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가 비꼬았다.“하준이 일편단심 코스프레 하더니 결혼은 이렇게 쉽게 할 줄 몰랐네.”유동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유미야, 너 오늘 왜 이래? 말에 가시가 있어.”서다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불편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말했다.“죄송하지만 전 일이 있어서 먼저 방에 갈게요. 두 분 편히 있으세요.”“그래요, 우리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자주 와서 이 집에 익숙해요.”유동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목시계를 봤다.“하준이도 곧 집에 도착하겠네요.”이 말을 마치자마자 문밖에서 주차하는 소리가 들렸고 유동진이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하준이 왔나 보네요.”유미는 부랴부랴 일어나 문 쪽으로 성급히 걸어갔고 서다인은 멀뚱멀뚱 제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웠다.남하준이 들어왔을 때 온화한 웃음기를 머금은 유미가 보였다.“하준아, 오랜만.”유미가 손을 내밀었고 남하준도 손을 내밀어 인사했다.“오랜만이네.”“하준아.”유동진이 다가가 두 손을 벌리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자 남하준은 유미의 손을 떼고 걸어가서 유동진과 격한 포옹을 나누었다.“반년 못 본 사이에 허약해졌어.”남하준은 주먹으로 유동진의 가슴을 몇 대 때리며 기분 나쁘게 인상을 찌푸렸다.“대체 얼마나 운동을 안 한 거야?”유동진은 그를 껴안고 거실로 걸어가며 말했다.“지금 내 몸이 중요해?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반년 동안 나 몰래 결혼을 해?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할 수 있어.”남하준이 고개를 들어보니 서다인이 거실에 서서 약간 굳은 표정으로 별로 기쁘지 않은 모습이었다.그는 유동진과의 어깨동무를 풀고 서다인 앞에 다가가 눈빛은 뜨겁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완아, 내 친구들 소개해 줄게.”“이미 자기 소개했어요.”이때 유미가 다가와 느릿느릿 말했다.“하준아, 난 네가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을 싫어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뜻밖에 너도 이런 속물이 될 줄 몰랐어. 자기 아내를 손에 물도 안 묻히는 사모님으로 만들다니.
서다인은 긴장해서 물었다.“그럼 제가 잠깐 자리를 비울까요?”유미는 서다인을 힐끗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다인 씨는 정말 시사나 국사에 전혀 관심이 없나 봐요? 평소 예능이나 드라마만 보죠?”서다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심호흡했다.그녀는 이 주제들이 기밀일까 봐 자리를 뜨려 했던 것인데 어떻게 유미는 그녀를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여성으로 여길까?남하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유미를 차갑게 보았다.“너 왜 그래? 말 제대로 못 해?”유동진이 긴장해서 침을 삼키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하준아, 다인 씨, 화내지 마세요. 유미... 실연당했어요.”남하준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유미 연애했어?”유미는 불쾌한 듯 눈을 돌려 창밖의 경치를 보고 숨을 크게 내쉬며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유동진이 웃으며 말했다.“맞아, 또 실연당했어.”유미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불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녁은 너희 집에서 먹을 거야.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가서 준비할게.”남하준은 그녀의 이런 스타일에 익숙해졌다. 매번 그의 집에 올 때마다 그녀는 직접요리를 하곤 했다.유동진이 말했다.“오랜만에 제대로 된 안성 소고기 전골 먹고 싶어.”남하준은 아무거나 라고 대답했다.유미는 서다인을 바라보며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엄격한 눈빛을 보냈고 서다인은 어리둥절해서 ‘저도 아무거나 괜찮아요.’라고 답했다.그녀의 모습에 유미는 코웃음을 치더니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심호흡을 했다.“서다인 씨, 이건 당신네 집이에요. 손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건 주인이 해야 할 일인데 지금 나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내가 요리 해주기를 바라는 거예요?”유미의 강력한 태도는 마치 트집 잡기 좋아하는 무서운 시누이 같아 서다인은 숨 막혔다. 그녀의 시부모님도 이렇게 무서운 적이 없었다.서다인은 쭈뼛쭈뼛 대답했다.“난 밥 할 줄 몰라요.”“그럼 음식 씻고 써는 건 하겠죠?”“씻는 건 되는데 써는 건 좀...”남하준이 서다인의 손을 잡고 일어나 유미를 향해 불쾌
남하준과 유미가 주방에서 밥을 하는 사이 서다인은 인터넷에 접속해 방금 그들이 언급한 ‘슈퍼 전투기'를 검색해 보니 이건 기밀 사항이 아니었다.제작비가 어마어마한 이 전투기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공중전 무기로 성능과 전투력이 최고 수준이었다.M국은 아직 이렇게 선진화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인재가 없어 외국에서 비싸게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한편 유동진은 다리를 꼬고 차를 마시며 할 일이 없어 한가롭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서다인은 휴대전화를 내려놓더니 유동진을 보며 말했다.“동진 오빠, 슈퍼 전투기가 그렇게 비싼데 왜 우린 직접 만들지 않아요?”유동진은 그녀의 오빠라는 호칭에 멍해져서 몇 초 동안 가만히 있다가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그게 어디 쉬워요? 우리가 부족한 건 돈이 아니라 기술이고 인재죠.”서다인은 정색하며 말했다.“한 대를 사서 분해하고 연구하다 보면 똑같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유동진은 그녀가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 웃다가 실례인 것 같아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서다인은 입술을 오므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유동진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안 되는 것보단 우리나라에 마땅한 인재가 없는 거예요.”“강대국들보다 우린 기술적으로 많이 뒤처졌거든요. 양성된 인재들을 유학 보냈고, 그들이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조국에 보답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강대국의 각종 우월한 조건에 매수되어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까요.”“유학에서 돌아온 엘리트들도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욕심내지 않은 걸 보면 별로 뛰어난 인재가 아닌가 보죠.”서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음, 알겠어요.”“다인 씨는 취미가 뭐예요?”유동진이 화제를 돌려 묻자 서다인은 책장을 가리켰다.“독서요. 그림 그리고 피아노도 좀 칠 줄 알아요.”유동진은 간단하게 대답하더니 눈빛이 맑아졌다. 서다인이 왜 집안일도 안 하고 직장도 안 다니는지 깨달았다.알고 보니 부잣집 귀한 아가씨라 고생
남하준은 주먹을 천천히 쥐며 꾹 참고 말을 하지 않았다.유미가 말을 이었다.“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잖아. 사업상 널 도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너랑 도우미가 보살펴야 하고, 이건 다 큰 아기나 다름없어! 둘이 지내는 거 보니까 너만 애정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네 아내는 받아주지도 않잖아. 그렇게 여자 외모에 약해? 외모에 혹해서 집에 모셔놓고 사냐고!”유동진은 얼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충격적인 얼굴로 유미를 쳐다봤다. 그의 이란성쌍둥이 여동생이 오늘 대체 왜 이럴까? 왜 남하준이란 총구 앞에서 죽음을 자초할까?남하준은 냅킨을 들고 입을 닦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눈 밑에는 한기가 가득했다.유동진과는 생사를 함께한 전우이고, 유미와는 못할 말이 없는 친구로서 늘 사이가 좋았다.그는 냅킨을 홱 던지더니 차갑게 말했다.“내가 왜 결혼했는지 궁금해?”유동진과 유미는 진지하게 남하준을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좋아하니까.”남하준은 화가 난 듯 말투가 약간 거칠었다.“생리적인 애착이지.”생리적인 애착이란 건 무엇일까?유미는 막연한 표정으로 유동진에게 의문의 눈길을 보내자 그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나한텐 공기 같은 존재야.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공기를 잃으면 질식하기 때문에 다인이 없이 살 수 없어.”남하준은 설명을 마치고 식탁을 나와 입구로 향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왜 백하린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면서도 악명 높은 여자에게 끌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할머니가 서다인과 결혼하라고 강요했을 때 그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타협했다.만나자마자 그녀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몸이 닿아도 싫증이 나지 않고, 오히려 쉽게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점점 더 그녀와의 스킨십을 좋아하게 됐다.남하준은 그녀가 한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소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문득 깨달았다.가장 좋아하는 여자와 10년 동안 만나지
“멀쩡하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사라져?”유동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나가서 더 찾아봐. 아무런 도움도 못 주면서 하준에게 폐만 끼치네.”유미는 귀찮은 듯 몸을 돌리더니 중얼거렸다.금원은 별로 크지 않았다. 십여 명이 정원 밖에서 서다인을 찾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남하준은 미칠 것 같았다....별이 총총한 밤하늘, 달이 높이 걸려 있고 달빛은 밝고 투명했다.텅 빈 공원의 오솔길에서 따뜻한 불빛이 두 여인을 비췄다.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고 사방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윙윙거렸다.그중 한 여자의 감격스럽고 슬픈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서다인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됐어요. 그만 좀 울어요. 대체 누구예요? 어떻게 쉽게 금원에 들어가 날 잡아 올 수 있죠? 날 안다고 했는데 내 신분을 알아요?”“흑흑... 너무 흥분돼서요. 너무 기뻐서. 흑흑... 언니가 죽은 줄 알았어요. 그런 데 며칠 전 인터넷에서 언니 영상을 봤어요. 흑흑...”서다인은 머리가 아팠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끌려온 지 두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여기서 이 여자가 30분 동안 우는 것을 들었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서다인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일단 나 먼저 집에 보내주고 마음 다 추스르면 다시 나 찾아와요. 이렇게 날 갑자기 잡아 오면 내 남편이 걱정할 거예요.”여자는 코를 훌쩍이며 서다인이 떠나지 못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깜박였다.“정안 언니, 나 3년 동안 언니를 찾았어요. 이제 겨우 찾았는데 절대 한 발자국도 떠날 수 없어요.”“방금 나 뭐라고 불렀어요?”서다인은 의혹스러웠다.그녀는 서다인의 멍한 눈빛을 보며 또 울음을 터뜨렸다.“언니 진짜 기억 잃었네요. 흑흑흑... 어떡해요. 기억을 잃어 나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요?”서다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 나이 또래의 이 여자는 몸에 꼭 끼는 검은 옷에 검은 캡을 쓰고 멋지게 차려입은 여자
그녀의 등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점차 두피가 저렸다.이때 이어폰에서 AI의 첫마디가 들려왔다.“안막주름 인식 성공. 정안의 개인 정보시스템에 로그인한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그녀의 이름이 정안일까? 이 이름은 남하준이 몇 번 언급하는 걸 들었지만 그 상대가 자신일 줄은 몰랐다.그 아래 더 충격적인 내용이 펼쳐졌고 서다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가 누구죠?”“당신 이름은 정안, 본명 백완자. 한때 이름은 백하린, 올해 25세, 아버지 M국인, 어머니 Z국인. 당신은 M국에서 태어났고, 14세에 Z국에 귀화하여 Z국 국방대학을 더블 박사 학위로 졸업했습니다.”“당신은 화학 연구 과학자이자 1급 군무기 엔지니어이며 Z국의 주요 기밀 유지 대상입니다.”서다인은 떨리는 손으로 이어폰을 벗고 창백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눈시울은 이미 붉어졌고 아랫입술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이렇게 충격적이고 무서운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저 가족에게 버림받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전 세계가 갖고 싶어 하는 정안일 수 있을까?순간 서다인은 일어나서 넋을 잃은 채로 지윤에게 다가가 태블릿을 건네주었다.“언니,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요.”서다인은 숨쉬기가 힘들고 심장이 돌처럼 굳어지며 넋을 잃고 겨우 말했다.“집에 돌아갈래요.”“당장 티켓 예매할게요.”지윤은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서다인은 긴장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나 금원으로 갈래요. 내 남편 집에. 사람 잘못 찾았어요. 난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 아니에요.”지윤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언니, 이건 모두 국가 기밀이에요. 언니가 열어볼 수 있다는 건 언니가 바로 우리가 찾는 사람이란 뜻이고요. 틀림없어요.”“난 언니가 16살 때부터 언니 곁에 파견됐어요. 22살 언니가 실종되기 전까지 6년을 봐왔는데 절대 언니를 잘못 볼 리가 없어요.”서다인은 여전히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지윤의 손을 밀쳤다
금원의 등불이 밝았고 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서다인은 소파에 앉아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있었고 그 옆에는 남하준과 유동진 남매가 앉아 있었다.정호와 류청도 옆에 서서 지키고 있었는데 모두 굳은 표정이었고 긴장되고 초조한 눈빛으로 서다인이 마음을 추스른 후 어쩌다 갑자기 실종됐는지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서다인은 마지막 우유 한 모금을 마신 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더니 마지막에는 남하준의 얼굴에 시선이 떨어졌다.그의 눈빛은 어둡고 무거웠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약간의 뜨거움이 깃들었고 휴지를 들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서다인은 슬쩍 피해 직접 휴지를 잡았다.“내가 할게요.”남하준이 인내심 있게 물었다.“괜찮아? 말해 봐. 어쩌다 실종됐고 어디로 갔던 거야? 또 무슨 일을 당했고.”서다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려 베란다 밖을 가리켰다. “뒷마당에 아주 큰 반얀나무가 있잖아요? 그 아래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밧줄이 나무에서 떨어져 고개를 들었더니 어떤 여자가 밧줄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어요.”“누구였는데?”남하준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몰라요.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도 전에 전 기절했어요. 깨어나 보니 교외의 외진 습지 공원에 나 혼자 누워 있었어요.”류청은 즉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통해 CCTV를 검색하기 시작했다.“그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너 데려간 건데? 해치진 않았고?”서다인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눈빛이 좀 흔들렸다.“모르겠어요. 제가 눈을 떴을 때 이미 보이지 않았어요.”방 안의 몇몇 사람들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았고 유미가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그 말을 누가 믿어요?”서다인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모두 똑똑한 사람이고, 그녀는 거짓말을 잘 못 하니 이 논리 없는 말을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지윤에 의해 밧줄을 타고 금원을 나갔고 차에 실려 갔다.다만 지윤의 존재를 자백하지 않았을 뿐이다.유동진은 위엄 있는 자태로 물었다.
서다인이 위층으로 올라갈 때 남하준이 유동진 남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을 들었고, 유미가 오늘 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그녀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남하준의 할머니가 그녀를 첫눈에 알아본 이후로 늘 자신의 신분과 가까이 지냈다.무엇보다 그녀를 오싹하게 만든 건 백인호였다. 분명 삼촌인데 외부인과 결탁하여 그녀의 신분을 훔치고 또 그녀의 전 남자친구로 가장하고 있었다.그녀가 백하린인 건 그래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그녀는 또 정안이라니.그 이름이 짊어진 무게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였다.백완자, 일명 정안, Z국인, 화학 과학자, 1급 군무기 엔지니어.그녀는 눈 밑에 눈물을 글썽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온갖 번뇌가 머릿속을 맴돌았다.이 순간 그녀는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남하준의 아내, 아주 평범하고 나약한 M국 여자로 살고 싶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남하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완아, 잤어?”정안은 대답 없이 눈물을 글썽이며 방문을 바라보았다.문을 두 번 두드리더니 곧 조용해졌고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나 이제 어떡해요?”그녀는 발을 움츠리고 이불을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고는 울먹였다.이튿날 아침.정안은 깨끗이 씻고 방문을 열고 내려가 아침을 먹으려는데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멍해졌다.남하준이 그녀의 문 앞에 서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똑바로 서 있었는데 강한 기운이 감돌았다.천성적으로 카리스마를 타고 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강한 압박감을 주었다.“굿모닝.”남하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하자 정안은 목을 축이고는 웃으며 인사했다.“굿모닝.”남하준은 그녀가 어젯밤에 이미 잠든 것이 아니라 그를 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우리 얘기 좀 해.”정안은 뒤로 물러서 문짝에 기대어 말했다.“들어와요.”그는 두 손을
사람은 기쁜 일이 생기면 기분이 상쾌한 법이다. 하루 종일 바빠도 지우와의 관계를 회복한 생각만 하면 속으로 은근히 기뻐 났다.남태준이 막 차 옆으로 다가갔을 때 임다희가 차 뒤에서 걸어왔다.“태준아.”남태준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려 여유롭게 물었다.“임다희? 무슨 일이야?”“할 얘기가 있어. 아주 중요한 얘기야.”임다희는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타.”남태준이 쿨하게 대답하자 임다희는 그의 차에 올라탔고 남태준이 시동을 걸고 떠났다.차 안에서 남태준이 물었다.“어디서 얘기할래?”“너희 집.”남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그건 안돼.”“아주 중요한 일이야. 반드시 사람 없는 곳에서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임다희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빛을 내뿜으며 엄숙하게 말했다.“마약 거래에 관한 얘기야.”“그럼 지금 얘기해.”남태준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차 안에는 우리 둘만 있으니까 안전해.”임다희가 앞뒤를 돌아보니 이 길은 행인도 없고 오가는 차량도 뜸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남태준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지 않으려 하자 마지못해 핸드백을 열어 그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이 시간에 거래가 있을 거야.”그의 다년간 사건 처리 경험으로 볼 때, 이렇게 명확한 거래 장소와 시간은 임다희가 절대 알 수 없었다.이 정보가 가짜이거나, 누군가가 그녀에게 준 것이 틀림 없었다.“어디서 났어?”남태준이 묻자 임다희는 조금 켕긴 듯 대답했다.“건달인 친구가 알아낸 정보인데 내가 샀어.”남태준은 입꼬리를 꼬며 그녀의 거짓말이 좀 억지스러워서 계속 물었다. “네가 마약 형사도 아니고 이 정보를 왜 사는데?”“너 주려고.”남태준은 움찔하더니 침묵했다.임다희는 애정 어린 눈으로 남태준을 지그시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태준아, 우리 다시 만나자.”남태준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뭐라고?”임다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울먹였다.“전에는 내가 미안했어. 네
지하 카지노 사무실.육건우는 자료를 책상에 던지고는 화가 나서 일어나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임다희를 노려봤다.“너 혹시 남태준 스파이야?”임다희가 미소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그럴 리가 있나요? 우리는 같은 배에 탄 사람이잖아요. 내가 남태준을 도와서 얻을 수 있는 게 뭔데요? 난 단지 애매한 단서만 줬지 실질적인 증거를 준 적은 없어요.”“요즘 사복 경찰이 계속 우리 촬영장 밖을 배회하고 가끔 항공사진 드론이 공중을 선회하고 또...”육건우는 책상으로 가서 서류뭉치를 집어던졌다.“이건 전부 최근 경찰들에게 적발된 물건이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젠장!”임다희는 긴장해서 침을 삼키고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육건우는 분노하여 임다희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네 신분을 잊지 마. 내가 너를 도와 남태준과 그 여자를 갈라놓겠다고 약속했고 그 동생까지 함정에 빠뜨렸어. 그런데 그 여자가 지금 나를 고소했다고. 젠장.”임다희는 웃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어떻게 사장님의 큰 은혜를 잊겠어요? 다만... 저는 다시 전 남자친구와 재결합하고 싶어요. 그런데 하필 태준이가 마약 경찰이잖아요. 그래서 저... 이 일에서 손 떼고 싶은데 보스에게 사정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육건우는 어이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임다희가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그해 남태준과 요트에서 탈출한 뒤 남태준은 그녀 때문에 다시 잡혀가 바다에 빠져 하마터면 숨질 뻔했지만 그녀는 사실 안전하게 귀국할 방법이 없었다.배후의 빅보스가 바로 그녀를 죽이려고 했지만 육건우가 빅보스에게 사정을 해서 그녀에게 살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그녀의 연예인 신분을 이용하여 마약을 갖고 귀국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그녀는 마지못해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십여 킬로그램의 마약을 촬영장 카메라 기둥에 숨긴 후 요트를 타고 귀국했다.그 이후로 그녀는 마약밀매 조직의 일원이 되었고 매번 물건을 가져오거나 몸을 헌신해야 했다.임
꽃가게 앞을 지날 때 남태준이 걸음을 멈추었다.“지우야. 나...”남태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우는 재빨리 그를 끌고 나가 그의 팔을 껴안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부질 없는 곳에 돈 낭비하지 말아요.”“여자들은 다 꽃을 좋아하지 않아?”지우에 의해 팔이 단단히 조여진 남태준은 아주 편안했고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안 좋아해요. 굳이 사주고 싶다면 차라리 다육식물을 줘요. 기르기도 쉽고 번식도 할 수 있잖아요.”“가방의 품질, 브랜드, 가격 중 어떤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가격이죠.”남태준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소비 관념과 가치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또 물었다.“다이아몬드와 금 중에 뭐가 좋아?”“금이요.”지우가 고민도 없이 대답하자 남태준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좋아. 알겠어.”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을 때 흥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우야!”지우가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더니 그녀를 부른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바로 그녀에게 맞선 상대를 소개해 준 중매인이었다.그녀는 빠르게 남태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놀라움과 설렘이 가득해 말했다.“어쩐지 내가 그렇게 좋은 남자들을 소개해줘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니. 알고 보니 눈이 이렇게 높았었네? 남편 어디 사람이야? 누가 소개해줬어?”지우는 어색하고 난처해하며 웃어 보였다.“친구가 소개해줬어요.”말하자면 백완자가 그들을 소개해 준 셈이었다.“외모도 빼어나고 큰 기에 몸매도 좋네. 어디 사람이야? 무슨 일 해?”역시 가십에 관심이 많은 중매인이었다.남태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지 않았지만 지우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안성 사람이에요. 아주머니, 제가 얼른 가서 밥해야 해서요. 다음에 얘기 나눠요.”“안성 좋지! 큰 도시 사람이네!”지우는 남태준의 손을 잡고 서둘러 떠났다.그녀는 매우 급하게 걸었지만 남태준의 얼굴에는
지우는 긴장되어 귀가 빨개졌다.“싫어?”남태준은 그녀의 진심을 떠보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와 재결합하고 싶은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의 허벅지에 몸을 기울여 앉았는데 긴장해서 등이 약간 뻣뻣했다.남태준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덥석 끌어안고 뒤로 기댔다.지우는 그의 튼실한 가슴에 완전히 엎드렸고 몸이 나른해졌다. 수줍고 난처해 감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그의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아주 편안하고 심장이 왠지 모르게 떨리면서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만약 네가 불편하거나 거부감이 든다면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남태준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갖고 싶었지만 그녀가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지우는 조바심이 났다.그녀는 남태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그의 깊고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불편하지 않아요. 거부감도 들지 않고요.”“그러니까 너 지금...”남태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우가 갑자기 입을 맞추었다.그러자 남자는 움찔했다.지우는 눈을 감고 두 손을 천천히 남자의 어깨에서 뒤로 걸어 목을 감은 뒤 수줍고 서툴게 그의 따뜻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녀는 심장이 천둥처럼 뛰었다.남태준은 몇 초 동안 멍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마음은 더없이 흥분되었다.그는 지우의 뒤통수를 낚아채 옅은 키스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의 입술과 혀는 그녀의 어금니를 비틀어 열고 곧장 달려들어 여자의 혀와 한데 엉켰다.“음!”지우는 그의 공세에 못 이겨 수줍은 소리를 냈다.그동안의 갈망과 그리움을 남태준은 한숨에 모두 보상받고 싶은 심정이었다.지우를 꽉 껴안고 격렬하고 난폭한 키스를 계속 퍼부었다.긴 키스가 이어지고 지우는 입술이 다 아프고 호흡이 가쁜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남자의 가슴을 밀면서 고개를 뒤로 뺐다.남태준은 아쉬운 듯이 그녀를 놓아주었다.두 사람은 눈을 감고 서로 이마를 맞댔고 거친 호흡을 나누며 뜨거운 기운이 감돌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