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과 정안 모두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다들 눈치챈바 계속 캐묻기 난처했다.남하준은 항상 바빴고 정안의 산후조리 기간에 만나지도 않고 서로 교류도 없어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분위기가 난처해졌을 때, 유미가 걸어와서 손에 노트를 들고 남하준 곁에 섰다.“하준아, 오늘 스케줄 내가 다 짜놨어.”정안이 아침을 먹던 동작이 순간 굳어졌고 안색이 가라앉아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저 다 먹었으니까 다들 천천히 드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떴고 형들은 경악하여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아침을 반쯤 먹은 걸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오늘은 왜 이렇게 적게 먹어?”정안은 대꾸도 없이 성큼성큼 떠났다.평소 같으면 남하준은 정안이 그와 함께 아침을 먹고 싶지 않고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 떠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정안이 진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유미였다.남하준은 심호흡을 하고 애써 화를 억누르며 차갑게 물었다.“내 명령을 귓등으로 들은 거야?”유미는 서러워하며 중얼거렸다.“휴가 가기 싫은 것도 잘못이야?”남하준은 눈을 감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식탁 위에 놓인 주먹을 천천히 움켜쥐고 손등의 핏줄이 부풀어 올랐다.어쩐지 정안이 유미를 그렇게 싫어하더라니.유미는 정말 겁도 없이 상사의 말도 존중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의 아내를 안중에 둘까?남하준은 눈을 뜨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엄숙하게 말했다.“아주머니. 지금 당장 유미 짐 싸서 기사더러 집에 데려다주라고 하세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도우미는 긴장해서 급히 응수하고 위층으로 몸을 돌려 정리하러 갔다.유미는 어금니를 깨물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서러워했다.남하준은 일어나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냉담한 태도로 또박또박 말했다.“네 업무는 류청이 맡아 할 거고 넌 한 달 안에 다른 자리 마련될 거야.”유미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하준아! 설마 백완자 때문이야? 너 언제부터 이렇게 공과 사를 구별
보다 못한 최서윤이 유미를 도와 말해주려고 다가갔다. “하준아. 유미 씨 잘못한 거 없는데...”남하준이 그녀를 차갑게 흘기며 엄숙하게 말했다.“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마시죠.”최서윤은 그의 차가운 기운에 충격을 받아 깜짝 놀라 소리를 뚝 그치고 침을 삼켰다.말을 마친 남하준은 성큼성큼 떠났고 그가 대문을 나섰을 때 류청이 차량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도련님, 잘 주무셨어요?”류청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남하준이 주변을 둘러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완자는?”“사모님은 지윤이와 함께 차를 몰고 나가셨습니다.”“따라가.”남하준이 즉시 차 문을 당겨 앉자 류청이 운전석에 들어서 시동을 걸며 물었다.“혹시 무슨 일 생겼습니까?”남하준은 조바심이 났다.“완자가 리셋 미용실 CCTV를 해킹해서 유미를 조사했어.”“유 비서를 왜 조사하죠?”“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뭔가 실마리를 찾아서 지금 깊이 조사하러 갔다는 게 중요해.”“혹시 사모님이 우리 계획을 망칠까 봐 걱정되십니까?”남하준은 침묵하며 천천히 창밖을 내다보았다.계획을 망쳤으면 계획을 바꾸면 된다.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정안이 위험에 처하는 것이었다.유미도 저번에 그 미용실을 파고들다가 납치당했으니....1시간 뒤.차량이 리셋 미용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고 지윤이 시동을 끄고 안젠벨트를 풀고 정안을 돌아보았다.“도착했어요. 우리 들어가요?”정안은 얼굴이 굳고 미간을 찡그린 채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아니.”“여기까지 왔는데 왜 안 들어가요?”정안이 태블릿을 지윤에게 보여주자 지윤이 안에 있는 정보를 확인했다.회사 등록 정보가 있었는데 리셋 미용실의 법인은 한이서였다. 즉 이 미용실은 백씨 가문 산업 중 하나였다.“한이서?”지윤은 그때 이 미용실 화장실에서 한이서에게 더러운 물을 먹인 기억이 떠올랐다. 한이서는 그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마저 생겼을 것이다.정안이 태블릿을 가져가며 느릿느릿 말했다.“오랫동안 CCTV를 봤는데 유 비
정안은 권총 같은 무기를 꺼내 지윤에게 건넸다.“이거 갖고 있어.”지윤이 경악했다.“총기 사용은 좀 그렇지 않을까요?”M국의 총기 통제는 매우 엄격했다. 일반인이 총을 소지하는 것도 불법인데 게다가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사형감이었다.정안은 특수 마스크를 꺼내 지윤에게 씌워주며 설명했다.“총에 총알이 들어 있지 않아. 내가 연구한 다량의 에테르를 함유한 화학무기로 의학적으로 환자를 마취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지. 사람에게 쏘아도 다치지 않고 탄체가 파열되어 공기 전파를 통해 사람이 조금만 마셔도 몸이 저리고 힘이 없어 혼수상태에 빠져.”지윤은 감격에 겨워 손에 든 총을 바라보며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언니는 역시 대단해요.”정안은 자신의 마스크를 착용하고 말했다.“조심해서 사용해. 탄체를 튕길 때 흡입하지 않도록 20초 동안 숨을 죽이고 있어.”“좋아요.”지윤은 고개를 돌려 점점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았고 두 사람이 동시에 차에서 내렸다.지윤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총을 겨누자 사내들은 그녀 손에 든 총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정안이 준비를 마치고 명령했다.“쏴!”말이 끝나자 지윤은 앞 사람을 향해 총을 쐈는데 펑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즉시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사람을 겨누고 또 한 발 쐈다.두 발의 총격이 끝나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웅크리고 앉아 좌우로 흩어져 차 안으로 숨었다.그러자 주차장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십여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계속해서 쓰러졌고 앞과 뒤 차량에 타고 있던 남자들이 상황을 보자마자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정안과 지윤을 향해 들이받았다.정안과 지윤은 빠르게 반응하여 주차된 차량의 좌우로 숨었다.펑 하는 굉음과 함께 그녀들의 차량이 부딪쳐 찌그러졌다.정안은 차 밑으로 기어들어 숨었다.잠시 후 차에 타고 있던 남자가 문을 열고 내려오더니 휴대전화를 꺼내서 다이얼을 돌렸다. “이 여자 손에 화학무기가 있어. 사람 더 보내고 방독면도 챙겨.”정안은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지윤이 총을
남하준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뜻밖에도 그녀는 방향을 바꿔 반대쪽을 통해 일어나 몸의 먼지를 털고 있었다.지윤이 달려와 긴장하며 그녀를 부축했다.“괜찮아요?”“나 괜찮아.”정안은 중얼거리더니 복도를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이전에 쓰러진 사내들 외에도 몇 명의 사내가 방독면을 쓰고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알고 보니 그들의 구원병이 와서 지윤이 해결할 수 없었다.남하준은 정안의 곁으로 가서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그녀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안과 지윤이 몰고 온 차는 이미 심하게 손상되어 운전할 수 없었다.“경찰이 현장을 처리할 테니 내 차 타고 가.”“고마워요.”남하준이 말하자 정안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들의 차로 향했다.그녀는 조수석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고 지윤과 류청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남하준을 보았다.남하준은 어두운 얼굴로 조수석의 정안을 한참 바라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타.”류청은 별말 없이 운전석에 앉았다.지윤은 이해할 수 없어 조수석 유리 창문을 두드렸다.“언니, 도련님이랑 뒤에 타세요.”정안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잔말 말고 빨리 타.”지윤은 불쾌한 듯 입을 삐죽 내밀고 뺨을 불룩하게 내밀며 마지못해 뒷좌석 문을 열었다.남하준과 나란히 앉아 그의 차갑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견뎌야 하니 지윤은 너무 괴로웠다.차량이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번화가로 들어섰다.답답한 차 안, 형언할 수 없는 저기압이 감돌고 있었다.지윤은 창가에 웅크리고 앉아 바깥 경치를 조용히 바라보며 남하준이 그녀와 언니를 꾸짖을 거로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남하준이 먼저 그 정적을 깨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직접 조사하지 말고.”지윤은 흠칫 놀라 남하준을 돌아보았다.그의 시선이 줄곧 정안의 옆모습에 고정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지윤은 그
남하준은 해명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런 해명이 정안의 오해를 깊어지게 할까 봐 두려웠다.그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지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맑고 큰 눈을 깜빡이며 충격을 받은 말투로 물었다.“설마 언니 전화 받기 싫어서 전원 끈 건 아니겠죠?”남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긴장한 나머지 툭 내뱉었다.“유미가 내 외투를 걸치고 있었어. 마침 휴대폰이 외투 주머니에 있었고.”순간 정안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정말 의리 깊은 우정이야!’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심호흡을 하며 답답하게 창밖을 보았다.지윤이 경악해서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물었다.“그럼 유 비서가 일부러 전원을 껐다는 거예요?”남하준이 설명했다.“내가 물어봤는데 부인했어요.”“그래서 도련님은 유 비서 말을 믿어요?”“내가 믿든 안 믿든 유 비서가 전원을 껐다는 증거는 없어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지나친 행동이네요.”지윤이 불쾌한 듯이 중얼거렸다.남하준의 어두운 눈동자에 당황스러움이 스치고 잠자코 있는 정안을 보며 미안함이 짙어졌다.차 안이 또 무거운 고요 속에 빠졌다.잠시 후 정안은 갑자기 몸을 돌려 온기 없는 눈빛으로 남하준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폰 줘요.”남하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정안에게 건넸다.정안은 휴대전화를 받아 차량의 선반에서 케이블을 찾아 휴대전화에 꽂고 또 그녀의 태블릿에 접속하고는 물었다.“잠금 번호 뭐예요?”남하준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해서 시트에 몸을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결혼기념일.”정안은 몇 초간 멈칫했다.류청과 지윤은 재밌는 구경을 한 것 같아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었다.정안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태블릿에서 조작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코드를 작성하고 그날 휴대폰의 데이터와 지령을 내보내기 시작했다.작업이 끝나자 정안은 태블릿 화면을 밝게 하고 남하준 앞에 내보였다.“직접 확인해요.”남하준이 화면상의 일련의 코드 숫자를 보니 아주
남하준이 눈을 감고 냉담하게 물었다.“너도 같이 조사받고 싶어?”“죄송합니다.”류청이 부랴부랴 사과하고 긴장해서 말했다.“저는 정치적 입장이 확고하고 국가와 도련님에게 충성심이 강하니 조사할 필요 없어요.”남하준은 그를 조사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의심되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고 일단 곁에 두면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주변 사람들에 대한 지나친 믿음으로 정호가 그를 배신하고 유미가 멋대로 그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그는 침울한 심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출발해.”...정안이 본가에 들어서자 최서윤의 신랄하게 비꼬는 소리가 들렸다.“요즘엔 여자들은 자기 남편 일을 지지하지도, 이해하지도, 도와주지도 않고 옆에 있는 여비서조차 용납할 수 없다니까.”정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거실 소파에 있는 최서윤을 돌아보았다.지윤은 화가 치밀어 올라 따지려 했지만 정안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 충동적인 행동을 막았다.지윤은 그녀의 비서였으니 최서윤에게 미움을 사면 앞으로 이 집에서 잘 지낼 수 없었다.정안이 천천히 다가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형님, 할 말 있으면 바로 하세요. 빙빙 돌려서 비꼬지 마시고.”최서윤은 거들먹거리며 소파에 기대더니 차갑게 되물었다.“동서를 말한 것도 아닌데 왜 예민하게 반응해?”정안은 변명할 가치도 없었다.“지금 이 방에 형님과 저뿐인데 설마 귀신과 대화하신 거예요?”최서윤은 정안의 강경한 태도에 더 이상 시치미를 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가슴을 두르고 기고만장하게 말했다.“하준이가 동서 예뻐하는 것만 믿고 옆에 있는 여비서까지 내쫓는 게 보기 불편해서 그래. 지금 유미 씨 집에서도 나갔고 일도 끊겼어. 이제 만족해?”정안은 살짝 넋을 잃고 지윤을 바라보았고 지윤도 어리둥절해 모르겠다는 뜻으로 두 손을 벌렸다.조금 의외였지만 정안은 곧 정신을 차리고 느릿느릿 말했다.“형님께서 그렇게 유 비서를 아끼시니 차라리 셋째 도련님 수행 비서로 채용해 회사에 출근시키는 건 어때요? 하루 24시간 옆에
남하준이 일단 마음먹으면 이렇게 신속하고 잔인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베란다 밖 등나무 의자에 앉아 맥없이 바깥 경치를 바라보며 온갖 상념을 늘어놓았다.휴대전화를 꺼내 남하준과의 채팅 페이지를 열어 그가 보낸 음성 메시지를 보면서 한 줄 한 줄 손가락으로 그었다그녀는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고 메시지도 곁눈질만 할 뿐 계속 무시했다.갑자기 남하준이 그간 자신에게 무슨 음성을 보냈는지 궁금해졌다.한 달 전의 음성으로 올라가 클릭해서 들었다.“완아. 너와 아기에게 내가 참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알아. 나 용서하지 않아도 되니까 무시하지는 마. 응?”“산후 도우미가 너 젖 오르는 게 힘들다고 했는데 내가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네. 너무 걱정되고 불안해. 나 지금 네 방 앞에 있는데 잠깐 나올래?”“몸은 좀 어때? 내일 나랑 같이 아기 보러 가자. 응?”“내가 잘못했어. 어떻게 해야 네가 용서해줄까? 내가 어떻게 해야 네 화가 풀릴지 좀 알려주면 안 돼?”“비 온다. 감기 걸리지 않게 옷 많이 입어.”“밤늦게까지 책 보지 마. 눈에 안 좋아. 얼른 불 끄고 쉬어.”“나 3일 동안 출장 가는데 그곳 장미 과자가 유명하대. 돌아올 때 좀 사 올게. 다른 것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완아. 뒤뜰에 감이 익었어.”“보고 싶다. 나랑 말 섞지 않아도 되니까 피하지 마.”“나 병원에 가서 우리 아기 봤는데 의사가 상태가 점점 좋아져서 곧 집에 돌아올 수 있대. 우리 상의해서 이름 지어주자. 성을 백 씨로 할까 아니면 남 씨?”“너 안 뚱뚱하니까 다이어트 하지 말고 많이 먹어. 몸이 회복되면 나랑 같이 산에 가서 일몰 보자.”“날씨가 풀렸어. 봄이 오려나 봐.”“벌써 한 달이야. 그동안 내가 어떻게 버텨왔는지 넌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야. 집에 있으면 너 기분 나쁘게 할까 봐 계속 바삐 일했어.”“약속을 어긴 대가가 이렇게 큰 거구나. 난 아마 평생 다시 약속 어기지 못할 거야.”“지윤 씨가 너에게 앵두를 여러 번 사준
정안은 평소 11시에 잤는데 오늘은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무엇을 기대하는지, 무엇을 걱정하는지 마음이 허전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갑자기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문을 닫는 소리가 미약하고 남자의 발걸음은 가벼웠다.정안은 몸이 팽팽하여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했다.남자는 불을 켜지 않고 정안의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두 손으로 침대를 짚고 몸을 숙인 후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그의 동작은 가볍고 느리고 조심스러웠다.정안은 은은한 술 냄새와 남하준 특유의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그의 뜨거운 호흡이 그녀의 얼굴에 뿌려져 약간 뜨거웠다.남하준은 그녀를 깨울까 봐 살짝 키스한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씻었다.그는 정안의 수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불빛이 방 밖으로 비칠까 봐 불도 켜지 않고 화장실에 들어갔다.어쩌면 남하준이 돌아왔다는 걸 알아서인지 정안은 허전했던 마음이 한순간 편안해졌고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마음이 편안해진 그녀는 천천히 깊은 잠에 빠졌다.얼마나 지났을까,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곁에 있던 남자가 다시 그녀의 뒷머리 밑에 손을 얹고 그녀의 등을 대고 잠든 몸을 살며시 바로잡아 주는 것을 느꼈다.바깥 날씨가 아직 추웠다.정안은 튼튼하고 포근한 가슴이 그녀를 끌어안고 있으니 아주 편안했다.이른 아침의 첫 햇살이 온 방 안을 밝게 비추었다.아직도 단꿈에 빠진 정안은 아랫배가 뭔가에 떠받치는 것 같아 불편했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고 두툼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남하준에게 가까이 안긴 채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온몸에 반바지만 입고 있는 남자는 아침에 강렬한 생리적 반응을 보였고 마치 해방되지 않은 듯 그녀의 몸에 억지로 받치고 있었다.남자의 생리적 현상이 아랫배를 받치고 있어 조금 아팠던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으니 얼굴이 왠지 뜨거워졌다.하지만 그는 가볍고 고른 숨을 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지금 몇 시지?’정안은 갑자기 시간을 알고 싶어서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