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강지훈이 사람을 보내 쫓아온다면, 얼마나 더 숨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강용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네가 같이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내가 조금만 참으면 되는 거니까.” 그는 손가락을 뻗어 장소월의 이마를 살짝 튕겼다. “얼른 자. 내가 떠날 방법 생각해 볼게.”“너 먼저 자. 난 좀 더 앉아 있고 싶어.” “같이 있어 줄게.” “괜찮아.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어서 가서 자.” 강용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12시 전에 꼭 방으로 돌아가. 안 그러면 내가 잡으러 올 거야.” “알았어.” 장소월의 얼굴에 오랜만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강용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방에 돌아가지 않고 거실 소파에 누워 음 소거로 PS 게임기를 만지작거렸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고 강용도 졸음이 몰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2시 반이었다. 한 시간 동안 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부르려고 팔을 뻗었다가 내려놓았다. 강용은 사색에 잠겨 있는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수평선에서 오늘을 밝힐 금빛 광선이 솟아올랐다. 또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강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날이 밝았어. 우리 이제 가서 좀 쉬자, 응?” 장소월의 귓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에서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용, 봐봐. 진짜 날이 밝았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계속 이렇게 지낸다면, 그녀의 몸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강용은 몰래 그녀의 물에 수면제를 타 겨우 잠들게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그녀는 물에 손도 대지 않았다. “소월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한테 말해주면 안 될까?” 장소월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슴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뭐라고? 소현아가 사라졌다고?” 높은 자리에 앉은 남자가 잠옷 차림으로 다리를 벌린 채 매서운 눈빛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을 위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강지훈은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여자를 힘껏 움켜쥐었다. 천효연은 매혹적인 입술을 다시며 입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키고는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입었다. 그녀의 유혹적인 눈동자엔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강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는 음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소현아가 그곳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감시하라고 했잖아. 이제 와서 하는 말이, 소현아가 사라졌다고?” 규영은 두려움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말했다. “주인님, 저희가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부디 벌을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아가씨께서 성정이 너무 활달하셔서 감당이 어려웠습니다. 당시 저희는 국경 근처 낙일 마을이라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가씨께서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을 때, 저희는 그저 농담을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 화장실에 간다고 저희를 속이시고는 몰래 도망치셨습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그 별장에 가보니 아가씨께서 입으셨던 더럽혀진 옷만 남아 있었습니다. 분명 그 별장 주인에게 끌려갔을 겁니다.” 미경은 곧바로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아가씨의 말씀을 되새겨보면, 데려간 사람은 아마 아가씨의 친구분일 겁니다.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주... 주인님...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엔 반드시 아가씨를 모시고 오겠습니다.”“한 번 더 기회를 줘?” 강지훈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천효연이 두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그의 가슴팍으로 손을 뻗었다. “지훈 씨, 그 바보가 뭐가 좋다고 그래요? 나 하나로 부족해요? 사라졌으면 그냥 내버려 둬요... 그 여자가 북경 감옥에 있을 때 저 너무 불편했어요. 그러니까... 다시 돌아오게 하지 말아요. 네?” 규영과 미경은 서로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미경은 비명을 지르며 허벅지를 붙잡았다. 강지훈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함부로 판단하고 행동한 벌이야. 이번엔 다리 하나를 분지르는 것으로 끝내지만, 다음번에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야!” 미경은 두려움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주인님,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지훈은 옆에 있는 천효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아이... 키우고 싶어?” 그는 확실히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후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특히 그 바보 같은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전에 없던 미묘한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말이다. 천효연은 교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어차피 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까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한번 키워보죠 뭐.” 강지훈이 말했다. “그럼 소현아를 찾아 데려와. 아이를 출산하고 나면 본가로 돌려보낼 거야.” “네, 주인님.” ... 천하 일성 야간 업소. “당신 여자가 내 애완동물 데려갔어요. 이 빚 어떻게 갚을 거예요?” 전연우는 사진 속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대가로 무기랑 정보 지원해줄게. 대신 찾으면 장소월은 털끝 하나 다치게 해선 안 돼.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와 내 아내로 살게 할 거야.” 사랑에 눈먼 듯한 전연우의 모습에, 강지훈은 핏물처럼 검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당신답지 않은 대답이네요. 오랜 시간 동안 옆에서 지켜봐 왔던 당신은 여자 한 명한테 이렇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전연우는 사진 속 여인을 애처롭게 쓰다듬었다. 어쩐지 예전보다 더욱 야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눈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난 이미 그 사람을 한 번 잃었어. 두
강지훈은 지금처럼 사랑에 이성을 잃은 듯한 전연우보다는, 예전의 그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권력을 손에 움켜쥐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자는 절대 감정 따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여자 한 명 때문에 저토록 나약해진 모습이라니. 사람을 바다에 빠뜨려 죽게 하고도 눈 깜짝하지 않던 그 냉정함은 어디에 갔단 말인가. 반산 별장. 송시아는 미친 듯이 발광하며 집 안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기성은! 빌어먹을, 엄기준! 다 죽여버릴 거야! 모조리 다 죽여버릴 거라고! 감히 나한테 싸움을 걸어? 이까짓 글자 몇 줄로 날 묶어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민아는?” “부대표님, 아가씨와 신이랑 씨가 해외로 떠나신 후 잠시 동안은 추적 가능했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현재 그곳 정세가 혼란스러워 저희 세력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최대한 다른 인맥을 동원해 찾고 있습니다.” 송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성은, 넌 면북에 있을 때 죽었어야 했어. 빌어먹을 놈,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미 한 번 죽여봤으니, 두 번 못할 것도 없지!” 송시아는 소민아만 장악하면 기성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한 계획이었다. 그때, 도우미가 전화를 받고 뛰어와 송시아에게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남원 별장으로 가셨다고 합니다.”“뭐라고?” 짜증스러운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전연우가 그곳에 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설마 기억이 다 돌아온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먹인 약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는데.” “양이 부족했나 보네. 전연우, 내가 평소에 너한테 너무 잘해줬나 봐. 깨어나자마자 그 잡종을 찾아가게 만든 걸 보니.” “지금 장소월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누가 먼저 찾는지 두고 보자고.” 그녀의 잔인함만 탓할 일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누가 쫓아오면 막아요. 남원 별장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해요.” “네, 대표님...” 은경애는 눈치껏 바로 호칭을 바꾸었다. 아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전연우가 확실한데,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한 낯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은경애는 머리가 지끈거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전연우는 방으로 돌아온 뒤, 늘 그랬던 것처럼 바로 금고가 있는 서재로 향했다. 금고를 열자 중요한 서류나 돈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금고 비밀번호도 단순하게 그녀의 생일 날짜였다. 그는 사진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밝게 웃고 있는 장소월의 모습을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녀를 잃은 고통은 정말이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다 내 잘못이야. 널 혼자 두는 게 아니었어.’‘내 아내, 소월아!’그때 별이가 전연우 옆으로 다가와 사진 속 여자를 보고는 옹알거리며 말했다. “엄마, 엄마...” 전연우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아 들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우리 곁으로 데려올 테니까.” 그는 두 번의 삶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생의 전연우이자, 또 현생의 전연우이다. 침실의 모든 것은 결혼식 날 그대로였다. 침대에 깔려있는 신혼 이불, 그리고 액자 안에 담긴 세 사람의 웨딩사진까지... 순백의 웨딩드레스 차림의 장소월은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그 순간 미소는 짓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아이를 향한 애틋한 모성애가 가득 담겨 있었다. 과거 그는 너무나도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다시 되돌아갈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목숨을 바쳐 속죄했다. 결혼식 날 호텔에서 장소월이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그에게 목숨을 부지할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전연우 역시 그녀가 마음이 약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아이는 전연우가 손에 쥐고
세 사람은 근처 민박집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장소월은 불안한 마음에 문밖 가게 앞에 서 있는 소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강용, 현아 좀 살펴봐 줘.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강용은 팔짱을 낀 채, 귀찮다는 듯 눈을 까뒤집으며 말했다. “정말 성가시단 말이야. 애초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어.”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됐어. 체크인 마치고 현아랑 같이 주변 좀 돌아봐. 나는 먼저 올라가서 쉴게.” “난 너만 신경 쓸 거야. 쟤는 내 알 바 아니야.” “강용, 여기 오기 전에 내가 너한테 했던 말 잊었어?” “소현아는 지금 임신한 상태라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어. 이왕 데려오겠다고 결정했으면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도 했고. 하지만... 내가 하루 종일 쟤만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소현아가 꽃 세 송이를 들고 다가왔다. “소월아, 소월아... 이것 봐, 내가 방금 산 꽃이야. 예쁘지?” 장소월은 꽃을 받아들며 말했다. “예쁘네.” 소현아는 들뜬 얼굴로 강용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강용, 나랑 같이 놀러 가자.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강용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나 바빠. 가고 싶지 않아. 너...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장소월에게 일렀다. “소월아, 소월아, 강용이 나한테 화냈어.” 장소월의 입꼬리가 위로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그만해, 애도 아니고. 강용, 잠깐 현아랑 놀아주고 있어. 난 너무 피곤해서 방에 가서 쉬어야겠어.” 말을 마친 장소월은 바로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강용은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에 들고 있던 꽃을 프런트에 올려놓고 말했다. “나도 가서 짐 풀어야겠어.” “강용, 나랑 같이 놀기로 했잖아.” 이곳은 총 3층 건물로, 1층은 거실, 2층은 방, 3층은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침 방도 3개가 구비되어 있고, 빨래를 널 수 있는 베란다도 있어 세 사람이 살기엔 적당한
소현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간신히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냈다. 평소 까불까불 장난기 많고 히죽거리기만 하던 사람이 예고도 없이 돌연 사납게 돌변한 것이다. 그녀는 두려움에 황급히 방으로 달려가 침대에 웅크린 채 이불 속에 숨어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강용이 강지훈과 같은 사람일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눈물을 흘릴 때면, 강지훈은 더욱 심하게 그녀를 괴롭히곤 했었다. 강용은 예전 장소월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다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주변 환경에 꽤나 익숙했다. 그는 시장에 가서 신선한 닭, 오리, 생선, 고기 등을 사 왔다. 사막 근처라 물가가 다른 곳보다 훨씬 비쌌다. 특히 물은 가까운 곳에 오아시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강용은 민박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방음 시설이 좋지 않기 때문에 행여 위층에 잠들어 있는 장소월을 깨울까 염려되어 말이다. 집에 들어가 보니 또다시 소현아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소파에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그를 보고 싶어 하면서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강용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자 소현아는 소파에서 내려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가서는 입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속삭였다. 강용은 앞치마를 두르고 능숙한 솜씨로 야채를 씻고 다듬었다. 허리를 굽혀 찬장 아래에 있는 기름을 꺼내려다가 뒤에 있는 여자를 발견한 그가 말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말했을 텐데?” 소현아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세 걸음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확실하게 세어봤어. 지금은 네 걸음이나 떨어져 있어.” 그 말에 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라는 말도 너한테는 과분하네.” 강용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장소월에게 줄 삼계탕을 요리하는 데에 집중했다.소현아는 줄곧 말없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음식이 거의
“머리가 정말 정상은 아니네. 그렇게 심심하면 병원에나 가봐.” 강용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고는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소현아는 슬픈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용, 왜 이 아이를 싫어하는 거야? 규영과 미경은 분명 네가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규영과 미경도 내 좋은 친구 거든. 그 두 사람이 나를 속일 리는 없어.” “강용 너까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나도 필요 없어.” 그때 잠에서 깬 장소월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소현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실은 강용이 부엌으로 들어간 뒤부터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 장소월은 입술을 앙다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소현아에게 다가갔다. “현아야... 무슨 일이야?” 소현아는 장소월의 목소리를 듣고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월아, 강용이 내 배 속에 있는 이 아이 싫대. 이제 나도 싫어. 지워버릴 거야.” 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리 와, 우리 이야기 좀 하자.” 강용은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정원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 “현아야, 너 강용 좋아하지?”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소월이 너도 좋아해.” 장소월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아야, 좋아하는 마음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 나랑 너처럼 친구로서 좋아하는 감정도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감정도 있어. 그건 평생을 변함없이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현아는 어때? 네 마음은 어느 쪽인 것 같아?” 소현아가 대답했다. “난 강용과 평생 함께 살고 싶어. 현아는 강용을 좋아하지만, 강용은 현아를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내 배 속에 있는 아이도 싫대. 현아는 너무 슬퍼.”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틀림없이 강지훈의 핏줄이다. “그럼 강지훈은? 너 그 사람 좋아하는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