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겸은 성큼성큼 베란다로 달려가 기모진의 모습이 이미 손님들 사이를 빠져나가 무사히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승겸은 기모진이 이런 운동 신경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로서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그는 돌아서서 방으로 돌아갔고 여전히 잠들어 있는 소만리를 보다가 손에 든 수정구를 보고 천천히 침대 곁으로 걸어가 소만리를 깨웠다.눈을 뜬 소만리는 잠시 멍한 눈빛을 보이더니 마치 어린아이처럼 온몸에 천진난만한 분위기를 풍겼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완전히 깨어났다.“방금 기모진이 여기 온 걸 본 것 같아.”소만리는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의혹을 털어놓았다.고승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방금 왔었어. 기모진이 당신을 데리고 가려고 시도하다가 나한테 들켜서 도망갔어.”소만리는 이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정말 귀찮은 사람이야.”“다시는 기모진이 당신을 귀찮게 하지 못하게 할 거야.”고승겸이 소만리에게 다짐하듯 약속했다.“우리 결혼식이 끝나면 다시 경도로 돌아가자. 그러면 당신 마음이 안심이 될 거야.”“경도로 돌아가?”소만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되물었다.“왜 경도로 돌아가? 여기서 사는 게 좋지 않아?”“여기서 사는 게 당연히 좋지.”고승겸은 천천히 몸을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렇지만 경도로 돌아가는 것은 나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소만리는 고승겸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살짝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왜 그런 말을 해?”이 말이 떨어지자 고승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소만리에게 눈을 돌려 웃는 듯 마는 듯 소만리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마주 보았다.“그 얘기는 그만하고 어서 준비해. 이따가 손님들한테 인사해야 하니까. 그때 데리러 올게.”고승겸은 애써 말머리를 돌렸고 소만리도 별다른 추궁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승겸을 향해 미소를 지은 뒤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고승겸이 소만리의 방을 나온 후 제일
일이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터라 고승겸도 적잖이 당황했다.이런 순간은 고승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었다.그는 급히 침대 곁으로 달려가 손을 뻗어 소만리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고승겸은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소만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승겸은 소만리가 어떤 이유로 실신했는지 알 수가 없어 주치의를 불렀다.여지경은 고승겸이 소만리를 데리고 내려오길 한참을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소만리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그녀는 부랴부랴 소만리의 침실로 올라왔다.마침 의사가 소만리에게 이것저것 검사를 끝내고 있는 중이었다.“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쓰러졌냐구?”여지경이 다급하게 물었다.의사는 여러 검사를 마친 뒤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검사를 해보니 신부가 다른 방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혈압도 정상이고. 아마도 저혈당에 일시적으로 산소가 부족해서 쓰러진 것 같아요.”“저혈당?”여지경은 얼굴을 찡그렸다.“그럼 얼마나 있으면 소만리가 깨어날까요?”“곧 깨어날 겁니다.”여지경은 살며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승겸아, 넌 우선 여기 소만리랑 같이 있어. 저쪽 손님들은 내가 상대하마.”그녀는 고개를 돌려 의사와 시중들에게 말했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가세요.”의사와 시중들은 즉시 여지경의 말에 따라 소만리의 방을 나왔다.몸도 마음도 분위기는 이내 찬물을 뿌린 듯 가라앉았고 고승겸은 침대 옆에 서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소만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수정구를 살며시 꺼냈다.최면 때문에 그런가?그는 스스로에게 물으며 시선을 소만리의 얼굴에 떨어뜨렸다.고승겸은 손을 뻗어 소만리의 눈썹을 살짝 건드렸다.“당신은 정말 좀 특별한 것 같아. 아무래도 당신이 스스로 내 최면술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그는 얇은 입술 한 귀퉁이를 천천히 끌어당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좋아. 자꾸 날 자극해 도전하게 만드니까.”아래층.
고승겸의 싸늘한 시선이 안나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너도 이제 돌아가도 돼.”“...”안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내키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그저 얌전한 척 억울한 척 쭈뼛거리며 여지경에게 관심을 기울였다.“어머니, 그럼 저 먼저 가 볼게요. 오늘은 많이 바쁘고 정신없으셨을 테니 푹 쉬세요.”여지경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그래, 들어가 쉬어라.”안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금방 그 자리를 떠났다.“소만리는 아직도 안 깨어났니?”여지경이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다.고승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요즘 너무 긴장해서 그런 것 같아요.”“소만리랑 그 기모진인가 하는 사람 사이에 아이가 세 명이나 있다는 사실 너 아니?”여지경은 갑자기 화제를 돌려 고승겸에게 물었지만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녀에게 몇 명의 아이가 있는지 전 신경 쓰지 않아요.”“너, 신경 쓰지 않는다고?”여지경은 기함을 하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승겸아, 너 소만리를 그 정도로 많이 좋아한다는 거냐?”“좋아한다...”고승겸은 이 단어를 읊조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어서 들어가 쉬세요. 내일도 바쁘니까요.”“...”여지경이 뭔가를 말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고승겸은 아예 돌아서 버렸다.그런 고승겸의 뒷모습을 보고 여지경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밤이 깊었다.집안 식구들은 이미 모두 잠들어 있었다.한 줄기 기다란 그림자가 조용히 누군가의 침실로 들어섰다.침대에 누워 있던 소만리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듣고 눈을 번쩍 떴다.어둠 속이었지만 그녀는 익숙한 실루엣이 그녀에게 빠르게 접근해 오는 것을 보았다.“소만리.”기모진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소만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소만리는 얼른 일어나 앉았다.“당신 어떻게 또 왔어?”“소만리, 내가 당신을 집으로 데려다줄게.”기모진은 소만리의 손목을 덥석 잡아당겼다
소만리는 곧바로 불을 켰다.기모진의 왼쪽 발목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그는 부상을 입은 것이다. 그리고 그 부상이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기모진은 눈을 내리깔고 피가 배어 나오는 발목을 보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통을 참아가며 소만리에게 돌아갔다.“소만리, 난 당신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꼴을 절대 지켜볼 수 없어. 난 지금 당신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 한다고.”소만리의 눈길은 기모진의 다친 발목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강인한 빛을 머금고 기모진을 향했다.“난 가지 않을 거야.”그녀는 여전히 단호했다.“기모진, 그동안 부부 사이의 정을 생각해서 지금 당신에게 떠날 기회를 줄 테니 어서 가. 당신 스스로 그물에 뛰어드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알겠어?”그녀는 점점 쓸쓸한 빛을 더해가는 그의 깊은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당장 꺼져.”기모진은 소만리의 단호한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갑자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당장 꺼져 줄게.”“방 안에서 뭔가 이상한 움직임이 있는 거 같아요.”문밖에서 갑자기 의문에 가득 찬 시중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방금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니까. 정말 누군가가 몰래 들어오는 것 같았어.”“얼마나 배짱이 두둑한 도둑이길래 감히 고 씨 집안에 들어와 물건을 훔치려고 해, 글쎄!”여러 말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이윽고 방문이 벌컥 열렸다.침대 옆에 서 있던 소만리는 놀란 얼굴로 눈을 들어 보았다.두 시중은 소만리가 깨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황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방에서 소리가 들려서 들어왔어요. 난 아직 못 깨어난 줄 알고 누군가가 몰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서 그만...”시중은 말을 하면서도 계속 방 안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죄송해요. 소만리, 내가 잠을 깨워버렸네요. 암튼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겸이 도련님이 많이 걱정하셨거든요.”
그를 신경 쓰는 듯한 소만리의 모습은 기모진에게 있어 상처를 치유하는 더없이 좋은 약이었다.기모진은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아오르는 듯 아무리 아파도 참아낼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소만리의 뺨에 따뜻한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소만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고 더 빨리 그의 상처에 거즈를 감아 동여맨 다음 약 상자를 정리하였다.“당신 나 좀 따라와.”그녀는 일어서서 어두컴컴한 달빛 아래서 방문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냈다.기모진은 소만리가 한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그녀는 그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려는 것이었다.지금 겉으로 보기에 소만리의 표정은 매우 냉담해 보였지만 기모진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소만리는 아직 잠들지 않은 시중들이 지나갈 수도 있는 길을 피해 빙빙 돌아서 기모진을 뒷문으로 안내했다.“당장 여길 떠나. 어서 가라고.”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했다.이번에는 기모진도 거역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 이제 갈게. 하지만 소만리, 난 당신 혼자 계속 이곳에 머물게 하지 않을 거야.”소만리는 기모진의 말을 듣고는 말문이 막힌 채 기모진을 쳐다보았다.기모진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더욱 깊이 미소 지었다.“소만리, 기다려.”이 말을 끝으로 기모진은 마침내 단호하게 고 씨 집안에서 벗어나 그곳을 떠났다.소만리는 눈을 들어 기모진이 떠나는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멀어지는 기모진의 모습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소만리는 그제야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 들었는지 몸을 돌리려고 했다.그러나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어딘가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바위처럼 멈춰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천천히 아름다운 눈을 들어 올렸다.어스름 달빛 아래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고승겸의 그윽한 검은 눈동자와 부딪혔다.그는 2층 거실 베란
고승겸의 말을 들은 소만리의 눈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녀는 눈앞에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웃고 있는 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온몸에 솟구쳤다.이 남자는 그녀를 꿰뚫어 보았지만 좀처럼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소만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변명할 기미도 보이지 않자 고승겸의 눈에는 오히려 그녀의 표정을 감상하는 듯한 빛이 감돌았다.“언제부터인지 말해줄 수 있어?”고승겸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언제부터 최면이 풀린 거야?”온순하던 소만리의 태도가 갑자기 예리한 눈빛으로 바뀌며 그녀는 한층 굳어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그럼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 왜 내 남편을 조사하고 자료를 수집했어? 그리고 왜 나한테 최면을 걸고 거짓 정보를 심어주려고 했던 거야? 여긴 왜 데려온 거야?”소만리는 마음속에 품었던 의혹들을 털어놓았다.소만리가 묻는 말에 고승겸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그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무런 목적 없이 하는 행동이 재미가 있는 법이야.”이 말을 듣자마자 고승겸이 무언가를 숨기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고승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눈치 없는 그녀가 아니었다.“고승겸, 당신이 나를 구해준 것은 고맙지만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가 당신과 무슨 혼인을 맺었다고 속일 수는 없어.”“난 당신에게서 성가신 안나를 떼어내는 걸 돕는 줄 알았고 당신이 말한 약혼 계약서도 단지 형식일 뿐이라고 믿었어.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사실 혼인 서약서였던 거야.”고승겸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맞아, 산비아 결혼 제도상 당신은 지금 나의 합법적인 아내인 거야. 그와 동시에 기모진과 혼인을 맺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당신은 지금 중혼죄를 범하고 있는 거지.”“그래서 그때 당신이 이걸 무기로 기모진을 위협했기 때문에 그가 순순히 당신에게 날 데리고 가라고 한 거로군.”“당신 말 대로야. 딱 그대로 내가 기모진한테 말했지.”고승겸은 너
”네, 겸이 도련님.”시중은 재빨리 대답하고 소만리의 곁으로 다가갔다.소만리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고승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건장한 경호원들을 보았다.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방으로 돌아간 후 소만리는 바닥에 남아 있는 핏자국을 보면서 기모진이 방금 아파하며 피를 흘렸던 모습을 떠올렸다.마음이 쓰리고 욱신거렸다.“모진...”소만리는 약지의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기모진에 대한 자신의 나쁜 행동들을 떠올렸다.죄책감이 밀려와 그녀의 마음이 찢어지도록 괴로웠다.“딸깍.”방문이 갑자기 열렸다.소만리가 눈을 들어 보니 고승겸이 문고리를 잡고 문 앞에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내일 결혼식은 예정대로 거행될 거야. 당신이 계속 잘 협조해 주길 바래. 당신도 기모진이 산비아에서 무사히 떠나는 것을 보고 싶을 거 아냐.”고승겸은 말을 마치자 단호하게 방문을 닫았다.소만리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았다.모진, 이번에는 내가 발을 잘못 들인 것 같아.그렇게 제멋대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소만리는 죄책감에 밤을 새웠는데 다음날 날이 어슴푸레 밝아올 때 시중이 들어와 옷을 갈아입혀주겠다고 했다.어젯밤 고승겸이 협박이 가득 담긴 경고의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거의 30분 동안 옷을 갈아입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을 때 여지경이 왔다.여지경은 어제보다 더 화려하고 우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여지경은 어제 소만리가 왜 기절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소만리의 안색이 좋은 것을 보고 일단 그녀는 매우 만족스럽고 안심이 되었다.“또 갑자기 쓰러지면 안 된다. 오늘은 너랑 승겸이한테 좋은 날이잖니.”소만리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벌떡 일어섰다.화장을 해주고 있던 시중은 놀란 표정으로 소만리를 쳐다보았다.“소만리...”“어머니, 부탁이 하나 있어요.”도움을 청하는 소만리의 눈길이 여지경의 얼굴에 떨어졌다.여지경은 의아한 표정을 지
고승겸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고 여지경의 불쾌한 기색에서 뭔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승겸아, 아직 친지들이 오시지 않았으니 너에게 정신을 차리고 돌아설 기회가 아직 있는 거야.”여지경은 엄한 목소리로 타이르며 소만리를 돌아보았다.“너 어떻게 이미 혼인한 여자와 결혼할 수 있어! 당장 이 결혼 취소해!”“이 결혼 취소할 수 없어요.”고승겸의 대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했다.여지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승겸아, 너 미쳤니? 소만리와 기모진은 아직 부부야!”“그게 뭐 어때서요?”고승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되물으며 자신을 거부하는 듯한 소만리의 시선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아는 것은, 소만리와 나의 혼인 서약서는 지금도 유효하고 나와 그녀의 결혼은 산비아 혼인법의 보호를 받는다는 거예요.”“...”여지경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고승겸은 서늘한 기운을 가득 담은 소만리의 얼굴을 힐끗 보며 웃었다.“승겸아!”여지경이 다시 한번 말렸다.그러나 소만리는 이 남자가 반드시 일을 밀어붙일 것임을 알아차렸다.소만리도 더 이상 말씨름하고 싶지 않았고 그와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지쳤다.그녀는 아무 두려움이 없는 듯 예리하게 눈을 치켜뜨고 교만하고 차가운 눈빛을 뿜으며 말했다.“고승겸, 당신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니 끝까지 함께 하긴 할게. 그렇지만 당신 분명히 후회할 거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이 말에 고승겸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내가 후회한다고? 하하하하...음, 어떤 식으로 날 후회하게 만들 건데? 갑자기 궁금해지네.”소만리는 담담하게 웃으며 자신감에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곧 알게 될 거야.”“그럼 두고 보자구.”고승겸은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웃어넘기며 돌아섰다.여지경은 이 상황을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문득 고개를 돌려 소만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소만리, 너 충동적으로 행동하지도 말고 함부로 행동하지도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