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청재는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사화정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윽고 깜짝 놀라 다시 사화정의 손을 잡아당겼다.“그게 사실이에요? 사돈, 정말 돌아오신 거예요? 옛날 일 다 기억나세요? 소만리 알아보셨어요?”사화정은 한때는 자신과 앙숙지간이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걱정해 주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여러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사화정과 위청재 사이에는 끈끈한 정이 생긴 것 같았다.위청재가 자신의 손을 잡고 마음을 쓸어내리는 모습을 보자 사화정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거렸다.“네, 소만리 알아봤어요. 옛날 일도 다 생각났구요. 제가 제정신이 아닌 채로 미쳐 날뛰었을 때 사돈께서 지난날의 원한따위 제쳐두고 절 극진히 보살펴 주셨던 거 다 생각났어요.”“그동안 사돈이 절 이렇게 세심하게 보살펴 주지 않으셨다면 아마 회복하기 어려웠을 거예요.”“사돈, 정말 감사드려요. 그리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사화정은 위청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고 마음을 다해 사과했다.위청재는 사화정의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시큰해졌다.울고 싶었지만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속으로 울음을 참았다.“아유, 나도 예전엔 제멋대로였어요. 경도 제일 부잣집 부인이라고 어딜 가나 행세했었죠, 뭐.”“말하자면 그건 우리 둘 잘못이 아니에요. 다 그 못된 소만영 잘못이에요. 그리고 사악한 소만영의 부모가 우리를 농락해서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에요.”“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진작에 사돈이 되었고 소만리와 기모진도 더 일찍 함께 할 수 있었을 거예요.”사화정은 소만영의 집안이 모든 악행의 근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덮어 놓고 소만영이 말한 대로 곧이곧대로 믿었던 잘못이었다.진실이 눈앞에 있어도 소만영의 말만 믿고 싶었던 그때의 자신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이다.어찌 생각해 보면 그때 사화정이 그렇게 소만영을 신뢰했던 이유도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잃
연고를 바르던 기모진의 손이 멈췄다.사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는 강자풍이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강자풍이 갑자기 그들과의 관계를 멀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분명 어딘가에서 무슨 말을 들은 것이 틀림없다.아니면 누군가가 강자풍에게 그들 부부에 대한 부정적인 허위사실을 심어 주었을 수도 있다.하지만 비록 강자풍이 어리긴 하지만 기모진은 그가 남이 부추기는 말에 쉽게 흔들리는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소만리.”기모진이 부드럽게 소만리의 손을 잡고 일어나 그녀 옆에 앉으며 그녀를 다정하게 품에 안았다.“소만리, 난 아이들 다 키운 후에 당신이랑 같이 산과 물을 끼고 있는 교외에 가서 살고 싶어. 우리 둘만의 삶을 말이야.”기모진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아름다운 소망을 이야기했다.그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그는 이 꿈을 진심으로 실현하고 싶었다.그래서 더 이상 소만리가 이런 번뇌에 시달리지 않고 벗어나길 바랐다.소만리는 기모진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고 눈을 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꼭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그녀 또한 기모진의 소망대로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서 부모로서 성공하고 은퇴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그러나...소만리는 천천히 눈을 뜨고 눈시울을 붉혔다.그런데 여온이는 지금 어디 있을까?엄마가 어딜 가야 널 찾을 수 있을까? 여온아, 너 지금 괜찮니?...F국.교외에 은밀히 자리 잡고 있는 집.흰 가운을 입은 젊고 잘생긴 의사는 방금 기여온의 건강 검진을 마쳤다.그는 검사를 마친 뒤 줄곧 옆에 서 있던 강자풍을 따라 현관으로 나왔다.강자풍은 나오기 전에 침대 곁으로 다가가 여온에게 말했다.“여온아, 오빠 잠깐 나갔다고 금방 돌아올게.”그는 기여온의 작은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강자풍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작은 인형을 기여온의 손에 쥐여 주었다.기여온은 인형을 살짝 안은
”왜 어렵다는 거예요? 당신이 치료한 아이 중에 낫지 않은 아이는 한 사람도 없어요!”“그렇죠. 그렇지만 그 아이들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어요. 이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운이 좋을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이반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잘생긴 얼굴에 난색을 표했다.“강자풍, 내가 검사한 바로는 이전에 이 아이를 검사한 의사가 뭔가 잘못 판단할 걸로 보이는데요.”“잘못 판단했다고요?”강자풍의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갑자기 기대의 빛이 차올랐다.“당신 말은 혹시 여온이가 백혈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요?”“아니, 그 말이 아니라.”이반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훨씬 심각해졌다.“아이는 병에 걸린 게 맞아요. 게다가 전에 의사가 판단한 것보다 훨씬 심각해요. 아이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요.”“...”강자풍은 말문이 막혔다.심방이 순식간에 멈춰버린 것 같았고 보이지 않는 찬바람이 그의 사지를 사정없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그는 눈앞이 아찔했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뭘 물어봐야 하는지 생각했다.이반에게 물어보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는 거예요?”“고칠 수 있어요.”이반은 천금 같은 긍정의 대답을 주었지만 이내 방향을 틀었다.“아이의 몸에 적합한 골수만 이식할 수 있다면요.”골수 이식!의료계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적합한 골수를 찾아 이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강자풍도 잘 알고 있다.희망은 있지만 희박할 뿐이다.“참,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것 같던데요?”이반은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강자풍에게 물었다.“몇 번 검사를 해 봤는데 살짝 미소 짓는 것 말고는 말하는 건 한 마디도 못 들어본 것 같아서요.”이 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강자풍은 여온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비록 기여온이 직접적으로 강자풍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강연은 그의 친누나였다.그에게도 책임이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저쪽에서 차갑고 나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사람 딸을 잡은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거야? 설마 네 형과 누나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은 거야?”강자풍이 긴 눈썹을 살짝 비틀자 아직 미소년다운 수려한 얼굴에 노한 빛이 떠올랐다.“내가 뭘 했는지 당신한테 설명할 필요 없잖아.”강자풍은 불만스럽게 말했다.“하지만 네가 네 형과 누나의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된 건 모두 내 덕분이란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강자풍, 비록 네 누나가 동정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네 친누나였잖아. 강어도 마찬가지고. 그가 너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네가 잘 알고 있을 거야. 설마 네 형과 누나를 죽인 사람들이 유유자적하게 잘 살아가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은 아니지?”“지금 아이가 네 손에 있으니 복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야. 망설이지 마. 망설임은 그저 기모진에게 기회를 줄 뿐이야.”남자가 하는 말에 깊은 암시가 담겨 있었다.그의 말투는 강자풍을 유혹하고 꾀어 내기에 충분했고 강자풍의 감정을 요리조리 이끌고 있었다.말을 마친 후 남자는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강자풍은 책상 위로 핸드폰을 던지며 다시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돌렸다.강어가 남겨 놓은 글을 보고 강자풍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표정도 점점 굳어졌다.몇 분 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이반에게 전화를 걸었다.“골수를 찾을 필요 없어요.”“네?”이반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의 강자풍은 아무 말이 없었다.“강자풍, 듣고 있어요? 지금 골수를 찾을 필요가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 아이를 더 이상 신경 안 쓰겠다는 거예요?”이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수십 초가 지난 뒤 이반은 아무런 감정 없는 강자풍의 대답을 들었다.“그 아이 죽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세요. 당신도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말고요.”매정하고 차가운 말을 내뱉은 강자풍은 이반이 뭐라고 추궁할까 봐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소만리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눈가가 뜨거워졌다.아이의 목소리를 얼마만에 듣게 되는 것인가.드디어 그녀는 맑고 영롱한 아침 이슬 같은 아이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이었다.그녀는 앞에 있는 작은 그림자를 보았다. 영락없는 기여온의 모습 같았다.소만리는 손을 내밀어 마침내 한 손을 잡았다.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깜짝 놀라서 깨어났고 눈앞에는 근심에 가득한 기모진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소만리, 여온이 꿈꿨어?”기모진이 다정하게 다가와 물었다.소만리는 잡은 손을 보더니 비로소 정신이 드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온몸을 전율하게 만들던 기쁨이 한순간에 상실감으로 변했다.“응. 꿈속에서 여온이가 나한테 말하는 소리를 들었어.”“소만리...”“똑똑똑.”기모진이 소만리를 달래주려고 몇 마디 말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작업실 문이 노크 소리로 울렸다.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 알렸다.“사장님, 고승겸이라는 분이 뵙고 싶다고 찾아오셨습니다.”고승겸이 왔다고?기모진과 소만리는 이름만 들어도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이 사람이 온 것이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소만리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기모진과 함께 손님 접대실로 향했다.고승겸은 한정판 정장 차림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채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러나 그가 한 짓을 생각하니 이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소만리와 기모진이 안으로 들어오자 고승겸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를 짓고는 손에 든 청첩장을 건넸다.“당신들에게 청첩장을 주려고 특별히 찾아왔어. 이번 주 토요일에 기 씨 그룹이 소유한 가장 호화로운 호텔에서 내 결혼식이 거행될 예정이야.”고승겸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두 분이 내 결혼식에 참석해서 꼭 축하해 줬으면 좋겠어. 기 선생도 호텔 서비스가 완벽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잘 부탁해.”기 씨 그룹에는 각계각층의 회사를 거느리고 있었다.기모진은 자신의 회사가 소유한 호텔에서
기모진과 소만리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소만리는 고승겸의 얼굴에서 기여온의 행방을 정말 알고 있는 듯한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유심히 보았다.그녀의 심장 박동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기여온의 행방을 알고 싶었고 작은 단서라도 손에 쥐고 싶었다.그런데 고승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 소식을 그들에게 쉽게 알려줄 수 있겠는가.이 점에 대해서 기모진은 고심했다. 그는 고승겸을 바라보며 얇은 입술을 살짝 들썩였다.“고 선생이 내 딸의 상황을 이렇게 잘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 그럼 내 딸이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말해 봐. 어디에 있어?”고승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기 선생은 비즈니스맨이잖아. 그렇다면 이것도 잘 알겠군. 가치 있는 것을 얻으려면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걸 말이야.”“원하는 게 뭐야?”기모진이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물었다.“기 씨 그룹의 지분 50%.”고승겸은 망설이지도 않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기모진의 마음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기모진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소만리가 그보다 한발 앞섰다.그녀는 빙그레 웃었다.보기에는 아주 온화하고 달콤해 보였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예리함이 빛을 뿜고 있었다.“고 선생, 농담도 참 잘해. 50%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내 남편의 지분을 다 합쳐 100%를 달라고 해도 주저하지 않고 승낙할 거야. 내 딸은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거든. 고 선생이 내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소만리의 말을 들은 고승겸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당신 말이 맞아. 농담이었어. 당신들의 귀한 딸이 어떻게 물질로 측정이 가능하겠어?”고승겸은 소만리가 터준 퇴로를 타고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그럼 우리 서로 아는 사이기도 하니 선물 하나 보내주는 셈 치지. 당신들의 귀한 딸은 지금 F국에 있고 스무 살 젊은이가 데리고 있어.”고승겸이 말한 정보는 강자풍과 딱 맞아떨어졌다.소만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
”내가 갈게. 당신은 경도에 있어.”“혼자 F국으로 가겠다고?”기모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왜?”소만리는 방금 고승겸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정말 그가 우리에게 청첩장을 주고 여온이의 소식을 전해주려고 일부러 왔다고 생각해?”“물론 고승겸을 믿지는 않지만 우린 어떤 정보도 놓칠 수 없어.”“그러니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해.”소만리가 단호하게 말했다.“그가 방금 한 말은 우리를 내보내려고 하는 말 같았어. 아마도 고승겸이 경도에서 무슨 일을 꾸밀 것 같아.”“그래도 여온이보다 더 중요하지 않아.”“알아. 당신이 여온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아. 그렇지만 이번에는 내 말 들어줘.”소만리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F국에 가서 여온이를 찾아볼게. 만약 여온이가 강자풍한테 있다면 강자풍을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 볼게.”“강자풍이 아직 그렇게 이성적이라고 생각해?”기모진은 걱정이 되었고 방금 고승겸이 한 말도 생각났다.“고승겸은 우리의 과거사를 철저히 조사한 사람이야. 강어와 강연의 일을 포함해서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어. 그는 마치 강어와 강연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말했어. 그렇다면 강자풍도 분명히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래서 당신이 혼자 강자풍을 만나러 가는 것이 난 너무 마음이 놓이질 않아.”“나 혼자 가는 게 아니야.”소만리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만졌다. 그 목걸이에는 자수정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기여온과 기란군이 함께 만들어 소만리에게 선물한 것이었다.“여온이도 함께 있어.”소만리가 빙그레 웃었다.소만리는 이번에 F국에 가면 반드시 어린 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기모진은 소만리의 굳건한 표정을 보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그녀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 공항까지 그녀를 데려다주었다.기모진은 고승겸으로부터 받아낸 소중한 해독제를 소만리에게 건네주었다.4단계가 진작에 발작을
기모진은 청첩장을 들어 천천히 열어 보았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결혼식 시간과 장소만 있을 뿐 정작 신랑과 신부의 이름은 없다는 것이었다.기모진은 고승겸이 자신과 결혼하는 여자를 싫어하기 때문에 일부러 청첩장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기모진의 추측은 사실상 고승겸의 생각과 일치했다.한편 초요는 현재 두 다리에 감각이 없는 남연풍을 매일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비록 그녀는 남연풍이 한 짓을 경멸하고 혐오하지만 그녀는 남사택의 누나였다.남사택이 그동안 자신을 돌봐준 것에 대해 초요는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하고 있었다.사실 남사택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누나를 아끼고 있다는 것을 초요도 알고 있었다.남연풍도 처음에는 초요의 손길을 거세게 저항하다가 이제는 무감각해진 듯 아무렇지도 않게 초요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초요가 남연풍의 몸을 씻겨 주고 있는데 갑자기 아래층에서 택배 기사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초요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서명을 하고 서류 봉투를 받아들었다.보낸 사람은 써 있지 않았는데 받는 사람은 남연풍이라고 쓰여 있었다.남연풍에게 온 개인 물건이라 초요는 당연히 손댈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당연한 듯 남연풍에게 가져다주려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남사택이 마침 들어왔다.남연풍에게 우편물이 온 사실을 안 남사택은 유심히 서류 봉투를 보고는 바로 가져가서 찢어 버렸다.“사택 선배, 이러면 안 되잖아요?”초요가 급히 막았다.“남연풍이 여기 있는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어? 소만리와 기모진이 보낸 거 같지 않은데, 그럼 누가 있어. 딱 한 사람밖에 더 있어?”초요는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남사택이 말한 사람은 바로 고승겸이었다. 고승겸이 남연풍에게 물건을 보낸 것이다.남사택은 곧바로 서류 봉투를 뜯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았다. 덜렁 청첩장 한 장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이 청첩장은 고승겸이 기모진에게 준 것과는 완전히 달렸다. 신랑의 이름과 신부의 이름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