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해적은 다급히 돌아섰다. 어깨에 걸친 총도 미처 들지 못했는데 권총 두 자루가 이미 그의 머리 양쪽을 조준하고 있었다.해적은 그대로 제자리에 얼어붙었다.이때 검은 무장 전투복을 입고 손에 총을 든 군대가 위엄 있고 늠름하게 들이닥쳤다.맨 앞장선 사람은 차갑고 도도한 모습을 보였는데 마치 만천하를 손에 거머쥔 듯한 카리스마가 흘러넘쳤다.그는 바로 군전 그룹의 남하준이었다.서다인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가장 위급할 때 남하준은 늘 때맞춰 나타나는데 어떻게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물론 그녀 때문에 온 건 아니었지만 서다인은 그래도 가슴이 벅찼다.이때 백하린이 사람들 속에서 일어서더니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우리 하준 오빠가 나 구하러 왔어.”서다인은 잠시 흠칫하다가 얼굴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백하린은 신나게 남하준을 향해 뛰어갔다.하지만 남하준은 엄숙한 얼굴을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뒤로 물러서.”백하린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달려가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하준 오빠, 드디어 나 구하러 온 거예요? 엉엉...”백하린이 해적의 옆을 지나갈 때 해적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자기 쪽으로 끌어오고는 칼을 꺼내 그녀의 목에 갖다 댔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제멋대로 행동하는 백하린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그렇게 다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해적은 손에 든 칼을 백하린의 목을 받치고 있었다. 예리한 칼날이 그녀의 피부를 뚫자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백하린은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녀는 울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하준 오빠, 엉엉, 빨리 나 살려줘요. 이 사람을 죽이고 날 살려달라고요...”해적이 어금니를 깨물더니 세트리아어로 말했다.“날 보내줘...”남하준의 얼굴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우람한 몸집의 그는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인데?”원숭이 마스크를 한 해적이 또 무슨 말을 했는데 여전히 세트리아어라 알아들을 수
사람들은 모두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류청과 정호, 그리고 군전 그룹의 전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서다인이 국제적으로 지위도 별로 없는 이런 작은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안다니?남하준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겉으로는 침착하고 덤덤한 척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세트리아어를 하는 서다인 때문에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남하준은 차분함을 유지하며 물었다.“1g의 뭐?”남하준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서다인은 사람들 앞에서 차마 모든 걸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참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하준 씨가 계속 찾고 있던 그 희귀 원소 말이에요.”남하준의 검은 눈동자에는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마스크를 쓴 해적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하린이를 풀고 물건을 내놓으면 살려는 줄게.”남하준이 이토록 백하린을 신경 쓰는 것을 보니 서다인은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세트리아어로 해적에게 통역했다.해적이 또 무슨 말을 하자 곧이어 서다인이 통역했다.“요트 한 대 준비해 달래요.”남하준이 명령했다.“요트를 준비해.”원숭이 마스크를 쓴 해적은 백하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군전 그룹의 전사들도 총을 조준한 채 같이 따라 나갔고, 통역을 해야 하는 서다인도 당연히 따라 나갔다.해적이 떠나기 전 말을 길게 늘어놓았지만 서다인은 그중 몇 마디만 통역했다.원숭이 마스크의 해적은 살기 위해 기꺼이 검은색 유리병을 남하준에게 내던졌다.검은색 유리병은 하늘 위로 완벽한 포물선을 그려 남하준의 손에 떨어졌다.남하준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손에 넣은 유리병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기분이 한껏 다운된 서다인은 남하준에게 물었다.“거리가 그렇게 가까웠는데 왜 총을 안 쐈어요?”남하준은 그저 눈을 가늘게 뜬 채 검은색 유리병만 지켜보며 서다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한참 후, 남하준은 서다인을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하린이만 풀어주면 이제 가도 된다고 알려.”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대우를 하니 서다인은 분노가 끓
크루즈 밖.해적은 백하린을 놓아준 뒤 요트를 타고 떠났다.백하린은 상처 입은 목을 움켜쥐며 남하준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원수이 마스크를 쓴 해적이 탄 요트를 가리키며 마구 소리를 질렀다.“하준 오빠, 얼른 부하들더러 총을 쏘라고 해요. 이 정도 거리면 충분히 죽일 수 있어요.”남하준은 백하린을 품에서 밀어냈다. 그녀의 손을 내려놓고는 상처를 검사한 뒤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동맥은 다치지 않은 것 같으니 붕대를 감으면 괜찮을 것 같아.”백하린은 분노가 끓어올랐다.“총을 쏴요, 하준 오빠. 이러다가 도망가겠어요.”남하준은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류청에게 말했다.“붕대 감는 걸 까먹지 마.”백하린은 해적이 탄 요트가 눈앞에 사라진 걸 보자 화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남하준은 이미 부하들을 데리고 크루즈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하준 오빠, 나 붕대 안 감아줄 거예요?”백하린은 그를 따라가더니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방금 나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아직도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남하준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고 정호와 류청은 그의 뒤를 따랐다.류청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도련님, 어떻게 처리할까요?”남하준이 엄숙한 얼굴을 보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요트에 위치추적기 달았지?”“네.”“사람 붙여. 그놈 아지트를 찾으면 아지트도 몽땅 부숴버려.”“알겠습니다.”정호는 공손하게 대답한 후 바로 자리를 떴다.백하린은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종종걸음으로 남하준을 따라잡았다.남하준은 미간을 구기더니 류청에게 분부했다.“네가 상처 좀 처리해 줘.”“도련님, 백하린 씨의 성격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분명 도련님더러 붕대를 감아달라고 난리를 칠 겁니다. 만약 도련님이 나서지 않는다면 상처가 아물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남하준이 발걸음을 멈췄다.백하린은 숨을 몰아쉬며 겨우 따라왔다. 그녀는 집요하게 남하준의 팔을 잡으며 계속 칭얼거렸다.“하준 오빠, 어떻게 그럴
남하준은 손을 주머니에 넣은 뒤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덤덤하게 물었다.“기억을 잃기 전에 만난 거야?”“기억을 잃은 것도 거짓일걸?”백인호가 자신만만하게 설명했다.“내가 자기를 버린 걸 복수하기 위해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하며 거리를 두는 게 아닐까?”남하준의 머릿속에는 서다인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그때 남하준이 이렇게 물었었다.“좋아하는 사람 있어?”그리고 서다인은 이렇게 대답했다.“네, 다만 그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이번 생은 절대 이뤄지지 않을 사랑이에요.”‘그 사람이 아마 인호 형이겠지?’남하준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슴에 뭔가 걸린 듯한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갔다.“그런 가정에서 어떻게 그런 능력들을 키웠는지 몰라.”백인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옛날에는 왕궁의 공주들보다도 다재다능한 게 기생이었어. 가정 때문에 편견을 가지면 안 되는 거잖아.”“그 말도 맞네.”남하준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백인호를 바라봤다.“인호 형, 우리를 축복해 줘.”남하준은 무심한 보이지만 진지하게 백인호를 향해 서다인은 자기 여자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백인호는 착잡한 얼굴로 남하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뭐라고 한 거야?”남하준은 또박또박 대답했다.“결혼을 형에게 알리지 않은 건 아직 식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야. 오랫동안 알고 지낸 형으로서 우릴 축복해 주기를 바라.”백인호의 얼굴색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너 예전에 하린이를 엄청 좋아했잖아. 하린이밖에 모르던 놈이 쉽게 마음이 변했을 리가 없어. 하린이는 내 조카인데 어떻게 널 축복하라는 거야?”남하준이 두 사람을 축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절대 백하린 때문이 아니었다.‘앞으로 조심해야겠군.’남하준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세상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어디 있어. 할머니께서 직접 정해준 사람이야. 결혼을 다 한 마당에 끝까지 책임져야지.”얼굴색이 한층 더 어두
서다인은 뷔페 레스토랑에 도착하고는 접시에 야채와 과일을 보이는 대로 집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일차 한 잔 챙기고는 방으로 돌아갔다.방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흠칫하더니 발걸음을 멈췄다.문을 두드리고 있던 남하준도 고개를 돌리자 음식을 챙기고 돌아온 서다인을 발견했다.눈이 서로 마주치자 두 사람 모두 어색한 마음이 들어 왠지 모르게 전보다 더 거리를 두게 되었다.남하준이 그녀에게 걸어가면서 그녀의 접시를 들려고 했다.“내가 도와줄게.”서다인이 다급하게 거절했다.“아니에요, 혼자...”하지만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남하준이 그녀의 접시를 가져갔다.더 이상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서다인은 먼저 가서 문을 열었다.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간 후 서다인은 다시 문을 닫았다.남하준은 방을 둘러보더니 접시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서다인은 유난히 어색해 보였다. 매번 남하준과 단둘이 있을 때면 온몸이 절로 굳어진다. 긴장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설레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1주일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는지라 사실 오늘 만나기 전까지 서다인의 머릿속에는 온통 남하준 생각뿐이었다.하지만 그 일이 일어난 뒤로 가슴에 응어리가 맺혔으니 억울한 마음이 계속 가슴에 사무쳤다.“이렇게 적게 먹어서 배가 불러?”남하준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서다인은 테이블 앞에 앉아 포크를 들고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고 무시했다.남하준의 얼굴색이 조금 어두워졌다.그는 서다인 맞은편에 앉더니 여유롭게 의자에 기대며 물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왜 말을 안 하는지 몰라서 묻는 건가?’그 생각에 입맛까지 떨어졌다.화가 치밀어 오른 서다인은 포크를 내려놓고 잔을 들어 과일차를 마셨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서다인의 맑은 눈망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청순함이 느껴질 정도였다.그 눈을 보고도 남하준은 어떻게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서다인이 말할 때까지 남하준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쓰던 포크로 과일 집어서 남하준에게 준 거야?’ 정말 미쳤나 봐.서다인이 정신을 차리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움츠렸다.“미안해요, 나...”서다인이 손을 거두기도 전에 남하준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아 수박을 입에 넣었다.서다인은 바보처럼 남하준의 입술이 닿은 포크를 멍하니 바라봤다.‘여기... 여기에 내 입술도 닿았잖아. 그럼 우리 간섭 키스를 한 건가?’그런 생각만 해도 서다인은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온몸이 굳어졌다.하지만 그녀와 달리 남하준의 반응은 무척 덤덤했다.그는 수박을 삼키고는 느긋하게 평가를 내렸다.“달긴 한데 양이 너무 적네.”서다인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와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방금 내가 쓴 포크였어요.”서다인의 사과에 아무 생각이 없던 남하준은 흠칫하더니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뜨거워진 분위기 때문인지 자꾸 앵두 같은 서다인의 입술에 시선이 갔다.서다인은 천천히 입술을 앙다물었다. 얼굴은 사과 알처럼 새빨개졌다.남하준은 그녀의 한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입술도 바짝바짝 말랐다.수많은 남자를 겪은 서다인에게서 천박함이나 가벼움이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맑고 순수한 기운만 느낄 수 있었다.부끄러움이 많고 얼굴이 쉽게 빨개지고 눈물도 많은 걸 보니 꼭 세상 물정을 모르는 단순한 소녀 같았다. 그런 서다인을 누가 10여 년 동안 남자에게 몸을 팔아 돈을 번 여자라고 생각하겠는가?남하준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일부러 덤덤한 척했다.“나도 당신이 쓰던 걸 안 꺼리는데 당신은 내가 쓰던 걸 꺼리는 거야?”서다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아니에요, 꺼리는 거 아니에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포크로 과일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남하준은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얼굴이 새빨간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어린 시절의 백하린 같았다.특히 서다인
남하준은 겨우 진정하고는 고개를 돌렸는데 마침 옷깃으로 조금 드러난 그녀의 하얀 속살에 시선이 갔다.서다인은 테이블에 몸을 숙이고 남하준을 바라봤는데 자신의 옷이 좀 헐렁한 것은 전혀 발견하지 못한 눈치였다.‘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네.’남하준이 시선을 옮기고는 살짝 입을 벌려 숨을 몰아쉬었다.찌릿한 이 기분은 낯설기도 했지만 왠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참을성 하면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텐데, 이거에 절대 넘어가면 안 되지.’“그것 말고 다른 말은 더 안 했어?”남하준의 목소리가 점점 허스키해졌다.서다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없는데요.”남하준은 서다인의 어깨를 꾹 눌러 의자에 잘 앉히고는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하지만 서다인의 눈은 샘물처럼 한없이 맑았다. 백옥같은 피부에 앵두 같은 입술은 그야말로 남하준을 유혹하고 있었다.남하준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목울대가 울렁이면서 입이 바짝 말랐다.‘나 미친 건가? 왜 서다인한테 반응을 하는 거지? 아니야, 나 성인 남자잖아. 서다인은 내 아내고. 욕구가 생기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남하준은 어색한 마음을 애써 숨기려고 했다. 그리고 낮고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서다인에게 물었다.“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돼?”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후끈거렸다.서다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남하준을 바라봤다. 오늘 그는 왠지 모르게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에 그녀는 몸 둘 바를 몰랐다.서다인이 되물었다.“크루즈에 남은 방이 없대요?”남하준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있는데 당신이랑 자고 싶어서.”‘아직도 내 뜻을 못 알아챈 거야? 수많은 남자를 겪었다며? 그런데 왜 못 알아듣는 거야?’서다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남하준의 말투와 눈빛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딘가 불편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절박해 보였다.두 사람은 자주 한 침대에 잤으니 서다인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남하준은 워낙 백하린을 사랑하기 때문
서다인은 황급히 책을 집어 들었다.얼굴은 새빨개졌고 시선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동공 지진이 일어났지만 본능적으로 자꾸 남자의 몸을 훔쳐보곤 했다.서다인은 책으로 새빨개진 볼을 가리고는 톤이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왜... 왜 옷도 안 입고 나와요?”남하준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고 옆에 올려놓더니 그녀에게 점점 다가가면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입으면 어차피 또 벗어야 하잖아. 너무 귀찮아서.”그 말을 들은 서다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다른 곳에 시선을 둘 수도 없어 그윽한 그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왜 옷을 벗고 자는데요?”남하준은 멈칫하더니 할 말을 잃었다.순진무구한 서다인의 표정과 쑥스러움이 가득 묻어난 새빨간 볼, 백인호는 분명 서다인이 기억을 잃는 게 연기라고 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서다인이 보인 순수함도 연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남하준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서다인이 다급하게 옷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크루즈 방 옷장에 모두 깨끗한 파자마가 준비되어 있더라고요. 얼른 입어요.”남하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오해한 거네.’서다인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남하준은 아쉬운 마음으로 옷장으로 다가가고는 파자마를 꺼내 입었다.그가 침대에 돌아왔을 때 서다인은 이미 그를 등져 누운 상태였다.이런 일은 강요할 수도 없으니 남하준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처음에는 서다인이 바닥에서 자려고 해 남하준은 버럭 화를 냈었다.이제 와서 잠자리를 가지려 한다면 이보다 더 창피한 일은 없을 것이다.남하준은 잡념을 떨치고 침대에 누운 후 불을 껐다.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지만 맑은 달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긴장감, 그리고 알 수 없는 욕구 때문에 두 사람 모두 호흡이 거칠어졌다. 고요한 분위기에 그 소리는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한참 후, 남하준이 먼저 잠긴 목소리로 정
퇴근 후 집에 들어온 남우영은 냉장고에 붙은 메모, 그리고 방에 가지런히 놓인 선물들과 그 위에 올려놓은 그의 블랙카드를 발견했다.답답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외투를 대충 침대 위에 던진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허리를 숙였다.그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선물과 카드를 돌려준 걸 보니, 내일은 이혼 서류를 건네겠다는 뜻인가?’그 생각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잠시 고민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남우영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다은 씨, 얘기 좀 해요.”방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말했다.“다은 씨...”잠시 후, 방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은 일찍 자려고요.”시간을 보니 아직 자기에는 이른 초저녁이었다.남우영은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방으로 돌아간 그는 샤워를 마친 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밤 9시경, 남우영은 다시 이다은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직접 등록된 지문으로 방문을 열었다.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고 거실의 불빛이 비스듬히 새어 들어와 희미하게나마 침대의 윤곽만이 보였다.남우영은 문을 닫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잠들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던 이다은은 문 열리는 소리에 긴장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어둠 속에서 다가온 남우영이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남우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다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녀의 경계심이 가득 담긴 눈빛에도 불구하고 남우영은 대답 대신 이불을 들추고 그녀 옆에 누웠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이다은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남우영 씨!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요?”남우영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내가 내 아내를 안고 자겠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이참에 우리 말도 놓자.”이다은은
이다은은 남우영의 메시지를 읽고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화난 목소리로 혼잣말했다.“남우영, 나쁜 놈! 돈 많고 권력 있다고 다 네 맘대로 되는 줄 아는 거야? 사람을 이렇게 갖고 놀면 재밌어? 정말 너무해...”그녀는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충분히 쉰 덕분인지 몸이 한결 가벼워진 이다은은 간단히 씻고 준비를 마쳤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그녀는 남우영이 눈을 뜨기도 전에 이미 집을 떠난 상태였다.그녀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다시 우주항공청으로 향했다. 남은 데이터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연구소로 들어선 그녀는 몇몇 뛰어난 교수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교수들은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규 학위가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점심시간, 이다은은 교수들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그녀는 밝고 친근한 성격 덕분에 교수들과 금세 가까워졌다.정안 교수는 유난히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이다은 씨,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돼요?”“스물일곱입니다.”정안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정말요? 믿기지 않네요. 제 아들이랑 동갑인데, 훨씬 어려 보이세요.”이다은은 머뭇거리며 물었다.“교수님, 자녀가 몇 분 계세요?”정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들 하나요.”“아, 그러시구나...”이때 옆에 있던 교수들이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정 교수님, 혹시 이다은 씨를 아드님께 소개하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정안은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아니에요. 우리 아들은 다은 씨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다른 교수는 웃으며 농담을 이어갔다.“그거 반어법 아닌 거 확실하죠?”이다은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안은 그녀가 불편할까 봐 서둘러 말했다.“무슨 그런 말씀을! 물론 우리 아들이 다른 씨같이 참하고 능력 있는 여자 친구를 만난다면 저야 기쁘겠죠. 하지만 우리 아들은...”정안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쉬면서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이
남우영의 폭풍 같은 키스에 이다은은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어느새 그녀는 모든 것을 맡긴 채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강렬한 입맞춤과 단단한 품 안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은 이미 이성을 잃고 그의 리드에 따르고 있었다.숨은 점점 가빠지고 온몸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린 듯했고, 그녀는 자신이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두 사람의 침실은 2층에 있었지만, 거실 소파 앞에 다다르자, 남우영은 이다은이 갑작스럽게 이성을 되찾아 자신을 밀어낼까 두려워 서둘러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이다은은 여전히 그의 키스에 취해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고 가슴은 폭발할 듯 두근거렸다. 아슬아슬하게 이다은의 온몸 곳곳을 부드럽게 만지던 그의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고, 거실의 공기는 뜨겁고도 위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남우영은 테이블 위에서 리모컨을 집어 들어 거실의 조명을 어둡게 조정했다. 은은한 빛으로 바뀐 거실은 마치 꿈속 같은 몽환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다은은 이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 자신이 언제 옷을 벗었는지도 알지 못했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살이 찢기는 듯한 첫 경험의 고통이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아... 아파요!”이다은은 고개를 돌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며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며 간신히 말했다.“남우영 씨, 미쳤어요? 진짜 나쁜 놈이에요... 흑...”“미안해요... 다은 씨... 정말 미안해요.”남우영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안하다고 속삭였지만, 고장난 1톤 트럭처럼 절대 멈추지 않았다.그의 강압적인 태도는 이다은을 더욱 혼란스럽고 무력하게 만들었다.이다은은 그의 품속에서 몸부림치며 울었다. 고통과 두려움,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고, 더 이상 어떤 존중도 느낄 수 없었다.‘내가 싫다고 했는데도 멈추지 않아
두 사람이 차에 타자,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했다.이다은은 창가 쪽으로 몸을 틀어 최대한 남우영과 거리를 두며 참았던 화를 터뜨리듯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남우영 씨, 왜 자꾸 억지 부리시는 거예요?”남우영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의자에 기대고 짐짓 느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억지라니요.”“억지잖아요! 남우영 씨의 차를 얻어 타고 싶지 않다고 분명하게 얘기했잖아요!”“다은 씨, 제가 잘못한 거니까 저를 미워해도 돼요. 저를 원망한다 해도 할말 없고, 심지어 때려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혼은 절대 안 돼요.”이다은은 울분을 담아 쏘아붙였다.“이건 사기 결혼이에요! 이 결혼은 애초에 무효라고요!”“사기 결혼이라... 그 말 누가 믿을까요?”이다은은 그의 눈빛과 말투에 당황한 듯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사기 결혼이라니... 보통 그런 건 돈이나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잖아. 근데... 남우영 같은 부자가 나같이 탈탈 털어도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 여자를 속여서 결혼했다? 그걸 누가 믿겠어?’“그건...”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있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무거운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다.이다은 역시 이혼을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좁힐 수 없이 큰 간격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를 옭아매게 했다.이다은이 아무리 분수를 알고 결혼을 요구해도 남우영은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다은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남우영은 평소처럼 주방으로 향해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한때는 대저택에서 손끝 하나 물에 적시지 않던 도련님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요리하는 시간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이다은은 씻고 나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그때, 방에서 나오던 그녀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더니 흠칫 놀라며 다급히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남우영 씨! 제발 이제 저를 위해 요리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거... 받을 자격 없다
이다은은 정안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화학 교수라고 하면 보통 나이 많은 대머리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세련되고 기품 있는 분도 있구나.’정안은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뒤쪽 데이터에서 또 편차가 발생했습니다. 이전에 데이터를 성공적으로 수정했던 동료에게 다시 맡겼지만, 이번엔 손도 못 대더군요. 이유를 물어보니 그 데이터를 수정했던 숨은 고수가 있다며 다은 씨를 언급했어요.”이다은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정안 교수님, 이덕수 차장님,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 제가 잘못했습니다. 신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받은 돈은 다 돌려드릴게요. 각서도 쓰고 협약서에도 서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데이터를 유출하거나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정안은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다은 씨, 오해하신 것 같네요. 저희는 당신 씨를 감옥에 보낼 생각 전혀 없어요. 다만 데이터를 직접 확인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주실 수 있을까요?”이다은은 순간 멍하니 정안을 바라보다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기대와 긴장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덕수마저 옆 의자를 당기며 권했다.“자, 여기 앉으세요.”이다은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린 가운데,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마우스를 집어 들었다.비록 M국 항공우주대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항공우주 데이터 분석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였다. 자격이 부족하다며 좌절하는 대신, 독학으로 공부하며 스스로 능력을 키워온 결과였다.시간이 흘러 30분이 지나자, 이다은은 화면에 집중한 채 외쳤다.“찾았어요! 여기 오류가 있네요.”방 안의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문제는 단순히 코드 하나가 어긋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수정하기 위한 접근 방식은 쉽지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반면 남우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저는 이다은의 남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그 이다은 말입니다.”그의 말에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고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침묵을 깨고 여중권이 겨우 입을 열었다.“오늘 이렇게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이 일 때문이겠군요.”여민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우영을 바라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저를 홍보팀에 들여온 것도 계획된 거였나요? 저를 직접 면접 본 것도 다 계획이었나요?”남우영은 부드럽지만 의심의 여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물론입니다. 여민지 씨가 제 아내를 사칭한 증거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제 아내로 위장해 제 아내의 학위를 가로채고, 그 신분으로 회사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옥에 갈 이유가 되니까요.”여민지는 온몸을 떨며 부모를 불안하게 쳐다봤다.여중권은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남 대표님, 대화로 해결합시다. 과거 일인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어려운 이씨 가문을 도와줬던 건 대표님도 잘 아실 겁니다.”남우영은 냉소를 띤 채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당신 딸을 회사에 들인 이유가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란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걸 제대로 정산할 때가 됐군요.”여중권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이혜원과 여민지는 안절부절못하며 필사적으로 남우영에게 용서를 빌었다.“남 대표님,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어떤 방법이든 따르겠습니다.”그러나 남우영은 비웃으며 단호히 말했다.“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잠시 후, 경찰들이 레스토랑에 도착했고, 세 사람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 체포되었다.여민지는 울면서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했지만, 남우영은 흔들림 없이 그들을 외면했다.레스토랑을 나서며 남우영은 차로 돌아갔다.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
이다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고 단 하나의 문장만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네. 이러다 감옥에 가는 건가? 그런데 나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남씨 가문 며느리가 감옥에 가면 그야말로 집안 망신이겠지?’그녀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막막한 심정으로 끌려갔다.한편, 남우영은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를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레스토랑에서 남우영을 만난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의 정체를 알게 된 여민지의 부모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등장했다. 마치 딸이 재벌가 며느리라도 되는 듯, 두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남우영은 마주 앉아있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전직 공무원에 전직 판사라...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 다은 씨 같은 약자에게는 그들의 권력이 얼마나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을까...’여민지의 아버지, 여중권이 먼저 입을 열며 공손히 물었다.“남우영 씨는 어디에서 일하고 계십니까?”“에이스타 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이번에는 여민지의 어머니, 이혜원이 대화를 거들며 말했다.“우리 딸과는 얼마나 알고 지내셨어요?”“얼마 안 됐습니다.”이혜원이 다시 물었다.“그럼 두 분 관계는 어느 정도로 발전한 건가요?”남우영은 태연히 답했다.“오늘이 처음으로 저녁 약속을 한 정도입니다.”여중권과 이혜원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중권이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첫 만남부터 저희를 초대하신 이유는 뭔지... 혹시 결혼 이야기가 나온 건가 싶어서요.”남우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결혼 이야기라니요. 두 분은 저와 다은 씨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이혜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민지가 황급히 끼어들며 말했다.“아빠, 엄마... 대표님께서 두 분을 직접 뵙고 싶어 하셔
여민지는 모두의 칭찬과 아부 속에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며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남우영은 여느 때처럼 집으로 향하지 않고 차 안에 앉아 조용히 로비를 응시하며 이다은이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시간이 흘러 대부분 직원이 퇴근했지만, 그녀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조바심이 난 그는 차에서 내려 곧장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길을 가로막았다.“대표님, 안녕하세요.”여민지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밝게 인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네.”여민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대표님, 오늘 회사에서 떠도는 이상한 소문 때문에 마음 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저도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모르겠어요.”남우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무슨 소문이요?”“대표님이 저를 좋아하신다는 얘기요. 회사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수군거리더라고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심지어 대표님이 저에게 적극 대시한다고들 해요...”남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여민지는 그가 미소 짓는 걸 보고 신이 난 듯 한 발 더 다가섰다.“대표님, 기회 되면 저녁 식사하면서 조용히 얘기 나눠보는 건 어떠세요?”남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짧게 답했다.“좋아요. 부모님도 모시고 나오세요.”여민지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뭐라고요? 처음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요?”남우영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나갑시다.”여민지는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들뜬 마음으로 주변 직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남우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한편, 건물 모퉁이에 숨어 있던 이다은은 두 사람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들이 함께 차
또다시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이다은은 뒤척이며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불안과 두려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만약 이 사실이 남우영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쥔 채 생각했다.‘현실은 동화가 아니야. 왕자가 신데렐라와 결혼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있을 수 없어.’다음 날 아침, 이다은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남우영이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녀는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회사에 도착하자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익숙한 듯 주어진 일을 받아 들고 묵묵히 책상으로 돌아갔다. 문서를 정리하고 자료를 검색하는 등 사소한 일을 처리하며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그녀는 팀장에게서 늘 가벼운 업무만 배정받았다. 학력이 높지 않은 데다 특별 채용으로 입사한 그녀를 향한 동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사랑스러운 외모와 우아한 몸매는 사람들이 그녀를 오해하게 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동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식사하러 나갔다. 그러나 몇몇 직원들은 그녀처럼 사무실에 남아 빵이나 배달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이다은은 무심히 빵을 뜯으며 한숨을 내쉬었다.‘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결혼을 하게 된 거지... 어떻게 에이스타 그룹의 대표랑 번개 모임을 가지듯 결혼할 수가 있냐고!’아직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덕분에 이렇게 쉽게 항공 개발 부서에 들어오다니... 이건 분명 내 능력에 비해 과분한 일이야.’그녀가 빵을 입에 물고 멍하니 앉아있던 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이다은 씨.”그녀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세련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남자가 한 손에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도시락을 그녀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공손히 말했다.“대표님께서 준비하신 점심입니다.”이다은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주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