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는 소파에 있는 깨끗한 옷 한 벌을 집어 들고 빠른 걸음으로 몸을 돌려 위층으로 뛰어갔다.그녀는 아무도 없는 방을 찾아 서둘러 상의를 갈아입은 다음 문을 잠그고 사방을 살폈다.주변은 소만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곳이었다.기모진이 이곳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하지만 1분 후면 자신이 또 위기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지금의 경연은 예전에 보았던 우아하고 기품 있는 군자의 모습을 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지금 악마가 되어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는 그야말로 잔혹한 악마 그 자체일 뿐이다.지금은 이미 저녁 8시.경찰과 IBCI요원들은 모두 기 씨 본가에서 소만리를 구해낼 방도를 상의하고 있었다.아마 지금까지 제대로 된 아빠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기여온은 계속 기모진의 품에 안겨 있었다.그녀는 말을 할 줄 안다. 하기는 한다. 그러나 ‘아빠’라는 말 두 글자뿐이었다.“아직 경연과 기 부인의 행방을 찾지 못했습니다.”IBCI 관계자는 경연의 핸드폰이 꺼져 위치추적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기모진은 위치 추적 앱을 켜서 소만리의 행방을 추적해 보려 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소만리, 기란군이 만들어 준 팔찌를 당신이 버렸을 리가 없어.경연이 팔찌에서 위치 추적을 발견하고 버린 걸까?소만리, 절대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안 돼.“아빠.”기여온은 여리고 보드라운 목소리로 기모진을 불렀다.호수처럼 맑고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모진을 바라보았다.“여온아, 엄마 보고 싶어?”기모진의 눈빛이 순간 부드러워졌다. 기여온은 진심을 담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기모진은 다정하게 아이를 달래었다.“아빠가 곧 엄마를 집으로 무사히 데려올 거야. 여온이 너무 걱정하지 마.”“아빠.”기란군이 다가와 말했다.“엄마 지금 어디 있는지 나 알아.”기모진을 포함해 집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란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 작고 귀엽게 생긴 얼굴에
천천히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주삿바늘을 보며 소만리는 죽을힘을 다해 버둥거렸다.그녀는 다리를 들어 자신을 잡고 있는 남자를 호되게 걷어찼다.남자는 생각지도 못한 소만리의 발길질에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소만리는 이 틈을 타서 두 남자에게서 벗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경연은 눈빛이 무거워지며 성큼성큼 걸어서 소만리의 허리를 휘어잡았다.“경연, 이 나쁜 놈아! 놔! 놔!”“내가 당신을 놓아주면 기모진이 승리를 거머쥘 텐데 내가 놓아줄 것 같아?”경연의 목소리는 소만리의 귓가에서 소름 끼치게 넘어왔다.그녀는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고 경연을 바라보았다.“경연, 당신이 주사한 대로 날 통제한다고 해도 난 단지 꼭두각시일 뿐이야. 난 영원히 너 같은 남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아. 나 소만리 평생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은 오직 기모진뿐이야!”소만리가 완강히 저항하며 하는 말을 듣고 경연은 눈썹을 찡그렸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소만리의 턱을 꽉 쥐어 그에게 마주 보게 하였다.“계속해.”그는 다시 입을 열어 명령했다.두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다시 소만리의 팔을 잡았다.이번에는 소만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었다.남사택도 재빨리 소만리 곁으로 다가와 과감하게 소만리의 정맥에 바늘을 꽂았다.차가운 액체가 정맥을 타고 뼛속까지 스며들었다.소만리는 핑크빛 입술을 오므리고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지만 눈빛만큼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경연은 소만리의 날카로운 눈빛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졸린 듯 빼곡히 들어찬 속눈썹을 몇 차례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경연은 여세를 몰아 소만리를 자신의 품에 안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출발 준비.”경연이 명령을 내렸고 막 소만리를 안고 떠나려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쏜살같이 달려왔다.“사장님, 밖에 젊은 여자가 왔어요. 사장님을
”깨어났어?”경연의 낮은 목소리가 가위눌리듯 귓가에 울려 퍼졌다.소만리는 소리가 나는 곳을 찾다가 옆에 앉아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며 자신을 바라보는 경연을 보았다.쫓기고 있는 수배자 답지 않게 한가한 자태였다.소만리가 막 몸을 움직이려다가 의자 양쪽에 자신의 두 손이 묶여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가 곁눈질로 힐끔 보니 검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시야에 들어왔다.여긴 하늘 위?그녀는 비행기 안에 있는 것이었다!소만리는 이를 악물고 유유자적한 자세를 하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경연, 나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우리 집으로. “경연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소만리는 그를 차갑게 흘겨보았다.“날 더 이상 좋아하지 마. 난 한 번도 당신을 좋아한 적 없어.”“당신이 날 좋아하든 싫어하든 당신이 내 혼인 증명서 상의 아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경연은 눈을 치켜뜨고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디로 가든 우리는 합법적인 부부야.”소만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와 경연의 혼인관계는 확실히 합법적인 것이었다.경연은 가시가 돋친 소만리의 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은 당신한테 말할 수 있어. 애초에 결혼으로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보호하자고 내가 IBCI의 상부에 제안했었어. 상부에서는 내가 이렇게 사심을 가지고 제안했을 거라고는 몰랐을 거야.”“경연, 당신 정말 비열해!”경연은 못마땅한 듯 가볍게 웃으며 손을 들어 소만리의 턱을 쥐었다.소만리는 옆으로 얼굴을 휙 돌렸지만 다시 경연이 힘껏 잡아 돌렸다.그의 눈에 어두운 기운이 가득 들어찼다.“그래, 나 비열해. 그래서 당신은 아마 평생 기모진을 다시는 보지 못할 거야.”“당신 그게 무슨 소리야?”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더 이상 침착하게 경연과 대치할 수 없었다.“경연,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소만리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그러나 경연은 웃으며 소만리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잠시
기모진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어디 있어요?”“방금 알아냈는데 경연이 자가용 경비행기를 타고 어제저녁 경도를 떠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경비행기의 착륙지는 어디죠?”기모진이 초조하게 물었다.“일단 그것은 불분명합니다.”동료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모진에게는 희망이었다.기모진의 희미한 눈동자에 점차 희망의 빛이 생겼고 그 빛은 더욱 밝아졌다.그는 기 씨 본가로 돌아와 황급히 자신의 용모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문을 나서려는데 기란군과 기여온이 두 남매가 그의 뒤를 졸졸이 따라왔다.“아빠, 아직 엄마 못 찾았어?”기란군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물었다.기모진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앞에 있는 두 어린 남매의 얼굴을 번갈아 어루만지며 봄바람처럼 보드라운 웃음을 띠었다.“기란군, 동생 잘 보고 있어. 아빠가 꼭 엄마 데리고 올게.”기란군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작은 눈썹에는 여전히 근심이 서려 있었다.기모진은 아들이 여전히 소만리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소만리는 그의 마음속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차라리 자신이 피를 흘리고 있을지언정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손상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그가 소만리의 안전을 걱정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갑자기 기여온이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기여온도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앙증맞은 팔을 뻗어 기모진의 목을 끌어안았다.“아빠.”여온이 또 아빠라고 불렀다.그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기모진의 거칠어진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었고 이내 그의 마음이 따뜻해졌다.“여온이, 착하지? 아빠가 지금 엄마 데리러 갔다 올 테니까 오빠랑 착하게 놀고 있어, 알았지?”그가 다정하게 얘기하자 두 아이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기모진은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지만 지금 그의 마음속에 더 안타깝고 그리운 사람은 소만리였다.그가 차에 오르자마자 경연의 자가용 경
”사모님을 모시고 씻고 옷을 갈아입혀 드리세요.”경연이 두 시중에게 분부를 내렸다.두 시중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네, 사장님.”경연은 자신을 노려보던 소만리를 한번 흘끔 쳐다보고서야 그 자리를 돌아섰다.두 시중은 소만리에게 다가가 옷을 갈아입고 씻는 것을 도우려고 공손하게 말했다.소만리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힘을 낼 수가 없었다.분명 그 두 번의 주사가 그녀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경연이 방을 나가자 한 젊은 여자가 그에게 달려와 애교 섞인 표정으로 기대감을 비치며 말했다.“자기야, 당신 이제 시간 좀 있지?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어?”경연은 눈앞의 여자를 흘겨보더니 유유히 걸음을 옮겨 아래층 거실로 갔다.그는 느긋하게 핸드폰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보아하니 경도의 경찰과 IBCI 요원들이 그의 행방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자기를 찾을 수가 있었지?경연은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잿빛 눈동자를 치켜세우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자기야, 나.”“경연. 앞으로 이렇게 경연이라고 불러.”그는 차갑게 말을 끊고 옆에 서 있는 여자를 힐끔 쳐다보았다.“알았어?”“그게, 자기...”여자는 아직도 옛정에 기대어 말을 걸려다가 갑자기 가라앉은 경연의 눈빛을 보고 두려움에 벌벌 떨며 고쳐 불렀다.“경, 경연.”경연은 자못 마음이 흡족했지만 눈꺼풀도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말해 봐. 무슨 생각으로 날 따라 여기 왔지?”여자는 경연의 말을 듣자마자 경연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앞에 있는 이 남자를 올려다보며 애처로운 눈빛을 가득 담아 말했다.“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야. 아니, 경연. 사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나 당신을 놓아줄 수가 없어.”경연은 이 말을 듣고 웃는 듯 마는 듯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양이응을 바라보았다.“당신이 놓지 못하는 게 나야? 돈 아냐?”“아,
시중이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경연의 가슴이 초조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소만리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양이응의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침실로 달려갔다.그런데 그가 막 침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꽃병 하나가 ‘펑'하고 그의 발 옆에 날아왔다.꽃병이 깨지며 파편이 그의 얼굴 쪽으로 튀어 올랐지만 그는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그는 꽃병 조각을 그대로 밟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소만리는 창가에 서 있었고 시중이 가져온 음식들은 모두 바닥에 엎질러져 있었다.소만리의 발치에는 피가 방울방울 떨어져 있었고 그녀의 둥근 손끝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여름 햇빛 아래 마치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조각처럼 서 있었다.“나가.”경연은 두 시중에게 명령했다.그는 입술 사이로 차가운 기운을 뿜으며 말을 뱉었다. 온화하고 점잖은 얼굴과는 딴판이었다.시중은 감히 앞서지 못하고 허둥지둥 그 방에서 나갔다.양이응도 경연을 따라 올라왔지만 방 안의 상황을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시중드는 사람들이 허겁지겁 달려 나와 문을 닫았다.“안에 무슨 일 있어요? 그 소만리라는 여자가 무슨 짓을 했어요?”양이응이 궁금해하며 물었다.그러나 시중들은 양이응을 힐끗 쳐다보고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문 앞의 꽃병 파편을 치웠다.양이응은 이를 갈며 닫힌 방문을 불만스러운 듯 노려보았다.방금 경연이 제시한 요구를 생각하니 그녀는 다시 가슴이 섬찟 떨려왔지만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더니 점차 그녀의 얼굴에도 음흉한 웃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방 안.경연은 천천히 소만리 곁으로 걸어갔다.유리 파편에 베인 채 피를 흘리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보며 경연이 손을 뻗었지만 소만리는 단호하게 그녀의 손을 거두었다.“건드리지 마.”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의 기세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그윽하던 경연의 눈빛이 차가워졌고 그는 다시 손을 뻗어 소만리의 손목을 잡았다.소만리는 몸을 피하면서 동시
소만리는 경연의 말을 듣고 눈을 들었다.경연의 짙은 잿빛 눈동자에서 음흉한 소유욕이 엿보였다.그는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굉장한 편집증적 성격을 가졌다.경연은 어느새 소만리의 다친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그녀는 손을 움츠리고 싶었다.경연이 그녀의 손을 힘껏 잡고 고개를 숙이고 피가 흐르는 그녀의 상처에 입술을 가져다 대려고 했기 때문이다.그는 그의 입술로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었나 보다.“뭐 하는 거야!”소만리는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남은 힘을 다해 경연을 밀어냈다.경연은 다시 살며시 피 묻은 상처에 입을 가까이 댔다. 비릿한 피냄새가 났다.그러나 말쑥한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흐뭇한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이 섬뜩할 정도였다.소만리는 이런 웃음을 본 적이 없었고 참을 수 없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아름다운 소만리의 눈동자에 혐오스러운 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경연은 더욱 간특한 미소를 띠었다.“당신은 두려울 게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당신도 두려운 게 있는 모양이군.”그는 소만리에게 점점 다가갔고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에 소만리의 눈에는 저항의 빛이 더 짙어졌다.“당신 피는 흔하지 않잖아, 당신 잊었어? 그러니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소만리는 경연을 노려보았다. 보면 볼수록 이 남자는 더욱 종잡을 수가 없었다.경연은 소만리가 자신을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고개를 숙여 소만리의 볼에 키스하려 했지만 소만리는 그를 피했다.경연은 아무 접촉도 하지 못하고 향긋한 그녀의 향기를 맡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입술을 오므린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상처를 잘 싸매고 어서 밥 먹어. 이틀 후에 만날 사람이 두 명 있으니까. 그 두 사람을 보고 나면 당신 분명히 기뻐할 거야.”소만리는 돌아서서 경연을 완전히 무시했다. 도저히 그를 더 이상 마주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경연도 더 머물지 않고 방문을 열고 시중에게 분부해 소만리에게 약 상자와 음식을 가져다주
경연이 떠난 뒤 소만리는 혼자 방에 있었다.시중이 다시 들어와 약 상자와 무늬가 아주 정교하게 새겨진 그릇에 식사를 가져다주었다.소만리는 아직도 피가 나오고 있는 손가락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자신의 혈액형이 희귀하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녀 스스로도 계속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다.“사모님, 제가 도와드릴게요.”젊은 시중이 소만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려고 친절하고 공손하게 다가왔다.생각해 보니 소만리도 자신이 방금 좀 충동적이었다고 느꼈고 침착해야 경연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네. 그래요. 부탁해요.”소만리는 시중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젊은 시중은 소만리가 아까처럼 저항하지 않자 기쁜 마음으로 상처를 싸매주었다.그녀는 매우 공손하게 소만리의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면봉과 알코올 솜을 조심스럽게 꺼내 소만리의 상처를 소독했다.소만리는 열심히 상처를 소독해 주는 시중을 보며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이름이 뭐예요?”“아희라고 합니다.”시중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마루를 청소하고 있는 또 다른 시중을 가리키며 말했다.“쟤는 아현이에요. 우리 둘이 사모님을 보살펴 드리는 것을 담담하고 있어요.”아희, 아현.소만리는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어 물었다.“아희, 여기가 어디예요?”“여기는 Y국에서 사장님이 지내시는 집이에요. 사모님 모르셨어요?”아희가 큰 눈을 깜빡이며 소만리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Y국?여기가 설마 Y국?잠깐.소만리는 문득 예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예선의 엄마는 Y국의 갑부라고 했다!이것이 과연 그녀가 경연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까?하지만 예선의 엄마는 지금 경도에 있을 것이다.소만리의 마음속에서 타올랐던 희망의 불꽃이 다시 사그라들었다.“사모님, 상처는 이미 다 쌌습니다. 당분간은 물에 닿지 않게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상처에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에요.”아희는 친절하게 당부하고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