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북성이 식량 지원을 요청한 것 때문에 문제는 긴급히 신하들을 소집해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북성에 식량을 주면 적을 돕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고, 주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겨울을 버티지 못할 북성이 남하하여 약탈하려 하겠지. 그리된다면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북방이 또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되는데. 태자의 모반 사건으로 내부가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인 대건이 이 시점에 북성과 전쟁을 벌인다면 승산이 너무 적어. 승리하더라도 우리 쪽 피해도 만만치 않을 거야.’문제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강경파와 온건파도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온건파가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문제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이때, 숙비가 호위병을 밀쳐내며 대전 안으로 뛰어들었다.“폐하! 우리 운림이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사옵니다. 부디 이를 굽어 살펴주시옵소서!”“어험.”문제는 가볍게 기침을 한 뒤, 숙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지금은 중대한 국사를 논의하는 중이니, 물러나 기다리시오. 숙비.”그러나 숙비는 대궐 안이 떠나가라 통곡하며 울부짖었다.“폐하! 운정이 운림의 급소를 걷어찼사옵니다. 이대로라면 사내구실도 어려울 것이옵니다... 흑흑…”“뭐라!”그녀의 말에 문제는 분노가 치밀어올랐으나 이내 차분함을 되찾고 허허 웃었다.“숙비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오. 여섯째의 성품은 짐이 잘 아오. 그는 그럴 용기가 없지.”정국공인 서승우도 허허 웃으며 말했다.“숙비마마, 폐하께서는 정사를 돌보느라 매우 바쁘시니 지나친 농은 삼가십시오. 어질고 착한 여섯째 황자님께서 어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이옵니까?”겁이 많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여섯째 황자를 어질고 착하다며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다.숙비가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폐하가 내 말을 믿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어찌 오라버니조차도 믿지 않는단 말인가?’하지만 그때, 대전 밖의 호위병이 급히 들어와 보고했다.“폐하, 여섯째 황자님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여섯째가?”문
‘도망치지 않고 왜 황성에 남았지? 남아봤자 죽임만 당할 뿐인데. 이제라도 도망칠까?’문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운정을 노려보며 말했다.“이놈아, 어찌하여 아무 말도 없느냐? 짐이 네게 말할 기회를 줄 테니 어디 한 번 변명해 보거라.”문제의 분노에 운정은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변명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변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어찌 되었든 소자가 셋째 형님을 걷어찼으니 벌받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죄를 인정합니다.”운정의 말을 듣고 서승우는 콧방귀를 뀌었다.‘역시 미련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군. 변명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이리 나오다니. 하긴 뭐 변명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문제가 이 무능력한 황자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도록 서승우는 계속 밀어붙일 작정이었다.서승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공손히 말했다.“폐하, 여섯째 황자님께서 이미 죄를 인정하셨습니다. 하니 여러 대신들의 청을 받아들이시어 여섯째 황자님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일벌백계로 삼으시옵소서.”“여섯째 황자님을 서인으로 강등시키어 황실의 위엄을 보여주셔야 하옵니다.”셋째 황자의 세력들이 일제히 간청했다.운정은 이 대신들을 마음속에 기억한 뒤, 문제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큰 소리로 말했다.“소자의 죄가 무겁다는 걸 잘 알고 있사오니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아바마마.”“벌을 내려달라?”문제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그렇다면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스스로 말해보라.”“죽을죄입니다.”운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아바마마, 소자를 죽여주시옵소서.”운정의 이 말에 대전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죽여 달라고 스스로 폐하께 죽음을 요구하다니! 여섯째 황자가 실성했나?’운정이 이렇게 말할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그를 쳐다보았다.서승우와 숙비도 어리둥절해하여 할 말을 잃었다.비록 황자인 운정이 세력과 지위가 없다고는 하나 모반을 꾀하거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 한, 죽음에 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고작 급소
운정의 말이 대전 안에 울려 퍼지자, 무관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갔다.평소 운정과 말도 섞지 않았던 없던 몇몇 장군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더니 입을 열었다.“폐하, 지금 우리와 북성은 언제든 전쟁이 발발할 수 있사오니 만약 여섯째 황자님께서 친히 전장에 나서신다면 군의 사기가 크게 오를 겁니다.”“그렇사옵니다. 폐하, 존귀하신 여섯째 황자님께서 죽을 각오로 전장에 임하신다면, 우리 대건의 장병들도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부디 여섯째 황자님의 청을 받아들이시어 군의 사기를 드높이시옵소서.”강경파인 몇몇 장군들이 입을 열면서 찬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비록 운정이 전장에서 많은 적을 베지는 않겠지만 그의 이런 행동은 군의 사기를 높일 수 있어서 전쟁이 임박한 북방 상황을 놓고 볼 때 좋은 계책이라 할 수 있었다.신하들의 말을 들은 문제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후, 문제의 시선이 다시 운정에게 향했다.“네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으니 참으로 뿌듯하구나. 짐이 다시 한번 묻겠다. 정말로 변경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 맞느냐?”운정이 입을 열려는 순간, 서승우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또다시 막아 나섰다.“폐하, 이리하는 것이 신은 여전히 옳지 않다고 사료되옵니다.”“왜 불가하다는 것이냐?”문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서승우가 답했다.“여섯째 황자님의 용기는 가상하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전장입니다. 만에 하나 여섯째 황자님께서 포로로 잡히신다면 우리 대건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음…”문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서승우의 말도 일리가 있어. 황자가 포로로 잡힌다면 오랑캐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해.’자신의 계획이 수포가 될 위기에 처하자, 운정은 서둘러 대책을 강구했다.“소자 감히 아바마마께 청하옵니다. 혹시 보검 한 자루를 하사해 주실 수 있겠사옵니까?”‘헤헤. 서승우가 오히려 나를 돕는구나. 아바마마께서 하사한 검을 손에 넣는다면 권력을 장악하기 훨씬 수월해질 거야.
안색이 어두워진 숙비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폐하, 비록 운림이 괜찮다고는 하나…”“닥치시오!”문제가 갑자기 숙비를 쏘아보며 호통쳤다.“여섯째의 성품이 어떠한지는 조정의 문무백관들도 잘 아오. 아무 이유 없이 셋째를 그리 만들었을 것 같소? 짐은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추궁하고 싶지 않으니, 이쯤에서 끝내려 하오.”숙비가 목이 멘 듯 말을 잇지 못하자, 문제는 그녀를 진정시켰다.그러고는 지쳤는지 운정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가서 셋째 형님께 사과하라. 이 일은 이쯤에서 끝내야겠다.”‘뭐야? 내가 바라던 것은 이게 아닌데.’서승우와 숙비가 반대해 주길 내심 바라며 운정은 은근슬쩍 고개를 돌려 이들을 쳐다보았다.비록 서승우와 숙비의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문제의 말에 운정을 서인으로 강등시키려는 그들의 계획은 수포가 되고 말았다.‘나중에 운정을 처리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거야.’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운정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아바마마의 너그러운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하오나 소자는 정말로 장렬히 전사하고 싶으니, 변경으로 보내주시옵소서.”“그래도 이놈이!”운정의 말에 분노한 문제는 눈에 쌍불을 켜고 소리쳤다.“네 큰형님이 반역을 꾀한 것이 들통나 자결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너마저 죽으려 하느냐! 이런 식으로 짐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다, 이거지?”그러자 숙비가 문제를 달래며 말했다.“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옥체가 상하시옵니다.”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또 운정을 쳐다보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운림의 일은 내 더 이상 캐묻지 않겠으니 어서 일어나라. 폐하의 옥체가 상하신다.”‘웃기고 있네. 네년에게 내 뒤통수 칠 기회를 주면 안 되지.’운정은 마음속으로 욕을 내뱉었으나 고집을 꺾지 않았다.“숙비마마, 그리고 아바마마,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고맙사옵니다. 소자 지난 세월 동안 약한 모습을 보여왔으니, 이제라도 이 한 몸 바쳐 나라를 구하고 싶사옵니다.”이들의 대화에
원하든 원치 않든, 문제는 이미 조서를 내려서 운정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군권을 손에 넣는 게 중요하니 혼인해야겠다. 그리고 황자인 내가 혼인하는데 날 싫어하는 조정 대신들도 예의상 예물을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이 기회에 재물이나 많이 모아야지. 병력도 중요하지만, 군량미와 물자도 필요하니 재물은 많을수록 좋아. 하지만 황성에 더 오래 머무르면 운림과 숙비가 기회를 틈타 내게 복수하려 들 테니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황자님, 잠시만요.”그가 걸으면서 고민하던 중, 문제의 측근인 내시 총관 목순이 뒤쫓아오며 불렀다.운정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목 총관님,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목순을 보자마자 그는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큰형님조차도 아바마마의 최측근이었던 목순에게 예를 갖췄으니 만약 이자를 포섭한다면…’하지만 그는 이내 이 생각을 접었다.‘권력도, 세력도 없는 내가 무슨 수로 목순을 매수한단 말인가? 까딱하다간 내 계획이 탄로 나면 큰일이야. 변방의 군권을 노린다는 걸 아바마마께서 눈치라도 챈다면 내 목을 칠 수도 있어.’목순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황자님을 모시고 심씨 저택에 가서 조서를 전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가는 김에 여섯째 황자비도 만나보라 하셨고요.”“알겠습니다.”운정은 대답한 뒤 목순과 함께 마차를 탔다.가는 길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계획만 생각했지만, 목순의 눈에는 그런 그가 오히려 우유부단하게 보였다.“황자님, 심씨 가문에 대해 아십니까?”목순이 침묵을 깨뜨렸다.“그것이….”운정은 어색하게 웃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는 정말로 몰랐다.오랫동안 궁궐 안에 갇혀 지냈던지라 궐 밖에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그러자 목순이 허허 웃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심씨 가문이야말로 진정한 충신 가문이지요…”5년 전, 문제의 북성 정벌.선봉대장으로 출정한 심남정이 자식들과 함께 문제를 호위했다.양측이 격전을 벌인 지 두 달 후, 문제가 형세를 오판하여 북
목순이 허허 웃더니 운정을 바라보았다.“다들 일어나세요.”운정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목순 이놈이 그래도 제법 눈치는 있구나.’“예.”심씨 가문의 여인들이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감축드립니다. 심 부인.”목순이 심 부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자, 심 부인이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목 총관님, 무슨 경사라도 있습니까?”목순이 그녀를 무시한 채 심씨 여인들에게 물었다.“어느 분이 심해원입니까?”“소녀 목 총관님께 인사 올립니다.”심해원이 앞으로 나서자, 운정이 그녀를 자세히 관찰했다.맑은 눈과 하얀 치아, 늘씬한 몸매, 그리고 미간 사이의 늠름한 기상은 그녀의 우아한 자태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목순이 심해원을 흘끗 쳐다보더니 소리높이 외쳤다.“심해원은 폐하의 어명을 받아라.”심해원이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심씨 가문은 가풍이 엄격한 데다 대대로 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바쳐 모든 이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에 짐은 심해원을 여섯째 황자의 정실부인으로 삼고자 하니 길일을 택해 혼사를 치르도록 하라.”목순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심씨 가문 사람들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백지장이 되었다.‘폐하가 해원의 혼사를 주선한다고? 그것도 무능한 여섯째 황자와의 혼인?’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심해원의 얼굴도 분노로 일그러졌다.‘조금 전까지 뒤뜰에서 여섯째 황자가 무능하다며 비웃던 내가 그의 안사람이 된다고?’목순이 문제(文帝)의 조서를 다 읽은 후에도 심씨 가문의 사람들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여섯째 황자비는 속히 폐하의 조서를 받드시오.”목순이 허허 웃으며 심해원을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목순이 내민 조서를 쳐다보았다.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분노에 찬 얼굴로 말했다.“조서를 받들 수 없다고 폐하께 전하세요.”“무엄하구나!”목순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심해원, 기어이 폐하의 어명을 거역하겠단 말이냐?”“예. 거역하겠습니다.”심해원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목순이 차가운 얼굴로
“봉자야!”심해원은 본능적으로 오라버니가 남긴 유일한 핏줄인 조카를 바라보았다.울부짖는 조카의 모습에 심해원의 마음이 약해졌다.그 틈을 타 우향이 서둘러 달려와 딸을 안으며 눈물로 애걸복걸했다.“아가씨, 우리는 죽어도 괜찮지만… 이 아이는 아직 일곱 살도 안 되었습니다.”눈물범벅이 된 조카의 얼굴을 보며 심해원은 불끈 쥐었던 주먹을 서서히 폈다.쿵!심해원이 무릎을 꿇었다.두 줄기의 분노와 슬픔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소녀… 어명을 받들겠습니다.”말을 내뱉은 순간 그녀는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그제야 목순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혼사 길일은 따로 알려드리겠으니 전 이만 궁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폐하께 아뢰겠습니다.”말하고 나서 목순은 운정을 쳐다보았다.“황자님, 이제 궁으로 돌아가시죠.”“총관님이 먼저 돌아가세요. 전 이들과 얘기 좀 나누겠습니다.”운정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심 아가씨가 충동적인 말을 하였으나 폐하께 좋게 전해주세요.”“그리하지요.”목순이 허허 웃으며 자리를 뜨자, 사람들의 시선이 운정에게 쏠렸다.“그런 가식적인 말을 몇 마디 했다고 해서 제가 고마워할 거라는 착각은 버리세요.”황자의 체면 따위 안중에도 없이 심해원은 혐오감 가득한 눈빛으로 운정을 노려보았다.“그런 거 바란 적이 없다.”운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 조카가 어리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난 네가 어명을 거역하길 원했다. 그랬다면 너와 함께 죽으로 송북으로 가겠다고 아바마마께 청해볼 텐데.”“제가 왜 황자님하고 같이 죽어야 합니까?”심해원이 콧방귀를 뀌며 흐르는 눈물을 닦다가 갑자기 손을 멈췄다.“잠깐… 죽으러 송북에 간다고요?”조금 전까지 운정을 경멸하던 심 부인과 그의 며느리들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래.”운정이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혼인 후에 송북으로 가라고 아바마마께서 나를 호렬장군으로 봉하셨다. 공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죽음으로 대건 장병들의 사기를 드높
“…”심해원의 아름답던 얼굴이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황자님과 엮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죽어도 저 혼자 죽어요.”‘농을 한 것인데 미련하고 아둔한 년이 참 진지하게도 받아드리네.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말이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데.’운정은 속으로 비웃으며 또 비아냥거렸다.“아바마마께서는 이미 우리의 혼인을 허락하셨으니, 우리가 죽어도 함께 묻으라고 명할 거다.”그 말에 심해원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죽어서도 이놈한테서 벗어나지 못한단 말인가?’“됐고 난 이만 가봐야겠다.”운정은 천천히 일어서며 진지하게 말했다.“아바마마의 뜻은 확고하고 조정도 요새 다사다난하니 기름을 붓지 않는 것이 좋다.”말을 마치고 운정은 자리를 떴다.‘이렇게까지 말했으니, 궁으로 가서 아바마마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없겠지.’…심씨 가문를 떠나 벽파원으로 돌아온 운정이 문 앞에 도착해서 보니 호위병이 바뀌어져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오셨습니까. 여섯째 황자님.”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두 호위병이 공손히 인사했다.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운정이 물었다.“너희들은…”주밀이 허리를 굽혀 답했다.“소인들은 원래 우림군 소속이었으나 오늘부터 여섯째 황자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우림군이라고?’운정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날 감시하기 위해 아바마마께서 보낸 사람들인가? 아니면 우림과 숙비를 경계하려고 원래의 호위병들을 불러들인 것인가? 어쩌면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겠구나.’“알겠다.”운정은 당황한 표정을 가다듬고 물었다.“너희들 이름이 무엇이냐?”“주밀이라 합니다.”“고운입니다.”“앞으로 잘 부탁한다.”운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호위병도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소인들이 잘 모시겠습니다.”운정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던 궁녀들이 겁에 질린 채 서로를 바라보더니 허둥지둥 그에게 달려갔다.“당장 꺼지지 못할까!”운정이 눈을 부라리며 몇몇 궁녀들을 쏘아보다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모두 무릎 꿇고 자기 얼굴을 때리
‘늦잠도 못 자게 하고. 그래도 겨울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겨울이었더라면 정말 일어나기 싫었을 텐데.’조회 대전 밖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대신들이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황자님, 오늘 상을 받으시면 저희에게 술 한 잔 사셔야지요.”“맞습니다, 맞습니다. 이 늙은이는 어젯밤 황자님과 실컷 마시지 못했습니다.”“잃어버린 땅을 되찾으신 공을 세웠으니 분명 상을 많이 받으실 겁니다.”“황자님의 공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합니다.”이번에는 많은 조정 대신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유국공 소만욱이 운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친한 척했다.“황자님, 앞으로 또 누가 감히 황자님이 쓸모없다고 말한다면 제가 그 입을 찢어버릴 것입니다.”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것은 장군들의 오래된 염원이었다.이젠 나이가 들어 땅을 되찾는 날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운정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되찾아주었다.“감사합니다, 유국공님. 감사합니다, 여러분.”운정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확 때려서 기절시켜버릴까? 이 늙은이는 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거야?’마음 같아서는 말을 걸지 말아 달라는 글이 적힌 나무판이라도 목에 걸고 싶었다.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운정을 보며 다른 황자들은 질투심에 휩싸였다.서승우와 운림의 눈에 동시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지만 속으로는 계속 비웃었다.‘그래. 그렇게 친하게 지내. 운정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 빨리 죽을 거야. 두고 봐. 진짜 재미있는 건 이제부터 시작이니까.’한창 얘기를 나누던 그때 문제가 사람들에게 대전에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문제에게 인사를 올린 후 신하들은 자리로 돌아갔다.“여섯째는 어디 있느냐?”문제는 물으면서 대전 안을 둘러보았다.“소자 여기 있사옵니다.”운정은 가장 뒤쪽에 있는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문제의 얼굴이 살짝 떨렸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오늘은 너에게 상을 주려는 것이지,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다. 왜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이냐?”“소자 숨지
깊은 밤, 대건에서 마련해준 거처에 도착한 방휘승은 한참이 지나도 분을 삭이지 못했다.‘오늘 여섯째 황자가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대건의 체면을 깎아내리고 본때를 보여주려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텐데. 빌어먹을 놈. 되레 우리 체면을 깎은 것도 모자라 끌려다니는 입장이 돼버렸어. 괘씸해서, 원. 분명 여섯째 황자가 무능한 놈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저런 재주가 있는 거지? 대건왕조의 고서에 색깔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근데 그건 정말로 내가 우연히 생각해낸 건데. 혹시 대건왕조에 나보다 먼저 생각해낸 사람이 있었던 거야?’슉.방휘승이 울적해 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자객인가?’그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밖에서 지키고 있던 호위병이 다가왔다.“국사님, 방금 누군가 화살을 쏘아 보냈는데 거기에 서신이 하나 있었습니다.”호위병이 화살과 서신을 건넸다.“사람은?”방휘승이 물었다.“보지 못했습니다.”호위병이 고개를 저었다.“알았다. 물러가라.”그는 가볍게 손을 내젓고는 화살과 서신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의 등불을 빌려 손에 든 서신을 펼쳤다.“허허...”방휘승은 서신을 읽으며 경멸에 가득 찬 웃음을 터뜨렸다.“대건 사람들은 싸우는 것과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건 제대로 못 하면서 내분을 일으키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한다니까?”조금 전 여섯째 황자를 죽일 생각을 하자마자 대건왕조의 누군가가 그에게 방법을 알려주었다.게다가 계획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었고 득실까지 분석해주었다. 여섯째 황자가 송북으로 가서 죽을 각오로 군대들의 사기를 북돋으려 하고 있고 또 그가 송북에서 죽든 말든 북성에는 아무런 좋은 점이 없다고 했다.‘분석은 그럴듯하게 했네. 근데 그 똑똑한 머리를 자기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만 쓰고 있어. 조정에 간신배들뿐이니 당연히 망하지.’“고민하지 말자.”방휘승이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우리에게 공동의 적이 있다면 내가 돕도록 하지.”그는
“어머니, 잠깐만요.”심해원이 심 부인을 불러 세웠다.“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심 부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심해원은 어이없어하며 두 새언니에게 말했다.“먼저 황자님과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전 어머니께 가보겠습니다.”그러고는 재빨리 뒤따라갔다. 한시라도 빨리 운정이 궁에서 크게 돋보였다는 걸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물론 가장 중요한 건 대건이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주었다는 것이었다.심 부인의 방에 도착한 심해원은 그녀에게 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얘기했다.“그런 재주도 있단 말이냐?”심 부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냥 운 좋게 맞춘 건 아니고?”“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심해원이 피식 웃었다.“나중에 한 번 더 풀어냈는데 아예 눈을 감고 풀어낸 거 있죠? 정말 신기했어요.”“눈을 감고?”심 부인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그저 쓸모없는 재주일 뿐이다.”심해원이 말했다.“쓸모 있든 없든 우리 대건의 체면을 살려줬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백수하 이남의 땅을 되찾았다니까요?”“체면을 살린 건 그렇다 쳐도 잃어버린 땅을 되찾은 건...”심 부인이 고개를 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북성은 늑대와 같아서 입에 넣은 고기는 절대 쉽게 뱉어내지 않을 거라고. 잃어버린 땅을 정말로 되찾았을 때 그때 다시 얘기하자꾸나.”심 부인은 다시 한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구두로만 약속해서 무슨 소용이야? 글로 쓴 것도 소용이 없는데. 오직 북성이 물러가고 대건의 군사들이 들어가야 비로소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다고 할 수 있는 거지.’두 모녀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운정은 영자와 함께 뒤뜰로 갔다. 우향은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핑계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나와 함께 일하는 건 어떻습니까?”운정은 주위를 둘러본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영자가 눈썹을 치켜세웠다.“황자님이 이렇게 직설적인 분
방휘승이 무릎을 꿇자 북성 사절단의 다른 사신들도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마음속으로는 내키지 않더라도 지금은 꿇어야만 했다. 만약 이제 와서 약속을 어긴다면 식량을 구하는 일은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게 된다.무릎을 꿇은 북성 사람들을 보며 문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5년이다. 5년 전 그를 포로로 잡을 뻔했던 북성 국사가 드디어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이로써 5년 전의 분노를 풀 수 있게 되었다. 더 중요한 건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이젠 죽더라도 조상들을 볼 면목이 생겼다. 그리고 역사책에도 그를 영토를 잃은 황제라고 기록하지 않을 것이다.문제는 가슴이 벅차올라 일부러 시간을 끌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모두 일어나 자리에 앉도록 하오.”“성은이 망극하옵니다.”천천히 일어서는 북성 사람들의 안색이 하나같이 좋지 않았고 방휘승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운정을 노려보았다.운정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속으로 그를 욕했다.‘나쁜 놈들. 내가 언젠가는 북성을 싹 다 멸할 것이다. 감히 나를 노려봐?’북성 사절단이 자리에 앉자 기분이 좋아진 문제는 곧바로 술과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경사스러운 일 덕분에 연회의 분위기도 달라졌다.수심에 가득 찬 북성 사람들과 달리 대건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셋째 황자의 일당 중 일부도 함께 기뻐했다.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으니 매국노가 아닌 이상 기뻐해야 마땅했다.연회가 반쯤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운정에게 술을 권하러 왔다. 특히 강경파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운정이 예전에 아무리 무능했더라도 오늘만큼은 대건의 영웅이었다.연회가 끝난 후 운정은 문제가 그를 부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분이 좋은 문제는 과음한 바람에 일찍 궁으로 돌아갔다.운정도 차라리 잘됐다면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지 않고 심해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궁을 나선 운정은 심해원에게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물론 그의 목적은 그녀의 둘째 새언니인 영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점점 멀어지는 운정의 마차를 보던 운림의 표정이
운정의 말에 방휘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 눈앞에 떡하니 놓여있으니까.그가 만든 물건을 운정이 눈을 감고도 그보다 빨리 풀었다. 몰래 배운 게 아니라고 하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하하...”호탕한 웃음소리가 멍하니 있던 사람들을 깨웠다. 소만욱이 방휘승을 보며 크게 웃었다.“국사, 우리 대건에서 훔쳐 배워놓고 이제 와서 색깔돌이로 자랑질이나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소만욱의 말에 사람들은 흠칫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유국공님의 말씀이 맞습니다.”“제자가 스승을 시험하려 했으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국사, 북성에서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겠소.”“유국공님이 아주 맞는 말씀을 했습니다.”운정이 또 내기에서 이기자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오직 운림과 그의 일당들만이 얼굴이 어두워졌고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젠장. 저 멍청이가 정말로 눈을 감고 풀어냈어?’사람들의 조롱에 방휘승은 속으로 미친 듯이 포효했다.‘그래. 마음껏 웃어. 언젠가는 너희들이 울 날이 올 것이다. 내가 북성의 땅을 순순히 돌려줄 것 같으냐? 꿈도 꾸지 마라. 재간 있으면 땅을 되찾아보든지. 오늘은 일단 기뻐하게 놔두겠다. 우리가 목적을 달성하면 그때 실컷 울게 해주마.’“됐다. 그만들 하거라.”문제는 사람들을 제지한 후 운정을 노려보고는 방휘승에게 말했다.“국사, 승복하겠소?”방휘승이 이를 꽉 악물었다.“우리 북성의 사내들은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거두지 않습니다. 여섯째 황자와 내기하여 졌으니 당연히 승복합니다.”그러고는 허리춤에 찬 검을 푼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도 검을 내려놓으라고 했다.북성 사절단의 사람들은 원치 않았지만 방휘승이 먼저 말을 꺼낸 이상 그들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그들의 행동에 사람들은 더욱 기뻐했다.혹시라도 방휘승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다. 그들이 승복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승복하면 대건은 피 한 방울 흘리지
‘눈을 감고 일각 안에 풀어내겠다고?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어. 요행으로 한 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해졌구나.’문제는 너무도 화가 나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운정을 무섭게 노려보았다.‘나라의 대사를 걸고 내기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목숨을 내걸었어. 게다가 눈을 감고 풀겠다고? 차라리 신선술로 풀어낼 수 있다고 말하지 그러냐? 망할 놈, 그렇게 죽고 싶어?’문제는 울화가 치밀었다. 북성 사절단이 없었더라면 발로 가차 없이 차버렸을 것이다.심해원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조금 전 내기를 통해 대건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준 건 엄청난 공이었다. 그런데 제 주제도 모르고 또 내기를 하겠다고 덤벼들었다. 게다가 목숨까지 걸고 말이다.이건 죽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눈을 감고 색깔돌이를 풀어낸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운정을 몇 번이나 말렸는데도 말을 듣지 않은 것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됐어. 기어이 죽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어.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했어. 그래도 죽겠다면 그냥 내버려 두자. 이놈이 죽으면 나도 시집가지 않아도 되고. 좋지, 뭐.’심해원은 씩씩거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그 시각 입이 귀에 걸린 건 운림과 그의 일당들이었다.원래는 운정이 큰 공을 세워 앞으로 문제의 총애를 받게 될까 봐 걱정했었다. 그런데 운정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다.‘하하. 이제 볼 만하겠군.’“좋소.”잠시 넋을 잃었던 방휘승이 흔쾌히 대답했다.“여섯째 황자가 내기를 하겠다는데 당연히 응해야 하지 않겠소?”방휘승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검을 걸고 대건 황자의 목숨을 따는 건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안 그래도 운정이 그의 일을 망쳐놓아서 제거하고 싶었던 참이었다.방휘승이 웃자 북성 사절단의 사람들도 함께 웃기 시작했다.“좋소.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운정이 색깔돌이를 방휘승에게 건넸다.“국사가 섞도록 하오. 나중에 내가 속임수를 썼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알겠소.”방휘승이 크게 웃었다.
‘옥영롱? 옥영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밤하늘을 관찰하다가 만든 거라고? 차라리 타임슬립했다고 하는 게 더 그럴듯하겠어.’운정은 속으로 미친 듯이 비난하며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오. 이건 색깔돌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오.”“색깔돌이?”방휘승이 미간을 찌푸렸다.‘분명히 내가 만든 옥영롱인데?’운정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솔직하게 말해서 열 살 때 대건의 고서에서 본 적이 있소. 가끔 심심할 때 나무로 만들어보기도 했소. 그리고 내가 가지고 놀던 색깔돌이는 한 면에 열여섯 칸이나 있었소. 국사의 것보다 훨씬 복잡하오.”‘아무렇게나 지어내면 되지, 뭐. 어차피 벽파원의 궁녀와 호위병들 모두 처리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지어내든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내 말이 곧 진실이야.’운정의 말에 방휘승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열여섯 칸? 열 살 때 열여섯 칸짜리 옥영롱을 만들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말도 안 되오. 절대 불가능하오.”방휘승의 두 눈에 핏발이 섰고 이를 꽉 악물었다.“그냥 황자의 운이 좋았을 뿐이오.”“그렇소?”운정은 웃으면서 시선을 방휘승의 허리에 찬 검으로 돌렸다.대건왕조의 문무백관들은 무기를 들고 궁에 들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방휘승 일행은 사신으로 왔기 때문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국사, 검이 참 멋진 것 같소.”뜬금없는 말에 방휘승은 어안이 벙벙했다. 잠깐 정신을 놓았다가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이건 북성의 대선우께서 하사하신 보검이오. 멋스러울 뿐만 아니라 날카롭기 그지없소이다.”“그렇소?”운정이 웃으며 말했다.“국사, 그럼 그 검으로 내기를 한 번 더 하는 게 어떻겠소?”‘내기를 또 한다고?’그 말에 문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운정을 쳐다보았다.“여섯째야, 오늘 연회는 북성의 사신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이미 오래 지체되었으니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물러가거라.”문제는 이쯤에서 거둬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운정이 또 무슨 내기를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내기를 하다 보면 질 수
문제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버렸다.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운정은 색깔돌이를 잠시 관찰하더니 양손을 동시에 움직였다...그리고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미 손을 멈췄다. 어리둥절한 시선 속에서 운정은 색깔돌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방휘승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운정이 들고 있는 색깔돌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말도 안 돼. 어떻게 저렇게 빨리 풀 수 있지?’그가 들고 있는 색깔돌이를 보며 대건 사람들도 완전히 넋을 잃었다.‘저것을... 풀어냈다고?’사람들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어 눈까지 비볐다. 여전히 그 색깔돌이였지만 여섯 면의 색깔이 모두 같아져 있었다.정말로 풀어낸 것이었다. 게다가 운정이 말했던 일각이 아니라 숨을 몇 번 쉬는 사이에 풀어냈다.운림과 다른 황자들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말도 안 돼. 우린 한참 동안 애를 써도 기껏해야 한 면만 맞췄는데 저 무능한 놈이 이렇게 빨리 풀어냈다고? 젠장. 대체 어떻게 된 거지?’“감축드리옵니다, 폐하. 하늘이 대건을 돕고 있나이다.”원로 장규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눈물을 흘리며 크게 외쳤다.“감축드리옵니다, 폐하.”“하늘이 대건을 돕고 있나이다.”신하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서승우와 운림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무릎을 꿇었다.잃어버렸던 땅을 되찾은 건 큰 경사였다. 무릎을 꿇지 않는다면 매를 벌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그 시각 문제는 등지고 서 있어 아직 결과를 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함성 소리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문제는 멍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폐하, 여섯째 황자님께서 이기셨사옵니다.”장규는 눈물범벅인 채로 색깔돌이를 가리키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대건이 5년 전에 잃었던 땅을 되찾았나이다.”장규는 온건파였다. 하지만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대건이 태평 성대하여 백성들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랐다.5년 전에 잃었던
‘차라리 죽어, 그냥. 어차피 죽을 바에 빨리 죽는 게 낫지. 저놈이 빨리 죽어야 나도 시집갈 필요 없는데.’운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국사는 내가 풀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오?”“물론이오.”방휘승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물건은 내가 만든 것이지만 나조차도 일각 안에 풀어낸 적이 없소.”“그렇소?”운정은 넋이 나간 얼굴로 방휘승을 쳐다보았다.‘뭐야? 자기가 만든 것도 빨리 풀지 못한다고? 그럼 대체 어떻게 이런 물건을 만들 생각을 했지?’어리둥절한 운정의 모습에 운림은 속으로 비웃었다.‘멍청한 것. 이제야 좀 놀랐어? 허풍이 다 드러났지? 주제도 모르고 나대더니 꼴좋다. 네 꼴이 어떤지 보고 좀 나대.’“운정아.”문제가 엄격한 목소리로 호통쳤다.“앉거라.”“아바마마, 소자를 믿으시옵소서.”운정은 문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방휘승에게 말했다.“국사 스스로도 일각 안에 풀 수 없다고 했으니 내기를 하는 게 어떻겠소?”“내기?”방휘승이 피식 웃었다.“무슨 내기를 하고 싶소?”문제는 운정이 나라의 대사를 걸고 내기를 할까 봐 버럭 화를 냈다.“여봐라. 당장 운정을 끌어내거라.”“잠깐만요.”방휘승은 손을 들어 문제를 제지했다.“폐하, 군주는 한 입으로 두말해서는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여섯째 황자가 그래도 황자인데 공개적으로 한 말을 쉽게 거두어들여서야 하겠습니까?”문제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렇다. 군주는 한 입으로 두말해서는 안 되었다. 하여 황제의 아들이 공개적으로 한 말도 쉽게 거두어들여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북성 사절단의 앞에서는 더더욱 안 되었다.문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호위병들을 물리고 경고 섞인 눈빛으로 운정을 째려본 다음 고개를 돌렸다.‘저 어리석은 놈이 국사를 걸고 내기를 한다면 반드시 처형을 내릴 것이다.’그 모습에 운림과 일당들은 비웃으면서 운정이 어떻게 죽을지 지켜보기로 했다.“황자, 어떤 내기를 하고 싶은지 말해보도록 하오.”방휘승은 운정을 가지고 놀겠다는 표정으로 웃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