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정이 현재 거주하는 곳은 그가 성인이 되기 전에 머물던 거처였다.운정을 생각하며 문제는 마음속으로 또다시 욕하기 시작했다.‘내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면 스스로 제기했어야지. 못난 놈 같으니라고.’잠시 생각에 잠긴 문제가 목순에게 명했다.“죄인 우민의 저택을 지금 즉시 청소한 후 내일 아침 일찍 운정에게 조서를 내려 그 저택을 하사하라. 그리고 저택의 하인들은 운정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삼황자 저택.운림의 아랫도리는 아직도 약간의 통증이 있었다.운림을 보러 온 서승우와 숙비가 이런 운림의 모습을 보고는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운림이 무능한 운정에게 제대로 당했네!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게 생겼네.’화가 치밀어올라 서승우는 운림을 꾸짖었다.“너도 참 어리석구나. 운정 그놈에게 죄명을 씌울 거면 다른 걸로 하지, 왜 하필 태자와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우는 것이냐 말이다. 이걸 믿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 조정의 신하들뿐만 아니라 너 자신도 믿지 않으면서.”‘하긴 운정이 태자와 내통해 모반을 꾀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지. 그 무능한 놈이 피만 봐도 벌벌 떠니 내통할 리가 없어. 그걸 믿는 사람은 머리가 아둔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하지.’운림은 답답함과 분노가 치밀어올라 입술을 깨물었다.“저는 단지 겁주려 했을 뿐 그놈이 반격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반격하지 않으면 죽음뿐인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리 없지.”서승우는 화 난 눈빛으로 운림을 노려보며 당부했다.“당분간은 안정을 취하고 운정에게 시비 걸지 마라.”“왜요?”운림이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소리쳤다.“가만 놔둔다면 분을 어찌 삭이란 말입니까.”“이 어리석은 놈아!”서승우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호통쳤다.“폐하께서는 이미 전후 사정을 다 아셨을 거다. 지금까지 너를 찾지 않은 건 너를 떠보려는 것이야. 만에 하나 이 시점에 네가 또다시 운정을 괴롭힌다면 너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일이란 걸 왜 모르느냐!”애송이인 우림과 달리, 서승우는 노
다음 날 아침, 목순이 찾아와서 문제의 조서를 전달하자, 운정은 만감이 교차했다.궁궐을 벗어나 있어서 비밀리에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기쁘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문제가 갑자기 자신에게 미안함을 느껴 혼인시킨 후에 송북으로 보내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리되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와서 걱정한들 아무 소용이 없어서 운정은 일단 조서를 받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벽파원에서 오랫동안 거주했지만, 소지품이 많지 않아서 운정은 짐만 간단히 챙긴 후, 두 호위병과 함께 떠났다.우민의 저택에 도착해보니 간판은 이미 여섯째 황자 저택이라고 씌어있는 새 간판으로 바뀌어져 있었다.다만 유칠이 덜 말라서 한눈에 봐도 급하게 만든 티가 확 났다.“어서 오십시오. 여섯째 황자님.”저택 안에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절을 올렸다.‘하인들이 꽤 많구먼.’사내와 계집을 합쳐보니 족히 30명은 넘어 보였는데 대부분은 시녀와 머슴들이었고, 이 중 6명은 호위병이었다.하지만 이들이 모두 문제(文帝)가 보낸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운정은 불편함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이들 중에 아바마마의 밀정이 몇 명이나 되는지.’“다들 일어나거라.”운정이 손을 들어 올리며 부드럽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딴생각을 품고 있었다.‘믿을 만한 심복을 따로 구해야겠네.’저택 내부를 둘러본 후, 운정은 고운과 주밀을 대동하고 저잣거리로 나갔다.“황자님, 마차 타시는 게 어떨는지요?”고운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황자님께서는 평소 말을 타신 적이 드물 터이니, 혹여 나중에 사고라도 난다면 큰일이 아닙니까. 해서…”“그러자꾸나.”운정이 깊은 한숨을 들이쉬며 말했다.“하긴 전장에 나갈 사람이 말도 탈 줄 모른다면 아바마마의 얼굴에 먹칠하는 거나 다름없지.”말하면서 운정은 손과 발을 쓰며 말에 올라타려 했다.전에 말을 타본 적이 없던지라 그가 허둥지둥하며 겨우 중심을 잡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밀과 고운은 탄식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참, 말도 제대로 못 타면서
운정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를 갖췄다.불같은 성격의 심해원도 예의를 차리는 것을 보고 운정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뭐야? 그새 성격이 변했나? 어젯밤에 폐하를 뵙지 못해서 이제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다 한 가족이니 이런 격식은 필요 없습니다.”운정은 대수롭지 않게 웃은 뒤에 시선을 기개가 넘치는 젊은 사내에게 향했다.“그대는 누구인가?”그 순간, 젊은 사내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운정을 흘끗 쳐다본 뒤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황자님, 소인은 좌둔위 기도위 원규라 합니다. 아버지는 좌둔위 대장군 원종이시고요.”‘원종이라면 셋째 형님의 사람이 아니던가? 어제 대전에서 그 누구보다 즐겁게 춤을 추던데. 그렇다면 난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되겠구나.’“아, 원 도위구만.”운정이 허허 웃으며 물었다.“그래 원 도위는 무슨 일로 온 것이오?”원규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둘러 답했다.“심 낭자가 기분이 안 좋으시다고 해서 특별히…”“어험!”영자가 기침 소리로 원규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원 도위는 저의 먼 친척입니다. 원래는 저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 말을 타며 나들이 하려다가 해원이 기분이 안 좋다는 말을 듣고 같이 가려 했습니다.”말을 마치고 영자는 원규에게 눈짓을 보냈다.‘이 멍청한 놈아, 해원은 곧 황자비가 될 사람인데 그녀와 둘이서 말 타고 나들이 간다면 안 되지. 비록 해원이 네놈을 명확히 거절했다고는 하나 황자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찌 나올지 아무도 몰라.’영자의 눈짓에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원규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번복했다.“예. 영자 누님과 함께 나들이하려고…”“그렇구먼.”운정이 웃으며 영자를 흘끗 쏘아보았다.‘이 여인이 눈치가 있구먼. 원규를 혼낼 좋은 기회였는데.’이때 심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젯밤 궁 밖에서 밤새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고뿔에 걸린 것 같습니다. 황자님께 전염될 수도 있어서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말을 마치
‘말타기를 가르쳐 달라고?’원규는 어리둥절해하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소인이 어찌 감히 황자님의 부탁을 거절하겠습니까.”‘그래. 내 승마 솜씨를 보여줄 테니 너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 똑똑히 보거라. 폐하께서 네놈과 해원과의 혼사를 주선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분명 내 여인이 되었을 텐데. 이제 와서 결과를 바꿀 수 없겠지만 네놈의 체면을 구겨버려서 마음속에 쌓인 원한을 풀어야겠다.’“그러면 두 분이 가세요.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원래 흥미가 없는 데다 운정이 억지로 따라가려 하자,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 심해원은 아예 가기를 포기해 버렸다.심해원의 말에 영자는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아가씨, 기분도 전환할 겸 같이 가시지요. 그래야 황자님과 친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영자는 마음이 답답했다.‘폐하가 오해할까 봐 내가 나선 건데 이제 와서 안 간다면 내가 뭐가 되냐? 저 한심한 놈을 너뿐만 아니라 나도 보기 싫단 말이다.’“그래. 같이 가자꾸나.”원규도 심해원을 설득했다.“여섯째 황자님이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는 솜씨를 구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 않느냐.”그 말에 마음이 움직인 심해원은 슬쩍 운정을 곁눈질했다.‘그래. 저 오만방자한 놈의 기를 확실히 꺾어줘야겠다. 장군 가문의 딸인 내가 너 같은 놈은 안중에도 없단 걸 보여주마.’이렇게 생각하고 심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심씨 저택을 나서자, 머슴들이 말을 끌고 왔다.원규는 운정에게 자랑하려는 듯, 한 손으로 가뿐히 말에 올라탔다.‘관심받고 싶어서 환장했네.’운정은 마음속으로 욕하면서도 칭찬을 늘어놓았다.“역시 기도위답게 승마술이 뛰어나군.”그러자 원규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황자님도 어서 말에 올라타시죠.”운정의 추태 부리는 모습을 볼 생각에 그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일단 내려오시오.”운정이 원규를 불렀다.“말 타는 법부터 배워야겠소.”“예.”원규는 우아하게 말에서 뛰어내렸다.그 모습을 보고 운정이 또 칭찬했으나 역시 속으로는
그녀는 원규를 다시 보게 되었다.“이제 보니 네놈은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멍청하구나.”영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원규를 흘끗 쏘아본 뒤, 옆에 있던 심해원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조금 자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괜찮은 거냐?”운정이 일어난 후에 서둘러 주밀을 일으켰다.“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소인은 괜찮습니다.”주밀은 옷의 먼지를 털면서 말했다.“괜찮다면 됐다.”운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원규에게 돌렸다.“원 도위, 다음부터 나를 밀 때 힘을 너무 주지 마시오.”‘뭐라?’원규는 어리둥절했다.‘힘을 많이 안 주고 그저 살짝 밀었을 뿐인데.’“원규, 네 이놈! 감히 황자님을 밀쳐 말에서 떨어뜨려?”갑자기 고운의 고함이 원규의 귀에 들려왔다.원규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해명했다.“난… 난 힘을 주지 않았다. 황자님께서 스스로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닥쳐라!”고운의 눈동자에서 날카롭고 차가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황자님이 너를 모함이라도 했다는 말이냐?”“됐다, 됐어.”중재에 나선 운정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원 도위이 실수로 힘 조절을 못 했을 뿐 고의는 아니었을 거다.”운정의 말에 원규가 펄쩍 뛰었다.‘중재하는 줄 알았더니만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잖아.’고운과 주밀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이놈이 고의로 밀친 것이 맞네. 보나 마나 황자님을 심해원 앞에서 망신 주려고 그랬겠지.’두 사람이 쏘아보자, 원규는 할 말을 잃은 채 애원하는 눈빛으로 심해원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심해원은 입을 삐쭉거리며 코웃음을 쳤다.“황자님이 말 타는 솜씨가 서툴러서 넘어진 것이…”“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심 아가씨.”고운이 고개를 들어 심해원을 쳐다보았다.“곧 여섯째 황자비가 될 분이 이리 말하면 안 되지요.”심해원이 씩씩거리며 대거리하려 했지만, 영자가 막아 나섰다.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운정이 속으로 고운을 칭찬했다.‘고운의 눈치가 빠르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다니.’“됐다.
원씨 저택.“뭐라!”원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원규를 발로 걷어차며 호통쳤다.“이 미친놈아! 여섯째 황자님을 말에서 밀어뜨렸다고? 죽고 싶어서 환장했느냐?”“아버지! 제가 밀친 것이 아닙니다.”원규는 바닥에 엎드린 채 울부짖었다.“황자님이 스스로 떨어졌어요.”“그래도 이놈이!”원종의 분노가 폭발했다.“밀치지 않았다면서 어찌하여 큰 소리로 웃은 거냐?”“그것이…”원규는 억울했지만,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서방님, 그만하세요.”원 부인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원규가 고의로 무능한 여섯째 황자님을 밀쳤다 한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그런 아들 있는지조차 모르실 텐데. 그 무능한 놈 때문에…”착!원 부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원종은 그녀의 뺨을 후려갈기며 소리쳤다.“닥치시오! 비록 그동안은 잊고 살았다고 하나 변방 가서 죽으려 하는 여섯째 황자님을 폐하께서는 지금 안쓰러워하고 있단 말이오. 이런데도 별일이 없을 거라고?”“그것이 참말입니까?”원종의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원 부인이 얼굴의 통증도 잊은 채 물었다.“그… 그러면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폐하께서 알게 되면 우리 원규를 가만두지 않을 것인데.”인제야 사태 파악이 되자, 그녀는 공포감이 몰려왔다.“어떡하긴 뭘 어떡한단 말이오!”원종이 씩씩거리며 원규를 쏘아보았다.“어서 썩 일어나라! 선물을 준비하여 나와 함께 여섯째 황자님을 찾아가 사죄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예. 예…”원규가 허겁지겁 일어났다.이들은 귀중한 물품을 챙겨 곧바로 여섯째 황자 저택으로 향했다.문제가 이 사실을 알기 전에 운정에게 사과해야 하므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마차를 타지 않고 말을 탔다.운정이 뇌물을 받으면 원규를 용서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어서 이에 대해 나중에 문제(文帝)가 추궁한다고 할지라도 엄벌에 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이들이 황급히 달려온 바람에 여섯째 황자 저택에는 금방 도착했다.원종 부자가 들고 있는 상자를 보며 운정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원종이 초대장을 쓰는 족족 운정은 그것을 대신들에게 전달하라고 하인들에게 명했다.글 쓰는 와중에 운정은 차와 약과를 대접하기도 했다.그렇게 오후가 되어서야 원종은 100개의 초대장을 다 작성했다.“원 장군은 참으로 겸손하십니다. 제가 쓴 글씨보다 훨씬 낫군요.”운정이 빙그레 웃으며 원종을 칭찬했다.“저는 이따가 조정 충신들에게 직접 초대장을 전달하러 가겠으니, 저녁은 대접 못 하겠습니다.”“예. 괜찮습니다.”원종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황자님, 그러면 제 자식은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용서하고 안 하는지가 어디 있겠어요.”운정이 손을 내저었다.“원 도위가 고의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운정의 말에 원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원규를 쏘아보았다.“어서 황자님께 감사 인사를 하지 않고 뭣 하는 게야?”원규는 억울함을 참으며 울며 겨자 먹기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황자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되었소. 제가 두 분을 배웅해 드리겠습니다.”운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원종이 사양하려 하자 운정은 손사래를 쳤다.“이리 큰 도움을 주셨는데 당연히 배웅해 드려야죠.”원종 부자가 어쩔 수 없이 운정과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때는 머슴들이 이미 이들 부자의 말을 끌고 온 뒤였다.“이 말은…”눈앞의 말을 보더니 원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건 내가 타고 온 말이 아니잖아.’“이 말이 왜요?”운정이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황자님, 이건 소인들의 말이 아닙니다.”원종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예? 그럴 리가요?”운정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설마 그렇다면 아까 하인들이 타고 간 것이 두 분의 말이겠군요.”‘하인들이 타고 갔다고?’운정의 말에 원종 부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원 장군님.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운정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말들은 모두 아바마마께서 보낸 것이라 저도 잘 몰라서…”“괜… 괜찮습니다.”원종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억지로 말했다.“말이 다 똑
원종 부자를 배웅하고 나서 초대장을 셋째 황자의 외숙부인 서승우에게 전달하려고 운정은 고운을 대동하고 곧바로 정국공 저택으로 향했다.‘정국공만 잘 구워삶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예물을 보내겠지.’“황자님, 소인이 할 말이 있는데…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가던 도중, 고운이 망설이던 끝에 입을 열었다.“무슨 일인데 그러느냐?”운정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고운은 쓴웃음을 짓더니 정색하며 말했다.“황자님께서 직접 정국공 저택에 가서 초대장을 전하는 게 스스로 굴욕을 자초하는 일인 것 같아서요.”“그들이 날 얕보는 걸 나도 알고 있다.”운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들이 내 초대에 응하지 않겠지만 나는 예의를 다해야지 않겠나.”고운은 말문이 막힌 듯 잠잠해졌다.잠시 후, 해가 저물어갈 때쯤 두 사람은 정국공 저택에 도착했다.“여섯째 황자가?”운정이 찾아온 소식을 듣고 서승우와 그의 가족들은 어리둥절했다.‘여섯째 황자가 무슨 일로 왔을까? 설마 사죄하러? 하지만 사죄할 거면 삼황자 저택에 갔을 것인데.’“다들 나가 맞이합시다.”서승우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비록 운정을 얕잡아보더라도 여섯째 황자인 그를 영접조차 하지 않는다면 황실을 능멸한 거나 다름없었으니.“어서 오십시오, 여섯째 황자님.”저택 입구에서 서승우는 가족들과 함께 억지로 절을 하며 예를 갖췄다.‘조정의 충신이란 자가 내게 절까지 하니 모욕감이 많이 느껴지겠구나.’“정국공, 어찌 이러십니까.”운정은 수줍게 웃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정국공께 초대장을 전하려고 이리 왔습니다.”“초대장이라고요?”서승우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황자님과 심해원의 혼삿날이 잡혔습니까?”서승우가 운정을 저택 안으로 초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운정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그것이 아니라 제가 새 저택으로 이사했습니다. 해서 조정의 여러 대신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열려고 하니 정국공도 참석하시라고요.”말하면서 운정은
‘늦잠도 못 자게 하고. 그래도 겨울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겨울이었더라면 정말 일어나기 싫었을 텐데.’조회 대전 밖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대신들이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황자님, 오늘 상을 받으시면 저희에게 술 한 잔 사셔야지요.”“맞습니다, 맞습니다. 이 늙은이는 어젯밤 황자님과 실컷 마시지 못했습니다.”“잃어버린 땅을 되찾으신 공을 세웠으니 분명 상을 많이 받으실 겁니다.”“황자님의 공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합니다.”이번에는 많은 조정 대신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유국공 소만욱이 운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친한 척했다.“황자님, 앞으로 또 누가 감히 황자님이 쓸모없다고 말한다면 제가 그 입을 찢어버릴 것입니다.”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것은 장군들의 오래된 염원이었다.이젠 나이가 들어 땅을 되찾는 날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운정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되찾아주었다.“감사합니다, 유국공님. 감사합니다, 여러분.”운정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확 때려서 기절시켜버릴까? 이 늙은이는 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거야?’마음 같아서는 말을 걸지 말아 달라는 글이 적힌 나무판이라도 목에 걸고 싶었다.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운정을 보며 다른 황자들은 질투심에 휩싸였다.서승우와 운림의 눈에 동시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지만 속으로는 계속 비웃었다.‘그래. 그렇게 친하게 지내. 운정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 빨리 죽을 거야. 두고 봐. 진짜 재미있는 건 이제부터 시작이니까.’한창 얘기를 나누던 그때 문제가 사람들에게 대전에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문제에게 인사를 올린 후 신하들은 자리로 돌아갔다.“여섯째는 어디 있느냐?”문제는 물으면서 대전 안을 둘러보았다.“소자 여기 있사옵니다.”운정은 가장 뒤쪽에 있는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문제의 얼굴이 살짝 떨렸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오늘은 너에게 상을 주려는 것이지,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다. 왜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이냐?”“소자 숨지
깊은 밤, 대건에서 마련해준 거처에 도착한 방휘승은 한참이 지나도 분을 삭이지 못했다.‘오늘 여섯째 황자가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대건의 체면을 깎아내리고 본때를 보여주려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텐데. 빌어먹을 놈. 되레 우리 체면을 깎은 것도 모자라 끌려다니는 입장이 돼버렸어. 괘씸해서, 원. 분명 여섯째 황자가 무능한 놈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저런 재주가 있는 거지? 대건왕조의 고서에 색깔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근데 그건 정말로 내가 우연히 생각해낸 건데. 혹시 대건왕조에 나보다 먼저 생각해낸 사람이 있었던 거야?’슉.방휘승이 울적해 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자객인가?’그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밖에서 지키고 있던 호위병이 다가왔다.“국사님, 방금 누군가 화살을 쏘아 보냈는데 거기에 서신이 하나 있었습니다.”호위병이 화살과 서신을 건넸다.“사람은?”방휘승이 물었다.“보지 못했습니다.”호위병이 고개를 저었다.“알았다. 물러가라.”그는 가볍게 손을 내젓고는 화살과 서신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의 등불을 빌려 손에 든 서신을 펼쳤다.“허허...”방휘승은 서신을 읽으며 경멸에 가득 찬 웃음을 터뜨렸다.“대건 사람들은 싸우는 것과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건 제대로 못 하면서 내분을 일으키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한다니까?”조금 전 여섯째 황자를 죽일 생각을 하자마자 대건왕조의 누군가가 그에게 방법을 알려주었다.게다가 계획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었고 득실까지 분석해주었다. 여섯째 황자가 송북으로 가서 죽을 각오로 군대들의 사기를 북돋으려 하고 있고 또 그가 송북에서 죽든 말든 북성에는 아무런 좋은 점이 없다고 했다.‘분석은 그럴듯하게 했네. 근데 그 똑똑한 머리를 자기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만 쓰고 있어. 조정에 간신배들뿐이니 당연히 망하지.’“고민하지 말자.”방휘승이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우리에게 공동의 적이 있다면 내가 돕도록 하지.”그는
“어머니, 잠깐만요.”심해원이 심 부인을 불러 세웠다.“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심 부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심해원은 어이없어하며 두 새언니에게 말했다.“먼저 황자님과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전 어머니께 가보겠습니다.”그러고는 재빨리 뒤따라갔다. 한시라도 빨리 운정이 궁에서 크게 돋보였다는 걸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물론 가장 중요한 건 대건이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주었다는 것이었다.심 부인의 방에 도착한 심해원은 그녀에게 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얘기했다.“그런 재주도 있단 말이냐?”심 부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냥 운 좋게 맞춘 건 아니고?”“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심해원이 피식 웃었다.“나중에 한 번 더 풀어냈는데 아예 눈을 감고 풀어낸 거 있죠? 정말 신기했어요.”“눈을 감고?”심 부인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그저 쓸모없는 재주일 뿐이다.”심해원이 말했다.“쓸모 있든 없든 우리 대건의 체면을 살려줬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백수하 이남의 땅을 되찾았다니까요?”“체면을 살린 건 그렇다 쳐도 잃어버린 땅을 되찾은 건...”심 부인이 고개를 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북성은 늑대와 같아서 입에 넣은 고기는 절대 쉽게 뱉어내지 않을 거라고. 잃어버린 땅을 정말로 되찾았을 때 그때 다시 얘기하자꾸나.”심 부인은 다시 한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구두로만 약속해서 무슨 소용이야? 글로 쓴 것도 소용이 없는데. 오직 북성이 물러가고 대건의 군사들이 들어가야 비로소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다고 할 수 있는 거지.’두 모녀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운정은 영자와 함께 뒤뜰로 갔다. 우향은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핑계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나와 함께 일하는 건 어떻습니까?”운정은 주위를 둘러본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영자가 눈썹을 치켜세웠다.“황자님이 이렇게 직설적인 분
방휘승이 무릎을 꿇자 북성 사절단의 다른 사신들도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마음속으로는 내키지 않더라도 지금은 꿇어야만 했다. 만약 이제 와서 약속을 어긴다면 식량을 구하는 일은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게 된다.무릎을 꿇은 북성 사람들을 보며 문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5년이다. 5년 전 그를 포로로 잡을 뻔했던 북성 국사가 드디어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이로써 5년 전의 분노를 풀 수 있게 되었다. 더 중요한 건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이젠 죽더라도 조상들을 볼 면목이 생겼다. 그리고 역사책에도 그를 영토를 잃은 황제라고 기록하지 않을 것이다.문제는 가슴이 벅차올라 일부러 시간을 끌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모두 일어나 자리에 앉도록 하오.”“성은이 망극하옵니다.”천천히 일어서는 북성 사람들의 안색이 하나같이 좋지 않았고 방휘승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운정을 노려보았다.운정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속으로 그를 욕했다.‘나쁜 놈들. 내가 언젠가는 북성을 싹 다 멸할 것이다. 감히 나를 노려봐?’북성 사절단이 자리에 앉자 기분이 좋아진 문제는 곧바로 술과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경사스러운 일 덕분에 연회의 분위기도 달라졌다.수심에 가득 찬 북성 사람들과 달리 대건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셋째 황자의 일당 중 일부도 함께 기뻐했다.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으니 매국노가 아닌 이상 기뻐해야 마땅했다.연회가 반쯤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운정에게 술을 권하러 왔다. 특히 강경파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운정이 예전에 아무리 무능했더라도 오늘만큼은 대건의 영웅이었다.연회가 끝난 후 운정은 문제가 그를 부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분이 좋은 문제는 과음한 바람에 일찍 궁으로 돌아갔다.운정도 차라리 잘됐다면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지 않고 심해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궁을 나선 운정은 심해원에게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물론 그의 목적은 그녀의 둘째 새언니인 영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점점 멀어지는 운정의 마차를 보던 운림의 표정이
운정의 말에 방휘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 눈앞에 떡하니 놓여있으니까.그가 만든 물건을 운정이 눈을 감고도 그보다 빨리 풀었다. 몰래 배운 게 아니라고 하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하하...”호탕한 웃음소리가 멍하니 있던 사람들을 깨웠다. 소만욱이 방휘승을 보며 크게 웃었다.“국사, 우리 대건에서 훔쳐 배워놓고 이제 와서 색깔돌이로 자랑질이나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소만욱의 말에 사람들은 흠칫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유국공님의 말씀이 맞습니다.”“제자가 스승을 시험하려 했으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국사, 북성에서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겠소.”“유국공님이 아주 맞는 말씀을 했습니다.”운정이 또 내기에서 이기자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오직 운림과 그의 일당들만이 얼굴이 어두워졌고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젠장. 저 멍청이가 정말로 눈을 감고 풀어냈어?’사람들의 조롱에 방휘승은 속으로 미친 듯이 포효했다.‘그래. 마음껏 웃어. 언젠가는 너희들이 울 날이 올 것이다. 내가 북성의 땅을 순순히 돌려줄 것 같으냐? 꿈도 꾸지 마라. 재간 있으면 땅을 되찾아보든지. 오늘은 일단 기뻐하게 놔두겠다. 우리가 목적을 달성하면 그때 실컷 울게 해주마.’“됐다. 그만들 하거라.”문제는 사람들을 제지한 후 운정을 노려보고는 방휘승에게 말했다.“국사, 승복하겠소?”방휘승이 이를 꽉 악물었다.“우리 북성의 사내들은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거두지 않습니다. 여섯째 황자와 내기하여 졌으니 당연히 승복합니다.”그러고는 허리춤에 찬 검을 푼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도 검을 내려놓으라고 했다.북성 사절단의 사람들은 원치 않았지만 방휘승이 먼저 말을 꺼낸 이상 그들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그들의 행동에 사람들은 더욱 기뻐했다.혹시라도 방휘승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다. 그들이 승복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승복하면 대건은 피 한 방울 흘리지
‘눈을 감고 일각 안에 풀어내겠다고?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어. 요행으로 한 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해졌구나.’문제는 너무도 화가 나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운정을 무섭게 노려보았다.‘나라의 대사를 걸고 내기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목숨을 내걸었어. 게다가 눈을 감고 풀겠다고? 차라리 신선술로 풀어낼 수 있다고 말하지 그러냐? 망할 놈, 그렇게 죽고 싶어?’문제는 울화가 치밀었다. 북성 사절단이 없었더라면 발로 가차 없이 차버렸을 것이다.심해원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조금 전 내기를 통해 대건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준 건 엄청난 공이었다. 그런데 제 주제도 모르고 또 내기를 하겠다고 덤벼들었다. 게다가 목숨까지 걸고 말이다.이건 죽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눈을 감고 색깔돌이를 풀어낸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운정을 몇 번이나 말렸는데도 말을 듣지 않은 것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됐어. 기어이 죽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어.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했어. 그래도 죽겠다면 그냥 내버려 두자. 이놈이 죽으면 나도 시집가지 않아도 되고. 좋지, 뭐.’심해원은 씩씩거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그 시각 입이 귀에 걸린 건 운림과 그의 일당들이었다.원래는 운정이 큰 공을 세워 앞으로 문제의 총애를 받게 될까 봐 걱정했었다. 그런데 운정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다.‘하하. 이제 볼 만하겠군.’“좋소.”잠시 넋을 잃었던 방휘승이 흔쾌히 대답했다.“여섯째 황자가 내기를 하겠다는데 당연히 응해야 하지 않겠소?”방휘승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검을 걸고 대건 황자의 목숨을 따는 건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안 그래도 운정이 그의 일을 망쳐놓아서 제거하고 싶었던 참이었다.방휘승이 웃자 북성 사절단의 사람들도 함께 웃기 시작했다.“좋소.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운정이 색깔돌이를 방휘승에게 건넸다.“국사가 섞도록 하오. 나중에 내가 속임수를 썼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알겠소.”방휘승이 크게 웃었다.
‘옥영롱? 옥영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밤하늘을 관찰하다가 만든 거라고? 차라리 타임슬립했다고 하는 게 더 그럴듯하겠어.’운정은 속으로 미친 듯이 비난하며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오. 이건 색깔돌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오.”“색깔돌이?”방휘승이 미간을 찌푸렸다.‘분명히 내가 만든 옥영롱인데?’운정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솔직하게 말해서 열 살 때 대건의 고서에서 본 적이 있소. 가끔 심심할 때 나무로 만들어보기도 했소. 그리고 내가 가지고 놀던 색깔돌이는 한 면에 열여섯 칸이나 있었소. 국사의 것보다 훨씬 복잡하오.”‘아무렇게나 지어내면 되지, 뭐. 어차피 벽파원의 궁녀와 호위병들 모두 처리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지어내든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내 말이 곧 진실이야.’운정의 말에 방휘승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열여섯 칸? 열 살 때 열여섯 칸짜리 옥영롱을 만들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말도 안 되오. 절대 불가능하오.”방휘승의 두 눈에 핏발이 섰고 이를 꽉 악물었다.“그냥 황자의 운이 좋았을 뿐이오.”“그렇소?”운정은 웃으면서 시선을 방휘승의 허리에 찬 검으로 돌렸다.대건왕조의 문무백관들은 무기를 들고 궁에 들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방휘승 일행은 사신으로 왔기 때문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국사, 검이 참 멋진 것 같소.”뜬금없는 말에 방휘승은 어안이 벙벙했다. 잠깐 정신을 놓았다가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이건 북성의 대선우께서 하사하신 보검이오. 멋스러울 뿐만 아니라 날카롭기 그지없소이다.”“그렇소?”운정이 웃으며 말했다.“국사, 그럼 그 검으로 내기를 한 번 더 하는 게 어떻겠소?”‘내기를 또 한다고?’그 말에 문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운정을 쳐다보았다.“여섯째야, 오늘 연회는 북성의 사신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이미 오래 지체되었으니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물러가거라.”문제는 이쯤에서 거둬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운정이 또 무슨 내기를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내기를 하다 보면 질 수
문제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버렸다.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운정은 색깔돌이를 잠시 관찰하더니 양손을 동시에 움직였다...그리고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미 손을 멈췄다. 어리둥절한 시선 속에서 운정은 색깔돌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방휘승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운정이 들고 있는 색깔돌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말도 안 돼. 어떻게 저렇게 빨리 풀 수 있지?’그가 들고 있는 색깔돌이를 보며 대건 사람들도 완전히 넋을 잃었다.‘저것을... 풀어냈다고?’사람들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어 눈까지 비볐다. 여전히 그 색깔돌이였지만 여섯 면의 색깔이 모두 같아져 있었다.정말로 풀어낸 것이었다. 게다가 운정이 말했던 일각이 아니라 숨을 몇 번 쉬는 사이에 풀어냈다.운림과 다른 황자들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말도 안 돼. 우린 한참 동안 애를 써도 기껏해야 한 면만 맞췄는데 저 무능한 놈이 이렇게 빨리 풀어냈다고? 젠장. 대체 어떻게 된 거지?’“감축드리옵니다, 폐하. 하늘이 대건을 돕고 있나이다.”원로 장규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눈물을 흘리며 크게 외쳤다.“감축드리옵니다, 폐하.”“하늘이 대건을 돕고 있나이다.”신하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서승우와 운림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무릎을 꿇었다.잃어버렸던 땅을 되찾은 건 큰 경사였다. 무릎을 꿇지 않는다면 매를 벌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그 시각 문제는 등지고 서 있어 아직 결과를 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함성 소리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문제는 멍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폐하, 여섯째 황자님께서 이기셨사옵니다.”장규는 눈물범벅인 채로 색깔돌이를 가리키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대건이 5년 전에 잃었던 땅을 되찾았나이다.”장규는 온건파였다. 하지만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대건이 태평 성대하여 백성들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랐다.5년 전에 잃었던
‘차라리 죽어, 그냥. 어차피 죽을 바에 빨리 죽는 게 낫지. 저놈이 빨리 죽어야 나도 시집갈 필요 없는데.’운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국사는 내가 풀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오?”“물론이오.”방휘승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물건은 내가 만든 것이지만 나조차도 일각 안에 풀어낸 적이 없소.”“그렇소?”운정은 넋이 나간 얼굴로 방휘승을 쳐다보았다.‘뭐야? 자기가 만든 것도 빨리 풀지 못한다고? 그럼 대체 어떻게 이런 물건을 만들 생각을 했지?’어리둥절한 운정의 모습에 운림은 속으로 비웃었다.‘멍청한 것. 이제야 좀 놀랐어? 허풍이 다 드러났지? 주제도 모르고 나대더니 꼴좋다. 네 꼴이 어떤지 보고 좀 나대.’“운정아.”문제가 엄격한 목소리로 호통쳤다.“앉거라.”“아바마마, 소자를 믿으시옵소서.”운정은 문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방휘승에게 말했다.“국사 스스로도 일각 안에 풀 수 없다고 했으니 내기를 하는 게 어떻겠소?”“내기?”방휘승이 피식 웃었다.“무슨 내기를 하고 싶소?”문제는 운정이 나라의 대사를 걸고 내기를 할까 봐 버럭 화를 냈다.“여봐라. 당장 운정을 끌어내거라.”“잠깐만요.”방휘승은 손을 들어 문제를 제지했다.“폐하, 군주는 한 입으로 두말해서는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여섯째 황자가 그래도 황자인데 공개적으로 한 말을 쉽게 거두어들여서야 하겠습니까?”문제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렇다. 군주는 한 입으로 두말해서는 안 되었다. 하여 황제의 아들이 공개적으로 한 말도 쉽게 거두어들여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북성 사절단의 앞에서는 더더욱 안 되었다.문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호위병들을 물리고 경고 섞인 눈빛으로 운정을 째려본 다음 고개를 돌렸다.‘저 어리석은 놈이 국사를 걸고 내기를 한다면 반드시 처형을 내릴 것이다.’그 모습에 운림과 일당들은 비웃으면서 운정이 어떻게 죽을지 지켜보기로 했다.“황자, 어떤 내기를 하고 싶은지 말해보도록 하오.”방휘승은 운정을 가지고 놀겠다는 표정으로 웃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