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나가 계세요.”기모진은 전예의 말허리를 잘랐고, 그녀는 아무 말 없는 소만영을 흘긋 보고는 눈물을 닦으면서 얘기했다.“그럼 만영이 곁에 좀 있어 줘. 절대 자극하지 말고.”그녀는 몸을 돌려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기모진은 병상 위에서 아무 말 없이 누워있는 소만영을 보면서 그녀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소만영은 슬픈 얼굴로 눈을 감고 그를 보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이 바닥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의사 불러서 치료하라고 했으니까 네 다리 곧 나을 거야.”그는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내 얼굴 보기 싫은 거면 지금 갈게.”그 말에 소만영은 머리를 휙 돌리더니 팔을 뻗어 기모진의 손을 꽉 잡았다.“모진아, 가지 마!”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리 준비해뒀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모진아, 이젠 나 싫어졌어? 내 얼굴 전혀 보고 싶지 않아?”연약한 목소리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그녀를 더욱 초췌해 보이게 했다.“모진아, 그거 알아? 난 내 전부를 잃는다고 해도,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난 너 절대 못 잃어. 네가 없으면 난 정말 죽을 거야!”그녀는 처량한 표정으로 소리 내 통곡하기 시작했고 남들이 보기엔 충분히 가슴 아플 광경이었지만, 기모진은 마치 그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그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소만영은 훌쩍거렸고 눈물은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모진아, 내가 잘못해서 너 실망시킨 거 알아. 그런데 우리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돼?”“기회?”기모진은 그 말에 드디어 반응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냉랭한 어투로 얘기했다.“그럼 소만리한테는 기회를 줬었어?”“…”기모진의 역질문을 생각하지 못한 그녀는 당황했다. 소만영은 발갛게 물든 눈으로 기모진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고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래서, 진짜 나 버리겠다고?”소만영은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짓씹다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
기모진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무슨 소리죠?”“기모진, 꼭 만리를 그렇게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겠어? 그 애는 널 사랑하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용서 못 할 일이야? 얼른 말해, 도대체 만리를 어디로 데려간 건지!”소군연은 다급한 음성으로 추궁했고,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근심이 묻어나왔다. 소만리는 이미 죽었는데 그는 아직도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모진은 바로 천미랍이 떠올랐다. 소군연이 소만리가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천미랍 때문일 것이다. 천미랍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기모진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더 생각할 새도 없이 그는 얼른 소만영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려 나갔고, 소만영은 경악한 표정으로 잠시 경직돼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땐 기모진은 이미 병실을 떠난 뒤였다.“모진아, 모진아! 너 어디가!”그녀가 급히 물었지만 기모진은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그녀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리고 문밖에 서 있던 전예는 기모진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는 얼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소만영은 얼굴을 잔뜩 굳힌 채로 화가 난 듯이 병상 위에 놓인 물컵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전예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만영아, 어때? 아까 모진이랑 어떻게 됐어?”“흥, 어떻긴?”소만영은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엔 노기와 불만이 가득했다.“나한테 여태껏 좋아한 사람이 소만리라고 하다니, 소만리 그 천한 것을 좋아한다고?”“…”전예는 잠깐 멈칫했다가 조심스레 얘기했다.“그러니까 모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걔가 어릴 때 만났던 소만리라는 얘기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모진이는 그 애가 너인 줄 알잖아!”전예의 위로의 말은 소만영의 화를 억누르지 못했고 도리어 불 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었다. 기모진이 아까 한 말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기모진이 줄곧 좋아한 건 소만리였다. 좋아하다 못해 이
"그렇다면 당신은 그렇게 말 할 자격이 있나? 그때 당신은 내 아내를 데려가서는 길가에서 꽁냥대며 마라탕을 드시던데..? 그리고 당신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지. 그리고… 대낮에 그녀에게 키스까지 했던 건… 다.. 지워버린 건가?"기모진이 질문을 하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 대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의 오싹한 기운만이 느껴졌다."소군연.. 내가 너에게 말하는데, 소만리는 손끝에서 발끝까지 내 여자야… 비록.. 그녀는 세상을 떠났지만, 남아있는 그녀의 재까지 모두 내 소유라고. 그런데 넌 뭐지? 넌 유부녀를 빼앗으려는 망상에 갇힌 불륜남일 뿐이야. 정신차리라고."기모진의 말이 끝나자 소군연은 살짝 웃음지었다."불륜남이라..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럼 그거 알아? 바로 네가 소만영이라는 불륜녀를 내버려두지만 않았어도 만리는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그저 그녀의 죽음을 방관한 협잡꾼에 불과하다고!"기모진의 평온했던 표정에 갑자기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그는 소만리가 하나씩 입어가던 상처를 만든 가해자 역할에 가담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몸에 있는 상처, 흐르던 피.. 그 절반은 그가 직접 만든 것들이었다.기모진은 눈살을 찌푸렸다."소군연.. 내가 지금 너와 이런 것들을 따지려고 한 게 아닐 텐데.."소군연도 그제서야 비로소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의심스럽게 기모진을 바라보았다."정말 네가 사람을 써서 만리를 납치하라고 한 것이 아니야?""그녀는 만리가 아니야."기모진은 거듭 강조했다."아직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려는 건가?"소군연은 계속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했다."난 세상에 그렇게 똑같은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아. 만리는 분명 너에게 세뇌된 거야!""하."기모진은 낮은 소리로 나지막이 웃었다. 그의 눈빛은 순간 끝을 모를 쓸쓸함에 휩싸였다."네가 말한
소만리의 심장은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고 덩달아 긴장까지 되었다.소리를 들어보니 자신을 납치한 인간들이 문 앞에 와있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곧 바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그녀는 두 손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버려진 의자 옆으로 기어갔다. 그 때 바깥에서 자물쇠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바깥에서 자물쇠를 열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에 돌 하나를 집어 들고는 의자 위로 발을 디뎠다."아오씨! 이 문은 네가 좀 전에 열었었잖아! 대체 열쇠를 어떻게 하다가 잃어버린 거야? 빨리 찾아오라고!" 문밖에서 갑자기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소만리는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고 이건 바로 좋은 기회였다.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살짝 깨진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돌을 집어 들어 힘껏 내리쳤다.“쨍그랑!!!”유리는 곧바로 깨지며 맑은 파열음을 냈다. 별안간 문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몇 초가 흐른 뒤에서야 화가 나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제길! 여기 안에 있는 기집애가 도망가진 않겠죠?"“뭐?! 도망갔다고요?”화가 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람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했다. “문 좀 걷어차봐요! 당신 둘은 바로 밖으로 나가서 어디로 도망갔는지 샅샅이 뒤지고요. 그 기집애가 도망쳐봤자 얼마 가지 못했을 거라고요!"말소리와 함께 캄캄한 방의 문은 세차게 부딪혀 열렸다. 소만영과 두 사내들이 방 안으로 뛰어왔다.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밧줄들이 눈에 들어왔다."천미라아압!!!" 소만영은 치를 떨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삐죽 빼죽 깨진 유리창 사이로 천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아니 진짜 도망쳤잖아! 당신들 빨리 그 기집애를 잡아와요! 만약 못 잡아오면 돈이고 뭐고 그냥 매장될 줄 알아!”"가자! 빨리 쫓아가!" 건달들은 곧바로 소만리를 뒤쫓았다.그 사이 소만영은 떨어진 밧줄에 발길질을 해대며 악에 받쳐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걱정은 점점 더 커져갔다.그때 마침 그의 휴대전화로 익명의 문자가 왔다.[서쪽 교외 종이공장. 천미랍은 거기에 있다. 빨리 그녀를 구하러 가라.]기모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문자가 온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되지 않았다.그는 많은 생각과 의심을 할 틈도 없이 바로 핸들을 돌려 문자에 적힌 주소로 달려갔다.날이 어둑어둑 해지자 소만리는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머물러야 했다.그녀가 갇혀 있던 곳 주변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소만영이 여전히 건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어렴풋이 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건달들이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로 돌아왔다.그들은 소만리가 깨진 유리창 너머로 도망가지 않았음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소만리가 던진 돌멩이는 그들의 주의를 돌리는데 매우 성공적이었다.“이 쓸모 없는 밥통들아!” 소만영은 화가 나서 몇 명의 남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한바탕 욕을 쏟아 부었다. 그 후 그녀가 돌아가려고 하자 뺨에 칼자국이 난 두목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사람은 도망갔지만서도, 우리 아그들이 그쪽을 위해 하루 종일 뛰어다녔잖는가? 그라믄 돈은 좀 줘야제~”소만영은 그 말을 듣고서 비웃으며 팔짱을 꼈다. 마치 의기양양한 마님 같았다. “잡아오라는 사람은 잡아오지도 못하면서 지금 돈을 달라고? 니네 목숨이 붙어있기를 바란다 내가. 이 쓸모 없는 것들아!" 그녀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째려보며 돌아섰으나, 두 걸음을 채 옮기지도 못하고 두 사내에게 붙잡혔다. 화가 난 소만영은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부으려다 뺨을 세게 맞았다. 뺨에 칼자국이 난 두목이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매서운 눈빛으로 소만영의 기를 꺾어버렸다.“너…너 뭐 하는 거야?! 빨리 놔줘!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말이야…….”“좀 닥치소. 이 멍청한 아가씨야~ 우리는 그짜기 누군지 관심도 없고, 그냥 돈만 주면 된다니까네!” 두목은 또 다시 소만영의 뺨을 한 대 때렸다.소만영은 너무 아파서 참지
두 명의 건달들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빠르게 뛰어들었다. 그러나 방 안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아 어둠 속에서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휴대전화의 후레쉬를 켜려고 하자 갑자기 사람 그림자가 뒤편의 벽면으로 스쳐 지나갔다.두 사람이 급히 뒤를 돌아보자 소만리는 손에 들고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는 뒤돌아 뛰쳐나갔다.건달들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의자를 막았다. “아이씨! 저 년 저거 진짜 여기 있었네!”“쫓아!!!”소만리는 더 이상 숨어 있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정면 돌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그녀는 건달들이 들어오는 틈을 타 시야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도망갔다.하지만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들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인지. 그녀는 나오자마자 헐벗은 소만영과 옷이 흐트러진 건달 둘을 마주쳤다. 이런 상황과 맞닥뜨리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메스꺼움을 느꼈다.“천미랍?!” 소만영은 도망쳐 나온 소만리를 보자 깜짝 놀라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너.. 너! 계속 거기 숨어 있었던 거야?!” "쯧. 아따 요년 참말로 똑똑하고마잉. 우리를 그냥 똥개 훈련을 시켜버리는구마."두목은 흥미로운 듯 소만리를 쳐다보았다.소만리는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에 멀지 않은 곳의 낡은 대문을 바라보며 빠르게 도망쳤다.“당장 저 기집애를 잡아오란 말이야!” 소만영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소만영은 자신이 천미랍에게 놀아나게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천미랍의 속임수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 추한 불량배와 몸을 섞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몸을 섞고 나서 저것들에게 돈까지 줘야 한다니!등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소만리는 가까이에 있는 대문을 보고 단숨에 달려갔다.그러나 그녀의 두 발이 대문을 벗어나려는 순간, 그녀의 팔을 누군가 거칠게 당기는 것을 느꼈다. “어딜 또 도망가려고?!” “이거 놔!” 소만리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눈을 치켜 뜨고 노려보았다.“하! 놓
“소만영.. 너 진짜… 뻔뻔하다.”“후후훗~ 니가 지금 나한테 부탁해도 시원찮을 판에.. 니가 나한테 살려달라고 한다면 뭐 한 번 봐줄 수 있겠지만, 계속 고집만 부리면.. 죽는 수밖에 없지 뭐~!”소만영은 독한 눈빛으로 그녀를 째려보았고 거즈가 덮인 얼굴에 사납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소만리는 아직 마음 속 깊이 남아있는 원한을 갚지도 못했기에, 결코 다시는 자신의 몸에 소만영이 낼 상처를 덧씌우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눈앞에 바싹 다가온 네 명의 건달들을 바라보며 소만리는 천천히 두 주먹을 쥐었다.‘설령 죽음을 택하더라도, 결코 나를 이런 쓰레기들의 손에 넘어가게 두지 않겠어!’그녀는 벽 주변에 놓인 나무 막대를 보고는 순식간에 달려가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오호! 요 아가씨 성질머리가 참 화끈하고마이, 좋아 좋아!" 두목은 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소만리가 잡고 있는 막대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즈기 예쁘장한 언니, 우리 아그들 말 좀 들어보자고. 몸으로 고생하지 말고잉?”소만리는 앞으로 다가오는 두목을 보았다. 그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니 걱정이나 해야 할 것 같은데!”"킬킬킬킬...!"이 말을 들은 두목이 미친 듯이 웃으며 소만리가 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옆에서 대기하던 부하 세 명도 덩달아 웃기 시작했다.소만리는 바로 이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이힐을 신은 발로 두목의 아랫도리를 거세게 걷어차버렸다."으..으억!"두목은 곧바로 느껴지는 고통으로 소리를 질러 대며 바닥을 이리저리 굴렀다.“아오 젠장! 저년 저거 좀 눕혀봐라 야들아. 그냥 아주 죽여브리게!"“예 형님!”부하들은 두목의 명령을 따랐고, 결국 소만리는 다시 예상 외의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건달 중 하나가 마취제가 든 스프레이를 들어 소만리의 얼굴에다 뿌렸다.소만리는 방심한 나머지 마취제를 한 두 모금 들이마셔버렸다. 익숙한 화학 냄
소만리는 약물 때문에 머리가 멍했지만, 희미하게 누군가가 귓가에 그녀를 만리라고 부르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그녀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보기 위해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은 점점 무겁기만 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꼭 안고서 놓지 않는 이 남자에게 무의식적으로 가까워졌다.생각해보면 그녀는 지금까지 이처럼 보호받는 듯한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요 몇 년 동안 불합리한 화를 겪으면서 누군가 그녀를 도와주기를 갈망할 때 사람들은 오히려 그 틈을 타 그녀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녀는 갈망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서 점차 아무런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도움이 가장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이끌려 돌아오는 느낌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이제서야 깨달았다..기모진은 자신의 팔에 안긴 사람이 자신에게 가까이 붙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손은 천천히 그의 목에 올라가 부드럽게 그를 껴안았다.그 때 기모진은 다시 이성을 찾은 것 같았다. 그는 품속에 안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지난 날 잃은 소만리가 아니라는 것이 비로소 기억나는 듯했다."천미랍씨 괜찮아요?" 그녀가 소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 얼굴을 보면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소만리는 눈썹을 찌푸리며 "아..어지러워..."라고 말했다."즉시 병원으로 데려다 줄게요!" 기모진은 곧바로 그녀를 끌어안고 차로 향했다."모진아!"갑자기 공장 건물 안에서 소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기모진은 멈춰 서서 어리둥절하며 뒤를 돌아보자 소만영이 보였다. 그녀는 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채 땅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쓰러뜨린 건달 무리를 가리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진아 저들이 힘으로 나를 더럽혔어~ 날 위해 복수해줘 모진아! 나 정말 너무너무 아파… 난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쓰읍…”기모진의 미간에는 주름이 생기고, 검은 두 눈썹이 잔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