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왕은 모용란이 임종 직전에 남긴 말을 봉구안에게 전했다.“안타깝게도 약쟁이라는 말만 남기고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서왕의 눈가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봉구안은 생각에 잠겼다.“천룡회에서 약쟁이들을 기른 적이 있으니, 계속 조사해야겠습니다. 다만, 이 일은 폐하께서 결정하셔야 할 일입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공손히 절하고 자리를 물러났다.서왕은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예전 그 당차고 늠름하던 맹 소장군이, 여인이었다니.…모용렴이 고백한 죄행들은 수많은 억울한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었다.여기에 양연삭이 자백한 내용까지 더해지며, 폐태자와 진가의 억울함은 마침내 밝혀졌다.다음 날, 천룡회의 죄행이 천하에 공표되었고, 주범 양연삭은 시장에 끌려 나갔다.사람들이 구경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양연삭은 아직 들을 수 있었다.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존엄을 지키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당당한 진국 황실의 후예가, 이 천한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받다니!지금의 양연삭에게 있어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형벌이었다.그 며칠 동안, 옛 사건들이 재심을 받으며 폐태자와 진가 사람들이 명예를 회복했다.이 소식이 후궁 처소에 전해지자, 연상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이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그리고 황제는 그녀의 봉호를 박탈하고 출궁을 허락했으며, 진가의 후손으로서의 보상으로 좋은 농지와 가게를 하사했다. 진가의 오래된 저택까지 모두 돌려주었다.그녀의 인생은 수차례 굴곡을 겪은 끝에 이제야 비로소 땅에 발을 디딘 것 같았다.“황제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립니다!”연상은 땅에 엎드려 큰절하며 흐느꼈다.그녀는 이 황궁에 단 한 점의 미련도 없었다. 그날로 바로 궁을 떠났다.황궁의 사치스러운 부귀도, 밖의 드넓은 하늘과 바다만큼은 아니었다.…객잔.봉구안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열어보니, 눈물 자국으로 가득한 연상이 서 있었다.“구안 아씨…” 연상은 울먹이며 말했
봉구안은 궁중에 생일 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저녁 해시로 약속을 잡았다.결과적으로, 해시 전 한 시간 전에 소욱이 도착했다.그는 꽃단장을 한 듯 진홍색 옷을 입고 나타났고, 봉구안은 그의 뒷모습만 보고도 강림 그놈이 나온 줄 알았다.주변 손님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봉구안은 미리 두 각 전에 주점에 도착했는데, 그가 더 일찍 온 것이었다.“2층에 있는 방을 예약했습니다.”소욱이 즉시 그녀의 손을 잡았으나, 본능적으로 봉구안이 손을 뿌리쳤다.왜냐하면 지금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남자 둘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은 모양새가 말이 아니었다.소욱의 손이 허공에 멈췄고, 그는 어딘지 모르게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혹시 자신이 며칠 동안 그녀를 못 챙겨준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인가 싶었다.아간에 들어가자마자, 소욱은 다짜고짜 봉구안을 껴안았다.문 밖에서 오백이 재빠르게 손을 놀려 문을 닫았다.그는 고개를 들어 보니, 진한길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뻣뻣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오백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말했다.“자네는 문도 제대로 못 닫는 것이오?”진한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방 안.봉구안이 소욱을 밀어내며 눈살을 찌푸렸다.“제가 지금 몸이 더럽습니다.”그제야 소욱은 그녀의 옷에 뿌연 먼지가 묻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마치 좁은 골목길을 헤쳐 나간 듯했고, 머리카락에 거미줄 같은 것도 조금 묻어 있었다.소욱은 웃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에서 그 거미줄을 털어냈다.“무얼 하고 다녔느냐? 내 생일 선물은 준비했느냐?”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그렇습니다.”소욱의 손동작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이 갑자기 밝아졌다.“참말이더냐?”봉구안은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그날 양연삭을 심문하던 중, 폐하의 모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이 말을 듣자, 소욱의 눈썹이 약간 찌푸려졌다.그는 조묘의 난 때 이미 알고 있었다. 과거의 해난은 천룡회의 소행이라는 것을 말이다.그러나 안다고 해서 무엇이
봉구안은 한 채의 집을 빌려 수적들을 그 안에 가두었다.그들은 이미 고문을 당해 온몸에 상처투성이였다.오백이 구석에서 거의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한 명을 가리키며 진한길에게 말했다.“저 놈입니다. 방금 도망치려다 소장군께서 친히 붙잡아 오셨던 놈입니다.”수적들은 봉구안을 보자 쥐가 고양이를 본 것처럼 벌벌 떨었다.그들은 한때 강호를 휘어잡던 수적들이었지만, 이제는 젊은 남자 하나에게 얻어맞아 친어머니도 못 알아볼 꼴이 되어 있었다.“제발… 제발 때리지 마십시오! 말할 건 다 말했단 말입니다…”진한길은 한 명을 끌어다가 소욱 앞에 내던졌다.그 자의 열 손가락은 피투성이였고, 고문을 받았음이 분명했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군가 우리에게 큰돈을 주며 그렇게 하라고 시켰습니다.”“우린 돈만 받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게 부잣집 상선이라는 것밖에 몰랐습니다. 아니었으면 우리가 아무리 배짱이 커도 황실의 배를 감히 털 생각은 못 했을 겁니다!”“배가 뒤집혔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쳤고, 그 여자는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녀를 구해냈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옥패를 주며 그게 아주 값진 거라고 했습니다.”“우리를 설득하며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요.”“그녀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처음엔 우리가 강제로 손을 대볼까 했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우리가 털었던 배가 황제의 배라는 거 아닙니까! 그 여자는 또 자기가 황제의 여인이라고 하더군요. 우린 그 말에 기겁해 어디 손이라도 댈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정말입니다! 우린 그 여자에게 손끝 하나 댄 적 없습니다!”“다 그 고용한 자가 문제입니다! 그가 우리를 속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겁니다.”“그 여자를 그냥 놔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우린 그녀를 풀어주었습니다. 정말 한 손가락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그 일 이후, 우린 몇 년 동안 숨어 지내며 물도둑질은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조정에서 우리를 찾는 것도 없었습니다. 작년쯤
완부옥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살짝 웃고는 소욱을 바라보며 말하였다.“결정했습니다. 두 분과 함께 입궁해야겠어요.”이어서 소욱에게는 태도를 바꿔 말을 이어갔다.“기왕 황제께서 계시니 직설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저를 비로 봉해 주세요. 크고 화려한 궁전은 필요 없습니다. 저희 낭군과 함께 살 수 있는 곳이면 충분해요.”소욱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비로 봉해달라고?”그녀는 머릿속이 대단히 간단한 모양이었다.소욱은 완부옥을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게 어울리는 것은 다만 유골 단지일 뿐이다.”“폐하!” 완부옥의 눈에 살기가 번득였지만, 그를 죽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결국 그녀는 봉구안의 팔을 끌어안고는 누구도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듯한 모습으로 매달리며 애교스럽게 말했다.“낭군, 당신은 아직 제게 빚진 것이 있죠?”소욱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이냐!”완부옥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였다.그녀는 봉구안에게 상기시키듯 말했다.“잊었나요? 남방에서 당신이 제게 무당을 빌려갔을 때, 저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말이에요. 우리 둘이… 음흠?”그녀는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봉구안의 어깨를 콕콕 찌르며 아리따운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봉구안은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그때 소욱이 독충의 독에 중독되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완부옥을 찾아 도움을 청해야 했다.바로 그때, 봉구안은 완부옥에게 자신이 여성임을 밝히게 되었다.“그만하거라!” 소욱이 봉구안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냉랭한 표정으로 완부옥을 바라보았다.이 여자는 도무지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는가!그는 곧바로 봉구안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 완부옥을 멀찍이 떼어놓으려 하였다.그러나 완부옥은 집요하게 그 뒤를 따랐다.뒤따르던 진한길과 오백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나누었다.진한길이 먼저 입을 열었다.“너희 소장군은 참 꽃을 불러모으
완부옥은 서왕 앞을 돌아섰다. 그녀의 눈에는 흥미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제가 맞춰볼까요? 지금 전하께서 무척 궁금해하는 건, 제가 어떻게 알아냈는지겠죠.”“사실은요, 아주 간단해요.”“저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들은 두 가지 부류예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 아니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죠.”“제 예상이 맞다면, 전하는 후자겠네요!”‘정말 자신감이 넘치는군.’서왕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완부옥을 바라보았다.완부옥은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 전하께선 제가 왜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지 궁금해하고 있겠죠.”“저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는…”서왕은 온화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완 낭자, 앞으로 걸어가서 두 번째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으세요. 거기 만두 가게가 보일 겁니다.”“그 가게 동쪽, 두 번째 집으로 들어가 보세요. 거기 좋은 의원이 낭자를 잘 치료해 줄 겁니다.”‘지금 나보고 병이 있다고 하는 거야?’…가마 안.봉구안은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며칠 동안 수적들을 잡느라 바쁜 나날을 보낸 탓에 잠이 부족했다.그녀가 눈을 떴을 때, 방향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곧바로 창문에 걸린 천을 걷고 밖을 살폈다.“이 방향은 객잔이 아니군요.”봉구안은 옆에 앉아 있는 소욱을 바라보았다.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어둠 속에서 욕망이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알고 있다. 너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싶어서 그랬다.”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는 한 별채 앞에 멈췄다.봉구안이 고개를 들어보니, 문에 ‘자재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자재, 자유로움이라…?’봉구안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소욱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솔직히 말했다.“네게는 자유각이라는 집이 있었지. 이제 넌 내 아내가 되었으니, 너에게 이 자재각을 선물하고자 한다.”그의 말에서 단번에 드러나는 야심. 소욱은 모든 면에서 단회욱을 이기고 싶어 했다.하지만 봉구안은 이런 집이 필요 없었다. 풍류를 이해할 마음도 없었다.
소욱의 말을 들은 봉구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시험을 해보라니?봉구안은 몸을 돌려,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어떻게 시험하면 될까요?”소욱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두었다. 동시에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그녀의 표정 변화를 확인하려 했다.봉구안의 숨결이 약간 흐트러졌고, 그녀의 눈은 반쯤 내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 속 감정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소욱은 그녀의 귀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농담한 것이다.”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냉정하고 담담했으니,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기란 참으로 어려웠다.그렇게 말한 뒤, 소욱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는 다시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신혼 첫날밤은 지키고 싶구나.”대혼례 전까지 그는 성욕을 자제해야 했다.그가 물러나려던 찰나, 봉구안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그의 옷깃을 잡아채며 전장에서 적을 마주하는 것처럼 공격적인 눈빛을 보였다.“제가 꼭 원한다면요?”소욱은 한 걸음 물러섰다. 얼굴에는 믿기 힘든 당혹감이 스쳤다.“구안아, 진정하거라.”그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완전한 혼례를 지키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했다.봉구안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눈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그 말의 내용은 다소 도발적이었다.“벗으시죠, 폐하.”소욱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너… 진심으로 원하느냐?”그는 여전히 고민하는 듯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차갑고 결연해 보였다.“네, 주실 건가요?”소욱은 한숨을 내쉬었다.“어찌 여인으로서 이리 늑대처럼 구느냐.”결국 그는 포기했다.신혼 첫날밤이 뭐 대수겠는가. 그녀와 함께 있는 모든 밤이 신혼 첫날과 같을 터였다!잠시 후, 소욱은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갔다.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봉구안은 오지 않았다.뒤돌아보니,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내관 진한길이 들어와 병풍 밖에서 보고했다.“폐하, 마마께서 보내신 옷입니다. 또
염추가 이미 죽었고, 천룡회와 금련파도 철저히 몰락했다. 양연삭은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백성들이 던진 돌더미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이로써, 강호에는 더 이상 천룡회가 없으며, 진국 황실의 후손도 완전히 끊어졌다.소욱의 생일 이튿날, 봉구안은 사람들을 이끌고 궁림에 도착했다. 진나라 태조 황제의 묘를 찾기 위해서였다.이를 위해 그녀는 감옥에서 몇몇 도굴꾼들을 끌어냈다.전문가를 대동한 이유는 일을 더욱 수월하게 처리하기 위함이었다.도굴꾼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며칠 되지 않아 대략적인 묘 위치를 확정했다.계속해서 땅을 파내자, 한 관이 드러났다.기묘한 점은, 이 관이 세로로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도굴꾼들은 흥분하며 말했다.“세로로 세워진 묘입니다! 관 속의 사람 신분이 지극히 고귀하다는 뜻이죠! 틀림없습니다! 이건 진 나라 태조 황제의 묘입니다!”한 호위가 흙이 느슨해진 것을 발견하고 외쳤다.“이상합니다! 흙이 헐거워졌습니다!”느슨한 흙을 파내자, 낮은 문 하나가 드러났다.봉구안은 그 낮은 문을 바라보다가 즉시 명령을 내렸다.“관은 옮겨 다른 곳에 다시 묻어라.”이어 다시 말했다.“문을 열어라. 문 뒤에 뭐가 있는지 보도록 하자.”잠시 후, 문이 열렸다.문 안쪽에는 극도로 좁은 통로가 있었고, 오직 작은 체격의 사람만 기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한 도굴꾼이 스스로 나섰다.“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축골공을 익혔습니다!”그는 이 상황의 첫 목격자가 되어 역사의 이름을 남길 수 있다고 믿었다.봉구안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에게 밧줄을 묶어라.”“예!”곧, 그 도굴꾼은 밧줄을 묶은 채 좁은 통로로 기어들어갔다.밧줄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 계속해서 앞으로 뻗어나갔다.대략 열 장 정도 갔을 때, 밧줄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그 도굴꾼이 끝까지 도달한 듯했다.다른 도굴꾼들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나으리, 저희도 이제 들어갈 수 있습니다!”도굴 작
소욱은 정말 어이가 없고 웃기기도 했다.어쩐지 며칠간 사라졌다 싶더니, 이렇게 엉망진창인 꼴로 돌아온 이유가 밝혀졌다.알고 보니 남의 선산을 파헤치러 간 것이었다!소욱은 봉구안 앞으로 걸어가, 손을 뻗어 그녀 얼굴에 묻은 흙을 직접 닦아주며 말했다."이리도 위험한 일을, 꼭 네가 직접 해야 했더냐? 그냥 편히 혼례 준비나 하면 안 되겠느냐?"지금 혼례복만 완성되면 바로 그녀를 궁으로 맞아들일 참이었다. 그래야 매일 그녀 걱정으로 속을 끓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하지만 이 순간, 그는 문득 자신이 어린 시절의 봉구안을 키웠던 맹건 부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어릴 적 그녀 역시 이렇게 가만히 있지 못하고 온종일 뛰어다니고 돌아다녔을 것이다.봉구안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묘 안에는 온갖 장치가 있더라고요. 꼭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그녀가 학문적으로 지식에 대한 갈망을 보이며 진지한 태도를 보이자, 소욱은 마음이 부드러워졌다.그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받치며, 입술에 두 번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그녀가 너무 좋아서,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였다.그러나 봉구안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정신 차리세요.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이 부장품들, 전부 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소욱은 그녀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잡아 고정하며,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 말을 끊었다."넌 자꾸 정사만 이야기하자 하는구나. 나는 너와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그는 다른 손으로 그녀 허리띠를 슬쩍 당기며, 의도를 암시하듯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날 밤 말이다. 네가 욕조에서 날 두고 혼자 도망친 일 말이야. 그때의 빚, 아직 내가 정산하지 못했어. 네가 어찌 갚아야겠느냐?"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아니, 대혼례 전까지는 몸을 아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소욱은 잠시 멍해졌다.큰일이다. 자신이 쏜 화살에 스스로 맞아버렸다.하지만 그는
선성 밖에서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수십만 남제 장병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는 선성 위를 울려 퍼지며, 마치 갇혀 있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성 안에서도 그 소리가 선성을 흔들 만큼 강렬하게 울렸다.봉구안은 전마를 타고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갑옷 아래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성문은 이미 단단히 닫혀 있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였다.성루 위에서는 단춘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그 옆의 부장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장군, 저건 동방군입니다. 대체 어떻게 선성에 나타난 걸까요?! 분명 감주에 있어야 할 자들인데…”하늘에서 날아온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북연의 황제는 성 밖 동방군의 존재에 크게 분노했다.그는 단춘의 옷깃을 움켜잡고 호통을 쳤다.“감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그런데 이게 대체 뭐냐! 단춘, 정말 잘도 해냈구나!”단춘은 당혹스러웠다.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기에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그때 수화부 연합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남제가 당신들을 속인 게 확실하군!”황제는 점점 격분하며 단춘을 더욱 매섭게 쏘아봤다.“동방군이 너희 뒤를 따라왔는데도 모르다니, 이런 실력으로 남제를 우리 북연과 나누겠다고? 정말 가소롭구나!”단춘은 황제의 손을 뿌리치며 반박했다.“폐하, 성 밖에 있는 건 일부 동방군에 불과합니다.”“게다가 우리 동부 연합군만 속은 것도 아닙니다.”“남부 연합군인 수화부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남제군을 알아챘습니까? 똑같이 속았으면서 왜 저희에게만 책임을 묻습니까?”동부 연합군의 장수들도 이에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남제의 계략은 워낙 교묘합니다. 감주를 언제 빠져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폐하, 북부 연합군이라고 해서 뒤따라오는 남제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그만들 하십시오.
강력한 적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어리석은 동맹이었다.단춘은 선성의 옥석비를 손에 넣고 싶었지만,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그는 정정당당히 조유관을 공략하며 남제에 진입했다.그런데 수화부 연합군은 도대체 뭘 하는가?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동부 연합군의 성과를 가로채려는 것은 아닐까?그들의 이런 태도는 단춘을 화나게 했다.그렇다고 이미 도착한 연합군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결국 단춘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모두 들어라. 먹을 것도 쉬는 것도 뒤로 미뤄라.”“다른 나라보다 앞서 선성에 도달해야 한다!”“예!”……감주.대하국 연합군은 성 밖에서 남제 동부군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남제 황후 봉구안이 이미 거미줄이라 불리는 비밀 통로를 통해 대군을 이끌고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는 소수의 병력을 남겨 감주에 대규모 병력이 주둔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이 계책에 말려든 동부 연합군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그 사이, 봉구안의 동부군은 비밀 통로를 통해 이미 묵성에 도착해 있었다.그곳에서 그녀는 동방세를 만났다.동방세는 거미줄 비밀 통로의 마지막 관문을 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그는 고된 작업 중에도 농담을 잊지 않았다.“이번 거미줄 개조를 위해 황제께서 이 장군의 10만 대군을 내게 맡기셨소.”“덕분에 난 한동안 대장처럼 군림하며 유세를 떨었네.”황제가 보낸 인력 덕분에 그는 북부와 동부의 거미줄 비밀 통로를 효율적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이제 마지막 관문만 마무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봉구안은 그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동방세, 남제 장병들을 대신해 깊이 감사의 뜻을 전하네.”“선성으로 갈 계획이오?”동방세가 웃으며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동방세는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여기 작업만 끝내면 범진과 함께 선성에서 보도록 하세.”그는 선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직감
남강.서왕은 수화부 연합군의 갑작스러운 철수가 단순한 계략일 것이라 의심했다.하지만 밤중에 직접 확인한 결과, 그들의 철수는 패주와 다름없었다.식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떠난 흔적이 역력했으며, 모닥불조차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조사를 거듭한 끝에, 수화부 연합군이 선성의 보물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서왕은 당황스러웠다.적군이 사라졌으니, 그는 계속 방어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한편, 수화부 연합군은 선성을 향해 급히 북진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병사들은 강추위를 뚫고 말을 달리며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선두에서 말을 탄 장수가 외쳤다.“장군의 명령이다! 속도를 더 내라!”병사들은 지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우리가 가봤자 보물이 우리 손에 들어올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둘러야 하나?”“그러게! 선성 보물 얘기를 듣자마자 진지를 철수했지만, 보물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잖아. 그 유명한 옥석비도 하나뿐인데, 그게 우리 차지가 되겠어?”“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를 수밖에. 우리가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동산국 황궁.동산국 황제는 어마장에서 여전히 기력이 넘쳤다.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이어 과녁 중심을 명중시켰다.곁에 있던 신하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폐하, 수화부 연합군이 남강 공격을 포기하고 북상하여 조유관으로 향했다고 합니다.”조유관은 대하국 연합군이 최초로 돌파한 약점이었다.더 많은 연합군이 조유관으로 몰려드는 상황은 연합군에게 유리했다.그러나 그로 인해 남부 방면의 공격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황제는 활을 내려놓았다.머리칼에는 은빛이 드리워졌지만, 여전히 강인한 모습이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담대연의 소식은 알아왔느냐?”“담대연은 여전히 남제에 억류되어 천옥에 갇혀 있습니다.”황제는 다시 활을 들어 두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한 번의 발사로 과녁을 뚫자, 곁에 있던 신하가 찬사를 보냈다.“폐하, 화살로 만물을
남강.서왕의 어깨는 부상으로 아파왔고, 완부옥은 표면적으로는 화목한 부부처럼 행동하며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막상 군막 안에 들어가면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듯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완부옥은 저녁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배가 부른 상태였다. 갑작스런 복통에 허리를 구부린 그녀를 보자, 서왕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유화! 군의를 데려오라!”그는 완부옥의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완부옥은 그저 체한 것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필요 없습니다!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내심 불안했던 그녀는 거짓 임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벌레가 최근에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태아의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군의가 와서 진찰을 하면, 모든 게 드러날 위험이 컸다.서왕은 그녀의 상태가 진정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그녀를 침대에 앉힌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이는 괜찮은가?”그의 시선은 그녀의 배로 향했다. 완부옥은 워낙 마른 체형이라 배가 불러도 잘 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느슨한 옷을 입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서왕은 그녀의 진짜 상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일반적인 임산부라면 나타날 만한 불편함이 완부옥에게는 전혀 없었다. 이런 점들이 서왕에게 의심을 품게 했다.그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우리 아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드디어 이 남자가 의심하기 시작한 걸까? 완부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초조해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어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어미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겠어요?”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옷깃을 살짝 건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솔직히 말해라.”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완부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평소에는 성격이 부드럽던 이
대하 연합군은 묵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선성을 향해 진격했다.장수들 중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 말했다.“단 장군, 지금까지의 남제 원정이 너무 순조롭습니다.”“선성에서 매복을 준비한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단춘 역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동부군은 현재 감주에 주둔 중이었다.그는 전력을 선성으로 보내면서도 일부 병력을 감주로 보내 허위 공격을 감행하고, 동부군을 묶어두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만약 선성에 매복이 있다 해도, 우리의 10만 대군에 북부 연합군까지 합하면 수십만 병력인데, 선성 하나를 못 뚫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그럼에도 신중한 장수는 여전히 망설였다.“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남제의 전략은 적을 깊이 유인하려는 술책 같습니다.”“단 장군, 처음 계획대로 동부군을 견제하며 진격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단춘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짜증을 드러냈다.“유인이라니? 남제가 그렇게 어리석어 감주를 내놓고 선성에 매복을 펼친다는 말인가?”“만약 남제가 유인책을 쓴다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감주로 끌어들이는 것이겠지!”“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둬라. 만약 북연이 먼저 선성에 도달해 옥석비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북연의 손발 노릇을 하게 될 거야!”“북연이 동부를 맡으라고 한 것은 그들이 다 해먹으려는 술책일 뿐이다.”“기다릴 테면 기다려 봐. 하지만 대하는 그렇게 바보처럼 속지 않는다!”선성은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북연 황제 역시 선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그들은 남하하는 도중 남제 잔병들에게 여러 차례 매복 공격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시키며 계속해서 진격했다.남제군이 계속 후퇴하면서, 연합군의 사기는 높아졌다.그러다 어느덧 설날 전야가 되었다.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리 정적이 감돌았다.백성들은 해가 지자마자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설날을 맞이하기보다는 다가오는 전란을 피해 숨으려는 모습이었다.황성.궁궐 안, 후궁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밤을 지새웠다.그들은 한 손에 작은
군막 안.서왕은 한쪽 어깨를 드러낸 채 앉아 있었고, 군의가 그의 상처에서 독을 빼내고 있었다.예리한 단검을 손에 쥔 군의가 상처를 살피자, 서왕은 입에 물고 있던 두꺼운 수건을 꽉 깨물었다.그 모습을 본 완부옥이 눈썹을 찌푸렸다.“이미 독화살을 뽑아냈는데, 왜 또 칼을 드는 거죠?”호위 유화가 대신 답했다.“군의께서 남아 있는 독을 빼려면 살을 도려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완부옥은 소리 내어 웃었다.“살을 도려낸다고? 군의가 혹시 적국에서 온 첩자가 아닐까요?”그녀의 말에, 군의의 손이 떨렸다.“부인, 어찌 그런 망언을!”서왕은 입에 물고 있던 수건을 깨물며 눈빛으로 완부옥에게 조용히 하라는 경고를 보냈다.그러나 그녀는 군의를 밀어내고 서왕의 상처를 살폈다.피부가 갈라지고, 독이 퍼지며 상처 주변이 검게 변해 있었다.흔한 여인이라면 얼굴을 돌리며 기겁했을 터였다.그러나 완부옥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그녀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무심하게 말했다.“이게 그렇게 심각한 건가? 별거 아니네.”그 말에 유화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부인, 아직 독이 남아 있습니다! 군의께서 말하길 어서 전하의 몸을 도려내 독을 빼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완부옥은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독을 빼는 방법이 꼭 살을 도려내는 것뿐인가?”그녀는 품 속에서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군의는 그것을 보며 해독약이라고 생각했다.유화 또한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그러나 항아리가 열리자, 그들이 본 것은 해독약이 아니었다.완부옥은 맨손으로 뚱뚱하고 하얀 벌레 하나를 꺼내더니, 서왕의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군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전하! 조심하십시오! 저것은 독충입니다!”유화도 경악하며 외쳤다.“부인, 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시끄럽다!”완부옥은 눈살을 찌푸리며 꾸짖었다.“한번만 더 내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군의는 이성을 잃고 외쳤다.“남강의 독충은 맹독입니다! 부
대하 사국 연합군이 묵성을 함락시키려 진격했을 때,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묵성은 조유관과 똑같이, 텅 비어 있었다."말도 안 돼!"단춘은 차마 현실을 믿지 못했다.이 짧은 시간 동안, 도시 전체의 사람들이 대체 어디로 간 것이란 말인가?그들이 모두 감주로 이동한 것일까?그때, 정찰병이 헐레벌떡 뛰어왔다."보고 드립니다! 장군! 묵성에 적군이 없습니다!"연합군은 도시 곳곳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단 한 명의 인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심지어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니..."묵성은 한때 인구가 많은 번화한 도시였다.그런데 지금은 마치 유령 도시가 되어 버린 듯했다.연합군은 묵성에 주둔했지만, 밤이 되자 몰아치는 한파와 함께 불길한 분위기가 마을 전체를 감쌌다.캄캄한 어둠 속에서, 차가운 바람이 기괴한 신음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병사들은 모닥불을 피워 음식을 끓이려 했지만,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어.’주군이 모여 있는 대장막 안.장수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단춘을 바라보았다."단 장군, 이건 분명 남제의 계략입니다!""우리가 이미 두 번이나 빈 성을 마주하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습니다.""더욱이, 우리는 전쟁을 통해 식량을 보충하려 했으나, 기대와 달리 얻은 것은 없습니다!""장군! 이곳에서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내일도 계속 진군하시겠습니까?"단춘의 표정은 냉랭했다.눈빛은 날카롭게 빛났고,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묵성이 비어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감주로 이동했을 것이다.""그러나 감주에 적의 매복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섣불리 공격할 수 없다."그는 고개를 들어 정찰병을 바라보았다."북연은 어떤가? 북부 연합군은 어디까지 진격했지?"정찰병이 빠르게 답했다."장군! 북부 연합군은 이미 풍양까지 진격했습니다.""풍양은 작은 군현으로, 바로 인근에 있는 박주를 넘어가면, 그다음은 곧바로 선성입니다!"회의실은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북연군의 속도는
이촌은 그야말로 유령 마을이 되어 있었다.사람의 흔적조차 없었다.연합군은 황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북연 황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마지막 생존자를 끌어오라 명령했다.화살에 맞은 병사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끌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폐하, 분명 이곳입니다! 바로 이 마을에서 기습을 당했습니다!”하지만 북연 황제는 차가운 시선으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귀신조차 보이지 않는구나.”조사에 나섰던 정찰병들도 나섰다.“폐하, 틀림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북연 황제의 손이 힘껏 말고삐를 쥐었다.“찾아라.”병사들은 마을 곳곳을 수색했지만, 백성은커녕 전날 죽은 병사들의 시신조차 사라져 있었다.그 순간, 눈보라가 더욱 거세졌다.쌓인 눈이 빠르게 대지를 덮으며 모든 흔적을 삼켰다.북연 황제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행군을 계속한다.”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남제의 백성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임현에 도착했을 때도 상황은 같았다.원래라면 사람이 넘쳐나야 할 곳, 그러나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병사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졌다.“이건 이상하다. 아무리 전쟁이 나도, 이렇게까지 흔적 없이 사라질 리가…”“설마, 남제 황실이 모든 백성을 대피시킨 건가?”전쟁이 벌어지면, 백성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마련이었다.이는 그리 드문 광경이 아니었다.그러나 이번은 달랐다.정찰병들이 조사한 결과, 십 리 안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그것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북연 황제는 손을 들어 병사들을 조용히 시켰다.“정찰병을 보내라.”이튿날 새벽.한 정찰병이 중대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폐하, 확인된 바에 따르면 남제 황실은 일찍이 백성들을 남쪽으로 대피시켰습니다!”“그들이 향하는 곳은… 선성입니다!”선성.남제의 전략 요충지이자, 철벽 방어를 자랑하는 도시.이곳만 함락하면, 남제 황궁까지 진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북연 황제는
동방이 함락된 데 이어, 이번에는 북방까지 무너졌다.끝없는 위기였다.조정 대신들은 안색이 창백해졌고, 궁중 곳곳에서는 남제가 정말 끝장나는 것이냐는 말이 오갔다.그러나 용상에 앉은 소욱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그는 남제의 황제,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질 수 없었다.조정이 파한 후, 문무백관들은 삼삼오오 모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어찌 된 일인가! 북방이 무너졌다니!”“연합군은 어디까지 쳐들어온 것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방이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는가!”“황후마마께서 그토록 신중하게 군을 이끌었음에도 동부를 지키지 못했으니, 서부와 남부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겠군.”혼자의 힘으로 십여 개국의 연합군을 막는 것은 결국 무리였던 것일까.많은 대신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황궁 안.궁궐 안에도 불안감이 퍼졌다.후궁들은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했다.그들은 조묘의 난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성이 무너지고 적군이 들어오면… 우리는 가축과 다를 바 없어요.”“북연은 호랑이 같은 나라라더니… 그들에게 잡히면 끝장입니다.”그녀들은 북연과 대하의 야만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포로가 된다면, 그들에겐 지옥보다 더한 운명이 기다릴 터였다.자녕궁.자녕궁에서도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녕비는 잔뜩 겁에 질린 채 태후에게 물었다.“고모님… 남제는 정말 망하는 겁니까?”태후는 이미 곳곳의 정보를 통해 전황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태평성대에는 꽃이 피지만, 난세에서는 한낱 들풀에 불과하구나…”“내가 널 지키지 못할 날이 올 수도 있다. 어서 이 병을 받거라… 들고 있다가 꼭 필요할 때 사용하거라.”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작은 약병을 녕비의 손에 쥐어주었다.그 의미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녕비의 손이 떨렸다.그녀는 약병을 쥔 채, 눈을 뗄 수 없었다.“고모님…”태후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애처롭게 미소 지었다.“내가 너를 궁에 들인 것은 잘못된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