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장미?소만리의 머릿속에는 그날 길가에서 보았던 그 여인이 떠올랐다.노란 장미를 들고 두 아이를 데리고 있던 그 여인.그런데 지금 소만리가 놀란 것은 이 여자의 목소리 때문이었다.이건 분명히 초요의 목소리였다!소만리는 몸을 홱 돌려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았다.마침 한 젊은 여인이 노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꽃집 입구를 나서고 있었다.이 수척한 모습의 여인은 바로 그날 꽃집 앞에서 소만리가 보았던 그 여자였다.이 사람은, 초요?믿을 수 없는 생각들이 소만리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초요!”소만리는 여자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지만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꽃집 문을 나섰다.소만리가 쫓아가려고 발길을 돌리자 꽃 가게 직원이 급히 그녀를 불렀다.“손님, 꽃 안 가지고 가셨는데요.”“고마워요!”소만리는 포장된 안개꽃 다발을 받아들고 서둘러 꽃집을 뛰쳐나갔다.기모진은 소만리가 꽃 가게로 들어간 후 줄곧 꽃집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 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아 통화를 하고 나서 눈을 들어 보니 소만리가 급하게 꽃집에서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망설임없이 바로 차에서 내려 소만리를 향해 달려갔다.“소만리, 왜 그래?”소만리는 꽃집 양옆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모진, 내가 나오기 전에 방금 꽃집에서 나온 젊은 여자 못 봤어?”기모진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방금 집에서 전화가 와서 뭘 물어보는 바람에 내가 그쪽을 못 봤어. 왜 그래?”“나 초요를 본 것 같아.”“초요?”“응!”소만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 여자가 노란 장미꽃을 사고 바로 갔어.”“소만리, 정말 초요인 것 같았어?”“내가 그 여자 얼굴은 못 봐서 백 퍼센트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 목소리, 그 목소리는 분명히 초요야!”소만리는 매우 침착하게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시선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여인에게 박혔다.
”그날 밤 내가 전화로 들은 그 여자의 목소리는 정말 초요와 같았어. 그런데 지금 남사택이 저 여자 곁에 나타났어. 저 둘은 도대체 무슨 사이일까? 초요라면 초요는 왜 남사택과 함께 있는 걸까?”소만리의 심장 박동이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고 이 젊은 여자의 정면을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이때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었고 소만리와 기모진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지만 공교롭게도 남사택은 그 여자와 두 아이를 데리고 바로 옆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소만리와 기모진이 쫓아갔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자 소만리는 더욱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남사택과 함께 있던 그 여자가 초요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초요가 그 후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살아있는 한 소만리는 그것만으로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했다.기 씨 본가로 돌아온 후에도 소만리와 기모진은 이 사실을 기묵비에게 알리지 않았다.뭔가 확실해지기 전에 그에게 헛된 희망을 줄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이때 기란군과 기여온 두 남매가 방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소만리는 하늘하늘 우주를 품은 듯한 안개꽃 다발을 뒤로 숨긴 채 방으로 들어갔다.“기란군, 여온아"기란군과 기여온 두 남매가 소만리의 목소리를 듣고 동시에 눈을 들어 소만리를 쳐다보았다.이 녀석들은 모두 엄마의 태도에 대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한동안 소만리가 집을 비운 후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그들 남매에게 차갑고 낯선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자신의 정신이 온전치 못해 아이들에게 냉대했다는 것을 깨달은 소만리는 자애로운 미소를 만면에 띠우며 두 아이를 향해 팔을 벌렸다.“기란군, 기여온. 왜 그래? 엄마 몰라?”기란군과 기여온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두 남매는 펜을 놓고 약속이나 한 듯 작은 다리를 내디디며 소만리를 향해 달려갔다.“엄마!”기란군은 소만리의 다리를 끌어안고 큰 눈을 말똥거리며 말했다.“엄마, 나 알아보겠어?”“미안해, 기란군.
기묵비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눈물이 그렁그렁한 그의 눈에 나타난 그 얼굴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초요. 초요.”그는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눈 속을 가득 채우던 눈물을 닦아내었다.눈앞을 스쳐가던 그 낯익은 모습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섰다.기묵비는 얼른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지만 지금은 한창 퇴근 시간이라 인파 속에 묻히고 말았다.그가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초요. 초요!”기묵비는 젊은 여인의 뒷모습을 향해 연신 소리쳤지만 먼 거리를 두고 여인은 묵묵히 제 갈 길로 가버렸다.기묵비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초요’라는 말에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기묵비는 반대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그저 건너편 길에서 나란히 그녀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돌아서서 길 끝 모퉁이로 들어갔다.“초요!”기묵비는 그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안절부절못했다.결국 그는 오가는 차량에도 불구하고 곧장 길 건너편으로 돌진했다.많은 운전자들이 창문을 내리고 머리를 내밀어 기묵비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화를 냈다.“죽을 셈이야! 이렇게 함부로 건너다니, 죽어도 싸!”기묵비는 이 사람들과 말싸움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그는 자신이 밤낮으로 오매불망 그리던 이 사람이 다시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그는 정말 무서웠다.하지만 기묵비가 모퉁이를 돌아 따라갔을 때 방금 그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초요. 초요!”기묵비는 당황하며 주변을 향해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으나 지나는 행인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만 보일 뿐 낯익은 그 모습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초요.”기묵비는 낙담한 듯 어둡게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 전체가 텅 빈 것 같았다.설마 그가 너무 그녀를 그리워한 나머지 방금 환영을 본
훤칠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여자의 머릿속이 갑자기 먼 옛날로 훅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엄마, 엄마.”아들이 부르는 소리에 여인은 그제야 멀어져 가던 정신을 붙잡았다.“엄마, 집에 가. 집에 가자구.”“그래.”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을 안고 다시 돌아섰다.몸을 돌린 후에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기묵비를 향해 고개가 돌아가서 몇 번을 쳐다보았다.기 씨 본가.저녁을 먹은 후 온 가족이 거실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웠다.소만리는 앞으로 자신의 삶이 무척 바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지금 그녀는 세 아이와 그리고 약간 기억을 잃은 엄마에게 둘러싸여 그동안 풀어내지 못한 애틋한 얘기들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다행히 기란군과 기여온 두 아이는 철이 들어서 소만리가 그들을 어르고 달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가장 신경을 많이 쓰고 마음을 위로해 줘야 할 사람은 사화정이다.그리고 막내아들도 아직 많이 어려서 소만리에게 달라붙어 뽀뽀를 하고 높이 들어 올려달라고 조르고 있었다.“우르르르, 까꿍!”막내아들은 큰 눈망울을 굴리며 천진난만하게 웃었고 계속 재미있는 놀이처럼 안아달라고 했다.소만리가 다시 손을 뻗어 막내아들을 안아올리려 하자 기모진이 다가와 막내를 안아갔다.“아빠가 안아줄게.”막내는 완강하게 짧은 다리를 뻗으며 작은 손을 소만리에게 뻗쳤다.역시나 아직은 기모진이 생소한 모양이었다.기모진도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녀석과의 관계 형성을 잘 맺어야 했다.자신의 행동에 충격을 받아 조산까지 하게 된 소만리를 생각하면 그는 더더욱 이 아이를 많이 안아주고 아껴주고 싶었다.기모진의 각종 장난감과 간식 공세에 어린 막내아들은 어느새 점점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소만리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기모진이 아이를 보는 동안 소만리는 편안하게 사화정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모현의 말을 듣자 기모진의 무거운 눈길에는 다행스러운 빛이 흘렀다.강연이 그에게 준 담배 때문에 읽어버렸던 중요한 기억들이 이제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그때의 화재는 제가 저지른 것이 아니에요.”기모진은 마침내 사실을 말할 기회가 생겼고 모현과 소만리는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모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 일에 대해서는 나한테 말했잖아. 비록 자네가 그때 강연에게 이용당해 기억을 잃었지만 이 불은.”“강연이 사람을 시켜 미리 불을 질러놓았고 나한테 전화를 걸어 이쪽으로 오게 만들어 날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했어요. 강연의 목적은 이 불을 내가 지른 것이라고 소만리가 오해하게 만들어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었어요.”기모진의 대답에 모현과 소만리는 깜짝 놀랐다.그들은 물론 지금 기모진이 한 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강연이라는 여자는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여자이기 때문이다.“모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소만리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쓰린 심정으로 안타깝게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갑자기 소만리는 죄책감이 느껴졌다.기모진은 지금까지 이런 억울함을 혼자 속으로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심지어 그 일로 인해 그녀를 잃고 그들의 결혼 생활도 파탄이 났지만 그는 자신을 위해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그동안 강연이 준 특제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 까닭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정신이 혼미했었어.”기모진의 말을 들으며 소만리는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그 당시 그녀의 눈앞에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불길을 본 순간 그녀는 모든 이성을 잃었다.강연에게 다른 속셈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소만리는 오직 강연이 기억을 잃은 기모진을 이용해 그에게 불을 지르게 했다고만 생각했다.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얼마 전 비행기를 타고 Y국으로 가던 비행기 안에서 난기류 때문에 머리를 부딪히고 나서야 모든 일이 생각났어.”기모진은 눈앞의 폐허
사화정은 그곳에서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찾았는지 손에 들고 감격에 겨워 바라보고 있었다.“찾았다! 여보! 이리 와 봐. 소만리!”사화정은 모현을 돌아보며 검게 그을린 가족사진 한 장을 펄럭이며 들어 올렸다.모현은 빠른 걸음으로 사화정의 곁으로 다가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사화정을 일으켜 세웠다.“여보, 얼른 일어나.”“여보, 이거 봐. 우리 딸 소만리야.”사화정은 사진 속에 거의 흐릿하게 보이는 인물을 가리키며 말했다.“소만리가 여기 있었어.”소만리는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그녀는 사화정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사화정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엄마, 소만리 여기 있잖아.”사화정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소만리의 말을 듣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어? 이 소만리 우리 딸 소만리랑 많이 닮았네.”“...”사화정은 진지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 말은 소만리의 심장을 사정없이 아프게 찔렀다.그녀가 바로 사화정이 그렇게도 그리던 바로 그 소중한 딸이건만 사화정은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만 여기고 있었다.“여보, 그렇지 않아? 정말 우리 딸 소만리랑 많이 닮았지?”사화정은 소만리를 가리켰다. 아름다운 사화정의 큰 눈에 천진난만한 놀라움이 가득했다.모현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그러네. 정말 많이 닮았어. 여보, 이 소만리를 우리 딸 소만리라고 생각하면 돼.”“어떻게 그래?”사화정은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부정했다.“우리한테는 하나뿐인 소중한 우리 딸 소만리가 있는데. 더구나 이 소만리한테도 부모가 있을 거 아냐? 그렇지?”사화정은 말을 마친 뒤 진지하게 소만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소만리는 말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오늘 여기 온 목적은 잃어버린 사화정의 기억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소만리의 상실과 슬픔을 지켜보던 기모진은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며 위로했다.“소만리 그리고 자네, 지금 봤지? 이제 어떡하면 좋겠나?
소만리는 갑자기 내려앉은 계단 아래로 뛰어갔다.전화를 받고 있던 모현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소만리의 고함을 듣고 안색이 달라지며 쏜살같이 뛰어들었다.소만리는 길을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기모진이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 남자를 보니 그녀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져 흔적도 없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모진!”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소만리가 기모진의 곁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을 들어 품에 안았다.“모진, 일어나 봐, 모진! 이러지 마! 나 놀래키지 마!”소만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고 두 손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그녀는 기모진의 얼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잘생긴 눈을 어루만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모진, 나 놀래키지 마, 제발. 제발 이러지 마. 당신을 잃는다면 난 정말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어.”“모진, 그동안 나 정말 힘들었어. 이제 남은 인생 당신이 날 지켜주고 보호해 줘야지. 당신이 없는 세상을 혼자 살아가게 하지 마. 알았지? 제발, 모진!”소만리는 머리를 숙이고 이마를 기모진의 이마에 바짝 붙였다.“모진.”“소만리, 어떻게 된 거야?”모현은 바닥에 누워 정신을 잃은 기모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 머리 위에 구멍이 뻥 뚫린 계단을 보며 순간 사건의 경위를 깨달았다.“소만리, 빨리 모진을 병원으로 데려가!”소만리는 기모진의 머리를 받쳐 들고 눈물로 얼룩진 눈을 치켜떴다.정신을 잃고 쓰러진 기모진의 모습을 보니 그녀는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정말이지 다시는 이런 비통한 감정을 겪고 싶지 않았다.소만리는 기모진을 안고 멍하니 얼어붙어 있었다.어디를 다쳤는지 알 길은 없었고 그저 이렇게 그의 몸에 흐르는 온기를 느껴야 그녀가 안심이 되었다.구급차가 곧 도착해서 기모진을 들것에 실어갔다.소만리도 모현도 구급차를 따라갔다.하지만 병원에 도착하고 난 후 모현은 뭔가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의사의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소만리는 명치끝에 얹힌 큰 바위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하지만 기모진은 괜찮은데 사화정이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소만리, 네가 우선 모진을 돌보고 있어. 난 엄마를 찾아보마.”모현은 소만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돌아섰다.황급히 떠나는 모현의 뒷모습을 보며 소만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소만리가 기모진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화정은 모현에게 있어 평생 사랑한 여인 그 자체였다.그런 사람에게 일이 생겼으니 그의 마음속 초조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기모진은 일반 병실로 옮겨졌고 소만리는 그의 침대 옆을 지키고 있었다.햇빛이 그의 아름답고 강직한 얼굴에 쏟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소만리는 그의 눈매를 살며시 어루만졌다.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잡고 손깍지를 한 다음 눈을 내리깔고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부부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갑자기 그녀의 귓가에 은은하고 낮은 목소리가 미끄러져 들어왔다.소만리가 눈을 번쩍 들고 촉촉하게 젖은 아름다운 눈동자를 애틋한 미소를 머금은 기모진의 눈동자에 맞추었다.“모진! 깨어났어!”소만리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응.”기모진은 손을 들어 소만리의 뺨을 어루만졌다.“당신만 괜찮으면 돼.”소만리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코끝이 찡해졌다.“모진, 당신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정말 걱정했어.”“겁내지 마. 앞으로 남은 인생 당신 잘 보필하며 살기로 약속했잖아. 나 그냥 하는 말 아니야.”소만리는 눈물을 머금고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여 기모진의 입술에 그녀의 입을 맞추었다.기모진은 싱글벙글 웃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말했다.“장모님은? 내가 막 계단으로 올라가서 장모님을 찾으려고 했는데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판자가 부러졌어. 장모님이 위층으로 올라가시지는 않은 것 같아.”그 말이 끝나자 기모진은 소만리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지는 것을 보았다.“엄마가 사라졌어.”“사라져?”기모진이 천천히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