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강자풍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공장 건물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그녀는 순식간에 기모진이 복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철문에 뛰어들어 공장 안의 상황을 보려고 했다.철문에 들어서자마자 기모진이 공장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마치 정교한 조각품처럼 차갑고 쓸쓸하게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황급히 소방서에 전화를 건 후 바로 기모진의 앞으로 달려갔다.남자는 그제야 소만리가 온 것을 알아차렸고 어두웠던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소만리, 여긴 어떻게 왔어? 빨리 가.”기모진이 그녀를 잡아당기며 바깥의 불꽃이 그녀에게 스치지 않도록 했다.소만리가 그의 손을 밀쳐내었다. 눈동자에 타는 듯 근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당신 뭐 하는 거야! 당신 지금 뭐 하는지 알아!”“알아.”기모진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며 타오르는 불꽃을 아무런 온기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강연은 죽어야 해.”“강연이 죽어야 하는 건 맞지만 당신이 이렇게 할 필요는 없어!”소만리가 애가 타서 안의 상황을 보려고 시도했지만 기모진에게 안겨서 볼 수 없었다.소만리는 발버둥을 쳤다. 두 눈이 불빛에 빨갛게 그을린 탓인지 어찌 된 건지 모르지만 촉촉히 젖어있었다.“강연과 양이응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지! 기모진, 지금 아직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그러나 기모진은 여전히 침착하게 소만리를 안고 말했다.“소만리, 그 여자들 때문에 당신 마음이 약해질 필요 없어.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어.”소만리는 이 남자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녀가 어떻게 강연과 양이응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단 말인가?“기모진, 당신은 내 부모님의 복수를 하는 게 아니야. 당신 인생을 망치고 있는 거라구! 알기나 해!”소만리가 하는 말을 듣고 기모진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 인생은 소만리 당신을 잃은 후 더 이상 빛이
소만리의 울먹이는 눈동자를 보며 기모진의 표정에 마침내 동요가 일었다.그는 소만리의 절규하는 부탁을 더 이상 묵살할 수 없었고 그녀의 뜻과 어긋나는 일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저 문 밑에 있을 거야.”기모진이 입을 열었다. 소만리는 황급히 강자풍에게 외쳤다.“문 아래쪽에 열쇠 있어!”강자풍은 소만리의 말을 듣자마자 땅바닥에 주저앉아 더듬어 보니 정말 열쇠가 만져졌다.그는 문을 열 후 강어와 차례로 돌진해 이미 기절해 있는 강연과 양이응을 끌어안았다.강연과 양이응의 몸에 휘발유가 묻어 있었기 때문에 불길을 빠져나오는 순간에도 산발적인 불꽃이 그녀들의 몸에서 튀었다.때마침 소방관이 달려와 불길을 모두 껐다.강연과 양이응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둘 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그러나 강연의 한쪽 머리는 마치 개한테 물려 뜯긴 듯 짧았고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소만리는 강연과 양이응이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공포를 쓸어내리며 차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기모진이 이런 행동을 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마음속으로 얼마나 강연이 원망스럽고 또 그만큼이나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울 것이다.소만리는 사화정과 모현의 사진을 꺼내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엄마 아빠, 내가 방금 기모진을 말린 거 원망스럽지 않으세요?”그녀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마음속으로 괴로움을 삼켰다.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의 부모를 죽인 범인이 되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어느새 큰 돌덩이가 그녀의 심장을 압박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소만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죄책감이 들고 미안했다.이유야 어찌 되었든 기모진이 사화정과 모현을 죽였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의 삶과 미래가 너무나 걱정되고 신경이 쓰였다.생각에 여기까지 이르자 소만리는 자신도 유죄라고 느껴졌다.소만리는 하얀 국화 한 다발과 카네이션 한 다발을 사들고 묘지에 도착했다.묘지에 다가가기도 전에
기모진은 울먹이며 소만리를 뒤로한 뒤 마음을 독하게 먹고 돌아섰다.기모진은 하루 동안 세 아이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비록 여온은 여전히 그를 잘생긴 오빠라고 불렀지만 그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날이 어두워졌을 때 소만리가 돌아왔다.기모진이 다시 서명한 이혼 합의서를 소만리 앞에 내미는 순간 그는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강연이 말한 만성 독소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소만리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소만리, 더 이상 당신을 힘들게 하지 않을게. 누군가를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소유할 필요는 없으니까. 당신이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 난 그걸로 충분히 기뻐.”위청재는 옆에서 기모진이 하는 말을 듣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모진아, 너 그게 무슨 뜻이냐? 정말 소만리랑 헤어질 생각이냐?”그녀가 물었지만 기모진은 대답하지 않았다.위청재는 다시 소만리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소만리, 내가 예전에 널 힘들게 하고 미워한 일도 네가 용서해 줬잖아. 정말 모진이는 용서가 안 되는 거냐?”위청재가 말을 이었다.“모진이가 잘못은 했지만 기억을 잃었을 때 강연이라는 그 여자한테 이용당해서 그런 거잖니. 소만리...”“소만리가 날 용서한다고 해도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기모진이 위청재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소만리는 이혼 합의서를 보며 책상 위에 있던 펜을 집어 들고 결국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위청재는 이 광경을 보고 안타까운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기모진의 마음도 깊은 바다로 가라앉았고 끝을 알 수 없을 만큼의 추위와 서늘함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소만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혼 합의서를 들고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최대한 피하며 가방을 챙겼다.“가능한 한 빨리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수속을 밟을 거예요. 당신은 언제든 아이를 보러 와도 돼요. 그렇지만 기 씨 그룹은 원하지 않아요. 내일 이곳을 떠나겠어요. 지금부터 나는 당신과 아무
”남사택?”기모진은 곧 따라갔다. 확실히 남사택을 보았다.남사택의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안경을 쓰고 있었고 점잖아 보였다.겉으로 보기에 이렇게 고상하고 점잖아 보이는 남자가 남의 목숨을 가지고 실험을 한 것이다.기모진은 남사택이 소만리에게 한 모든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남사택을 믿고 있었고 남사택이 진심으로 성심성의껏 자신을 구해줬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녀는 남사택의 실험 대상일 뿐이었다.왜 그때 남사택이 소만리에게 계속 그가 처방한 진통제를 먹으라고 했는지 지금까지도 소만리는 알지 못했다.남사택은 사무실에 자료를 가지러 돌아왔는데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기모진이 눈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남사택의 눈에는 당황스러운 빛이 역력했지만 이내 진정하고 말했다.“기모진? 나한테 무슨 볼 일이 있어요?”기모진은 사무실 문을 뒤로 잠그고 곧장 남사택에게로 갔다.가느다란 기모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의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덕목도 없는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의사 가운을 입어?”남사택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기모진, 무슨 말이에요?”“당신이 뭘 했는지 모르겠어?”기모진은 남사택의 멱살을 확 잡아당겼다.“소만리는 그렇게 당신을 믿고 친구로 대했는데 당신은 소만리를 실험 대상으로 여기다니, 당신 정말 죽일 놈이야!”기모진은 참다못해 남사택의 뺨을 한 대 휘둘렀다.안경이 바닥에 떨어지고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 남사택은 안경을 주워 들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쓴웃음을 지은 뒤 말했다.“기모진, 지금은 당신 자신이나 잘 돌봐야 할 것 같은데요.”남사택은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그래요. 내가 소만리를 실험 대상으로 대했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감옥에서 죽은 목숨이 되었을 거예요. 흥, 소만리가 감옥에 가게 된 게 다 당신 기모진 덕분이라는 걸 잊었나 봐요.”남사택은 기모진의 마음속 아픈 구석을 사정없이 공격했고 기모진의 표정이 약간 변하기 시
남사택은 확실히 연구와 실험에 열정적으로 빠져드는 사람이었다.그에게 있어서 실험이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는 순간만큼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가 이 연구에 기술적 물적 지원을 받으려면 흑강당에 의존해야 했던 것이다.왜냐하면 남사택 본인 스스로는 그럴 능력도, 재력도, 세력도 없기 때문이다.기모진은 남사택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기모진이 혈액 검사 결과를 가지고 아는 교수에게 물어보니 비슷한 대답을 했다기모진의 혈액에 이미 변이가 생겼고 추가 신체검사를 통해 가능한 한 빨리 원인을 규명해 치료할 것을 권유하였다.하지만 기모진은 이미 그 원인을 잘 알고 있었고 치료하기 정말 어렵다는 것도 알았다.남사택이 말한 두 가지 선택지를 생각하며 기모진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그는 당장 남사택의 입을 열게 해서 해결 방법을 모색할 수 있었지만 앞서 소만리가 이렇게 긴장하며 그를 잡고 한 말이 떠올랐다.“기모진,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또다시 잘못된 일을 하지 마.”소만리, 다시는 잘못된 길을 가지 않을 거야.기모진은 검사 결과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병원을 떠났다.그가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검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차창이 천천히 내려지고 눈에 익은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기 사장님, 차에 타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한 중년 남자가 예의 바르게 물었다.기모진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당신 M국에서 온 거 아닙니까?”“기 사장님의 관찰력이 굉장히 예리하시군요. 차에 올라타서 잠깐 얘기 나눌 수 있는 영광을 줄 수 있겠습니까?”남자는 또다시 정중하게 권했다.기모진은 거절하며 말했다.“죄송합니다만 시간이 없어요.”“기 사장님, 잠깐만요.”남자는 그를 붙잡고 차에서 내려 명함을 내밀었다.“기 사장님, 이것 좀 잠시 봐 주시죠.”기모진은 냉담한 눈으로 힐끗 보았고 명함에서 네 글자로 된 약자를 보자마자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중년 남자는
소만리가 궁금해서 계속 물으니 경연은 온화한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소문난 젊은 화가란 닉네임이 붙은 줄 알아요?”경연이 되물었다. 소만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볍게 웃었다.“들을 준비가 됐으니 말해 보세요.”경연은 시선을 소만리에게 돌리며 바라보았다.“왜냐하면 당신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에요.”“저요?”소만리는 점점 어리둥절해졌고 이어 경연이 몇 년 전의 일을 말했다.그때 소만리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여름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아르바이트를 구하다가 결국 디저트 가게 일을 구하게 되었고 가게 앞에 그림을 파는 노점상이 있었다.소만리는 당시 아직 주얼리 디자인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그림에 관심이 많았기에 다가가 보았다.작품들이 모두 꽤 흥미로웠다.그녀는 그중 한 작품을 집어 들어 보기 시작했다.그러자 한 소년이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사실래요?”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그 소년이 말을 했다.“이 그림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주세요.”“...”그때 소만리는 순수한 소녀였고 남의 그림을 들고 있다가 바로 내려놓기가 민망해서 주머니를 뒤졌는데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뿐이었다.핸드폰에는 충전된 돈이 있었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내려고 준비한 것이어서 여윳돈이 없었다.그녀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내밀며 말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이 돈밖에 없어요.”그리고 그녀는 격려하듯 말을 이었다.“학생, 학생 그림 정말 독특해요. 계속 힘내세요. 학생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잠재력과 재질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소만리는 당시 그 그림을 가지고 갔고 소년은 그녀가 준 오백 원짜리 동전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이 말을 듣고 소만리는 마침내 예전에 경연이 오백 원을 기억하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던 것을 이해했다.그러나 이 일을 그녀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만약 경연이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평생
한 달이 지났다.소만리는 기모진이 어디에 있는지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오히려 강자풍에게 들어서 강연의 소식은 알고 있었다.강연은 강어에게 심하게 욕을 먹고 F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하지만 강연이 한 일들이 어떻게 이렇게 욕 몇 마디로 뜨뜻미지근하게 끝낼 일인가.소만리는 비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을 잊지 않았다.강연이 F국에 머문 지는 한 달쯤 되었고 이전에 같이 어울려 놀았던 친구들이 경도에서 소만리라는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한 일에 대해 물을 때면 체면이 구겨졌다.어렸을 때부터 아무도 감히 그녀를 비웃지 못하고 안하무인으로 켰는데 당당하고 도도하던 강연이 지금은 천하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강연은 F국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어딜 가도 소만리에게 무릎 꿇고 사과한 걸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강연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도저히 숨을 삼킬 수가 없어서 강어와 강자풍 몰래 경도로 다시 돌아왔다.경도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먼저 기모진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기모진이 소만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정말 속이 후련했다.어차피 기모진이 소만리의 부모를 죽인 살인범이서 결국 두 사람은 함께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소만리는 강연이 다시 경도로 돌아온 사실을 몰랐다.한 달 넘게 아이를 키우고 일에 전념하는 것 외에는 때때로 경연을 만나 밥을 먹는 것뿐이었다.다만 밤이 깊어 혼자 침대에서 잠이 들 때마다 눈을 감으면 참혹하게 죽은 부모와 행방불명이 된 기모진이 떠올랐다.소만리는 떠나기 전 기모진이 소만리에게 했던 말을 깊이 생각했다.[나중에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 여온이에게는 내가 친아빠라는 걸 알릴 필요 없어. 더 이상 필요 없어.]필요 없어?소만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가 그녀의 부모님께 속죄한단 말인가?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소만리의 심장이 빨라지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안 돼.그는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일을 하지 않을 거야.안 돼.
강연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지만 기모진이 매혹적인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다시 한번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담배.”담배.그는 그녀에게 담배를 달라고 물어보러 온 것이었다.강연의 두 눈이 번쩍 빛나며 당황스러웠던 빛이 한순간 사라졌다.아무리 참을성 있는 남자라도 독소에 의해 몸과 마음이 파괴되는 고통을 견딜 수는 없는 것이었다.강연은 어슬렁어슬렁 기모진에게 다가가 웃음을 터뜨리며 초췌해 보이는 얼굴을 감상하듯 쳐다보았다.“기모진, 담배는 줄 수 있지만 지금부터 당신이 기꺼이 내 남자가 되어 주어야 해.”강연이 조건을 제시했고 눈 속에는 기모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했다.기모진은 추악하게 웃는 이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좋아.”기모진이 승낙하자 강연은 기뻐하며 술기운에 붉어진 눈동자를 반짝이며 기모진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결심을 증명해 보일 수 있겠어? 당신도 알다시피 전에 당신이 소만리 때문에 나한테 무섭게 굴었잖아. 당신이 지금 나를 위로하고 달래주지 않으면 난 좀 무서워.”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기모진은 명확하게 알아들었다.“호텔, 당신이 골라.”기모진은 명쾌하고 짧게 그녀가 원하는 말을 했다.강연은 너무 기뻤다. 기모진과 함께 밤을 보낼 날이 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즉시 가까운 호텔을 골라 방을 예약하고 신바람이 나서 앞장서서 그를 이끌었다.방에 들어서자 강연은 얼른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서둘러 했다.그녀는 대충 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를 흔들었다.아까 술집에서 좀 많이 마셔서 약간 어지럽지만 기분은 좋았다.강연은 목욕 타월을 몸에 두르고 욕실 문을 여는 순간 기모진이 피워 놓은 듯한 향초에서 아주 특별한 향기를 느꼈다.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오매불망 그리던 남자가 침대 옆에 앉자 강연은 다급하게 이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하룻밤이 지났다.강연이 몸을 뒤척이며 깨어났을 때 기모진이 침대 옆에서 옷을 입고 있는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