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술을 권했지만 아무도 남하준이 술을 마시게 하지 못했다.그런데 정안이 오자마자 뜻밖에도 그녀의 술을 대신 마셔주고 있었다.모두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박수를 쳤고 정안이 술 마시는 것보다 더 재밌어했다.“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모두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전략을 바꾸어 하나둘씩 정안에게 술을 권하러 달려갔다.그리고 모두 유동진의 수법대로 자신이 먼저 한 잔 비우고는 정안에게 술을 마시라고 강요했다.정안은 거절도 모르고 술도 모르니 전부 남하준이 대신 마셨다.한편 옆에서 보고 있던 유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얼마 후 그녀가 일어서서 남하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하준아, 그만 마셔. 이건 다인 씨 술이야. 마시든 안 마시든 자기가 알아서 하라 그래. 너한테 흑기사 요청한 적 없잖아.”정안은 의자에 앉아 얼굴이 붉게 물든 남하준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이런 술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어 술자리 예절도 모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유동진이 그런 유미를 끌어내며 웃으며 말했다.“유미야, 그만해. 하준이 이 자식 처음으로 마시겠다잖아.”“그래, 유미야. 말리지 마.”남하준은 술잔을 내려놓고 미간을 찡그리고 유동진을 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제 그만해.”유동진은 활짝 웃었다.“뭘 그만해? 난 네가 아니라 다인 씨랑 마시는 거야.”유동진은 또 한 잔 따라 정안의 손에 가져다주고 몸을 숙여 다가갔다.“다인 씨 아주 대단하네요. 하준이가 자기 룰을 깨게 만든 여자라니. 내가 한 잔 더 올리죠.”유동진은 자신이 먼저 마시고 정안의 술잔을 받쳐 그녀의 입으로 가져갔다.남하준은 꾹 참고 손을 뻗어 그녀의 술을 막았다.술잔을 위로 밀어 올리자 정안의 입술이 남하준의 손등에 붙었다.순간의 짜릿함에 정안은 온몸이 팽팽해지며 수줍고 긴장된 듯 움츠러들었다.남하준은 또 한 번 그녀의 잔을 빼앗아 유동진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완이 술 못해.”“딱 한 잔만. 한 잔으로 안 취해.”유동진은 웃으며 남하준에게 다가가 어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정안이 걸으며 물었지만 남하준은 말없이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정원 오솔길을 몇 군데 가로질러 갔다.펜션의 한 저택 문 앞에 멈춰 서자 그녀의 손을 놓았다.정안이 주위를 돌아보니 환경이 아름답고 푸른 식물이 둘러싸고 있어 독특하고 그윽한 곳이었다.남하준은 말없이 벤치에 앉더니 말했다.“나랑 같이 있어 줘.”정안은 흠칫 놀라더니 긴장해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고개를 들어 정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둡고, 입가에 어쩔 수 없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몸에 손 안 대. 그냥 오늘은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정안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뜨거운 눈을 바라보며 더이상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남자를 외면하고 옆에 있는 식물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시간이 늦었어요. 다 큰 성인남녀가 같이 있는 건 올바르지 않죠.”남하준은 차갑게 웃더니 말투에는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다.“우리가 부부로 지냈을 때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너한테 강요한 적 없잖아. 근데 이제 와서 내가 너 다칠까 봐 두려워?”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긴장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몸이 굳었다.“네가 백완자든, 서다인이든 난 다 사랑했어.”남하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전에는 내가 변덕스럽고 마음이 갈대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한 사람은 오직 너였어. 네가 누구든, 어떤 이름이든 너에게만 마음이 움직였으니까.”남자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정안은 놀라서 얼어붙었고 심장이 심하게 벌렁거리고 호흡이 흐트러지며 긴장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오빠 취했어요.”정안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알코올 때문인지 귀밑에서 목까지, 뺨까지 빨개진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안 취했어.”남하준은 손을 들어 아픈 이마를 짚고 팔꿈치를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나 좋아해달라고 강요
“오빠 미안해요.”장안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죄책감에 힘들었다.남하준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고는 붉게 물든 두 눈을 감았다.“알겠어.”그는 쫓아가지 않고 벤치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가에 두 방울의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따뜻한 노란색 불빛이 자욱하고 몽롱하여 남자의 쓸쓸하고 고독한 그림자를 휩싸고 있었다.정안은 빠른 걸음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그만큼 확고했다.남하준은 이마에 손을 얹고 눈가의 눈물을 가리며 외로움과 고통을 느꼈다.10년 전, 이미 이런 고통을 한 번 맛보았지만 지금 다시 겪으니 여전히 괴로웠다.정안은 펜션을 떠나 택시를 탔고 차에서 그녀는 내내 울었다.운전사는 그녀가 실연당한 줄 알고 계속 위로했지만 정안은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는 남자에게 차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도 너무 사랑하는 남자를 거절했기 때문이다.백씨 저택에 들어왔을 때, 지윤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지윤은 눈물범벅이 된 정안이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채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언니 왜 그래요? 누가 언니 괴롭혔어요? 왜 울어요?”정안은 걸어가면서 눈물을 닦았다.“나 괜찮아.”“말해봐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누가 언니 괴롭혔죠?”지윤은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정안은 무기력하게 침대에 쓰러져 이불 속에 틀어박혀 머리를 푹 덮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윤은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레 물었다.“언니 대체 어디 갔었어요? 언니 이러면 내가 너무 걱정되잖아요?”정안은 이불을 들썩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나한테 고백했는데 내가 무정하게 거절했어.”“누가요? 남하준 씨가요?”정안은 미쳐버릴 것 같은 아픔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응. 원하는 게 많은 것도 아니었어. 정말 아주 간단했는데... 부부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심지어 친구도 아니어도 되니까 가끔
정안은 제자리에 멈추었고 백하린은 화가 치밀어 올라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며 물었다.“너 하준 오빠한테 무슨 말 했어? 대체 뭐라 말했길래 갑자기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을 바꾸냐고?”정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백하린은 살벌한 눈빛으로 또박또박 말했다.“너 맞지? 어젯밤에 하준 오빠 만나고 왔지 너? 사람이 묻잖아? 대답하라고!”“맞아.”“이 재수 없는 년이. 진짜 너였어!”백하린은 화가 치밀어 곧장 손바닥을 치켜들었다.그러나 그녀의 손바닥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달려온 지윤의 손에 쥐어졌다.백하린은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이 온몸을 관통하여 비명을 질렀다.“악!”아팠던 백하린은 지윤의 손을 세게 뿌리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잡혔던 손목을 꼭 잡고 지윤을 경계하며 노려보았다.지윤은 아무리 봐도 연약한 여자인데 왜 이렇게 아픈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어느 혈 자리를 꼬집어 온몸의 힘줄이 공격당하는 듯한 저린 통증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지윤은 정안의 앞에 서더니 오만하게 웃었다.“백하린 씨, 배운 사람답게 앞으로 손찌검은 하지 마시죠? 만약 우리 언니 얼굴에 흠집이라도 난다면 그 손목 아작 날 줄 알아요.”백하린은 이를 악물었지만 겁에 질려 뭐라 할 수 없었다.“너...”“내가 뭐?”지윤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녀를 노려봤다.“집사!”그때 집사가 급히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아가씨, 무슨 분부 있으십니까?”백하린은 정안과 지윤을 가리키며 노기등등해서 말했다.“지금 당장 이 뻔뻔스러운 두 년 쫓아내. 앞으로 우리 집엔 발도 못 들이게 하라고.”“네, 아가씨.”집사는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고 곧 여섯 명의 보안 요원이 도착했다.지윤은 정안을 보호하며 긴장해서 물었다.“이제 어떡하죠?”정안도 어쩔 수 없었다.더 이상 백씨 저택에 남아 있을 수 있는 핑계가 없었다. 이대로 쫓겨나는 거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주거침입죄로 경찰서에 끌려갈 가능성도 있었다.기세등등해진 백하린은 오만하게 큰소리로 외쳤다.“당장
“할아버지 깨셨어요?”백하린은 달려가 백진의 팔짱을 꼈다.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감격한 척 눈물을 글썽였다.“다행이에요. 드디어 깨어났으니. 너무 다행이네요...”정안과 지윤은 평온하기 그지없었고, 백진이 깊은 눈으로 정안을 다정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나 소파로 부축해다오.”백하린은 눈물을 닦고 백진을 부축해 소파로 향했다.30분 후, 백인호가 부랴부랴 돌아와 소파에 앉아 있는 몇 사람을 보자 충격과 함께 백진을 바라보는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했다.백진은 눈도 안 들고 덤덤하게 차를 마셨다.이내 여은수도 급히 뛰어 들어왔고, 백진이 깨어난 것을 보고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떨며 눈물범벅이 되어 걸어갔다.“영감. 드디어 깨어났어...”여은수는 백진의 곁으로 가서 그의 얼굴과 몸을 만지며 말했다.“진짜 괜찮은 거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 정말 회복했군요.”백진은 여은수의 손을 밀치고 불쾌감을 드러냈다.“됐어. 모두 앉게.”백인호는 심호흡하고 마음을 추스르고 다가가 앉더니 흥분한 척 입을 열었다.“아버지, 하늘이 도왔네요. 너무 잘 됐어요.”“그래.”백진은 싸늘하게 대꾸했다.백인호는 단정하게 앉아 있는 정안을 보고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지윤을 보더니 눈빛이 싸늘해졌다.모두가 자리에 앉자 백하린이 참지 못하고 정안을 가리키며 말했다.“할아버지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이 여자 정말 괘씸해요. 하준 오빠가 나랑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여자가 오빠에게 뭐라고 했는지 하준 오빠가 결혼을 번복하고 있어요.”“그리고 나랑 하준 오빠 혼사로 할머니를 협박해 우리 집에 틀어박혀 있고요. 할아버지, 제발 따끔하게 혼내주세요.”백진이 백하린을 힐끗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써 숨겨둔 혐오감이 가득했고 다시 정안을 바라볼 때 눈빛이 한껏 부드러워져 나긋나긋 말했다.“이봐요. 우리 집엔 왜 들어온 거죠?”정안은 덤덤하게 말했다.“저 하준 씨랑 이혼하고 빈털터리로 나왔어요. 그리고 전 백 선생
백하린도 따라서 일어서며 외쳤다.“나도 반대에요!”백진은 이 두 사람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백인호에게 물었다.“인호야. 이 아가씨가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정안은 천천히 백인호를 바라보았다. 촉촉하고 반짝이는 그녀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백인호의 심장을 저격했다.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백인호는 순간 마음이 녹아내렸다.그녀가 진심이 아니란 것도 알고, 뭔가 음모가 숨겨져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여기서 지내게 하죠.”정안은 생글생글 웃으며 백인호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했고 백진도 즉시 입을 열었다.“그럼 앞으로 이 두 숙녀분은 우리 집의 귀한 손님이니 아무도 함부로 쫓아낼 수 없다.”“할아버지!”“이 미친 영감탱이가!”그때 백하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고 그녀는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화면을 켰다.메시지를 본 후, 그녀는 백인호를 바라보며 눈으로 왜 메시지를 보내냐고 물었다.백인호는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휙 던지고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가 보낸 메시지를 열심히 읽은 백하린은 순간 얼굴빛이 어두워졌다.[남하준에게 접근하는 임무는 일단 제쳐두고, 백가의 재산을 상속받는 건 꿈도 꾸지 마. 늙은이 상태를 보니까 아직 죽기는 멀었어. 조직에서 보내온 소식에 의하면 정안이 아직 살아있어. 지금 중요한 임무는 정안을 찾고 나머지 48g 경분자를 얻는 거야.]백하린은 메시지를 삭제하고 불쾌하게 말했다. “좋아요. 굳이 여기서 지내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죠. 미리 말해두지만 절대 나 건드리지 마. 험한 꼴 보기 싫으면.”말을 마친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고 위층으로 돌아갔고 백인호도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휴대전화를 들고 서재로 돌아갔다.여은수는 한마디 말도 없이 어두운 얼굴로 정안을 불쾌한 듯이 노려보았다.정안과 지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고 드디어 한숨 돌렸다.일주일 뒤.“언니, 큰일 났어요!”지윤이 불안하게 고함을 지르며 정안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
M국 국경으로 가는 비행기는 결항됐고 기차와 고속철도도 전부 중단됐다.도저히 방법이 없어 그녀들은 차를 한 대 빌려서 출발했고 두 사람은 번갈아 운전했다.정안은 끊임없이 남하준에게 연락했지만 여전히 부재중이었다.이튿날 아침, 밤새 운전한 그녀들의 차량은 M국 국경에 도착했지만 검문소를 지키는 병사에 의해 저지당했다.마치 지구 종말이 다가오는 듯한 비극적인 장면이었다.구급차들이 끊임없이 밖으로 나갔고 대형 구조 트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안으로 들어갔다.하늘은 뿌옇고 짙은 보라색이었고, 공기 질은 매우 나빴고, 모두가 방진 마스크를 착용했다.“죄송하지만 지금 이 구역은 재난지역이라 구조대원만 출입할 수 있고 민간인은 출입금지입니다.”정안이 불안해하며 물었다.“폭발이 일어난 정확한 위치가 어디죠? 몇 명이 죽었어요? 군전 그룹은 괜찮나요? 남하준 장군은 어디 있어요? 그 사람 괜찮아요?”“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죠.”정안은 보라색 하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군전 그룹의 방향을 바라보았다.지윤은 정안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이 위로했다.“언니, 하준 씨 괜찮을 거예요. 일단 인근 호텔부터 잡아요 우리.”정안은 하늘의 보라색 스모그를 가리켰다.“방사능은 없지만 오염이 매우 강해서 이곳의 모든 수원을 마실 수 없어. 그리고 가스를 흡입한 사람들, 부상당한 사람들, 모두 내 도움이 필요해.”정안은 다시 몸을 돌려 병사에게 말했다.“나 화학자예요. 들어가게 해주시면 안 돼요? 이번 폭발의 위험과 수습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당신들은 제가 필요해요.”병사는 손을 내밀었다.“증명서는요?”정안이 심호흡을 하고 상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지윤은 정안을 끌고 차에 올라탔고 정안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녀는 기분이 가라앉고 불안했다.“언니, 혹시 그것 때문일까요?”지윤이 긴장해서 묻자 정안이 중얼거렸다.“하준 씨 손에 2g 있어.”“전에 아주 안정적이라면서요? 근데 왜 폭발해요?”
이 순간 남하준은 그녀의 눈에 비친 걱정과 슬픔을 보았다.그녀의 걱정과 슬픔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다른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그녀는 왜 여기에 나타났을까?남하준이 문을 열고 내려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정안은 부랴부랴 주머니에서 새 방진 마스크를 꺼내어 허둥지둥 봉투를 찢었다.그가 다가오자 정안은 두말없이 그에게 마스크를 끼웠다.그녀의 손끝이 남하준의 귀를 돌아 그의 피부에 닿는 순간, 그는 몸이 굳어졌고, 방금 하려던 말이 목구멍에 걸렸고, 뜨거운 눈동자는 깊은 사색과 근심으로 가득 차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오빠 보라색 먼지에는 독소가 있으니 마스크 착용해야 해요.”“돌아가.”남하준은 그녀에게 왜 여기 왔는지 묻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그녀가 걱정되었다.정안이 긴장하며 말했다.“나도 같이 들어가게 해 줘요. 내가 도울 수 있어요.”남하준의 태도는 확고했고 말투는 엄숙하지만 가벼웠다.“지금 일손이 부족해서 너 데려다줄 사람이 없어. 어떻게 여기 왔으면 다시 그렇게 돌아가. 지금 당장 여기 떠나라고.”“오빠, 내가 돕게 해줘요.”남하준은 쓸쓸해 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전에 나한테 한 말 잊었어?”정안은 침묵했고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부부도, 친구도 안 되고 서로 만나지도 왕래하지도 않고 연락 끊고 살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여기 나타나. 네가 뭘 도울 수 있는데?”정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구조대 자원봉사자요. 재난당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남하준은 그녀의 말에 또 한 번 상처받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녀에게 모질게 말하기 아까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너 필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돌아가.”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가려 했고 정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외쳤다.“하준 오빠!”남하준은 그녀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추었다.“폭발한 지 이미 10시간이 지났어요. 공기 중에 보라색 스모그도 떠다니고 있어요.아무리 전문적인 화학자 팀이 있다고 해도 이런 문제는 처음이라 아직 해결 방법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