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는 병원 CCTV도 있고 휴대전화 기록도 있어요. 이것이 바로 당신이 함부로 내 남편 전화를 껐다는 증거예요.”“만약 내 남편이 아직도 당신을 친구로 여긴다면 그저 전근 보내는 정도로 처리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안보국에서 조사받을지도 몰라요. 그런 행동은 스파이로 의심받아 마땅하니까.”현장에 있던 모두가 놀랍고 의아한 표정으로 유미를 바라보았다.유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긴장하고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아니야. 난 스파이가 아니야.”정안은 컴퓨터를 접고 따듯하게 웃으며 말했다.“나한테 설명할 필요는 없고 남편한테 설명하세요. 두 사람 우정이 깊으니 아마 안보국 조사까지 받게 하지는 않겠죠.”정안은 겉으로는 덤덤한 척했지만 유미와 남하준의 우정이라고 얘기하니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현장을 쓱 둘러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께서 하시는 게임에 대해 저는 정말 몰라요. 제가 아는 것에 대해 여러분들도 잘 요해하지 못하니 제가 이 모임에 낄 수가 없네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정안은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한 뒤 유미를 보며 말했다.“유 비서가 입건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저는 유 비서와 거리를 두는 게 좋겠네요.”“인아 씨,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정안은 구인아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꿋꿋이 돌아서서 자신만만한 발걸음으로 떠났다.지윤이 그 뒤를 바싹 따랐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다.M국은 절대 스파이를 용납하지 않았다.나라를 배신한 스파이는 총살감이었으니 아무도 감히 이 일에 엮이려 하지 못했다.“미안, 인아야. 나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나... 나도 일이 생겼어.”“엄마가 나보고 집에 돌아오래.”그러자 사람들은 유미를 피하려고 온갖 핑계를 대며 조심스럽게 자리를 떠났다.유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래지고 이를 악물고 손을 약간 떨며 휴대전화를 꺼내 남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구인아가 긴장해서 물었다.“유미야. 너 진짜 남 장군님
불빛이 눈 부신 도시는 심야에도 여전히 시끌벅적하고 차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지윤은 차를 몰고 정안은 조수석에 앉아 조용히 창밖의 경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지윤이 호기심에 물었다.“언니, 구인아가 일부러 그랬을까요?”정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맞아.”지윤은 운전대를 꽉 잡고 이를 악물었다.“정말 너무하네요. 정통 어르신 따님이 이런 사람일 줄이야.”정안이 느릿느릿 말했다.“자녀의 행동으로 그 부모까지 거론하지 마.”“그럼 도련님은 유 비서를 안보국에 고발할까요?”이 일을 생각하자 정안은 기분이 가라앉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깊은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며 불빛이 한 프레임 씩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지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었다.아마 유미를 안보국에 고발하지 않을 것이다.유미의 주장대로라면 남하준은 그녀의 사람됨을 알고 있고 더욱이 두 사람은 우정이 두터웠기 때문에 일부러 휴대전화를 꺼버린 일로 그녀를 입건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남하준은 아마 유미를 아까워할 것이다.지윤은 정안이 대답하지 않자 자문자답했다.“유 비서는 이미 도련님의 한계를 건드렸어요. 내 생각에는 무조건 유 비서를 단단히 혼내실 거예요.”정안이 씁쓸하게 입술을 오므리고 몰래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유 비서가 그런 고생을 하게 놔두지 않을 거야.”“언니, 유 비서 때문에 언니가 도련님께 구조 요청을 해도 연락이 닿지 않아 언니가 얼마나 고생을 했어요? 당시 그 위급한 상황에서 경찰차와 구급차가 길에서 몇 분만 더 막혔다면 언니와 아이는 모두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지윤이 감개무량해서 울분을 터뜨렸다.“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도련님이 유 비서를 감싼다면 이런 남편은 없어도 그만이에요.”정안이 중얼거렸다.“나도 남편으로 인정할 생각 없었어. 지금은 그냥 아이 아빠일 뿐이야.”그에 대해 실망하고 자신이 없어 정안은 이렇게 비관적일 수밖에 없었다.차량이
만약 유미가 남하준이 추운 겨울 늦은 밤에 집 앞에 서서 정안을 기다리고, 그녀에게 슬리퍼를 건네는 것을 알았다면 유미는 화나 죽지 않을까?정안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방으로 걸어갔다.유미의 존재를 너무 의식한 것 같아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정안은 안방으로 돌아갔고 남하준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녀는 잠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고 화장을 지우고 씻고 머리도 감았다.40분 후, 정안은 긴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나왔다.그녀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남하준을 향하고 있었다.그는 아직 자지 않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온몸에 차가운 냉기가 서려 있고 주위에 짙은 장막이 드리워져 있어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발자국 소리를 들은 남하준은 허리를 펴고 정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즉시 시선을 거두고 화장대로 가서 앉았고 위에 있는 크림을 집어 얼굴에 발랐다.남하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이 시간에 머리를 감았어?”정안은 대답이 없었다.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안에서 헤어드라이어를 꺼내 코드를 꼽고 그녀 뒤로 와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수건을 풀었다.정안은 그가 자신의 머리를 말리려 하자 급히 손을 뻗어 헤어드라이어를 집어 들었다.“내가 할게요. 주세요.”남하준은 놓아줄 기미가 없이 꽉 쥐었다.그녀의 손이 남하준의 손등에 닿는 순간, 처음으로 그의 손이 차갑다는 걸 느꼈다.그의 손은 언제 어디서나 아주 따뜻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차가울까?옷을 얇게 입고 문밖에서 그녀를 오래 기다려 몸이 얼어버린 걸까?그는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일부러 외투를 입지 않고 추운 겨울밤에 서서 자신을 괴롭힌 걸까?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당기고 헤어드라이어를 켜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잡고 열심히 말렸다.헤어드라이어는 무음이라 소음이 거의 없었다.정안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핸드크림을 들고 두 손을 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정안의 냉담한 말이 들려왔다.“이미 42일이 지났으니 하고 싶으면 해요.”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하준이 그녀를 강제로 안방에서 재우고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게 한 것은 아내의 의무를 다하게 하려는 목적일 것이다.그는 요즘 이미 참을 만큼 참은 것 같았다.남하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움찔했다. 설레기도 했지만 서글픈 마음이 더 컸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손을 매트리스에 따라 가볍게 정안의 손을 만졌다.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그녀는 손을 빼서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남하준은 쓸쓸히 입술을 오므리고 천천히 눈을 감은 채 아무런 행동도 없이 속삭였다.“시간이 늦었다. 쉬어.”정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의심이 가득했다.아침마다 욕망에 가득 차 언제 폭사할지 모를 정도로 잔뜩 부풀어 오르면서, 그녀가 먼저 허락했는데 그는 왜 반응이 없을까?정안은 의혹을 안고 그에게 등을 돌리고 누워 눈을 감고 천천히 잠이 들었다.순간, 뒤에 있는 남자도 몸을 돌려 그녀의 등을 마주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가볍게 중얼거렸다.“부부 사이 잠자리는 절대 일방적인 개념이 아니야. 네가 원하지 않고 즐기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단순히 동물의 본능적인 욕망의 분출일 뿐이지.”“완아, 내가 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네 몸이 나를 배척하고 있어. 너의 냉담함이 내 욕망보다 날 더 고통스럽게 해.”정안은 가슴 끝이 살짝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손은 천천히 이부자리를 꼬집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통증을 참았다.그녀는 이렇게 마음이 약한 자신이 싫었다.지금 이 순간 이 남자가 안쓰러웠다.이 남자를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이혼하지 않으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그는 자신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였다.정안은 생각이 많고 마음이 심란하여 속으로 갈등하면서도 아무 답도 하지 않은 채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너무 피곤했는지 그녀가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침대 위에는 그녀 혼자 남아 있
그리고 정안은 이 좋은 소식을 가족들에게 전했다.시부모님들과 몇몇 가족들은 모두 기뻐하며 내일 온 가족이 아이를 데리러 병원에 가려 했지만 최서윤은 예외로 코웃음을 쳤다.사람이 너무 많으면 바이러스와 세균에 감염될까 봐 정안은 아이의 건강을 위해 모두 거절했다.그녀는 기대에 부풀어 내일 아들을 일찍 데려올 수 있기를 희망했다.햇볕이 내리쬐는 날, 정안은 기분 좋게 정원 밖의 정자에 앉아 바람을 쐬며 정원 곳곳에 햇빛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날씨가 따뜻해지자 정원의 푸른 식물이 새싹을 돋우고 있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아저씨들이 도구를 들고 푸르싱싱한 식물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정안이 궁금해서 걸어가 보니 그 거대한 녹색 식물은 어린 국화꽃이었는데 이미 열매를 피고 있었다.“여기부터 시작하죠. 다 뽑아서 흙을 뒤집어 유기질 비료를 넣고 튤립을 가지런히 심을 거예요.”정안이 다가가 호기심에 물었다.“아저씨, 여기 국화꽃이 곧 필 텐데 왜 뽑으시는 거죠?”그는 정안을 보고 황급히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도련님께서 그렇게 분부하셨습니다.”정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남자는 공무로 바쁘면서 정원의 꽃과 식물을 관리할 시간이 있다니.“그 이는 왜 이 꽃들을 뽑으려는 거죠?”정안이 묻자 남자가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이게 다 사모님께서 튤립을 좋아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작년에 도련님께서 저희 들에게 이 잔디밭을 정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사계절 꽃이 피는 국화꽃을 들여와 직접 씨앗을 뿌려 이렇게 아름다운 국화꽃을 심었습니다. 이제 곧 꽃이 필 텐데 사모님께서 튤립을 좋아하신다며 저희더러 이 꽃을 전부 뽑아 튤립을 심으라고 하셨습니다.”정안은 튤립 씨앗 몇 봉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했다.남하준은 그녀가 튤립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그는 국화꽃을 두 번 준 적은 있지만 한 번도 튤립을 선물한 적은 없었다.아마 지윤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사모님, 정자 쪽에서 쉬고 계세요. 여기는
다그치는 벨소리가 계속 울렸다.정안은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고 휴대전화를 귓가에 갖다 댔다.남하준은 먼저 의외인 듯 몇 초 망설이다가 의심스러워 물었다.“완이야?”그의 말투가 유독 부드러워 정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너무 많은 전화를 거절해서 이젠 다른 사람이 답장하고 받은 전화인 줄 알았을까?정안이 온화한 말투로 대답했다.“맞아요.”그는 약간 흥분된 듯 부드럽게 말했다.“나 내일 집에 돌아갈게. 우리 같이 아들 데리러 병원에 가자.”정안은 살짝 놀랐지만 그의 일이 모레나 끝날 것으로 생각해 거절했다.“괜찮아요. 일 보세요. 지윤이랑 함께 가면 돼요. 괜히 서둘러 돌아올 필요 없어요.”“나 별로 안 바빠.”남하준이 기회를 잡으려고 애쓰면서 물었다.“내일 몇 시에 병원에 가?”정안이 다시 거절했다.“퇴원하는 게 별로 큰일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마세요.”남하준은 침묵했다.정안은 그의 기분이 좀 가라앉은 느낌이 들어 급하게 전화를 끊으려 했다.“별일 없으면 나 먼저 끊을게요.”휴대전화가 그녀의 귓전을 떠날 때 남하준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완아 나...”그래도 그녀는 통화를 끊었다.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눈 앞에 펼쳐진 작은 국화들을 바라보며 정안은 남하준이 좋은 아빠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날은 유독 시간이 느리게 지나갔다.그녀는 산후 도우미와 함께 아들이 쓸 이불과 생필품을 준비했다.도우미는 아이가 퇴원한 후에도 자신과 함께 자도록 권했지만 정안이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많이 갖고 친밀감을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다.그날 밤, 정안은 흥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전에 찍어온 아들의 사진을 계속 보았다.곧 만날 생각에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지루한 고요 속에서 정안은 슬슬 깊은 잠에 빠졌다.잠결에 침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졸린 눈으로 거슴츠레 눈꺼풀을 젖혔다.익숙한 향긋한 바디워시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무거운 눈을 젖혔다가 덮으며 눈을 가늘게 뜨
또렷한 이목구비가 정교하고 예쁘고 남성적인 것이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어렴풋이 튀어나온 수염까지 남성미를 물씬 풍겼다.그녀는 오랜만에 남하준의 얼굴을 열심히 보았다.건강한 피부색, 오똑한 콧날, 부드러운 얇은 입술, 섹시한 목젖까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정안은 입술을 오므렸고 그때 남하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놀란 정안은 얼른 시선을 돌려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들어가 씻었다.하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정안은 깨끗하게 씻고 나갈 옷으로 갈아입고 짐을 챙겨 아침 먹으러 내려갔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지윤과 함께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러 갈 계획이었다.거실에서 그녀는 지윤과 류청을 보았고 그들은 소파에 앉아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정안은 그들에게 인사하고 거실에 앉아 아침을 먹었는데 그들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렸다.지윤이 호기심에 물었다.“너 야밤에 도적질이라도 했어? 얼굴이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내안 피곤하게 생겼어? 도련님께서 오늘 서둘러 돌아오시려고 얼마나 필사적으로 모든 일정을 앞당겨 마치셨는데. 오늘 아침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여전히 공무를 처리하셨다고. 나 어제 2시간 밖에 못 잤어.”지윤이 걱정스레 말했다.“그럼 얼른 가서 더 자.”“안돼. 7시에 작은 도련님 모시러 병원에 가야 한단 말이야. 더 못 자.”“너 이거 과로운전이야. 누가 감히 네 차를 타겠어?”류청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네가 운전해.”정안은 좀 먹고 거실로 가서 류청에게 말했다.“류청 씨 들어가서 쉬세요. 병원은 오후에 갈 거예요.”류청이 감격에 겨워 물었다.“정말요?”정안이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으며 류청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단을 올라갔다.안방에 돌아온 정안은 남하준의 휴대폰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알람을 켜니 7시 15분 알람이 맞춰져 있었다.몇 분 후에 울릴 알람이었다.그녀는 과감히 알람시계를 지우고 천천히 휴대전화를 내려놓았고 커튼 사이 빈틈을 더욱 촘촘히 잡아당겼다.점심나절.바
점심 식사 후, 정안이 병원으로 출발하려는데 유가영이 그녀의 손을 이끌고 구석으로 가더니 신비롭게 물었다.“도련님 바람났어?”정안은 경악했다.“아니요!”유가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야. 도련님은 저렇게 긴장해서 너 신경 쓰는데 네 태도가 너무 냉담하잖아? 특히 너 아이 낳은 후에 두 사람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정안은 어쩔 수 없이 웃으며 유가영이 남하준의 명성을 망치는 것을 원치 않아 황급히 해명했다. “정말 바람나지 않았어요. 형님이 괜한 생각하신 거예요.”“근데 왜 그래?”“다 지나간 일이에요.”정안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부부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말하기 싫으면 됐어. 그래도 충고하는데 뭐든 너그럽게 생각해. 도련님 신분이 워낙 특별하잖아. 내 남편처럼 아무 때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매일 너와 아이 곁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빨리 적응해야 해. 도련님 몸은 나라 소유고, 전우 소유고, 또 시민의 소유이지 절대 너 혼자만의 사람이 아니야. 알겠어?”유가영의 허를 찌르는 말에 정안은 문득 깨달았다.그녀는 유가영이 이렇게 인생을 깨우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도 인생 경험과 결혼으로 인한 깨달음일 것이다.정안은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남하준이 바람피운 것도 아니고 어깨에 짊어진 책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놔두고 떠난 것이다.그가 구한 것은 유미 그 여자가 아니라 전우였다.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고 전원을 끈 것도 남하준의 뜻이 아니었다.그는 사실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정안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져 방긋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형님.”“두 사람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으니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유가영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경험이 좀 많아. 우리 부부 이렇게 사이가 좋은 거 보면 모르겠어? 내가 남편 다루는 기술이 좀 대단하거든.”정안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 나면
이다은은 컴퓨터를 켜고 쇼핑몰 관리자 페이지에 로그인했지만, 거래 완료된 주문은 하나도 없고 답장하지 못한 문의 메시지만 가득한 화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답답한 마음으로 하나씩 정성껏 답장을 보냈지만, 새로운 손님은커녕 추가 메시지도 오지 않는 적막한 화면에 멍하니 시선을 두다가 결국 다른 화면으로 넘어갔다.새로 띄운 화면에는 빽빽한 코드와 무인 로켓의 데이터 구조가 가득 떠 있었다.이다은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마를 짚으며 깊은 고민에 빠진 끝에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 코드를 작성하고 저녁을 먹은 뒤에도 세 시간이나 작업에 매달렸다.밤늦게 작업을 마치고 파일을 보냈지만, 그녀가 손에 쥔 돈은 고작 60만 원에 불과했다.‘학력이 없으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값싼 노동자로만 보이는구나...’그녀는 가끔 이 모든 걸 버리고 싶을 만큼 깊은 절망에 빠지곤 했다. 컴퓨터를 끄고 스트레칭을 하며 욕실로 들어가면서도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한때 그녀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운명이 바뀔 거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M국 항공우주대학교 합격 통지서가 도용되면서 그녀는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 일은 그녀의 꿈과 미래를 부숴버렸고 지금까지 체념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다음 날 아침, 약속대로 남우영과 두 번째 만남을 가진 이다은은 드디어 손에 혼인관계증명서를 쥐게 되었다.남우영이라는 잘생긴 남편이 생겼지만 그녀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녀에게 결혼은 그저 누구와 하든 큰 차이가 없는 일이었다.‘결혼이란 건 결국 평생 팀플할 팀원을 고르는 거지. 게다가 부모님 잔소리에서도 해방될 수 있게 됐으니, 이보다 완벽한 일거양득이 어딨어?’구청을 나서며 혼인관계증명서를 내려다보던 이다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남우 씨, 근데 왜 이름이 남우영으로 되어있어요? 남우 아니었어요?”남우영은 순간 표정이 굳더니 억지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주민등록증엔 남우영으로 되어있어요.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남우라고 불
이다은은 남우영이 타고 온 차를 보더니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었다. 그렇게 조수석 문 앞에서 한참 머뭇거리는 그녀를 본 남우영이 다가와 차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다은 씨,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이다은은 차를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몇억은 하는 차 아닌가요? 잘못 긁거나 고장 내면 저희 둘 다 감당 못 해요.”남우영은 잠시 그녀를 보며 생각하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타요. 제가 조심해서 안전운전 할게요.”이다은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차에 올랐다.차가 도로를 달리자, 이다은은 자기 집 주소를 알려주었고, 한 시간이 지나 낡고 오래된 구도심의 허름한 건물 앞에 차가 멈췄다.이다은은 차에서 내린 뒤 남우영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구청에서 봬요.”남우영도 창문을 내려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낡고 허름한 건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다은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의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갔다. 8층 꼭대기 층에 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캐릭터 탈을 구석에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하아... 오늘도 정말 너무 많이 뛰어다녔네.”그때 옥상에서 세탁물을 한가득 담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 다리를 저는 그녀의 아버지, 이적이 내려왔다.“다은아, 이제 퇴근해서 온 거야?”이다은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가 빨래 바구니를 받아들며 말했다.“아빠, 제가 할게요.”이적은 바구니를 건네고 천천히 거실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이다은이 빨래를 하나씩 꺼내 정성스럽게 개기 시작하자, 이적도 옆에 앉아 빨래를 개며 무심히 물었다.“다은아, 요즘엔 선 봤던 남자 안 만났어?”이다은은 빨래를 개던 손을 멈추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빠, 저 결혼하려고요.”이적은
이다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기쁨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그동안 선을 보면서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집안 형편이 가난하다느니, 학력이 부족하다느니, 성격이 유치하다느니 하며 그녀의 단점을 들춰내기 바빴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그것도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남자가 인정해 주다니... 집이 가난한 건 서로 똑같으니까 오히려 잘된 거야. 적어도 누가 누구를 나무랄 일은 없으니까.’더군다나 이다은의 이모는 이미 그의 고향으로 시집가 그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까탈스러운 이모가 그를 성실하고 착하며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이다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목소리가 낮아졌다.“저도 남우 씨가 맘에 들어요. 우리 그냥 내일 혼인 신고하러 가요.”남우영은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 되물었다.“혼인 신고요? 오늘 선보고 내일 바로 혼인 신고요? 그래도 시간을 두고 서로 좀 더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이다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차피 부부로 살아가는 건 현실적인 문제잖아요. 적당히 맞춰 가면서 살다 보면 되는 거 아닌가요?”남우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살짝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그건 그렇지만...”이다은은 남우영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물론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고 싶으시다면 저도 받아들일게요. 다만... 이모에게서 남우 씨 아버님이 암 투병 중이셨다가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남우 씨의 결혼 문제로 걱정을 많이 하신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남우 씨가 저보다 더 급하신 줄 알았거든요.”남우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우리 혼인 신고합시다.”이다은은 엄청나게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오래된 숙제를 끝낸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필요한 서류 챙겨서 내일 아침 일찍 구청 앞에서 만나요.”남우영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이다은은 여전히 개구리 캐릭터 탈을 품에 안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발견했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남우영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다은은 그를 단순히 맞선남 ‘남우 씨’로만 알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을 애타게 찾는 듯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성큼성큼 다가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물었다.“작은 개구리 탈 하나 제작하는 데 도대체 얼마나 드는데요?”“만... 만원이요.”이다은이 대답하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그러면 고작 만원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거예요?”다소 황당하다는 어투가 담긴 질문에 이다은의 표정이 굳어졌고 목소리에는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마치 고작 몇 푼 때문에 생고생이라도 했다는 식으로 얘기하시네요?”“돈 문제가 아니라면... 그럼 뭐때문에 이렇게 고생하셨단 거죠?”남자가 당황한 듯 다시 묻자, 이다은은 코웃음치며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잘생긴 얼굴이 다는 아니라니까!’조금 언짢았지만 이다은은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고작 만원이 아니에요. 오천 원은 저에게 이틀 치 밥값이기도 하고요. 새벽부터 일어나 두 시간 걸려 도매시장까지 가서 어렵게 가져온 개구리 캐릭터들이에요. 제가 하나하나 기대를 담아 준비한 거라고요. 심지어 단속 공무원들 피해 가며 골목에서 한 시간이나 도망쳤는데 그걸 훔쳐 간 사람이 결국 ‘할머니의 모습’을 한 도둑이었다는 거죠. 제가 그걸 되찾으려고 한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세요?”남우영은 이다은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개구리 캐릭터 탈을 내려놓고 자기 지갑에서 현금을 몽땅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 정도면 오늘 손해 본 건 다 메꿀 수 있겠죠?”그는 이다은이 더 이상 속상해하지 않길 바랐다. 이런 일로 괜히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피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오늘 소개팅을 잘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이다은은 그의 손에 들린 현금다발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남우영을
안성의 6월은 날씨가 무더웠다.뜨거운 태양 아래, 거리에 행인이 거의 없었다.왕개구리 인형 옷을 입은 한 여자가 커피숍 앞으로 다급하게 다가왔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수십 개의 개구리 ‘자식’들을 구석에 놓고 무거운 개구리‘머리'를 벗고는 땀에 젖은 예쁜 얼굴을 드러냈다. 간판을 올려다보고 큰 눈을 깜빡이며 다급하게 말했다.“아마 여기가 맞을 거야!”개구리 머리를 안고 카페에 들어가 두리번거렸는데 젊은 남자는 한 명뿐이었다.멀리서 보니 얼굴도 아주 잘생겼고 분위기도 우아했다.‘오늘 남자는 좀 괜찮은데? 어쩐지 엄마가 이번에 결혼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하더라니.’여자는 헐레벌떡 걸어 들어가 남자 앞에 앉은 후 매우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일 때문에 방금 도시 관리인에게 쫓기다가 길을 잃었어요. 반 시간이나 늦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소리를 들은 남우영은 고개를 들어 반대편에 앉아 있는 반인 반개구리를 보는 순간 멍해졌고 눈 밑에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놀라움이 언뜻 스쳤다.정장 차림의 남자는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며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그녀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애써 웃으며 설명했다.“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저는...”남자가 덤덤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다은.”이다은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반응하고 말했다.“맞아요. 전 이다은이에요. 저희 이모가 말해줬나 보네요. 그래도 예의상 자기 소개를 더 자세히 해야겠어요.”남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이다은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제 이모가 당신을 소개해줬어요. 저는 전문대 졸업에 올해 26살이고 프리랜서 창업자예요. 연애 경험 제로, 적금 제로, 나쁜 습관도 없고 취미도 없지만 꿈은 있어요.”남우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물었다.“꿈이 뭐죠?”이다은은 개구리 손을 덥석 움켜쥐며 흥분해서 말했다.“제 꿈은 달을 여행하는 우주비행사가 되는
너무 비정상이었다.그때 남서연과 백건이 다가왔다.세 사람은 사사로운 일을 제쳐두고 백건과 남서연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그들은 덕담도 나누고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흐름이 남우영에게 흘러갔다.“그러고 보니 우리 집안 애들은 전부 결혼했네. 이제 서연이까지 결혼했으니 우영이만 혼자야. 아내는 고사하고 여자친구도 없어.”“엄마, 내 위에 있는 사촌 형들 전부 서른이 넘었어요. 결혼하는 게 정상 아니에요?”“서연이는 너보다 어린 데도 이미 결혼했어!”남하준이 나서서 말렸다.“조금만 더 기다려. 서두르지 말고 서른이 넘으면 다시 말해. 안 되면 마흔에 해도 되고. 혹시 알아? 오십에 할 수도 있잖아. 아직 몇십 년 더 남았어.”남우영은 어두워진 얼굴로 덤덤하게 웃었다.“아빠는 위로를 참 잘해요.”백건은 정안과 남하준의 걱정을 이해하고 위로했다.“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영이는 확실히 여자를 좋아해요. 얘가 어릴 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우영이 갑자기 달려들어 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어깨동무를 한 채 옆으로 질질 끌고 갔다.“삼촌, 내가 할 말이 있어요.”정안은 긴장하더니 흥분해서 앞으로 다가갔다.“어릴 때 뭐? 야! 가지 마. 똑바로 말하고 가!”남우영은 백건을 꼭 감싸고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삼촌이 헛소리하는 거예요.”“분명 뭔가 있네.”남하준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우영에게 비밀이 있네요.”남서연이 목소리를 낮추고 장난스레 중얼거렸다.“작은 아빠, 작은 엄마, 집에 가서 제가 우영 오빠의 비밀을 알아낼게요.”정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아. 서연이 네가 돌아가서 꼭 물어봐.”남서연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성대한 결혼식은 이틀 동안 거행되었다.첫째 날의 주제는 결혼식이었고 둘째 날의 주제는 여행이었다.그리고 이 섬은 백건이 사들여 남서연에게 선물했고 스위트 아일랜드라
“그래. 더 이상 의미가 없지.”“두 사람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야? 난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백건은 부드럽게 웃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넌 알 필요 없어. 가자. 부모님이랑 한잔해.”“그래요.”남서연은 주스를 챙기고 진우석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서윤아와 백정우를 향해 걸어갔다.진우석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젖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서윤아는 휠체어에 앉아 적당한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백건과 남서연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버님, 어머님, 저희가 한잔 올릴게요.”서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남서연을 보았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눈빛이지만 그런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지 그녀를 향한 인정은 아니었다.그녀는 마음속 깊이 여전히 남서연의 능력이 그의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다만 그녀의 편견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그들 부부의 애정 전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백정우는 크게 기뻐하며 격앙되어 잔을 들며 끊임없이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요점은 아이를 빨리 낳으라는 것이었다.남서연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백건은 이미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입술을 오므리고 몰래 남서연을 바라보며 꿀을 먹은 듯 달콤했다.비밀을 지키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하지만, 그의 어린 아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3개월 후, 태아가 안정되면 모두에게 공개하려 했다.그리고 그녀의 체질도 대단해서 임신 증상이 전혀 없었다. 평소처럼 먹고 자고 출근하고, 어지럽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고, 입덧도 하지 않았다.멀지 않은 곳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남하준, 정안 그리고 그들의 아들 남우영.언뜻 보면 그들은 또래처럼 생겼는데 절대 남우영이 성숙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가 선천적으로 미모를 타고났고 또 관리가 너무 잘 되어 젊어 보이는 것이었다.한 명은 늠름한 국방 장군이고, 한 명은 꽃 같은 미모의 화학자이고, 남우영
반년 후.남하준은 국경에서 안성으로 돌아왔다.정안과 반년 동안 떨어져 살면서 그는 그녀에게 언제 국경으로 돌아가냐고, 언제 실험실로 돌아가냐고 수없이 물었다. 비록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정안의 옆에 붙어 있으려 했다.그때마다 정안은 이렇게 대답했다.“난 안성에 남아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요.”무슨 중요한 일인지 정안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남하준은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정안은 묵은 원한과 새로운 원한을 함께 복수하고 있었다.유미의 남편은 횡령으로 고발돼 조사를 받다가 낙마했다.유미는 해외에서 남서연의 납치를 지시한 혐의와 직책 뇌물수수 혐의도 함께 추가되어 체포됐다.부부가 나란히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갔다.반년 동안 걷지도 못한 서윤아도 이 일을 알고 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승아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건은 그들 가족의 기업에 누를 끼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또 한 가지 큰일이 있었다.바로 백건과 남서연의 성대한 결혼식이었다.갑부의 결혼식은 M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에서 진행되었다. 십여 대의 비행기가 몇 번이고 낭만적인 섬으로 향했다.하늘과 바다가 일색이 되어 단조롭던 해변이 낭만적인 꽃바다로 변하고, 땅에 꽃잎이 깔리고, 수천만 개의 현장 장식이 있고, 가장 호화로운 음식과 술이 있었다.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서연도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장을 보게 되었다. 공기조차 꽃향기로 변했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로맨틱함이 가득했다.남서연은 수억 원짜리 웨딩드레스에 수십억 원짜리 주얼리를 착용한 채 멋지게 차려입은 백건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카펫을 밟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결혼식 무대 중앙으로 다가갔다.하객석은 꽉 찼고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남서연은 행복한 눈물을 흘리며 달콤한 미소로 하객석의 부모님과 큰아버지들, 큰어머니들, 그리고 그녀를 20년 넘게 애지중지한 사촌 형제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다
“백정우, 방금 뭐라 그랬어? 내가 소란을 피워?”서윤아가 울부짖자 핸드폰 저쪽에서 통화를 뚝 끊어버렸다.서윤아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냅다 던져 박살 냈다.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아들과 남편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고, 심지어 자기 딸과 외손자까지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크게 실망했다.백건과 남서연을 이어주려고 주변의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녀와 점점 멀어진다고 느꼈다.유승아는 바닥에 부서진 휴대전화 두 대를 주워들고 그녀 곁에 다가와 앉으며 부드럽게 달랬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그러다 몸 상해요. 건이 결혼 문제는 천천히 해결하세요.”“승아야,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서윤아가 긴장하며 묻자 유승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때 정안이 성큼성큼 병실로 들어오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이제 아무 방법도 쓸모 없어요.”병실 안의 두 사람은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정안은 우아하게 걸어 들어와 보온 상자를 손에 들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건이는 이미 재산의 절반을 서연에게 주겠다고 공증을 끝냈어요. 이혼하면 가족 기업 전체가 흔들릴 거예요.”권력과 재산을 중시하는 서윤아는 고함을 질렀다.“누가 허락했어? 이 자식이 감히 반역을 저질러!”서윤아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포악한 기세가 너무 강렬해 침대에서 벌벌 떨 정도였다.정안은 이제 그녀의 어머니를 걱정하지 않았다. 유일한 걱정은 유승아가 계속 파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도시락을 내려놓은 정안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유승아를 마주 보며 비꼬듯 말했다.“승아는 참 끈질긴 애구나. 건이는 이미 서연이와 결혼했으니 너도 이제 정신 차리고 적당한 선을 지켜. 더 이상 건이에게 환상을 품지 마.”유승아가 황급히 설명했다.“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와 건이는...”정안이 차갑게 웃었다.“오해인지 아닌지는 네가 누구보다 잘 알겠지. 거짓 해명은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