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은 화가 나서 온몸이 쑤셨다. 남하준 같은 대쪽 같은 남자 옆에 여우 같은 여자가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형제 같은 감정이라니?유미는 분명 남하준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는데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하준의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버렸다.그의 전화가 다시 걸려오자 정안은 문자 한 통을 보냈다.“배터리 없어요.”그러고 나서 그녀는 전원을 껐다.차량이 강변에 도착하자 넓은 도로에 아름다운 상품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고 강변에는 많은 관광객이 왕래하고 있었다.정안은 계속 위로 올라가서 인파를 뚫고 걸어가다 보니 끝에 있는 지우가 보였다.지우의 작은 노점상에는 다양한 상품들이 놓여 있었는데 종류가 많고 가격이 저렴했다.모두 매우 평범한 공예품, 작은 장식품과 머리 장신구 등등이었다.“완자!”지우는 정안을 보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고 신이 나서 낮은 의자에서 일어나 정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정안도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그녀의 앞에 진열된 상품을 내려다보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렸다.이거 다 팔아도 20만 원도 안 될 것 같았다.지우는 정안을 끌어당겨 유일한 낮은 의자에 그녀를 앉히고 자신은 쪼그리고 앉아 정안을 보며 낙관적으로 말했다.“오늘 사람 많아서 아까 엄청 바빴잖아. 그래서 너랑 길게 얘기 못 했어.”“아주 바빠?”정안이 안쓰러워하며 다정하게 물었다.“바쁠 때도 있고. 손님이 몰리면 잠깐 바쁘다가 또 없으면 그냥 앉아있지 뭐.”정안은 지우의 손을 잡더니 물었다.“오늘 얼마 벌었는데?”지우는 감격스러운 눈빛을 하고 흐뭇하게 말했다.“아침 내내 4만 원 벌었어. 만약 저녁까지 기다린다면 10만 원 넘을 수 있을 것 같아!”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으며 마음이 씁쓸했다.지우가 또 말했다.“너 저녁에 집 가지 마. 내가 국수 사줄게.”그때 한 손님이 다가와 유리구슬 팔찌를 집어 들며 물었다.“이거 얼마예요?”지우는 벌떡 일어서서 환하게
잠시 후 정안은 봉투 하나와 간이 테이블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지우가 어리둥절해 있는데 정안은 테이블을 펴고 봉투에서 A4 용지 한 묶음, 붓과 먹을 꺼냈다.그녀는 백지에 몇 글자를 써서 노점상에 붙였다.[2만 원 이상 구매 시 수묵화 그림 한 장 증정!]정안이 먹을 갈기 시작하자 지우가 좌우를 살피며 말렸다.“여기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야. 평소 명화 같은 거엔 관심이 없어서 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야.”정안은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지완의 공식 계정에 로그인하여 게시물 하나를 올렸다.[친구를 위해 물건 파는 중. 2만 원 이상 구매 시 그림 무료로 증정.]정안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싱글벙글 웃으며 지우를 보았다.“기다려봐.”지우는 감사한 마음이 컸지만 정안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조금 불안했다.“네 그림이 얼마나 비싼데 여기 노점상 전체 상품을 합해도 네 그림 가격 천만 분의 일도 안 돼. 네가 네 몸값 낮춰 가며 나 도와주면 나 엄청 죄책감 느낄 거야.”정안은 A4 용지를 휙휙 저으며 말했다.“나 원래 자선 목적으로 그림 그렸어. 널 돕는 것도 일종의 자선이야. 그리고 이렇게 작은 종이에 그리는 그림은 별로 가치도 없어.”지우는 반신반의했다.정안은 가치가 없다고 했지만 30분 후, 그들의 노점상 앞에 십여 대의 고급차량이 세워졌다.노점상 앞에 줄을 서서 그림을 기다리는 남자들은 모두 양복 차림에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이 거리의 품격과 어울리지 않았다.온 사람들은 수집가이거나 회사 대표들의 비서였다.“여기 있는 상품 전부 살 테니 지완 씨 그림에 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이것은 모든 호기로운 손님들의 요구였다.그러면 정안이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죄송하지만, 서명이나 사진은 안 됩니다.”그녀는 일단 그녀가 서명하거나 그림과 사진을 찍으면 이 그림은 물이 불어나서 몇백만 원 이상의 가격에 팔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그녀가 지우를 도우려는 원래 취지
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었다. 지우를 도울 수 있어 기분이 좋은 그녀는 유미와 남하준의 걱정거리를 진작 잊고 있었다.지우가 젓가락을 들고 국수를 먹으며 궁금해서 물었다.“기사 보니까 너 그림 한 장이 몇십억 원이라던데, 정말이야?”정안은 엷게 웃더니 젓가락을 놓고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 보통은 몇천에서 몇억 정도.”지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왜 그렇게 값이 나가는 거야?”“예술은 재능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노이즈 마케팅과 셀럽 효과가 더 크지. 나 처음에 온라인에서 그림 그렸거든. 그때 자선 경매를 하는데 아빠가 나 몰래 40억 원으로 내 그림을 샀어. 난 또 그 거금을 산간 지역의 학교에 기부하면서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지. 그 후로는 걷잡을 수 없이 값이 치솟았어.”“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네 그림은 몇십 억 원의 가치가 있고 소장 가치가 있다고 여겼고 모두 네 스타일을 연구하고 그림을 모사하기 시작한 거네?”정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우는 유유히 면을 먹으며 감탄했다.“부자들 세상을 난 모르겠지만 네가 부럽네. 널 그렇게 사랑하는 아빠가 계시잖아.”정안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니 아빠 얘기에 그녀는 쓸쓸한 기색과 슬픈 표정이 역력했다.“지우야, 너희 아버지 요즘 건강은 어떠셔?”“지난달에 돌아가셨어.”지우는 고개를 숙이고 목이 메어 말했다.정안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한동안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모아둔 돈을 모두 탕진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어렵게 수술을 마치고 모두 좋아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 갑자기 돌아가셨다.불행은 늘 힘든 사람에게 닥친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불치병 환자의 슬픔이었다.정안은 사과의 뜻으로 지우의 손을 꼭 잡았다. 지우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모두 지난 일이었다.정안이 생각하더니 또 물었다.“지우야, 너 전에 정신병원에서 심리상담 자원봉사로 일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정안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안 돼. 돈은 꼭 줘야 해. 아니면 너 한 시간도 못 버틸 거야.”지우는 경악했다.“그 정도로 심각해?”지우는 돈도 벌고 싶고 존경할만한 마약 경찰을 돕고 싶어 하겠다고 응수했다.정안은 남태준의 업무 특성과 어쩌다 다쳤고, 현재 어떤 상태인지 지우에게 낱낱이 알려줬다.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일 무렵, 정안은 지우의 손을 잡고 국숫집을 나갔다.막 몇 걸음 걸어 나온 두 사람은 입구 큰길의 남자를 보고 걸음이 뚝 멈추었다.검은색 승용차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는데 바로 남하준, 유미 그리고 류청이었다.남하준이 어두운 얼굴로 다가가 따져 물었다.“지윤 씨는? 경호원은? 왜 혼자 다녀?”지우는 남하준이 왜 갑자기 완자에게 화를 내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정안이 어둑한 하늘을 보니 아마 연회가 끝난 것 같았다.그녀의 시선이 남하준을 넘어 유미를 향해 흘끗 보더니 마음이 불편해졌다.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남하준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엄숙한 투로 말했다.“너 때문에 지금 인터넷이 난리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어?”정안은 침묵했다. 그녀는 남하준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의 곁에 유미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지우가 나서려 했다.“사실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미가 남하준 곁으로 다가가더니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완자 씨, 아까 왜 하준이 전화 끊었어요? 전원까지 꺼서 하준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외국 지도자를 접대하는 중요한 연회에서 하준이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다고요. 그 나이 먹고 왜 아직도 철이 없어요?”정안은 어안이 벙벙해서 유미를 보며 말문이 막혔다.유미는 지금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설교하고 있을까?그녀가 남하준의 전화를 끊었다고 해도 이건 유미가 나서서 혼낼 일이 아니었다.정안은 자신의 격을 낮춰가며 유미를 비난하고 싶지 않아 남하준을 바라보았다.촉촉한 눈망
유미는 미간을 찌푸리고 정안을 흘끗 바라보더니 정의롭고 늠름한 자세로 남하준의 편에 서서 말했다.“부부라니요? 완자 씨가 부부라고 인정한대요? 대체 하준이를 뭐로 생각하는지 몰라요. 아무런 명분도 주지 않으면서 계속 인연도 끊지 않고. 보통 친구도 아니지 않아요?”류청이 급히 앞으로 나가 유미를 뒤로 당기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유미 씨, 그만 하세요.”유미는 류청의 손을 뿌리치고 울분에 차서 말했다.“난 그쪽 도련님 생각해서 말하는 거잖아요? 언제까지 저 여자 손에 놀아 나게 할거예요?”정안은 말없이 남하준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눈 밑이 촉촉해지고 가슴이 아팠다.그는 정말 유미가 하는 모든 말에 동의하고 있는 걸까?그녀를 정말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으로 생각할까?정안은 실망한 듯 지우의 손을 잡고 돌아섰고 괴로워서 목소리마저 힘이 빠졌다.“지우야, 가자.”지우가 그녀를 따라갔다.“그래.”두 사람이 막 한 걸음 걸었을 때 남하준이 정안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더니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하고 부드러운 말투에는 약간의 근심이 묻어났다.“또 어디 가는데?”정안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숨을 참으며 억울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남자는 알아채지 못하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집에 가자. 친구랑 같이 집에 가서 놀아 밖에서 돌아다니지 말고. 위험해.”지우는 가소롭다는 듯 차갑게 말했다.“나랑 함께 있는데 뭐가 위험해요? M국 치안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데요? 곳곳에 감시 카메라와 순찰 경찰들이 있으니 도련님께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남하준은 지우를 흘끗 쳐다보더니 탄식했다. 지우는 상황을 모르고 있으니 두려움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다만 정안은 자신의 신분이 특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블랙 섀도우 본부에서 이미 신분을 폭로했으니 언제 어디서든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정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덤덤하게 말했다.“도련님의 관심은 감사하지만 금원에는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다 도련님 형제분께서 내가 도련님 마음 갖고 놀면서
정안은 생각하면 할수록 괴로워 그의 뒤에 있는 유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저 여자는 아마 지금쯤 고소해 하고 있겠지?’‘나랑 오빠 사이가 틀어지는 걸 보면서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정안은 억울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알고 이기적으로 행동한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남하준이 친구 앞에서 무조건 그녀의 편이 되어주고 감싸주기를 바랐다.이 남자의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편애를 받고 싶었다.정안은 생각할수록 괴로워 이미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덤덤한 척 말했다.“그래요. 나 변덕 심해요. 오빠 나 때문에 다쳤으니까 며칠 돌봐준 것뿐이에요. 이제 몸도 회복했으니 내 책임은 다한 거죠.”“책임?”남하준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두 글자를 중얼거리더니 비참하게 씩 웃었다.“책임이라. 내 상처에 대해 단지 책임을 졌다 이 말이야?”정안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꾹 참으며 눈을 내리뜨고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분명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 말을 듣고 슬퍼할 줄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내고 말았다.남하준이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니 또 후회가 몰려왔다.그는 충혈된 눈으로 심호흡을 하면서도 자칫 그녀를 놓칠까 봐 그녀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그녀의 앞에서 남하준은 어쩔 수 없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나 아직 완전히 회복한 거 아니니까 너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야. 몇 시까지 놀고 싶어? 내가 옆에 있어 줄게. 놀고 싶은 만큼 다 놀고 나랑 집에 가.”그 말을 들은 정안은 마음이 완전히 녹아내렸다. 유미에게 속상한 말을 듣고, 또 그가 그녀를 감싸지 않았지만 더 이상 따지고 싶지 않았다.유미는 타협하는 남하준의 말투를 듣더니 열이 차올라 달려들어 따져 물었다.“하준아, 너 왜 이렇게 비굴하게 굴어? 정신 좀 차리라고!”막 마음이 약해진 정안은 유미의 개입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유미를 무시한 채 남하준을 마주 보며 또박또박 물었다. “오빠, 우리 사이 일을 외부인이 왈가불가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남하준이 막 입을
그는 지금 유미를 감싸고 있는 걸까?정안은 심지어 이 남자가 자신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그저 어린 시절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그녀를 위해 유미에게 그 어떤 상처도 주지 않으려 했다.정안은 심호흡을 하더니 힘껏 남하준의 손을 뿌리쳤다. 화가 나서 온몸이 떨리고 가슴이 괴로워 소리쳤다.“내 몸에 손대지 마!”그녀는 남하준에게서 뒷걸음질 치고 두 손으로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쓱쓱 닦았다. 지금의 자신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비참한 사람 같았다.지우가 보다 못해 걸어가서 정안의 손을 잡았다.“가자.”지우의 팔짱을 끼고 떠나며 계속 눈물을 닦던 정안은 참지 못하고 그를 돌아보았다.그녀의 뒤를 따라온 건 류청이었고 남하준과 유미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서 있었다.그녀는 완전히 절망했다.자신의 결정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남하준은 그녀가 Z국의 과학 연구 사업을 포기하고 M국으로 돌아올 가치가 없는 남자였다.정안은 생각할수록 슬펐고 이번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지우를 따라 떠났다.가로등 아래에서 정안의 뒷모습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본 남하준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고 차가운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유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곁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위로했다.“하준아, 됐어. 저런 여자는 좋아할 가치도 없어.”남하준이 차갑게 또박또박 되물었다.“저런 여자가 어떤 여잔데?”유미는 남하준의 말투가 뼈에 사무칠 정도로 차갑다는 느낌이 들어 침을 삼키더니 태도를 바꿨다.“그만 생각해. 돌아가자.”남하준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유미를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유미야, 내가 비열했던 건 인정해. 널 빌미로 완자에게 명분을 달라고 강요하고 싶었어.”유미는 경악하더니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너도 잘 알 텐데? 내가 얼마나 완자 사랑하는지?”남하준은 경고하는 투로 또박또박 말했다.“계속 나랑 친구 하고 싶다면 선 잘 지켜. 나랑 완자
인기척이 없는 깊은 밤, 금원의 불빛이 환하게 빛났다.거실에서 남하준은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한 손은 눈에, 다른 한 손은 소파 등받이에 걸치고 있었다.그의 양복 외투는 옆으로 벗어졌고, 넥타이는 풀렸고, 흰색 셔츠의 단추는 두 알이 풀렸다.그는 무기력하고 나른한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았고 퇴폐함 속에 약간의 피로가 배어 있었다.그의 주위에는 암울한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연회에서 술을 마셨기 때문에 취기가 부쩍 올랐고 마음속의 슬픔은 알코올에 의해 몇 배 증폭되었으며 머릿속은 방금 눈물을 흘리던 정안의 모습들로 가득 찼다.그는 자신이 미쳤다고 느꼈다.왜 정안이 유미의 따가운 질책에도 그에게 명분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보통 친구? 아니면 남자친구? 그는 명분을 얻기 위해 미쳤던 것 같았다.이전의 그는 어떤 여자와도 명분 없는 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지만 상대는 백완자였으니 그는 자신의 룰을 깨고 명분이 없어도 될 것 같았다.그녀가 그의 마음을 갖고 놀든, 썸을 타든, 심지어 잠자리를 갖고 싶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그녀만 원한다면.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고 남하준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손을 뻗어 탁자에서 휴대폰을 가져와 귓가에 연결했다.잠긴 목소리는 아주 낮았고 무기력하게 물었다.“지금 온대?”류청이 말했다.“도련님, 아가씨께서 친구분이랑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낯선 남자랑 춤까지 추고 계세요.”남하준은 허리를 굽히더니 머리를 숙여 손으로 이마를 짚고 팔꿈치를 무릎에 괴고 말했다.“놀게 놔둬. 잘 지켜보고. 충분히 다 놀면 데려와.”류청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제가 방금 아가씨 데려가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 금원에는 절대 안 간대요. 놀다가 백씨 저택에 갈 거래요.”남하준은 침묵하더니 엄숙하게 말했다.“안 오겠다면 납치해서라도 데려와.”“네, 알겠습니다.”류청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고 남하준은 휴대전화를 옆으로 휙 던지고 소파 등에 쓰러져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두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