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 안의 불빛은 너무 어두워서 남연풍은 지금 이 여자의 생김새를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여자의 표정이 얼마나 흉악할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뭘 하려는 거야?”남연풍은 두 손을 번쩍 들어 뒤로 물러나려고 애썼다.남연풍은 이 여자가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자신의 얼굴에 상처가 생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이것은 어떤 여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여자는 과도를 흔들며 거들먹거렸고 도도한 자태로 고개를 숙여 남연풍을 노려보았다.“남연풍, 내가 영원히 널 따라잡을 수 없고 널 대신할 수 없는 부분이 너한테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 내가 지금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외적인 것뿐이야.”이 말을 들은 남연풍은 이 여자가 자신의 얼굴을 망가뜨릴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남연풍은 자신이 지금 사력을 다해 저항하지 않으면 분명 얼굴에 되돌릴 수 없는 상처가 생길 것 같았다.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었다.여자가 칼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향해 덤비자 남연풍은 온 힘을 다해 여자를 밀어냈다.여자는 원래 남연풍이 저항할 힘이 하나도 없을 줄 알았다.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자신이 밀리며 바닥에 넘어졌고 손에 들고 있던 과도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여자는 남연풍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급히 과도를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만 남연풍은 재빨리 과도를 움켜쥐었다.형세가 역전될까 두려웠던 여자는 남연풍의 손을 덥석 누르며 두 사람이 맞붙었다.점점 남연풍은 체력이 떨어져 여자에게 밀리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과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 날카로운 칼날이 여자의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다.“아!”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와 함께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여자의 표독스러운 눈이 남연풍을 쏘아보았다.여자는 남연풍이 움켜쥐고 있던 과도를 홱 낚아채었고 눈빛이 들개처럼 변했다.“죽어!”여자는 칼자루를 힘껏 쥐고 날카로운 칼끝으로 남연충의 오른쪽 뺨을 휙 내리쳤다.“아..
남연풍은 얼굴을 가리고 살을 에는 듯한 눈보라를 뚫고 허둥지둥 달려갔다.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붉은 피가 새하얀 눈밭에 뚝뚝 떨어졌다.마치 붉은 꽃송이가 눈 위에서 피어나는 것 같았다.자신이 얼마나 뛰었는지 어디로 뛰었는지 알지 못했던 남연풍은 점점 의식을 잃어가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무렵 도로로 뛰어들었다.그때 지나가던 택시 한 대가 뛰어들어오는 남연풍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급브레이크를 밟은 운전자는 생각지도 못한 돌발 상황에 놀라 핸들을 잡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저 여자가 와서 부딪힌 거야. 난 아무 잘못 없어.”운전자는 끊임없이 되뇌었다.뒷좌석에 앉아 있던 남사택과 초요는 뜻밖의 상황을 보고 동시에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의사로서 남사택은 부상자를 절대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단지 처음 차에서 내렸을 때는 단순한 실수로 길을 잘못 난입한 낯선 사람인 줄 알았는데 피투성이에 얼룩투성이인 얼굴을 똑똑히 마주하고 난 남사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남연풍? 남연풍!”그는 연신 남연풍의 이름을 불렀지만 남연풍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남사택은 남연풍의 코끝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마치 실오라기 같은 약한 숨결을 확인한 남사택은 마음을 진정시켰다.그는 피투성이가 된 남연풍을 번쩍 안아 차에 태웠다.남사택을 뒤따라 초요도 차에 올라탔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남사택이 운전자를 향해 황급히 소리치는 것을 보았다.“당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요. 빨리!”운전기사가 몇 초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남사택이 다그치는 소리에 바로 액셀을 밟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이 시각 소만리와 기모진도 병원으로 돌아왔다.위청재는 링거를 꽂고 있는 기여온을 돌보고 있었다.기모진과 소만리가 들어오는 것을 본 위청재는 탁자 위의 분홍색 안개꽃을 가리키며 말했다.“아까 마스크를 쓴 남자가 여온이를 보러 왔는데, 아 글쎄 아
소만리는 남사택이 준 시약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으니 왠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만약 기모진의 독소가 언제 또 발작이라도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남사택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아마도 남사택이 바쁜 게 아닐까 싶어 소만리는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시도해 보려고 했는데 바로 남사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소만리가 전화를 받아보니 초요의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소만리 언니, 저예요.”“초요, 지금 남사택과 같이 있어? 혹시 지금 전화 좀 바꿔줄 수 없어?”“소만리 언니, 지금 사택 선배는 전화받기가 좀 불편해요. 왜냐하면...”소만리는 전화기 너머로 초요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기모진은 누군가와의 통화를 마치고 병실로 들어오다가 소만리의 안색이 이상한 것을 보고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소만리, 무슨 일이야?”“남연풍한테 사고가 났어.”소만리는 말을 하고 난 후 기모진의 손을 잡았다.“어머니, 저 이 사람이랑 잠깐 나갔다 올게요. 죄송하지만 여온이 좀 봐주세요.”위청재에게 인사를 건넨 후 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끌었다.“걱정하지 말고 가서 일 봐.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게.”위청재는 손사래를 치며 흔쾌히 답했다.위청재의 대답을 들은 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잡고 얼른 병실을 나왔다.“소만리, 어디 가는데?”“수술실 쪽으로 가야 해.”“수술실?”기모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머릿속에선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남연풍이 거기 있어?”“그런 것 같아.”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잠시 후 그들은 수술실로 통하는 복도로 나왔다.소만리는 저 멀리 굳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남사택을 보았다. 초요도 함께 있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초요도 그들에게 다가왔다.“소만리 언니, 모진 오빠. 남연풍은 아직 수술실 안에 있어요. 아직 상황이
의사의 말을 들은 남사택은 마치 자신이 얼음 물에 잠긴 듯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가슴은 순식간에 식어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만리는 남연풍이 이렇게 죽어가는 게 믿기지가 않아 물었다.“의사 선생님, 지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소만리와 남사택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의사는 자세히 설명했다.“현재로서는 자주적 행동 능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요. 남은 생애를 휠체어에서 보내야 할 것 같고 얼굴의 상처도 유난히 깊어 회복되기 힘들 것 같아요.”얼굴의 상처는 회복되기 힘들다.소만리는 어렴풋이 예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눈도 멀어 봤고 얼굴도 망가진 적이 있었다. 지금의 남연풍과 거의 같은 처지라 할 수 있었다.“이것이 지금 부상자의 현재 상황이에요. 재활을 잘 하면 좀 나아질 수는 있겠지만 아마도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심지어 평생 그럴 수도 있어요.”“닥터 류, 고마워.”남사택은 의사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그가 말을 마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어깨가 유난히 축 쳐져 보였다.“소만리 언니, 모진 오빠. 저 사택 선배한테 가 볼게요.”초요는 소만리와 기모진에게 인사를 하고 난 후 바로 남사택의 뒤를 쫓았다.소만리는 눈을 들어 기모진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에 복잡한 심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소만리도 남연풍의 현재 이런 처지와 최후가 업보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업보라고 한다면 그녀가 예전에 겪었던 것들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초요는 남사택을 따라 병원 아래층 정원으로 나왔다.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고 이미 바닥에는 눈이 곱게 쌓이고 있었다.남사택은 거친 눈보라 속에서도 조각상처럼 미동 없이 서 있었다.감정도 말도 아무것도 없었다.초요가 그에게 다가서려고 시도해 보았다.“사택 선배.”그녀가 큰소리로 그를 불렀고 남사택이 아랑곳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가 돌아섰다.“초요, 여기 추워. 먼저 들어가 있어. 나 혼자
”그녀의 다리가 치유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얼굴은 아마 사택 선배한테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이 말을 들었을 때 초요의 눈에서 빛이 났다.그녀는 남사택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다.그러나 초요의 말을 듣고 남사택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남사택이 한참 지나 고개를 들었고 어디 흠결 하나 없이 잘생긴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번지며 초요를 마주 보았다.“초요, 고마워.”“고맙다는 말은 우리 둘 사이에 너무 멋쩍어요. 사택선배는 나에게 있어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걸요. 가족끼리는 그런 말 안 하는 거예요.”가족.이 두 글자가 남사택의 귓가에 흘러들어오자 그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서운함을 느꼈다.그래도 역시 기쁜 마음이 훨씬 컸다.어쨌든 가족이라는 말도 보통 친구 사이가 아니라 남다른 존재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남연풍은 개인 병실로 옮겨졌다.그녀는 하루 종일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깨어났다.깨어났을 때 그녀의 첫 반응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확인하는 것이었다.그녀는 힘겹게 손을 들어 조심스레 얼굴을 만졌다.볼에 두툼하게 감긴 붕대가 만져지자 그동안의 일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정말 망가져 있었다.남연풍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두 다리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아무리 그녀가 움직여 보려고 애를 써도 움직이기는커녕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연풍은 다시 움직여 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여전히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하늘에서 청천벽력이 떨어져 내려와 그녀의 몸과 마음을 두 동강 내버렸다.그녀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이내 소름이 온몸을 덮쳤다.창밖의 어둠이 사정없이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그녀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어둡고 차갑게
남연풍은 여자의 손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그녀는 멍하니 눈을 들어 앞을 보다가 깨끗하고 큰 눈을 마주쳤다.“의사 선생님이 몸조리 잘해야 회복도 잘 된다고 하셨으니 푹 쉬세요.”초요는 부드러운 말투로 남연풍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주었다.남연풍이 몸을 일으키며 바로 냉소를 날렸다.“어느 돌팔이 의사 말이야? 지금 내 상황이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아? 기본적인 판단도 못하는 의사가 무슨 의사야?”남연풍은 아픔을 꾹 참으며 빈정거렸다.“잘난 척하는 돌팔이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 선의의 거짓말이네 어쩌네 하지? 나한테는 그런 가증스러운 선의 따위 필요 없어. 장애가 있으면 그냥 장애인이 되는 거야! 얼굴이 망가지면 그냥 망가진 거야! 완쾌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남연풍의 자포자기하는 모습을 보며 초요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물론 당신 말도 맞을 수 있어요! 이 세상에는 실력없는 돌팔이 의사들도 많지만 명실상부한 좋은 의사들도 많아요. 사택 선배는 좋은 의사예요. 게다가 당신 친동생이구요. 그를 믿어야 해요 그가 반드시 당신을 예전처럼 회복할 있도록 도와줄 거예요.”“입 다물어!”남연풍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초요의 말을 끊었다.“네가 뭔데 나한테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내가 의술을 모른다고 생각하니?”그녀는 시선을 돌려 아직 잠들어 있는 남사택을 힐끗 쳐다보았다.“쟤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다 할 수 있어!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걸 쟤는 못 해. 난 지금의 내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 허, 나도 속수무책인 일을 그가 무슨 수로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겠어?”남연풍의 눈에 도도함이 비쳤다.초요도 마침내 남연풍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응어리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부모에게 사랑받고 자랐다고 생각하는 동생을 이기고 싶은 의지가 무엇보다 강해 보였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질투는 잘못된 오해에서 시작된 것이었다.“초요라고 했지?”남연풍은
남연풍은 힘껏 남사택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당연히 신경 안 써. 당신같이 남을 해치고 괴롭히는 사람이 독소에 시달린다고 해도 그건 자업자득일 뿐이야.”“...”“사택 선배.”“하지만 난 의사야. 의사의 사명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어.”“...”남연풍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멍해졌다. 그 아픈 고통도 순간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허, 허허...”잠시 후 그녀는 고심하는 표정을 보이다가 끝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남사택은 이미 병실에 없었고 초요만 옆에 서 있었다.“사택 선배 곧 올 거예요.”남연풍은 초요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이미 말할 힘도 없어 보였다.이 독소들은 그녀가 개발한 것이지만 사람 몸에 들어갔을 때 이렇게까지 큰 고통이 따를지는 그녀조차도 몰랐다.정말 너무 잔인한 고통이었다.“아...”남연풍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했다.그녀는 소만리가 이 고통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자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이대로 자신이 죽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독소의 처음 세 단계는 사람의 몸을 괴롭힐 뿐이지만 네 번째 단계에 도달하면 사람의 마음을 모질게 괴롭히게 된다.그녀는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 그녀를 우울한 어둠 속에 밀어 넣었던 외롭고 차가운 날들을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다.“아...”네 번째 단계는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남연풍은 벌써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써 보았지만 쏟아지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초요는 남연풍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이나마 위로해 보려고 애썼다.“조금만 참아요. 사택 선배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을 거예요.”“방법...”남연풍은 눈물로 얼룩진 두 눈을 붉히며 쓴웃음을 지었다.“이 독소는 내가 만든 거야. 나도 완전한 해독제를 만들지 못했는데, 누
초요는 이 광경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급히 소만리에게 다가갔다.“소만리 언니, 조심해요!”갑작스러운 기습에 미처 대비하지는 못했지만 소만리는 타고난 민첩함으로 남연풍의 손목을 잡아 뒤로 꺾으며 제지했다.“소만리 언니, 괜찮아요?”초요는 걱정스러운 듯 소만리에게 다가왔고 고개를 돌려 남연풍을 비난했다.“당신은 왜 자꾸 사람을 괴롭히려고 해요? 지금까지 오만 나쁜 짓은 다 해놓고 그걸로도 모자란 거예요? 네! 소만리 언니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해치려는 거예요!”남연풍은 치밀어 오르는 통증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소만리를 노려보았다.“왜 내가 저 여자를 자꾸 해치려 하냐구? 난 악랄하기 때문이야. 나는 피도 눈물도 없고 인간성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도구니까! 하하하하”남연풍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이를 악물고 소만리를 향해 불만을 터트렸다.“소만리, 당신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만났는지 정말 분하고 억울하지? 그냥 당신이 운이 나쁘다고 밖에 할 수 없어. 사람을 시켜 날 이 꼴로 만들다니! 누가 날 먼저 건드리라고 했어? 안 그래, 소만리?”남연풍의 말에 초요는 곤혹스러워하며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당신이 이렇게 다친 게 소만리 언니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당신이 갑자기 도로로 뛰쳐나와서 택시 기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부딪힌 거예요.”“허.”남여풍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소만리, 정말 뻔뻔하게 연기하는 것 좀 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다정하고 착한 여자인 줄 알지만 사실 당신은 나보다 더 악랄하고 음흉해!”소만리는 자신을 향해 퍼붓는 남연풍의 독설이나 눈빛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남연풍의 말을 이어받았다.“그래, 나도 음흉하고 악랄한 여자야. 그러니 안심해. 나도 당신을 이렇게 쉽게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까. 왜냐하면 당신한테는 아직 내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야.”남연풍은 창백하고 메마른 입술을 오므리며 말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