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술을 권했지만 아무도 남하준이 술을 마시게 하지 못했다.그런데 정안이 오자마자 뜻밖에도 그녀의 술을 대신 마셔주고 있었다.모두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박수를 쳤고 정안이 술 마시는 것보다 더 재밌어했다.“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모두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전략을 바꾸어 하나둘씩 정안에게 술을 권하러 달려갔다.그리고 모두 유동진의 수법대로 자신이 먼저 한 잔 비우고는 정안에게 술을 마시라고 강요했다.정안은 거절도 모르고 술도 모르니 전부 남하준이 대신 마셨다.한편 옆에서 보고 있던 유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얼마 후 그녀가 일어서서 남하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하준아, 그만 마셔. 이건 다인 씨 술이야. 마시든 안 마시든 자기가 알아서 하라 그래. 너한테 흑기사 요청한 적 없잖아.”정안은 의자에 앉아 얼굴이 붉게 물든 남하준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이런 술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어 술자리 예절도 모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유동진이 그런 유미를 끌어내며 웃으며 말했다.“유미야, 그만해. 하준이 이 자식 처음으로 마시겠다잖아.”“그래, 유미야. 말리지 마.”남하준은 술잔을 내려놓고 미간을 찡그리고 유동진을 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제 그만해.”유동진은 활짝 웃었다.“뭘 그만해? 난 네가 아니라 다인 씨랑 마시는 거야.”유동진은 또 한 잔 따라 정안의 손에 가져다주고 몸을 숙여 다가갔다.“다인 씨 아주 대단하네요. 하준이가 자기 룰을 깨게 만든 여자라니. 내가 한 잔 더 올리죠.”유동진은 자신이 먼저 마시고 정안의 술잔을 받쳐 그녀의 입으로 가져갔다.남하준은 꾹 참고 손을 뻗어 그녀의 술을 막았다.술잔을 위로 밀어 올리자 정안의 입술이 남하준의 손등에 붙었다.순간의 짜릿함에 정안은 온몸이 팽팽해지며 수줍고 긴장된 듯 움츠러들었다.남하준은 또 한 번 그녀의 잔을 빼앗아 유동진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완이 술 못해.”“딱 한 잔만. 한 잔으로 안 취해.”유동진은 웃으며 남하준에게 다가가 어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정안이 걸으며 물었지만 남하준은 말없이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정원 오솔길을 몇 군데 가로질러 갔다.펜션의 한 저택 문 앞에 멈춰 서자 그녀의 손을 놓았다.정안이 주위를 돌아보니 환경이 아름답고 푸른 식물이 둘러싸고 있어 독특하고 그윽한 곳이었다.남하준은 말없이 벤치에 앉더니 말했다.“나랑 같이 있어 줘.”정안은 흠칫 놀라더니 긴장해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고개를 들어 정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둡고, 입가에 어쩔 수 없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몸에 손 안 대. 그냥 오늘은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정안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뜨거운 눈을 바라보며 더이상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남자를 외면하고 옆에 있는 식물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시간이 늦었어요. 다 큰 성인남녀가 같이 있는 건 올바르지 않죠.”남하준은 차갑게 웃더니 말투에는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다.“우리가 부부로 지냈을 때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너한테 강요한 적 없잖아. 근데 이제 와서 내가 너 다칠까 봐 두려워?”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긴장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몸이 굳었다.“네가 백완자든, 서다인이든 난 다 사랑했어.”남하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전에는 내가 변덕스럽고 마음이 갈대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한 사람은 오직 너였어. 네가 누구든, 어떤 이름이든 너에게만 마음이 움직였으니까.”남자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정안은 놀라서 얼어붙었고 심장이 심하게 벌렁거리고 호흡이 흐트러지며 긴장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오빠 취했어요.”정안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알코올 때문인지 귀밑에서 목까지, 뺨까지 빨개진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안 취했어.”남하준은 손을 들어 아픈 이마를 짚고 팔꿈치를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나 좋아해달라고 강요
“오빠 미안해요.”장안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죄책감에 힘들었다.남하준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고는 붉게 물든 두 눈을 감았다.“알겠어.”그는 쫓아가지 않고 벤치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가에 두 방울의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따뜻한 노란색 불빛이 자욱하고 몽롱하여 남자의 쓸쓸하고 고독한 그림자를 휩싸고 있었다.정안은 빠른 걸음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그만큼 확고했다.남하준은 이마에 손을 얹고 눈가의 눈물을 가리며 외로움과 고통을 느꼈다.10년 전, 이미 이런 고통을 한 번 맛보았지만 지금 다시 겪으니 여전히 괴로웠다.정안은 펜션을 떠나 택시를 탔고 차에서 그녀는 내내 울었다.운전사는 그녀가 실연당한 줄 알고 계속 위로했지만 정안은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는 남자에게 차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도 너무 사랑하는 남자를 거절했기 때문이다.백씨 저택에 들어왔을 때, 지윤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지윤은 눈물범벅이 된 정안이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채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언니 왜 그래요? 누가 언니 괴롭혔어요? 왜 울어요?”정안은 걸어가면서 눈물을 닦았다.“나 괜찮아.”“말해봐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누가 언니 괴롭혔죠?”지윤은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정안은 무기력하게 침대에 쓰러져 이불 속에 틀어박혀 머리를 푹 덮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윤은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레 물었다.“언니 대체 어디 갔었어요? 언니 이러면 내가 너무 걱정되잖아요?”정안은 이불을 들썩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나한테 고백했는데 내가 무정하게 거절했어.”“누가요? 남하준 씨가요?”정안은 미쳐버릴 것 같은 아픔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응. 원하는 게 많은 것도 아니었어. 정말 아주 간단했는데... 부부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심지어 친구도 아니어도 되니까 가끔
정안은 제자리에 멈추었고 백하린은 화가 치밀어 올라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며 물었다.“너 하준 오빠한테 무슨 말 했어? 대체 뭐라 말했길래 갑자기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을 바꾸냐고?”정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백하린은 살벌한 눈빛으로 또박또박 말했다.“너 맞지? 어젯밤에 하준 오빠 만나고 왔지 너? 사람이 묻잖아? 대답하라고!”“맞아.”“이 재수 없는 년이. 진짜 너였어!”백하린은 화가 치밀어 곧장 손바닥을 치켜들었다.그러나 그녀의 손바닥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달려온 지윤의 손에 쥐어졌다.백하린은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이 온몸을 관통하여 비명을 질렀다.“악!”아팠던 백하린은 지윤의 손을 세게 뿌리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잡혔던 손목을 꼭 잡고 지윤을 경계하며 노려보았다.지윤은 아무리 봐도 연약한 여자인데 왜 이렇게 아픈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어느 혈 자리를 꼬집어 온몸의 힘줄이 공격당하는 듯한 저린 통증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지윤은 정안의 앞에 서더니 오만하게 웃었다.“백하린 씨, 배운 사람답게 앞으로 손찌검은 하지 마시죠? 만약 우리 언니 얼굴에 흠집이라도 난다면 그 손목 아작 날 줄 알아요.”백하린은 이를 악물었지만 겁에 질려 뭐라 할 수 없었다.“너...”“내가 뭐?”지윤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녀를 노려봤다.“집사!”그때 집사가 급히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아가씨, 무슨 분부 있으십니까?”백하린은 정안과 지윤을 가리키며 노기등등해서 말했다.“지금 당장 이 뻔뻔스러운 두 년 쫓아내. 앞으로 우리 집엔 발도 못 들이게 하라고.”“네, 아가씨.”집사는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고 곧 여섯 명의 보안 요원이 도착했다.지윤은 정안을 보호하며 긴장해서 물었다.“이제 어떡하죠?”정안도 어쩔 수 없었다.더 이상 백씨 저택에 남아 있을 수 있는 핑계가 없었다. 이대로 쫓겨나는 거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주거침입죄로 경찰서에 끌려갈 가능성도 있었다.기세등등해진 백하린은 오만하게 큰소리로 외쳤다.“당장
“할아버지 깨셨어요?”백하린은 달려가 백진의 팔짱을 꼈다.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감격한 척 눈물을 글썽였다.“다행이에요. 드디어 깨어났으니. 너무 다행이네요...”정안과 지윤은 평온하기 그지없었고, 백진이 깊은 눈으로 정안을 다정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나 소파로 부축해다오.”백하린은 눈물을 닦고 백진을 부축해 소파로 향했다.30분 후, 백인호가 부랴부랴 돌아와 소파에 앉아 있는 몇 사람을 보자 충격과 함께 백진을 바라보는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했다.백진은 눈도 안 들고 덤덤하게 차를 마셨다.이내 여은수도 급히 뛰어 들어왔고, 백진이 깨어난 것을 보고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떨며 눈물범벅이 되어 걸어갔다.“영감. 드디어 깨어났어...”여은수는 백진의 곁으로 가서 그의 얼굴과 몸을 만지며 말했다.“진짜 괜찮은 거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 정말 회복했군요.”백진은 여은수의 손을 밀치고 불쾌감을 드러냈다.“됐어. 모두 앉게.”백인호는 심호흡하고 마음을 추스르고 다가가 앉더니 흥분한 척 입을 열었다.“아버지, 하늘이 도왔네요. 너무 잘 됐어요.”“그래.”백진은 싸늘하게 대꾸했다.백인호는 단정하게 앉아 있는 정안을 보고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지윤을 보더니 눈빛이 싸늘해졌다.모두가 자리에 앉자 백하린이 참지 못하고 정안을 가리키며 말했다.“할아버지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이 여자 정말 괘씸해요. 하준 오빠가 나랑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여자가 오빠에게 뭐라고 했는지 하준 오빠가 결혼을 번복하고 있어요.”“그리고 나랑 하준 오빠 혼사로 할머니를 협박해 우리 집에 틀어박혀 있고요. 할아버지, 제발 따끔하게 혼내주세요.”백진이 백하린을 힐끗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써 숨겨둔 혐오감이 가득했고 다시 정안을 바라볼 때 눈빛이 한껏 부드러워져 나긋나긋 말했다.“이봐요. 우리 집엔 왜 들어온 거죠?”정안은 덤덤하게 말했다.“저 하준 씨랑 이혼하고 빈털터리로 나왔어요. 그리고 전 백 선생
백하린도 따라서 일어서며 외쳤다.“나도 반대에요!”백진은 이 두 사람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백인호에게 물었다.“인호야. 이 아가씨가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정안은 천천히 백인호를 바라보았다. 촉촉하고 반짝이는 그녀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백인호의 심장을 저격했다.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백인호는 순간 마음이 녹아내렸다.그녀가 진심이 아니란 것도 알고, 뭔가 음모가 숨겨져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여기서 지내게 하죠.”정안은 생글생글 웃으며 백인호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했고 백진도 즉시 입을 열었다.“그럼 앞으로 이 두 숙녀분은 우리 집의 귀한 손님이니 아무도 함부로 쫓아낼 수 없다.”“할아버지!”“이 미친 영감탱이가!”그때 백하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고 그녀는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화면을 켰다.메시지를 본 후, 그녀는 백인호를 바라보며 눈으로 왜 메시지를 보내냐고 물었다.백인호는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휙 던지고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가 보낸 메시지를 열심히 읽은 백하린은 순간 얼굴빛이 어두워졌다.[남하준에게 접근하는 임무는 일단 제쳐두고, 백가의 재산을 상속받는 건 꿈도 꾸지 마. 늙은이 상태를 보니까 아직 죽기는 멀었어. 조직에서 보내온 소식에 의하면 정안이 아직 살아있어. 지금 중요한 임무는 정안을 찾고 나머지 48g 경분자를 얻는 거야.]백하린은 메시지를 삭제하고 불쾌하게 말했다. “좋아요. 굳이 여기서 지내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죠. 미리 말해두지만 절대 나 건드리지 마. 험한 꼴 보기 싫으면.”말을 마친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고 위층으로 돌아갔고 백인호도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휴대전화를 들고 서재로 돌아갔다.여은수는 한마디 말도 없이 어두운 얼굴로 정안을 불쾌한 듯이 노려보았다.정안과 지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고 드디어 한숨 돌렸다.일주일 뒤.“언니, 큰일 났어요!”지윤이 불안하게 고함을 지르며 정안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
M국 국경으로 가는 비행기는 결항됐고 기차와 고속철도도 전부 중단됐다.도저히 방법이 없어 그녀들은 차를 한 대 빌려서 출발했고 두 사람은 번갈아 운전했다.정안은 끊임없이 남하준에게 연락했지만 여전히 부재중이었다.이튿날 아침, 밤새 운전한 그녀들의 차량은 M국 국경에 도착했지만 검문소를 지키는 병사에 의해 저지당했다.마치 지구 종말이 다가오는 듯한 비극적인 장면이었다.구급차들이 끊임없이 밖으로 나갔고 대형 구조 트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안으로 들어갔다.하늘은 뿌옇고 짙은 보라색이었고, 공기 질은 매우 나빴고, 모두가 방진 마스크를 착용했다.“죄송하지만 지금 이 구역은 재난지역이라 구조대원만 출입할 수 있고 민간인은 출입금지입니다.”정안이 불안해하며 물었다.“폭발이 일어난 정확한 위치가 어디죠? 몇 명이 죽었어요? 군전 그룹은 괜찮나요? 남하준 장군은 어디 있어요? 그 사람 괜찮아요?”“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죠.”정안은 보라색 하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군전 그룹의 방향을 바라보았다.지윤은 정안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이 위로했다.“언니, 하준 씨 괜찮을 거예요. 일단 인근 호텔부터 잡아요 우리.”정안은 하늘의 보라색 스모그를 가리켰다.“방사능은 없지만 오염이 매우 강해서 이곳의 모든 수원을 마실 수 없어. 그리고 가스를 흡입한 사람들, 부상당한 사람들, 모두 내 도움이 필요해.”정안은 다시 몸을 돌려 병사에게 말했다.“나 화학자예요. 들어가게 해주시면 안 돼요? 이번 폭발의 위험과 수습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당신들은 제가 필요해요.”병사는 손을 내밀었다.“증명서는요?”정안이 심호흡을 하고 상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지윤은 정안을 끌고 차에 올라탔고 정안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녀는 기분이 가라앉고 불안했다.“언니, 혹시 그것 때문일까요?”지윤이 긴장해서 묻자 정안이 중얼거렸다.“하준 씨 손에 2g 있어.”“전에 아주 안정적이라면서요? 근데 왜 폭발해요?”
이 순간 남하준은 그녀의 눈에 비친 걱정과 슬픔을 보았다.그녀의 걱정과 슬픔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다른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그녀는 왜 여기에 나타났을까?남하준이 문을 열고 내려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정안은 부랴부랴 주머니에서 새 방진 마스크를 꺼내어 허둥지둥 봉투를 찢었다.그가 다가오자 정안은 두말없이 그에게 마스크를 끼웠다.그녀의 손끝이 남하준의 귀를 돌아 그의 피부에 닿는 순간, 그는 몸이 굳어졌고, 방금 하려던 말이 목구멍에 걸렸고, 뜨거운 눈동자는 깊은 사색과 근심으로 가득 차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오빠 보라색 먼지에는 독소가 있으니 마스크 착용해야 해요.”“돌아가.”남하준은 그녀에게 왜 여기 왔는지 묻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그녀가 걱정되었다.정안이 긴장하며 말했다.“나도 같이 들어가게 해 줘요. 내가 도울 수 있어요.”남하준의 태도는 확고했고 말투는 엄숙하지만 가벼웠다.“지금 일손이 부족해서 너 데려다줄 사람이 없어. 어떻게 여기 왔으면 다시 그렇게 돌아가. 지금 당장 여기 떠나라고.”“오빠, 내가 돕게 해줘요.”남하준은 쓸쓸해 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전에 나한테 한 말 잊었어?”정안은 침묵했고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부부도, 친구도 안 되고 서로 만나지도 왕래하지도 않고 연락 끊고 살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여기 나타나. 네가 뭘 도울 수 있는데?”정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구조대 자원봉사자요. 재난당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남하준은 그녀의 말에 또 한 번 상처받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녀에게 모질게 말하기 아까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너 필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돌아가.”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가려 했고 정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외쳤다.“하준 오빠!”남하준은 그녀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추었다.“폭발한 지 이미 10시간이 지났어요. 공기 중에 보라색 스모그도 떠다니고 있어요.아무리 전문적인 화학자 팀이 있다고 해도 이런 문제는 처음이라 아직 해결 방법
사람은 기쁜 일이 생기면 기분이 상쾌한 법이다. 하루 종일 바빠도 지우와의 관계를 회복한 생각만 하면 속으로 은근히 기뻐 났다.남태준이 막 차 옆으로 다가갔을 때 임다희가 차 뒤에서 걸어왔다.“태준아.”남태준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려 여유롭게 물었다.“임다희? 무슨 일이야?”“할 얘기가 있어. 아주 중요한 얘기야.”임다희는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타.”남태준이 쿨하게 대답하자 임다희는 그의 차에 올라탔고 남태준이 시동을 걸고 떠났다.차 안에서 남태준이 물었다.“어디서 얘기할래?”“너희 집.”남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그건 안돼.”“아주 중요한 일이야. 반드시 사람 없는 곳에서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임다희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빛을 내뿜으며 엄숙하게 말했다.“마약 거래에 관한 얘기야.”“그럼 지금 얘기해.”남태준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차 안에는 우리 둘만 있으니까 안전해.”임다희가 앞뒤를 돌아보니 이 길은 행인도 없고 오가는 차량도 뜸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남태준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지 않으려 하자 마지못해 핸드백을 열어 그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이 시간에 거래가 있을 거야.”그의 다년간 사건 처리 경험으로 볼 때, 이렇게 명확한 거래 장소와 시간은 임다희가 절대 알 수 없었다.이 정보가 가짜이거나, 누군가가 그녀에게 준 것이 틀림 없었다.“어디서 났어?”남태준이 묻자 임다희는 조금 켕긴 듯 대답했다.“건달인 친구가 알아낸 정보인데 내가 샀어.”남태준은 입꼬리를 꼬며 그녀의 거짓말이 좀 억지스러워서 계속 물었다. “네가 마약 형사도 아니고 이 정보를 왜 사는데?”“너 주려고.”남태준은 움찔하더니 침묵했다.임다희는 애정 어린 눈으로 남태준을 지그시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태준아, 우리 다시 만나자.”남태준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뭐라고?”임다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울먹였다.“전에는 내가 미안했어. 네
지하 카지노 사무실.육건우는 자료를 책상에 던지고는 화가 나서 일어나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임다희를 노려봤다.“너 혹시 남태준 스파이야?”임다희가 미소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그럴 리가 있나요? 우리는 같은 배에 탄 사람이잖아요. 내가 남태준을 도와서 얻을 수 있는 게 뭔데요? 난 단지 애매한 단서만 줬지 실질적인 증거를 준 적은 없어요.”“요즘 사복 경찰이 계속 우리 촬영장 밖을 배회하고 가끔 항공사진 드론이 공중을 선회하고 또...”육건우는 책상으로 가서 서류뭉치를 집어던졌다.“이건 전부 최근 경찰들에게 적발된 물건이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젠장!”임다희는 긴장해서 침을 삼키고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육건우는 분노하여 임다희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네 신분을 잊지 마. 내가 너를 도와 남태준과 그 여자를 갈라놓겠다고 약속했고 그 동생까지 함정에 빠뜨렸어. 그런데 그 여자가 지금 나를 고소했다고. 젠장.”임다희는 웃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어떻게 사장님의 큰 은혜를 잊겠어요? 다만... 저는 다시 전 남자친구와 재결합하고 싶어요. 그런데 하필 태준이가 마약 경찰이잖아요. 그래서 저... 이 일에서 손 떼고 싶은데 보스에게 사정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육건우는 어이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임다희가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그해 남태준과 요트에서 탈출한 뒤 남태준은 그녀 때문에 다시 잡혀가 바다에 빠져 하마터면 숨질 뻔했지만 그녀는 사실 안전하게 귀국할 방법이 없었다.배후의 빅보스가 바로 그녀를 죽이려고 했지만 육건우가 빅보스에게 사정을 해서 그녀에게 살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그녀의 연예인 신분을 이용하여 마약을 갖고 귀국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그녀는 마지못해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십여 킬로그램의 마약을 촬영장 카메라 기둥에 숨긴 후 요트를 타고 귀국했다.그 이후로 그녀는 마약밀매 조직의 일원이 되었고 매번 물건을 가져오거나 몸을 헌신해야 했다.임
꽃가게 앞을 지날 때 남태준이 걸음을 멈추었다.“지우야. 나...”남태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우는 재빨리 그를 끌고 나가 그의 팔을 껴안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부질 없는 곳에 돈 낭비하지 말아요.”“여자들은 다 꽃을 좋아하지 않아?”지우에 의해 팔이 단단히 조여진 남태준은 아주 편안했고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안 좋아해요. 굳이 사주고 싶다면 차라리 다육식물을 줘요. 기르기도 쉽고 번식도 할 수 있잖아요.”“가방의 품질, 브랜드, 가격 중 어떤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가격이죠.”남태준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소비 관념과 가치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또 물었다.“다이아몬드와 금 중에 뭐가 좋아?”“금이요.”지우가 고민도 없이 대답하자 남태준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좋아. 알겠어.”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을 때 흥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우야!”지우가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더니 그녀를 부른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바로 그녀에게 맞선 상대를 소개해 준 중매인이었다.그녀는 빠르게 남태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놀라움과 설렘이 가득해 말했다.“어쩐지 내가 그렇게 좋은 남자들을 소개해줘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니. 알고 보니 눈이 이렇게 높았었네? 남편 어디 사람이야? 누가 소개해줬어?”지우는 어색하고 난처해하며 웃어 보였다.“친구가 소개해줬어요.”말하자면 백완자가 그들을 소개해 준 셈이었다.“외모도 빼어나고 큰 기에 몸매도 좋네. 어디 사람이야? 무슨 일 해?”역시 가십에 관심이 많은 중매인이었다.남태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지 않았지만 지우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안성 사람이에요. 아주머니, 제가 얼른 가서 밥해야 해서요. 다음에 얘기 나눠요.”“안성 좋지! 큰 도시 사람이네!”지우는 남태준의 손을 잡고 서둘러 떠났다.그녀는 매우 급하게 걸었지만 남태준의 얼굴에는
지우는 긴장되어 귀가 빨개졌다.“싫어?”남태준은 그녀의 진심을 떠보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와 재결합하고 싶은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의 허벅지에 몸을 기울여 앉았는데 긴장해서 등이 약간 뻣뻣했다.남태준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덥석 끌어안고 뒤로 기댔다.지우는 그의 튼실한 가슴에 완전히 엎드렸고 몸이 나른해졌다. 수줍고 난처해 감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그의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아주 편안하고 심장이 왠지 모르게 떨리면서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만약 네가 불편하거나 거부감이 든다면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남태준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갖고 싶었지만 그녀가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지우는 조바심이 났다.그녀는 남태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그의 깊고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불편하지 않아요. 거부감도 들지 않고요.”“그러니까 너 지금...”남태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우가 갑자기 입을 맞추었다.그러자 남자는 움찔했다.지우는 눈을 감고 두 손을 천천히 남자의 어깨에서 뒤로 걸어 목을 감은 뒤 수줍고 서툴게 그의 따뜻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녀는 심장이 천둥처럼 뛰었다.남태준은 몇 초 동안 멍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마음은 더없이 흥분되었다.그는 지우의 뒤통수를 낚아채 옅은 키스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의 입술과 혀는 그녀의 어금니를 비틀어 열고 곧장 달려들어 여자의 혀와 한데 엉켰다.“음!”지우는 그의 공세에 못 이겨 수줍은 소리를 냈다.그동안의 갈망과 그리움을 남태준은 한숨에 모두 보상받고 싶은 심정이었다.지우를 꽉 껴안고 격렬하고 난폭한 키스를 계속 퍼부었다.긴 키스가 이어지고 지우는 입술이 다 아프고 호흡이 가쁜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남자의 가슴을 밀면서 고개를 뒤로 뺐다.남태준은 아쉬운 듯이 그녀를 놓아주었다.두 사람은 눈을 감고 서로 이마를 맞댔고 거친 호흡을 나누며 뜨거운 기운이 감돌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