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소리 작작 좀 해.”남연풍이 안나의 말을 잘랐다.“너 나한테서 떨어져. 내 뱃속의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당신 팔, 다리도 모자라 얼굴이 망가지는 걸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네가 감히 나한테 협박을 해?”안나는 화가 치밀어올라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승겸의 아이를 임신하면 내 자리를 차지할 줄 알았겠지? 흥. 남연풍, 잘 들어. 내가 네 뱃속의 아이를 죽여버리면 돼. 내가 직접 손쓸 필요도 없어! 두고보라구!”안나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남연풍에게 경고하고 돌아서려는데 뒤돌아보니 여지경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안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쩔쩔매며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여지경을 쳐다보았다.“어머니.”여지경은 안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어떻게? 직접 손쓸 필요도 없다면 그럼 누구 손이라도 빌려서 내 손자를 죽이겠다는 거야? 네 엄마의 손?”“...”이 말을 들은 안나는 입술을 깨물었고 가슴은 불안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그러나 여지경이 남연풍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손자라고 부르는 것에 안나는 화가 났다.손자.손자는 무슨 손자?손자라면 당연히 안나 자신이 낳은 아이가 손자여야 한다!“어째서 말이 없니? 응?”“어머니, 전 그냥 질투가 나서 막말을 했어요. 사실 내가 무슨 수로 감히 그런 일을 하겠어요?”안나는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감히 못한다고?”여지경은 매섭게 노려보았다.“남연풍의 얼굴은 네가 직접 칼을 들고 망가뜨린 거 아니었어? 이런 일도 서슴지 않고 하면서 무슨 감히 못한다고 발뺌을 하고 그래?”“제가 안 그랬어요!”안나는 강하게 항변했다.“내가 그런 짓을 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잖아요!”“내가 증명해 보이란 말이야?”고승겸의 서릿발 같은 싸늘한 목소리가 방문 앞에서 들려왔다.안나는 순간 몸서리가 쳐졌다. 고승겸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안나를 노려보았다.“내가 남연풍을 잘 돌봐달라
아기 엄마.남연풍은 이 네 글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고승겸을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남사택을 끌어들이지 마.”남연풍은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고승겸에게 상기시켰다.“남사택은 우리와 같은 부류가 아니니까 건드리지 마.”이 말을 듣고 고승겸은 입꼬리를 찡그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우리? 당신은 여전히 나와 당신을 하나로 생각하는군.”“...”남연풍은 말문이 막혔다. 고승겸이 이런 꼬투리를 잡을 줄 몰랐다.잠시 후 고승겸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는 당신이 항상 내 앞에서 남사택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지금 당신은 동생을 이렇게 신경 쓰고 걱정하고 있으니 당신 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고승겸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남연풍은 일부러 차갑게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내가 이미 말했지만, 이전에는 당신을 이용해 당신한테 덕을 좀 보려고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을 뿐인데....”“어, 그랬구나. 맞아. 남연풍의 연기력은 최고였어. 배우 뺨치게 멋졌어.”고승겸은 남연풍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 경박스러운 말투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래서, 지금도 당신 연기하고 있는 거 맞지?”그의 말투는 냉담했고 눈빛은 일순간 깊어졌다.“당신은 나를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척하고 있잖아.”고승겸은 마음속에 품었던 의문을 털어놓으며 잠시 멍해 있던 남연풍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남연풍은 정신이 멍해졌다. 고승겸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볼 줄은 몰랐다.그는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떠나려고 돌아섰다.그가 문으로 걸어갔을 때 남연풍의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울렸다.“그를 건드리지 마. 이용하지도 말고.”고승겸은 남연풍이 말하는 ‘그' 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그는 얼굴을 옆으로 돌려 남연풍과 눈을 마주쳤다.“당신이 한다면 나도 할 거야.”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홀연히 그 자리를 떠났다.남연풍은 두 손을 천천히 움켜쥐
남연풍은 눈을 들어 안나를 바라보며 물었다.“고승겸이 당신한테 말해 줬어?”안나는 웃으며 말했다.“그가 알려주지 않는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내 말 못 믿겠으면 날 따라와 봐.”말을 마친 안나는 먼저 뒤돌아 마당으로 향했고 슬쩍 뒤돌아보며 남연풍이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안나는 자신의 수법이 통했음에 적잖이 만족스러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남연풍도 안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따지기도 귀찮았다.여기는 고승겸의 집이라 안나가 아무리 대담하다고 해도 감히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남연풍은 생각했다.오히려 남연풍은 집의 규모에 놀랐다.집이 얼마나 큰지 2, 3분 정도 걸어 내려왔는데도 아직 마당에 머물러 있었다.그녀는 고승겸이 경도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 미리 많은 준비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가 기모진에게 접근하도록 계획이 짜여 있었을 때 고승겸은 이미 준비를 다 했던 것이었다.그는 자신의 일생에서 성공만을 허락하고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그래서 남연풍은 남사택도 자신처럼 고승겸이 이용하려는 장기판의 말이 되어 버릴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남연풍이 이런 고민들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 갑자기 안나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바로 여기야. 당신 동생과 초요라는 여자가 이 안에 있어.”남연풍은 휠체어의 전진 스위치를 누르며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네모난 현대풍 작은 집이 단독으로 있었다.평수는 그리 넓지 않았고 고승겸이 평소 차를 마시며 휴식을 즐기던 곳처럼 보였다.남연풍이 별생각 없이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낯익은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남연풍이 뒤따라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기도 전에 안나의 안색이 갑자기 급변하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물어볼 필요도 없이 남연풍은 누가 왔는지 알 것 같았다.“그녀를 데리고 여기 온 거야?”고승겸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는 얼굴로 안나를 꾸짖었다
고승겸의 짜증 섞인 물음에 남연풍은 시약을 내려놓고 휠체어를 조종해 세면대 앞으로 다가갔다.그녀는 손을 씻은 뒤 마스크와 고무장갑을 끼고 실험대로 돌아와 담담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고 선생, 나 지금 작업 시작할 거니까 좀 나가 줘.”자신을 본체만체하는 남연풍의 태도에 고승겸은 불쾌했지만 해독제 개발을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남연풍에게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가 남연풍을 혼자 실험실에 있게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다.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핸드폰의 앱을 열어 실험실에 설치해 둔 감시 카메라를 통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남연풍은 별다른 수상한 움직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고승겸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핸드폰 화면에 머물던 시선을 접었다.그가 막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여지경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승겸아, 너랑 상의할 게 있어.”여지경의 표정이 굉장히 엄숙했다.고승겸은 여지경이 자신과 무엇을 상의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여지경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남연풍 얘기 하시려고요?”고승겸이 먼저 물었다.고승겸의 행동을 뚫어져라 지켜보던 안나는 이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벽 뒤로 숨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듣고 있던 중 여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겸아,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남연풍을 어떻게 할 거냐고? 아직 출산 예정일이 한참 남았지만 세월 금방 간다. 장차 아이가 태어나면 절대 혼외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해선 안 돼.”“나 고승겸의 아이가 절대 혼외자가 되어선 안 되죠. 그럴 리도 없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명분을 줄 거예요.”이 말을 들은 안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긴 손톱이 손바닥을 뚫을 기세였다.그가 남연풍에게 명분을 주려 한다고?하지만 고 씨 집안 며느리, 자작 부인 자리는 하나뿐이었다.고승겸이 남연풍에게 제대로 된 명분을 준다는 건 안나의 입지가 위태로워진다는 얘기다.안나는 불안하기
”그 남사택이라는 젊은이 말이야?”“네. 남사택은 남연풍을 영원히 저 상태로 두지 않을 거예요. 아마 빠른 시일 내에 남연풍을 이전 상태로 되돌릴 거예요.”고승겸은 매우 긍정적으로 확신했다.여지경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그럼 난 안심하고 손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구나.”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가 잠시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그때 남연풍이 집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너희들은 벌써 결혼했을 거고 지금쯤 아이가 두세 명이나 되었을지도 몰라. 그때 왜 남연풍이 떠났는지 모르겠어.”고승겸은 여지경의 원망 섞인 말을 들으며 자신도 같은 의혹과 불만이 마음속에서 꿈틀대고 있음을 느꼈다.그러나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이라도 이렇게 붙잡아둘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위안이 될 것 같았다.여지경의 말을 듣고 안나는 화가 나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고 곧바로 자신의 엄마에게 연락했다.안나의 모친은 안나에게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뒤 잠시 생각하다가 안나에게 좋은 생각이 났다며 말해 주었다.안나는 자신의 엄마가 하는 말을 다 듣고 난 후 꽤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고승겸이 나중에 알게 되면 혼자 죄를 뒤집어쓰게 될까 봐 직접 자신의 손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다시 자신의 엄마가 한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니 역시 자신의 엄마 말이 옳았다.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기 때문에 그녀가 반드시 직접 해야 했다....며칠 동안 남연풍은 매일 해독제 연구에 몰두했다.다만 남연풍이 남사택과 초요의 상황을 알아볼 때마다 고승겸은 알고도 모른 척 그냥 넘어가 주었다.남연풍은 마음속으로 비록 걱정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독제 개발을 미룰 수도 없는 처지였다.남사택의 집에 머무는 동안 이미 남사택은 심각하게 남연풍을 나무랐다.남사택은 그녀에게 소만리가 네 번째 단계 발작 후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소만리가 깨어나지 않으면 몸에 더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남연풍은 안나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해독제 개발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혼자서 테스트에 몰두하며 최종적으로 안전하고 효과적인 해독제를 만들려고 안간힘을 썼다.남사택과 초요는 며칠 동안 고 씨 집에서 머물렀다.행동 범위는 계속 이 작은 공간에 국한되어 있었다.하루하루 의식주는 잘 마련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마음이 별로 편치 않았다.남사택은 어서 남연풍을 이 집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그는 남연풍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다.그가 고 씨 집에서 머무는 동안 고승겸이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때 시중이 아침을 가져다주었고 남사택은 시중의 입을 통해서 고승겸이 오늘은 늦게 외출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남사택은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초요는 조금 망설였다.“사택 선배, 처음부터 남연풍 언니는 해독제를 개발하기 위해 이곳에 머무르려고 했어요. 선배가 데려가고 싶어도 가려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남사택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남연풍이 계속 여기에 있다가는 조만간 무슨 사고라도 날 것 같아.”“왜 그런 말을 해요?”초요는 남사택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고승겸은 언니를 정말 많이 아끼는 것 같아요. 안나라는 여자가 걱정인 거예요?”“응.”남사택은 짧게 대답했다. 대답하고 보니 마음속에 불안한 감정들이 더욱 솟구치는 것 같았다.“그 여자가 남연풍을 지금 이 꼴로 만들어 놨는데 고승겸은 아무런 응징도 하지 않고 있어. 그 여자가 남연풍을 해치려는 걸 알면서도 묵인한 거 아니겠어? 고승겸을 못 믿겠어. 그런 시한폭탄을 남연풍 옆에 두어서는 안 돼.”남사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눈앞에 투명한 유리문이 열렸다.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안나였다.남사택은 안나를 보자마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초요는 남사택이 혹시라도 충동적인 행동을 할까 봐 먼저 선수를 쳤다.“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여긴 아무도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 우린 당신
고승겸은 남연풍을 너무나 아끼고 있었고 남연풍이 자신을 위협할 것 같아서 안나는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당시 기모진의 집에 갇혀 있던 남연풍을 납치한 것이었다.안나는 남연풍의 얼굴을 망가뜨리고도 뻔뻔스럽게 소만리의 이름을 팔았고 발을 다쳐 절뚝이며 도망치던 남연풍이 차에 치여 다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하게 만들었다.이 모든 것은 그녀의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남사택, 두고 봐. 너도 네 누나처럼 사람을 질리게 하는군!”안나는 노발대발하며 협박성 경고를 날렸다.“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나랑 맞선 대가가 얼마나 큰지 반드시 알려줄 테니까!”“존재감을 찾을 거면 여기서 해. 우린 당신과 맞서 싸울 시간 없어. 괜한 일을 만들어 스스로 무덤에 빠지는 짓 하지 마.”남사택은 여지를 남기지 않고 싸늘하게 쏘아붙였다.안나는 대놓고 남연풍을 겨냥하지 못하게 되자 직접 남동생인 남사택에게 화풀이를 하려다 오히려 된통 당하고 말았다.남사택과 초요가 콧방귀도 뀌지 않자 안나는 이를 악물고 몇 번이고 눈을 부라렸다.“두고 보자구!”그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돌아섰다.초요는 밖을 내다보면서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사택에게 말했다.“사택 선배, 뭔가 이상해요. 저 여자가 도대체 우리한테 뭘 원했던 거죠?”남사택은 떠나는 안나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흘겨보다가 몸을 돌려 초요를 향했다.“당신 말이 맞아. 나도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렇지만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당신을 보호할 테니까.”남사택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다.초요의 마음에도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설령 남사택이 자신에게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아도 초요는 그가 반드시 자신을 보호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승겸이 그렇게 남연풍을 아끼는데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그리고 안나가 이 집에서 수상한 짓을 하도록 고승겸이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초요와 남사택의 추측이 완전히 맞긴 했지만
안나는 안 그래도 핑계를 대고 남연풍을 남사택과 초요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남연풍이 먼저 입을 열어주니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안나는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일부러 난처한 척했다.“남연풍, 지난번에 당신도 봤잖아. 당신을 데리고 동생을 찾아 나섰다가 고승겸한테 들켰던 거. 다시는 승겸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그렇지만 고승겸이 나한테 당신을 잘 돌보라고 했는데 당신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그렇잖아. 동생을 만난다는 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안나는 남연풍의 말에 난처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모순된 모습을 가증스럽게 연기했다.“남연풍, 그럼 양심 있게 행동해. 나중에 승겸이 돌아와서 내가 당신을 동생이 있는 곳으로 데려간 걸 알면 당신이 강제로 날 데리고 갔다고 말해야 해.”안나가 자신의 계략을 위해서 밑밥을 깔아놓는다는 걸 알 리 없었던 남연풍은 시원스레 대답했다.“그래, 내가 혼자 책임질게.”“당신이 한 말 꼭 기억해.”안나는 남연풍에게 되새겨 주고는 속으로 웃으며 휠체어를 밀었다.마당을 가로질러 남사택과 초요가 있는 곳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이 분 정도는 걸어가야 했다.가는 길에 남연풍은 어디선가 타는 것 같은 매캐한 냄새가 났다.무엇이 타고 있는지 궁금해서 뒤돌아보니 안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저 앞에 왜 불빛이 보이지?”남연풍은 안나의 말을 듣자마자 안나가 말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곳에서는 불꽃이 보였고 가로등에 비친 짙은 연기가 끊임없이 위로 날아올랐다.남연풍은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남사택과 초요가 있는 곳 아니야?”그녀는 얼른 휠체어를 조종하며 불꽃이 일렁이는 곳으로 가 보았지만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남연풍은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사택아! 초요!”그녀는 집안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쳐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남연풍은 위험을 무릅쓰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휠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