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풍, 당신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허, 허허...”남연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인과응보.”그녀는 힘겹게 이 말을 내뱉었다.“그게 무슨 헛소리야?”“네 번째 단계의 독소가 발작을 시작한 거야.”남연풍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고승겸은 순간 어리둥절해하다가 남연풍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해독제는? 내가 아까 실험실에 가서 이미 완성된 해독제를 봤어. 당신 주사 안 놨어?”고승겸은 당황스러워하며 횡설수설했다.지친 두 눈을 치켜들고 남연풍은 흐릿해진 시선으로 타들어가는 듯한 고승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완성했어. 주사도 놓았어. 나한테 놓은 건 아니지만.”남연풍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난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그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했어.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꽤 괜찮다는 걸 처음 알았어. 아니, 그렇다고 좋은 사람이 된 건 아니야. 난 단지 이전에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가능한 한 만회하고 싶었을 뿐이야.”남연풍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여 휠체어를 조종했다.기모진은 남연풍의 말을 듣고 순간 무언가를 알아차렸다.알고 보니 남연풍이 방금 자신에게 준 해독제가 유일한 것이었다.그녀가 방금 그렇게 다급하게 소만리에게 주사를 놓아주라고 한 것도 다름 아닌 고승겸이 와서 방해할까 봐 서두르고 걱정한 것이었다.고승겸도 뭔가 어렴풋이 깨달은 것 같았다.“남연풍, 무슨 소리야? AXT69 해독제를 기모진에게 줬다는 말이야?”“소만리가 무슨 잘못이 있어?”남연풍은 냉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소만리는 원래 그런 고통을 겪지 말았어야 했어. 난 이제야 정신을 차렸어. 고승겸, 그러니 당신도 더 늦기 전에 정신 차려.”“뭐라고...”고승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남연풍은 똑같은 태도로 일관했다.“고승겸,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할 때는 정당한 수단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당신도
이 말을 듣고 기모진은 디시 한 번 깜짝 놀랐다.고승겸은 더욱 멍한 눈을 하였고 남연풍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에 힘이 풀렸다.“남연풍,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뜻이냐구?”남연풍은 붉어진 두 눈을 가볍게 치켜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난 처음부터 이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어.”“...”“독소가 태아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당신한테서 해독제에 쓰이는 성분을 얻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어.”“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고승겸은 지금 남연풍이 하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끝냈으니 난 아무 미련 없어.”남연풍의 눈길이 점점 아득하게 어두워졌다.“사택이와 초요는 나 때문에 지금 그렇게 됐어. 이 세상에는 나를 정말 아끼고 배려해 줄 사람이 없는 거야. 해독제도 필요 없어. 난 그냥 조용히 나의 마지막 길을 가고 싶을 뿐이야.”남연풍은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말하고는 휠체어의 전진 스위치를 눌렀다.빗줄기는 잦아들지 않았고 휠체어를 탄 남연풍의 모습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고승겸은 바로 그녀를 쫓아갔고 기모진도 그들을 바짝 뒤쫓았다.“남연풍, 방금 뭐라고 했어? 남사택과 초요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떻게 된 거냐구! 얼른 말해!”기모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고승겸이 남연풍의 앞을 가로막았다.거센 빗줄기가 고승겸의 얼굴과 온몸을 적시며 그의 모습을 더욱더 차갑고 어둡게 만들었다.“기모진,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기모진은 지금 고승겸의 존재 따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고 오로지 남사택과 초요의 상황만 알고 싶을 뿐이었다.기모진이 계속 물어보려고 따라오자 고승겸이 손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기모진이 능력이나 힘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누군가가 그를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그때 갑자기 남연풍이 괴로운 듯 신음 소리를 내었다.고승겸이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남연풍이 괴로운 얼굴로 가슴을 힘껏 움켜쥐었다.
한편 고승겸은 차를 몰고 자신의 경도 집으로 돌아왔다.그는 비를 맞으며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이미 잠든 남연풍을 안고 거실로 들어왔다.거실에 있던 여지경과 안나는 고승겸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남연풍을 안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연풍이가 왜 이래?”여지경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즉시 시중에게 지시했다.“어서 닥터 육을 불러.”시중은 황급히 대답하고는 돌아섰다.안나는 옆에 서서 고승겸이 남연풍을 안고 황급히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승겸의 뒤를 따라 여지경이 바싹 그들을 따라붙었다.남연풍을 걱정하는 그들의 모습에 안나는 가슴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내 얼굴에 미소가 은은하게 번졌다.그녀는 아까 남연풍이 비를 맞으며 달려가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온몸이 흠뻑 젖은 걸 보니 아마 오랫동안 빗속에 있었던 것 같았다.지금 남사택과 초요의 죽음까지 더해져 남연풍은 뱃속의 아이를 지킬 여력이 없을 거라고 안나는 생각했다.고승겸은 남연풍을 방으로 데리고 오자마자 깨끗한 옷을 꺼내 직접 갈아입혔다.여지경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렸다.“연풍이가 비를 맞았다고? 얼마나? 자기가 임산부라는 걸 잊은 거야?”임산부.고승겸은 이 말이 귀에 아프게 박혔다. 아까 남연풍이 한 말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혔다.“고승겸, 처음부터 뱃속의 이 아이는 세상에 나올 운명이 아니었어.”이 말이 고승겸의 귓가에 쟁쟁거렸고 그의 등골을 점점 서늘하게 만들었다.이윽고 닥터 육이 도착했다.그는 남연풍에게 가장 기초적인 검사를 했고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뱃속의 아이였다.그러자 고승겸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남연풍의 몸이 왜 이런지 다 알아야겠어요!”닥터 육은 고승겸의 뜻을 헤아리고 남연풍을 다시 검사해 보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사실 고승겸은 닥터 육이 아무리 남연풍을 검사해 보아도 원인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남연풍의 몸에 독
고승겸은 시중의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 남연풍의 침실로 서둘러 올라갔다.침실과의 거리가 짧아질수록 고승겸의 심장박동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애초에 AXT69를 만든 이유는 특별히 소만리를 겨냥하기 위해서였다.이 독소 안에는 아주 무서운 성분이 들어있는데 이 성분이 사람 몸에 들어와서 일단 작용하기 시작하면 천천히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결국 그것은 사람의 정신적인 부분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하고 환각을 일으켜 사람을 있는 대로 괴롭히고 끔찍한 기억 속에서 살아가게 만든다.이런 생각을 하자 고승겸의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그의 마음이 너무나 초조했고 전에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도 느껴졌다.아마도 그는 곧 이런 남연풍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그렇다면 그 끔찍한 그녀의 기억속에 그의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아마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에 그녀를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남연풍의 방 앞에 다다르자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고승겸의 생각이 뚝 멈췄다.그는 왠지 모르게 무형의 압박이 몰려와 그의 온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방 안에서는 괴로워하는 남연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다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왜 기운이 하나도 없는 거야? 왜!”고승겸은 이 말을 듣고 눈썹을 찡그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그가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여지경은 눈썹을 찌푸리며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연풍이가 좀 이상해. 최근에 발생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 같아.”이 말을 듣고 고승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역시 기억을 잃었다.그녀는 독소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와 죽도록 고통스러운 시간을 마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고승겸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그는 방 안의 모든 사람을 내보내고 남연풍과 단둘이 얘기하고 싶었다.그러나 그가 남연풍의 시선을 마주치자 그녀의 눈빛은 일순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녀와 이렇게 앉아 있으니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비를 맞은 탓인지 남연풍은 감기몸살 증세를 보였다.그녀는 임신 중이라 감기약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그는 의사를 불러들여 갖은 치료 방법을 써 보았다.밤이 늦어서야 겨우 남연풍의 증세가 안정되기 시작했다.한밤중에 남연풍은 잠꼬대를 하며 고승겸의 이름을 불렀다.고승겸은 줄곧 그녀의 침대 곁을 지키며 한 발자국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남연풍의 휴식을 방해할까 봐 고승겸은 조그마한 스탠드를 켰다.남연풍의 잠든 얼굴에 부드러운 온기가 돌자 고승겸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상처 난 그녀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그때 당신이 날 떠나지 않고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왜 내가 당신을 미워하게 만든 거야?”“남연풍, 왜 당신과 나 사이를 이렇게 힘들게 했어?”고승겸은 남연풍이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 중얼거렸다....마찬가지로 기모진도 밤새 소만리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그는 남연풍이 늦어도 8시간 안에는 소만리가 깨어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기모진은 그 시간 동안 해독제가 혹시라도 소만리에게 다른 부작용을 일으킬까 봐 옆에서 깨어 있었다.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소만리는 슬슬 깨어날 기미를 보였다.기모진은 순간 마음이 뜨거워졌다.“소만리.”그는 소만리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소만리의 이름을 불렀다.“소만리, 당신 깨어났어? 내 말 들려? 소만리?”소만리는 눈꺼풀을 움직이다가 한참 만에 천천히 눈을 겨우 떴다.창가에서 새어 나온 새벽녘 희미한 빛이 눈을 부시게 한 탓인지 그녀는 눈을 찡그렸다.“소만리?”기모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갔다.“소만리, 일어났어?”기모진은 지친 듯한 소만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모진.”소만리가 힘없
기모진은 소만리가 기여온을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그녀의 마음을 다정하게 달래주었다.“여온이는 강자풍한테 잠시 머무는 것뿐이야, 소만리. 걱정하지 마. 강자풍이 여온이한테 나쁜 짓을 하진 않을 거야.”그러나 소만리는 여전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나쁜 짓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여온이는 지금 병을 앓고 있어. 제때 치료해야 한다고.”“알아, 소만리.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기모진은 인내심을 가지고 소만리를 달래면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소만리, 이거 봐. 어제 날짜로 여온이의 신체검사 보고서야.”기모진이 그렇게 말하자 소만리는 얼른 핸드폰을 들고 눈을 내리깔았다.사진은 분명히 기여온의 신체검사 보고서였다.소만리가 자세히 살펴보니 기여온이 강자풍에게 끌려갔을 때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다.그러나 소만리는 의문이 들었다.“모진, 이게 정말 여온이의 신체검사 보고서야?”기모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소만리, 강자풍을 믿어. 그는 내심 모순된 면도 있지만 아직은 우리가 아는 강자풍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아.”기모진이 확고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긴장되었던 소만리의 마음도 점차 누그러졌다.“여온이 정말 잘 지내는 거 맞지?”소만리가 안심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기모진은 소만리의 두 손을 잡은 뒤 보드라운 미소를 머금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만리, 날 믿어.”“믿지. 당연히 당신을 믿지.”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를 믿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이기를 더욱 믿고 싶었다.소만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계단을 내려갔다가 오랜만에 막내아들을 보자마자 바로 품에 안았다.“엄마.”막내아들이 소만리를 보고 말하며 소만리의 볼에 가볍게 뽀뽀를 했다.소만리의 마음이 갑자기 뭉클해졌다.막내아들을 보니 갑자기 훌쩍 커 버렸을 큰아들이 보고 싶어진 것이었다.그러나 기란군은 이미 학교에 가고 없었다.소만리가 자신
바로 그때 핸드폰으로 최신 뉴스 알람이 떴다.어젯밤 어느 교외 단독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해 남녀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기모진은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이 남녀가 누구인지 기사에서 설명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기모진은 그것이 바로 남사택과 초요라고 느껴졌다.그러나 기모진은 자신의 허튼 생각을 접고 소만리를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기사에 있는 사진 속 집을 단번에 알아봤다.“경도에 있는 고승겸의 집 아니야?”소만리는 사진 속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고승겸의 집에 어젯밤 불이 났다고? 그 때문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죽었어?”왠지 소만리의 심장 박동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기모진이 지금 차를 몰고 가는 방향이 바로 고승겸의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모진, 고승겸한테 가는 거야?”“남연풍을 만나서 초요와 남사택의 행방을 물어봐야겠어.”기모진은 전방을 주시하며 차의 속도를 약간 높였다.소만리는 심장 뛰는 소리가 밖에서 들릴 만큼 쿵쾅거렸다.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기모진의 옆얼굴을 보고 소만리는 다시 한번 기사에 있는 사진을 보았다.그녀는 뉴스 내용을 찬찬히 보았다. 받아들이기 힘든 추측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모진, 설마 뉴스에 난 남녀가 혹시 초요와 남사택일까?”소만리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털어놓았고 그 말이 떨어지자 자신의 손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소만리는 부인했지만 기모진의 침묵은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모진의 차는 고승겸의 집 앞에 멈추었다.차에서 내린 후 소만리는 불에 탄 매캐한 냄새를 맡았다.어젯밤에 폭우가 한바탕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캐한 냄새가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마침 경찰과 화재감식 요원들이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그들은 아마도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서 왔을 것이다.여지경은 그들 바로 옆에 서서 조사에 응하고 있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이 다가오자 경찰이
고승겸이 갑자기 나타나 이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돌아섰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눈빛을 교환하고는 고승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고승겸은 어젯밤 불이 난 건물 앞으로 걸어갔다.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남사택과 초요에게 이곳에서 머물라고 지시했고 어디에도 가지 말라고 종용했었다.고승겸도 어젯밤에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분명 누군가 고의로 일으킨 사고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강하게 박혔다.소만리는 눈앞의 폐허가 된 집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큰불이 났던 부모님의 집을 떠올렸다.그때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기모진이 그 불을 질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그가 지른 화재로 부모님이 불바다에 묻혔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다행히 모든 진실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남사택과 초요가 어젯밤 이곳에서 불바다에 묻혔다고 생각하니 소만리의 마음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녀는 남사택과 초요의 사고도 뭔가 반전이 일어나 그녀의 부모님처럼 무사하길 바라고 또 바랐다.“고승겸, 여기에 남사택과 초요를 가두어 놓고 못 나오게 한 거야? 그런 거야?”기모진의 말에 생각 저 편에 가 있던 소만리가 정신을 차렸다.소만리는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는 고승겸을 의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러나 고승겸은 기모진과 소만리의 의심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고도 여전히 무신경한 듯 말했다.“그들을 이곳에 있게 한 건 그들이 나에게 유용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야. 고로 난 그들을 불에 태워 죽이고 내 집을 더럽힐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고승겸, 당신 정말 뻔뻔해. 그렇게 말하면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 양 발뺌하겠다는 거야?”소만리의 표정이 굳어졌다.“멀쩡하게 살아 있던 두 사람이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 어떻게 그런 가벼운 말 몇 마디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거야?”“책임? 나한테 무슨 책임이 있는데?”고승겸이 되물었다.“그들이 여기서 날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