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더 이상 문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그녀는 과감히 화장실 유리문을 열고 얼른 뛰어들어갔다.욕조에 앉아 매서운 한기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기모진, 그 옆에서 허둥지둥 넘어져 있는 셜리가 눈에 들어왔다.소만리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소만리는 기모진이 가장 걱정되기는 했지만 예의상 셜리를 먼저 부축하려 했다.그러나 소만리가 내민 손이 갑자기 기모진에 의해 저지당했고 그의 힘이 어찌나 센지 잡힌 손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잡아주지 마.”기모진이 갑자기 이렇게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말투는 어느 때보다 냉혹하게 들렸다.“모진?”날카로운 눈빛과 차가운 한기를 내뿜는 기모진을 보니 소만리는 도대체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모진,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셜리가...”“기 부인,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욕조 가장자리를 잡고 천천히 일어선 셜리는 서리처럼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는 기모진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며 소만리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기 부인, 모진이 방금 잡아주지 말라고 한 것은 제가 방금 실수로 주사기를 부러뜨렸기 때문이에요. 혹시라도 당신이 부러진 주사 바늘을 밟을까 봐 염려해서요.”셜리는 오른팔을 들며 말했다.소만리는 그제야 부러진 작은 주사 바늘이 셜리의 팔뚝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잠시 후 셜리는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침착하게 주사 바늘을 뽑았다.“모진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니 이제 찬물에서 조금 진통을 진정시키면 될 거예요.”“고마워요. 셜리.”소만리는 감사의 말을 하고 돌아서서 기모진을 향해 시선을 떨구었다.그녀는 조금 온기가 느껴지는 그의 손을 잡고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모진, 이제 좀 나아졌어?”“응, 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기모진은 손을 들어 소만리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그래! 내가 옆에 있을게!”소만리는 가까이 다가가 있는
남사택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뭐라구요? 무슨 말이에요? 당신 누구야? 소만리는?”“내가 누군지 기억도 안 나? 남사택, 넌 정말 네 부모처럼 무정하구나.”셜리는 빈정거리며 대꾸했다.남사택은 여자의 말을 듣자마자 침묵에 빠졌고 몇 초가 지나서야 반응을 보였다.“당신이었군.”그의 마음속에 짚이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그가 한 말에 스스로도 적잖이 놀랐다. 놀랐다는 데에 모순이 느껴졌다.“그래, 나야.”셜리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남사택, 왠지 우리 곧 만날 것 같지 않아? 넌 별로 기대하지 않겠지만. 안 그래?”남사택은 다시 침묵에 빠졌고 셜리가 한 말은 무시하고 화제를 돌렸다.“당신이 왜 소만리의 전화를 받아? 소만리는? 기모진은 지금 좀 어때?”셜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아까 말했잖아. 그는 곧 죽을 거라고. 그의 아내가 슬퍼하며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기모진이 그렇게 목숨이 위태로울 리가 없어!”남사택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함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이 말을 끝으로 남사택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점점 빛을 잃어가는 핸드폰 화면을 보며 셜리는 더욱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남사택, 네가 뭔데 날 함부로 하겠다 말겠다 지껄이는 거야? 죽은 지 이미 몇 년이나 지난 두 사람 때문에? 흥!”셜리는 시큰둥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 위로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진 뒤 자신의 캐리어를 들고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방 문을 나가려다 말고 다시 캐비닛으로 다가온 셜리는 자신이 선물한 그 향수도 다시 가져갔다.화장실 안.소만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기모진의 곁에 함께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어느새 창밖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기모진의 체온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소만리, 나 이제 안 아파.”기모진은 소만리의 손을 잡고 피곤함과 불안함이 뒤섞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모진, 우리 집
소만리는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셜리, 어쩐 일로 여기 왔어요?”셜리는 의기양양하게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내가 전에 집으로 간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여기가 내 집이에요.”소만리는 눈앞에 있는 작은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가 셜리 집이에요?”“네, 여기가 내 집이에요.”셜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남사택에게 다가갔다.“남사택, 누나 왔어. 그런데 어떻게 하나도 기쁘지 않은 표정이야?”셜리의 말에 소만리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셜리, 당신이 남사택 누나예요?”“그래요. 내가 남사택의 누나에요. 같은 아빠, 같은 엄마를 둔 친남매죠.”셜리는 손을 들어 당당하게 남사택의 어깨를 두드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사택, 어떻게 네 친구들한테 내 소개도 안 했어?”남사택은 이 말을 듣고 마지못해 웃으며 말했다.“모두들 서로 다 아는 사이 같으니 소개는 따로 필요 없겠죠. 안에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하시죠.”그는 일부러 셜리를 피하는 듯 두어 발짝 먼저 앞서 걸어갔다.셜리는 입꼬리를 간특하게 끌어올리며 환하게 웃었다.“너무 오랜만에 집에 와 보네. 이번에 온 김에 어릴 적 추억이 가득한 집에서 편하게 쉬다 가야겠어.”그녀는 먼저 돌아서서 성큼성큼 들어갔다.남사택은 곧바로 소만리와 기모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들어가시죠.”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모진의 손을 잡았다. 기모진은 여전히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모진, 셜리가 남사택 누나였었네. 둘 다 의사인데다 둘 다 당신을 구해줬어. 세상이 이렇게 좁은지 몰랐어.”감탄 섞인 소만리의 말을 듣던 기모진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미소 지었다.“우리도 들어가자.”기모진은 소만리를 데리고 걸음을 옮기며 얼음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셜리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그는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오랜 계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셜리는 어린 시절의 추
남사택도 셜리를 부르지 않고 소만리와 기모진을 데리고 그가 일하는 방으로 갔다.방은 매우 컸고 안의 시설은 그가 병원에서 진찰할 때보다 더 최신식이었다.소만리는 남사택이 기모진에게 각종 검사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마지막으로 남사택은 기모진의 혈액 샘플을 채취하여 가장자리에 있는 기기에 넣어 직접 분석을 실행했다.기다리는 동안 소만리의 마음이 두근거렸다.하지만 방금 기모진의 혈액을 채취했을 때 보니 예전처럼 그렇게 색이 어둡지 않다는 것을 소만리는 똑똑히 보았다.그것은 분명 좋은 징조였다.대략 십여 분이 지나서 결과가 나왔다.“남사택, 기모진의 상태는 좀 어때요?”소만리가 절박하게 물었다.“소만리, 너무 걱정하지 마. 내 상황이 전보다 훨씬 나아졌을 거야.”기모진은 소만리의 손을 잡고 달래주었다.“정말 많이 나아졌다면 그날 왜 그렇게 심하게 재발했을까?”소만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과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남사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두 번 자세히 검사한 후 눈에 무슨 미묘한 빛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지만 이내 사라졌다.“좋아요. 괜찮네요.”남사택은 소만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보니까 천천히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아요.”남사택의 말을 들은 소만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사택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남사택, 고마워요.”남사택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소만리에게 시약 한 통을 건네주었다.“가져가서 필요할 때 써요. 다음에 재발하면 당신이 기모진한테 좀 놔주세요.”“고마워요.”소만리는 시약을 받아들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소만리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듯했지만 기모진은 방금 남사택의 눈에 스쳐 지나간 미묘한 빛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그는 소만리를 따돌리고 남사택과 단둘이 얘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 핑곗거리를 이리저리 찾고 있던 와중에 마침 위청재의 전화를 받았다.위청재는 소만리와 기모진에게 병원에 좀 와 보라고 했다.
남사택은 셜리가 들고 있는 투명한 액체를 힐끔 쳐다보았다.셜리는 투명한 액체에 가까운 향수 같은 작은 병을 손에 들고 있었다.“냄새 맡아봐.”셜리가 손에 든 향수병을 남사택에게 들이밀었다.뭔가 불길한 느낌을 예감한 남사택은 뚜껑을 열고 살짝 냄새를 맡은 뒤 안색이 확 변하기 시작했다.“이 안에 든 성분은...”“하하.”“어쩐지 갑자기 기모진이 재발하더라니. 이거 때문이었어!”남사택은 문득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남연풍, 의사의 소명은 사람을 구하는 거야. 사람을 해치는 게 아니라!”“의사? 허. 하하하...”셜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그들은 너를 사람을 구하는 백의의 천사로 키우려고 애를 썼지. 그런데 난? 난 이제 너희 같은 백의의 천사를 적으로 삼는 검은 악마일 뿐이야!”“남연풍, 너 엄마 아빠를 오해하고 있어. 그때 엄마 아빠는...”“나한테 그때 얘기 꺼내지도 마!”셜리는 험상궂은 얼굴로 말을 끊었고 성큼성큼 남사택을 앞으로 다가갔다.“네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해도 난 절대 마음 약해지지 않을 거야.”셜리는 가볍게 웃으며 도도하고 요염한 눈꼬리를 치켜올렸다.“남사택, 기모진은 내 실험용 대상이야. 네가 기모진을 구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덤벼봐. 네 능력이 더 센지 아니면 내 능력이 더 센지 보자구.”그녀는 발에 떨어진 액자를 힘껏 걷어차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남사택은 오래된 낡은 사진을 집어 들었다.20여 년 전 가족사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점차 어두워지다 허탈한 듯 한숨을 쉬었다.“사택.”남사택의 등 뒤에서 갑자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남사택이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보니 이유심이 노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내려놓고 다정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유심, 무슨 일이야?”“그 사람이 또 왔어.”유심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눈썹을
”사택, 이 사람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들어가자.”이유심은 남사택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팔을 꽉 잡았다.남사택도 더 이상 머물 생각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심의 손을 잡고 돌아서려 했다.“초요!”기묵비가 돌아서는 이유심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심은 그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기묵비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말했다.“초요.”그의 얼굴에 기대감이 잔뜩 묻어났다. 그러나 이유심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한 채 얼굴을 돌렸다.“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이미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난 그 무슨 초요라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자꾸 이렇게 쫓아오지 마세요. 정말 자꾸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 너무 짜증나요!”그녀는 짜증나고 귀찮다는 듯 기묵비에게 화를 토해 내었고 남사택의 팔을 잡더니 그 길로 돌아섰다.기묵비의 눈 속에 맴돌던 기대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고 그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졌다.그녀는 그를 향해 짜증나고 귀찮다고 말했다.예전에 초요가 기묵비에게 말했었다.당신이 날 장난감 인형처럼 여긴다 해도 당신을 계속 좋아할 것이고 당신한테 평생 엉겨 붙어 귀찮게 굴며 살 것이라고.바람이 불어와 기묵비의 시린 가슴에 차가운 기운을 보태었다.하지만 그가 누굴 원망할 수 있겠는가?그가 무슨 자격으로 원망할 수 있단 말인가?그가 지금 감사해야 할 것은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다.이유심은 바로 그의 초요이다.아직 완전히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그녀가 가까이 왔을 때의 느낌과 숨결은 초요 바로 그 자체였다.절대 틀림이 없다.초요.그 옛날 일을 당신이 어쩔 수 없이 잊어야 했던 거야? 아니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야?...병원.소만리는 원래부터 기모진의 검사가 끝나면 사화정을 보러 가려고 했다.그러나 갑자기 위청재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걱정스럽고 초조한 마음으로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왔다.병원에 도착한 후 소만리는 병실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바로 위청
기모진은 뭔가 마음에 켕기는 일이 있는 듯 손에 든 예약증을 움켜쥐었다.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결코 소만리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어떻게 소만리가 기모진한테서 한 시라도 눈을 뗄 수 있겠는가.“보여줘.”소만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기모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기모진은 소만리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순순히 방금 받은 예약증을 건넸다.소만리는 예약증을 손에 들고 눈을 내리깔고 내용을 살펴보았다.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충격과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번쩍 들어 기모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모진, 당신...”“소만리, 나 이미 결정했어.”기모진은 여사를 몰아 소만리의 손을 잡았다.“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야. 반대하지 않을 거지?”“당신이 이렇게 날 생각해 주는데 내가 어떻게 반대를 하겠어.”소만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모진, 우리의 미래가 앞으로 더 달콤했으면 좋겠어. 난 단지 당신과 우리 아이들이 다 함께 같이 잘 살아가길 바랄 뿐이야.”소만리의 말을 들은 기모진의 입꼬리가 한없이 말려 올라갔다.그들은 주위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정하게 서로를 감싸 안았다.“우리 가족은 당신이 바라는 대로 더 많이 달콤하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게 될 거야.”기모진은 소만리의 볼에 키스를 했다.“그래. 그럴 거야.”소만리의 가슴속에 나비가 날아다니듯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고 이 순간 기모진과 함께 할 수 있음에 더없이 행복했다.“그럼 나 먼저 클리닉에 가서 상황을 좀 물어볼게. 당신은 얼른 가서 장모님을 돌보고 있어.”기모진이 소만리를 품에서 떼어내며 말했다.소만리는 기모진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따돌린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기모진은 소만리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남사택에게 전화를 걸었다.남사택은 마치 전화를 기다린 사람처럼 바로 받았고 받자
소만리는 이틀 동안 병원에서 사화정을 돌봤고 의사의 말에 따라 사화정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사화정의 몸에는 별다르게 큰 문제는 없었지만 숨결이 좀 약했고 말이 좀 어눌한데다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아서 소만리는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기모진은 그런 소만리에게 자신의 건강 상태까지 알려서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가끔은 귀찮고 성가실 때도 있지만 밝고 귀여운 세 아이를 보고 있으면 기모진은 자신이 걱정하고 있던 모든 것이 싹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다.다만 웃을 줄만 알고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 공주를 보면 기모진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고개를 돌린 늦가을 오후, 기모진은 회사에 있었고 소만리는 사화정을 데리고 정원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기란군과 기여온 두 남매의 작은 머리가 오밀조밀 한곳을 바라보며 북을 치고 있었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는 해맑은 눈망울을 굴리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사방을 휘젓고 있었다.소만리는 이렇게 평화롭고 정겨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나 따뜻해졌다.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리클라이너 의자에 기대어 아이들의 미소를 바라보는 사화정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엄마, 엄마 웃네. 거 봐. 웃으니까 너무 좋잖아, 그렇지?”사화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껌뻑거리며 마치 소만리에게 화답하는 듯했다.소만리는 사화정의 이런 모습을 보니 너무나 기뻤다.사화정이 지금 정신이 혼미하고 게다가 자신을 딸로 알아보지도 못하지만 이렇게까지 나아졌다는 것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엄마, 나랑 여온이랑 같이 만든 거야. 엄마한테 줄게.”기란군의 맑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소만리는 고개를 돌려 기란군이 내미는 목걸이를 보았다.목걸이에는 작은 자수정 세 개가 있었는데 햇빛을 받아 현란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막내도 날 도와서 같이 만들었어.”기란군은 이 목걸이에 그의 동생도 관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기여온도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