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셋이 함께 떠나는 건 좀 힘들어. 내가 안전하게 떠날 방법을 더 생각해볼게.”백인호가 차분한 말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만약 지금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일이 훨씬 쉬워질 텐데.”“날 죽여.”정안이 슬픔에 빠져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백인호가 부드럽게 되물었다.“내가 널 어떻게 죽여?”정안은 천천히 손을 내려놓더니 마치 산송장처럼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 넋을 잃은 듯 말했다.“네가 날 안 죽으면 내가 너 죽일 거야.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백인호가 입술을 오므리고 웃더니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네 아들이 아직 내 손에 있어. 네 아들이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내 말 잘 들어.”정안은 안색이 창백하고 초췌한 표정으로 천천히 침대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 이불을 끌어다가 덮었다.그녀가 눈을 감으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그녀는 꾹 참고 있었지만 심장이 점점 더 아파지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질식할 것 같은 통증이 그녀를 괴롭혔다.정안은 이불을 끌어다가 입에 물고는 몸을 웅크리고 흐느꼈다.그날 이후로 정안의 몸은 날로 허약해졌다. 먹는 대로 토하고, 토하고 나면 계속 먹으며 자신이 빨리 낫기를 다그쳤다.힘이 있어야 반항할 수 있고 백인호를 죽일 수 있었다.백인호가 남하준에 의해 섬멸된 블랙 섀도우에게 며칠 동안 연락을 취했지만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었다.블랙 섀도우의 도움을 잃은 백인호는 날개가 부러진 까마귀처럼 전혀 날 수 없었다.어느 날 오후. 백인호가 주방에서 정안의 보양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이 휴대전화 번호는 아무도 몰랐다.백인호가 경계하며 전화를 받으니 남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인호야. 나 태준이.”백인호는 침묵하며 긴장한 채 기다렸다.“너 M국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거 알아. 내가 도와줄 수 있어.”남태준의 말에 백인호가 코웃음을 쳤다.“지금 장난쳐? 네가 나를 돕는다고? 나 잡고 싶으면 좀 더 그럴 듯한 이유를 찾아봐.”백인호는
그러나 백인호는 남태준이 남하준을 죽일 것이라고 전혀 믿지 않았다.다음 날 점심때.백인호는 남태준이 보내준 영상을 받았다.영상에서 남하준은 심장에 칼이 꽂힌 채 피를 흘리며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백인호가 영상을 반복해서 보니 편집도 아니고 소품도 아닌 것 같아 조금 흥분되었다.그는 거실에 앉아서 기다리며 10분마다 실검을 확인했다.1시간 뒤.M국 군전 그룹의 수령이 암살당했다는 헤드라인의 기사가 실검 차트를 가득 채웠다.백인호는 너무 흥분되어 뉴스를 계속 뒤적거렸다.모두 권위 있는 언론사에서 남하준의 사망 소식을 발표하여 아주 믿음직스러웠다.백인호는 휴대전화를 잡고 신나게 일어나 거실을 서성거리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인터넷 뉴스를 계속 뒤적거렸다.그는 남태준이 정말 자신의 동생을 죽일 줄은 몰랐다.역시 독한 사람이었다.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점이 매우 맘에 들었다.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남태준의 전화가 걸려왔다.그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정서가 불안해 보였고 목이 잠겨 울먹였다.“인호야. 내가 하준이를 죽였으니까 나 뇌수술 해줘. 내가 너 M국 떠나게 해줄게.”“좋아. 설비가 잘 갖춰진 뇌과 병원 준비해. 전문 조수가 세 명 필요해. 전부 뇌과 의사면 좋겠어.”“그건 내가 알아서 준비할게.”“수술 끝나면 바로 전문 조종사와 비행기 준비해줘.”“눈이 다시 보이려면 얼마나 걸릴까?”“뇌 혈괴에 의해 눌린 실명이라면 바로 효과가 있을 거야. 혈괴를 제거하면 보통 첫 번째 날에 점차 시력을 회복하는데 느린 경우도 있어. 사흘에서 다섯 날 정도 걸려. 그때 가서 상황을 봐야 해.”“인호야. 우리 이제 진짜 한 배를 탄 사람이야.”백인호는 크게 기뻐했다.“그래. 우리는 운명공동체야. 네가 다시 빛을 봐야 내가 M국을 떠날 수 있으니 안심하고 나한테 수술 맡겨.”그리고 두 사람은 수술 전 준비에 대해 상의했다.수술은 다음 날 오후에 예정되어 있어 백인호는 그날 차를 몰고 국경을 벗어났다.그러나 국경의
비 온 뒤 하늘이 맑게 갰다.정안은 2층 베란다 밖에 서서 멀리 무덤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도 따라 죽는 것 같았다.침대에서 곤히 잠든 아들을 돌아보고는 절망적인 마음이 다시 살아났다.그녀는 살아서 아들을 데리고 여기를 떠나야 했다.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얼굴이 창백하며 눈물이 자꾸 밖으로 새어 나왔다.손을 뻗어 뺨의 눈물을 닦고 방으로 돌아와 아들을 안아 살짝 품에 안으며 아들에게서 온기를 얻으려 했다.그때 아래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정안은 얼른 아들을 내려놓고 다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그녀가 잠시 훔쳐보았지만 어떤 움직임도 듣지 못했다.백인호가 돌아온 줄 알고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내려갔다.갑자기 낯익은 그림자가 그녀 앞에 나타났고 그녀는 온몸이 굳어버렸다.충격에서 설렘으로, 또 설렘에서 슬픔으로.지윤이 문 앞에 서서 눈 밑에 눈물을 반짝이며 입술을 오므리고 웃고 있었다.정안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한탄했다.“너 무사해서 너무 다행인데 지윤아. 지금 너도 여기 잡혀 왔으니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어?”지윤이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난 대문을 통해 내 발로 들어왔어요 언니.”정안은 어리둥절했고 곧 류청이 군전 그룹의 병사 몇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류청은 하찮게 여기며 중얼거렸다.“집안에 총을 든 경비원이 어쩌면 두 명밖에 없어? 칼로 해치워서 총을 쓸 기회도 없었네.”말을 마친 류청은 고개를 들어 정안을 보더니 공손하게 인사했다.“사모님. 저희가 늦었어요. 많이 놀라셨죠?”류청을 본 정안은 다시 남하준이 생각나서 말을 잇지 못하고 울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았다.지윤이 상황을 보고 안쓰러워하며 다가가 그녀를 껴안고 다독였다.“언니 울지 말아요.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요.”정안이 나지막이 울먹였다.“하준 오빠 파내세요. 데리고 집에 돌아갈래요.”류청은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누구요?”정안은 몸을 가늘게 떨며 뒤쪽 베란다를 가리켰다. “저 무덤에 오빠
정안은 움찔 놀라더니 그렁그렁한 눈으로 류청을 바라보며 눈 밑에 감격이 가득했다.남하준이 긴장하며 물었다.“왜 그래? 완자 안전한 거 맞아?”“안전합니다. 도련님.”정안은 다급히 달려가 류청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손을 약간 떨며 울먹였다.“하준 오빠!”휴대전화 너머로 남하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완자야. 미안해. 그동안 고생 많았어.”정안은 입술을 깨물고 손바닥으로 입을 꼭 가린 채 감격의 눈물을 참으며 한없이 기뻐했다.지금 이 순간, 남하준이 살아 있으니 아무리 힘든 것도 이겨낼 수 있었다.“두 사람 모두 괜찮아?”남하준의 말투가 다소 절박했고 정안은 목이 바짝 조여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말했다.“나와 아기 다 괜찮아요.”“인터넷에 떠도는 기사 다 가짜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당분간은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서 너 구하러 갈 수 없어.”“안돼요. 오지 마요!”정안의 말투가 극도로 긴장돼 있었다. 그가 오면 또 위험에 처해 돌아가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이미 한 번 남하준을 잃은 그녀는 현실에 감사하며 평생 다시는 그런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류청이 너 잘 지켜줄 거니까 너무 걱정 마.”“네. 일단 끊고 만나서 얘기해요.”“그래.”통화를 끊은 정안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류청에게 건네며 말했다.“현장 수습하고 우리 빨리 떠나요.”“네.”류청은 휴대전화를 받아들고 궁금해서 물었다.“근데 이 남자는 도련님과 왜 이렇게 닮았죠?”그때 한 병사가 입을 열었다.“혹시 인터넷에서 핫한 인플루언서가 아닐까요? 도련님 외모를 쏙 빼닮아 SNS에서 도련님을 모방하는 거로 유명해요.”류청이 경악했다.“어쩐지!”지윤이 입을 열었다.“빨리 경찰에 신고해서 이 시신을 수습해.”정안은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백인호는 일부러 비 오는 날 남하준을 닮은 남자를 데려와 그녀 앞에서 죽이며 그녀를 단념시키려 했다.정말 지독한 인간이었다.정안이 몸을 돌려 별장으로 향하자 지윤이 황급히 따라갔다.“언니 어디 가요
오후 나절.남태준은 백인호를 공항까지 데리고 가고 무사히 비행기에 태웠다.남태준은 싱글벙글 웃으며 이륙 중인 백인호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순간, 백인호는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앞으로 사랑하는 여자와 외국에서 함께 지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반 시간의 비행 후 비행기가 서서히 착륙했다.백인호가 주위를 둘러보니 공항 같지 않았다.“여긴 어디죠?”백인호가 긴장해서 묻자 조종사가 답했다.“공항입니다.”“무슨 공항이요?”조종사가 답이 없자 백인호는 목청을 높여 따져 물었다.“무슨 공항이 이렇게 작아?”조종사가 비행기를 세우고 안전벨트를 풀고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말했다.“감옥의 공항.”말을 마친 후 그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빠른 걸음으로 감옥으로 향했다.백인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황급히 조종실에 도착했지만 그는 비행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시동이 꺼진 후의 비행기를 어떻게 작동시켜야 할지는 더더욱 몰랐다.그는 당황할수록 더욱 초조해졌고 결국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앞 광장을 바라보았다.사방은 온통 구름 속으로 우뚝 솟은 담장뿐이었다.잠시 후 감옥의 철제 난간 문이 열리자 교도소장이 교도관들을 데리고 손에 무기를 든 채 걸어 나왔다.“백인호 씨, 국경 남자 교도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백인호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하늘이 무너지고 신념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남태준이 감히 그를 속이다니.‘남태준! 내가 다음 생에 귀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너 절대 가만 안 둬!’...남태준이 퇴원하자 인터넷에는 새로운 뉴스가 등장했다. M국 국방 장군 사망설이 가짜라는 해명 동영상과 뉴스가 실시간 검색어와 각종 플랫폼에 오르내렸다.임기 만료에 따른 정통 선거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낙선된 전직 정통은 조기 퇴직했고 새로 올라온 정통은 매우 젊고 박력이 있어 민중의 추대를 받기에 좋은 지도자였다.구인아는 남편의 정체를 알게 된 후 뱃속의 몇 개월 된 아이를 지웠고 그간의 오만했던 태도와는 달리 자세를 낮
정안은 다급히 남하준을 끌고 숙소로 향했다.남하준의 눈에는 따뜻함이 가득했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지체 없이 그녀를 껴안고 키스하려 했다.그러나 정안이 손을 뻗어 그의 얇은 입술을 눌렀다. “뭐 하는 거예요?”“나 바로 숙소로 데려온 건 이러려고...”“아니에요.”정안이 부끄러운 듯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일단 놔 봐요.”남하준이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자 정안은 그의 손을 잡고 스위트룸으로 들어갔다.보모가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 잠이 들었고 침대 위의 아기는 이미 몸을 돌려 혼자 침대에 엎드려 앙증맞게 놀고 있었다.울지 않고 보채지도 않는 아이는 맑고 투명한 큰 눈을 뜨고 장난감을 쥐고 깨물고 있었다.아기는 남하준을 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다시 정안을 보았을 때 흥분해서 팔다리를 움직이고 배를 공중으로 올리며 옹알옹알 소리를 질렀다.보모가 순간 잠에서 깼고 정안과 남하준을 보고 약간 긴장한 모습이었다.“도련님, 사모님 오셨어요? 제가 방금 깜빡 잠이 들었어요.”정안이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수고 많으셨어요.”아이를 돌보는 건 힘든 일이니 그녀는 감사하기 그지없었다.정안이 손을 뻗어 보호대 안으로 들어가 아들을 안아 올리자 아기는 그녀의 품에서 더욱 밝게 웃었다.남하준은 왠지 모르게 설레고 벅찼다.두 달 못 본 사이에 아이는 벌써 이렇게 많이 컸고 이제 장난감도 갖고 놀고 혼자 몸을 뒤집을 줄도 알았다.남하준은 자애로운 눈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자. 아빠가 한 번 안아보자.”정안이 천천히 그에게 아기를 넘겨주었다.남하준의 품에 안긴 아기는 순간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더니 엄숙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남하준도 귀여운 그의 작은 얼굴을 열심히 들여다봤다.두 부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지도 않고 말도 없이 그 어떠한 스킨십도 없이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정안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남하준이 호기심에 물었다.“얘가 왜 날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정안이
과학 연구는 무미건조하고 무료한 싸움이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일 년을 하루같이 연구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정안은 그렇게 오래 버티면서 주위에 이성 친구가 거의 없었고 연애할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오늘날 그녀는 과학 연구가 행복하고 즐겁게 느껴졌다.아이와 남편이 옆에 있어 외롭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유일한 단점은 너무 바쁘다는 거였다.남하준은 돌아온 며칠 동안 정신없이 바삐 돌아쳤고 두 사람의 업무 모두 매우 중요했다.유일한 만남 시간은 저녁 휴식 시간이었다.아무리 바빠도 남하준은 시간을 내서 아들과 시간을 보냈다. 아들에게 뺨을 맞은 사실을 줄곧 마음속에 새기며 부자 관계를 잘 유지하겠다고 맹세했다.남하준은 아들을 안고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았다.가드레일을 설치해 그가 중간에서 자고 아들은 왼쪽에서 자고 아내는 오른쪽에서 잤다.일이 아무리 힘들고 고돼도 저녁이 되어 행복한 시간을 즐기는 순간, 모든 고생은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정안은 여전히 책을 보는 습관이 있었고 남하준은 그녀가 밤에 책을 보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만약 넋을 놓고 보게 되면 그녀 몸을 만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그녀가 책을 집어 들려고 하면 남하준은 얼른 그녀를 침대에 쓰러뜨리고 진한 관계를 맺어 그녀가 녹초가 되어 잠들도록 했다.정안은 이번 주요 프로젝트의 수석 엔지니어로 일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고 있었다.나이도 젊고 M국에 돌아온 시간도 짧았기 때문이다.그녀의 학식이 옅어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고 남하준의 권력으로 수석 엔지니어 자리를 차지했다는 얘기도 돌았다.식당.식사 시간에 가십거리가 많이 떠도는 법이었다.여성 직원은 오히려 쉽게 정안을 받아들였지만 경력이 많은 몇몇 베테랑 과학 연구원들이 늘 이 일을 마음에 두고 자주 거론했다. 한 여자가,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20대 여자가 자기 상사로 앉게 되었으니 더욱 분통하고 달갑지 않았다.군전 그룹에는 몇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정안이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내버려 둬. 굳이 말할 필요 있어?”“하지만 모두 언니 능력을 의심하고 뒤에서 수군대고 있잖아요?”“사람의 능력은 입으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실력으로 보여주는 거야. 저 사람들의 입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과를 내는 거야.”그러나 지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뒤에서 사람을 함부로 의론하는 일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녀는 이 일을 류청에게 알렸고 류청이 남하준에게 알렸다.다음날, 그룹은 인물 프로필을 직원들에게 보냈다.안에는 M국 가장 유명한 과학자들, 그중 빛나는 사적, 업적, 명예 등이 있었다.수백 명의 과학자 사이에 백완자의 이름이 버젓이 나타났다.본명 백완자, 별명 정안, M국 가장 저명한 화학 과학자, 무기 설계 엔지니어, 경분자 개발자, Z국에서 수백 회 주요 연구에 참여했으며 큰 영예를 얻었다.이 보고서가 나오자마자 군전 그룹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과학 연구자로서, 모든 사람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정안의 과학 연구실을 물샐틈없이 에워쌌다.정안은 항상 조용한 것을 좋아했고 시간이 소중한 사람이었다.요즘 그녀의 시간은 모두 덕질하는 동료들과 접대하는 데 사용되었다.그녀는 하던 일을 제쳐놓고 뾰로통해서 남하준의 사무실을 찾았다.류청이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가 나왔다.남하준은 갑작스레 방문한 정안을 보자마자 하던 일을 제쳐놓고 그녀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고는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어쩐 일이야? 오늘은 안 바빠?”정안이 투덜댔다.“바빠 죽겠어요. 워낙 일도 바쁜데 오빠가 내 이력을 발표하는 바람에 사무실에 사람들로 가득 찼어요. 친한 척하는 사람들, 친해지려는 사람들, 연구를 지도해달라는 사람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니까요!”남하준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안고 소파에 앉아 그녀를 품에 안았다.“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처음이라 다들 흥분해서 그래. 전 세계 어느 과학자가 정안을 알고 싶지 않겠어?”정안이 불쾌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대체 왜 그랬어요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