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아는 앞으로 걸어가 손을 뻗어 소민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언니가 했던 고생 넌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민아야, 그때 언니가 널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서 미안해. 다 언니 잘못이야. 널 잃어버렸던 그 날 밤... 얼마나 많이 찾아다녔는지 몰라.”“이제 언니한테 가족은 너밖에 없어.”“난 다시는 너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지난 시간 너한테 잘못했던 거 하나하나 다 보상해 줘야지.”“이번 한 번만 언니 말대로 해줄래? 기성은은 잊고 신이랑과 결혼해. 언니가 있는 한 신씨 가문에서도 널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지금으로선 널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야.”“소씨 가문은 널 도울 능력이 없어.”소민아가 말했다.“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요, 이랑 씨 좋죠. 하지만 전 그 사람한테 마음 없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성은 씨라고요. 꼭 이렇게까지 절 몰아붙여야겠어요?”“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주선호는 지금 신장암 말기야. 치료될 가능성은 제로고. 지금은 선거 시즌이잖아. 신군회도 후보자 중 한 명이야. 신군회도 성세 그룹 임원들과 밀접히 관계를 맺고 있으니 분명 당선될 거야. 신군회가 시장 자리에 앉으면 지금 그 사람이 맡고 있는 비서실장 자리는 공석이 돼. 신이랑이 정계에 진출하기만 하면 그 자리는 자연히 신이랑의 것이 될 거야. 애초부터 신군회는 신이랑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었거든.”소민아는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신씨 가문과 예전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네요!”송시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건 전연우한테 물어야지.”“전연우야말로 이런 면에서 가장 빠삭한 사람이야. 전연우와 장소월이 결혼하기 전, 주선호는 전연우와 자신의 딸인 주가은을 맺어주려 했었어. 하지만 아쉽게도 전연우는 이미 장소월에게 단단히 빠져버려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해버렸어.”“정치와 사업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잖아. 전연우가 짧은 몇 년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프로젝트를 따냈다고 생각해?”주가
6시 퇴근 후, 소민아는 호텔에 들러 신이랑의 컴퓨터 가방과 옷을 챙기고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그녀가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딸깍 문이 열렸다.신이랑이 편한 잠옷을 입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은 아까보다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왔어요?”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민아는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네. 이랑 씨 물건 가져왔어요. 빠진 건 없는지 확인해봐요.”거실에 들어와 보니 깜빡하고 청소하지 못했던 거실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공기청정기까지 작동하고 있었고,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져놓았던 카펫도 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구석구석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이랑 씨가 청소한 거예요?”소민아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푹 쉬라고 했잖아요. 이런 일은 왜 한 거예요!”심지어 식탁엔 신이랑이 만든 음식까지 놓여 있었고 주방에선 채 완성되지 않은 음식이 조리되고 있었다.신이랑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 있는 물건을 받아들었다.“손 씻고 와요. 내가 갈비탕 만들고 있어요. 곧 다 돼요.”소민아는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모두 삼켜버리고 말머리를 돌렸다.“그럼 약은 먹었어요? 좀 좋아졌어요? 머리 아직도 아파요?”신이랑이 머리를 저었다.“이제 안 아파요. 내가 가서 젓가락 가져올게요. 앉아요.”실은 소민아는 물건을 전해준 뒤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나가버린단 말인가?그녀는 여전히 그의 마음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소민아는 어쩔 수 없이 식탁 의자에 앉았다. 신이랑이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와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많이 만들었으니까 얼른 먹어요. 내일까지 놔두면 상할 거예요.”“나 혼자 먹으라고요? 이랑 씨도 앉아요. 저 다 못 먹어요.”“그래요.”신이랑은 앞치마를 벗고 마지막으로 국을 가져온 뒤 그녀 옆에 앉았다.소민아는 얼이 빠진 얼굴로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 채 입안에 밥을 넣고 있었다. 신이랑은 그동안 줄곧 그녀에게 음식을
소민아는 눈썹을 찌푸리고 말을 이어갔다.“만약 아니라면, 송시아는 왜 나더러 반드시 이랑 씨와 결혼해 신씨 집안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거예요? 우린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라는 거 이랑 씨도 인정하잖아요. 나한텐 기성은 씨가 있어요... 이런 말이 이랑 씨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알지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송시아가 소월 언니 목숨을 담보로 날 협박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송시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소월 언니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게 될 거예요.”“이랑 씨, 사실 제 머릿속에 예전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랐어요.”“송시아는... 제 언니가 맞아요...”소민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죽을 때까지도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송시아가 그녀의 언니이고, 두 사람은 혈연관계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소민아는 어린 시절 송시아를 가장 의지하고 좋아했지만, 이젠 그녀와의 관계를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민아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송시아가 돈을 벌기 위해 더러운 곳에 가서 늙은 아저씨들의 노리개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지 생활비를 벌어 동생을 키우기 위함이었다.그녀 역시 당시의 고됨이 송시아를 이토록 권력에 눈이 먼 괴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그녀가 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엔 종래로 그녀를 해친 적이 없다.소민아는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예전 기억이 모두 돌아오니 송시아에게 드는 감정은 애증이에요. 절 살리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돈을 벌던 언니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변해버렸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눈물을 흘리는 소민아를 본 신이랑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꼭 껴안고는 등을 토닥여주었다.“나 민아 씨 우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나 다 알고 있어요. 한 번도 민아 씨를 힘들게 할 생각 없었어요. 난 영원히 민아 씨 편이라는 거 기억해요.”“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뭘 요구하든 다
“이랑 씨한테 너무 불공평한 일 아닌가요?”소민아는 그제야 자신이 늘 고민하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이랑 씨, 대체 무엇 때문이에요?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 우린... 분명 예전엔 만난 적 없잖아요, 안 그래요?”소민아는 종래로 첫눈에 반해 모든 걸 바친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신이랑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호선을 그렸다. 그는 설명 대신 그녀에게 대충 둘러댔다.“민아 씨, 세상엔 이유가 없는 일들도 있어요. 한 사람을 좋아하는 데엔 이유가 필요 없어요.”그가 손을 뻗어 그녀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우리 일단 밥부터 먹어요. 아까 거의 안 먹었잖아요. 내가 가서 음식 데울게요. 다 먹으면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저 오늘 차 몰고 왔어요.”신이랑은 분명 누군가의 최고의 동반자가 될 것이고, 친구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가 될 것이다.다만 소민아와의 관계는 발전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녀는 한 사람에게 마음을 굳히면 영원히 그 사람만 보기 때문이다.3년이라는 시간제한도 오직 기성은을 자극하기 위해 꺼낸 말이다. 또한 어쩌면 자신의 기다림을 합리화하고 싶어 그랬는지도 모른다.모든 말을 털어놓고 나니 그녀는 마음속 거대한 돌덩이를 내려놓은 것 같이 홀가분했다. 그녀가 집에 돌아가니 명세진이 주방에서 죽을 꺼내왔다.“이랑이네 집에서 밥 먹었다면서? 그래도 시간이 늦으면 네가 배고파할까 봐 아주머니한테 먹을 것 좀 만들어놓으라고 했어.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힘든 거 있으면 고모한테 말해.”소민아는 이미 배가 불렀지만, 고모의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어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다.“전 괜찮아요. 회사 일로 고민 좀 하고 있어서 그래요. 참, 현아 언니 최근 집에 온 적 있어요? 저번 엄마아빠가 오셨을 때 왜 다음 날 바로 간 거예요?”명세진은 한숨을 내쉬었다.“휴. 그 강지훈이라는 사람은 대체 우리 현아한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신이랑은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신군회의 책상에 내려놓았다.“이 안에 6억이 들어있어요. 제가 모아둔 돈이에요. 나머지 돈은 민아 씨와 결혼식 준비하는 데에 쓸게요.”“안... 안 돼요. 오빠...”“아빠, 빨리 오빠 좀 설득해주세요! 소민아 그 여자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요.”신이랑은 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신군회는 이 일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이 권력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 지금 신이랑은 많은 돈을 벌고 있다. 그의 도움 없이 신이랑 본인의 능력만으로도 서울에서 충분히 잘 살 수 있다.역시 신군회의 아들이다.신수지는 이제 유연홍에게 칭얼거리기 시작했다.“엄마, 아빠한테 말해주세요. 아빠... 엄마 말씀은 잘 들으시잖아요.”“그만! 다 나가!”신군회는 벌컥 화를 내며 책상 위 서류들을 모두 바닥에 내던져버렸다.유연홍은 차분하게 신수지를 달랜 뒤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겼다.“여보, 수지한텐 이렇게 불같이 화내면서 왜 그 아들한테는 아무 말도 못 해요? 수지는 내 딸이에요.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어요. 무슨 수를 쓰든 신이랑과 우리 수지 결혼시켜요. 아니면... 절대 집에 들이지 않을 거예요.”신군회는 시뻘게진 눈으로 유연홍을 쳐다보다가 들고 있던 찻잔을 던져버렸다. 그가 유연홍에게 화를 분출하는 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그 입 다물어! 여자가 뭘 안다고.”“당신 소민아가 누군지 알아?”“송시아의 잃어버렸던 동생이야. 내 대다수 인맥들은 다 송시아와 연결되어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세 그룹과 닿아있고, 또 얼마나 많은 놈들이 그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지 알아? 이건 내 유일한 기회야. 이번 일이 잘못되면 우린 끝이라고!”그 지독한 여자의 동생이었으니 소민아가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었던 것이다.유연홍은 더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신수지도 잔뜩
그의 제안에 응한 뒤 소민아는 무겁고 착잡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신이랑은 그녀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눈치챈 듯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먼저 그 사람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필경 작은 일은 아니잖아요. 사전에 자세히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괜찮아요. 제가 잘 설명할 수 있어요.”회사에 돌아간 뒤, 로비에서 송시아와 마주쳐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소피아도 그 뒤를 따랐고, 그렇게 그리 비좁지 않은 엘리베이터 안엔 그들 몇 명만 타고 있었다. 송시아는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최근 기분이 좋아서인지 얼굴은 벚꽃이 핀 듯 밝고 환했다.“좋아. 내 말 제대로 들은 것 같네.”소민아는 그녀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송시아는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데이트하는 데에 힘든 점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예를 들어... 레스토랑을 예약한다거나...”신이랑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소민아가 그를 제지했다. 그의 눈빛을 보니 마치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저런 사람한테 신경 쓸 필요 없어요.”엘리베이터는 빠르게 10층에 도착했고, 소민아와 신이랑은 엘리베이터를 나섰다.대표 사무실 안, 송시아가 문 앞에 멈추어 팔을 휘저었다.“이따가 조회는 소피아 씨가 진행해요. 난 화상 회의 일정이 있으니까 중간에 찾아오지 말고요.”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송 대표님.”소피아가 나가자 송시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의자에 등을 돌린 채 앉아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이렇게나 빨리 왔어요?”그녀는 천천히 문들 닫고는 배시시 웃으며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그쪽 일은 다 처리됐어요? 내 도움 더 필요하지 않아요?”남자는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의자를 돌리고 여자의 손을 꽉 잡은 뒤 허리를 감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송시아는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한의준이 말했다.“왜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거야? 마음이 약해졌어? 차마 하지 못하겠어?”송시아는 돌
“우리 남원 별장에 있는 아이를 몰래 데리고 나올까요? 장소월은 전연우의 죽음은 개의치 않아 할 수 있어도 아이까지 외면하지는 못할 거예요.”송시아가 남자의 품에 기대어 말했다.“계속 찾고 있는데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서철용도 연구원에 들어가 버렸어요. 우리의 사람들은 출입금지라 장소월에 대해 묻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요.”한의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품속 여자를 바라보았다.“남원 별장은 지금 강지훈이 책임지고 지키고 있어. 또한 전연우가 떠나기 전 최고 레벨의 방어 시스템을 구축해 놓기도 했고. 일반 사람들은 절대 들어가지 못해. 설사 들어간다고 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야.”송시아는 도리어 흥분하며 말했다.“그럼 주위에 폭탄을 심어놓고 터뜨리는 건 어때요? 통로를 하나 파서 그 속에 묻어두면 되잖아요. 그럼 쉽겠네요.”“넌 정말 지독한 여자야.”송시아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내 이런 모습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몇 분 뒤, 사무실에 야한 공기가 가득 찼다. 그 소리만 들어도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정도였다....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가슴에서 불편함이 느껴졌다. 이런 경우는 드물었던지라 뭔가 큰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그때, 신이랑이 통화를 마치고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소민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전화는 했어요?”“네. 저녁에 레스토랑 예약해뒀어요. 진짜 결혼이든 가짜 결혼이든 난 민아 씨가 어머니한테 인사드렸으면 좋겠어요.”“어머니도 민아 씨 보면 엄청 기뻐하실 거예요.”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니한테 드릴 선물 준비해야겠어요. 빈손으로 가면 안 되잖아요.”“그래요. 민아 씨 뜻대로 해요.”신이랑은 정말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있는 것 같았다.신이랑의 어머니에 관해선 그에게 들은 바가 있다. 아주 자애롭고 친절한 분이시라고 했다. 예전 무용단에 있을 때 아
중식 레스토랑 안, 신이랑과 소민아는 일찌감치 도착해 음식 주문을 마쳤다. 맞은편엔 아주머니가 열한 살 남짓한 남자아이와 함께 앉아있었는데, 아이는 장난기가 많아 젓가락으로 그릇 안 음식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아주머니가 부드럽게 한마디 했지만, 아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흥 콧방귀를 뀌고는 계속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후 아주머니도 어쩔 수 없이 더는 아이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진미령의 아름다운 미모는 무용단 단원이었던 예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세월도 미인은 피해 가는 모양이다. 얼굴에 주름은 조금 패어 있었지만, 예전 얼마나 출중한 외모를 갖고 있었는지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빨간색 코트 차림에 목엔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하지만 아주머니의 얼굴엔 약간의 짜증이 드러났다.“우리 현빈이 내일 학원 가야 해. 내가 오늘 이렇게 나온 거 애 아빠는 몰라. 할 얘기 있으면 얼른 해.”두 모자는 한자리 띄워 앉았고, 소민아는 그 옆에 있었다. 신이랑이 말했다.“저 곧 결혼할 것 같아요. 결혼식 날 어머니께서... 와주셨으면 좋겠어요.”진미령은 소민아의 얼굴을 대충 훑어보고는 말했다.“네가 건강하게 자란 것만으로도 난 만족해. 네가 지금 결혼하고 애를 낳는다고 해도 난 이제 너한테 해줄 게 없어. 저번에 네가 나한테 보낸 돈은 다시 돌려보냈어... 금액이 차이나지 않는지 확인해봐. 네 양육권을 가진 뒤로 난 최선을 다해 널 성인으로 키워냈어. 이젠 너도 혼자 살아갈 능력 있잖아. 지금 내가 꾸리고 있는 이 가정과 거리를 유지해줬으면 좋겠어.”신이랑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점차 경직되었다. 밥상 아래 꽉 쥐어지는 주먹까지 소민아는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신이랑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고스란히 느껴졌다.신이랑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슬픔은 가감 없이 몸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돈이 아무리 많아도 함부로 쓰면 안 돼. 아가씨 예쁘네. 행복하게 잘 살아.”진미령은 그 한마디만 남겨놓고 아들 손을 잡고 나가버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