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은 침대에 누워서 꼼지락거리더니 곤히 잠들기 시작했다.“완아?”남하준은 그녀의 앞머리를 살짝 넘기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금욕적인 목소리가 낮고 매혹적이었다.“완아. 이대로 자면 안 돼. 저녁에 이불 안 덮으면 감기 걸릴 거야.”정안은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좀 시끄러워 짜증스럽게 손으로 귀를 비벼대고는 자세를 바꿔서 옆으로 잤다.남하준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이불을 다시 덮어 주었다.그는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할까 봐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잤다.이 밤, 남하준은 한밤중에 일어나 그녀가 이불을 잘 덮고 자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느라 잠을 설쳤다.밤새도록 그녀를 돌봤다.이튿날 아침.아침 햇살이 밝고 상쾌한 바람이 베란다 밖에서 불어와 커튼을 흔들며 방을 따뜻하게 비췄다.잠에서 깨어난 정안은 어질어질하여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눈을 비볐다.머릿속으로 어제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어제 남하준과 헤어진 후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지우와 술집에 가서 술을 많이 마시고 나서...정안은 눈을 감고 계속 생각했지만 필름이 끊겨 버렸고 흐릿한 화면만 기억났다. 어렴풋이 남하준이 그녀를 안고 있는 것이 보이고 그녀가 토할 때 물과 휴지를 건네주고 목욕도 씻겨준 것 같았다.이에 깜짝 놀란 정안은 눈을 번쩍 뜨고 이불 속으로 두 손을 빠르게 쓸어 넣었다.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만지자 갑자기 멍해졌다.‘미쳤어. 어제 필름 끊기고 하준 오빠랑 대체 뭐한 거야?’정안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깊은숨을 내쉬며 긴장한 듯 이불을 들추어 고개를 숙여 몸을 주시했다.“악!”그녀는 여전히 만취 후의 행각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이불을 머리까지 덮으며 수줍어했다.‘미쳤어. 나 미쳤어 진짜.’남하준과 잤는데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이건 그녀의 첫 경험인데 어떻게 다 잊을 수 있을까?정안은 속으로 울부짖으며 이불 속에서 주먹으로 침대를 쥐어박았다.그녀는 자신이 기억을 잃은 것에 화가 났을
정안은 공기마저 후끈 달아오른 것 같아 힘껏 숨을 쉬고는 용기를 내어 걸어갔다.발소리가 들리자 남하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정안은 별다른 인사도 없이 차가운 얼굴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고 냉랭한 태도를 유지했다. 수줍은 눈빛을 최대한 감추고 뾰로통해서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남하준은 미간을 약간 찡그리고 그녀 얼굴이 불그스름하고 눈가에 수줍음이 가득하고 약간 어수룩하지만 또 약간 화가 난 것을 보았다.그는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먼저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아직도 머리 아파?”그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 정안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아직도 아프냐는 것만 들렸다.정안은 이를 악물고 짐짓 덤덤한 척 그를 노려보며 약간 노기를 띠고 말했다.“정말 너무 하다는 생각 안 해요?”어제저녁 그녀가 서글프게 울던 것이 떠오른 남하준은 노트북을 덮고 죄책감 가득해서 말했다.“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정안은 안색이 돌변하며 마음이 불편했다.‘앞으로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원나이트 상대?’“그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정안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서러운 눈물을 글썽이며 촉촉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움찔 놀란 남하준은 급히 손에 들고 있던 노트북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왜 울어? 내 사과가 성의가 부족했어?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해?”그녀는 아무것도 바랄 수 없었다. 그녀가 여전히 Z국의 과학자인 이상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그에게 명확한 명분을 줄 수도 없고 함부로 그와 결혼할 수도 없었다.“나 왜 여기로 데려왔어요?”정안은 애써 참으며 질문했지만 눈 밑에는 서운함이 더 짙어졌다.그가 조용히 대답했다.“네가 내 곁에 있어야 보호하기 쉽잖아.”정안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이유라 그녀는 말없이 싸늘하게 일어나 돌아섰다.그녀가 막 몇 걸음 걷자 남하준이 쫓아와서 그녀를 홱 잡아당겨 두 팔을 잡았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정안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잠시 마음을 다잡더니 물었다.“나랑 유미 중에 한 사람만 선택해요.”남하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너.”“그럼 어젠 나한테 왜 그랬어요?”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호소했다.“그 여자가 나를 그렇게 구박하는데 도와주지도 않고 오히려 그 여자 말에 동의했잖아요.”“내가 미안해.”“사과 안 받아요.”정안은 차갑게 한마디 던지고 돌아섰다.“완아...”남하준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고 재빨리 쫓아가 그녀의 몸을 덥석 껴안고 그녀가 떠나지 못하게 힘껏 조였다.정안은 몸이 굳어지고 멍해졌고 심장 박동이 더욱 강렬해졌다.남자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명분을 갖고 싶었어. 그래서 유미를 이용해 널 압박했던 거야.”“네가 슬퍼하는 거 보면서 나도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야. 나도 괴로웠다고.”남하준은 눈을 감고 살짝 울먹이며 그녀의 팔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하지만 네 마음속에 내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어. 나 때문에 네가 힘들어하는지도 알고 싶었고.”정안은 몰래 눈물을 훔쳤다.남하준은 가슴이 답답하며 아파지는 것 같아 입술을 살짝 벌리고 호흡했다. 뜨거운 입김이 정안의 목피부에 뿌려져 그녀는 피부가 간지럽고 몸이 나른하고 힘도 빠지는 것 같았다.“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순조롭게 M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우리 계속 부부로 지내자고. 그건 명분이 아니고 뭔데요?”남하준은 그녀를 자신의 심장에 비벼 넣을 기세로 힘을 주어 그녀를 꼭 껴안고 눈을 감고 위안을 찾으려 했다.“나 사랑해?”남하준이 자신 없이 계속 물었다.“진심으로 나랑 결혼하고 싶은 거야?”정안은 남자의 힘에 의해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괴로운 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지금은 아무런 확신도 줄 수 없어요.”“나 기다릴 수 있어.”“그럼...”정안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앞으로 진짜 내 몸에 손 안 댈 거예요?”남하준은 얼떨떨해져서 눈을 뜨고
“콜록!”류청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정안은 남하준의 품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어색하게 고개를 떨구었고 류청은 눈을 흘기면 못 본 척하며 말했다.“도련님, 지윤 씨께서 아가씨 보러 오셨어요.”정안이 반색하며 몸을 돌렸다.“지윤이요? 어디 있어요?”그때 지윤이 들어오더니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도련님, 안녕하세요. 언니!”정안이 다가가 지윤의 손을 덥석 잡더니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왔어?”지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남하준에게 말했다.“도련님, 언니랑 같이 외출할 일이 있어요.”“류청이 데리고 가요.”남하준은 지윤의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고 걱정하며 말했다.지윤은 정안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그녀의 의견을 물었고 지윤의 눈빛에서 난처함을 읽은 정안이 남하준에게 말했다.“오빠, 그럴 필요 없어요. 지윤이랑 있으면 별일 없을 거예요.”남하준은 정안의 견고한 눈빛을 바라보며 그녀가 걱정되었지만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에게 늘 가장 많은 존중과 자유를 주는 그였다.“그래, 가봐. 꼭 조심해.”“네.”남하준이 당부하자 정안이 대답했다.“제가 언니 잘 지킬게요.”말을 마치자 정안이 지윤을 데리고 거실을 떠났고 류청이 남하준에게 물었다.“제가 몰래 따라갈까요?”남하준은 몇 초 동안 생각하더니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들고 뚜껑을 열며 말했다.“아니. 개인적인 일이 있겠지.”류청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하준은 늘 그녀를 아끼고 존중해줬는데 이건 그가 본 적 없는 깊은 감정이었다.정안과 지윤은 차에 올라 번화한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정안이 덤덤하게 물었다.“Z국 쪽 일은 어떻게 됐어?”지윤은 표정이 굳어졌다.“잘 안 되고 있어요. 연구소도 동의하지 않고 Z국도 동의할 생각이 없어요. 언니가 빨리 업무에 복귀하도록 타이르라고 했어요.”정안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의 등받이에 맥없이 기댔다.“언니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알고 Z국은 이미 언니를 설득할 사람을 보냈어요
정안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조직에서 백인호를 구해갔어. 아직 모르나 봐?”베스엔나의 얼굴이 침울해지더니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정안을 바라보았다.“조직에서 M국의 유명한 과학자 두 명을 납치해 백인호와 바꾸겠다고 협박했어.”“콕 집어서 백인호를 원한다고 했지만 너에 관해서는 언급도 없었어. 너를 구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용가치가 없어서 포기한 거지.”엔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믿기지 않아 고함을 질렀다.“헛소리!”“내가 지금 와서 너를 왜 속여?”엔나는 차갑게 웃었고 웃음 속에는 조롱과 서글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웃다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애초에 백인호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어. 널 죽였다면 내가 이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다고.”정안이 물었다.“넌 내 자리를 대신하고 싶어 했지. 남하준이 다시 나를 좋아하게 됐다는 걸 알았을 때 네가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날 죽이려 했는지 잊었어?”엔나는 냉소를 짓더니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네 목숨이 그렇게 질길 줄은 몰랐지. 넌 매번 교묘하게 위험에서 벗어났어. 널 죽이진 못하고 오히려 기억까지 회복하게 했으니, 신이 날 버린 거지.”정안은 이제야 모두 그녀가 한 짓이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그녀의 이런 무모한 행동은 자신의 정체를 쉽게 드러낼 수 있었고 그래서 조직이 그녀를 포기한 거였다.“그럼 내 부모님은 어디 있어?”정안은 여전히 백인호의 말을 믿지 않았고 마음속에 일말의 희망을 품고 부모님의 행방을 계속 추적했다.엔나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져서 복잡한 눈빛으로 정안을 바라보았다.정안이 다급해서 계속 물었다.“내 부모님 어디 있어? 대체 어디 숨겼냐고!”엔나는 냉소를 짓더니 수화기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나 여기서 구해준다면 네 부모님 행방을 알려줄게.”무너진 희망이 되살아난 정안은 흥분에 가득 찼다.“안 죽고 살아계시지? 맞지?”“그래, 안 죽었어.”엔나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네 아버지는 M국 갑부의 아들이
지윤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그래도 다행이에요. 아저씨 아주머니가 살아계신단 것만으로도 좋은 소식이잖아요.”정안도 그렇게 여겼지만 마음이 착잡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신 건 다행이지만 그들이 처한 처지를 생각하니 슬프고 절망스러웠다.그녀는 어떻게 해야 부모님과 어린 남동생을 구할 수 있을까?돌아가는 길, 정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지윤이 차를 몰며 물었다.“금원으로 가요?”“응.”정안이 얼떨결에 대꾸했고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그녀가 발신자 표시를 확인하더니 전화를 받고 귓가에 갖다 댔다.“지우야.”지우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깃들었다.“네가 저번에 말한 그 알바. 나 해보고 싶어.”“좋아. 지금 시간 있어?”“응.”“그래. 그럼 나 지금 남씨 본가로 갈게. 우리 대문 앞에서 만나.”전화를 끊은 후 정안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지윤아, 남씨 본가로 가.”지윤은 즉시 핸들을 돌려 본가로 향했고 그들이 본가에 도착했을 때 지우는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들어갔다.정안은 남태준의 심리 상담사 겸 간병인으로 지우를 남창민과 허윤미에게 소개해주었다.하지만 허윤미는 상냥한 얼굴에 연약한 모습의 지우를 보고 걱정하며 말했다.“완자야. 네가 우리 태준이 신경 써준 건 정말 고마워. 하지만 이 아가씨는 적임자가 아닌 것 같구나.”지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아주머니, 저 믿으세요. 저 할 수 있어요!”허윤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지우 씨. 이거 쉬운 일 아니에요. 태준이 깨어난 후로 우리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어요. 정신과 의사만 수십 명을 바꿨고 간병인도 3일을 버티는 사람이 없었어요. 남자 간병인도 자주 다치는데 연약한 지우 씨가 할 일이 아니에요. 다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지우는 긴장된 표정으로 정안을 바라보았고 마침내 시간당 수당이 40만 원이나 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그렇게 위험하다고? 설마 짐승인가?정안은 지우의 손을 꼭 잡고 설명했다.“지우야,
단풍나무 숲에는 요양하기 적합한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을 갖춘 독특한 작은 건물이 있었다.정안은 지우를 데리고 가면서 설명했다.“이름은 남태준, 올해 30살이야. 전에는 아주 용감한 마약 단속 경찰이었어. 훈장도 많이 받았고. 최근 몇 년 동안 M국 국경을 넘나들며 잠복 요원으로 일했고, 국경을 넘어 마약 밀매업자들과도 오랫동안 거래했어.”“마약 경찰로서 늘 초심과 본분을 잊지 않았고 덕분에 많은 마약을 노획했고 많은 사람을 구했지.”“하지만 이번엔 신분이 폭로돼 그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 오랫동안 시달렸어. 발견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어.”“의사가 염라대왕 손에서 다시 구해왔는데 깨어나 보니 자신이 장애인이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지금은 폐인처럼 살고 있어.”지우가 물었다.“그렇게 극적으로 다시 살았으면 어떻게든 잘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사실 난 가끔 태준 오빠 마음이 이해가 가.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잖아.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 게 더 낫지.”정안은 탄식하더니 말했다.“태준 오빠가 죽으면 가족들은 슬퍼하겠지만 태준 오빠가 죽지 않으면 오빠가 괴롭잖아.”정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또 말했다.“참, 그리고 첫사랑한테 배신당해서 신분이 폭로됐어.”“뭐? 여자친구한테 배신당했다고?”지우가 경악해서 정안을 바라보며 묻자 정안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여자친구 말고 첫사랑. 이미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났는데 한 마약 밀매업자 두목의 집에서 그 첫사랑이 마약을 운반하는 걸 발견했대.”“오빠는 그 여자를 구하고 싶었지만 상대방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어. 여전히 마약 두목의 달콤한 거짓말을 믿었고 심지어 태준 오빠가 M국에서 경찰대를 졸업하고 반년 동안 마약 경찰로 일했지만 후에 사라졌다는 것도 말해버렸어.”“그 두목이 M국에 사람을 보내 깊이 조사한 결과 태준 오빠의 정체를 알아낸 거지.”지우는 화가 나서 이가 간질간질하며 물었다.“그럼 그 썩어 죽을 년은 어떻게 됐어? 죽었어?”“태준 오빠가 강제로 마약 소굴에서 끌
“꺼져!”남태준이 노호하며 옆에 있던 술병을 마구잡이로 깨뜨렸다.집 안에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날카로운 유리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흩날렸다.정안은 지우가 다칠까 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반면 지우는 모든 공격을 피해 남태준의 휠체어를 빠르게 빈 구석으로 밀어냈다.상황을 파악한 정안은 급히 거실로 뛰어 들어가 지우와 협력하여 집안의 모든 위험물을 봉투에 넣어 갖고 나갔다.남태준은 죽은 사람처럼 두 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휠체어에 머리를 기댄 채 나른한 모습이었다.지우가 그에게 다가가서 숨을 헐떡이며 눈앞의 남자를 열심히 살폈다.흐트러진 머리칼이 눈을 가릴 정도로 길었고, 수척한 볼은 그루터기로 뒤덮여 퇴폐적이며, 검은 바지가 그의 마른 몸을 감싸고 있었다.지금의 그는 영혼이 없는 허약한 몸만 남았을 뿐 삶의 의욕이 조금도 없었다.정안이 다가가 눈물을 글썽이고 남태준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파 울먹였다.“오빠, 이제 좀 그만해요. 계속 이렇게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면 몸이 망가져 죽을 거예요.”지우는 정안을 문밖으로 밀어내고 정중하게 말했다.“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너 먼저 돌아가. 1년만 시간을 주면 내가 네 빚도 다 갚고 이 남자 포동포동하게 살 찌워 놓을게.”정안은 그녀에게 돈을 갚으라고 할 생각은 없었지만 정말 남태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지우는 그녀를 향해 살짝 웃으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문이 닫히는 순간 정안은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이 앞섰다.집 안.문을 잠근 지우가 남태준 앞에 다가서자 부드러웠던 눈빛이 엄숙하고 강인하며 단호하게 굳어졌고 선서 같기도 하고 경고 같기도 한 말을 또박또박 내뱉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지우라고 해요. 오늘부터 도련님의 일상생활을 돌보고 심리치료를 해줄 24시간 밀착 간병인이에요.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금부터 당신은 반드시 저의 모든 계획에 협조해야 합니다.”남자는 죽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입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글자를 내뿜었다.“꺼져.
지우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백건을 바라보았다.백건은 긴장하며 침을 삼키고 지우가 청혼서를 돌려줄까 봐 두려웠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슬쩍 바지를 만졌다.지우가 청혼서를 들더니 말했다.“건아, 사실은...”지우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백건은 긴장감에 허리를 굽혔다.“제가 아주머니보다 더 서연이를 아껴줄게요. 부디 허락해주세요.”지우는 어리둥절했고 남태준은 싱긋 웃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건이가 아주 놀랐나봐.”지우는 서둘러 해명했다.“난 이런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던 거야. 우리 가족들은 두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거야.”백건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감사합니다.”“어서 앉아.”지우는 자리에 앉아 손을 뻗어 백건도 앉으라고 했다.자리에 앉은 백건은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눈에 띄게 긴장한 백건의 모습에 집안 어른들은 모두 기뻐했다.특히 몇몇 큰아버지들은 집안에서 가장 아끼는 공주님이 M국의 갑부와 결혼할 수 있고, 심지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남자라고 생각하니 더욱 만족스러웠다.모두들 잡담을 하고 있을 때, 남서연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와. 웬 선물이 이렇게 많아요? 이거...”말을 반쯤 마친 그녀는 이미 남우영을 따라 거실로 갔다.백건을 보자마자 그녀는 얌전하게 변했다. 장난기 많고 발랄하던 모습의 그녀는 곧 부끄러움에 휩싸여 긴장한 채 백건을 바라보았다.남자의 눈빛은 뜨거웠다.“이거 건이가 가져온 예물이야.”허윤미가 말했다.예물이라는 말을 들은 남서연은 심장이 쿵쾅거리고 더욱 부끄럽고 긴장했다. 입술을 오므리고 웃으며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지우는 딸의 반응을 보고 또 백건을 보더니 아무래도 두 사람이 연인 사이 같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서먹서먹한 수줍음이 감돌고 있었는데 마치 썸을 타는 시기 같았다.허윤미가 또 입을 열었다.“서연아, 며칠 후에 너도 선물을 갖고 정식으로 건이 부모님께 인사드려. 그리고 시간을 내서 양쪽 가족
백건은 모든 예물을 갖고 차에 올라 별장을 떠났다.유승아는 서윤아를 부축한 채 별장 문에 서서 떠나가는 차를 보며 안색이 극히 어두웠다.서윤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유승아는 분노가 점점 끓어올랐지만 꾹 참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주머니, 서연이는 곱게 자란 공주님이고 건이와 어울리지 않지만 건이가 좋아하니 허락해주세요. 정말 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전 괜찮아요.”유승아는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 서윤아가 안쓰럽게 여겨 더욱 열심히 도울 줄 알았다.그런데 서윤아는 가볍게 탄식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우리 건이와 결혼하기에는 서연이가 아깝지.”유승아는 어리둥절해 하며 서윤아를 바라보았다.곧 서윤아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서연이는 온실에서 작은 화초라 백지장처럼 단순해. 내 아들이 아니라 자기처럼 단순한 남자를 만나야 해.”그 말인 즉, 백건에게는 단순하지 않은 여자가 어울린다는 뜻인가?예를 들면 신분, 성격이나 능력 같은 것...유승아는 마침내 서윤아가 남서연을 좋아하지만 왜 며느리로 삼고 싶지 않은지 알 것 같았다.그녀는 아들을 내조할 수 있는 사업적 파트너를 찾아주고 싶어 했다. 듣기 싫은 말로 서로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자였다.유승아는 조금 당황스러웠다.서윤아처럼 똑똑한 사람은 유승아가 단순하지 않고 수단이 있고 정치적 힘도 갖고 있다고 생각해 그녀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그녀가 의심하고 있을 때, 서윤아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내가 너희 둘 결혼식을 책임질 테니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유승아는 막막한 척 말했다.“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서윤아는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 미소는 또렷하게 말해주고 있었다.“넌 똑똑한 애니까 알고 있잖아.”서윤아는 말없이 천천히 별장을 떠났고 유승아가 서둘러 쫓아갔다.그녀는 당연히 이해했다.결혼식은 이미 준비되었고 그녀는 백건과 남서연의 혼사를 망치고 그들의 감정을 깨뜨리기만 하면 순조롭게 백건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유승
여자는 크면 집에 묶어둘 수 없는 법.남서연은 기쁨에 젖어 있었지만 가족들이 모두 자신의 혼사에 대해 걱정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왜냐하면 백건과 결혼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반드시 그의 부모님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으니....다음날 백건은 이미 푸짐한 예물을 준비했다.모두 직접 준비한 것으로 성의를 다했다.거실에서 하현우는 열심히 예물을 체크하고 있었다.그때 거실문이 열리고 유승아가 서윤아를 부축해 들어왔다.하현우는 들어온 사람을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사모님, 승아 씨 오셨어요?”서윤아는 온화하게 웃었다.“이거 승아에게 주는 예물인가?”하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침실 쪽을 돌아보았다. 백건이 빨리 나오기만을 기도했다.서윤아는 하현우 앞에 다가가 강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물었다.“내가 묻잖아?”하현우는 바짝 긴장해 대답했다.“서연 아가씨에게 주는 예물입니다.”유승아의 얼굴빛이 약간 어두워졌다.그러나 서윤아는 피식 웃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승아네 집에 갖다 주게.”“하지만...”하현우는 망설이며 뒤를 돌아보았다.서윤아는 소파에 앉아 차갑고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볼 필요 없어. 내가 갖다 주라면 갖다 주면 돼. 그 녀석 허락받을 필요 없어.”말을 마친 서윤아는 유승아에게 손을 내밀었다.“승아야, 앉아.”유승아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서윤아의 곁에 앉아 나지막이 말했다.“아주머니, 이건 건이가 남씨 가문에 주려고 준비한 예물이잖아요. 하 비서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건이와 결혼하는 여자는 너이니 당연히 이 예물도 네 것이지. 나도 서연이를 아주 좋아하지만 아직은 건이 아내가 될 자격이 없어.”“사업적으로 건이를 도울 수 없고 또 일상생활에서도 건이가 서연이를 돌봐줘야 해. 너만큼 성숙하지도, 능력이 강하지도 않아. 게다가 우리 두 가문은 친척 관계잖아.”백건은 방문을 나서서 양복의 커프스를 정리하면서 침착하게 계단을 내려갔다.그의 싸늘한 말투는 얼음처럼 차가워 뼛속을 파고들 것 같았다.“서연이는 나를 행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백건은 차에 올랐고 차량은 서서히 남씨 본가를 떠났다.뒷좌석에서 백건은 한마디 말도 없이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하현우도 기뻐하며 말했다.“축하합니다. 대표님.”“고마워.”한 번도 이렇게 대답한 적 없었는데 보아하니 기분이 아주 좋은 것 같았다.하현우는 찬물을 끼얹어야만 했다.“대표님, 근데 사모님 고비는 어떻게 넘기실 거예요?”백건의 안색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그리고 차 안은 말이 없었다....남씨 본가 거실.모든 사람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다.남태준과 지우는 딸이 가족들 앞에서 백건에게 청혼했다는 사실을 듣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남서연은 가족에게 둘러싸여 불심 검문을 당했다.“두 사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언제부터 만났어? 진도가 왜 이렇게 빨라? 갑자기 결혼 얘기까지 나오다니?”이러한 문제에 대해 남서연은 모두 털어놓았다.“우리는 정식으로 만난 적 없어요. 제가 어릴 적부터 오빠를 짝사랑했어요.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요.”“그럼 건이는 어떤 생각인데?”“오빠도 저와 결혼하고 싶대요.”남태준은 주먹을 쥐며 격분했다.“넌 단순하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애야. 분명 백건 그 자식이 오랫동안 음모를 꾸민 게 틀림없어.”지우가 나서서 말렸다.“당신 화부터 내지 말아요. 건이가 음모를 꾸몄든 아니든 인품은 좋은 애잖아요. 가짜 약혼녀 유승아를 빼고 다른 스캔들도 없었고.”남태준은 딸이 아까워 격노하며 물었다.“건이는 차갑고 예민해서 말도 잘 안 하는데 어떻게 우리 서연이와 어울려?”지우가 답했다.“난 두 사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서연이는 어릴 때부터 단순하고 걱정 없이 잘 웃으니 예민하고 차가운 건이 성격과 딱 상보적이잖아요.”허윤미는 시무룩해서 말했다.“하지만 서연이는 아직 너무 어려. 이렇게 일찍 결혼할 필요 없어.”“맞아요. 저도 동의해요.”“맞아요. 너무 어려요. 결혼을 서두를 필요 없어요.”남우
남서연은 빠른 걸음으로 뛰어내려 계단 모퉁이에 서서 백건의 뒷모습을 보며 외쳤다.“오빠, 우리 결혼해요!”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또렷했다.떠들썩한 거실이 폭탄을 떨어뜨린 듯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입을 딱 벌린 채 남서연을 충격적으로 바라보았다.온 집안이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백건은 움찔하더니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거실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드러난 충격이 그에게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해주었다.그는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돌아서서 남서연을 바라보니, 그녀는 반달 눈을 한 채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세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백건이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면 남서연은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있었다.남서연은 다시 한번 외쳤다.“오빠, 우리 결혼해요.”백건은 눈가가 흠뻑 젖어 그녀를 향해 입술을 오므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큰소리로 대답했다.“좋아!”거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남우영이 일어나서 말했다.“난 반대야. 내 삼촌이 내 사촌 동생과 결혼한다니. 이게 말이나 돼?”남창민이 남우영의 손을 덥석 잡아당겨 소파에 앉히고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넌 네 결혼이나 신경 써. 네 삼촌과 서연이 일은 걱정할 필요 없어.”남우영은 고민 끝에 남서연의 아래에 뛰어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서연아, 지금 두 사람 농담하는 거지? 두 사람.. 두 사람 늘 차갑고 낯선 사이였잖아? 갑자기 결혼이라니? 너 진우석이랑 결혼하려던 거 아니었어?”백건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걸어가서 남우영의 목을 조르고 소파로 끌고 갔다.장면이 좀 난처하게 되었다.백건은 어른들께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오늘 급하게 왔어요.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다음에는 정식으로 혼수 예물을 갖고 찾아뵙겠습니다.”허윤미가 서둘러 말했다.“그래. 어서 돌아가. 우리도 서연이와 잘 얘기해볼게. 너무 오냐오냐 키
“왜 내 방에 들어왔어요?”남서연은 긴장해서 그를 내쫓으려 했다.“얼른 나가요. 오빠가 몰래 내 방에 들어온 거 가족들이 알면 큰일 나요.”백건은 이미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오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더라도 결과를 얻어야 했다.“가족들에게 우리 결혼에 대해 직접 말하겠다고 시간을 달라며?”백건은 실망스럽기 그지없고 눈 밑에 슬픔이 가득했다.“방금 네 할아버지, 할머니와 얘기를 나눠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던데?”“그게...”남서연은 말문이 막혔다.백건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뜨거운 호흡이 남서연의 피부에 뿜어져 나와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백건이 매력적인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나와 결혼하기 싫어?”남서연은 거짓말이 언젠가 들통 날 것이니 사기 결혼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죄책감을 안고 말했다.“미안해요 오빠. 나 임신하지 않았어요.”백건은 가슴이 칼에 베인 듯 아파 숨을 쉴 수 없었다.남서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미안해요. 일부러 거짓말한 건 아니었어요. 생리가 늦어져서 약국에 가서 유통기한이 지난 테스트기를 샀더니 이런 오해가 생겼어요.”“내가 임신하지 않았으니 오빠도 저 책임질 필요 없고 우리도 결혼할 필요 없어요.”남서연이 한마디 덧붙이자 백건은 두 손으로 벽을 짚고 그녀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무력감은 그를 쓸쓸하기 짝이 없게 만들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고 그는 씁쓸하게 냉소를 지었다.남서연은 축 늘어진 그의 머리를 보며 긴장한 채 물었다.“오빠, 왜 그래요?”“남서연, 천국에서 지옥까지 떨어진 충격이 얼마나 큰지 알아?”백건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남서연은 그가 너무 안쓰러웠다.대체 얼마나 아이를 원했으면 이렇게 슬퍼할까?“미안해요.”남서연이 나지막이 사과했다.백건은 깊은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남서연을 바라보았다.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비분이 교차하는 눈빛에 남서연은 겁을 먹고 조심스럽게 위로했다.“오빠, 너무 슬
[나 기다리고 싶지 않아. 그냥 내가 말씀드릴게.][싫어요. 안 돼요. 그냥 제가 말할게요.]사흘째 되던 날, 남서연이 어렵게 용기를 내어 가족에게 고백하려고 했을 때 피가 흘렀다.그녀는 유산인 줄 알고 놀라서 혼자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갔다.근데 알고 보니 생리였다.의사는 테스트기가 틀릴 가능성도 있으니 임신을 확정하려면 반드시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알고 보니 이 모든 건 오해였다.그녀가 임신하지 않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녀는 한없이 서글프고 괴로웠다.슬프게도 백건에게 시집가는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아이를 빌미로 그와 결혼할 가망이 없어졌다.그녀는 백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백건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 물었지만 답장하지 않았다.일주일 뒤.기업 디자인 부서에서.하현우는 직접 디자인 부서에 와서 남서연을 찾았고 공손히 말했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찾으세요.”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배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미안해요. 집에 일이 좀 생겨서 시간이 없다고 전해주세요.”남서연은 가방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그녀는 아직 백건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생각하지 못했다.백건을 속이고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한 후에 그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했다.그런데 가짜 임신으로 속여서 결혼해야 백건에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슬프기도 했다....대표 사무실.백건은 인터넷에서 임신 기간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어떻게 임산부를 보살피는지, 산전 검사를 어떻게 하고 어떻게 간호해야 하는지 등등...그때 하현우가 노크했다.남서연인 줄 알았던 백건은 순간 마음이 가라앉아 혼자 온 하현우를 보며 물었다.“서연이는?”“아가씨는 먼저 집에 돌아가셨어요.”백건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천천히 눈을 감고는 마음의 답답함을 달랬다.남서연은 대체 무슨 뜻일까?이미 일주일 동안 그를 피했다.잠시 후 그는 눈을 뜨고 책상 위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대표님, 어디 가세요?”백건은 성
유승아는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짓더니 남서연이 가장자리에 앉아 조용히 경청하는 것을 보고 즉시 화제를 돌렸다. “서연아, 촌수로 따지면 네가 건이를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두 사람 만나게 되면 양쪽 어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네 작은 엄마가 어떻게 그런 복잡한 관계를 처리하겠어?”남서연은 멍해졌다.그녀가 설명하기도 전에 백건이 버럭 화를 냈다.“지금 내 앞에서 시비를 거는 거야?”유승아는 서둘러 해명했다.“네 친구로서 서연이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했을 뿐인데 왜 시비를 건다고 말해?”“이건 나와 서연이 일이니까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너 할 말 끝났으면 돌아가.”유승아는 얼굴의 미소가 점점 사라지고 태도가 진지해졌다. “백건, 비록 우리 연인 사이는 가짜였지만 오랜 우정은 가짜 아니지?”“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친구로서 충고 한마디 하고 싶어. 너와 서연이는 절대 불가능해. 양쪽 어른들께서 동의하지 않을 거야. 괜히 어린 서연이 상처 주지 마.”백건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유승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나 할 말 끝났으니까 돌아갈게. 두 사람 잘 생각해봐.”두 사람 모두 일어나서 유승아를 배웅하지 않았다.문이 심하게 닫혔고 거실이 조용해졌다.남서연과 백건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어색한 듯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승아 언니 말이 맞아요. 양쪽 집안에서 쉽게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넌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내 옆에 있겠다고, 나와 결혼하겠다고 동의하면 돼.”남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잠시 침묵을 삼키더니 물었다.“서연아, 키스해도 돼?”남서연은 이런 문제일 줄은 몰랐다.그녀는 머리가 텅 비었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멍해 있을 때, 남자는 그녀를 소파에 눕히고 키스를 했다.기습적인 키스에 남서연은 당황스러웠다.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키스를 나눴다.저녁 무렵.집
유승아는 조금 경악했다.“서연이도 있었네?”그러자 백건이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다음 달 결혼에 대해 아주머니가 너무 재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너와 의논하려고 왔어.”남서연은 괜히 애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승아는 남서연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서연아, 나 건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너...”남서연은 급히 말했다.“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전 먼저 가볼게요.”그녀가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백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너 갈 필요 없어. 여기서 들어.”남서연은 경악했고 유승아는 얼굴이 굳어지며 난처한 태도로 말했다. “건아, 그건 좀 아니지. 우리 두 사람 얘기야. 서연이는 외부인이고.”백건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외부인이 아니라 내 아내야.”남서연은 깜짝 놀랐고 유승아는 더욱 경악했다.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백건을 바라보았다.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말에 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벌써 그의 아내가 되는 건가?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두 사람... 만나기로 한 거야?”남서연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자 백건이 또박또박 대답했다.“응. 몇 분 전에 결혼까지 약속했어.”유승아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짐짓 대범한 척 말했다.“축하해.”“소파에 가서 앉아서 말해.”백건은 남서연의 손을 잡고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유승아도 따라가 앉더니 침울하게 숨을 푹 내쉬었다.“우리 집 쪽 친척들은 이미 청첩장을 받았어. 다들 축하 전화를 걸어오고 있어. 오늘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나를 찾아오셔서 결혼식은 반드시 거행될 거라고 하셨어. 어떻게든 너를 잡아서 교회에 묶어둘 테니까 안심하고 너의 신부가 되라고 하셨어.”백건이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유승아는 남서연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생각해? 오랫동안 네 여자친구였으니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잖아.”백건은 서둘러 남서연을 바라보며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