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겸이 갑자기 나타나 이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돌아섰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눈빛을 교환하고는 고승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고승겸은 어젯밤 불이 난 건물 앞으로 걸어갔다.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남사택과 초요에게 이곳에서 머물라고 지시했고 어디에도 가지 말라고 종용했었다.고승겸도 어젯밤에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분명 누군가 고의로 일으킨 사고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강하게 박혔다.소만리는 눈앞의 폐허가 된 집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큰불이 났던 부모님의 집을 떠올렸다.그때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기모진이 그 불을 질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그가 지른 화재로 부모님이 불바다에 묻혔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다행히 모든 진실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남사택과 초요가 어젯밤 이곳에서 불바다에 묻혔다고 생각하니 소만리의 마음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녀는 남사택과 초요의 사고도 뭔가 반전이 일어나 그녀의 부모님처럼 무사하길 바라고 또 바랐다.“고승겸, 여기에 남사택과 초요를 가두어 놓고 못 나오게 한 거야? 그런 거야?”기모진의 말에 생각 저 편에 가 있던 소만리가 정신을 차렸다.소만리는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는 고승겸을 의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러나 고승겸은 기모진과 소만리의 의심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고도 여전히 무신경한 듯 말했다.“그들을 이곳에 있게 한 건 그들이 나에게 유용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야. 고로 난 그들을 불에 태워 죽이고 내 집을 더럽힐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고승겸, 당신 정말 뻔뻔해. 그렇게 말하면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 양 발뺌하겠다는 거야?”소만리의 표정이 굳어졌다.“멀쩡하게 살아 있던 두 사람이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 어떻게 그런 가벼운 말 몇 마디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거야?”“책임? 나한테 무슨 책임이 있는데?”고승겸이 되물었다.“그들이 여기서 날
소만리는 눈을 지그시 치켜떴다.“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안타까워. 당신네 같은 부모가 있다는 것은 아이에겐 비극이야.”고승겸의 얼굴에 나타난 오만한 웃음이 소만리의 말에 일순 말끔히 사라졌다.“소만리, 남연풍이 유일하게 하나 있는 해독제를 당신에게 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그래. 난 여기 서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고 나한테 독소를 주입하고 또 해독제도 준 여자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 텐데 말이야, 그렇지?”“...”고승겸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지만 그는 소만리의 말에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한순간 그의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남연풍의 현재 상태는 비록 예상 밖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그러나 몸속의 독소가 제거되지 않으면 뱃속의 아이가 온전히 태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심란해졌다.이때 기모진이 입을 열어 심란해하는 고승겸의 마음을 더 헤집어 놓았다.“고승겸, 당신이 경도에서 뭘 하고 싶은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잘 들어. 난 당신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 일찌감치 단념하고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서 자작 공자로 사는 것이 좋을 거야.”기모진의 말이 떨어지자 고승겸의 미간에는 더 깊은 골이 패었지만 잠시 후 고승겸은 미간을 펴고 웃음이 나서 참지 못하겠다는 듯 오만하게 입꼬리를 잡아당겼다.“내가 원하는 걸 손에 얻는 데에 난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어.”고승겸은 말을 마치자마자 홀연히 돌아섰다.기모진은 멀끔한 고승겸의 뒷모습을 탐탁지 않게 보다가 유유히 입을 열었다.“고승겸, 원하는 것을 항상 얻을 수는 없어. 두고 봐.”기모진의 말에 거침없던 고승겸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그러나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한참을 걷던 고승겸은 핸드폰을 꺼내 통화기록에서 강자풍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러나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고승겸은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운
그저 스쳐가는 모습이었지만 소만리는 의식적으로 이 뒷모습이 상당히 익숙하다고 느꼈다.그녀는 눈물을 닦아주려는 기모진의 손을 무시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소만리.”기모진은 소만리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여겨 바로 바싹 뒤따라갔다.밖으로 나가 보니 기모진은 멀지 않은 곳에서 어떤 여자가 급히 걸어가는 모습을 한눈에 포착했다.그 뒷모습이 왠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낯설지가 않았다.그때 갑자기 기모진의 머릿속에 한 여자의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안나?”“안나야.”소만리는 뒷모습을 확인하며 걸음을 재촉해 힘차게 걸어가는 안나를 뒤쫓았다.“안나!”소만리는 안나에게 얼른 다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안나는 걸음을 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소만리를 쳐다보며 눈을 희번덕거렸다.“소만리, 내 앞길 가로막지 마. 내가 지금 어떤 신분인지 알아?”안나가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며 소만리는 예쁜 눈동자를 차갑게 들어 올렸다.“당신 신분은 익히 잘 알고 있지. 바로 고승겸의 명목상 부인이잖아.”“...”안나의 도도한 얼굴에 불만스러운 빛이 가득했다.자신이 고승겸의 명목상 부인이라는 사실을 소만리조차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소만리는 안나가 마음속으로 뭔가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았다.“고승겸은 당신과 결혼했지만 지금 다른 여자한테 온 신경을 다 뺏기고 있어. 게다가 다른 여자가 고승겸의 아이까지 가졌다는데 어느 누가 당신을 고승겸의 부인으로 인정할까?”“너...”안나의 분노가 폭발했다.“소만리, 그게 무슨 뜻이야? 너 일부러 날 비웃어서 어쩌겠다는 거야!”“당신을 비웃을 겨를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소만리는 안나에게 말하고 뒤쪽에 불에 다 타버린 집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단지 당신이 방금 왜 몰래 문 앞에서 안을 엿보고 있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야.”“...”안나는 어리둥절해했다.배포가 두둑하지 못한 도둑의
소만리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자 안나는 자신의 손을 소만리의 손아귀에서 힘껏 거둬들였다.“소만리, 당신 다시는 날 귀찮게 하지 마! 자꾸 이러면 보디가드한테 당신 쫓아내라고 할 거야!”안나는 짜증스럽다는 듯 소만리에게 경고한 뒤 얼른 돌아섰다.소만리가 다시 쫓아올까 봐 안나는 일부러 걸음을 재촉했다.소만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며시 찌푸렸다.“불이 난 일이 안나는 너무 기쁜가 봐. 아주 기뻐하는 것 같아.”기모진은 방금 안나가 한 말을 듣고 이미 단서를 알아차렸다.“소만리, 우리 먼저 남사택과 초요를 만나러 가 보자.”기모진은 소만리의 손을 잡았고 이 화재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방향을 잡은 것 같았다.기모진은 자신의 인맥을 통해 남사택과 초요가 현재 안치되어 있는 곳을 알아내어 그곳으로 향했다.그곳은 병원에서 가장 추운 곳이자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다.문이 열리자 서늘한 기운이 밀려왔고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과 같은 계절에는 더욱더 뼛속까지 추위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그러나 기모진과 소만리는 그런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그들은 흰 천으로 덮인 두 개의 침대 곁으로 갔다.이렇게 보기만 해도 두 사람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으며 먹먹해졌다.소만리는 흰 천을 벗기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기모진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소만리, 그냥 보지 않는 게 낫겠어.”기모진은 소만리가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보기 두려워할까 봐 걱정이 되어 그녀의 손을 막았다.그러나 소만리는 전혀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담담했다.“초요와 남사택은 우리한테 좋은 친구였어. 그들은 생전에 모두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어. 비록 그들의 모습은 다시 돌아올 수 없겠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 그들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을 거야.”소만리의 대답을 들은 기모진은 문득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느꼈다.그는 소만리의 손을 막고
안나는 원래 그냥 돌아서서 가려고 했는데 소만리가 이렇게 말하며 그녀의 화를 돋우었다.안나는 화가 나서 돌아섰다.소만리가 소파에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안나는 당당한 안주인 행세를 하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고 씨 집안이 손님들을 어떻게 응대하든 당신이 일깨워 줄 필요는 없어. 오히려 당신이야말로 다른 사람 집에 방문했을 때 보여야 할 예의가 전혀 없는 같은데.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바로 소파에 앉는 거, 안주인 동의라도 얻었어?”“안주인?”소만리는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여기는 안주인이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안주인이라고 칭하며 잘난 척하는 불쌍한 여자는 보여도.”“...”비웃음을 가득 짓던 안나의 얼굴에 순간 웃음기가 싹 가셨고 그녀는 화가 나서 소만리를 노려보았다.“소만리, 당신 나 짜증 나게 하려고 왔어?”소만리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이 집에서 가장 존재감 없는 사람이 당신이야. 그런데 내가 당신한테 시간을 낭비할 가치가 뭐가 있겠어?”“너...”안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이것은 분명히 소만리가 일부러 그녀에게 도발하는 것이었다!“소만리, 너...”“소만리, 또 왔네?”여지경이 갑자기 안나의 뒤에서 나타났다.여지경은 소만리의 기억 속의 이미지처럼 여전히 고귀한 용모와 당당하고 단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소만리는 소파에서 일어섰다.예전에 고승겸의 추적을 피해 산비아를 떠나려고 할 때 여지경이 그녀에게 주었던 도움을 잊지 않았다.“여사님, 또 뵙네요.”소만리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여지경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어제도 만났는데 오늘 또 왔네. 불행하게 불바다에 묻힌 그 두 분 때문이야?”여지경은 소만리에게 앉으라고 말하며 시중에게는 과자와 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옆에 서 있는 안나는 완전히 무시했다.안나는 더욱더 기분이 언짢았다.이건 정말 소만리의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그녀는 이
”내 말 오해하지 마.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 나도 여사님과 같은 생각일 뿐이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서는 안 되지. 그렇게 말하면 당신 남편 고승겸한테 폐만 끼칠 뿐이야.”소만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홍차 잔을 들고 우아하게 한 모금 마셨다.“그리고 이 일이 발생하고 난 후 누가 이익을 얻을까 하는 관점에서 보면, 남사택과 초요의 죽음이 고승겸한테는 조금도 득이 되지 않고 오히려 큰 손해야. 그런데 고승겸이 불을 질렀다고? 그건 제 발등 찍는 일 아니야?”“...”안나는 소만리가 그런 관점에서 분석할 줄은 몰랐다.안나는 어제 잠시 자신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되뇌이며 소만리가 그때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자신을 의심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여지경은 소만리의 말에 매우 만족한 것만은 분명했다.“소만리 말이 옳아. 승겸이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에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할 필요가 뭐 있어? 그러니 이것은 단순 사고일 뿐이야.”“아니요, 여사님. 그렇지 않아요. 이 일에서 고승겸을 배제할 가능성은 있지만 수상한 사람이 있긴 해요.”소만리는 도둑이 제 발 저린 안나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안나는 소만리의 눈빛이 분명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여지경도 자신에게 시선을 모으자 먼저 선수를 쳐야겠다고 생각했다.“소만리, 날 왜 쳐다봐? 설마 날 의심하고 싶은 거야? 난 남사택과 초요를 전혀 모르는데 내가 왜 그 사람들을 공격해야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안나는 눈빛을 가다듬고 사나운 면모를 드러내며 소만리에게 경고하듯 말했다.여지경은 소만리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긴 하지만 지금은 안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소만리. 난 이 일이 사고라고 생각해. 안나는 남사택과 초요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야. 안나가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할 동기가 없어.”“아니요. 안나는 충분한 동기가 있어요.”순간 소만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안나의
고승겸은 안나의 말에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그러나 그의 웃는 얼굴에는 섬뜩한 기운이 가득 서려 있었다.“믿지. 당연히 믿지.”“정말?”안나는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믿는다는 고승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고승겸의 눈빛이 바로 어두워졌다.“나 자신을 믿지.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안나는 자신의 심장박동이 점점 불안하게 뛰는 것을 느꼈고 고승겸의 눈빛에 점점 포악한 살기가 드리워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남연풍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한 번 마음에 두면 오래가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이미 소만리의 말을 믿고 있었다.안나는 고승겸이 자신에게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을 보고 초조하고 불안해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만약 그녀가 여기서 인정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인정하지 않으려면 또 어떤 핑계를 찾아야 할까.안나가 마음속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생각하고 있던 찰나 고승겸은 이미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사각지대로 그녀를 몰아넣었다.“승겸, 승겸. 내 말 좀 들어봐. 정말 소만리가 말한 그런 게 아니야. 난 정말 불을 지르지 않았어. 남사택과 초요의 죽음은 정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승겸. 난...”안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고승겸은 갑자기 손을 내밀어 안나의 목을 졸랐다.안나는 두 눈을 번쩍 뜨며 고통스럽게 입을 벌려 기침을 하려 했지만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너 정말 대단해.”고승겸은 비꼬며 차가운 눈빛으로 담담하게 말했다.“남연풍의 상태가 더 나아지지 않으면 내가 너 같은 여자한테 관심을 둘 것 같았어? 네가 나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넌 내 이름도 부를 자격이 없어.”“...”안나를 향해 혐오스럽게 내뱉는 고승겸의 한마디 한마디에 안나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그러나 고승겸은 안나의 눈물과 고통 따위는 안
안나는 아파서 외마디 비명을 지른 후 땅바닥에 웅크리고 심하게 기침을 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고승겸이 다가와 안나의 손가락을 꾹 밟았다.안나는 눈가가 뻑뻑해지고 뼈가 떨릴 정도로 아팠다.하지만 고승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을 구부려 어두운 기운을 꾹꾹 눌러 가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안나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당겼다.“다리가 망가지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 불에 산 채로 타죽은 기분이 어떤지 알아?”“...콜록, 승겸. 아니야, 난 정말...”안나는 놀라서 고승겸을 바라보았다.“난 정말 불을 지르지 않았어. 남사택과 초요의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소만리, 저 여자가 날 모욕하고 있어. 난 정말 아니라구...”“헛.”고승겸은 차갑게 웃으며 눈빛이 더욱 음침해졌다.“들어와.”고승겸은 경호원들을 불렀고 안나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혐오스럽게 놓으며 손수건을 꺼내 세상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은 양 손을 닦았다.“이 여자를 뒤뜰에 있는 개집에 버려. 혹시 몸부림치거든 때려 줘.”“...”안나의 상기된 얼굴은 일순 공포로 창백해졌다.고승겸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아니, 아니 싫어...”경호원들이 손을 쓰려 하자 안나는 목이 쉰 채로 울부짖으며 여지경 앞으로 기어갔다.“어머니, 승겸을 좀 말려 주세요. 전 어쨌든 여기 고 씨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해 들어온 며느리잖아요. 이름뿐이지만 그래도 자작 부인이라고요. 승겸이 저를 이렇게 대하면 고 씨 집안 명성에도 좋지 않잖아요.”“그리고 만약 내 친정 식구들이 알게 된다면 분명 고 씨 집안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안나는 결국 친정을 들먹거렸다.하지만 안나는 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안나의 말을 듣자마자 여지경의 안색이 순식간에 불같이 변했다.“안나, 소만리의 말이 맞아. 넌 정말 공감 능력도 없고 감성지수도 지능도 좀 낮은 것 같아.”여지경은 싸늘한 눈빛으로 안나를 바라보다가 돌아서며 경호원에게 말했다.“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