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는 언제나 즐거웠다.동거 첫날, 그들은 출근하지 않고 아침에 한 번, 점심을 먹고 서재에서 또 한 번 했다.피곤하면 껴안고 낮잠을 잤다.저녁이 되자 날이 저물었다. 샤워를 끝낸 남서연은 다시 침대에 눌려 격정에 휩싸여 밤늦게까지 열기가 넘쳤다.그들은 마치 평범한 연인들처럼 미친 듯이 뜨겁고 방종하게 서로의 가장 사적인 접촉을 즐겼다.몸과 마음이 에너지를 최대치로 방출했을 수도 있고 잠을 너무 많이 잤을 수도 있다.밤이 되자 남서연은 깨어나 휴대폰을 들어 보니 휴대폰이 꺼진 상태였다.어쩐지 하루 종일 전화가 없더라니.가족들이 다 그녀를 걱정 안 하는 줄 알았다.그녀가 전원을 켜니 십여 개의 부재중 전화가 모두 진우석에서 걸려왔고 많은 메시지가 있었다.그녀 어머니의 메시지도 있었다.[서연아, 왜 전화를 껐어? 건이가 너 잘 있다면서 나더러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 그래도 내 메시지를 봤으면 답장을 해야지. 우석이가 집에 너 찾으러 왔는데 아주 다급해 보이더라고.]남서연은 어머니의 메시지에 답장했다.[엄마,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요.]이윽고 침대에서 내려와 베란다 밖으로 나가 진우석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울리자 진우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연아, 너 어디야? 왜 하루종일 내 전화도 안 받고 답장도 안 해? 가족들이 너 집에 살지 않는다고 하던데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어디...”남서연이 즉시 말을 끊었다.“그만그만. 단숨에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답을 해요?”진우석은 심호흡을 한 후 이성을 찾고 물었다.“너 어디야?”“약혼자 집이요.”진우석이 불쾌하게 물었다.“백건의 집?”“네.”“두 사람 같이 살아?”“네.”진우석은 꾹 참으며 화를 냈다.“남서연, 너 미쳤어?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 같이 살아? 너 왜 이렇게 변했어? 너 원래 그런 애 아니었잖아?”남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예전에 매우 고분고분한 스타일이었지만 결코 보수적이란 뜻은 아니었다.그녀는 혼전 성관계를 받아들
백건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품에 안았다.그는 남서연의 나른한 몸을 안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과 초조함을 몰래 털어냈다.그의 관대함은 가장한 것이고 그의 이해도 가짜였다.마음속 깊은 곳에서 남서연이 진우석과 왕래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비록 순수한 우정일지라도 그는 질투하고 발광할 것이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그러나 남서연의 앞에서 자신이 인색하고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적어도 결혼하기 전에는 너무 많은 결점을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했다....햇살이 좋은 아침.진우석이 찾아왔다.별장 앞마당에서 남서연이 백건과 나란히 걸어 나오자 진우석이 성큼성큼 다가와 두 사람 사이로 다가왔다.마주친 두 남자는 서로 인사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 사이의 분노가 은근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눈빛의 파도가 소리 없이 밀려왔다.“왔어요?”남서연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진우석이 남서연을 바라보더니 눈빛이 부드러워졌고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 차량을 향해 끌고 갔다.“가자. 차에 타.”“어디 가려고요?”“묻지 말고 따라오면 돼.”남서연은 끌려가면서 고개를 돌려 백건에게 인사하고 싶었지만 진우석이 너무 빨리 당겨서 그대로 차에 밀어 넣었다.백건은 시종일관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진우석은 차량에 시동을 걸고 유턴해서 떠났다.백건을 노려보며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주먹이 다 깨지게 생겼으면서 젠틀한 척하기는. 정말 가식적이야.”그 말을 들은 남서연은 크게 당황했다.차창을 내밀고 고개를 내밀어보니 역시나 백건은 곁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주먹을 꽉 쥐고 분노가 은근히 배어 있었다.그녀가 백미러를 통해 뒤를 보니 그들이 이미 멀리 갔지만 백건은 여전히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냉엄한 카리스마가 사람을 얼릴 정도였다.남서연은 속으로 불안해졌다.그녀가
남서연은 완전히 어이가 없어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며 계속 묻지 않았다.1시간 뒤.차량이 고급 단지로 진입했다.어느 호화로운 고층 주택 아래에 차를 세운 후 진우석은 남서연을 단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남서연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진우석에게 이끌려 호화로운 단층 스위트룸으로 들어가 그 집의 주인을 만나자 기분이 싹 가라앉았다.진우석이 그녀를 데리고 만나러 온 사람은 유미였다.바로 유승아의 고모.유미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해 정중하게 그들을 안으로 초대하고 도우미에게 다과를 부탁했다.남서연은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마음속 깊이 진우석을 목 졸라매고 싶은 심정이었다.진우석이 그녀를 데리고 유미를 만나러 올 줄은 정말 몰랐다.인사말 몇 마디를 나누고 유미가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서연아, 오해하지 마. 아줌마는 승아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단지 네 친구인 우석이가 승아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지만 승아가 아무것도 몰라 나를 찾아온 거야.”남서연이 어색하게 웃었다.“너도 알다시피 아줌마 남편의 관직은 누군가를 조사하는 일이 아주 쉬워.”남서연은 이를 깨물고 진우석에게 물었다.“백건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한 거예요?”그러자 진우석이 당당하게 말했다.“맞아. 내가 승아에게 부탁해서 유미 씨가 이미 철저하게 조사했어. 이제 그 남자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봐.”남서연은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며 괴로운 감정을 달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좋아요. 어디 한번 다 말해보세요. 백건이 나의 대학과 유학에 손을 쓴 것 외에 또 어떤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죠?”유미는 일어나서 서재로 들어가더니 곧 자료 뭉치를 가지고 나왔다.그녀는 남서연 앞에 앉아 자료를 펼쳐 들고 문서 한 장을 건넸다.“이건 백건이 정자를 보관한 병원이야.”남서연은 주먹을 꽉 쥐고 버럭 화를 냈다.“이건 철저한 개인 정보지 않아요
남서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일기가 이것 하나 뿐은 아니겠죠? 다른 것도 보여주세요.”유미가 진지하게 말했다.“다른 건 너와 상관없는 거라 중요하지 않아. 이 페이지뿐이야.”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자료를 내려놓고 물었다.“다른 건요?”“이걸로 부족해?”진우석이 화를 내며 묻자 남서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부족해요.”진우석과 유미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예상을 빗나간 남서연의 반응이었다.남서연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건이 오빠가 언제부터 내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요. 아마 나를 좋아했으니 내가 아이를 낳아주길 바란 거겠죠?”진우석은 화가 치밀어 손가락으로 남서연의 머리를 쿡 찔렀다. “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 자식은 고등학교 때부터 너를 노렸어. 대학교 진학을 방해하고 네 출국도 막았고 네 주변의 이성 친구도 피해를 봤어. 나도 그 피해자라고.”남서연이 호기심에 물었다.“오빠가 왜 피해자예요?”진우석이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내가 무료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건 백건이 몰래 돈을 줘서 얻은 기회였어. 우리를 갈라놓으려는 목적이었지.”“우리를 갈라놓는다고요? 우리가 연인도 아닌데 왜 갈라놓아요?”“그러니까 무서운 인간이라는 거야!”유미가 남서연을 보고 또 진우석을 보더니 말했다.“더 무서운 건 뒤에 있어.”말하면서 그녀는 다시 한 묶음의 사진을 꺼내 남서연에게 건네주었다.“마음이 좀 뒤틀린 애야.”유미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연아, 충동적으로 결정하지 말고 다시 신중하게 고려해봐.”남서연이 사진을 넘겨받았다.그녀는 한 장 한 장 사진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고 가슴이 먹먹해졌다.남서연이 어린 시절부터 전부 은밀한 각도에서 몰래 찍힌 사진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든 전부 몰래 찍혀 있었다.심지어 그녀가 자는 사진도 있었다.모든 사진이 아름다운 건 아니었다. 그녀가 치마를 입었을 때 다리와 가슴 부위에 초점을 맞춘 사
남서연이 백건을 사랑한다고?그럼... 방금 백건을 변태처럼 포장해서 남서연이 겁을 먹고 떠나기를 바랐던 노력은 무엇인가?이제 보니 이 모든 건 도움의 손길에 지나지 않았다.유미는 다시 진우석을 바라보며 그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녀에게 남서연은 백건을 좋아하지 않고 단지 속았을 뿐이라고 했다.진우석은 이마를 짚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쓰러져 더 이상 설득할 힘이 없었다.남서연이 유미를 보며 말했다.“혹시 승아 언니도 오빠가 이런 사람이란 거 알아요?”유미가 어색하게 말했다.“당연히 알지. 승아는 똑똑해서 이렇게 무서운 남자를 선택하지 않아.”“그럼 다행이네요. 이런 무서운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저에게 남겨주세요.”진우석은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남서연!”남서연은 화들짝 놀라 경악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무섭게 내 이름을 불러요?”“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한 줄 알아? 그동안 배운 지식과 지혜들은 전부 어디 가고 지금 바보 멍청이 같은 말을 해? 백건에게 홀려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바보 같다고!”남서연은 진우석의 매서운 말에 울다가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 “난 그저 한 사람을 좋아했을 뿐인데 왜 그렇게 심하게 말해요? 백건이 몰래 내 사진을 찍고, 나와 잠자는 환상을 갖고, 내가 아이를 낳아주길 바라고, 심지어 악의적으로 이성을 쫓아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빠와 함께 가는 유학을 막은 이 모든 것들! 오빠가 보기에 이 모든 일은 끔찍하고 비뚤어진 거겠죠. 하지만 난 백건이 몇 년 동안 줄곧 나를 짝사랑하고 있는데 내가 그 마음을 몰라줘서 백건이 그렇게 맘고생 한 줄 몰랐어요. 그래서 난 지금 너무 슬프고 마음이 아프고 감동 받았다고요.”유미는 코웃음을 치고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일어서서 거실을 나갔다.진우석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을 잇지 못했다.남서연은 코를 훌쩍이고 눈물을 닦고 말했다.“백건이 나를 짝사랑하는 줄 알았다면 몇 년 전에 내가 먼저 고백해서 진작 만났어요.
말을 마친 남서연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났다.그녀는 길목을 벗어나 택시 한 대를 잡고 회사로 돌아갔다.하루 종일 그녀는 마음이 무거웠다.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녀는 정안에게 전화를 한 통 걸었다.멀리 변경에 있는 정안은 남서연의 전화를 받고 매우 의외였다.그녀가 보고 싶어 전화를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도움 요청이었다.남서연은 불쾌해하며 물었다.“작은 엄마의 엄마는 대체 왜 그래요? 오빠 일기를 훔쳐보고 승아 언니에게 보여주기까지 했어요. 왜 계속 오빠에게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고 강요하는 거예요?”남서연은 말하다가 사무실에 엎드려 몰래 울었다.백건이 너무 안쓰러워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정안은 의혹스러운 듯 물었다.“서연아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지금 합세해서 나와 건이 오빠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해요. 너무 슬퍼요.”“누가 그러는ㄴ데?”“건이 오빠 엄마와 유승아의 고모요.”정안은 경악했다.“우리 엄마와 유미가?”“네.”“서연아 울지 마. 건이가 다 해결할 테니까 넌 겁먹을 것 없어. 건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너를 사랑해. 절대 쉽게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 누구도 두 사람을 갈라놓지 못해. 그러니까 너도 절대 흔들리지 마.”“작은 엄마, 나 너무 무서워요. 아줌마가 계속 나 안 받아주면 어떡해요? 오빠와 같이 아줌마를 만나러 갈 용기도 없어요.”정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윤아의 고집, 유미의 더러운 수단과 유승아의 여우 짓을 생각하니 남서연이 너무 안타까웠다.정안은 생각하다가 말했다.“서연아, 겁먹지 마. 우리 부모님은 그래도 널 많이 좋아하셔. 다만 건이의 결혼을 이익으로만 계산해서 장단점을 재고 있는 거야. 승아가 건이 아내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셔. 진심으로 승아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승아가 가진 권력과 능력이 마음에 드신 거야.”“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저를 받아주실까요?”정안이 싱긋 웃었다.“일부러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건이가 계속 너를
남서연은 덤덤하게 말했다.“네. 하지만 당신만큼 중요하지 않아요.”“그 자식이 나랑 헤어지라고 했지?”남서연은 침묵했다.그러자 백건은 괴로워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천천히 팔에 힘주어 그녀를 더 꽉 안았다. 눈을 감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서연아,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절대 나와 헤어질 생각하지 마. 내가 너를 잡은 이상 절대 놓지 않을 거야.”남서연은 마음이 괴로웠고 그의 마음속 깊이 숨겨둔 짝사랑이 너무 안쓰러웠다.그녀도 마찬가지로 백건을 짝사랑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너무 순수하게 그를 사랑하는 마음 외에는 그 어떤 노력도 대가도 치르지 않았고 심지어 넘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남서연은 손을 뻗어 백건의 목을 걸고 발끝을 세워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비밀 하나 말해줄까요?”백건은 궁금한 마음에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다가가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나 사실 10년 넘게 짝사랑한 남자가 있어요.”남서연이 속삭이자 백건은 몸이 뻣뻣해져서 멍해졌다.그는 안색이 돌변해 남서연의 손목을 두 손으로 잡아당겨 목에서 빼고 거리를 두면서 덤덤하게 말했다.“듣고 싶지 않아.”남서연은 갑자기 차가워진 그의 안색에 놀랐다.백건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겨 식탁을 돌아보며 물었다.“아직 저녁 안 먹었어?”“아직이요.”남서연은 마음이 좀 아팠다. 방금 그 좋은 분위기에서 백건에게 고백하고 싶었는데 지금 그의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였다.“앞으론 나 기다리지 마. 나 제때 밥 챙겨 먹지 않아서 저녁은 안 먹는 날이 더 많아.”남서연은 억울해하며 말했다.“아.”백건은 양복 재킷을 벗고 식탁으로 향했다.“내가 음식 데울 테니까 같이 먹자.”백건은 음식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고 남서연이 천천히 따라갔다.그는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넣었고 남서연은 주방 입구에 서서 그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두 손으로 연단을 받치고 고개를 숙인 채 음식을 기다리는 그의 온몸에는 은은한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남서연은 용기를 내어 걸어가
“나 당신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진심으로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고요.”남서연이 진지하게 대답하자 백건은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잡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그의 진한 키스는 매우 뜨거웠다.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바짝 끌어당겼는데 그녀를 마음속 깊이 새겨넣고 싶어 했다.그들은 부엌에서 키스를 나눴다.거실에서 남우영이 들어와 사방을 기웃거렸다.그는 주방 문으로 가서 휙 스쳐 지나갔는데 어색하고 난처한 듯 즉시 몸을 돌려 나가며 큰소리로 외쳤다.“삼촌!”남서연은 소리를 듣고 백건을 밀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지고 숨을 헐떡였다.“우영 오빠 목소리에요.”아직 키스에 취한 백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신경 쓰지 마.”“안 돼요!”남서연은 두 손으로 백건의 가슴팍을 힘껏 밀었고 백건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남서연이 먼저 주방을 나갔다.거실에 도착한 남서연은 남우영의 의미심장한 표정과 놀리는 듯한 눈빛을 보고 왠지 모르게 수줍고 당황했다.“오빠 무슨 일이에요?”남서연은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남우영은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답했다.“네가 잘 지내는지 보려고 왔지.”남서연이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나 잘 지내요.”“그럼 됐어. 우리 엄마의 뜻을 받들어 내가 너와 삼촌이 무사하게 결혼할 수 있도록 도울 거야.”남서연이 의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남우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가 나더러 내일 너를 데리고 우리 외할머니 만나러 가서 결혼에 대해 상의하라고 하셨어.”남서연이 긴장해서 돌아보자 백건이 음식을 들고나와 식탁에 올려놓았다. 남우영의 말을 들은 그는 걸어와 덤덤하게 말했다.“아직은 때가 아니야.”남우영이 불쾌하게 말했다.“삼촌, 이건 피할 수 없는 거야. 서연이 언젠가는 우리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만나야지.”백건은 남서연이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는 걸 원치 않았다.“만날 필요 없는 사람은 안 만나면 그만이야.”
“남우 씨, 어느 부동산에서 일하세요?”한 동창이 궁금한 듯 묻자, 남우영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히 대답했다.“퇴근 후엔 업무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중개사가 연락처를 안 준다고?’‘퇴근 후엔 공적인 얘기를 안 한다고?’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이다은조차 남우영의 태도가 평소와 달라 살짝 의아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남편 지금 자존심 세우는 건가? 이런 사람들한테 굳이 잘 보이려고 굽신댈 필요 없지... 역시 대단해!’남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집이 좀 멀어서요. 다은 씨를 먼저 집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네요.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그는 말을 마치고 이다은의 가방을 들어 어깨에 걸치고 그녀의 손을 이끌며 방을 나섰고, 나가면서 호텔 매니저가 준비한 와인도 잊지 않고 챙겼다.남우영과 이다은이 방을 나가자, 몇몇 동창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몰래 따라 나갔다.‘진짜 저 와인 가져가나 보자.’그들은 남우영이 1억 4천만 원짜리 와인을 들고 호텔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안진호는 남우영이 말한 반값 세일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 계산서를 받아서 들었다. 예상대로 호텔 측은 남우영의 말 한마디로 정확히 50% 할인된 금액을 청구했다.안진호는 충격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대체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이 호텔이 그 사람 말 한마디에 반값을 해주다니... 말도 안 돼!”다른 동창들도 궁금한 얼굴로 소이현에게 물었다.“이현아, 너랑 다은이는 제일 친했잖아? 남편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소이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뭘 알겠어... 그냥 시골 출신에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아버지는 희귀 난치암 말기라고 들었어.”그 말을 들은 동창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했다.호텔을 나와 대로변으로 걸어가던 두 사람 앞에 검은색 고급 세단이 멈췄다. 운전기사가 내려 차 문을 열며 공손히 말했다.
“전에 고객이랑 마시다 남은 건데 다 못 마셔서 호텔 셀러에 맡겼었어요.”남우영은 앞에 놓인 와인을 들어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이런 와인은 입에 댈 수조차 없어서요...”안진호가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400만 원짜리 와인이 입맛에 안 맞는다고? 막걸리만 마셔서 그런 거 아니야?”그의 비웃음에 몇몇 사람들이 몰래 웃었다. 모두가 남우영이 곧 창피를 당할 거라 기대하며 분위기를 지켜보았다.그때 호텔 매니저가 작은 카트를 끌고 들어왔고 모두의 시선이 매니저와 그가 들고 있는 와인으로 쏠렸다.매니저는 와인을 조심스럽게 꺼내 남우영 앞에 놓으며 공손히 물었다.“대표님, 지금 오픈할까요?”남우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매니저는 숙련된 손길로 와인 오프너를 집어 들었다. 코르크가 완전히 빠지는 순간, 특유의 깊은 소리가 방 안에 은은하게 울렸다.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와인이 완벽히 디캔팅 된 순간, 매니저는 잔에 한 모금 따라 살짝 스월링하며 와인의 향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았다.와인을 여는 매니저의 움직임이 마치 의식처럼 느껴졌고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인 채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이다은은 술을 마시지 않아 와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방 안 사람들의 과장된 표정을 보며 무언가 대단히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그녀는 남우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이 와인, 얼마짜린데요?”남우영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비싸진 않아요. 하지만 돈 있다고 아무나 살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사람들이 놀라는 거예요.”이다은은 그의 말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매니저는 와인 잔에 소량의 와인을 따라 남우영에게 건넸다. 남우영은 잔을 받아 들고 이다은에게 건넸다.“마셔볼래요?”이다은은 급하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저는 술을 못 마셔서요.”남우영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마시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매니저님께 한 잔씩 부탁드리세요.”안진호
남우영의 선천적인 우아함과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그를 평범한 영업사원으로 연상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방 안의 사람들은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았고 이다은은 남우영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그냥 가요.”그녀는 남우영이 이 무례한 동창들 앞에서 조롱당하고 웃음거리가 되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남우영은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의자 하나를 당겼다.“앉아요.”이다은이 앉자 남우영도 자연스럽게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다시 남우영에게 고정되었다.이때, 한 여동창이 농담을 던졌다.“다은아, 네 남편 진짜 멋있다! 너 정말 복 받았네!”이다은은 어색하게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동창이 거들었다.“그러니까 네 남편이 정하늘보다 훨씬 잘생겼잖아.”소이현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얼굴이 잘생기면 뭐 해. 겨우 부동산에서 원룸이나 보여주는 영업사원이라는데. 우리 남편이랑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그 말을 듣고 남자 동창들이 한껏 들떠 맞장구쳤다.“맞아, 남자는 잘생긴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능력, 재력, 그리고... 전투력이 있어야지.”‘전투력’이라는 말에 남자 동창 몇몇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무아지경에 빠졌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 유치한 농담의 속뜻을 이해하자 연이어 웃음소리가 퍼졌다.그러나 이다은과 남우영은 미동도 없이 웃지 않았다.분위기가 점점 과열되자, 이다은에게 호감을 보였던 한 남자 동창이 남우영을 향해 말을 건넸다.“남우 씨, 농담이에요.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우리가 당신 전투력이 없다는 소린 아니었으니까요. 뭐, 재력은 ‘충분히’ 보여주셨고... 전투력은... 그건 우리 다은이가 잘 알겠죠?”그의 말끝에 방 안의 웃음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그녀는 남우영의 손을 꽉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남우영은 그녀의 손을 반대
“십만 원? 나도 십만 원 낼게!”누군가의 말이 시작점이 되어 동창들은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이다은에게 송금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이다은은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냥 다들 송금하지 마. 여기 음식값은 너희들의 축의금으로 퉁 칠게. 부족한 건 이 모임 주최한 사람이 알아서 채우고... 난 너무 가난해서 단돈 천 원도 못 내겠어.”그 말을 남긴 이다은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모임장을 걸어 나갔다.남아 있던 동창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고, 그중 두 명의 여학생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을 따라나섰다.그들은 긴 호텔 로비를 지나 끝까지 걸어가는 이다은을 붙잡으며 다급히 말했다.“다은아, 아직 모임 안 끝났는데 이렇게 나가는 건 좀 그렇잖아.”다른 한 명은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소이현이 일부러 그런 거잖아. 오늘 모임 처음부터 끝까지 널 곤란하게 만들고 말로 계속 찔렀잖아. 그냥 참지 말고 맞서야지. 이렇게 화내고 나가면 네가 지는 거 아니야?”“맞아. 걔네가 널 웃음거리로 만들게 두면 안 돼.”이다은은 그들을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너희 걱정 고마워. 그런데 내가 이런 자리,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사실은 나...”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은 씨?”이다은과 두 여동창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이다은은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걸음을 멈췄다.그녀를 불러세운 사람은 바로 남우영이었다.그는 세련된 정장을 입고 우아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다른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같은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뒤따르고 있었고, 그중에는 TV에서 종종 보던 유명 재계 인사들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이다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접대 자리인가? 고객 접대 때문에 온 건가? 그런데 이런 5성급 호텔까지 오는 건 좀 과하지 않나?’남우영은 뒤를 돌아 동행한 사람들에게 말했다.“여러분은 먼저
“이현이야말로 요즘 팔자가 폈지. 벌써 임신 5개월 차에다 이제 곧 엄마가 된다면서? 남편은 대기업 부장이라고 했나? 정말 인생 승자네!”동창들의 칭찬과 웃음소리에 이다은은 속이 점점 답답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홀로 식사를 이어갔다. 가끔씩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면 억지 미소로 대답할 뿐이었다.‘그래도 동창회 나와서 인맥 하나쯤 얻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내가 너무 큰 착각을 했구나.’이다은은 씁쓸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이 자리에서 그저 우스갯거리일 뿐이었다. 오래된 동창들에게 심심풀이 웃음거리로 전락한 자신을 느끼며 그녀는 빨리 식사를 끝내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그러나 소이현이 다시 엉뚱한 소리를 했다.“다은아, 너 결혼했으면서도 우리 같은 동창들한테는 결혼식 초대도 안 했잖아? 차라리 오늘 이 자리를 네 결혼 피로연이라고 생각하고 우리한테 한턱내라!”주변 사람들도 맞장구쳤다.“그래! 나중에 우리가 축의금 보내줄게!”이다은은 젓가락질하던 손을 멈췄다. 입에 넣은 음식은 더 이상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앞의 화려한 음식과 고급 와인을 바라보며 얼어붙었다.‘이건 분명 5성급 호텔인데... 이 한 끼가 최소 몇백만 원은 나오겠지. 축의금? 안성시에서는 한 사람당 기껏해야 십만 원 정도로 알고 있는데... 열 명이면 백만 원?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바보는 아니잖아... 동창이라는 것들이 이렇게 괘씸할 수가!’그간 참아왔던 모욕과 조롱이 머릿속을 스쳤다. 가난 앞에서 자존심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녀의 돈까지 탐내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이다은은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술잔을 들었다. 단숨에 술을 비워낸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소이현이
이다은은 하루 종일 구직 활동을 하며 여러 곳에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그녀는 전문대 졸업생에, 전공도 항공우주 기계 설비 수리 및 공학이라는 비주류 분야였기에 기업 입장에서 매력적인 지원자는 아니었다.그녀의 꿈은 항공우주연구소에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학력으로는 꿈조차 꾸기 어려웠다. 높은 곳에 닿을 수는 없고 낮은 곳을 바라보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포기하고 다시 쇼핑몰을 운영할지 고민하던 찰나,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다은아, 오랜만이다! 우리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한 번 모이자. 요즘 너무 연락도 안 하고 지냈잖아.”처음엔 당연히 거절하려 했지만, 그 찰나에 상대방이 덧붙였다.“다들 성공했더라. 큰 회사 사장도 있고 출세한 사람도 많아.”이다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인맥이라는 게 가장 큰 구직 네트워크라는데... 동창들 덕에 일자리를 소개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안성 호텔.화려하게 꾸며진 호텔의 한 룸에서 고등학교 동창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이다은이 룸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 반장이었다.“다은아! 오랜만이다!”반장이 반갑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이다은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먼저 와있던 동창들도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약간의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소이현도 앉아 있었다.이다은이 자리에 앉자마자 한 동창이 물었다.“다은아, 이현이가 너 결혼했다고 하던데 진짜야?”이다은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결혼했어.”“우리도 동창인데, 결혼식에 초대도 안 한 거야?”“결혼식 안 올렸어.”“남편은 누구야?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너희는 모르는 사람이야.”이다은의 단호한 대답에 동창들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그러다 한 동창이 농담조로 물었다.“남편 뭐 하는 사람인데? 얼굴 좀 보여줘!”이다은은 말없이 고개를
아침 식사를 마친 남우영은 출근 준비를 끝내고 문을 나섰다.이다은은 그를 아래까지 배웅하며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을 흔들었다.“운전 조심하세요!”남우영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배웅했다.그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이다은은 천천히 돌아서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집이 8층이었지만 그녀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것을 운동 삼아 여겼다.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다은은 부지런히 집안일을 시작했다.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고 빨래를 널고 다 마른 옷을 개며 하루의 일과를 착실히 이어갔다. 집안일을 마친 후, 거울 앞에서 간단히 화장을 고치고 이력서를 챙겨 구직 활동을 위해 집을 나섰다.에이스타 그룹.남우영이 1년 전 창립한 에이스타 그룹은 신흥 기업으로 단기간에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주요 사업 영역은 인터넷 기반 쇼핑 플랫폼, 온라인 방송, 항공우주 운송, 그리고 가장 수익성이 높은 게임 개발 및 e스포츠 팀 운영이었다.남우영은 젊은 나이에 천억 원대의 자산을 일구며 사업계의 거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다양했다.“타고난 금수저잖아. 부모의 배경 덕이겠지.”“재벌가 외삼촌의 후광을 업은 거야.”“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하지만 그런 평가는 대부분 그를 직접 본 적 없는 이들의 추측에 불과했다.넓은 사무실에서.남우영은 전면 유리창 앞에 서서 도심의 화려한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억짜리 계약조차 그의 관심 밖이었고 지금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고작 몇백만 원짜리 일자리였다.‘괜찮은 일자리를 찾았으려나...’그는 아내 이다은의 구직 결과가 궁금할 뿐이었다.고요를 깨우는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책상으로 걸어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대학 동창 진영수였다.“여보세요.”“우영아, 바쁘지 않지?”“그냥 평소랑 똑같아. 무슨 일이야?”“사실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네가 도와주면 좋겠어.”“뭔데
이다은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방금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얼굴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고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책망했다.‘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진짜 창피해서 어떻게 눈을 마주쳐.’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고 방 안은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남우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불을 껐고 방은 어둠 속에 잠겼다.고요한 공간에는 서로의 고른 숨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렸다.남우영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이해했기에 더 이상 그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침묵을 유지했지만, 그 밤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밤이었다.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 전, 이다은은 부지런히 일어나 하루를 준비했다. 남우영의 와이셔츠를 다림질하고 그의 구두를 반짝이게 닦아두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차린 뒤에는 정성스럽게 점심 도시락까지 준비했다.남우영이 일어났을 때, 이다은은 이미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림질을 마친 옷은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었고 그것을 보자 남우영은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남우영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이다은은 앞치마를 두른 채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아침 준비 다 했어요. 어서 드세요.”이다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남우영은 테이블 위에 정성껏 준비된 잡곡밥과 수제 만두, 그리고 도시락을 보고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고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이렇게까지 준비하려면...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거예요?”“괜찮아요. 원래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서요.”이다은은 가볍게 대답하며 앞치마를 벗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어제 팔려고 갖고 나갔던 물건들을 전부 도시관리 공무원들한테 몰수당했어요. 벌금 내야 하는데 그냥 포기했어요. 쇼핑몰도 문 닫았고... 오늘부터 일자리 좀 알아보려고요.”남우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굳이 일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혼자 벌어도 우리 가족 생계는 책임질 수 있어요.”
“뭔가 떠오르면 그때 말할게요.”이다은은 바닥을 닦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녀는 남우영에게 감정적 유대감도, 특별한 기대도 없었다. 결혼은 정하늘을 마음에서 지웠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한 단순한 선택에 불과했다.늦은 밤, 샤워를 마치고 잠옷 차림으로 방으로 들어간 이다은은 문을 열자마자 뜻밖의 광경에 발이 멈췄다.눈앞에는 옷을 갈아입고 있는 남우영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탄탄한 근육, 완벽한 라인, 건강하게 빛나는 피부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순간 놀라 굳어버린 이다은은 이내 정신이 번쩍 들며 황급히 문을 닫았다.‘쾅!’남우영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멈칫하던 그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졌다.문밖에 선 이다은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방금 본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진짜 저 몸이 현실이야? 드라마도 아니고...’평소 조용하던 마음이 갑자기 요동치며 얼굴이 화끈거려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던 순간 문이 열렸다.이다은은 놀라 고개를 들었고 옷을 다 입은 남우영이 불쾌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왜 숨어요?”“저... 그게...”이다은은 당황한 나머지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남편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까지 큰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미안해요. 아직 좀 익숙하지 않아서요.”남우영은 한 손으로 그녀를 방 안으로 이끌며 문을 닫았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다음부터 이런 상황엔 밖으로 도망치지 마요.”“그럴게요...”이다은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심장을 부여잡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갑자기 작아진 듯했고 공기가 더 뜨겁게 느껴졌다.그녀는 묘한 긴장감과 어색함에 몸을 움츠렸다.“얼른 쉬어요.”“다은 씨도요.”이다은은 서둘러 이불을 들어 올리고 침대에 누웠고 남우영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침대 가장자리에 섰다.이다은은 그가 자신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