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는 기모진의 포근한 품 안에서 하룻밤을 보냈다.잠에서 깨어보니 벌써 정오가 가까웠다.옆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니 소만리는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고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분명히 몇 년을 함께 한 부부인데 말이다.어젯밤 절제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니 그녀는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려오지만 남자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그가 없었던 지난 반년 동안 밤마다 외롭고 쓸쓸했었다.그가 돌아온 후에도 조금 의아한 마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편안하지 않았는데 어젯밤 그의 사랑스런 고백과 따스한 온기에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가 된 느낌이 들었다.소만리는 시선을 올려 그의 머리색을 살펴보았다.세 개의 해독제를 투여한 후 그의 머리카락 색깔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변화가 있어 보였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처음처럼 그렇게 옅지 않았다.보아하니 해독제가 정말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하지만 어젯밤 경연을 만났던 일을 떠올려보니 앞으로 네 번째 해독제는 그리 쉽게 내 주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소만리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급하게 일어서다가 핸드폰을 떨어뜨렸고 얼른 주웠다.경연의 이름이 핸드폰에 뜬 것을 보자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기모진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를 그의 품으로 끌어안았다.그는 그녀의 귓볼에 키스를 하고 그녀에게 착 기대어 말했다.“소만리, 나랑 좀 더 자자.”소만리는 아직도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 화면을 보며 가볍게 남자의 팔을 두드렸다.“이제 일어나야지. 우리 본가로 돌아가야 해.”그녀는 앉아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또 기모진의 팔이 그녀를 그의 품으로 이끌었다.그의 깊은 눈동자가 정면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의 가슴이 또 두근거리고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그녀는 기모진의 얇은 입술에 뽀뽀를 했다.“쪽, 굿모닝 키스야. 나 먼저 일어날게. 당신도 더 이상
경연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어젯밤의 일에 불만을 품은 듯 그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다.“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소만리도 참지 않고 차갑게 내뱉었다.“그렇다면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지?’경연은 더욱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냉담하게 되물었다.“어젯밤 당신은 경 부인의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어야 했어. 알아?”“내가 당신과 한 약속을 어기려고 한 게 아니야. 나도 모진이 갑자기 올 줄 몰랐어.”소만리가 계속 말을 이었다.“경연, 나 이미 당신이 요구하는 거 다 들어줬어. 하지만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있다구.”소만리가 말을 마치자 경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썹을 찌푸리며 뭔가 하고픈 말을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했다.“경연, 도대체 당신 목적이 뭐야? 남사택과는 어떤 사이야?”소만리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경연은 눈을 치켜떴고 그의 잿빛 눈동자에선 알 수 없는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더 물어보지 마.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을 테니까.”경연은 담담하게 소만리의 말을 되받아쳤고 옆에 놓여 있던 상자를 들고 소만리 앞에 놓았다.경연이 보여준 물건을 보고 소만리는 너무 뜻밖이어서 가슴이 뛰었다.상자에는 해독제가 가득 들어 있었다!소만리의 놀라는 듯한 눈빛을 보고 경연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옅게 웃었다.“한 달 치야.”한 달 치!이것은 소만리가 더없이 갈망하던 물건이었다.그러나 경연이 결코 쉽게 이 물건을 내어줄 리 없다는 걸 소만리는 누구보다 더 잘 안다.“이번엔 무슨 조건이야?”소만리가 말을 돌리지 않고 물었고 경연은 소만리의 적극적인 태도에 마음이 흡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도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조만간 요즘 가장 인기 있는 경쟁 입찰이 있을 거야. 이 프로젝트는 일단 따내면 엄청난 이윤을 남기게 돼. 난 무조건 따내야 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기모진이 그 입찰을 포기하게 하란 거지?”경
기모진의 경고를 들은 경연의 얼굴에 전에 없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그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딱딱하게 굳어졌다. 청순하고 온화한 얼굴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가득 들어찼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남사택에게 전화를 걸었다.“강연에게 어디 있는지 위치를 물어보고 바로 나한테 알려줘.”남사택은 즉시 경연의 지시에 따라 강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강연은 남사택이 주는 해독제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남사텍의 전화는 특별한 벨소리를 설정해 두었다.마침 강연은 어제 마지막 해독제를 다 썼기 때문에 남사택의 전화를 받고 매우 반가워하며 전화를 받았다.“남사택, 빨리 해독제 좀 줘!”그녀는 명령조로 말했다.“오늘 저녁 8시 경도 호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 가서 기다려. 누군가가 해독제를 가져다줄 거야.”남사택은 여유를 부리며 대답했다.강연은 못마땅한 듯 이를 악물었다.“남사택, 이 배신자! 처음에 누가 당신을 지원해 줬는지 잊었어? 지원 덕분에 당신이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 잊었어? 우리 오빠가 죽자마자 넌 바로...”“강연,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지 마. 네가 지금 살고 싶다면 잘난 척하는 아가씨 코스프레는 일찌감치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너...”강연은 몇 마디 욕을 더 퍼붓고 싶었지만 남사택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남사택이 한 말을 떠올리며 강연이 시계를 보았더니 8시까지는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밖을 한 바퀴 어슬렁거리다가 예전에 자신이 살던 집으로 가보았다.그곳은 이미 온통 차압 딱지가 붙어 있었다.강연의 마음속에 원망과 원한이 불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고 그녀의 모든 원한과 원망을 소만리에게 돌렸다.이날 강연은 소만리에게 어떻게 맞설지 계속 고민하다가 바로 호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으로 향했다.입구에 막 도착하자마자 강연은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고 밀고 들어갔다.해독제를 가져온 사람이 이미 왔는지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
성난 눈빛으로 가득 찬 경연을 보고 강연은 그제야 경연이 진심으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이렇게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깊은 어둠과 공포를 내뿜고 있는 경연의 얼굴을 보고 강연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경연, 왜 나를 죽이려 하는 거야? 난 당신한테 아무런 원한이나 감정이 없어. 당신은...”“당신 같은 멍청이는 이 세상에 살지 말아야 해.”경연이 차가운 말로 강연의 마음을 내리쳤다.“...”“강연, 그날 당신한테 물었었지. 당신이 어떻게 살아서 경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는지 아냐고. 지금 내가 말해주지. 그건 나 때문이야.”“뭐, 뭐라구?”강연이 놀라며 유유히 말을 하고 있는 경연을 바라보았다.“당신이라고?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지? 당신과 기모진이 손잡고 날 잡아들이고 또 날 풀어줬다고? 허!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믿을 것 같아!”강연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경연이 IBCI의 신분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갑자기 강연은 겁내지 않고 오히려 손을 들어 경연이 그녀의 이마에 대고 있던 총구를 밀치며 붉은 입술을 들썩이며 웃었다.“경연, 날 겁줄 필요 없어. 당신은 날 죽일 수 없어.”강연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당신은 IBCI 멤버이자 고위 지휘관이야. 당신은 매사에 민중의 이익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날 죽일 수...”“아.”총알은 소음기를 통과해 작은 소리를 내며 강연의 종아리를 단번에 관통했다.“아!”날카로운 통증을 느낀 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녀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고 온몸이 어두운 그림자로 둘러싸인 듯한 이 남자를 돌아보았다.“경, 경연, 너...” 경연은 발을 내디디며 까무러친 강연에게 다가갔다. 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담한 말을 내뱉었다.“만약 당신이 오늘 이렇게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강어와 함께 죽었을 거야.”“...”
어쩐지, 어쩐지...강연은 이제야 마침내 이해가 되었다!어쩐지 강연이 소만리를 괴롭힐 때마다 강어한테 그렇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더라니.알고 보니 그게 다 경연의 명령이었다!경연은 소만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강연이 소만리를 찾아가 계속해서 괴롭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강연이 계속 소만리를 찾아가 괴롭히면 경연의 계획이 엉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경연은 강어에게 거듭 여동생 관리를 제대로 하라고 경고했던 것이다!“허, 허허, 허허허...”강연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이렇게 된 거였구나. 결국 이렇게 될 거였어!그녀는 갑자기 머리를 번쩍 들어 탄환을 장전하고 있는 경연을 바라보았다.“경연, 너 정말 깊숙이 숨어서 개입하고 있었구나!”“당신 같은 사람들은 너무 어리석어.”경연은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웃으며 총으로 강연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남사택이 당신들을 위해 일하는 줄 알아? 당신 두 남매의 머리로 흑강당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치욕적인 경연의 말을 듣고 강연은 이를 악물었다.“경연, 네가 지금 날 죽인다면 당신도 발을 뺄 수 없게 될 거야!”“흥.”경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일어나 강연의 심장에 총구를 들이대었다.“강연, 기억해. 널 죽인 것은 내가 아니라 기모진이야. 사랑하고도 절대 네 것이 될 수 없었던 남자, 기모진이라구.”뭐?강연이 경연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펑'하고 총알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했다.강연은 순식간에 온몸이 굳어졌고 두 눈을 동그랗게 든 채 모든 감각을 잃고 피바다를 이룬 땅바닥에 쓰러졌다.경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총에 묻은 지문을 깨끗이 지운 다음 바닥에 던졌고 핸드폰을 꺼내 소만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소만리는 기 씨 본가로 가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경연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경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일 나 IBCI 본사로 돌아갈 거야.
기모진은 흩어져 있는 핏자국을 피해 이리저리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가까이 가져갔다.아무 동요 없는 평온한 심장이 이 여자가 그의 아내 소만리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듯했다.그가 소만리의 뒷모습을 잘못 볼 리가 없다.기모진이 다가가 보았더니 창백한 얼굴의 강연이 시야에 비쳤다.그는 놀라지는 않았지만 밀려오는 당혹감은 어쩔 수 없었다.강연은 분명히 F 국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죽어 있을 수 있지?”그는 손을 뻗어 강연의 경동맥을 짚어보았다. 이미 뛰는 느낌이 없었다.그녀는 이미 죽었다.기모진은 곧 경연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역시나 이건 함정이었다.그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화장실을 지날 때쯤 일부러 한 번 흘끗 보았다.그의 가슴 속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다시 솟구쳤다.소만리, 당신 어디 있어? 왜 당신 핸드폰은 꺼져 있는 거야?기모진이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고 여종업원이 코스요리를 들고 들어오다가 기모진과 마주쳤다.여종업원은 잠시 동안 기모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바닥에 흩어진 피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는 여자의 모습을 힐끗 보고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그릇들을 모두 바닥에 떨어뜨렸다.“아! 사람을 죽였어!”“살려주세요!”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방을 뛰쳐나갔고 마침 복도를 지나던 커플이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듣고 여종업원이 가리키는 방을 들여다보았다.마침 그들은 기모진이 방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혹시 기모진 아니세요?”“그 기모진이 사람을 죽였다고?”그 커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한달음에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와 상황을 목격하고는 모두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선명한 붉은빛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정말 섬뜩했다.놀란 커플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해 현장 상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인터넷에는 이미 각종 검색어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기모진의 이름도
”당신 정말 괜찮아? 지금 혼자 있어?”기모진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물었다.소만리가 얼른 대답했다.“응. 나 지금 운전해서 집에 가려던 참이었어.”그녀의 대답을 듣고 기모진은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그래, 그럼 얼른 집에 와. 기다릴게.”전화를 끊은 후 소만리는 뭔가 자꾸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기모진이 갑자기 왜 이렇게 긴장한 걸까?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그때 핸드폰에 몇 가지 메시지가 연이어 들어왔고 소만리가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이 예선한테서 전화가 왔다.예선의 말투는 기모진보다 더 다급해 보였다.“소만리, 이게 정말이야! 기모진이 강연을 죽였어?!”소만리의 신경이 쭈뼛거렸고 그녀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예선아, 그게 무슨 말이야?”“너 아직 인터넷 뉴스 못 봤어? 이미 여기저기 쫙 퍼졌어.”예선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난 강연 그 여자가 이미 F 국 감옥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녀가 풀려났었다니. 그 여자는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암튼 그런데 기모진이 이렇게 강연을 죽이면 자기도 감옥에 들어가게 될 텐데. 어떻게 된 거야? 왜 기모진은 그렇게 충동적이야?”소만리의 머릿속이 정신없이 윙윙 울렸다.그녀는 이미 전화기 너머 예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집중할 수도 없었다.강연은 확실히 경도에 있었다. 소만리도 이미 그건 알고 있었다.그날 강연을 만났을 때 소만리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일었고 그 악독한 여자를 죽이고 싶었다.그러나 설마, 기모진도 강연이 경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기모진, 당신 충동적으로 저질러버린 거야?소만리는 너무나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다가 겨우 핸드폰을 들었다.기모진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뉴스 알림이 파도처럼 계속 밀려왔다.그녀는 닥치는 대로 기사를 눌러보았다. 예선이 말한 내용이 보였다.강연이 경도 호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서 죽었다. 총을 세 발이나 맞았으며 심장을 겨눈 한
기모진의 이 말은 확실히 소만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그녀는 그렇게 긴장하고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당혹스럽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기모진에게 그 말의 의미를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경찰은 곧장 집으로 들어와 기모진에게 다가왔다.“기모진, 당신은 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의심됩니다. 지금 즉시 우리와 함께 경찰서에 가서 조사에 협조해 주십시오.”맨 앞에 선 경찰은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기모진에게 수갑을 채우려 했다.“당신들과 함께 수사에 협조할 수는 있지만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런 식으로 날 데려갈 수 없어요.”기모진은 수갑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순순히 문쪽으로 걸어갔다.“모진!”소만리가 뒤쫓아가자 기란군과 기여온도 따라왔다.기모진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오는 아이들을 보았다.그는 소만리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소만리,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 절대 당신 혼자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하지 않을 거야.”그의 눈동자에 흐르는 깊고 두터운 사랑을 느끼며 소만리의 눈가가 뜨거워졌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당신 올 때까지 집에서 기다릴게.”기모진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고 돌아서기 전에 기여온이 큰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여온아, 아빠가 무사히 돌아와서 널 오래오래 지켜줄게...기모진은 처음 경찰서에 온 것도 아니어서 이른바 강압적인 수사 협조에도 끄떡없이 침착하게 임했다.“기모진, 피해자 강연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어요.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경찰이 물었다.“해명할 게 없어요.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 이미 죽어 있었거든요.”기모진은 솔직하고 담담하게 대답했다.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당신 이전에 강연과 연인 사이 아니었나요?”이 질문에 기모진은 눈썹을 찡그렸고 이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내 아내 소만리 외에 나한테 다른 여자는 없어요.”“그렇지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