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는 기모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랐다.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을 때 기모진은 갑자기 팔을 구부려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소만리는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금 그녀의 의식 속에서 기모진이라는 사람은 자신을 죽도록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그녀를 안아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그녀는 이런 기모진의 행동 또한 무슨 음모가 아닐까 생각했다.소만리는 기모진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다.그때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미끄러졌다.“소만리, 당신이 지금 좀 아파서 당신이 날 용서했다는 사실도, 당신이 날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것도 잊고 있어.”내가 아프다고?소만리는 기모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곳은 누가 봐도 병원이었다.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몸이 여기저기 좀 불편하게 느껴졌다.호흡은 흐트러지고 심장 박동도 들쭉날쭉 마음대로 요동치고 있었다.그럼에도 소만리는 기모진의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기모진, 당신 소만영 때문에 온 거지? 당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굽신거릴 필요 없잖아. 무슨 목적이 있으면 지금 바로 말해.”의심과 경계로 가득 찬 소만리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기모진의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그는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욱 꽉 그녀를 안았다.“소만리, 내가 지금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진실이야. 미안해. 내가 당신한테 불쾌하고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미안해...”소만리는 기모진의 말을 반복하며 온기 하나 없는 눈을 들어 차갑게 기모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내가 들어본 농담 중에 가장 웃긴 농담이었어.”“소만리...”“기모진, 꺼져.”“...”기모진은 정신이 아득해졌다.소만리의 입에서 그렇게 매정하게 자신을 쫓아내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그가 정신이 멍해 있는 순간을 틈타 소만리
기모진은 시계를 보았다. 그는 강자풍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며 소만리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때 기모진은 소만리가 천천히 침대에 누워 옆으로 몸을 움츠리고 그를 향해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았다.기모진은 단번에 소만리가 매우 불편하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당장이라도 뛰어들어가고 싶었지만 또다시 그녀를 자극할까 봐 두려움이 밀려왔다.방금 이반이 와서 강자풍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으니 기모진은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강자풍이 도착했다.강자풍은 냉담한 표정으로 기모진의 눈을 마주 보고는 손에 든 해독제를 건넸다.“가져가세요.”해독제를 보자 기모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소만리의 몸속 독소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상태는 안정시킬 수 있었다.기모진이 해독제를 손에 들고 강자풍을 바라보았다.“고마워.”강자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옆에 있던 이반이 상냥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까요?”“주사를 놓는 일은 기 선생님도 이미 능숙해서 당신 도움 필요 없을 거예요.”강자풍이 기모진을 대신해서 대답했다.이 말의 숨은 의미를 이반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강자풍과 기모진은 알고 있었다.기모진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실 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와 기대에 찬 미소로 침대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소만리, 당신 이제 곧 좋아질 거야...”기모진은 이렇게 말을 하고 눈을 들어 눈앞의 소만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순간 아연실색했다.“소만리!”기모진이 순간 긴장하며 소만리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소만리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게다가 온몸은 사시나무 떨 듯 무섭게 떨고 있었다.그렇지만 소만리는 정신을 놓지 않고 기모진의 접근을 저항하듯 뿌리치려고 했다.“기모진, 내가 말했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꺼져. 멀리 가버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힘없는 소만리의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완강한
소만리는 강자풍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본 사람이 강자풍과 이반이었기 때문이었다.강자풍이 입구를 서서 그녀의 길을 막으려 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그녀가 강자풍을 밀치고 발걸음을 내디디려 했을 때 뒤에서 쫓아온 기모진에게 손목이 잡혔다.“소만리, 날 믿어.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게 아니야. 당신 정말 지금 아파. 주사만 맞으면 내가 당신을 속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기모진은 자신의 말을 믿어 달라고 소만리에게 간절하게 부탁했다.그러나 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기모진,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 난 이미 내 마음속에서 당신을 지웠어!”“소만리.”“당신들 비켜. 꺼지라구.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손에는 죽지 않을 거야.”소만리는 필사적으로 기모진의 손을 뿌리치고 강자풍을 밀어내고 뛰쳐나가고 싶었다.기모진과는 달리 강자풍은 매우 난폭하게 소만리의 팔을 잡아끌어 기모진에게로 끌고 갔다.“뭘 망설이는 거예요? 지금 그녀가 당신이 하려는 일에 협조하길 바라는 거 아니에요? 그럼 어서 주사를 놔요.”강자풍은 소만리를 꽉 잡고 기모진 앞으로 힘껏 밀었다.강자풍의 말을 듣자 소만리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고 눈에는 불안과 공포의 빛이 솟구쳤다.그녀는 눈앞에 서 있는 기모진을 노려보았고 주사기를 들고 있는 그의 손에 시선을 옮겼다.그녀의 눈은 이미 빛을 잃었고 산산이 부서진 희망만이 그 자리에 패잔병처럼 맴돌고 있었다.“기모진, 당신은 정말 양심도 없구나.”실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기모진을 바라보며 소만리가 말했다.기모진은 원망에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만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지금 기모진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그녀가 이 주사를 맞으면 원래의 정신으로 회복될 것이고 그가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눈앞의 소만리의 눈빛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기모진, 뭘 망
이반은 기모진의 다급한 뒷모습을 보면서 더욱 궁금해졌다.“강자풍, 방금 기모진이 놓은 주사 뭐예요? 어떻게 마취주사보다 더 세 보이죠? 그리고 어떻게 주사 한 방으로 소만리의 병세가 회복될 수 있어요?”강자풍은 멀어져 가는 기모진의 모습을 힐끔 보고는 눈썹을 살짝 비틀었다.“회복? 만약 정말로 예전에 그거라면 절대 완쾌되기 어려울 거야.”“예전에 그거?”이반의 호기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강자풍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연이 예전에 저지른 불명예스러운 일은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기모진은 경도에서 이곳으로 오느라고 밤을 꼴딱 새웠기 때문에 우선은 어디 가까운 호텔로 가서 좀 쉬고 싶었다.그는 가까운 호텔로 가서 방을 잡으려고 했으나 데스크 아가씨는 의식을 잃은 소만리를 안고 있는 기모진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았다.데스크 아가씨는 기모진이 소만리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걸로 의심했고 결국 기모진은 소만리와의 혼인 증명서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서야 비로소 방을 잡을 수 있었다.기모진은 소만리를 방으로 옮긴 후 줄곧 침대 곁에서 그녀를 지켰다.소만리가 깨어나면 정말 원래대로 돌아와 있을지 어떨지 기모진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이전에는 소만리가 몇 차례 주사를 맞고도 이렇게 정신을 잃은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 깨어나질 않았던 것이다.“소만리, 깨어난 뒤에는 제발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기모진은 소만리의 손을 잡고 애틋하게 키스를 했다.소만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불안과 초조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그는 소만리가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마치 그의 존재 여부가 그녀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 그의 마음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기모진은 독소가 이렇게 무서울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파멸시키다니....경도.남연풍은 휠체어를 탄 채 화장대를 바라보고
초요는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돌아섰다.남연풍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었고 한쪽에는 휠체어가 엎어져 있었다.남연풍은 스스로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도무지 일으켜지지가 않았다.이 상황을 보고 초요는 황급히 남연풍에게 다가갔다.초요가 몸을 웅크리고 남연풍을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초요가 내민 손을 뿌리쳤다.“날 동정하지 마!”남연풍은 입술을 깨물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내가 이런 모습으로 망가져서 남사택은 아주 기분이 찢어질 거야? 그렇지? 분명히 내 얼굴을 원래대로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수술도 안 해주고 이 모양 이 꼴로 놔두는 걸 보면 말야! 너도 똑같아!”남연풍은 초요를 힐끗 쳐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넌 날 도우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야. 단지 남사택의 체면을 봐서 폐인이 된 날 억지로 돌보고 있는 것뿐이야!”“당신도 알지? 지금 다른 사람한테 억지 부리고 있다는 거!”남사택이 현관에서 불쑥 들어왔다.남연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경멸하듯 냉소를 터트렸다.“허허. 남사택. 이제야 너의 진심을 말하는군. 너 날 진정으로 도와줄 생각이 없었던 거야. 피보다 진한 가족은 무슨! 그거 다 헛소리야!”“그래, 난 당신을 도와줄 마음 없었어. 당신을 여기에 머물게 한 것은 단지 소만리의 회복을 돕기 위한 해독제가 필요했을 뿐이었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당신한테는 훨씬 합리적으로 들리지? 이제 마음에 들어?”남사택이 얼음처럼 차갑고 침착하게 남연풍에게 되물었다.“...”남연풍은 말문이 막힌 채 가만히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다.초요는 분위기가 경직된 것을 보고 두 남매 사이의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고 잠자코 손을 뻗어 남연풍을 부축했다.남연풍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또다시 초요의 손을 밀어냈다.“네 동정 따윈 필요 없어!”“남연풍, 그 성질 좀 이제 작작 부려. 여기 당신한테 빚진 사람 아무도 없어.”남사택은 남연풍에게 비난하듯 말했다.“그동안 초요가 당신을 돌봐
”사택 선배, 와서 좀 도와주세요.”남사택은 초요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도 사실 아까부터 도우려고 했었다.남연풍은 초요와 남사택이 자신을 힘껏 안아 일으켜 세운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생각하는 척하며 그들의 호의를 묵묵히 받아들였다.석양이 아름답게 지는 저녁 무렵 남사택은 차를 몰고 경도에서 가장 아름답고 호화로운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아직 결혼식이 시작될 시간은 아니었지만 현관 앞에는 이미 많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남연풍은 뒤 칸에 앉아 입구로 들어가는 하객들을 눈여겨보았다.모두가 그녀가 아는 사람들이어서 낯이 익었다.고승겸의 결혼식은 전날부터 온라인상에서 대대적으로 홍보가 될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산비아의 존엄한 자작 공자가 결혼한다는 것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고승겸의 사진들이 인터넷에 공개가 되자마자 단숨에 많은 사생팬들을 양산했다.여기에 심리치료사와 고급 최면술사라는 꼬리표까지 더해지며 그를 흠모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눈앞의 시끌벅적한 광경을 바라보던 남연풍은 손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한참을 바라보던 남연풍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스크를 집어 들어 썼다.남사택과 초요가 먼저 차에서 내린 뒤 남사택이 마음을 놓지 못하여 초요에게 당부했다.“만약 고승겸의 눈에 띈다면 일이 좀 귀찮아질 수도 있어.”남사택은 고승겸이라는 사람이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가 없어 자꾸 걱정이 되었다.“걱정 마세요. 내가 잘 대응해 볼게요. 당신 누나도 잘 돌보구요.”“초요, 정말 고마워. 그동안 당신이 없었다면 나와 남연풍의 관계가 어떻게 흘렀을지 정말 상상하기도 싫어.”남사택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남연풍을 힐끔 쳐다보았다.초요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사택 선배도 사실은 누나한테 신경 많이 쓰고 있다는 거 잘 알아요. 선배는 입은 무겁고 마음이 약한 사람이잖아요.”“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남연풍이 재촉하는 소리가 차 안에서 들려왔다.남사택은 트렁
초요는 결혼식 청첩장에 적힌 신부 이름을 본 적은 있지만 그 이름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별로 없어서 신부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었다.초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전 잘 몰라요.”“흥, 넌 당연히 모를 테지.”남연풍은 혼잣말처럼 웃었다.“어릴 적부터 고승겸과 잘 어울리던 친구인데 고승겸은 이 여자를 항상 싫어했어. 심지어 이 여자에게서 벗어나려고 소만리를 방패막이로 이용하기도 했지.”고승겸이 소만리와 약혼한 것에 관한 거라면 초요도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고승겸이 소만리를 이용해 다른 여자에게서 벗어나려고 한 사실은 몰랐다.하지만 오늘 밤 그는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 여자와 결혼을 한다.초요는 당황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하지만 고승겸의 신분을 생각해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되었다.“이 신부랑 친해요?”초요는 스스럼없이 물었다.“친하지 않아.”남연풍은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나도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이 여자는 나보다 더 악랄해.”“그게 무슨 말이에요?”남연풍은 결혼식장 구석구석을 싸늘한 시선으로 힐끗 쳐다보다가 초요의 맑은 눈에 시선을 집중시켰다.“아마 지금까지도 소만리는 이 일을 모를 텐데. 예전에 소만리가 양이응이라는 여자한테 밧줄에 묶여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이 있었어. 사실 그때 양이응은 이 여자와 내통해서 그 일을 꾸민 거였어.”이 사실을 듣고 초요는 등골이 오싹하도록 깜짝 놀랐다.“사실 소만리가 똑똑해서 무사히 도망쳐 나오긴 했지만, 양이응과 이 여자는 일찌감치 계략을 꾸몄어. 이 여자는 소만리를 기절시킨 후 양이응이 소만리를 바다로 밀어 넣는 걸 싸늘한 눈으로 방관하고 있었지.”이를 들은 초요는 더욱 당혹스럽고 의아했다.“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이 일을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거예요?”남연풍이 거만하게 웃었다.“당연히 잘 알고 있지. 바로 근처에 있었으니까.”초요는 도저히 남연풍의 말을 믿을 수 없어 눈썹을 비틀며 물었다.
사실 고승겸 자신도 그가 안나와 이런 식으로 친지들 앞에 설 줄은 몰랐다.그는 이익을 따져본 뒤 여지경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그가 산비아의 차기 후계자가 되려면 안나 가문의 도움이 필요했다.이런 이유로 여지경은 안나를 찾아갔던 것이다.안나는 자신이 자작부인의 자리에 다시는 앉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여지경이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안나는 마침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생각했고 고승겸와 함께 나란히 결혼식장을 걷는 지금 누구보다 더 당당하고 자신있게 행동했다.그녀는 이제 다른 어떤 여자도 자신의 자작부인 지위를 흔들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안나는 승리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부케를 안고 결혼식장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왔다.그녀는 곁눈질로 고승겸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특히나 그의 얼굴이 더욱 고귀하고 우아해 보였다.그의 얼굴은 차가우면 차가울수록 고결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 같았다.이런 고승겸의 모습에 안나는 치명적으로 이끌리고 있었다.마침내 그녀가 고승겸의 여자가 되었다니, 그녀의 오랜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그녀는 남연풍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자신의 지위를 흔들 수 없게 된 것이다.안나는 용솟음치는 기쁨을 숨기지 않고 만면에 드러내었다.그러나 그때 주변 하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승겸이랑 결혼하는 여자가 안나였구나.”“어쩐지 청첩장에 신부 이름이 안 나와 있더라니.”“여지경은 어떻게든 안나를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보니까 안나한테 뭔가 수가 있었던 거 같아.”“...”안나는 자신을 험담하는 소리를 듣고 강한 불만을 느꼈다.어쩐지 결혼식장 앞에 안내판도 없더라니.알고 보니 고승겸의 집안에서 그녀가 고승겸의 신부라는 사실을 전혀 발표하지 않은 거였다.안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상황이 무엇을 말해 주는지 잘 알고 있었다.고승겸은 안나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사실을 못내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