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가을 햇살이 베란다 정원에 쏟아지고 꽃이 만발하고 녹초가 우거졌다.남서연은 단잠에서 깨어나 정신없이 휴대전화를 만져 시간을 보더니 깜짝 놀라 침대에서 튕겨 일어났다. 그녀는 황급히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뛰어들었다.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인 후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섰다.거실을 지나자 그녀는 백건이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앞에는 아침 식사 두 접시와 우유 두 잔이 놓여 있었다.“좋은 아침이에요.”남서연이 다가가 긴장하며 말했다. “알람 못 들었어요. 미안해요.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죠?”백건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의 맞은편 접시를 가리켰다.“1인분 더 만들었어. 같이 먹어.”그가 직접 만들었다고?남서연은 경악하며 접시에 든 음식을 바라보았다.껍질을 벗기고 얇게 썬 삶은 달걀 하나, 데친 브로콜리 몇 송이, 쇠고기 오믈렛 하나, 약간의 과일도 곁들어 있었다.너무 세련되고 건강해 보였지만 비주얼과 플레이팅은 평범해서 호텔 셰프의 솜씨가 아닌 게 분명했다.“하지만 디렉터 님은...”남서연은 고민했다.9시에 일어나 일하자고 약속했는데 지금 10시가 넘었으니 그녀는 상사에게 질책당할까 봐 두려웠다.“아직 나도 출근 안 했는데 뭐가 걱정이야?”백건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며 말하자 남서연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의자를 당겨 앉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비록 식었지만 맛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백건의 솜씨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단지 그가 아침 식사를 직접 준비하고 심지어 그녀의 것도 만들어 줄 줄은 몰랐다.처음으로 좋아하는 남자가 만든 아침밥을 먹으니 남서연은 왠지 모르게 달콤하고 기분이 좋고 마음이 설렜다.그녀는 자세를 잡고 아주 담담하게 접시의 음식을 다 먹은 후 우유를 마셨다.백건은 아주 우아하게 먹었다. 그녀가 다 먹자 그는 손을 뻗어 접시를 거뒀다.“내가 씻을게요.”남서연이 긴장해서 말하자 백건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설거지 해봤어
아침에는 행사장에 방문했다.모두들 여전히 긴박하게 무대를 세우고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는데 행사장의 기본 틀은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행사장에서 한창 바쁘다가 또 차를 타고 지사에 가서 회의했다.회의는 오전 11시부터 점심 1시까지 이어졌다.남서연은 구석에 앉아 있자니 배고파서 꾸르륵꾸르륵 소리가 나고 자꾸 하품이 나왔다.그녀는 지친 목을 어루만지며 가볍게 흔들었다.무심코 백건이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화들짝 놀란 그녀는 얼른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호흡마저 곤두세웠다.그녀는 속으로 아주 당황하고 걱정했다.방금 그녀가 꼼수를 부리는 모습을 백건이 본 건 아닐까?백건은 아마 그녀가 창피하다고 여길 것이다.남서연은 자신의 머리를 때려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회의는 계속되고 있었다.잠시 후, 하현우가 들어와서 남서연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씨 저 따라오세요.”남서연은 부랴부랴 공책을 챙기고는 조심스레 물었다.“무슨 일이에요?”하현우는 청하는 동작을 취했고 남서연은 그를 따라 나갈 수밖에 없었다.사무실을 나선 두 사람은 나란히 휴게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간 남서연은 어안이 벙벙했다.휴게실 식탁에는 점심과 주스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싱글침대가 놓여 있었다.“아가씨 식사하십시오. 식사 후에는 여기서 조금 쉬시면 됩니다. 대표님께서 일 끝나면 오실 거예요.”남서연이 궁금해서 물었다.“디렉터 님도 지금 식사하시나요?”“그분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말을 마친 하현우는 휴게실을 떠났다.남서연은 점심을 먹으면서 머릿속에 백건의 모습이 계속 스쳐 지나갔다.점심 식사 후 남서연은 한 시간 동안 눈을 붙였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육나리는 다른 디자이너를 데리고 떠났지만 남서연은 영문도 모른 채 백건의 곁에 있으라는 요구를 받았다.백건은 끝없이 회의를 이어갔다.무미건조한 데이터 보고서 그리고 책략 방안 등을 듣다 보면 남서연은 최면에 걸린 듯 잠이 쏟아졌다.그때 남서연의 휴대전화가 주머니에서 진
남서연은 그가 직접 만든 아침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뭉클했다.진우석은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죽은 얼굴을 하고 있지. 마치 온 세상이 자신에게 목숨을 빚진 것처럼 얼굴이 차갑고 더럽잖아.”남서연이 불쾌한 투로 나무랐다.“오빠. 그렇게 비하하지 말아 줄래요?”“왜? 기분 나빠?”“아니요.”남서연은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진우석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너 기분 나쁜 말투 맞네 뭐. 주소 줘. 데리러 갈게.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는데도 구경시켜 줄게.”“하지만 아직 퇴근하지 않았어요.”“그따위 일 집어치워. 이 오빠가 너 먹여 살릴게.”남서연은 쓸쓸하게 웃었다.“나도 나 먹여 살릴 수 있어요. 호의는 고맙네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무실 문이 열리고 백건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남자의 안색이 극도로 어두웠다.남서연은 제대로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다. 아마 그녀가 중간에 회의실을 나가 그를 존중하지 않고 또 자신의 업무를 존중하지 않아 백건이 화난 것 같았다.“나 이만 끊을게요. 바빠요.”남서연은 당장 전화를 끊고 긴장한 채 일어나 침을 꿀꺽 삼켰다.“대표님, 일 끝났어요? 이제 퇴근...”남서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얼굴의 백건은 어두운 눈빛으로 남서연을 무시하고 그녀 옆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남서연은 놀라서 몇 초 동안 멍해 있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남서연은 의혹스러운 듯 남자를 바라보았다.아침에는 분명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안색이 변했을까?남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분명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남자의 기분이 변했다고 느꼈다.그녀도 남자와 함께 회사를 떠났다.하현우의 인솔하에 그녀는 백건의 차에 탔다.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의 온몸에 두꺼운 얼음 서리가 드리워져 있어 보는 사람의 긴장감을 자아냈다.남서연은 차창 가에 기대어 조용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아마 이 시간에 호텔로 돌아가겠지?’30분 후.뜻밖에도 차량은 한 호화로운
남서연은 멀뚱멀뚱 백건을 바라보았다.왜 그녀는 백건의 말투에 질투가 섞인 것 같을까?그녀의 오해일까?남자는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아 몇 초 동안 그녀를 불쾌하게 쳐다보더니 화가 나서 차 문을 열고 내려가서 차갑게 한마디 던졌다.“하 비서. 데려다줘.”곧 문을 닫고 성큼성큼 걸어갔다.남서연은 완전히 멍해졌다.하현우는 시동을 걸고 차를 돌려 떠났다.차량이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하현우가 물었다.“아가씨, 주소를 주시면 제가 모셔다드릴게요.”‘어딜 간다는 거지? 나 호텔로 데려다주는 거 아니었어?’그녀가 막 말을 하려고 할 때, 핸드폰이 울려서 발신자 표시를 보니 진우석의 번호였다.그녀가 전화를 연결하자, 진우석은 그녀에게 퇴근했는지, 밥을 먹었는지, 잠깐 만날 수 있는지 물었다.그녀는 진우석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하현우에게 말했다.“스카이 레스토랑으로 가주세요. 고마워요.”하현우는 공손하게 응수하고 스카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그가 눈을 들어 백미러를 보니 남서연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진우석과 통화하고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탄식했다.스카이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남서연이 차에서 내려 하현우에게 말했다.“먼저 돌아가세요. 이따가 저 혼자 호텔로 돌아가면 돼요.”“아가씨 혼자는 위험해요.”“우석 오빠가 있잖아요?”하현우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남서연이 레스토랑에 들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진우석이 벌떡 일어섰다.“서연아, 여기!”남서연은 활짝 웃으며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가 진우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밝고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그의 웃음에 물들었다.“오랜만이에요. 우석 오빠.”진우석도 싱글벙글 웃으며 감격해서 말했다.“네가 이곳에 출장 올 줄은 생각도 못 했어.”“나도 못 했어요.”진우석은 그녀에게 메뉴판을 건넸다.“네가 먹고 싶은 것 시켜.”남서연은 메뉴판을 뒤적거리다가 무작위로 세트메뉴를 주문했다.음식 맛은 별로였지만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상당히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음악이 은은하
길가에 주차가 안 되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온 하현우는 검은색 우산을 들고 고인 물을 밟으며 백건 옆으로 달려가 그의 머리 위의 비를 막았다.지금의 하현우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그가 남서연을 이곳으로 데려다주고 파티장으로 돌아갔을 때 백건은 이미 안에서 나와 여기로 곧장 달려왔다.하현우는 여러 해 동안 백건의 곁에 있으며 그의 일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하현우가 본 백건은 즐거움이 없는 남자였다.그는 부모님의 모든 기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의 사업, 미래, 아내와 인생은 전부 부모가 계획한 길을 따라야 했다.그는 태어날 때부터 자아가 없었고 그저 백씨 가문의 재산을 상속하는 데 사용하는 꼭두각시일 뿐이었다.그런 백건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 없고 천진난만한 남서연을 좋아했다. 그가 아무리 동경하고 추구해도 평생 도달할 수 없는 꿈같은 존재였다.북풍이 휙휙 불고 빗물이 섞여 하현우는 오싹할 정도로 추워 났다.그는 팔 한쪽만 젖었을 뿐인데 백건은 온몸이 흠뻑 젖었으니 아마 더 추울 것이다.더구나 레스토랑 안의 저 달콤한 장면이 백건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일일까?하현우가 안쓰러워 입을 열었다.“대표님. 온몸이 흠뻑 젖었어요. 이러시다 감기 걸려요. 먼저 돌아가시죠.”백건은 조용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하현우는 이가 덜덜 떨리고 손이 얼어붙고 몸도 으스스 떨릴 정도로 추웠다.레스토랑의 문이 열리자 진우석은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고 큰 우산을 쓰고 남서연에게 씌워주었다.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한 시간 동안 서 있던 백건이 드디어 움직였다.그는 제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하현우도 뒤돌아서서 우산을 아래로 눌러 상대방의 시선을 가렸다.남서연은 고개를 숙여 발밑에 고인 물을 보고 진우석의 품에 기댄 채 나무랐다.“이 비는 두 시간이나 내렸는데 아직도 안 그쳤네요.”“요즘 비가 자주 오니까 우산 꼭 챙기고 다녀.”“알
남서연은 마음이 괴로워졌다.백건의 기분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지만 자꾸 그를 생각하고, 추측하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그러자 남서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뭐야? 우리 걱정 없는 서연 공주님이 한숨도 쉴 줄 알아?”남서연도 반응하고 저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 언제부턴가 나에게도 고민이란 게 생겼네요.”“우리 서연이 다 컸네.”“사람은 크면 고민이 생기네요. 난 정말 조금도 크고 싶지 않아요.”“네 고민이 뭔지 이 오빠에게 말해볼래? 회사 일이야?”진우석이 운전하며 묻자 남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러자 진우석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말투가 조금 엄숙해졌다.“그럼 감정 문제?”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수건을 비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우석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속으로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덤덤한 척 물었다.“설마 나한테 고백했다가 거절당할까 봐 고민이야?”남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투덜댔다.“오빠는 참,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요. 웃기지도 않아요.”진우석은 헛웃음을 두어 번 지어 자신의 어색함을 감추었다.그는 남서연을 호텔까지 바래다주고 인사를 하고는 떠났다.남서연이 스위트룸으로 돌아왔을 때, 백건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아직 시간이 이른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디자인 원고를 그렸다.시간은 1분 1초 지나갔다.남서연은 두 개의 디자인 초안을 다 그린 후, 참지 못하고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보았다.시간은 정확히 새벽 12시였다.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진작 꿈나라로 갔겠지만 지금은 잠이 오지 않았다.음악을 듣고 스케치를 하기 위해서보다는 무의식적으로 백건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남서연은 헤드셋을 벗고 스케치를 내려놓고 이불을 젖히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거실의 조명이 밝았다.방금 그녀가 방에 들어오기 전에 불을 껐는데 보아하니 백건이 이미 돌아온 것
“남서연.”백건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네?”“남서연.”“나 여기 있어요. 왜 그래요?”남서연이 인내심 있게 답했다.“남서연, 남서연...”그의 목소리는 더욱 무거워지고 쓸쓸해졌으며 눈시울은 붉어졌고 시선은 흐릿해졌다.남서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계속 여기에 있는데 이 남자는 왜 그녀의 이름만 부르며 다른 말은 하지 않을까?‘많이 취했나?’백건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꼬더니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남... 서... 연.”남서연은 걱정스럽게 다가가 그를 마주 보았다.“나 여기 있어요.”백건은 그녀를 보며 덤덤하게 웃더니 다시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힘없이 중얼거렸다.“네가 또 내 꿈속에 왔네.”“뭐라고요?”남서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얼굴을 갖다 대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남서연.”“왜 자꾸 내 이름을 불러요? 할 말이 있으면 바로 해요!”“남... 서... 연.”“정말 취했나 보네요.”남서연은 부랴부랴 침실로 들어가 휴대전화를 들고 하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은 하현우는 잠에서 깨어난 듯 몽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서연은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조심스럽게 말했다.“정말 죄송해요. 대표님이 술에 취해 거실에 앉아 있어요. 옷은 흠뻑 젖었고요. 저러다 감기 걸릴까 봐 걱정돼서요.”하현우는 경악했다.“대표님이 취했다고요?”분명 그를 호텔로 데려다줄 때는 멀쩡했는데 왜 술에 취해 젖은 옷을 아직 갈아입지 않았을까?남서연이 긴장해서 말했다.“네. 자꾸 제 이름만 부르고 있어요.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을 못 하더라고요. 아마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뇌가 말을 안 듣나 봐요. 저 상태로는 젖은 옷도 안 갈아입을 것 같은데 좀 와서 도와주시겠어요?”“네. 바로 갈게요.”하현우는 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 바람으로 달려왔다.벨이 울리자 남서연이 나가서 문을 열었다.방으로 들어온 하현우는 백건이 아직도 그 젖은 옷을 입고 곤
그녀는 백건을 오랫동안 짝사랑하며 그와 사귀는 날을 꿈꿔 왔지만 이성적으로 두 사람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도덕적으로 볼 때, 그녀의 짝사랑은 평생 빛을 보지 못할 운명이었다.그래서 그녀는 백건에게 가까이 가는 건 감히 바라지 않았고 헛된 꿈을 꾸지 않았고 비현실적인 일을 원하지도 않았다.이 어두운 짝사랑을 평생 마음속 깊이 간직해야 했다.남서연은 오랜 고민 끝에 결국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워 계속 잠을 잤다.이날 밤, 남서연은 잠을 설쳤다.다음 날 아침, 숙취가 남은 백건은 깨어나지 못했고 남서연은 이미 일어나 육나리와 다른 디자이너 준과 함께 행사장으로 향했다.행사장에는 이미 런웨이가 설치되었다.이번 시즌 패션쇼 행사가 곧 시작되어 모두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백스테이지 라운지.“거기 너.”한 남자가 남서연을 가리키며 오만하게 말했다.“너. 그래 너.”남서연은 경악하며 자신을 가리켰다.“저 부르셨어요?”“그래. 바로 너. 너 어느 부서 직원이야?”남자가 묻자 남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예의 바르게 답했다.“디자인 팀 직원이에요.”“처음 보는 얼굴인데?”“본사 신입직원입니다.”“그렇군. 가서 커피 몇 잔 사와.”남서연은 흠칫 놀라더니 물었다.“제가 커피를 사 와요?”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다른 사람을 가리켰다.“모두 바쁜데 너만 한가하잖아? 네가 안 가면 누가 가?”남서연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커피 심부름을 할 뿐이니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네. 몇 잔을 사 올까요?”남자는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을 가리켰다.“여기 지금 몇 명인지 세어보고 사와.”남서연이 사방을 둘러보니 스태프와 모델, 최소 수십 명이 모였는데 그녀 혼자서는 그렇게 많은 커피를 손에 들 수 없었다.“얼른 가지 않고 왜 멍을 때려?”남서연은 늘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많은 커피를 종이 상자에 넣어와도 되고가져올 방법은 생각해 내면 될 일이었다.“네. 알겠어요. 비용은 회사에 청구하면 되
남서연은 복잡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저예요.”백건은 숨이 거칠고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말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다.그는 남서연이 무슨 일로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몰라 계속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지금... 시간 있어요?”남서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쭈뼛쭈뼛 물었다.백건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있어.”“잠깐 만나서 얘기할래요?”“좋아.”백건이 곧바로 대답하더니 또 물었다.“어디서 볼래? 데리러 갈게.”남서연이 생각해보니 밖에는 보는 눈이 많아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데리러 올 필요 없어요. 내가 오빠 집으로 갈게요. 반 시간이면 도착해요.”“좋아.”남서연은 전화를 끊고 일어서서 마스크를 쓰고 공중화장실을 나섰다.한편, 공항 가는 차에 타고 있던 백건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명령했다.“차 돌려서 집으로 가.”“대표님, 비행기 시간 이미 다 됐어요.”백건은 정색해서 말했다.“이번 행사 취소하고 바로 집으로 가.”하현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그 전화를 들으니 아마 남서연일 것이다.백건에게 새 시즌 발표회는 취소할 수도 있고 연기할 수도 있고 없어도 되는 일이다.그러나 남서연을 만날 어떤 기회도 그는 놓칠 수 없었다.하현우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30분 후.남서연은 산 중턱 별장에 와서 막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하현우가 이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공손히 인사했다.“서연 아가씨,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남서연은 살짝 놀랐다가 하현우인 걸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경치가 아름다운 화원의 앞마당을 지나 웅장한 큰 집으로 들어갔다.문은 열려 있고 백건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어 우아하고 멋스러우며 준수한 매력을 자랑했다.남자는 그윽한 눈동자로 남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를 다시 만난 남서연은 마음이 혼란스럽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음속에 토끼 한 마리가 숨
백건은 당황해서 화를 내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하현우는 침을 삼키고 목숨을 걸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 여자가 대표님과 관계를 맺은 후 연락을 끊었다면 아마도 대표님의 돈과 권력 때문에 감히 저항하지 못했을 거예요. 진짜 대표님께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백건은 화를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아니, 돈과 권력이 부족한 여자가 아니야.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하현우는 경악하더니 속으로 크게 흥분했다.‘뭐야? 대표님 설마 서연 아가씨와 잔 거야? 대단하네!’‘목숨을 걸고 남씨 가문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목숨을 바칠 정도로 위대한 사랑이라니.’하현우는 은근히 충고했다.“대표님, 어떤 여자들은 성격이 순하고 마음씨가 착해서 아무리 권위 있는 집에서 자라도 담은 작아요. 어려서부터 너무 잘 보호 받으며 자라서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거절할 줄도, 반항할 줄도 모르죠. 그래서 도망을 치죠.”백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심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거절하지 않으면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일방적으로 남서연에게 상처를 준 걸까?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해 일방적인 행위를 가한 그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아닌가?백건은 눈을 감았고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남서연은 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두 번의 잠자리로 인해 계속 괴로워하지 않았다.백건은 어쨌든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자였으니 아무리 쓰레기일지라도, 이미 일어난 이상 좋은 추억으로 여기기로 했다.그녀의 짝사랑도 욕망을 만족시킨 셈이었다.만약 백건이 그녀와 사귀고 싶지 않으면서 계속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여다혜가 말한 대로 그녀는 더 이상 타락해서는 안 되었다.남자는 여자와 달리 사랑이 없어도 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그녀는 백건의 전화를 받지 않고 그의 메시지에도 답장하지 않기 시작했다.그 후 백건은 포기하고 그녀를 찾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도 접촉이 많지 않았으니 남서연은 일
“남서연 씨는요?”직원이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서연 씨는 방금 가방을 챙겨 나갔습니다.”백건은 군말 없이 급히 몸을 돌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남서연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몇 번 울리더니 끊겼다.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남서연이 다시 끊었다.세 번 연속 시도한 후 결국 포기했다.백건이 1층 로비까지 쫓아갔지만 이미 남서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풀이 죽어 위층으로 몸을 돌렸다.종일 그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날이 저물자 창밖의 네온사인이 유리창에 비쳐 창 앞의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창문을 마주하고 하늘가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눈 밑은 번화한 경치였지만 그의 마음속은 황폐했다.그는 남서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하현우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미 10시예요. 퇴근 안 하세요?”백건은 침묵했다.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뒤덮어 섬뜩하여 그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하현우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이미 몰래 저녁을 먹었지만 집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무리 야근 수당이 있어도 또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는 내키지 않았다.하현우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대표님,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제가 도와드려요?”백건은 말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나갔다.하현우는 급히 옆으로 피했고 등이 뻣뻣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백건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는 쪼뼛쭈뼛 따라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고 깊고 어두운 눈으로 창밖 거리의 야경을 바라보았다.차를 몰던 하현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추측했다.“대표님, 혹시 서연 아가씨와 연락이 안 되세요?”고개를 돌려 하현우를 보는 백건의 눈빛은 차갑고 굳어 있었다.하현우는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더니 등
[좀 바빠요.][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응?][서연아, 처음에 너도 거절하지 않았잖아? 왜 이제와서 이래? 이거 무슨 뜻이야?][기다릴 테니 내려와. 아니면 내가 올라간다?]남서연은 백건이 보낸 몇 개의 메시지를 보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마음이 더욱 불안해져 여다혜를 돌아보았다.여다혜는 연애경험이 비교적 풍부해서 거의 감정 전문가인 셈이었다.남서연은 의자를 옮겨 여다혜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다혜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여다혜는 책상 위에 엎드려 졸면서 중얼거렸다.“말해.”“내 친구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를 계속 짝사랑했어. 근데 그 남자는 계속 그 친구에게 차가웠고 만날 때마다 일부러 숨었어. 마치 싫어하는 것처럼.”“나중에 내 친구가 커서 그 남자가 먼저 접근했고 아무 이유 없이 두 번이나 잤어. 그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여다혜는 번쩍 튕겨 일어나 앉더니 깜짝 놀라며 입을 가리고 남서연을 끔벅끔벅 바라보았다.“왜 그래?”남서연이 묻자 여다혜는 비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서연아, 너 나쁜 남자 만났구나.”“내가 아니라 내 친구라고.”“그래그래. 네 친구.”여다혜는 서둘러 말을 바꾸고 슬픈 듯 입을 납작하게 하고는 눈에는 동정이 가득했다.“네 친구 나쁜 남자 만난 거야. 정말 너무해. 대체 어느 개자식이야?”남서연은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 숨을 몰아쉬었다.“무슨 말이야?”여다혜는 그녀의 말을 바탕으로 분석했다.“네 친구는 커서 예쁜 여자가 된 게 틀림없어. 그래서 그 남자가 혹한 거지. 어렸을 때부터 네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자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 남자는 하반신으로 고민하는 수컷이니까.”남서연은 얼굴이 희끗희끗해지며 축 처져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차디찬 손을 맞잡고 위로했다.“서연아, 네 친구는 감정에 무지하고 세상 물정에 어둡고 순진해서 남자한테 속았을 거야.”“그런... 사람 아니야.”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해명했다.“그
끝난 후, 너무 수줍은 남서연은 백건이 어찌할 수 없는 틈을 타 재빨리 자신의 옷을 챙겨 입고 거의 도망가듯 뛰쳐나갔다.“서연아...”백건은 옷을 챙겨 입지 못해 따라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사무실을 뛰쳐나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숨을 헐떡였다.그녀가 디자인 부서로 돌아왔을 때 여다혜는 급히 걸어가서 책상을 두 손으로 받치고 그녀의 붉어진 얼굴과 약간 불그스름한 입술을 보았다.“서연아,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너 점심 먹었어?”남서연은 마음이 켕겨 감히 여다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먹었어. 혼자 먹었어.”“식당에서 너 못 봤는데? 그리고 평소에는 30분이면 다 먹더니 오늘은 왜 한 시간이나 걸렸어?”“나... 구내식당이 아니라 밖에서... 멀리 가서 먹었어.”여다혜는 불쾌해하며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왜 좋은 곳에 나는 안 데리고 갔어?”남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귓가에 있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다음에. 다음에 꼭 데리고 갈게.”여다혜가 깜짝 놀라 외쳤다.“너 움직이지 마.”남서연은 경악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여다혜는 그녀의 긴 머리를 쓸어올리고 귓불 뒤 목덜미에 닿는 위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물었다.“너 목에 왜 빨간 자국이 있어? 마크 같아.”“무슨 마크?”“키스 마크!”크게 당황한 남서연은 황급히 긴 머리를 풀어 목을 가리고는 화난 척 말했다.“함부로 말하지 마. 그냥... 긁은 거야. 모기한테 물려서 난 자국이야.”모기에 물린 것인지, 키스 마크인지 여다혜는 경험자로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더군다나 남서연은 지금 볼이 붉어지고 눈 밑에는 수줍음이 가득했다.여다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서연아, 너 정말 우리 오빠 안 좋아해?”“안 좋아해. 자꾸 엮지 마.”남서연이 나지막이 말하자 여다혜는 어깨를 으쓱하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돌아가서 희망이 없다고 오빠에게 말할게. 네 생각하지 말고 빨리 다른 여자 만나라고.”남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
백건은 그녀 앞에 와서 안색이 어두워지고 눈빛이 흐려지며 부드러운 말투에 약간 불쾌함을 띠었다.“나 무서워하지 마. 서연아.”남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가로저었다.백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일할 때는 좀 엄숙하긴 하지만 부하직원에게만 그래.”남서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나도 부하직원이잖아요.”백건은 화가 나서 웃더니 고개를 떨구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남서연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줄 알고 급히 해명했다.“무서워한 게 아니라 그냥 좀 적응이 안 됐어요.”차이가 너무 컸으니 말이다.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사납다가 갑자기 그녀에게 너무 다정하게 대해서 적응이 안 됐을 뿐이다.백건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살펴보더니 물었다.“배고파?”남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너무 배고픈 건 아니에요.”백건은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옆 휴게실로 향했다.그는 남서연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고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백건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녀도 끌고 들어갔다.문이 닫히자 남자는 곧장 그녀를 문짝에 눌렀다. 두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가두고 몸을 붙이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남서연은 깜짝 놀라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져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남자의 강한 호르몬이 그녀를 감싸고 있고 보이지 않는 압박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며 호흡에는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가득했다.남자는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관능적인 목젖을 위아래로 구르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서연아. 네가 거절하지 않는 건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돼?”남서연은 머리가 하얘지고 몸이 약간 떨릴 정도로 긴장했다.문득 남자의 얼굴이 다가와 얇은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음!”그녀는 수줍은 소리를 내며 벽에 등을 바짝 붙였다.그의 키스는 매우 갑작스러웠고, 거칠면서도 거침없이 그녀의 입안을 침략하고 입과 혀를 섞었다.그의 키스는 매우 깊었다.남자는 서서히 자신의 몸을 눌렀고 나른해
그녀는 넓은 홀을 걸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비서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하현우는 보이지 않았다.대표 사무실의 문이 굳게 닫혀있지 않았다.남서연은 궁금해서 앞으로 걸어가며 문을 두드리려고 했다.그때 안에서 서류 뭉치가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가까이 다가간 남서연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백건의 냉엄한 목소리만 들렸다.“당신 사람들 데리고 당장 나가세요!”그러자 연륜이 느끼지는 중후한 목소리가 버럭 화를 냈다.“백건! 너무 나대지 마. 내가 네 할아버지와 사업을 일굴 때 넌 태어나지도 않았어.만약 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넌 날 보고 끽소리도 못 냈어. 네 아버지가 나를 봐도 아저씨라고 정중하게 부르는데 네가 감히 나를 해고해?”백건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맞아요. 나는 지금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을 해고하고 있어요. 당장 나가세요.”“네가 뭔데 나를 해고해? 내가 공로는 없어도 고생은 함께 했는데 어떻기 감히 나를 내보내?”“당신 손에 있는 주식, 매달 월급 그리고 매년 주어지는 배당금까지, 전부 고생 값이에요. 회사는 이미 현금으로 보상했으니 더 이상 빚진 것 없어요. 사람이 늙으면 능력이 떨어지고 더 이상 가치를 창출할 수 없으면 회사 자원을 점유하지 말고 집에 가서 노후를 보내야죠.”“백건. 네 이놈!”“당신 낙하산을 타고 들어온 사람들 한 명도 남기지 마세요.”또 한바탕 큰소리에 남서연은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예순 살쯤 된 늙은 남자가 양복 차림의 젊은이 몇 명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섰고 입구에서 남서연과 부딪혔다.남자는 남서연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조롱했다.“바로 너야? 일개 디자이너가 감히 대표 사무실에 찾아와? 생긴 건 번지르르하네. 몸을 팔아 디렉터를 쫓아낸 거지?”남서연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전 디자인 디렉터도 그의 사람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았다.말을 마친 남자는 사람들을 데리고 사무실을 떠났다.백건은 소리를 듣고 뛰쳐나왔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안색이 좀 긴장된 남
“대... 대표님. 아침부터 제가 뭐 잘못했나요? 왜 그러세요?”백건의 목소리는 얼음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듯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느껴졌다.“어제저녁에 왜 야한 영화를 보냈어? 잘리고 싶어?”하현우는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렀고 침을 삼키고 긴장하며 말했다.“그건 대표님께서...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를 부탁하셨잖아요. 혼자 사는 성인 남자가 저녁에 영화를 달라고 하니. 그리고 대표님은 애니메이션도 안 보고 로맨스 영화도 안 보시니 분명 그런 장르를 원한 거 아니셨어요?”백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갈았다.“서연이가 보려고 한 거야. 내가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해 모르니 네게 부탁한 거고.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하현우는 어안이 벙벙하고, 입이 떡 벌어지며,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 오랫동안 진정되지 않았다.백건은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그의 옷깃을 풀어주고 한 발짝 물러서서 경고했다.“만약 서연이가 이 일로 날 미워하고 나에 대해 나쁜 인상을 받았다면 넌 바로 아웃이야.”하현우는 깜짝 놀라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반드시 만회할 방법을 찾을게요. 반드시 대표님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백건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하현우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고 급히 운전석을 열고 들어가 차를 몰고 떠났다.가는 내내 하현우는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고민했고 백건은 뒷좌석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순간 하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서연 아가씨께서 어제 영화를 끝까지 안 보셨죠?”“응.”백건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하현우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물었다.“그럼 대표님은요?”“다 봤어.”백건이 솔직하게 말하자 하현우는 꾹 참으며 감히 웃지 못했다.그는 재미있는 영화를 거절할 수 있는 남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남자가 아닌 한.하현우가 또 물었다.“그런 영화 자원이 더 필요하세요?”백건은 서류를 덮고 눈을 감더니
색은 남녀의 천성이었다.남자로서 자신이 호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었다.“호색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때는...”백건이 설명하려는데 남서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크게 당황했다.백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벨 소리에 묻혔다.“내가... 널 좋아하니까.”“여보세요, 할머니!”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친구랑 같이 있어요. 곧 돌아가요... 아니에요. 오빠가 데리러 올 필요 없이 저 혼자 택시 타고 돌아가면 돼요... 자꾸 저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23살이에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네 알겠어요. 이따가 봬요.”남서연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백건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말이 목에 걸렸다.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몸을 돌려 차 키를 가지러 갔다.“데려다줄게.”“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남서연이 거절했지만 백건은 차 키를 들고 신발을 갈아 신고 남서연의 옆을 지나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남서연은 등뼈가 굳어지며 한발 한발 밖으로 따라나섰고 시선은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 고정되었다. 그의 따뜻한 큰 손바닥은 마치 전류가 흘러 그녀의 손바닥 피부에서 팔다리로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정한 촉감에 그녀는 심장이 벌렁거렸다.그녀는 온몸이 긴장되고 호흡이 좀 가빠졌다.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손바닥을 잡아주고 있었다.이토록 다정하게 남자의 손바닥에 닿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남서연은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져서 가슴이 쿵쾅대며 몰래 즐거워하고 있었다.백건은 그녀를 차량 옆으로 끌고 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줍게 숙이고 있었다.여자의 수줍은 자태는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백건은 움찔하더니 그제야 자신이 남서연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손을 놓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