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소만리는 힘없이 겨우 대답했다.잠시 후 서늘한 기운이 미친 듯이 온몸을 휩쓸고 오는 것이 느껴졌다.마치 한겨울 살얼음이 가득한 호수에 온몸이 떨어진 것 같았다.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그녀의 모든 감각을 점령해 버려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추워.”소만리가 중얼거리듯 내뱉었다.기모진은 서둘러 소만리에게 이불을 꽁꽁 덮어주고 방 안 온도도 높였지만 여전히 소만리의 몸은 덜덜 떨고 있었다.지금 기모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아끼고 보호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자신의 무력함을 느끼자 기모진의 마음이 몹시 혼란스러웠다.기모진은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키고 손을 뻗어 소만리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해 주었다.“소만리, 조금만 버텨. 내가 지금 남사택한테 전화해 볼게. 당신 이겨낼 수 있을 거야.”“그래.”소만리가 조용히 대답하며 눈짓을 했다.그녀는 자신이 분명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남연풍이 말했듯이 한 번씩 이런 고통이 찾아올 뿐 죽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이런 상황은 다음번에도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기모진은 소만리를 달래며 남사택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도무지 남사택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그는 초요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기모진은 시계를 보았다.남사택과 초요 두 사람 모두 이 시간에 잠이 들 사람들이 아니었다.그러나 두 사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소만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기모진은 즉시 이 병원에서 잘 아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진정제 한 통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기모진은 옆에 서서 의사가 소만리의 정맥에 진정제를 놓는 것을 지켜보았다.소만리의 오한과 가슴 통증은 조금 누그러졌을 뿐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의사도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고 소만리의 증세를 보더니 일반적인 증상은 아니라고 말했다.의사가 떠난 후 기
남사택은 아래층에 있는 기모진이 들을 수 있도록 인기척을 내려고 했다.초요도 덩달아 문짝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주위는 아무 기척도 나지 않았다.기모진은 희미하게 인기척이 나는 것을 들었지만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인지는 몰랐다.그가 계속 귀를 기울여 보니 위층에서 누군가가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기모진은 그 소리가 심상치 않아 올라가 보려고 했는데 고승겸이 계단 입구에 나타났다.“기 선생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오다니,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고승겸은 차가운 얼굴로 무표정하게 위층에서 내려왔다.“방금 당신 누구 이름 불렀어? 남연풍?”고승겸이 일부러 기모진을 떠보았다. 그 모습을 본 기모진은 차갑게 고승겸을 쳐다보았다.“고승겸, 연기할 필요 없어. 남연풍과 네가 한 편이라는 건 이미 다 알고 있어.”“어? 그래?”고승겸은 차갑게 되물으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알면서 여긴 왜 온 거야? 우리가 같은 편인 걸 알고, 당신 부인 몸속에 독소를 해독할 수 있는 해독제가 없다는 것도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냐구?”“나한테 이것저것 말할 필요 없어! 남연풍 나오라고 해!”기모진은 고승겸과 싸울 시간이 없었다.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소만리의 힘든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원하고 있을 뿐이다.지금은 독소를 개발한 남연풍이라는 작자만이 소만리를 진정으로 도울 수 있다.기모진이 이렇게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고 고승겸은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난 듯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그는 시중에게 홍차를 끓여 오라고 손짓했고 시중이 홍차를 가져다주자 소파에 한가롭게 앉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고승겸, 남연풍 나오라니까. 그 여자가 여기 있다는 거 다 알아.”기모진은 확신하며 말했다. 경도에서 한 사람의 동향쯤 파악하는 건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그가 조사하고 싶다면 아무 문제없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기모진은 남연풍과 고승겸이 얼마 전 그들을 따라 경도에 온 사실을 파악
남연풍은 눈앞의 광경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넋을 잃고 고승겸을 쳐다보았다.고승겸은 손에 총을 쥔 채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마치 감정이라고는 없는 포커페이스처럼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사람들 앞에서 보이던 온화하고 우아한 도련님은 온데간데없었다.이 순간 그는 마치 냉혈하고 무자비한 어둠의 공작처럼 세상의 어두운 기운을 다 빨아들인 사람 같았다.고승겸이 방금 한 행동은 기모진이 그녀를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그렇다면 저 사람, 날 위해 총을 쏜 건가? 날 위해?남연풍의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고승겸은 기모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누구도 내 눈앞에서 이 집에 있는 물건을 가져갈 수 없어. 어떤 물건도!”물건.고승겸의 이런 표현을 듣고 잠시 착각에 빠진 남연풍의 두근거림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그렇다.그가 어떻게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겠는가.항상 이용만 하는 주종 관계일 뿐이었다.그는 단지 그녀가 아직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에 곁에 둔 것이었다.“기모진, 남연풍을 놔줘.”고승겸이 재차 요구했다. 그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그러나 기모진의 시선은 고승겸보다 더 차가웠다.“해독제를 구할 수 없다면 난 여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거야.”이 말을 듣고 무표정하던 고승겸의 얼굴에 마침내 일말의 변화가 보였다.“기모진, 확실해?”“난 단연코 확실해. 확실하지 않은 것은 당신들이야.”기모진은 더욱 힘차게 남연풍을 잡아당겼다.“기모진, 당신 정말 도전적이군.”고승겸이 갑자기 이런 뜬금없는 말을 했다.그러나 기모진은 고승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이 남자가 자신에게 손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모진은 이미 다 준비를 해 두었다.그때 계단 위쪽에서 어수선하고 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기모진!”남사택의 목소리가 들렸다.떠나려던 기모진의 발걸음과 총을 쏘려던 고승겸의 몸짓이 동시에 멈추었다.“쿵쿵쿵쿵.”남사택이 서둘러 위층에서 뛰어내
마지막 단계.기모진의 심장이 갑자기 멈추는 것 같았다.기모진은 남연풍이 이 말을 할 때 그녀의 눈에서 이상야릇한 눈빛을 보았다.기모진의 심정을 간파한 듯 남연풍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됐어. 먼저 말하면 당신 미리 걱정하니까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남연풍!”기모진의 인내심이 바닥이 났고 그의 깊은 눈동자에서는 날카롭고 차가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지금 당신이랑 시간 낭비할 기분 아니야. 해독제를 달라고. 못 알아들었어?”“앗.”남연풍은 기모진이 힘을 주는 바람에 자신의 손목이 끊어질 것 같았다.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를 악물었고 이내 가벼운 웃음을 날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알아들었어. 그렇지만 해독제가 없다는 말도 알아들어야지. 더 이상 여분의 해독제가 없다니까.”이 말을 듣고 기모진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그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사정없이 남연풍의 목을 조르며 그녀를 밖으로 끌어냈다.“어...헉!”남연풍은 기모진이 극도로 흥분한 채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한순간에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겨 버린 남연풍의 모습을 보고 고승겸의 얼굴빛이 일순 폭발해 버릴 듯 변했다.하지만 고승겸이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는 남연풍의 기대와는 달리 고승겸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남사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쫓아 나왔다.“기모진! 우선 그 여자를 놓아주세요. 그 여자한테는 해독제가 없어요. 나한테 있어요. 요즘 계속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제 곧 성공할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남사택은 기모진에게 특별히 더 강조하며 말했다.남사택은 기모진이 자신의 말을 믿게 함으로써 잠시 그에게서 남연풍을 놓아주도록 했다.기모진의 발걸음이 멈추었고 그는 눈을 내리깔고 남연풍을 혐오스럽게 힐끗 쳐다보고는 남사택을 바라보았다.“이런 사람을 위해 그럴 가치가 있어? 이 여자는 당신 누나가 될 자격이 전혀 없어.”“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건 상관없어요. 난 그저 의사로서 내 눈
”당신 일부러 그랬어? 당신 동생 놓아주려고?”고승겸이 차갑게 물었다. 그의 눈가에 도사리고 있는 서슬퍼런 기운이 남연풍을 옥죄듯 에워쌌다.“내가? 콜록. 콜록콜록. 내가 왜 남사택을 놔주겠어?”남연풍은 연신 기침을 하면서 고승겸의 물음에 대답했다.“부모님은 걔 때문에 나를 무시하고 홀대했어. 내 앞날을 위해 외국으로 보낸다는 건 다 핑계였어. 사실은 그저 소중한 그들의 아들을 더 잘 키우고 싶었던 거지. 흥.”남연풍은 남사택이 떠나는 쪽을 향해 냉소를 흘렸다.“어디 한번 보자구. 그들의 귀하고 소중한 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이 말을 하면서 남연풍은 내내 이를 갈았다.그러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아버지가 직접 쓰신 수첩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고승겸은 남연풍이 하는 말을 들으며 그녀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고승겸의 마음도 먹먹해졌다.그는 갑자기 몸을 구부려 땅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남연풍을 번쩍 들어 안았다.그렇게도 바라고 바라던 순간이었지만 고승겸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순간을 남연풍은 감히 기대도 하지 못했다....병원.기모진이 병실로 돌아온 것은 이미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소만리는 진정제를 맞았지만 이불 속으로 스며드는 추위에 온몸이 움츠러들어 벌벌 떨고 있었다.기모진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지만 같이 마음 아파해 주는 것 외에는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만약 가능하다면 소만리를 대신해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싶었다.고승겸의 집을 떠나오는 길에 남사택은 기모진으로부터 소만리의 현재 증상에 대해 들었다.남사택은 우선 집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좀 챙긴 뒤에 기모진을 따라 병원에 왔다.그는 소만리의 상태를 간단히 확인한 뒤 자신이 가져온 시약을 주사했다.주사를 맞은 후에도 소만리는 여전히 가슴이 아프고 오한이 났으나 10여 분쯤 지나자 소만리의 안색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초요는 독소에 시달리는 소만리를 곁에
기모진의 의문에 남사택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후 남사택은 입을 열었다.“마지막 단계에서 어떤 증상이 나타날지 확신할 수 없지만 지금 소만리의 상황으로 볼 때 발작하는 시간이 잦아지고 중간에 발작이 끊기는 시간은 매우 짧아질 것 같아요. 예전에 당신이 겪었던 양상과는 조금 다른 듯해요.”기모진의 미간에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그게 무슨 뜻이야?”“그들이 짧은 시간 안에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일단 소만리의 몸속에 있는 독소가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면 그들은 이것을 이용해 당신을 협박해서 그들이 원하는 어떤 이익과 협상할 수 있으니까요.”이 점에 관해서는 기모진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 그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그 마지막 단계에서 소만리에게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걱정스러운 듯 기모진이 손을 들어 이마를 주물렀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가슴을 옥죄었다.“죄송해요.”남사택이 갑자기 사과했다.기모진은 영문을 몰라 수심에 잠긴 눈을 들었다.“왜 당신이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어쨌든 남연풍은 내 친누나니까요.”남사택이 이렇게 대답했다. 기모진은 남사택의 말뜻을 이해했지만 남사택은 그에게 한없이 고마운 존재였다.“당신은 당신이고 남연풍은 남연풍이야. 당신 둘을 나란히 놓고 생각하지 않아. 게다가 당신은 줄곧 우리 부부를 도와주었잖아.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이미 죽었을 거야. 소만리와 기란군도 마찬가지야.”“난 의사이고 사람을 살리는 게 내 역할이에요.”남사택은 잠시 말을 끓었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정말 이해가 안 돼요. 내가 분명히 아버지의 수첩도 다 보여줬는데 왜 아직도 부모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원망만 가득 차 있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고뇌에 가득 차 있는 남사택의 얼굴을 보고 초요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사택 선배,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당신 누나에게도 말 못 할 고충이 있을지도
”내가 있는 곳으로 이사 와서 같이 산다구요?”초요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남사택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내가 협박을 당해 그렇게 끌려가는 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선배가 날 보호하려는 거예요?”남사택은 부인하지 않고 가만히 초요를 바라보았다.“난 당신이 더 이상 그런 공포에 떠는 걸 볼 수 없어. 그들이 또 당신한테 접근해서 어떻게 한다고 해도 그때는 내가 적어도 당신 곁에서 지켜줄 수 있으니까.”남사택의 말에 초요는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남사택도 초요도 이런 감동이 사랑의 감정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남사택과 초요가 떠난 후 기모진은 줄곧 병실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여자를 지키고 있었다.한 사람은 사랑하는 아내이고 다른 한 사람은 평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다.이렇게 중요한 두 사람을 그는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 했던 것이다.그는 손을 들어 소만리의 뺨을 어루만졌다.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마지막 단계에 독소가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 생각만 해도 기모진의 마음이 타들어갔다.“소만리, 나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해야 모든 게 다 잘 해결될까.”기모진은 소만리의 손을 잡고 손에 입을 맞추었다.지금까지 이렇게 무기력한 적이 없었다.이번 문제는 그가 통제하고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 같았다.그 독소를 다루는 일은 일종의 전문 분야이고 그가 지금 연구를 시작한다고 해도 늦을 것이다.그가 지금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남사택뿐이었고 남사택이 상대할 남연풍은 뼛속까지 미친 여자였다.그녀는 이미 자신의 사상이나 주관 같은 것은 없고 무엇이든 고승겸의 말에 따를 뿐이었다.기모진은 하룻밤을 그렇게 보내었고 소만리는 다음날 새벽에 깨어났다.소만리의 안색이 더없이 초췌한 걸 보고 기모진은 어젯밤 소만리가 얼마나 독소로 괴로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러나 소만리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
소만리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일어나 고개를 돌려 굳어버린 여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어린 자식 앞에서 이런 불청객과 대면하고 싶지 않았지만 병실을 나오자니 아이 혼자 두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뭐예요? 나를 보는 당신 얼굴이 왠지 겁에 질린 얼굴 같은데요?”여자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걱정하지 마세요. 네 귀염둥이 딸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위로차 온 거니까.”남연풍이 거들먹거리며 들어왔고 핑크빛 안개꽃 한 다발을 기여온에게 건넸다.소만리는 속으로는 남연풍의 손을 막고 싶었지만 자신의 과격한 반응에 아이가 놀랄까 봐 기여온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남연풍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기여온, 너 주려고 이 꽃다발 사 온 거야. 마음에 들어? 핑크색 안개꽃 네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던데 잘 감상해 둬. 어쩌면 나중에는 이런 예쁜 꽃 받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남연풍이 꽃다발을 건넸지만 기여온은 받지 않았고 아이의 예쁘고 영민한 눈망울은 가만히 남연풍을 바라보기만 했다.소만리는 더 이상 남연풍의 행동을 봐줄 수가 없었다.남연풍이 지금 하는 말은 분명 저주에 가까웠다.“남연풍, 그 정도 양심이 있으면 하던 대로 계속 나와 내 남편한테나 덤벼요. 어린아이를 괴롭히다니 그게 무슨 짓이에요?”남연풍은 꽃다발을 들고 똑바로 서 있다가 소만리가 화를 내자 오히려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당신 딸도 보통이 아니네요. 당신과 기모진의 혼을 쏙 빼놓을 만해.”남연풍은 의미심장하게 웃었고 소만리는 남연풍이 하는 말뜻을 똑똑히 알아들었다.“쯧. 아이를 어떻게 가르친 거야? 내가 좋은 마음으로 꽃을 사 와서 병문안을 왔는데 무슨 애가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어.”남연풍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피식 비웃더니 문득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맞아. 내가 어떻게 잊을 수가 있지? 소중한 당신 딸 벙어리였죠. 강연이라고 하는 여자가 당신 딸을 벙어리로 만들었댔지 아마.”이 말에 소만리는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