질렀다고 막말을 하고 그래?”“함부로 말하지 마세요.”기모진은 냉담한 목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당신한테 귀띔해 주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마세요. 난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보다 내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을 더 곤혹스럽게 위기로 몰아넣거든요.”안나의 모친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벌벌 떨렸다.“난, 난 그렇든 말든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소만리란 여자가 왜 내 딸을 방화범으로 몰면서 모욕을 주고 있는지 묻고 싶어!”소만리는 설명하기도 귀찮고 성가셨다.그녀는 안나의 모친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는 고승겸에게 눈길을 돌렸다.“난 당신한테 설명할 게 없어요.”“뭐라고? 아니, 이 여자가! 내 딸을 방화범으로 지목한 건 너잖아. 너...”“말하고 싶은 게 있고 듣고 싶은 게 있다면 경찰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제가 이미 경찰에 신고했으니 경찰이 곧 도착할 거예요.”소만리는 안나 모친의 말을 단호히 차단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눈을 치켜들었다.“당신 딸이 어떤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지 당신은 잘 알고 있죠. 내가 충분한 확신이 없었다면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을 거예요.”“...”안나의 모친은 소만리의 말투와 눈빛에 겁을 먹었다.안나의 모친은 이전에는 소만리가 이런 기세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소만리에게서 그 아우라를 목격하고 말았다“당신의 천금 같은 딸이 내 소중
자세히 보지 않았더라면 안나의 모친은 눈앞의 이 더러운 여자를 자신의 딸이라고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소만리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이 여자를 본 후 고승겸이라는 남자는 정말 하고자 하면 모든 걸 다 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안나는 당황하며 그녀의 엄마 발밑으로 기어가 모친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엄마, 나 얼른 집에 데려다줘. 나 집에 갈 거야! 난 더 이상 자작 부인이 되고 싶지 않아.”안나는 말을 더듬으며 자신의 엄마에게 매달렸고 조심스럽게 곁눈으로 고승겸을 바라보았다.그의 어두운 두 눈동자를 보자마자 안나는 다시 한번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벌 떨었다.안나의 모친은 잠시 정신이 멍한 채 서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구부려 안나를 부축했다.안나의 모친은 헝클어진 안나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며칠 동안이나 씻지 못한 안나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안나, 너 어떻게...”안나의 모친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고승겸을 노려보았다.“자네, 어떻게 안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안나는 자네 아내야.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넌 안나를 감싸줘야 해.”“아내? 난 저 여자를 아내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고승겸은 시큰둥하게 쏘아붙였다.“내 눈에는 기껏해야 혼인을 맺는데 쓰이는 도구로밖에 안 보여요.”“자네 정말...”안나의 모친은 고승겸의 입에서 그렇게 직설적인 말이 나올 줄 몰랐다.안나의 모친이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안나는 모친의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집에 데려다줘!”“그래, 엄마가 널 집으로 데려다줄게! 누가 감히 내 딸을 괴롭혀!”안나의 모친은 기세등등하게 말하고는 안나를 부축하고 일어서서 가려고 했다.고승겸은 차갑고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냉소를 날리며 말했다.“한 손으로 두 생명을 죽인 방화범이 감히 어디 가려고?”앞으로 내디디던 안나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비록 고승겸의 말이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시치미를 뚝 떼고 인정하지 않았다.그때 소만
소만리는 당황한 안나를 보며 잠자코 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고 씨 집안 작은 사모님, 눈을 크게 뜨고 봐 봐. 이거 당신 물건이야?”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소만리가 손에 들고 것을 쳐다보았다.안나는 소만리가 손에 들고 있는 목걸이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자신의 텅 빈 목을 만졌다.“방금 당신의 반응이 말해줬어. 이거 당신 목걸이지? 맞지?”“...소만리, 너 내 목걸이 훔쳤어?”안나는 되물었다.하지만 소만리는 침착했고 여전히 발버둥치며 변명하는 안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안나에게 다가갔다.“이 목걸이는 내가 훔친 게 아니라 주운 거야. 화재가 발생한 다음날 화재 현장에서 주운 거라고.”“...”안나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녀는 이 목걸이을 언제 잃어버렸는지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그런데 이 목걸이가 지금 소만리의 손에 들어 있었고 소만리는 화재 현장에서 주웠다고 했다.경찰은 소만리가 들고 있던 목걸이를 보고 안나에게 물었다.“이 목걸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이, 이건 내 목걸이가 아니에요!”안나는 아예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소만리는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아니라고 하면 정말 아닌 게 되는 줄 알아? 법의학자는 목걸이에서 섬유조직과 지문을 채취할 수 있어. 검사만 하면 이전에 누가 착용했는지 금방 알 수 있어.”“...”안나는 아니라고 부정하면 혐의를 벗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소만리는 법의학자까지 들먹였다.“어때? 한번 해 볼까?”소만리는 눈썹을 가느다랗게 뜨고 말했다.안나는 소만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소만리, 왜 자꾸 날 괴롭히는 거야! 내가 지난번 당신과 고승겸의 혼사를 망쳤기 때문이야?”소만리는 안나의 말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당신은 사람을 죽였어. 그래 놓고 지금 여기서 나한테 묻는다는 소리가 날 왜 이렇게 괴롭히냐고? 허. 네 질문이
안나의 모친은 안나가 자신의 행동을 폭로할 줄은 몰랐다!안나의 모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에서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소리치는 안나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이건 전부 엄마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잖아! 남사택을 불태워 죽게 하면 남연풍은 영원히 낫지 못할 것이라고! 아마도 화병으로 죽을지도 모르니 그러면 이 화재로 두 명의 목숨을 한 번에 처리하게 되는 거라고!”“...”안나는 화가 나서 모든 내막을 다 폭로해 버렸다.“뭐? 당신이 시켰어? 당신 모녀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여지경은 안나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안나의 모친도 순식간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경찰이 자신도 체포해 갈까 봐 걱정되었다.그렇지만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은 고승겸이었다.고승겸이 자신을 혹독하게 괴롭힐까 봐 그것이 더욱 걱정되었다.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 고승겸이 경찰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낼 리 없었다.“여사님도 저희와 함께 좀 가셔야겠습니다.”경찰은 굳은 표정으로 수갑을 꺼내 안나의 모친의 양손에 수갑을 채웠다.“아니, 경찰관님, 저는 이 일과 상관없어요. 제 딸이 화가 나서 그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예요.”안나의 모친은 조금 전 궤변을 늘어놓았던 안나처럼 손짓 발짓하며 필사적으로 경찰에게 해명하려고 했다.“해명하고 싶은 게 있으면 경찰서에 가서 하세요.”경찰은 안나의 모친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두 모녀는 밖으로 끌려 나왔다.안나의 모친은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울화가 치밀고 답답한 적이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분통 터지는 마음을 담아 안나를 향해 마구 퍼부었다.“괜히 너 같은 멍청이를 낳아가지고! 이 애미는 널 도와주려고 그런 거라고! 잘 했다, 잘 했어! 어떻게 물귀신처럼 날 물고 늘어질 수가 있어!”“너 어떻게 그렇게 미련하니? 그러니까 고승겸이 널 무시하는 거잖아. 아무 생각도 머리도 없는 바보 멍청이 같으니라구! 설령 유죄가 되더라도 난 기껏해야 너
기모진은 재빨리 소만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의 품으로 그녀를 끌어당겼고 긴 다리를 이용해 사정없이 안나의 배를 걷어찼다.“아!”외마디 비명과 함께 안나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고 바닥에 입을 찍었는지 그녀의 입가에서 피가 번졌다.“소만리!”안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네가 감히 날 갖고 놀아?”“널 갖고 놀았다고? 난 네가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 내 속임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의 반은 네가 멍청했기 때문이고 반은 네가 죄를 저지른 진짜 범인이었기 때문이야. 네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결말은 없었을 거야.”“...”안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피로 범벅이 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그녀의 눈에는 표독스러운 빛으로 가득했다. 그때 그 바닷물 속에 소만리를 익사시키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소만리, 이 나쁜 년!”“나쁜 년!”“날 이렇게 무너뜨렸다고 좋아하지 마. 내 반드시 널 저주할 테니까! 절대 넌 제 명에 못 죽을 거야!”“입 다물어! 저주가 효과가 있었다면 너처럼 악독한 여자는 천 번, 만 번 죽었어야 해!”기모진은 더 이상 안나의 말을 들을 수가 없어서 안나에게 일갈을 하고 소만리를 보호했다.“넌 이번에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죄를 저질렀으니 누구의 저주도 필요 없어. 넌 법의 심판을 받을 거야.”“...”기모진에게 이렇게 호된 말을 듣자 안나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경찰도 안나를 얼른 일으켜 세우고 그녀와 그녀의 엄마를 경찰차에 태웠다.2층 계단에서 휠체어를 타고 아래층에서 벌어지는 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남연풍은 한눈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구부리며 웃더니 어느새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서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남연풍이 울자 옆에 있던 시중이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었다.“아가씨, 괜찮으세요? 왜 울어요?”남연풍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세상에 업보가 있다고 믿어요?”“그...”시중은 뭐라고
고승겸은 기모진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2층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뭔가 무거운 물건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그는 눈을 치켜뜨고 들여다보다가 휠체어를 탄 남연풍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연풍!”고승겸이 깜짝 놀라며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남연풍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여지경도 황급히 달려갔다.소만리와 기모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남연풍이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그녀를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는 않았다.시중은 2층에 서서 남연풍이 1층까지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시중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입을 벌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고승겸이 남연풍을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남연풍이 휠체어를 탄 채 굴러떨어졌으니 자신에게 불똥이 떨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남연풍은 1층까지 뒹굴며 균형을 잃고 휠체어에서 떨어져 온몸에 아픔이 엄습해 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승겸은 계단 입구로 달려가 몸을 웅크리고 남연풍을 번쩍 안아 올렸다.남연풍은 2층에서 굴러떨어져 여기저기 살갗이 까지고 다쳤지만 가장 심하게 다친 것은 계단의 금속 난간에 부딪힌 머리였다.고승겸은 남연풍을 안고 병원으로 가려고 했다.남연풍이 고틍스러워하며 눈을 반쯤 떴고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애타는 고승겸을 보자 그녀의 눈에 영롱한 이슬이 맺혀 있다가 눈가로 흘러내렸다.“병원에 갈 필요 없어.”남연풍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고승겸은 걸음을 재촉하다가 뭔가 끈적끈적한 액체가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그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여지경이 갑자기 놀라서 소리쳤다.“남연풍의 몸에서 피, 피가 나! 얼른 병원에 데리고 가야 돼! 빨리!”그 말을 듣자 고승겸의 심장박동이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고 숨이 막힐 듯 가슴이 조여왔다.그는 잠시 망설일 틈도 없이 바로 걸음을 옮겼다.남연풍은 자신을 향한 고승겸의 애타는 마음
”미안해. 나의 속죄가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소만리와 기모진은 남연풍이 잘못을 뉘우치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적잖은 감명을 받았다.“당신 말하지 마세요. 만약 남사택이 이 일을 보고 있다면 절대 당신이 이러길 바라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서 빨리 병원으로 가요. 가서 치료해야 해요.”소만리가 남연풍을 말렸지만 남연풍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지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동생도 보고 싶고. 나를 오랫동안 돌봐 준 그 여자한테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남연풍이 눈을 지그시 감자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고승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먹였다.“남연풍, 당신은 지금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초요는 생각하면서 난! 난 어쩌라고? 그리고 우리 아이, 생각해 본 적 있어?”“허.”남연풍이 눈을 감은 채 쓴웃음을 지었다.“이 아이는 처음부터 세상에 태어날 운명이 아니라고 말했잖아.”“...”남연풍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고승겸의 가슴을 다시 한번 관통했고 옆에 있던 여지경은 남연풍의 말에 깜짝 놀라며 초조한 듯 말했다.“승겸아, 연풍이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하지 말고 당장 병원으로 가! 어서 빨리 병원에 가. 아이는 아직 지킬 수 있어!”남연풍은 그 말에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지킬 수 있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아이는 결국 세상에 나오지 못할 운명이니까...”남연풍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고승겸은 들을 수 있었다.그녀의 말이 고승겸의 머릿속에서 자꾸 메아리처럼 맴돌았다.병원으로 가는 길에 고승겸은 어떻게 핸들을 잡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남연풍은 일부러 2층에서 아래층으로 굴러떨어졌다. 일부러 그의 앞에서 죽으려고 했다.그녀가 어떻게 이렇게 독할 수가 있을까?아이는 안중에도 없이.얼마나 절망적이었길래 이런 행동까지 했을까?수술실 문밖에서 고승겸이 안절부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