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따스하고 해가 서산에 저물었다.사설 클럽 테니스장에서 남하준은 정통 어르신과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정통 어르신은 땀을 뻘뻘 흘리며 체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호흡이 가빠졌지만 남하준은 여유만만했다.몇 판 끝나고 이기고 지는 건 상관없었지만 정통 어르신은 이미 숨이 턱턱 막혀 손을 들어 멈췄다.“잠깐만 쉬자고.”남하준은 멈추고 천천히 휴게 벤치로 가서 물 두 병을 집어 들고 정통 어르신에게 한 병 건넸다.정통 어르신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난... 이제 늙어서 당신네 젊은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어.”남하준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아부하는 말은 할 줄도 모르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요즘 따님과 갈등이 있다고 하던데, 무슨 이유 때문이죠?”남하준이 묻자 정통 어르신은 멍해지며 안색이 어두워졌다.“왜 갑자기 우리 집 개인적인 일에 관해 묻지? 남 장군답지 않군.”“제 관심사는 어르신과 따님이 아니라 선우석이에요.”정통 어르신은 벤치에 걸터앉아 수건을 들고 뺨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내 사위가 왜?”“선우석의 신분이 의심돼요.”남하준은 정통 어르신 곁에 앉아 엄숙하게 말했다.“선우석의 DNA를 얻어주셨으면 합니다.”정통 어르신은 아연실색하더니 한참 후에야 눈치채고 물었다.“지명 수배자인가?”“아직 증거가 없어 함부로 결론 내릴 수는 없어요.”정통 어르신은 덤덤하게 웃더니 말했다.“이 정도 일에 내가 직접 손을 쓸 필요가 있나? 남 장군이 그냥 잡아가서 피를 뽑으면 되는 일 아닌가?”“선우석의 경계심이 강하고 무엇보다 섣불리 행동하다가 눈치챌까 봐 두려워요.”정통 어르신은 고개를 젖히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인아가 결혼하기 전에 내가 이미 철저히 조사했어. 집안도 깨끗하고 전과 기록도 없었어. 괜히 내 사위 붙잡고 늘어지지 말게나.”남하준은 의심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정통 어르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는 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다가
남하준이 덤덤하게 말했다.“완자는 네 오빠를 봐서라도 이 일을 추궁할 생각이 없었어. 널 고소한 사람은 나야.”유미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괴로워하며 물었다.“왜?”“이유는 없어. 어른이라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유미는 끝까지 변명했다.“고의가 아니었어!”“우리 집 곳곳에 CCTV가 설치됐어.”유미가 움찔하더니 할 말이 없었다.남하준은 더 이상 그녀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어서 차를 타려고 돌아섰는데 유미가 울먹였다.“너 전에는 나한테 이러지 않았어.”남하준은 차 문을 당기던 손을 멈추고 심호흡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보며 차가워진 말투로 말했다.“나도 네가 이렇게 무서운 사람인지 몰랐어. 그리고 네 오빠가 널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네 오빠가 아니었다면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너 한 번 보는 것조차 나에게 시간 낭비야.”유미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남하준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크게 상처받고 서러워 보였다.“돌아가서 응소 준비해. 판사가 네 수입을 참작해서 배상금을 요구할 거야. 그리고 그 금액은 반드시 갚아야 해.”유미가 고함을 질렀다.“너 돈이 부족해?”“아니. 난 돈이 부족하지 않지만 넌 인성이 부족하지. 교훈이 부족하고. 이건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이야.”유미는 덜컥 겁이 나서 급히 손을 뻗어 남하준의 팔을 잡아당겼다.“하준아. 내가...”남하준은 즉시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소리쳤다.“저리 가!”유미는 더욱 슬퍼서 감히 그의 몸에 손대지 못하고 흐느꼈다.“내가 너와 완자에게 사과할게. 충동적인 행동이었고 나 지금 정말 후회하고 있어. 나 월급이 적어서 저축한 돈도 별로 없단 말이야. 오빠도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너 이러면 동진 오빠만 힘들어져.”“네 오빠 들먹이지 마.”남하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화를 참으며 말했다.“넌 성인이야. 자기 잘못은 스스로 책임져야지.”“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날 놔줄 거야?”유미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묻자
정안은 남하준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물었다.“왜요?”남하준이 속삭였다.“너 안고 싶어서.”“많이 힘들어요?”“괜찮아.”무엇보다 마음이 더 힘들었다.“배고파요?”정안은 다정하게 그의 등을 토닥이며 안쓰러운 마음뿐이었다.“아니.”“힘들어요?”“너 안고 있으면 안 힘들어.”“방에 가요. 내가 마사지해줄게요.”정안이 진지하게 말하자 남하준이 가볍게 웃더니 나지막이 물었다.“어떤 마사지?”아주 야릇한 말투였다.정안은 바로 알아채고 그의 어깨를 툭 쳤다.“나 지금 진지해요. 전에 할머니 간병인으로 일할 때 마사지 기술을 몇 가지 배웠어요.”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부드럽게 문질렀다.“이렇게 작은 손으로 마사지한다고? 아까워서 안 되지. 나 마사지 필요 없어. 그냥 이렇게 너 안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감동한 정안은 참지 못하고 그의 이마에 키스하고 그의 얼굴을 움켜쥐고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아까 들어올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이에요?”남하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래서 일부러 나한테 뛰어온 거야?”“맞아요.”정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그럼 오빠가 기뻐할 것 같아서.”남하준이 그녀의 코를 찌르더니 사랑스럽게 중얼거렸다.“우리 완자. 어떻게 하면 나 기쁘게 하는지 잘 알고 있네.”“그럼 대체 무슨 일인지 도련님께서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남하준이 미간을 찌푸리고 엄숙하게 말했다.“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마.”정안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활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여보?”남하준은 얼굴이 뜨거워지고 눈빛이 반짝이며 미소가 점점 더 밝아졌다.“다시 한번 말해봐.”정안은 쑥스러워져 고개를 흔들었다.“한 번만 더 부르면 알려줄게.”남하준은 감격에 겨워 손에 힘을 주고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정안은 수줍게 입술을 오므리고 엷게 웃다가 더 이상 부르기가 민망해 고개를 떨구었다.“싫어요.”
몰래 선우석의 DNA를 훔치고 싶었지만 결혼식에서 얻은 교훈으로 지금의 선우석은 아주 조심스럽고 매사에 신중해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었다.정안은 이런 중대한 사건에서는 남하준의 말을 잘 따랐다.남하준이 그녀가 선우석에게 접근하는 걸 원하지 않으면 그녀는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인연이란 언제나 교묘한 법이었다.며칠 후, 지윤과 함께 서점에서 나온 정안은 근처 백화점에서 옷을 구경했는데 한 브랜드 옷가게에서 구인아와 쇼핑 중인 선우석을 만났다.정안은 인사도 하기 싫어서 그냥 가버렸는데 선우석이 먼저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이렇게 뵙네요. 사모님.”정안은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호의적이지 않은 선우석을 바라보았다.옷을 들고 탈의실에서 나오던 구인아는 정안을 보자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오늘 운세를 보고 나오지 않았더니 정말 재수가 없네.”지윤이 달려가 혼내려 했지만 정안이 그녀를 가로막으며 흥분하지 말고 진정하라는 뜻을 전했고 구인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백완자. 거기 서!”정안은 못 들은 척 성큼성큼 떠나갔고 선우석은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악에 받쳐 온몸이 괴로운 구인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저년 지금 무슨 태도야? 너무 예의가 없잖아?”선우석은 말을 하지 않았고 눈 밑의 뜨거운 열기를 숨길 수 없었다.정안과 지윤은 두 번째 가게에 가서 계속 옷을 보았고 지윤이 맘에 드는 스타일을 골라 신나게 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계속 살펴보던 정안은 판매원의 부추김에 비교적 마음에 드는 옷을 한 벌 골라 탈의실로 들어갔다.탈의실은 문이 없었고 커튼만 있었는데 판매원이 입구에 서서 지키고 있어 정안은 안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갑자기 밖에서 판매원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네. 바로 가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탈의실의 커튼이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고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음?”정안이 반응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침 옷
“언니 괜찮아요?”지윤이 부랴부랴 뛰어 들어가 정안을 끌어내 자신의 뒤로 보호했다.가게 안의 판매원들이 모두 와서 구경했다.“여보?”구인아가 걱정스럽게 다가가 선우석의 팔을 잡고 그가 감싼 곳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상당히 안쓰러워했다.“왜 그래? 혹시 백완자가 때렸어?”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이곳은 여성매장이었고 탈의실 안에는 틀림없이 여자가 있을 것이다.한 남자가 탈의실에 나타났고 심지어 아래 부위가 차였으니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선우석이 괴로운 심호흡을 하더니 중얼거렸다.“백완자 너무 독해.”구인아는 이를 갈며 정안을 노려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두말없이 손바닥을 들고 내리치려 했다.반응 빠른 지윤이 그녀의 팔을 덥석 잡고 홱 뿌리쳤다.그러자 구인아는 몇 걸음 뒤로 비틀거리다가 화가 나서 정안을 가리키며 말했다.“백완자. 너 오늘 죽었어. 절대 가만 안 둬.”“그쪽 남편이 무슨 짓을 해서 맞았는지는 안 물어봐?”지윤이 되묻자 구인아가 고함을 질렀다.“내 남편이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이 천한 년이 몇 번이나 내 남편을 꼬시려 들었어. 진작 눈에 거슬렸다고.”정안이 차갑게 웃었다.“내가 당신 남편을 꼬셔?”“백완자. 내 친한 친구의 남자를 뺏어가더니 이젠 내 남편까지 꼬셔? 너 같은 여자는 길바닥에서 몰매를 맞아야 해!”정안은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속으로 웃고 있었다. 이렇게 어리석은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 눈이 멀었을까?사정을 모르는 판매원이 옆에서 이러쿵저러쿵하며 손가락질하자 불같은 성격의 지윤은 정안이 비방당하는 꼴을 보지 못하고 나섰다.“우리 언니와 도련님은 소꿉친구고 서로 오랫동안 좋아했어. 그쪽 절친은 그저 도련님 옆에 있는 개일 뿐이야. 근데 감히 주인이 되려고 설쳐? 지금 쫓겨나게 되니 개가 함부로 사람을 물고 말이야. 아주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지금 누구보고 개라는 거야?
지윤은 정안이 떠나는 것을 보고 바로 뒤를 따랐다.두 사람은 긴장한 기색으로 차에 올랐고 지윤이 재빨리 시동을 걸고 훌쩍 떠났다.정안은 휴대전화를 꺼내서 바로 남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정안은 혹시나 선우석이 다시 킬러를 보내 그녀를 쫓을까 봐 지금 이 순간 아주 긴장했다.벨이 두 번 울리자 전화가 바로 연결되었고 남하준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안이 다급하게 말했다.“오빠. 내 몸에 선우석 피가 있는데 지금 어떡해야 해요?”남하준의 긴장한 말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옷가게에서 선우석과 구인아를 만났는데 실랑이를 벌이다가 내가 그 인간을 다치게 했고 피가 내 옷에 묻었어요.”“당장 위치 보내. 그리고 가장 가까운 경찰서에 가서 일단 숨어 있어.”남하준의 말투가 유독 긴장했다.“좋아요.”남하준은 즉시 드론을 보내 그들의 차량을 추적 보호한 뒤 부하들을 데리고 정안과 합류했다.10분 후, 정안은 무사히 남하준과 합류했고 군전 그룹 전대의 호송을 받으며 군인 병원의 검사과에 갔다.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검사과 의사가 혈액을 가지고 가서 최대한 빨리 분석하고 검사했다.결과는 세 시간 만에 나왔지만 결과만 나오고 참조 데이터가 없었다.오랫동안 DNA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했지만 전에 보관된 백인호의 DNA 데이터가 사라지고 없었다.군인 병원장 사무실 안.남하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파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원장은 아직도 컴퓨터 앞에서 조작하며 식은땀을 흘리며 남하준의 냉엄한 표정을 훔쳐보고 있었다.노크 소리가 나자 형사과 팀장이 법의학 부서 책임자를 데리고 들어왔다.두 사람은 남하준 앞에 서서 공손히 인사했다.“안녕하십니까.”남하준은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며 물었다.“찾았어요?”“죄송하지만 데이터베이스에 백인호의 DNA 자료가 없습니다.”형사과 팀장이 먼저 입을 열자 법의학 책임자가 말을 보탰다.“저희 부서에서 보관하고 있던 샘플도 분실되었습니다.”그때 원장이 황급히 다가와 고개
남하준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며 고개를 젓자 정안이 경악해서 물었다.“백인호가 아니에요?”“몰라.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백인호에 대한 DNA 자료가 전부 삭제됐고 전에 보관했던 혈액 샘플까지 모두 사라졌어.”정안이 주먹을 쥐며 이를 악물었다.“어쩐지 오늘 그렇게 침착하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더라니. 이제 보니 후환이 없는 거네요.”“지난번 내가 결혼식에서 피를 훔쳐서 만단의 대비를 한 것 같아.”남하준은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고개를 쳐들고 쉬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선우석이 대선에 출마하면 잡기가 더 어려워져.”“아주 무서운 사람이네요. 무슨 일을 하든 흔적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해버리네요.”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걱정스럽게 말했다.“내가 지금 가장 걱정하는 건 너야.”“내 걱정 말아요. 앞으로 지윤이 말고도 경호원 몇 명 더 데리고 나갈게요.”“905 공정이 곧 시작되니 너도 슬슬 준비해야 해. 이제 나랑 국경으로 가자.”“그럼 아기는요?”정안은 기분이 가라앉아 아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아직 어리잖아요. 오빠 부모님께 맡겨요? 아니면 우리 부모님께 맡길까요?”“데리고 같이 가야지.”남하준이 정안을 품에 안고 말했다.“학교에 가기 전 요 몇 년 동안은 계속 우리 곁에 둘 수 있어.”“좋아요.”도우미가 다가와 그들에게 저녁 식사를 알렸고 식탁에서 온 가족이 웃고 떠들며 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가족들이 모두 있는 틈을 타 남하준은 할아버지와 장인, 장모님께 국경에서 일하겠다고 말씀드렸다.그러자 백진이 호기심에 물었다.“난 하준이 직책과 일을 알고 있는데 우리 손녀딸이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정안과 남하준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고 서윤아가 입을 열었다.“아버님 손녀는 전에 Z국 연구소에서 일했어요.”“그곳에서 무슨 일을 했어?”서윤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건 저도 몰라요. 어차피 국가 기관이니 저희도 더 묻지 않았어요.”백정우가 말을 보탰다.“그래요. 아빠. 애가
저녁 식사 후.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때 류청이 지윤의 손을 잡고 들어왔고 서윤아가 두 사람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두 사람 어서 이리 와 과일 먹어.”류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에게 인사하고는 남하준 곁에 공손히 서서 귀가 빨개지고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제가 상의 드릴 일이 있어요.”남하준이 건너편 빈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앉아서 말해.”류청은 지윤의 손을 잡고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빙그레 웃으며 지윤의 수줍은 모습을 보면서 좋은 일을 예감하고 기대에 가득 찼다.류청이 목청을 가다듬고 긴장하며 말했다.“도련님, 사모님 저...”지윤은 수줍은 안색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가 빨리 말하기를 기대했다.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류청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저... 그러니까 저...”그는 귀가 빨개지고 목까지 빨개지면서 부끄러워서 벌벌 떨고 있는 것 같았다.지윤이 보다 못해 류청의 말을 이었다.“저희 905공정이 시작되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요.”이 말이 나오자 정안은 감격에 겨워 입을 가리고 눈시울을 적셨다.속으로 아주 감동하고 기뻤다.서윤아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그래. 아주 잘 생각했어. 꼭 성대하게 올려.”백진과 백정우도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축하를 건넸다.“두 사람 축하해.”류청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환하게 웃었고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남하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기대가 가득했다.“나를 왜 봐? 나랑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내 의견 물어볼 필요 없어.”“감사합니다!”류청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남하준은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정안과의 결혼식을 치르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늘 불안했다.“우리 초대할 거야?”“당연하죠!”남하준이 묻자 류청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어디서 올려? 결혼식은 어떤 스타일로?”정안이 호기심에 묻자 지윤이 기뻐하며 답했다.“류청 고향 집에서 M국의 전통 결혼식을 올
경찰이 한 달간 배치한 작전이 오늘로 끝이 났다.산에서 거대한 독극물 재배 기지와 원자재가 발견되었고 2t의 현물도 압수되었다.남태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촬영기지의 투자자 육건우는 체포되어 입건되었다.다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그의 변호사가 와도 보석으로 풀려날 수 없었다.취조실.남태준은 쇠 옥에 갇힌 육건우를 향해 말했다.“침묵은 최선의 선택이 아니에요. 당신이 말을 하든 안 하든 증거가 확실하다면 마찬가지로 형을 선고할 수 있어요.”육건우는 피식 웃더니 조금의 당황함도 없이 여유작작한 모습이었다.경찰이 아무리 검문해도 침묵으로 일관했다.“대장님, 잠깐 나와보셔야겠어요.”취조실 문이 열리면서 오신우가 그를 불렀다.남태준이 일어나서 떠나려고 할 때, 육건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남태준, 난 그저 평범한 영화 투자자일 뿐이야. 마약 같은 거에 손댄 적 없으니까 나 풀어줘.”남태준은 얼굴이 어두워져서 육건우를 돌아보니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눈가에 냉기가 돌았다.남태준이 나가 문을 닫는 순간 오신우가 긴장해서 말했다.“대장님. 지성이가 신고하러 왔어요.”“지성이가?”남태준이 긴장하며 얼굴을 찡그리자 오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남태준은 밖으로 나가면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무슨 일이야?”“누나가 실종됐대요.”오신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태준은 황급히 달려나갔다.그는 달려가면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종일 꺼둔 전원을 켰다.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계속 들어왔고 그중에 지성도 있었다.남태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경찰 프런트 데스크에서 뛰쳐나왔고 표정은 엄숙하고 무거웠다.지성은 남태준을 보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더욱 초조해서 말했다.“형...”남태준이 다급히 물었다.“지우가 왜?”지성은 눈시울이 흠뻑 젖은 채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누나가 아침에 장 보러 간다고 나갔다가 계속 집에 안 돌아왔어요. 누나 스쿠터는 길바닥에 쓰러져있는데 사람은 안 보여요.”그때 옆에
남태준은 경찰서로 돌아와 밤새 배치하고 새벽 4시에 많은 경찰 병력을 이끌고 이웃 마을 산꼭대기의 영화기지를 공격했다.산꼭대기에 가까운 사람들은 늦은 밤 총소리에 잠이 깼다.날이 밝자 많은 경찰차가 정적을 울렸고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났다.지우가 한창 단잠에 빠져있는데 송수빈의 전화에 잠이 깼다.지우가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송수빈의 전화를 받자 송수빈은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지우야. 지우야. 얼른 인터넷 확인해봐. 세상에. 우리 마을에서 큰 뉴스가 났어. 어젯밤 얼마나 짜릿했는 줄 알아?”“우리 마을에서?”지우는 일어나 게슴츠레한 눈을 비볐고 송수빈이 황급히 수정했다.“아니. 우리 마을 아니고 옆 마을. 산에 있는 촬영기지 있잖아. 새벽 4~5시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경찰차가 잔뜩 오가고 난리가 났대.”새벽 4~5시? 지우는 남태준 생각이 나서 군말 없이 송수빈의 전화를 끊고 남태준의 휴대전화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전원이 꺼진 상태였다.지우는 그가 임무를 나갈 때 전원을 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마음이 조마조마해진 그녀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곧바로 인터넷에 접속해 인근의 기사를 검색했다.지우는 아침 내내 걱정하며 전화도 여러 번 했다.정오가 되자 지성이 밖에서 돌아와 득의만면한 얼굴로 물을 따라 마시더니 흥분해서 말했다.“누나! 육건우가 잡혔대. 하늘도 양심이 있지.”“육건우가 잡혔다고?”지우가 긴장하며 물었다.“마약 형사한테 잡혔대? 태준 씨는 괜찮아?”“누나 남자친구 괜찮던데? 내가 방금 육건우가 묵고 있는 호텔 입구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태준이 형이 경찰 몇 명과 함께 육건우를 경찰차에 태우는 걸 봤어.”아침 내내 근심하던 지우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육건우는 잡히면 사형 아니면 종신형이야. 네가 진 빚도 갚지 않아도 돼.”지성이 흥분해서 말했다.“그러니까 말이야. 죽어도 싸지 뭐.”“이번 사건으로 교훈을 얻어서 다시는 도박 하지 말고 착실하게 살아.”지성은 테이블에 있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소
남태준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물었다.“임다희가 내게 선물한 반지 같아서 질투하고 기분 나빴던 거야?”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이 가라앉았다.남태준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 흥분하며 지우의 몸을 덥석 껴안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너도 나 좋아하지? 그래서 신경 쓰고 있는 거지?”“맞아요. 나 당신 좋아해요. 그 반지 돌려주면 안 돼요? 더 이상 갖고 있지 말아요. 네?”“지우야.”남태준은 흥분하는 말투로 달랬다.“다시 한번 말해주면 안 될까?”지우는 순순히 중복했다.“그 반지 돌려주라고요.”남태준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긴장해서 말했다.“그거 말고 첫 마디.”지우는 얼굴이 화끈거려 그의 가슴팍에 묻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수줍게 말했다.“좋아해요. 태준 씨.”“나도 너 좋아해.”남태준은 크게 흥분하여 매력적인 목소리로 지우의 귓가에 속삭였다.“사랑해. 지우야.”“그럼 그 반지는...”남태준이 바로 말을 끊었다.“그거 임다희가 준 반지 아니야.”지우가 호기심에 고개를 들고 물었다.“그럼 누구 거예요?”“그때 큰 마약 조직을 잡으면서 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물건도 압수했지만 배후의 보스만 잡지 못했어. 그 신비로운 배후의 보스는 다들 준영이 형이라고 부르는데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어.”“그 반지는 그 사람이 잠자리에 들 왕비로 선택받은 중요한 증거야. 그것만 있으면 그 사람 배에 탈 수 있거든.”지우는 충격적인 표정으로 남태준을 밀어내고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남색을 팔아 접근했던 거예요?”남태준이 피식 웃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난 선택받았지만 그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신분이 폭로됐어.”“만약 폭로되지 않았다면...”지우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용기가 없었고 남태준은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그 사람을 만났다면 지금쯤 아마 감옥에 갇혔겠지.”지우가 호기심에 물었다.“그 사람은 잠자리에서 어떤 역할인데요?”남태준은 미간을 잔
지우는 마음이 뒤숭숭해져서 다른 서랍을 잽싸게 뒤지고 양말과 팬티를 챙긴 다음 옷장 문을 닫고 황급히 남태준의 집을 떠났다.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했지만 그럴수록 바늘에 가슴이 찔리는 듯 아파졌다.지우가 다시 병원에 돌아왔을 때 남태준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그녀는 짐가방을 가볍게 내려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의 옆을 지켰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액을 보고 또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서글퍼졌다.‘임다희는 몇 번이나 당신을 해쳤는데 왜 그 여자가 준 반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전에는 당신을 죽일 뻔했고 지금은 당신을 이렇게 괴롭게 만들었는데 왜 계속 마음속에 그 여자 자리가 있냐고요.’지우는 생각할수록 슬퍼져서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 그의 큰 손 옆에 기대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남태준의 따뜻한 큰 손을 만졌고 천천히 그와 손깍지를 꼈다.지금의 지우는 너무 불안하고 조금의 안정감도 느끼지 못했다.남태준이 아직도 임다희를 사랑할까 봐 두려웠다.남태준은 은은히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천천히 눈을 떴다.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하자 지우의 거뭇거뭇한 머리가 그의 곁에 엎드려 자는 것이 보였다.여자의 손이 그와 맞닿았다.남태준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그녀가 금방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다.남태준은 달콤한 행복에 마음이 꽉 채워진 것 같았고 손바닥을 천천히 조여 여자의 부드럽고 작은 손과 더 단단하게 밀착시킨 후 다시 눈을 감았다.조용한 병실에서 지우의 존재가 가져다준 따뜻한 행복에 남태준은 그 어떤 고난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그날 밤, 남태준은 몸 안의 약효가 빠지자 서둘러 퇴원절차를 마쳤다.지우는 그에게 하루 더 병원에 머물며 지켜보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새벽 네 시에 중요한 임무가 있어서 지금 서둘러 경찰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남태준은 지우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고 그녀의
지우는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병원에 병 보러 오지 왜 왔겠어? 갑자기 왜 태준 씨를 물어?”임다희는 지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확인했다.“태준이가 당신 안 찾았어?”“아니.”지우가 고개를 젓자 임다희는 가볍게 웃었다.“그쪽이 아니라면 대체 누굴 찾아갔을까?”“그게 무슨 말이야?”지우가 일부러 이해가 안 가는 척 묻자 임다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두 사람 재결합한 거 맞지?”지우는 침묵했다.임다희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조롱했다.“거짓말할 필요 없어. 두 사람 다시 만나는 거 아니까. 태준이가 당신을 찾지 않은 건 아마 약효가 너무 강해 당신 같은 여린 몸을 망쳐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으니 다른 여자를 찾아 해결했나 보네.”“약효가 너무 세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지우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며 그녀를 만족시켜줬다.임다희는 속이 편안해지며 여유롭게 말했다.“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고. 이 시간에 당신 남자친구는 다른 여자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지우의 안색이 확 가라앉았다.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앞의 이 악랄한 여자를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남태준을 그렇게 괴롭게 만들고 무슨 염치로 지금 까불고 있을까?만약 남태준이 그녀가 임다희와 정면충돌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면 지우는 절대 임다희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남태준의 뜻에 따라 얌전하고 철든 여자친구가 되어야 했다.지우는 괴로운 척 연기하며 겨우 눈물 한 방울을 짜냈다.임다희는 그녀의 괴로운 모습을 보고 마음속의 분한 감정을 잠재우고는 실소를 터뜨렸다.“이게 당신들 사랑이야? 하하. 우습네!”그녀의 비아냥거림과 함께 차 문이 닫히고 차량이 서서히 빠져나갔다.지우는 마음을 가다듬은 뒤 택시를 잡아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태준을 걱정했다. 그의 옷이 흠뻑 젖어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지우는 기사에게 주소를 말하고는 남태준의 집에 가서 깨끗한 옷 몇 벌을 챙기려 했다.
잠시 후 한 남자 의사가 들어와 남태준이 평온하게 쉬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효과가 조금은 있네요.”말을 마친 그는 남태준의 아랫도리를 보더니 한마디 보탰다.“하지만 효과가 만족스럽지는 않네요. 휴. 환자분 물 많이 주시고 약효가 천천히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의사는 자리를 떠났고 지우는 급히 미지근한 물을 붓고 남태준의 아랫배를 슬쩍 쳐다봤다.병원의 이불이 너무 얇은 편도 아니었는데 남태준의 아랫배가 여전히 부풀어 올랐다.지우는 속으로 욕했다.‘늑대 같은 임다희! 빌어먹을!’“태준 씨. 물 좀 마셔요.”지우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남태준이 흐릿한 검은 눈동자를 뜨고 몸을 지탱하며 일어나자 지우가 서둘러 그의 등을 부축해 주었다.“아직도 힘들어요?”지우가 관심하며 묻자 남태준은 대답하지 않고 물을 마시고 다시 누워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나 이제 괜찮으니까 너 집에 가서 쉬어.”“싫어요. 여기 있을래요.”남태준은 눈을 감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돌아가라고.”“혹시 무슨 일 생겼는데 옆에 돌봐줄 사람 없으면 어떡해요?”“여기 의사도 있고 간호사도 있으니까 나 괜찮아.”“그래도 난 여기 있고 싶다고요.”남태준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흐릿한 검은 눈동자를 천천히 뜨고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몸 안의 불은 꺼졌지만 탄소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어. 넌 탄소 더미 옆의 디젤과 같아서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비유를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남태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지우는 그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여기 머무르는 게 어쩌면 그의 안정과 회복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좋아요. 나 먼저 갈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 줘요.”“그래.”지우는 병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1층 로비에서 매니저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약을 받는 임다희를 만났다.지우는 재빨리 기둥 뒤에 숨었다. 보아하니 그녀는 허리와 다리를 다친
지우는 문득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시골 옆집에서 종돈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매번 거래가 있을 때면 이웃 할아버지는 종돈에게 독한 약을 먹였고 약을 먹은 종돈은 열 몇 마리의 암퇘지와 교배를 했다.그녀는 그 장면을 본 적은 없지만 처절하고 끔찍한 돼지 울음소리는 그녀 어린 시절의 악몽이었다.정신이 번쩍 든 지우는 두말없이 펑 하고 문을 닫았다.갑작스레 문을 닫는 모습과 지우의 창백한 얼굴, 당황하는 모습에 남태준은 피식 웃었다.지우는 부랴부랴 택시를 잡았고 15분 후, 남태준은 지우와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응급실에 가서 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의사가 남태준 옆에 있는 지우를 가리키며 물었다.“환자분 여자친구예요?”남태준이 다급하게 말했다.“여동생이에요.”지우는 마음이 뭉클했다. 남태준은 스스로 고통을 참을지언정 그녀가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여자친구 있어요?”“없어요.”“내가 주소를 줄 테니 가서...”의사가 간단한 방법을 추천하려 하자 남태준이 엄숙하게 말했다.“나 경찰입니다.”의사는 말을 뚝 그치고 긴장된 듯 침을 삼키더니 웃어 보이며 애써 둘러댔다.“그러니까 제 말은 이런 경우 의사를 찾아오는 경우가 드물다는 거예요. 게다가 우리도 해독제가 없어요.”“진정제 놔주세요. 진정제가 안 되면 마취제라도...”“그런 약은 함부로 처방할 수 없고 일정한 수치에 도달해야 처방할 수 있어요. 환자분 같은 경우는...”의사는 난처해하더니 남태준의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강한 카리스마에 겁을 먹고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진정제 놓아드리겠지만 효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거예요. 그저 괴로움을 조금 억제하는 정도예요.”“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괴롭게 참아내느라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다른 약도 같이 처방해 드릴게요.”의사가 약을 처방하며 말했다.“여자친구도 없고 그런 서비스도 받기 싫다면 여동생분께 성인 가게에 가서 사달라고 하세요.”지우는 이렇게 난처한 적이 없었다.
지우가 만약 숫처녀라면 아마 고생할 것이다.남태준은 생각하다가 결국 휴대전화를 꺼내 구급차를 불러 의사를 찾아 해결할 생각이었다. 휴대전화를 찾아 다이얼을 돌리려던 순간, 조수석 문이 열리면서 지우가 다급하게 들어와 앉더니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태준 씨?”남태준은 움찔 놀랐다. 뜨거운 눈으로 지우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니 입이 바짝 마르고 욕망이 최고조에 달했다.지우는 남자가 머리와 몸이 흠뻑 젖어 숨도 약간 헐떡이는 것을 보고 몸을 기울여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타오를 듯한 고온에 지우는 화들짝 놀랐다.“태준 씨 열 나요.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요.”남태준은 꾹 참으며 천천히 눈을 감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운전할 줄 알아?”“아니요.”지우가 긴장하며 말했다.“방금 택시 타고 왔어요. 택시 타고 병원에 데려다줄게요.”택시?남태준은 자신이 통제 불능이 되어 택시에서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몰라 걱정했다.지우는 휴지를 뽑아 그의 볼과 목의 물기를 닦아 줬다.여자의 몸에서 나는 향기, 손바닥의 부드러움은 치명적인 유혹처럼 그를 걷잡을 수 없이 달려들고 싶게 만들었다.“지우야.”남태준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눈을 감고 감히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하며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방금 다희를 만났어.”지우는 땀을 닦는 동작을 멈추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티 나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리고요?”“그리고 이렇게 됐어. 너무 괴롭고 답답해 죽을 것 같아.”남태준은 침을 삼키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지우의 시선은 그의 고통스러운 안색에서 내려와 그의 가슴팍을 보니 기복이 아주 심했고 더 아래로 내려가니 운전석에 앉아도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무섭게 부풀어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임다희가 약을 먹였어요?”지우는 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어쩔 줄 몰랐다.그러자 남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어떡해요?”지우는 부랴부랴 고개를 내밀어 근처에 호텔이 있는지 살폈다.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그건 지난번에 이미 설명했잖아.”“그 사람 내가 만나야겠어. 주소와 연락처 줘.”“없어.”임다희는 냉정한 얼굴로 어금니를 깨물며 악에 받쳐 말했다.“내가 그렇게 큰 단서를 줘서 네가 공을 세웠는데 넌 내게 조금의 감사함도 없이 이런 태도로 날 심문해?”“네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내가 너 경찰서로 데려가 어떻게 해서 그 단서를 얻었는지 조사할 거야. 너 절대 쉽게 못 벗어나.”임다희는 피식 웃더니 심호흡을 하고 중얼거렸다.“정말 어이가 없어.”남태준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그 술을 마신 후 몸이 따뜻해짐을 느꼈다.알코올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따뜻함이 점차 뜨거움으로 번지고 일부 기능은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해지며 의식이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컵을 보더니 와인을 바라보았다.컵은 닦았으니 틀림없이 문제가 없을 것이고 문제는 아마 개봉하지 않은 것 같은 와인에 있을 것이다그가 방심했다.남태준은 더 이상 임다희를 캐묻지 않고 벌떡 일어나 두말없이 성큼성큼 돌아서서 가버렸다.“태준아!”임다희가 급히 뒤쫓아가 남태준을 뒤에서 덥석 끌어안고 두 손을 놓지 않았다.“가지 마. 태준아. 사랑해.”임다희는 와인에 매우 강한 약을 넣었다. 소 열 마리라도 이 약효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남태준의 경계하고 신중한 성격을 알고 일부러 와인에 약을 넣은 다음 개봉하지 않은 것처럼 포장하여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했다.“이거 놔.”남태준은 화를 꾹 참고 나지막이 명령했지만 임다희는 한사코 놓지 않았다.그의 몸을 더 꽉 껴안고 자기 몸을 그의 몸에 문지르며 그를 통제 불능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남태준의 눈빛이 가라앉더니 임다희의 손목을 힘껏 잡아당겨 어깨너머로 세게 넘어뜨렸다.펑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임다희의 괴로운 울부짖음 소리가 들렸다. 고통스럽게 땅바닥에 뒹굴며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초라했다.“내일 다시 봐.”남태준은 매섭게 말하고는 방에서 사라졌다.그는 걸으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