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 방금 뭐라 그랬어? 내가 소란을 피워?”서윤아가 울부짖자 핸드폰 저쪽에서 통화를 뚝 끊어버렸다.서윤아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냅다 던져 박살 냈다.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아들과 남편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고, 심지어 자기 딸과 외손자까지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크게 실망했다.백건과 남서연을 이어주려고 주변의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녀와 점점 멀어진다고 느꼈다.유승아는 바닥에 부서진 휴대전화 두 대를 주워들고 그녀 곁에 다가와 앉으며 부드럽게 달랬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그러다 몸 상해요. 건이 결혼 문제는 천천히 해결하세요.”“승아야,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서윤아가 긴장하며 묻자 유승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때 정안이 성큼성큼 병실로 들어오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이제 아무 방법도 쓸모 없어요.”병실 안의 두 사람은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정안은 우아하게 걸어 들어와 보온 상자를 손에 들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건이는 이미 재산의 절반을 서연에게 주겠다고 공증을 끝냈어요. 이혼하면 가족 기업 전체가 흔들릴 거예요.”권력과 재산을 중시하는 서윤아는 고함을 질렀다.“누가 허락했어? 이 자식이 감히 반역을 저질러!”서윤아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포악한 기세가 너무 강렬해 침대에서 벌벌 떨 정도였다.정안은 이제 그녀의 어머니를 걱정하지 않았다. 유일한 걱정은 유승아가 계속 파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도시락을 내려놓은 정안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유승아를 마주 보며 비꼬듯 말했다.“승아는 참 끈질긴 애구나. 건이는 이미 서연이와 결혼했으니 너도 이제 정신 차리고 적당한 선을 지켜. 더 이상 건이에게 환상을 품지 마.”유승아가 황급히 설명했다.“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와 건이는...”정안이 차갑게 웃었다.“오해인지 아닌지는 네가 누구보다 잘 알겠지. 거짓 해명은 필요
반년 후.남하준은 국경에서 안성으로 돌아왔다.정안과 반년 동안 떨어져 살면서 그는 그녀에게 언제 국경으로 돌아가냐고, 언제 실험실로 돌아가냐고 수없이 물었다. 비록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정안의 옆에 붙어 있으려 했다.그때마다 정안은 이렇게 대답했다.“난 안성에 남아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요.”무슨 중요한 일인지 정안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남하준은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정안은 묵은 원한과 새로운 원한을 함께 복수하고 있었다.유미의 남편은 횡령으로 고발돼 조사를 받다가 낙마했다.유미는 해외에서 남서연의 납치를 지시한 혐의와 직책 뇌물수수 혐의도 함께 추가되어 체포됐다.부부가 나란히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갔다.반년 동안 걷지도 못한 서윤아도 이 일을 알고 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승아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건은 그들 가족의 기업에 누를 끼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또 한 가지 큰일이 있었다.바로 백건과 남서연의 성대한 결혼식이었다.갑부의 결혼식은 M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에서 진행되었다. 십여 대의 비행기가 몇 번이고 낭만적인 섬으로 향했다.하늘과 바다가 일색이 되어 단조롭던 해변이 낭만적인 꽃바다로 변하고, 땅에 꽃잎이 깔리고, 수천만 개의 현장 장식이 있고, 가장 호화로운 음식과 술이 있었다.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서연도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장을 보게 되었다. 공기조차 꽃향기로 변했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로맨틱함이 가득했다.남서연은 수억 원짜리 웨딩드레스에 수십억 원짜리 주얼리를 착용한 채 멋지게 차려입은 백건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카펫을 밟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결혼식 무대 중앙으로 다가갔다.하객석은 꽉 찼고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남서연은 행복한 눈물을 흘리며 달콤한 미소로 하객석의 부모님과 큰아버지들, 큰어머니들, 그리고 그녀를 20년 넘게 애지중지한 사촌 형제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래. 더 이상 의미가 없지.”“두 사람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야? 난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백건은 부드럽게 웃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넌 알 필요 없어. 가자. 부모님이랑 한잔해.”“그래요.”남서연은 주스를 챙기고 진우석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서윤아와 백정우를 향해 걸어갔다.진우석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젖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서윤아는 휠체어에 앉아 적당한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백건과 남서연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버님, 어머님, 저희가 한잔 올릴게요.”서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남서연을 보았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눈빛이지만 그런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지 그녀를 향한 인정은 아니었다.그녀는 마음속 깊이 여전히 남서연의 능력이 그의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다만 그녀의 편견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그들 부부의 애정 전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백정우는 크게 기뻐하며 격앙되어 잔을 들며 끊임없이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요점은 아이를 빨리 낳으라는 것이었다.남서연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백건은 이미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입술을 오므리고 몰래 남서연을 바라보며 꿀을 먹은 듯 달콤했다.비밀을 지키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하지만, 그의 어린 아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3개월 후, 태아가 안정되면 모두에게 공개하려 했다.그리고 그녀의 체질도 대단해서 임신 증상이 전혀 없었다. 평소처럼 먹고 자고 출근하고, 어지럽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고, 입덧도 하지 않았다.멀지 않은 곳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남하준, 정안 그리고 그들의 아들 남우영.언뜻 보면 그들은 또래처럼 생겼는데 절대 남우영이 성숙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가 선천적으로 미모를 타고났고 또 관리가 너무 잘 되어 젊어 보이는 것이었다.한 명은 늠름한 국방 장군이고, 한 명은 꽃 같은 미모의 화학자이고, 남우영
너무 비정상이었다.그때 남서연과 백건이 다가왔다.세 사람은 사사로운 일을 제쳐두고 백건과 남서연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그들은 덕담도 나누고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흐름이 남우영에게 흘러갔다.“그러고 보니 우리 집안 애들은 전부 결혼했네. 이제 서연이까지 결혼했으니 우영이만 혼자야. 아내는 고사하고 여자친구도 없어.”“엄마, 내 위에 있는 사촌 형들 전부 서른이 넘었어요. 결혼하는 게 정상 아니에요?”“서연이는 너보다 어린 데도 이미 결혼했어!”남하준이 나서서 말렸다.“조금만 더 기다려. 서두르지 말고 서른이 넘으면 다시 말해. 안 되면 마흔에 해도 되고. 혹시 알아? 오십에 할 수도 있잖아. 아직 몇십 년 더 남았어.”남우영은 어두워진 얼굴로 덤덤하게 웃었다.“아빠는 위로를 참 잘해요.”백건은 정안과 남하준의 걱정을 이해하고 위로했다.“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영이는 확실히 여자를 좋아해요. 얘가 어릴 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우영이 갑자기 달려들어 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어깨동무를 한 채 옆으로 질질 끌고 갔다.“삼촌, 내가 할 말이 있어요.”정안은 긴장하더니 흥분해서 앞으로 다가갔다.“어릴 때 뭐? 야! 가지 마. 똑바로 말하고 가!”남우영은 백건을 꼭 감싸고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삼촌이 헛소리하는 거예요.”“분명 뭔가 있네.”남하준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우영에게 비밀이 있네요.”남서연이 목소리를 낮추고 장난스레 중얼거렸다.“작은 아빠, 작은 엄마, 집에 가서 제가 우영 오빠의 비밀을 알아낼게요.”정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아. 서연이 네가 돌아가서 꼭 물어봐.”남서연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성대한 결혼식은 이틀 동안 거행되었다.첫째 날의 주제는 결혼식이었고 둘째 날의 주제는 여행이었다.그리고 이 섬은 백건이 사들여 남서연에게 선물했고 스위트 아일랜드라
안성의 6월은 날씨가 무더웠다.뜨거운 태양 아래, 거리에 행인이 거의 없었다.왕개구리 인형 옷을 입은 한 여자가 커피숍 앞으로 다급하게 다가왔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수십 개의 개구리 ‘자식’들을 구석에 놓고 무거운 개구리‘머리'를 벗고는 땀에 젖은 예쁜 얼굴을 드러냈다. 간판을 올려다보고 큰 눈을 깜빡이며 다급하게 말했다.“아마 여기가 맞을 거야!”개구리 머리를 안고 카페에 들어가 두리번거렸는데 젊은 남자는 한 명뿐이었다.멀리서 보니 얼굴도 아주 잘생겼고 분위기도 우아했다.‘오늘 남자는 좀 괜찮은데? 어쩐지 엄마가 이번에 결혼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하더라니.’여자는 헐레벌떡 걸어 들어가 남자 앞에 앉은 후 매우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일 때문에 방금 도시 관리인에게 쫓기다가 길을 잃었어요. 반 시간이나 늦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소리를 들은 남우영은 고개를 들어 반대편에 앉아 있는 반인 반개구리를 보는 순간 멍해졌고 눈 밑에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놀라움이 언뜻 스쳤다.정장 차림의 남자는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며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그녀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애써 웃으며 설명했다.“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저는...”남자가 덤덤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다은.”이다은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반응하고 말했다.“맞아요. 전 이다은이에요. 저희 이모가 말해줬나 보네요. 그래도 예의상 자기 소개를 더 자세히 해야겠어요.”남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이다은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제 이모가 당신을 소개해줬어요. 저는 전문대 졸업에 올해 26살이고 프리랜서 창업자예요. 연애 경험 제로, 적금 제로, 나쁜 습관도 없고 취미도 없지만 꿈은 있어요.”남우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물었다.“꿈이 뭐죠?”이다은은 개구리 손을 덥석 움켜쥐며 흥분해서 말했다.“제 꿈은 달을 여행하는 우주비행사가 되는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이다은은 여전히 개구리 캐릭터 탈을 품에 안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발견했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남우영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다은은 그를 단순히 맞선남 ‘남우 씨’로만 알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을 애타게 찾는 듯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성큼성큼 다가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물었다.“작은 개구리 탈 하나 제작하는 데 도대체 얼마나 드는데요?”“만... 만원이요.”이다은이 대답하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그러면 고작 만원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거예요?”다소 황당하다는 어투가 담긴 질문에 이다은의 표정이 굳어졌고 목소리에는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마치 고작 몇 푼 때문에 생고생이라도 했다는 식으로 얘기하시네요?”“돈 문제가 아니라면... 그럼 뭐때문에 이렇게 고생하셨단 거죠?”남자가 당황한 듯 다시 묻자, 이다은은 코웃음치며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잘생긴 얼굴이 다는 아니라니까!’조금 언짢았지만 이다은은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고작 만원이 아니에요. 오천 원은 저에게 이틀 치 밥값이기도 하고요. 새벽부터 일어나 두 시간 걸려 도매시장까지 가서 어렵게 가져온 개구리 캐릭터들이에요. 제가 하나하나 기대를 담아 준비한 거라고요. 심지어 단속 공무원들 피해 가며 골목에서 한 시간이나 도망쳤는데 그걸 훔쳐 간 사람이 결국 ‘할머니의 모습’을 한 도둑이었다는 거죠. 제가 그걸 되찾으려고 한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세요?”남우영은 이다은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개구리 캐릭터 탈을 내려놓고 자기 지갑에서 현금을 몽땅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 정도면 오늘 손해 본 건 다 메꿀 수 있겠죠?”그는 이다은이 더 이상 속상해하지 않길 바랐다. 이런 일로 괜히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피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오늘 소개팅을 잘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이다은은 그의 손에 들린 현금다발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남우영을
이다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기쁨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그동안 선을 보면서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집안 형편이 가난하다느니, 학력이 부족하다느니, 성격이 유치하다느니 하며 그녀의 단점을 들춰내기 바빴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그것도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남자가 인정해 주다니... 집이 가난한 건 서로 똑같으니까 오히려 잘된 거야. 적어도 누가 누구를 나무랄 일은 없으니까.’더군다나 이다은의 이모는 이미 그의 고향으로 시집가 그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까탈스러운 이모가 그를 성실하고 착하며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이다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목소리가 낮아졌다.“저도 남우 씨가 맘에 들어요. 우리 그냥 내일 혼인 신고하러 가요.”남우영은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 되물었다.“혼인 신고요? 오늘 선보고 내일 바로 혼인 신고요? 그래도 시간을 두고 서로 좀 더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이다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차피 부부로 살아가는 건 현실적인 문제잖아요. 적당히 맞춰 가면서 살다 보면 되는 거 아닌가요?”남우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살짝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그건 그렇지만...”이다은은 남우영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물론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고 싶으시다면 저도 받아들일게요. 다만... 이모에게서 남우 씨 아버님이 암 투병 중이셨다가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남우 씨의 결혼 문제로 걱정을 많이 하신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남우 씨가 저보다 더 급하신 줄 알았거든요.”남우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우리 혼인 신고합시다.”이다은은 엄청나게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오래된 숙제를 끝낸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필요한 서류 챙겨서 내일 아침 일찍 구청 앞에서 만나요.”남우영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이다은은 남우영이 타고 온 차를 보더니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었다. 그렇게 조수석 문 앞에서 한참 머뭇거리는 그녀를 본 남우영이 다가와 차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다은 씨,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이다은은 차를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몇억은 하는 차 아닌가요? 잘못 긁거나 고장 내면 저희 둘 다 감당 못 해요.”남우영은 잠시 그녀를 보며 생각하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타요. 제가 조심해서 안전운전 할게요.”이다은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차에 올랐다.차가 도로를 달리자, 이다은은 자기 집 주소를 알려주었고, 한 시간이 지나 낡고 오래된 구도심의 허름한 건물 앞에 차가 멈췄다.이다은은 차에서 내린 뒤 남우영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구청에서 봬요.”남우영도 창문을 내려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낡고 허름한 건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다은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의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갔다. 8층 꼭대기 층에 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캐릭터 탈을 구석에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하아... 오늘도 정말 너무 많이 뛰어다녔네.”그때 옥상에서 세탁물을 한가득 담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 다리를 저는 그녀의 아버지, 이적이 내려왔다.“다은아, 이제 퇴근해서 온 거야?”이다은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가 빨래 바구니를 받아들며 말했다.“아빠, 제가 할게요.”이적은 바구니를 건네고 천천히 거실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이다은이 빨래를 하나씩 꺼내 정성스럽게 개기 시작하자, 이적도 옆에 앉아 빨래를 개며 무심히 물었다.“다은아, 요즘엔 선 봤던 남자 안 만났어?”이다은은 빨래를 개던 손을 멈추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빠, 저 결혼하려고요.”이적은
이다은은 부엌으로 들어가 채소를 다듬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아빠, 여기 제가 할게요. 아빠는 나가서 좀 쉬세요.”이적은 손을 멈추고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하루 종일 일하고 왔잖아. 피곤할 텐데 내가 할 테니 너라도 좀 쉬어.”“저 안 피곤해요.”이다은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이적을 부축해 부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오늘 저녁은 제가 할게요.”이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부탁할게.”이적은 다리가 없어 과거에는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이동했지만, 몇 년 전 몇백만 원을 들여 의족을 맞췄다. 그러나 품질이 나빠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지금도 오래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프고 걸을 때마다 절뚝거렸다.그는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쉬었고 이다은은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했다.30분 뒤, 간단한 두 가지 반찬과 밥 두 그릇이 식탁 위에 놓였다.“아빠, 밥 먹어요.”이다은이 부르자 이적은 식탁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아 식탁 위 음식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이다은은 자리에 앉아 젓가락으로 삼겹살 한 조각을 집어 아버지의 밥그릇에 넣으며 말했다.“아빠, 드세요.”그러나 이적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를 본 이다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요? 어디 안 좋으세요?”이적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다은아, 너 혹시 뭐 잊은 거 없니?”“제가요? 뭘요?”이다은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이적은 웃으며 말했다.“혹시 네가 결혼한 거 깜빡한 거 아니야?”이다은은 순간 멍해졌다.‘아차! 깜빡했네!’결혼했다는 사실이 아직 마음에 와닿지 않은 그녀는 늘 하던 대로 두 사람 분량의 반찬만 준비한 것이었다.그녀는 당황하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서둘러 말했다.“제가 얼른 계란이라도 더 부칠게요. 계란후라이 괜찮으시죠?”“좋지. 몇 개 더 부쳐. 남우는 체격도 크고 잘 먹게 생겼더라.”이적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다은은 부엌으로 들어가 계란 여섯 개를 부쳤다. 계란 후라이를 들
“나 정말 바빠. 너희 부부 문제에 신경 쓸 시간도 없으니까 제발 나를 끌어들이지 말아줘.”이다은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마치고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갔다.소이현은 울먹이며 등 돌려 돌아가며 중얼거렸다.“이혼하고 싶은 거면 얘기해. 애도 필요 없어.”정하늘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남우영을 향해 쏘아붙였다.“다은이는 아무 남자나 만나서 결혼할 사람이 아니에요. 이건 분명 나한테 복수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그는 말을 끝내고 소이현을 쫓아갔다.남우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이다은은 집에 돌아와 더럽게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불공평해도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고 울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낙타도 마지막 한 줌의 짚에 짓눌려 무너진다더니... 나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건가 봐.’정하늘과 소이현을 만날 때마다 이다은의 마음은 찢어질 듯한 고통으로 무너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여전히 정하늘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고, 그 사실이 더욱 그녀를 아프게 했다.눈물을 훔친 뒤, 이다은은 큰 짐을 챙겨 거리로 나섰다. 생계를 위해 길거리 장사를 시작해야 했지만 이번에도 불운은 그녀를 비껴가지 않았다.물건을 진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단속반이 들이닥쳐 그녀의 모든 물건을 몰수해 버렸다. 남은 것은 텅 빈 손과 벌금 고지서 한 장뿐이었다.“물건을 되찾고 싶으면 사무소로 와서 각서를 쓰고 벌금을 내세요.”단속 공무원은 형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몰수된 물건의 가치는 200만 원 이상이었고, 이를 되찾으려면 100만 원의 벌금을 내야 했다.이다은은 벌금 고지서를 손에 쥔 채 도로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속에서 마음은 텅 비었고,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웠다.바람이 살짝 불어오며 그녀의 머리칼을 흩날리자, 마음 한쪽에는 싸늘한 허탈감이 스며들었다.‘사는 게 왜 이렇
이다은이 뒤돌아보자, 정하늘이 손수건을 꺼내 들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 얼굴의 물기를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우리 여전히 가장 좋은 친구잖아...”이다은은 급히 손수건을 받아 들며 불편한 표정으로 답했다.“임신한 아내 두고 이렇게 쫓아오면 어쩌라는 거야? 하늘아,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정하늘은 당황한 듯 말했다.“그냥 네가 걱정돼서 온 거야.”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긴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누가 또 괴롭히면 바로 나한테 말해. 내가 항상 널 지켜줄게. 난 여전히...”“필요 없습니다!”이다은 대신, 누군가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낯선 발걸음 소리가 계단 아래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다은과 정하늘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검은색 수트를 입은 남우영이 계단을 내려오며 우아하고 품격 있는 분위기를 풍기며 등장했다. 몇 번 본 적 있는 모습이었지만, 이다은은 다시 한번 그의 멋진 모습에 숨이 멎는 듯했다.남우영은 그녀에게로 다가와 젖은 어깨를 한 팔로 가볍게 감싸며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고 곧은 자세에서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느껴졌다.“내 아내는 내가 지킬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이다은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심장이 요동치고 몸이 굳어졌다. 그의 품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정하늘은 충격을 받은 듯 남우영을 바라보다 이다은에게 시선을 돌렸다.“너 결혼했어?”이다은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황당해하고 있자, 남우영이 대신 담담히 대답했다.“네. 저희는 이미 결혼했습니다.”남우영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이다은은 정신을 차리며 그의 품에서 황급히 벗어났다.“괜찮아요. 남우 씨는 출근 준비 중 아니었어요?”정하늘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고 이를 악물며 분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다은아, 나한테 네 남편 소개 정
이다은의 얼굴에 물을 끼얹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큰어머니였다. 큰어머니는 눈에 살기를 띤 채 목소리를 높였다.“이다은, 가서 네 엄마한테 전해! 한 번만 더 우리 아들한테 귀찮게 굴면 가만 안 둔다고!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고!”이다은은 화를 삼키며 얼굴에 범벅진 더러운 물을 손으로 닦아냈다.큰아버지 가족이 집안 조상 대대로 물려준 집을 강제로 빼앗았을 때도, 부모님이 큰아버지 부부와 법정까지 가며 싸웠을 때도 그녀는 입을 닫고 참았다. 하지만 이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장애를 가졌고 어머니도 능력 없으며 그녀 또한 힘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끝없이 괴롭혀 왔다.지금까지의 다툼은 묵묵히 견뎠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에게 직접 더러운 물을 끼얹는 모욕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조상 대대로 내려온 집도, 내 자존심도 모자라 이제는 좋아했던 남자까지 뺏겼고... 내 인생이 이렇게 실패로 끝날 운명인 거야?’이다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큰어머니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리고 그녀를 곧장 더러운 물이 고인 도랑 쪽으로 끌고 갔다.“아야! 아야야야! 이 계집애가! 어디 어른한테! 이거 좀 놔! 아프다니까!”큰어머니는 이다은이 여느 때처럼 참기만 할 줄 알고 있었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끌려갔다.이다은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악취가 나고 온갖 오물이 떠다니는 얕은 도랑 속으로 밀어 넣었다.큰어머니는 도랑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고 이내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랑에 빠진 큰어머니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울부짖었고 이를 본 이웃들은 이다은을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이다은은 주변의 시선을 견디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집!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집을 강제로 빼앗은 건 사실이잖아요. 이미 빼앗겼으니 되찾을 방법은 없겠죠. 하지만 적어도 조용히 살았어야 하지 않나요? 제가 착하다고 만만하게 보지 마세요. 계속해서 우리 가족들을 괴롭히면 저도 어찌 될지 몰라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경고할게요. 우리 가족 괴롭히지 마세요.
“그럼 당신은요? 전에 만났던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데요?”이다은은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복잡한 감정이 어렴풋이 스쳐 가는 눈동자를 살짝 떨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런 거 없어요.”그 짧은 대답이 무겁게 가라앉아 방 안 공기마저 달라진 듯했다. 남우영은 그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며 어색한 기운에 휩싸였다.“없다니요... 좋아했던 사람은 있었죠?”이다은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어차피 같이 살기로 한 거 우리 서로 배신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 과거 얘기는 묻지 말죠?”남우영은 이상하게 가슴이 쿡쿡 쑤셨다.‘역시.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던 거야. 그런데 그 사람과는 이어질 수 없으니 다른 남자랑 적당히 맞춰서 살겠다는 거지.’그는 입술을 깨물며 마음이 뒤틀리는 기분을 참았다.“하지만 이 과거 얘긴 누가 먼저 꺼냈죠?”“미안해요.”이다은의 사과에도 남우영은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짝사랑이었어요? 몰래 좋아했던 건가요?”이다은은 대답 대신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들며 차분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씻고 올게요. 당신은 짐 정리나 하세요.”그녀는 잠옷을 품에 안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는 벽에 기대 깊게 숨을 내쉬었고 가슴 한편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그리고 또다시 그 이름이 떠올랐다.‘정하늘...’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 함께 자라다 보니 두 사람은 천천히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었지만 연인이라 부르기엔 애매해진 관계가 되어버렸었다.정하늘은 언젠가 ‘우리 둘 다 서른 될 때까지 짝을 못 찾으면 그때 결혼하자.’라고 말했었다.이다은의 가장 친한 친구는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을 알고도 정하늘을 유혹했다. 그리고 결국 그와 관계를 해 혼전임신을 이유로 결혼까지 해버렸다.그 일이 이다은이 서둘러 결혼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늦은 밤, 작은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함이 가득했다.남우영
“나도 아빠한테 정장 한 벌 해드리고 싶거든요. 아빠는 평생 정장을 입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이다은의 말에 옷 정리 중이던 남우영은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가슴 한쪽이 저릿해졌다.‘얼마나 소박하게 살아왔으면 정장을 한 번도 못 입어봤다는 게 당연하다고 느낄까...’이다은은 남우영의 의아한 표정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정장 입을 일이 없어요. 예의를 갖춰야 할 자리라 해도 단정하게만 입으면 되니까요.”“부모님 결혼하실 때도 정장 안 입으셨어요?”이다은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그때도 우리처럼 그냥 혼인 신고하고 가족끼리 밥 한 끼 먹고 끝냈대요.”남우영은 옷장에 등을 기대고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다은 씨는 결혼식하고 싶지 않아요?”이다은은 그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아니요! 절대 그런 돈 들고 힘든 일은 하지 말아요. 저는 필요 없어요.”“세상에 결혼식을 원하지 않는 여자가 있다니...”그의 말에 이다은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는 결혼식 필요 없어요. 대신 돈 모아서 우리만의 집을 사는 게 훨씬 좋아요. 그게 더 소중하잖아요.”남우영은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며 조용히 말했다.“다은 씨 아버님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어요. 옛날얘기지만...”“혹시 아빠가 또 M국 장군 아들이 저한테 차였다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한 거예요?”남우영은 잠깐 멈칫했다.이다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맨날 그 얘기 하세요. 그냥 농담처럼 듣고 넘기세요. 별일 아니니까...”“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예요?”남우영은 손을 천천히 주먹 쥐며 진지하게 물었다.이다은은 그의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가방을 정리하며 태연히 대답했다.“무슨 생각이긴요. 그냥 웃겼어요. 같은 반도 아닌 옆 반 남자애가 러브레터를 주는데 어찌나 유치하고 웃기던지...”“만약 그 아이가 지금 다시 고
남우영은 웃어야 할지 한숨을 쉬어야 할지 몰랐다.그의 굳은 표정을 본 이적은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는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남우야, 오해는 하지 말거라. 그냥 옛날이야기 좀 꺼내서 농담한 거야. 우리 딸이 그땐 어린애라 공부밖에 몰랐지, 연애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니까. 지금 와서 웃자고 한 얘기일 뿐이야.”“이해합니다.”남우영이 계속해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이적은 남우영에게 차를 따라주며 덧붙였다.“남우야, 다은이 이모가 사람 보는 눈은 끝내준다고 생각해. 다은이 이모가 괜찮은 청년이라 했으면 틀림없을 거야. 우리 가족은 큰 기대 없어. 그냥 너랑 다은이랑 서로 잘 지내면서 행복하게 살면 그걸로 충분해.”“아버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남우영은 자신 넘치는 표정으로 답했지만 처가댁에서는 자신을 ‘남우’로 믿으며 품고 있을 기대와 믿음을 떠올리니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그는 이다은이 결혼 얘기를 처음 꺼냈던 순간 큰 충격을 받았었다.‘만약 내가 이다은에게 내 정체를 고백하면 나를 떠나겠지? 그리고 진짜 남우라는 사람을 찾아가 결혼할 거야.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난 같은 선택을 할 거야.’남우영은 그녀와의 재회가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소개팅하고 결혼을 논의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의 마음은 복잡하고 괴로웠다.저녁 식사 시간.저녁이 준비되자 가족은 식탁에 모였다. 소박한 반찬 몇 가지와 국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식사였다.식사를 시작하며 신혼을 축하하는 덕담과 건배가 이어졌고 남우영은 종일 긴장한 탓에 입맛이 별로 없어 조금만 먹었다.식사 후 이다은은 그의 캐리어를 방으로 끌고 갔고 남우영은 그녀를 따라 방 안을 둘러보았다.방은 좁고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책더미와 컴퓨터가 놓여 있고, 한쪽에는 큰 옷장이, 다른 한쪽에는 폭 1.5미터 정도 되는 침대가 자리 잡아 몸을 돌릴 공간조차 없어 보였다..“방에 화장실은 없어요?”남우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다은과 부모님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밝게 미소 지으며 정중하게 말했다.“정말 고맙네. 마음에 쏙 들어...”“괜히 이렇게까지 신경 다 쓰시고... 쓰고! 허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저도 너무 좋아요. 남우 씨, 고마워요.”이다은은 미소 지으며 남우영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그의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남우’의 아버지는 암 투병 중이고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남우’는 홀로 안성에서 힘겹게 자리 잡고 살아가고 가여운 청년으로 알고 있었다.이다은은 문득 그가 얼마 전 자신의 지갑 속 현금을 모두 내어주었던 일을떠올랐고 설령 이 선물들이 짝퉁이라고 해도 그의 진심과 정성을 높이 사고 싶었다.이다은은 선물을 어머니에게 건네며 말했다.“엄마, 아빠랑 얘기 나누세요. 저는 저녁 준비할게요.”남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돕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요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주방에 들어가면 금세 들킬 것이 뻔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김연아가 그의 팔을 붙잡고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아이고, 남우는 앉아서 아버님이랑 얘기 나누고 있어. 내가 다은이를 도와 준비하면 돼.”남우영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이적에게 차를 따라주며 대화를 이어갔다.이적은 남우영의 직장과 삶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자동차 판매 일은 어떤가? 수입은 괜찮아? 근무 시간은 길지 않나?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세웠나?”남우영은 미리 준비한 덕분에 차분히 대답할 수 있었지만 내심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결혼 사기’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내가 사기 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진짜 남우라는 사람이었겠지. 그리고 이다은의 남편도 내가 아니었을 거고...’이적은 다시 남우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감탄하며 말했다.“남우야, 참 희한한 게 말이야.”“네? 뭐가요?”“남우를 보면 볼수록 내가 예전에 모셨던 남 장군님이 떠오른단 말이야. 훤칠한
김연아는 갑자기 나타난 남우영을 보고 깜짝 놀라 눈물도 멈춘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청년이 네 남편이라고?”속으로는 더 혼란스러웠다.‘너무 잘생긴 거 아니야? 한눈에 봐도 기품이 넘치는 귀공자 같은데.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반듯한 청년이잖아. 이런 청년이 내 딸 남편, 내 사위라고? 이게 말이 돼?’이적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남우 씨, 어서 들어와요. 환영합니다.”“감사합니다. 아버님,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어머님도요...”남우영은 여행용 가방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방 안의 낡고 허름한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아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김연아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환한 얼굴로 부엌으로 달려가 분주한 손길로 과일을 준비했고 이적은 소파에 앉은 남우영을 유심히 살피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남우영은 축축해진 손바닥을 느끼며 등까지 뻣뻣해졌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몸을 움츠렸다.‘상견례는 처음이라... 장인, 장모를 뵙는다는 게 이렇게 떨리는 일이었구나...’잠시 후, 이적이 긴 숨을 내쉬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남우야, 예전에 내가 모셨던 상사랑 참 많이 닮았어. 기품 있고 딱 봐도 훌륭한 분 사내 같아 보이네.”남우영은 그의 말에 속으로 더 긴장했다.‘설마... 내가 누군지 벌써 알아보신 건 아니겠지?’그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공손하게 물었다.“아버님은 예전에 어디서 근무하셨었나요?”이적은 아련한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다 지난 일이니 그런 얘긴 하지 말자고.”그때 이다은이 김연아가 준비한 과일을 받아 들고 와 남우영에게 건넸다.“남우 씨, 과일 드세요.”남우영은 두 손으로 차를 받아 들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감사합니다.”이다은은 밝게 웃으며 덧붙였다.“우리 아빠 옛날엔 군인이었어요. 국경 수비대에서 근무하다 다쳐서 퇴역하셨거든요.”남우영은 놀란 척하며 말했다.“아, 그러셨군요!”그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