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민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현준이 다시 돌아왔다.“여진아.”그의 말투는 조금 전과 달리 어딘가 진지하면서도 긴장되어 있었다.“급히 회사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무슨 일인데요?”조현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내가 맡은 프로젝트에 갑자기 문제가 생겼나 봐. 내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 지금 당장 가 봐야 해. 더 늦어지면 타고 갈만한 기차도 없어서.”“아... 네.”민여진은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회사 일이 우선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럼 얼른 가 봐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조금 있으면 이모가 데리러 와 줄 거예요.”조현준은 숨을 들이쉬더니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민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여진아, 방금 내가 했던 말은 네가 진짜 거절하기 전까지 항상 유효해. 난 너랑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고, 널 지켜주고, 아껴주고 싶어. 단순히 우리 엄마나 영미 이모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래. 그동안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금방 돌아올 거야. 그때는... 네 대답이 듣고 싶어.”민여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조현준은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급히 자리를 떴다.그의 발걸음과 목소리에서는 다급함이 여실히 느껴졌다.민여진의 이마에는 조금 전, 조현준의 입술에서 전해진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 느낌이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이 어딘가 당황스러웠다.‘나 같은 사람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정말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걸까?’박진성이 떠오르자 무거운 마음에 심장이 다시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그가 남기고 간 상처가 너무 깊고 커서 어떠한 감정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조현준이라면 민여진도 싫지 않았다. 어쩌면 하늘이 그녀를 박진성에게서 벗어나게 도와준 이유가 새 삶을 시작해보라는 계시일지도 몰랐다.가만히 생각에 잠
남자는 민여진을 발견하자마자 놀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전에 찾아뵀던 조씨 가문의 여진 씨 아니신가요?”민여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겁에 질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진시우가 방금 부른 그 이름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임재윤? 그게 누구지?’상황을 파악한 진시우가 가볍게 웃으며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여진 씨. 설마 제 친구 때문에 놀라셨나요? 말을 못 하는 애라서 의사 표현이 제대로 안 됐을 겁니다. 그걸로 오해도 많이 받거든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세요.”‘말을 못 한다고?’민여진이 잠시 멍한 표현을 지었다.‘이 남자가 정말 말을 못 한다고? 그렇다면... 정말 박진성이 아닌 거네?’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것 같자 민여진은 조금씩 평정심을 되찾았다.만약 그가 정말 박진성이었다면 벌써 자신을 어딘가로 끌고 가 결박하고 협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뺨을 맞았을 때도 아무 반격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왜...”민여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며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갑자기 제 이마를 막 문질렀단 말이에요. 그것도 엄청 세게.”그녀는 남자가 자신에게 한 납득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설명을 원했다.진시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재윤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에 남아 있는 먼지를 가리키며 인상을 구겼다.“그랬구나.”진시우가 피식 웃었다.“여진 씨 얼굴에 뭐가 묻어 있어서 닦아주려고 했었나 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얘가 무술을 하던 애라 숫기가 없어서 손길이 조금 거칠었을 수도 있어요. 평소엔 백스테이지에만 있는 애거든요.”‘무술을 했다고?’잠시 멍하니 있던 민여진이 뒤늦게 이마를 문질렀다. 생각해보니 이마가 아팠던 이유는 그의 소매에 달려 있던 단추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임재윤이 아무 말도 없이 민여진의 이마를 닦았던 이유는 그가 말을 못 하는 실어증
“아이고…”조인화의 표정이 어딘가 굳어있었다.“방금 통화할 때 목소리가 엄청 급하더라. 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아닐 거예요.”민여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현준 오빠는 그냥 기차 막차 놓칠까 봐 급하게 간 거죠. 여긴 공항도 없는 지역이니까요. 별일 없을 거예요. 일 끝나는 대로 돌아온다고 했어요.”“그렇다면 다행이지.”조인화는 그제야 미소를 되찾았다. 그녀는 민여진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들어가며 슬쩍 물었다.“공연은 어땠어? 재밌었어?”“네, 좋았어요.”민여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사실 오페라는 앞부분밖에 제대로 못 들었다.“그럼 너랑 현준이는?”“네?”뒤늦게 반응한 민여진이 다시 물었다.“저랑 현준 오빠가 왜요?”조인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현준이가 가기 전에 나한테 전화하면서 너 좀 잘 챙겨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더라. 너랑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못 데려가서 아쉬운 그 목소리가 너무 잘 들렸어. 내가 엄마인데, 그걸 모르겠어? 걔 아직도 너한테 마음 있어. 안 봐도 뻔하지, 뭐.”머릿속이 복잡해진 민여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저… 이모. 우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저도 생각해볼게요.”“그래!”조인화가 눈을 반짝이더니 활짝 웃으며 민여진의 손을 꼭 잡았다.“생각 얼마든지 해봐!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이모고, 현준이도 네 오빠야. 그러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민여진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고 답답했다.오늘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졌다. 그녀는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특히 조금 전, 박진성과 비슷한 행동을 보이던 남자의 등장은 민여진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민여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박진성이 정말 자신을 찾아내면 어떻게 해야 할까?그녀가 물에 빠졌던 그 사건도 아직 완벽히 해결된 게 아니었다.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후에야 민여진은 침대에 누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
민여진의 마음이 흔들렸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오빠... 난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자신이 조현준의 관심과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감옥까지 다녀온 전과자에, 못생기고 앞도 보이지 않는 장애인인 것도 모자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그 자체였다. 지금 막 커리어를 탄탄하게 쌓아가고 있는 조현준에게 자신은 그저 방해만 될 뿐이었다.조현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여진아, 너 스스로를 너무 낮게 평가하지 마. 네가 방금 했던 그 말은, 내 말을 부정하는 거랑 똑같아.”민여진은 또다시 침묵을 유지했다. 조현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마침 네가 제일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 안 그랬으면 예전의 그 빛나던 네가 나를 봐주기나 했을까?”한때 민여진은 말 그대로 빛나는 사람이었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어도 똑똑한 머리 덕에 성적도 뛰어났고 명문대 진학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또래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감히 조현준이 넘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입술을 꽉 깨문 민여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현준 오빠, 난 오빠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괜히 오빠한테 방해가 되는 것도 싫고...”“여진아, 내가 그랬잖아. 나한테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조현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여진아, 너 동진까지 올 수 있어?”갑작스러운 제안에 민여진이 멍해졌다. 하지만 조현준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우리 엄마도 아직까지는 건강하시지만, 몇 년만 더 지나면 나도 엄마 혼자 둘 수 없을 거야. 나도 이제 동진에서 자리 잡았고, 때가 되면 모셔올 생각인데 너만 괜찮다면... 같이 와 줄래? 그래야 너도 같이 챙기지.”‘낯선 도시로 가야 할까?’민여진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그러던 중, 돌 하나가 날아와 민여진의 머리를 정통으로 내리쳤다. 갑자기 몰려오는 극심한 고통에 민여진은 손을 들어 머리를 만져보았다. 손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얼얼한 고통이 이마 전체에 서서히 퍼지고 있던 그때, 아이들은 여전히 깔깔거리며 떠들고 있었다.“안에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네? 눈만 멀었지, 귀도 먼 건 아니잖아. 설마 쫄아서 안에 숨어 있는 거야? 아니면 돌 더 맞고 싶어서 숨어 있는 거야?”곧이어 수십 개의 돌덩이들이 연달아 마당 안으로 날아들었다. 모든 돌이 그녀를 맞진 않았지만, 몇 개는 몸에 제대로 부딪혀 꽤 아팠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민여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더는 참을 수 없었던 민여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소리 하려던 그때, 밖에서 아이들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누구야? 야! 뭐 하는 거야!”곧이어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민여진이 문을 열어보자 아이들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던 제 분을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리며 씩씩대고 있었다.“외부인 주제에 감히 날 혼내? 두고 봐! 우리 할머니한테 당장 이를 거야! 널 가만히 둘 것 같아?”아이가 먼저 도망치자 다른 아이들도 슬그머니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줄행랑쳤다.민여진은 숨을 깊게 한 번 들이쉬었다. 이마에서 번져오는 고통을 애써 참으며 문 쪽을 향해 말을 걸었다.“저기... 누구시죠?”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민여진도 당황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다시 말을 걸었다.“혹시... 임재윤 씨인가요?”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민여진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마에 젖어 붙어 있던 머리카락이 위로 쓸어넘겨졌다. 그는 손끝으로 천천히 민여진의 이마에 맺힌 피를 닦아냈다. 상처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했지만 근처를 스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따끔한 고통에 그녀는 헛숨을 들이켰다.심상치 않은 민여진의 반응에 남자는 곧바로 움직임을 멈추었지만
말을 마친 민여진은 고개를 들고 예의 바르게 미소 지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지만 그 눈매에는 생기 넘치는 빛이 서려 있었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알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임재윤은 마음속에서 이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몇 번이나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민여진의 손바닥에 천천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괜찮아요.’잠시 고민하던 그가 다시 몇 글자를 더했다.‘저도 죄송했어요.’그 움직임에 잠시 멍하니 있던 민여진은 이내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그 말은 극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때도 임재윤은 민여진의 이마를 건드렸었다.“괜찮아요.”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었다.“그땐 제가 오해했던 거죠. 사실은 제가 걱정돼서 그랬던 거잖아요. 어젯밤에 이미 괜찮아졌었어요.”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다시 손을 들어 글자를 써 내려갔다.‘미안해요.’민여진의 손과 남자의 손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이 끼어 있었다. 전에 그녀가 언급했었던 남녀 간의 예의라는 것을 철저히 지키기 위함인 듯했다. 그의 손끝이 손바닥 위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차가운 감촉에 괜히 간질간질해졌다.민여진은 그제야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이 사람을 박진성으로 착각한 건 정말 잘못된 판단이었다. 박진성이었다면 이런 사소한 일로 사과를 했을 리도 없었을 거고, 이런 식으로 조심스럽게 대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그 사람은 언제나 강압적인 방식으로 모든 걸 손에 쥐려 했다. 임재윤을 그런 사람과 헷갈렸으니 오히려 실례인 셈이었다.“오늘 여기까지 오신 건 혹시... 사과하려고 오신 거예요?”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 안진 사람도 아닌 임재윤이 굳이 민여진의 집 앞까지 찾아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남자는 다시 민여진의 손바닥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리며 긍정의 답을 했다. 민여진이 웃으며 말했다.“사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오히
외모로 본다면 말이다.조인화는 저도 모르게 불안한 듯 미간을 구겼다.자기 아들만 해도 제법 잘생겼다고 생각해왔다. 드라마 남자 주인공들을 볼 때마다 ‘현준이도 저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싶은 자부심이 있었지만 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임재윤 씨라고 하셨나요? 여긴 무슨 일로 오셨죠?”조인화는 민여진의 손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남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민여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모, 저분 말을 못 하세요. 실어증이시래요.”“실어증?”임재윤을 바라보던 조인화는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말을 못 한다는 게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네, 방금 애들이 마당으로 와서 저한테 돌을 던졌는데 이분이 와서 애들 다 쫓아내 주셨어요. 일도 도와주셨고요.”그 말에 조인화의 시선이 민여진의 이마로 옮겨졌다. 이마에 붙은 거즈를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어쩌다가 다친 거야? 애들이 그랬어?”민여진은 괜히 조인화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애써 웃어 보였다.“아니에요. 그냥 제가 실수로 다친 거예요.”하지만 조인화가 민여진의 말을 믿을 리 없었다.“안 되겠다, 이장님한테 꼭 말씀드려야겠어. 그 쬐끄만 녀석들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는. 하루종일 놀기만 하고 말이야. 싹 다 학교 보내서 개과천선 시켜 놔야 해!”민여진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조인화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임재윤에게 정중히 말했다.“재윤 씨, 우리 여진이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우리’라는 말에는 조인화의 사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임재윤이 단순한 호의로 민여진을 도와준 것 같지 않았다. 조현준이 마을을 잠시 떠난 지금, 방심한 사이에 민여진을 남에게 뺏길까 봐 조금 걱정되었다.임재윤은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조인화는 민여진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민여진도 뭔가를 눈치챈 듯했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임
“그럼 된 거죠, 뭐.”민여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키도 크지, 잘생겼지. 게다가 그 진시우 씨랑 친구라면서요. 그럼 완벽한 엄친아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이런 시골에서 사는 장님한테 눈길이나 주겠어요? 아무리 말 못 하는 사람이라도 그 조건이면 저보다 훨씬 괜찮은 여자 만나서 살 수 있겠죠.”“너도 참...”조인화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사심을 품고 그런 말을 꺼냈을 때, 임재윤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잘난 사람이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여자 도와주겠다고 직접 발 벗고 나서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 부잣집 도련님들이 평생 농기구를 손에 쥐어본 적이 있을 리 없었다.“그만하죠, 이모.”민여진은 조인화의 팔짱을 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분은 그냥 어제 실수로 제 이마를 다치게 한 것 때문에 미안해서 도와주러 오신 거예요. 정작 저한텐 아무 감정 없을걸요. 이모가 더 잘 알잖아요. 괜한 걱정 좀 하지 마요.”“어제 너 다치게 했어?”조인화의 심장이 철렁했다.“어딜?”“이마요. 지금은 괜찮아요.”전날 밤이 너무 어두웠던 탓에 조인화도 민여진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도 민여진의 괜찮다는 한마디에 잔뜩 긴장됐던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그저 실수로 다치게 했던 일을 사과하러 온 거라면 모든 게 이해가 갔다. 돌이켜보면 임재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을 때, 자신 역시 지나치게 경계심을 보였던 것 같았다.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누구든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집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민여진은 몸 상태가 한결 좋아진 듯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다시 일하기 위해 나갈 준비를 했다.“여진아, 나가지 마. 오늘 오후엔 나랑 같이 콩이나 까자. 두부 만들어서 팔려고. 그 돈으로 너 겨울옷도 몇 벌 사야 할 것 같아.”민여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막 소매를 걷어붙이려던 그때, 대문이 쾅쾅 울렸다.“조인화! 당
진시우는 말을 이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두 사람 정말 하나같이 고집이 세네요. 한 사람은 어떻게든 가겠다고 하고, 한 사람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니. 목숨이 무슨 장난인 줄 아세요?”민여진은 낮에 들은 소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박진성이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과 임재윤의 연락 두절이 너무나도 우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을 부정했다.두 남자는 성격부터 행동 방식까지 완전히 달랐다. 박진성은 독선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강제하던 인물이었고, 임재윤은 온화하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만약 그녀가 조현준에게 전화하는 것을 박진성이 목격했다면, 그는 폭력적으로 핸드폰을 빼앗은 뒤 모욕적인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임재윤은 그러지 않았다.기분이 상했을지라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리를 두며 자신의 기분을 추슬렀다.어쩌면 임재윤은 정말로 어제 전기 배전함을 수리하다 감기에 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그래서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거였고 깨어나자마자 민여진이 생각나 안진 마을로 오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진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있던 민여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물었다.“임재윤 씨는 괜찮아요?”“별로 좋지는 않아요.”진시우는 숨길 이유가 없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임재윤은 원래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자주 졌어요. 게다가 고열에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상태가 더 나빠 진 거죠. 오늘 쓰러지지 않았다면 여기 온 사람은 제가 아니라 임재윤이였겠죠.”진시우의 말에 민여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주저 없이 옷을 벗어 자신에게 걸쳐주던 임재윤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추운 날, 눈보라를 맞으며 추위를 버텼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여진 씨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제때 왔으니 다행이지. 이 추운 날씨에 계속 밖에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말 안 해도 알죠?”진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제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진시우 씨
민여진은 임재윤이 비록 자신의 전화번호를 몰랐다고는 하지만, 마을 이장이나 주민들에게 전화할 수도 있었고 진시우의 인맥을 생각하면 연락처를 못 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 게 아니라면, 오는 길에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늦어지는 거로 생각하며 민여진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잠시 후 휴게실 문이 열렸다. 민여진이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들어온 건 마을 사람이었다.“여진아, 9시야.”“늦게까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민여진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약봉지를 들고 나섰다.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마을 사람이 말했다.“같은 길이니 내가 데려다줄게. 이런 날씨에 혼자 가기 힘들 거야.”민여진은 잠시 망설이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먼저 가세요.”“너 설마 더 기다릴 생각인 거야?”마을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너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기다렸어. 오겠다고 했던 사람이 안 오면 그건 분명히 바람맞힌 거야. 아무리 날씨가 이렇다고는 해도, 계속 기다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온다고 했으니 꼭 올 거예요. 그 사람은 빈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그녀는 추운 날 옷까지 벗어준 그 사람을 위해 조금 더 기다리는 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안 오는 줄 알고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면 어떡해?’민여진은 이런 추운 날에 임재윤이 헛걸음이라 할까 봐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알겠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눈이 점점 더 심하게 오고 있고 날도 추우니까 길어도 30분만 더 기다려. 그 이상은 위험해.”“네. 걱정하지 마세요. 10분만, 정말 10분만 더 기다릴게요.”마을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다.민여진은 문 앞에 웅크려 앉았다. 처마가 눈은 많이 막아주었지만,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져 그녀는 고개를 가슴에 묻고 있었다.‘조금만 더, 조
“아이고.”조인화가 죽을 마시며 의아한 듯 말했다.“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다쳤다고? 무슨 일이야? 저런 사람들은 항상 경호원들이 붙어 다니지 않나? 설마 암 같은 건 아니겠지?”민여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파져 오는 마음에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죽을 마셨다.이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덮어졌고 조인화는 오락프로에 빠져 웃음꽃을 피웠다.아침 식사를 마친 민여진은 얼굴을 씻은 뒤 도구를 들고 말했다.“마당에 잠깐 다녀올게요.”눈이 내린 마당에는 정리할 게 별로 없을 터였지만, 민지연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조인화는 만류하지 못하고 그저 안전에 유의하라고 재삼 당부했다.“정말 할 일이 없으면 이내 들어와. 밖이 너무 추워서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오늘 일기예보 보니까 하루 종일 눈 온다던데.”“네, 조심할게요.”민여진은 특히 조심하며 마당으로 나갔다. 먼저 쌓인 눈을 치우고, 마당에 놓인 물건들을 가능한 한 모두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일을 하다 보니 정말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차츰 몸에서 땀이 나기까지 했다.점심을 먹고 난 후, 민여진은 조인화가 준비해 준 약을 가지고 교회로 향했다.교회 안에는 마을 사람들만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사람을 설득해 휴게실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소파에 앉아 두 시간을 기다리다 몸이 찌뿌둥해 일어나서 스트레칭하고 다시 앉아 기다렸다.그러던 중 누군가 문을 열고 물었다.“여진아, 누구 기다리니? 진시우 씨 일행은 눈 오는 날엔 오지 않아.”민여진은 어색해하며 말했다.“알아요.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거예요.”“다른 사람?”마을 사람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마. 우리도 저녁이면 문 닫고 가야 해.”“네, 너무 늦지는 않을 거예요.”민여진은 임재윤이 말한 오후는 어쩌면 네시나 다섯 시일 수
민여진은 마당 왼쪽에 있는 물탱크 쪽으로 가서 벽을 더듬으며 말했다.“여기 있을 거예요.”임재윤이 휴대전화 불빛을 비추자 바로 전기 배전함이 보였다.전기 배전함을 열어 살펴보던 임재윤은 단순한 누전이 아니라 조금 복잡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다행히 공구 상자가 근처에 놓여 있었다.“휴대전화 좀 들어줄 수 있나요?”그는 불빛을 비춰줄 사람이 필요했다.“네.”민여진이 휴대전화를 받아 들자, 임재윤이 적당한 위치로 조정해 주었다.마당에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지만, 추위는 여전히 그녀를 떨게 했다. 갑자기 임재윤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남자의 체온이 배어 있는 외투가 그녀의 몸을 감싸자, 순간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하지만 민여진은 임재윤도 옷을 얼마 입지 않은 것 같아 머뭇거리며 말했다.“임재윤 씨, 이럴 거 없어요.”임재윤은 고집스럽게 단추까지 채워준 뒤에야 작업을 계속했다.그의 옷에서 풍겨오는 향기에 민여진은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백화점에서 끝내지 못한 대화가 떠올랐다.‘그때 임재윤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걸까?’앞이 보이지 않았던 민여진은 당시 임재윤이 일부러 다가온 건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착각인 건지 알 수 없어 참지 못하고 물었다.“백화점에서 임재윤 씨가 다가오셨죠?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거예요?”그 순간, 공구를 다루는 소리가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졌다.조인화가 문을 열며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고 외치자, 임재윤은 작업을 마치고 민여진의 휴대전화를 돌려받아 글을 입력했다.“내일 오후, 교회 휴게실에서 만나요. 그때 말할게요.”침대에 누운 민여진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었길래 내일이 되어야만 말할 수 있는 건지 너무 궁금했다.마치 큰 결심을 내리기라도 하듯, 그 말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뒤숭숭한 마음을 뒤로한 채 민여진은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 8시였다.민여진이 새로 산 옷을
임재윤은 길을 바라보며 휴대전화로 ‘알겠습니다’라는 음성을 재생했다.집에 도착하자,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민여진이 차 문을 열자 날카로운 바람이 칼날처럼 그녀의 손목을 스쳤다.세 사람은 나란히 집 안으로 들어간 뒤 조인화는 숯을 가져다 임재윤의 방에 화로를 먼저 설치했고, 민여진은 이불을 가져와 임재윤의 침대를 정리하며 이불 커버를 씌웠다.그녀는 눈에 젖은 외투를 벗어 던진 후 분주히 이리저리 움직였다.임재윤은 주변을 둘러보던 중 책상 위에 놓인 사진액자를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는 네 사람이 있었는데, 두 명의 젊은 여자와 한 명의 소년,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카메라를 향해 브이 사인을 하며 환하게 웃는 소녀는 사진 속 모든 빛을 독차지한 듯 눈부셨다. 그 옆의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지 못한 감정을 눈가에 묻어두고 있었다.임재윤은 손가락 끝으로 소녀가 있는 위치를 살며시 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임재윤 씨, 잠깐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이 이불 모서리 좀 잡아주세요.”민여진이 부르는 소리에 임재윤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액자를 내려놓고 이불 모서리를 잡아주러 갔지만, 민여진은 그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무슨 일 있으세요?”“아니에요.”임재윤은 글을 입력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민여진 씨의 열일곱, 여덟 살 때 사진을 봤어요. 그땐 잘 웃었네요.”“사진이요?”민여진은 기억이 나지 않아 되물었다.“무슨 사진이요?”임재윤이 설명했다.“가족사진 같은 거예요. 한 여자는 젊은 시절의 조인화 씨로 보이고, 소녀는 민여진 씨, 소년은 조현준 씨인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한 분은 민여진 씨의 어머니인 것 같던데요. 많이 닮았더군요.”조현준의 방에 그런 사진이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민여진은 멍하니 있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디 있어요?”임재윤이 사진을 건네주자, 민여진은 손가락으로 사진을 세게 문지르며 두 눈을 크게 떠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그렇다면 사진 속의 그 남자가 누구든 문채연은 상관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건 오직 민여진이었다.그전까지 박진성의 입에서 정보를 캐내려 온갖 수를 다 썼지만 소용없었는데, 민여진이 안진에 있다니.문채연은 살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밖으로 나가 라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을 부르는 건 싫어요.”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머리는 하얘졌다. 조현준에 대한 그의 반감은 차가운 기계음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였다.민여진은 마음이 조여와 입술을 깨물었다.“왜... 왜요? 현준 오빠를 아직 못 봐서 그래요. 나중에 한 번 만나보시면 좋을 거예요. 정말 좋은 사람인데...”“아니요.”임재윤은 민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민여진 씨는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을 텐데요.”‘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임재윤의 말에 그녀는 순간 답을 알 것도 같았지만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설마, 아닐 거야.’조현준이 그녀를 좋아하는 건 과거의 그녀를 알았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라지만 임재윤은 달랐다. 그들은 고작 며칠 안 된 친구 사이일 뿐,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건 너무 황당했다.생각을 접은 민여진은 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제가 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임재윤이 글을 쳤다.“그럼 알고 싶어요?”그의 시선은 민여진의 얼굴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민여진은 멈칫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네.”그녀의 대답을 듣고도 임재윤은 즉각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다가왔다.뜨거운 숨결이 민여진의 속눈썹에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입술이 떨렸고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하지만 임재윤은 마치 처음부터 다가온 적도, 그런 생각도 없었던 사람처럼 미련 없이 물러섰다.“여진아, 임재윤 씨, 너무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안에서 이것저것 고르느라 시간
라미연이 이렇게까지 확신하자, 문채연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 분명히 박진성을 봤고, 양성에서 안진까지는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어떻게 된 거지?’라미연은 문채연이 아무 반응이 없자 또 불을 지폈다.“채연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그 여자에게 내줄 셈이야? 민여진은 그저 너랑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됐고, 널 공식 석상에 나오지도 못하게 했어. 이제는 네 남자까지 빼앗으려 하는데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너 이러다 다 빼앗길 수도 있다고!”힘들게 지내던 과거가 떠오르자, 문채연의 눈에는 살기가 스쳐 지났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알았어. 미연아, 고마워.”문채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올해 신상으로 나온 핸드백, 사람을 시켜 보내줄게.”라미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사양했다.“됐어. 친구 사이에 뭘 이런 것 가지고.”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던 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혹한의 추위마저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갑게 변했다.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두 손에 힘을 주더니, 다시금 사진을 열었다.사진 속, 그 여자의 환한 미소는 마치 칼날처럼 문채연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왜? 넌 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꼴을 하고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건데?’반면 문채연은 이정화가 그 두 해 동안 함께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을 안 후로, 완전히 연락을 끊어버렸고 몇 번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만 당할 뿐이었다.‘이정화와의 관계도 끝났는데 박진성마저 잃는다면...’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문채연은 이를 악물더니 벌떡 일어나 옷을 걸치고 나갔다.박진성의 병세는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복부의 상처가 자꾸만 벌어지며 악화하여 며칠 내내 별장에서 요양 중이었다. 게다가 민여진의 일까지 더해져 그는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문채연이 찾아가자, 서원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민여진의 머리가 임재윤의 넓은 가슴에 닿았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는 묘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특정할 수 없는 향수 냄새였지만, 오히려 민여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다만 애매한 이 자세가 불편했다.두 사람의 행동에 여자는 눈이 빨개진 채 말했다.“뭐야? 사귀는 사이였어? 요즘 세상에 왜 잘생긴 남자는 다 못생긴 여자랑 붙는지 모르겠네!”여자는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를 떠났다.여자의 말에 임재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민여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익숙해요.”민여진은 임재윤이 자신의 마음이 다친 건 아닌지 신경 쓸까 봐 걱정스러웠다.임재윤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글씨를 썼다.[민여진 씨가 저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워요.]한 글자 한 글자 강한 압력으로 글을 쓰는 그의 태도는 단호하고 진심이 어려 보였다.어쩌면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민여진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현준 오빠랑 똑같이 그래요? 현준 오빠는 원래 사람을 잘 달래주는 사람이라 이해가 가는데, 임재윤 씨는 예쁜 여자를 너무 많이 봐서 제 얼굴이 신기한 건가요?”임재윤은 침묵하다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그리고.”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타자를 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는 건 싫어요.”다른 한편.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라미연은 민여진과 임재윤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며 멈춰 섰다.‘저거 민여진 아니야?’깜짝 놀란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민여진을 찍은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 바로 문채연에게 사진과 함께 음성을 보냈다.“채연아, 방금 너한테 사진 보냈는데 봤어? 이 여자 민여진 아니야?”음성을 보내고 다시 한번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던 라미연은 그제야 민여진 옆에 한 남자가 희미하게 찍혀 있는 걸 발견했다.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터라 남자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등만 찍혀 있었는데 체형으로 보니 박진성인
“하지만...”민여진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짧은 시간 안에는 갚기 어려울 거예요.”민여진에게는 자립할 능력도,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짐이 될 뿐이었다.“그냥 돈을 받아주세요. 현준 오빠한테 빚진 건 언제든 갚을 수 있지만, 임재윤 씨는 휴양지 건설이 끝나면 떠나실 거잖아요. 기간이 너무 짧아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평생 안진 마을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집은 여기가 아니었고,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임재윤은 받지 않고 물었다.“민여진 씨의 뜻은 나더러 안진 마을에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건가요?”차가운 기계음 소리는 임재윤이 지금 농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민여진이 잠깐 멈칫하자, 임재윤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일단 가지고 계세요. 제가 떠나기 전에 갚을 수 있을 거예요.”결국 민여진은 그 돈을 임재윤한테 주지 못한 채 다시 조인화에게 가져갔다.“왜 다시 갖고 왔어? 임재윤 씨가 뭐라고 했는데?”“빌려주는 거래요. 돈이 생기면 갚으라고.”조인화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건 앞으로 다시 만날 계기를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직 순진한 민여진만이 자신에게 매력이 없다고 여기며 그런 쪽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었다.“갚지 못하면 어쩌려고?”민여진도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임재윤 씨의 말로는, 떠나기 전에 내가 갚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몸으로 갚으라는 거야?”민여진은 흠칫하더니 순간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이모, 장난치지 마세요.”조인화는 웃으며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아이고, 이 바보.”잠시 후, 포장 되어있는 봉투는 아까 전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임재윤이 봉투를 받아 든 뒤, 세 사람은 가계를 나왔다.밖으로 나가던 중 다른 한 가계에서 조인화는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