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근심 걱정 없이 투덕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는 서울에서 벗어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 없이... 계속 이렇게 지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장소월에겐 너무나도 얻기 힘든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됐어. 우선 밥부터 먹자. 이따가 놀러 가기로 했잖아.”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나 팔짝팔짝 뛰며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얼른 밥 먹자. 아니... 누가 먼저 다 먹는지 시합할까?” 강용은 장소월 옆에 앉아 그녀에게 국을 떠주었다. “너 시끄러운 거 싫어한다는 거 알아.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날씨가 너무 더워서 네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돼.”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몸 그렇게까지 허약하지 않아.” 그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문밖으로 향했다. 어린아이 한 명이 손에 빵 조각을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장소월의 다리를 잡고 철퍼덕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엄마...” “여긴 어떻게 왔어?” “월아, 네 아빠는 어디 계셔? 왜 같이 안 왔어?” 장소월은 한 손으로 아이를 힘겹게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월이는 침을 질질 흘리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강용은 바닥에 떨어진 빵 조각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세상에, 어떻게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아빠는 뭐 하는 거야, 아이도 제대로 보지 않고.” 강용은 일어나 아이를 안아 들려 했다. “내가 데려다주고 올게.” 장소월은 망설이다 말했다. “나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어. 볼살도 통통하니 귀엽고, 현아 어렸을 때랑 많이 닮았어. 머리 예쁘게 땋고 나비 머리핀도 꽂았네.” 이 아이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난날 그녀가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였다면, 전연우는 그녀를 남원 별장에 가두는 족쇄로 별이를 이
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강용, 말조심해. 애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야.” 강용이 말했다.“안 그래도 수상쩍었어. 자기 자식도 제대로 보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 “게다가 사방팔방 아무 데나 뛰어다니게 놔두고... 보자마자 엄마라고 부르잖아.”“아가씨,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장소월이 말했다. “강용, 몇 번이나 확인했잖아. 그 사람은 전연우가 아니야.” “별이도 아니야. 내가 별이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저번에 살펴봤는데 팔에 검은 몽고반점도 없었어. 강용, 네가 나 걱정하는 건 알지만, 그냥 어린아이일 뿐이야.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지금 장소월의 눈에는 오직 아이만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아이의 작은 얼굴을 꼬집으며 물었다. “밥 먹었어? 월아?” “아!” 아이가 소리쳤다. 장소월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만약... 그녀에게도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현아는 밥 먹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강용, 왜 안 먹어! 내 배 속 아기는 벌써 많이 먹었지롱. 안 먹으면 나 혼자 다 먹어버릴 거야.” 강용은 한숨을 푹 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배불러. 입맛 없어.” “강용!” 장소월이 그를 불렀다. 소현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강용 왜 저래?”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며 말했다.“괜찮아, 이따가 내가 강용한테 밥 가져다줄게. 현아는 먼저 먹어.” “괜찮아, 내가 하면 돼.” 소현아는 밥을 몇 숟가락 급하게 퍼먹고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뒤 강용의 그릇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았다. “강용 이 속 좁은 놈, 내가 닭 다리 뺏어 먹을까 봐 심통이 났나 보네. 닭 다리 먹고 싶으면 말하면 되지.”장소월이 당부했다. “조심해서 올라가, 넘어지지 않게. 이따가 내가 다시 보러 갈게.” 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소현아가 그릇을 들고 올라가는 동안 장소월의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늘 덜렁거리기만 하는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장소월, 31세, 암으로 사망.서울 강남병원,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연우야, 오늘 의사선생님이 투석한다고 주사를 놓아주셨는데 너무 아팠어.」「나 곧 죽어. 보러 와 줄 거지?」「제발, 연우야...」장소월이 힘겹게 머리를 돌려 전화기의 메시지 창을 보고 있다. 메시지를 몇 개나 보냈건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전연우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그녀의 손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뼈만 남아 앙상했고 두 눈은 안쪽으로 푹 꺼져 있었다.사지는 이미 암 후유증으로 인해 썩어가고 있었다.몸을 까딱할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임 간호사도 거의 보름 너머 와보지 않았다.원인: 더 이상 치료해도 의미 없음.그녀는 사실 엄살이 많았고 아픈 걸 끔찍이 무서워했다. 암 말기라 그녀는 매일 고통에 시달렸고 전연우에 대한 사랑만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하지만 이 넘쳐나던 사랑이 메말라가자 그녀에게 남은 건 뼈만 남은 몸뚱이였다.장소월은 전화기를 꺼버리고 조용히 죽기를 기다렸다.고통으로 그녀는 의식이 흐릿해졌다. 씁쓸하게 느껴졌다. 안 깐 힘을 다해 전연우와 결혼했고 8년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좋은 아내가 되려 했다. 모든 걸 다 바쳐 그 사람 곁을 지켰는데 그녀가 얻은 건 무엇인가?사람들은 하나 둘 그녀의 곁을 떠났고 가난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그녀가 죽으면 제일 기뻐할 사람이 전연우다. 이제 그는 자유의 몸이다. 더 이상 징그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전연우, 드디어 소원대로 송시아와 결혼할 수 있다.8개월 전.전연우의 생일날,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테이블 위 그녀가 정성껏 차린 음식들도 이미 차갑게 식어갔다.기다리던 전연우는 오지 않고 비서가 이혼서류를 가져왔다. 비서가 싱겁게 입을 열었다.“사모님, 사장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요. 이렇게 큰 전 씨 집안 산업을 누군가는 물려받아야 되잖아요.”장
새벽 12시.장소월이 악몽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다. 이마엔 땀이 맺혀있다.순간 익숙한 소독제 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다.장소월은 잠시 멍해졌다. 죽은 거 아니었나?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탈칵’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했던 병실이 밝아졌다. 눈부신 불빛에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악몽이라도 꾼 거야?”긴 다리로 침대 곁에 다가왔다. 큰 체구가 그녀의 왜소한 몸에 비친 빛을 막아주기엔 넉넉했다.“전...전연우?”장소월이 머리를 들어 뼈속까지 증오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다가오지 마!”왜 또 이 악마의 곁으로 돌아온 걸까?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뒤로 물러선다.장소월의 머리는 지금 복잡하기 그지없다. 전연우를 본 순간 크나큰 두려움과 절망이 몰려와 숨이 막혔다.전연우가 멈칫한다. 이내 가느다란 눈은 차가움으로 가득 찬다. 불쾌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고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다.“의사 불러줄게.”남자의 차가운 저음이 칼처럼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문이 쾅 하고 닫기고 나서야 장소월도 긴장이 풀렸다.남자가 떠난 후 방안에 떠돌던 강렬한 압박감도 사라졌다. 장소월은 황급히 이불을 걷어냈다. 순간 째질듯한 아픔이 손목에 전해졌다.손목을 보니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손목을 그은 건가?장소월은 아픔을 견디면서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테이블에서 구식 전화기를 들어 달력을 찾아보았다.시간을 본 순간 장소월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지금은 무려 2000년, 그녀가 18살 되던 그해였다.장소월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지금 입원 중이고 손목을 그어 전연우를 협박해 고백을 받아달라는 중인 것 같았다.전연우는 장소월이 10살 되던 해에 장해진이 밖에서 데려온 양자였다.장소월이 그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 건 그녀가 15살 되던 해 집에서 키우던 티베탄 마스티프가 갑자기 실성해 그녀한테 달려들어 물
장소월이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는 전연우에게 웃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오빠, 미안해. 전에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오빠를 궁지로 내몰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제 깨달았어. 앞으로도 꼭 기억할게. 오빠는 오빠일 뿐이라고.”난리를 피우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너무나도 평온한 나머지 아무런 생기 없는 인형 같았다.전연우의 어두운 눈동자가 빛나더니 얇은 입술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비웃음이었다. 그녀의 새로운 수작인 건가?전연우가 입을 열었다.“알았다니 다행이네. 밤새우지 말고 얼른 쉬어. 내일 데리러 올게.”그러고는 어른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장소월은 피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고 수긍하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돌아선 전연우의 눈에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고 차가움만이 남아 있었다.병실에서 나온 전연우는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장소월을 만졌던 손을 닦았다.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간 그는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손수건을 던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전연우가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버튼을 누른다.아우디 한 대가 라이트를 킨 채로 있다. 조수석에는 긴 파마머리를 한 여인이 앉아있다. 섹시한 옷차림에 손에는 담배가 들려있다. 야릇한 붉은 입술은 담배연기를 뿜어냈다.여자의 시선은 차에 타는 남자의 잘빠진 몸을 따라 움직였다.“잘 달래줬어?”전연우가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했다. 그의 눈에 역겨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여자의 손에 들린 담배를 뺏아 창밖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 내 차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마.”여자가 매혹적으로 웃어 보이더니 다리를 꼬았다.“안 피면 어린 아가씨 향수 냄새를 어떻게 덮어.”아이라인을 그린 예쁜 눈이 차 안에 놓인 핑크색 향수병으로 향한다. 거기엔 글자가 쓰여있는 스티커도 붙여져 있었다: 장소월 전용 좌석.그녀가 살짝 웃어 보이더니 말한다.“18살밖에 안되는 여자애가 점유 욕은 굉장히 강하단 말이야. 왜? 장가에 데릴 사위로 들어갈 생
택시에 탄 지 한 시간쯤 지나 장가 별장 앞에 멈춰 섰다.장소월은 집으로 들어가 신발을 바꿔 신었다. 아줌마가 그 모습을 보더니 인츰 다가왔다.“아가씨, 왜 혼자에요? 연우 도련님이랑 같이 들어오시는 거 아니었어요?”아줌마는 아직 많이 젊었고 주름이 많지는 않았다.장소월은 대뜸 아줌마를 꼭 끌어안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녀를 친자식처럼 아껴준 사람은 아줌마뿐이었다.그러나 뒤에는 전연우가 강제로 전가에 남겨 그와 송시아를 모시게 했다.“아줌마, 너무 보고 싶었어.”“어... 저기... 아가씨, 왜 그래요? 혹시 아직 다 안 나으신 건가요?”아줌마가 장소월을 밀어내더니 걱정스레 손을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댔다.괜찮은 거 같은데?아줌마는 오늘 장소월이 약간 이상해 보였지만 딱히 뭐라 표현할 수는 없었다.“아니 그냥 안아보고 싶었어.”“이제 막 들어왔는데 배 안 고파요? 죽 끓여놨는데 얼른 오세요.”“입맛 없어, 그냥 올라가서 좀 잘래. 점심때 다시 불러줘!”밤을 꼬박 새우고 차를 탔더니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아 맞다, 아가씨, 아까 회장님 전화 오셨는데 집 들어오시면 다시 전화 달라고 했어요. 아가씨한테 하실 말씀이 있어 보였어요. 그리고 이건 회장님 출장 가시기 전에 아가씨께 전달하라고 하신 거예요.”장소월은 실버 쇼핑카드를 건네받고는 머리를 끄덕인다.“응”장해진이 전연우 대신 그녀에게 주는 보상인가?장해진이 무슨 말을 꺼낼지 장소월은 알고 있었고 담담하게 전화를 걸었다.장해진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확실히 좋은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허울뿐이었다...그는 사실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장해진이 늘 가업을 물려받을 아들을 갖고 싶어 했다는 것을. 하여 많은 애인을 두고 있었지만 그중 누구도 아들이나 딸을 낳지는 못했다.그래서 결국 전연우를 입양한 거다.나날이 커가고 있는 딸은 장해진에게 정략결혼의 도구일 뿐이었다.이익을 위해서라면 장해진은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자신의
장소월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에 들었다. 자기 전 그녀는 따듯한 우유 한 잔을 마시곤 했는데 오랫동안 고치지 못한 습관이었다.얇은 커튼 밖 어둠은 유난히 짙었다. 한줄기 라이트가 창문으로 비쳐들었다.타이어가 땅에 마찰되면서 나는 소리가 시끄럽게 귀청을 때렸다.전연우의 아우디 A6은 장해진이 회사에서 그에게 상으로 준 새 차였다.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들어왔고 손에 든 차 키를 내려놓았다.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번 훑었지만 익숙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전에는 항상 가냘픈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무미건조한 드라마를 보는 누군가가 있었건만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테이블도 평소처럼 간식이 널브러져 있지 않고 깨끗했다.전연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아줌마가 주방에서 나왔다.“연우 도련님, 저녁 식사하셨나요?”“소월이는?”전연우가 묻는다.“아가씨는 몸이 불편하시다면서 일찍 잠에 드셨어요.”“올라가서 한번 볼게.”전연우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계단을 세 개쯤 올라가더니 발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내일 점심에 윤이 돌아오니까 윤이 좋아하는 음식 몇 개 더 하고.”“네, 알겠습니다, 연우 도련님.”아줌마가 답한다.3층에 도착한 전연우, 손잡이를 돌렸지만 전처럼 열리지 않았다.안에서 잠군 것이다.전연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와 장소월의 방은 모두 3층에 있었고 장해진의 방은 2층이었다. 2층은 평소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고 4층은 윤이가 단독으로 쓰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그는 장소월의 방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안에서 잠근 적은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장소월이 진짜 그에게서 마음을 거둔 것일까?전연우는 문을 두드렸다.“소월아, 자?”악마의 노크 소리에 정소월은 이불 속에 몸을 감추고 귀를 틀어막았다. 대꾸하기가 싫었다.사실 아까 전연우가 차를 끌고 돌아올 때부터 그녀는 소리를 듣고 깨어있었다.전연우는 밖에 집을 하나 샀다. 방 2개에 거실 2개
전생에 전연우가 송시아와 결혼한 이유도 송시아의 생김새가 백윤서랑 조금 닮아있어 백윤서 대용품으로 곁에 두고 있었다.장소월은 집안을 제외하고 성적이든 외모든 어릴 때부터 쭉 백윤서에게 밀렸었다.백윤서와 전연우 사이의 감정은 철근으로 만든 성벽처럼 단단했고 그 누구도 무너트릴 순 없었다.전연우가 백윤서에 대한 사랑은 뼈에 새길 만큼 깊었다.장소월은 전연우에게 그저 원수의 딸일 뿐이었고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노크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장소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전연우는 그녀에게 인내심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었다.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전연우는 오늘 저 문을 부시고도 남을 것이다.장소월은 불을 켰다. 이불을 거두고 신발을 챙겨 신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물을 열고는 잠에서 덜 깬 듯 눈을 비비며 말했다.“오빠? 왜 온 거야? 미안해. 내가 너무 깊게 잠들어서 못 들었나 봐. 무슨 일이야?”전연우의 진한 눈썹이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진짜 졸음을 무릅쓰고 일어나 문을 열어준 걸 보고는 미간이 살짝 풀렸다. 눈빛이 부드러워지는 듯하더니 그녀의 이마 쪽으로 손을 갖다 댔다.장소월이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몸을 돌려 테이블로 걸어가 컵에 물을 따랐다. 그러면서 감정을 잘 숨기려고 애썼다.전연우의 눈빛이 다시 차가워지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거두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장소월은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지금의 전연우는 자신을 싫어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이내 불안했던 마음이 다시 진정되었다.전연우가 핑크로 도배된 소녀의 방을 훑어보았다. 방안에는 잔잔하게 달콤한 냄새가 깔려있었다. 그의 차에서 나는 냄새와 같았다. 예전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컨디션은 괜찮아졌어?”전연우가 아무런 기복이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장소월은 컵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놓인 걸상을 빼서 앉았다. 그러면서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관심 고마워요 오빠. 많이 좋아졌어.”전연우가 다가선다. 그의 몸에서는 담배와 술이 섞
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강용, 말조심해. 애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야.” 강용이 말했다.“안 그래도 수상쩍었어. 자기 자식도 제대로 보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 “게다가 사방팔방 아무 데나 뛰어다니게 놔두고... 보자마자 엄마라고 부르잖아.”“아가씨,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장소월이 말했다. “강용, 몇 번이나 확인했잖아. 그 사람은 전연우가 아니야.” “별이도 아니야. 내가 별이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저번에 살펴봤는데 팔에 검은 몽고반점도 없었어. 강용, 네가 나 걱정하는 건 알지만, 그냥 어린아이일 뿐이야.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지금 장소월의 눈에는 오직 아이만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아이의 작은 얼굴을 꼬집으며 물었다. “밥 먹었어? 월아?” “아!” 아이가 소리쳤다. 장소월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만약... 그녀에게도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현아는 밥 먹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강용, 왜 안 먹어! 내 배 속 아기는 벌써 많이 먹었지롱. 안 먹으면 나 혼자 다 먹어버릴 거야.” 강용은 한숨을 푹 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배불러. 입맛 없어.” “강용!” 장소월이 그를 불렀다. 소현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강용 왜 저래?”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며 말했다.“괜찮아, 이따가 내가 강용한테 밥 가져다줄게. 현아는 먼저 먹어.” “괜찮아, 내가 하면 돼.” 소현아는 밥을 몇 숟가락 급하게 퍼먹고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뒤 강용의 그릇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았다. “강용 이 속 좁은 놈, 내가 닭 다리 뺏어 먹을까 봐 심통이 났나 보네. 닭 다리 먹고 싶으면 말하면 되지.”장소월이 당부했다. “조심해서 올라가, 넘어지지 않게. 이따가 내가 다시 보러 갈게.” 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소현아가 그릇을 들고 올라가는 동안 장소월의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늘 덜렁거리기만 하는
장소월은 근심 걱정 없이 투덕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는 서울에서 벗어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 없이... 계속 이렇게 지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장소월에겐 너무나도 얻기 힘든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됐어. 우선 밥부터 먹자. 이따가 놀러 가기로 했잖아.”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나 팔짝팔짝 뛰며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얼른 밥 먹자. 아니... 누가 먼저 다 먹는지 시합할까?” 강용은 장소월 옆에 앉아 그녀에게 국을 떠주었다. “너 시끄러운 거 싫어한다는 거 알아.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날씨가 너무 더워서 네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돼.”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몸 그렇게까지 허약하지 않아.” 그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문밖으로 향했다. 어린아이 한 명이 손에 빵 조각을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장소월의 다리를 잡고 철퍼덕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엄마...” “여긴 어떻게 왔어?” “월아, 네 아빠는 어디 계셔? 왜 같이 안 왔어?” 장소월은 한 손으로 아이를 힘겹게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월이는 침을 질질 흘리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강용은 바닥에 떨어진 빵 조각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세상에, 어떻게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아빠는 뭐 하는 거야, 아이도 제대로 보지 않고.” 강용은 일어나 아이를 안아 들려 했다. “내가 데려다주고 올게.” 장소월은 망설이다 말했다. “나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어. 볼살도 통통하니 귀엽고, 현아 어렸을 때랑 많이 닮았어. 머리 예쁘게 땋고 나비 머리핀도 꽂았네.” 이 아이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난날 그녀가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였다면, 전연우는 그녀를 남원 별장에 가두는 족쇄로 별이를 이
그녀는... 여전히 과거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전연우는 불이 꺼진 어두운 방에 외로이 홀로 서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수면제 덕분인지 점심 12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오늘의 거리는 평소와는 달리 조용했다. 매일 길가에서 채소를 팔던 노점상들도 오늘은 어쩐 일인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장소월이 세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강용은 국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소현아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강용을 졸졸 따라다니며 뜨거울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릇 아래에 손을 대고 있었다. 강용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바보야! 국 쏟아지면 어쩌려고 그래. 저리 비켜, 귀찮게 하지 말고.”소현아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네가 넘어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국 몸에 쏟으면 엄청 뜨겁단 말이야.” 그녀는 계속하여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을 향해 부채질을 했다. “조심해! 국 쏟으면 안 돼. 빨리 내려놔.”강용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못마땅한 듯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결국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단 위에 서 있는 장소월을 발견한 강용이 앞치마를 풀며 말했다. “깼어? 웬일로 늦잠까지 잤네. 내려와서 내가 만든 생선국 먹어봐.” 장소월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수고했어. 오늘 딱히 할 일 없으니까 이따가 오아시스에 놀러 가자.” 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좋아, 좋아!” 강용이 장소월에게 그릇과 젓가락을 건네주자 소현아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거는? 강용, 내 것도 줘.” “너 손 없어? 임신한 거지, 손발이 잘린 건 아니잖아. 직접 가져와.”장소월이 말했다. “내가 가져다줄게.” 장소월이 일어나려 하자 강용은 그녀를 눌러 앉혔다. “됐어, 둘 다 아주 상전이시구먼. 노비인 내가 모셔야지 어쩌겠어!” “그게 아니라... 다음에는 내가 가져다줄게.” 소현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소월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현아야, 강용은 철없는 어린아
거리에는 아직 적잖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때 밤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소월에게는 마치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전생에서 그녀는 이 종소리와 함께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했었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지나는 순간, ‘펑’ 한 줄기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어 연이어 폭죽들이 터지며 찬란하게 하늘을 수놓았다. 깜빡 잊고 있었다. 오늘은 불꽃 축제를 하는 날이라는 걸. 보아하니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 같았다. 복도에서 잔뜩 들뜬 소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월아, 소월아, 빨리 봐, 불꽃 놀이한다.” “정말 예뻐!” “와, 강용, 빨리 봐. 여기 불꽃놀이 서울에서 하던 거랑 비슷하게 예뻐.” “우리 밖에 나가서 놀면 안 돼?” 강용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문틈으로는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잠들었나? 장소월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뒤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침대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수면제를 바라보다가 결국 집어 들었다. 평소에는 두 알을 먹었지만, 지금은 네 알을 먹어야 한다. 이미 내성이 생겨 두 알로는 효과를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약을 삼키자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얇은 커튼 밖으로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밤새도록 이어질 줄 알았던 불꽃놀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그렇게 거리는 이전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이렇게 빨리 끝나는 거야. 하나도 안 예뻤어. 이제 잘 거야.” “강용, 잘 자.” 강용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바보.” 이어 그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냉담한 태도에도 소현아는 신나는 듯 폴짝폴짝 뛰며 방으로 돌아갔다. 조금 전 강용이 그녀에게 웃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싫어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소현아는 천진난만한 눈으로 임신 4개월 된 둥그런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가, 태어나면 아빠랑 만날 수 있을 거야. 엄마는 두 명이나 있어
별이는 몸을 기울여 장소월에게 팔을 뻗으며 옹알거렸다.“엄마... 안아...”“저 아이 참 신기해요. 낯도 안 가리고 저한테 엄마라고 부르네요”가짜 손이준 행세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전연우였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어렸을 때 병을 앓아서 뇌 손상이 좀 있었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장소월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고는 휴지로 입가에 묻은 기름을 닦아주었다. “다시 엄마를 찾아줄 생각은 안 해봤어요? 지금은 너무 어려서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야 아빠도 덜 힘들 텐데요.” “그 사람 돌아올 겁니다.” 국수를 먹고 있던 강용은 그 말에 사레가 들려 연이어 재채기를 했다. 장소월이 그의 등을 토닥여주자 소현아도 그녀를 따라 강용의 등을 두드렸다. 장소월이 말했다. “천천히 먹어.” 소현아도 똑같이 말했다. “천천히 먹어.” 강용은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단한 사랑이네요.”장소월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강용.”“알았어. 입 다물게.” 장소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먹었지? 시간이 늦었어. 이만 돌아가자.” “만둣국 잘 먹었습니다. 강용, 식삿값 드려.” 다른 두 사람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강용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더 얹어 주었다. “힘내세요, 형님.” 그들이 떠난 후, 전연우는 아이를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신이 나 방긋방긋 웃던 별이는 곧바로 서러운 표정으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엄마...” 전연우가 말했다. “엄마는 곧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 그녀는 국수엔 거의 손대지 않고 만두만 모두 비웠다. 전연우는 그녀가 남긴 국수를 남김없이 모두 먹어치웠다. 장소월은 집에 돌아온 뒤 두 사람에게 말했다. “강용, 차표 예매해. 여긴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돼.” 소현아는 졸린 듯 눈을 비볐다.“우리 가는 거야? 어디로 가는데?” 장소월이 대답했다. “난 어디든 좋아.
“와, 이 아이 정말 귀여워. 소월아, 빨리 봐봐. 나도 나중에 딸 낳고 싶어. 매일 예쁘게 꾸며주고... 우리 세 명이서 같이 쇼핑도 다니자. 강용은 아빠, 나는 엄마, 소월이도 아기 엄마가 되는 거야.” 거의 정리가 끝나갈 무렵, 강용이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꿈이 아주 야무지네.” 장소월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우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녀는 아이를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아직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막아서며 소리쳤다. “만지지 말아요.” 장소월은 깜짝 놀라 재빨리 손을 움츠렸다. 그가 부엌에서 국수 네 그릇을 들고 나와 탁자 위에 놓았다. “애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소현아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왠지 소월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엄마라고 부르기까지 하던데.” “참,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그가 대답했다. “손이준이에요.” 강용이 물었다. “한국인이에요?” “사정이 있어 한국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어요.” 소현아가 또 물었다. “그럼 아기 엄마는 어디 갔어요?” 고개를 젓는 장소월을 본 소현아는 맹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소월아, 왜 그래? 아, 알겠다. 이런 걸 물어보면 안 된다는 거지!” “아저씨,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예의가 없었어요.” 강용이 손을 들어 소현아의 머리를 가볍게 톡 쳤다. “너 정말 바보구나.” 그는 아이를 안아 올리고 숨김없이 대답했다. “아내가 돈 들고 도망갔어요.” 강용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소현아는 동정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정말 딱하시네요!” “아기도 너무 불쌍해요. 이렇게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다니.” 손이준이 말했다. “미안함의 의미로 국수를 끓였어요.” 장소월이 바로 말했다.“괜찮습니다.”하지만 소현아는 잔뜩 들뜬 얼굴로 손뼉을 쳤다. “좋아요, 좋아요.” 강용이 삐딱하게 물었다. “그렇게 좋아?
강용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태연하게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별로 놀라지도 않는 것 같네요!” “손님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죠? 아까 싸움을 벌였던 놈들은 이 지역 갱단이에요. 그놈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부정당한 수단으로 돈을 벌어놓고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싸움이 벌어진 거더라고요. 이곳 밤은 위험하니까 함부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고를 꺼내 등에 나 있는 상처에 바르고 있었다. 강용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귀로 들었죠.” 그의 등에는 커다란 화상 자국 두 군데가 더 있었다. 장소월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까요? 아까는 제가 신세를 졌어요.” 그는 차갑게 거절했다. “됐어요. 당신들 같은 외지인들은 알아서 몸조심이나 하세요.”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었다. 조금 전 난동을 부린 사람들은 이미 경찰차에 태워져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 경찰들과 현지 방언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아는 무서움에 딸꾹질을 하며 장소월의 뒤에 몸을 숨겼다. “소월아, 저 사람들 뭐라고 하는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는지 묻는 것 같아. 저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설명해 주고 있어.” 바깥에 있던 가게 사장도 구급차에 실려 갔다. 시끄러움이 가라앉은 뒤 문밖에 나가보니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엔 핏자국이 흥건했고, 아까 총을 맞은 사람의 허연 뇌수까지 흩뿌려져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경찰들이 떠나자 그가 몸을 돌려 말했다. “이제 돌아가도 돼요.” 이어 그는 부엌에서 양동이를 들고 밖으로 나가 핏자국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그의 분주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느낌이 틀린 걸까? 그래. 오만하기 그지없는 전연우가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분명 그녀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정말로 전연우라면 저토록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밤 8시 30분, 강용은 갑자기 확인하려는 충동이 생겼는지 야식을 먹으러 건너편 국숫집으로 향했다. 이 시간대에는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사막 근처라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반팔을 입고 다녔지만, 밤에는 목도리를 둘러야 했다. 장소월은 니트 롱스커트와 옅은 색 코트 차림에, 목에 두른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이곳으로 여행 온 한국인들도 꽤 있었지만, 대부분은 반년 이상 머무른 주민들이었다. 가게 밖에선 손님들이 작고 낮은 의자에 앉아 야식을 즐기고 있었고, 그 옆에선 사장이 기타를 들고 이곳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장소월은 거의 6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간신히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기 중에는 꼬치구이를 만들 때 피어오른 짙은 연기가 매캐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소현아는 임신 중이라 이런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몸에 해롭기 때문에 따로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해 주었다. 장소월은 또다시 낮에 주문했던 만둣국을 시켰다. 가게에는 종업원이 한 명, 요리사가 두 명 있었다. 만둣국이 나오자 장소월은 만두를 한 입 먹어 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강용이 물었다. “왜 그래? 맛이 없어?”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그럼 말해 봐. 내가 만든 거랑 이것 중에 뭐가 더 맛있어? 말 잘해. 아니면 다신 안 해줄 거야.”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만든 게 더 맛있어.” “그래야지.” “다 못 먹겠으면 나한테 줘. 먹던 거라도 상관없어.” 이 만두의 맛, 그리고 안에 들어간 속 재료까지, 전생에 그녀가 만들었던 만두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거의 다 먹어갈 때쯤, 갑자기 앞 테이블에 있던 술 취한 남자 두 명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주먹까지 오가기 시작하자 사장이 재빨리 달려가 말렸다. 결국 두 사람 싸움은 패싸움으로 번졌고,
장소월이 말했다. “고마워.” 그녀는 간단히 대답을 마치고 차갑게 몸을 돌렸다. 강용이 탁자 위에 국수를 올려놓았다. 장소월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국수 위에 떠 있는 파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용은 재빨리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와 그녀 옆에 앉았다. “너 많이 못 먹잖아. 남은 건 내가 처리해줄게.” 소현아가 어느새 냄새를 맡았는지 위층에서 내려와 킁킁거리며 말했다.“음! 맛있는 냄새! 소월아, 뭐 먹고 있어? 나도 먹을래.” “바보야, 정신 차려! 겨우 국수 한 그릇인데, 세 명이서 나눠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소현아가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조금만 먹을게.” 소현아는 얼른 달려가 젓가락을 가져왔고,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장소월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강용이 말했다. “국물만 좀 남겨줘.” 소현아가 말했다. “나도 국물.” “파 싫으면 나한테 줘.” “파 싫으면 나한테 줘.” “바보야, 남의 말은 왜 따라해!”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장소월에게 일렀다. “소월아, 얘 나한테 욕했어. 그러니까 얘한테 면 좀 조금만 주고 나한테 많이 줘.”장소월이 말했다. “그래. 내 국수 나눠줄게.” “역시 소월이가 최고야!” 건너편 국숫집 안,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별이는 긴 머리 가발을 쓰고 여자아이 변장을 하고 있어 본래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 사람이 딸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앞으로 넌 계속 이런 모습으로 지내.” 별이는 손으로 유리를 긁으며 작은 얼굴 전체를 유리에 바짝 붙인 채 조용히 맞은편 집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눌한 발음으로 옹알거리고 있었다. “엄마...”“괜찮아, 곧 만나게 될 거야.” “소월아...” 장소월은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줄곧 지워지지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 다른 특별한 점은 전혀 없었다. 최근 예민함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걸까. 세 사람은 국수 한 그릇을 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