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서다인에게 다가가며 나지막이 물었다.“안 갔어?”서다인은 일부러 담담하게 대답했다.“갔다가 다시 돌아왔어요.”“책 두고 갔나?”서다인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꼬며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쓰레기라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에게 두근거림을 느끼는 자신이 한심했다.“책 가지러 온 거 아니에요.”“그래.”남하준은 차분하게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위엄있고 듬직한 겉모습과는 반대로 마음은 얽히고 긴장되고 불안했다.서다인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집에 며칠 더 머무를 거예요? 아니면 바로 군전 그룹으로 돌아가요?”남하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건 왜 물어?”그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를 수집하거나 가정 폭력을 인도하는 것은 너무 어려우니 가까이 지내면 더 얻기 쉬울 것이다.“당신이랑 함께 있고 싶어서요.”서다인이 툭 내뱉었다.남하준은 움찔하더니 생각에 잠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180도 변한 태도에 남자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숨을 가볍게 내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당분간은 안 돌아가. 내려가 물 마시려고.”그러자 서다인은 바로 옆으로 비켜서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가시죠.”퉁명스럽고 가식적인 행동은 평소의 서다인이 아니었다.방금 말다툼을 하고 화가 난 채로 떠났는데 어떻게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남하준은 의심을 품고 그녀 옆을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서다인은 이미 방으로 들어갔다.허윤미는 물을 마시며 거실을 지나던 남하준을 보고 말했다.“하준아, 이리 와봐.”남하준이 거실로 자리를 옮겼고 온 가족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서다인은 셋째 형수가 예전만큼 그녀에게 악랄하지 않다고 느꼈는데, 아마도 남하준이 집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저녁 식사는 꽤 화목한 편이었다.밤이 되고, 별장 정원의 바깥은 불빛이 환하고 매미 울음소리가 가득했다.서다인은 침실 베란다 밖의 등나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뺨을 괴고 캄캄한
처음 동침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긴장하는지 알 수 없었다.남하준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여자의 태도를 보고 방해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베개로 허리를 짚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책을 집어 들고 뒤적거렸다.방은 조용하고 따뜻했으며 조명은 밝았고 두 사람은 서로 방해하지 않고 대화도 없이 조용히 책을 읽었다.보는 건 글이지만,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상대방의 감정과 반응이었다. 시시각각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책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분위기가 너무 어색해서 서다인은 도무지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들어 남하준을 바라보았다.막 말을 하려던 순간 서로 눈빛이 마주쳐 그녀는 멍해졌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이 남자는 왜 책을 읽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을까?남하준은 덤덤하게 시선을 옮겨 계속 책을 봤다.“당신... 안 자요?”서다인은 긴장해서 말도 제대로 못 했다.“자야지.”남하준은 책을 덮고 캐비닛에 올려놓고 리모컨을 들어 방의 조명을 어둡게 한 다음 자리에 누웠다.얇은 이불을 허리까지 덮고 반듯하게 누웠다.서다인도 따라 천천히 누워 남하준에게 등을 돌렸다.순간, 남하준은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우리 얘기 좀 할까?”그는 언변이 좋지 않고 여자의 마음을 달랠 줄도 모르며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더더욱 몰랐다.소통을 많이 하면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촉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싫어요. 잘래요.”남하준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서다인을 향해 천천히 몸을 기울였고, 따뜻하고 어두운 빛 속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마음속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그가 20년 넘게 사랑한 여자가 지금은 그의 아내이고, 바로 곁에서 자고 있지만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간단한 포옹을 하고 싶어도 그녀가 혐오스러워하며 밀어낼까 봐 그녀를 건드릴 용기조차 없었다.비록 기억을 잃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렸을 때처럼 그의 할머니를 좋아하고 그의 넷째 형을 숭배했다.하지만 남하준을 깨끗이 잃
서다인은 그의 휴대전화에 분명 증거가 있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사진첩에는 그가 개발한 무기 사진들로 가득했다.메신저 앱을 열어보니 그는 이미 한 달 전 백하린의 메신저 계정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았다.주소록에는 백하린의 번호를‘백’이라고 저장해 두었다.서다인은 몸을 움츠리고 이불 속에 숨어서 한참을 뒤졌지만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해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자신의 번호는 ‘아내’라고 저장되어 있었다.서다인은 그 두 글자에 충격을 받아 잘못 본 것 같아서 다시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이 두 글자가 있었다.휴대전화를 가슴에 꾹 눌러 붙인 채 떨리고 막막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잠시 후, 그녀는 조용히 이불을 젖히고 받쳐 들어 남하준의 위를 넘어 휴대전화를 제자리에 조심스레 놓았다.그녀의 몸이 너무 가까워 남하준의 코안은 온통 여자의 은은한 향기로 심금을 울렸다.그는 목이 타는 듯 침을 삼키고 계속 자는 척했다.잠시 후 그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방의 전등은 이미 꺼졌고 옆에 있는 서다인은 여전히 그를 등지고 옆으로 누워 숨을 고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문으로 비친 방안의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그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다.분명 지척에 있는데도 만질 수 없는 허탈함이 그를 괴롭혔다.그는 에어컨 리모컨을 만져서 온도를 20도로 조절했다.그러고는 자신의 이불을 서다인의 몸에 덮었다.조용한 방에서 20도의 찬 공기가 잠시 불자 잠든 서다인은 몸을 움츠리고 남하준에게 몸을 기대었다.뜨거운 온도를 포착한 그녀는 남하준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의 가슴에 머리를 모두 파묻었다.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몸은 남하준 품속에서 작은 새처럼 보였다.남하준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그녀의 헝클어진 긴 머리를 뒤로 넘겼다.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정수리에 가볍게 키스했다. 향기로운 머리카락 냄새를 맡으니 공허한 마음은 약간 안정감을 느꼈다.문득 남하준은 몸이 빳빳하게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의 품
서다인은 깜짝 놀랐다.남자는 눈을 감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침부터 어딜 만져?”“아니, 그게 아니라... 난 만지려던 게 아니라”서다인은 긴장해서 말을 더듬으며 손을 빼려 했다.‘잘 때 내가 몰래 만졌다고 생각하겠지?’남하준은 무거운 눈꺼풀을 뜨지도 않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서다인은 머릿속이 하얘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 두 사람의 자세가 너무 애매하고 다정하게 누워있어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 이 어색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잠시 후 그녀는 아무런 변명도 없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남하준은 가볍게 웃었다.“자기 남편 만지는데 뭐가 미안해?”“만지지 않았어요!”서다인은 심장 박동이 더욱 빨라졌고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다.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근육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가 다시 자신의 단단한 가슴팍에 올려놓았다.“만지고 싶으면 만져. 사과도 설명도 필요 없어.”서다인은 남자의 피부에 손이 닿았다. 또렷하고 탄탄한 근육 라인이었고 근육마다 완전하고 적당했다.그녀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이 촉감이 좋았다. 수줍음과 욕망을 동시에 느끼며 그야말로 그녀 심장 박동의 최고점에 도전하고 있었다.남자는 몸이 뜨겁고 호흡이 좀 가빴다.“이거... 놔요.”서다인은 부끄러운 듯 손을 움츠리려 했지만 남하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가슴을 누르며 움직일 수 없게 했다.방안의 기류는 뜨거워졌고 두 사람의 숨결은 거칠어졌다. 야릇한 분위기에서 남하준은 천천히 눈을 떴고 그녀를 바라볼 때 눈동자는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그의 눈빛은 너무 자극적이고 욕망적이고, 마치 끝없는 심연 같고 뜨거운 용암 같아서 서다인은 정말 견딜 수 없었다.그녀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늘어뜨리고 쳐다보지 못했다.“몸은 맘에 들어?”서다인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귀밑부터 목까지 뜨거워지며 입술을 오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가슴을 만지던 굳어버린 손도 서서히 풀리며 그의 피부가 주
남하준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순간 안색이 변했다.서다인은 남자의 실의에 빠진 눈빛을 보고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불안해했다.하지만 그와 백하린의 일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말끔히 사라졌다.게다가 자신의 진짜 신분을 찾기 전까지 서다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 상대가 남하준일지라도. 서다인은 앉아서 긴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당신 같은 나쁜 남자랑은 절대 평생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남하준도 그녀를 따라 앉더니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여 양손으로 짧은 머리를 잡아당겼다. 긴 숨을 가볍게 내쉬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계속 나보고 나쁜 남자라는 둥 쓰레기라는 둥 하는데,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유나 좀 알자.”서다인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손가락으로 시트를 꼬집으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네가 알려줘야 내가 고칠 거 아니야?”서다인은 아주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당신 속으로는 계속 첫사랑을 사랑하고 있잖아요.”남하준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나한테 첫사랑은 너밖에 없어.”서다인은 움찔 놀랐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이건 내가 쓰레기라는 이유가 될 수 없어. 또 다른 건?”“당신 병원에 있을 때 내가 곁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백하린을 불렀잖아요. 당신은...”남하준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하린이를 군전 그룹으로 불러들인 건 순전히 일 때문이었어.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어.”서다인은 점점 어이가 없어 화를 내며 말했다.“그럼 병실에서 서로 껴안고 있던 것도 일이었어요?”남하준은 살짝 놀라더니 그제야 왜 서다인이 갑자기 떠났고 또 이혼을 강행하는지 알게 되었다.‘그래도 숨기지 않고 이제라도 말해줘서 다행이네.’남하준은 다시 한번 숨을 가볍게 내쉬며 말했다.“그건 하린이가 갑자기 달려들어 날 안은 거야. 근데 마침 그 모습을 봤다고?”능구렁이 같은 이 남자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어떻게 세상에 우연이 그렇게 많을까?서다인은 억울해서 입을
서다인은 고개를 숙이고 흔들었는데 답답한 기운이 목에 걸려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말이 없는 건 묵인한단 뜻인가?”남하준은 괴로운 듯 나지막이 캐물었다.서다인은 목구멍에 걸린 기운을 뚫고 울먹이며 말했다.“아니에요.”남하준은 눈을 짓누르고 있던 손을 내리고 붉게 물든 눈을 뜨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서다인에게 등을 돌려 엄숙하게 말했다.“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혼 얘기는 다시 꺼내지 마. 절대 불가능하니까.”“나한테 부족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성격만 빼고 다 고칠 수 있으니까.”“그리고 원하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 난 여자 마음 헤아리지 못해.”말을 마친 남하준은 화장실로 향했고 서다인은 그 자리에 멍하니 있다가 몰래 눈물을 닦고 코를 훌쩍였다.그녀는 여전히 어둡고 싸늘한 모습의 남하준이 두려웠고 방금 그의 엄숙한 말에 지레 겁을 먹었다.아무리 억울하고 괴로워도 그 앞에서 감히 억지를 부리지 못했다.서다인은 생각하면 할수록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것이 달갑지 않아 화가 나서 화장실 문으로 다가가 문을 사이에 두고 말했다.“그럼 각서 써요. 앞으로 백하린이랑 인연 끊겠다고. 아니면 이혼이에요.”다시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꺼내자 서다인은 당황해서 말을 마치고는 곧장 드레스룸으로 뛰어들어 옷을 갈아입었다.곧 남하준은 씻고 화장실에서 나왔다.그는 드레스룸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고 펜과 종이를 챙겨 베란다 밖의 등나무 의자에 앉아 글을 썼다.서다인은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씻고 긴 머리를 묶고 산뜻하게 걸어 나왔다.남하준은 베란다 밖에서 걸어 들어와 손에 든 종이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서다인은 종이를 건네받고는 고개를 숙여 확인했다.[각서.나 남하준은 평생 아내와 가정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아내 완이에게 보증한다. 만약 약속을 어길 시 무조건 이혼에 동의한다.]각서를 확인한 서다인은 고개를 들어 남하준을 바라보았다.“난 완이가 아니에요.”남하준은 차분하고 여유롭게 대답했다.“할머니도 널 완자라고 부르고 화가
남하준은 오랫동안 쌓인 그리움을 지금 이 진한 키스에 모두 쏟아부었다.서다인은 남자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멍해졌다.머리가 텅 빈 채로 그의 키스가 아주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만 알았다. 그녀를 방 벽에 대고 몇 세기가 넘는 키스를 한 것 같았다.키스가 끝난 후,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그를 따라 내려가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허윤미가 호기심에 물었다.“다인아, 어제 하린이 할머니가 너 왜 찾아오신 거야?”모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서다인을 쳐다보았다.서다인은 움찔하더니 말했다.“별말씀 안 하셨어요.”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 아침을 먹었다.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셋째 형수 최서윤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하, 뻔한 거 아니에요? 딱 봐도 귀염둥이 손녀의 남은 인생을 위해 왔겠죠. 그 할머니 성격상 협박하거나 돈을 주며 매수해 다인이가 도련님을 떠나도록 설득했겠죠.”서다인은 마음이 좀 언짢았다.“형님은 사람 마음을 참 잘 읽으시네요.”조용히 아침을 먹고 있던 남하준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유가영은 흥미가 생긴 듯 서다인을 보며 물었다.“그 할머님이 얼마 주셨어?”서다인은 무심코 대답했다.“금액은 제가 원하는 대로 적으라고 하셨어요.”이 말에 유가영은 저도 모르게 흥분했다.“어머, 대박. 그런데 그걸 거절한 거야?”말이 끝나자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남하준의 어두운 안색을 힐끗 쳐다보더니 황급히 한마디 보탰다.“그러니까 내 말은 다인이가 허영심도 없고 성격이 꿋꿋하다고 칭찬한 거야.”서다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식탁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모두가 남하준의 눈치를 살폈다.오직 최서윤만 겁도 없이 계속 도발했다.“도련님이 동의하지 않는 이상 다인이가 그 돈을 갖고 싶어도 이혼 못 해요. 내가 어제 우연히 두 사람 이혼 얘기 오가는 거 들었잖아요?”모두가 서다인을 경악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돈 때문에 이혼을 원하는 것 같다는 의심을 품었다.“다인아, 정말이야?”허윤미가 긴장해서 물었고
“우리 집에 수사대 두 팀 보내.”최서윤은 당황하고 긴장하여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멍한 표정으로 남하준을 바라보았다.다른 사람들은 너도나도 물었다.“집은 왜 수색해?”“가족끼리 무슨 짓이야?”“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남하준은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냉담한 얼굴로 식탁을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그의 온몸에서는 사람을 얼게 만드는 한기가 풍겨 나왔고 차갑고 엄숙하여 사람들을 몸서리치게 했다.피비린내 나는 가족 대전이 펼쳐질 것 같아 모두 두렵기만 했다.서다인은 거실에 있는 남하준을 돌아보고 또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부모님의 요구로 남씨 가문의 동서끼리 강제로 함께 살게 되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별 탈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폭풍전야였다.잠시 후 류청은 대여섯 명의 그룹 수사관들을 데리고 집에 도착했고 그들은 전문 장비까지 챙겨왔다.“도련님, 수사대 도착했습니다.”남하준은 유유히 앉아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로 초점 없이 다기를 바라보며 턱을 괴고 있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동작은 느리지만 기세는 웅장했다.모두 식탁을 떠나 거실로 가서 그들의 방으로 향하는 수사대를 지켜보았다.최서윤은 당황해서 남편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셋째 형은 아내가 괴롭힘 당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남하준에게 소리쳤다.“하준아, 여기가 너 혼자 사는 집이냐? 네가 무슨 자격으로 집안을 수색해? 우리 동의도 없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남하준은 서서히 눈썹을 치켜올리고 셋째 형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그 단순한 모습이 걱정스러울 따름이었다.그는 또박또박 말했다.“집안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기를 기도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법대로 처리할 테니까.”셋째 형은 끝까지 무서워하지 않고 대꾸했다.“허. 내가 뭔 걱정거리가 있어서 기도까지 하겠어? 난 단지 너의 그 오만방자함이 보기 싫을 뿐이야. 부모님이랑 형님들은 안중에도 없는 거지?”남하준은 대꾸하지 않았다.남창민과 허윤미도 자리를 잡고 앉아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
네모난 식탁에는 여섯 가지 요리에 국 하나, 그리고 디저트와 과일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새우, 게, 생선, 닭, 쇠고기, 야채, 수입산 인삼 비둘기 찜이 있었다.이러한 음식은 그다지 비싸지 않지만 남태준은 명절이나 중요한 날이 아니면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던 남태준이 시선을 돌려 지성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이 맛있는 음식들이 지성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성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엄마, 의사가 상처 완전히 아물기 전에는 담백하고 잘 소화되는 음식을 많이 먹고 기름진 음식은 피하라고 했어요. 아직 이런 음식은 벅차요.”진효연은 야채를 집어 지성의 그릇에 놓았다.“넌 야채 많이 먹어. 이건 충분히 담백해.”지성은 게를 보며 침을 흘렸다. 평소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 그의 집에서 하필 그가 다쳤을 때 해산물을 준비하다니.밥을 먹기도 전에 화가 잔뜩 불렀다.진효연은 집게로 가장 큰 게를 집어 남태준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놓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태준아. 넌 이거 많이 먹어.”“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우를 쳐다봤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국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태준은 진효연이 너무 열정적인 것 같았다.설마 그를 수양아들로 삼아 지우의 오빠로 만들고 싶은 걸까?“혹시 게 뜯는 도구 있어요?”남태준이 식탁을 보며 묻자 진효연은 어리둥절했다.게를 자주 먹지 않으니 게를 먹을 때 전문적인 도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지우는 그릇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가 깨끗한 작은 가위와 커피용 작은 숟가락을 꺼내 남태준에게 건넸다.“대충 이거라도 써요. 우리 집은 게를 먹을 때 그냥 입으로 뜯었어요.”지우가 부드럽게 말하자 남태준은 엷게 웃으며 도구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우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진효연은 남태준에게 해산물을 집어주고 지성에게 닭고기를 집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다들 열심히
지우가 물건을 들고 지성의 방으로 가져갔다.남태준은 신발을 갈아신고 들어가서 그녀의 집안을 둘러봤다.확실히 좀 좁고 낡긴 하지만 깔끔한 편이었다.부엌 맞은 편에 바로 식탁이 있고 식탁 옆에는 거실이 있고 거실 소파도 짧아서 세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텔레비전은 구식이고 냉장고도 작아서 거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비좁아 보였다.“태준이 왔어?”진효연은 음식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활짝 웃으며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앉아. 어서 앉아. 준비 거의 끝나가.”너무 친절하고 다정한 태준이라는 호칭에 남태준은 조금 어리둥절했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제가 뭐 도와드릴까요?”“없어. 없어. 그저 앉아서 차나 마시고 지우와 얘기나 나누면 돼. 부엌일 정도는 나 혼자로 충분하지.”남태준은 또 움찔했다.지우와 얘기를 나누라니. 조금 어리둥절했다.너무 갑작스러운 열정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지성은 부랴부랴 남태준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청한 뒤 녹차 한 잔을 우려낸 뒤 리모컨을 건넸다.“TV 볼래요?”남태준이 다급하게 거절했다.“괜찮아.”지성은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을 누르면서 말했다.“누나는 로맨스 드라마만 좋아해요. 누나가 집에 있으면 내가 리모컨을 차지한 적이 없어요.”남태준이 따뜻하게 웃었다.“그건 직업 때문에 그런 거잖아.”“형도 누나 글 쓰는 거 알아요?”“누나가 경찰의 사랑 이야기를 쓴 적 있는데 아쉽지만 결말은 비극이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책을 출판했어요.”남태준은 방금 찻잔을 들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동작이 뻣뻣해져서 차마 차를 마실 수 없었다.방 안에서 지성의 옷을 챙겨주던 지우가 그의 말을 듣고 노기등등하게 뛰쳐나왔다.“야. 너 그 부질 없는 입 다물어!”남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우를 바라보았다.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하지만 지성에게는 그저 무서울 따름이었다.지성은 긴장한 채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TV를 계속
지우가 휴대전화와 가방을 들고 일어서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래. 그럼 나 간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남태준의 옆을 지나갔다.남태준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고 그녀가 병실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지우는 그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저번에 강제로 그녀의 몸을 가지려고 해서 그녀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요 며칠 동안 그는 끝없는 번뇌와 후회 속에 살았다.그때 지성이 가방을 들고 남태준 앞으로 다가왔다.“형. 가요.”남태준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내가 들게.”지성은 크게 기뻐했고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마워요. 형.”차에 오른 남태준은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잠시 후 지우가 뒤에서 따라오자 남태준은 속도를 줄이고 백미러로 지우가 스쿠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약간 멍해졌다.지성이 그런 남태준의 상태를 눈치채고 말했다.“누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매일 다니는 길이라 아주 익숙해요. 조금 있다가 앞쪽 길목에 도착해서 오솔길로 빠지면 누나가 우리보다 훨씬 빨라요.”남태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지성은 힐끔 남태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사실 우리 누나가 가끔 사납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착하고 어질어요.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사람 잘 챙길 줄 알고 성실하고 선량한 편이에요.”남태준이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알아.”“아주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병에 걸리셨을 때, 난 대학생이었고 누나 혼자 힘으로 이 집안을 지켰어요. 병원비며 빚이며 모두 누나 혼자 짊어졌어요.”남태준이 계속 응대했다.“알아. 지우 좋은 사람인 거.”지성이 궁금해서 물었다.“우리 누나 좋은 사람인 거 알면서 왜 헤어졌어요?”남태준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네 누나가 나 안 좋아해. 별로 느낌이 없대.”지성은 입을 떠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누나 사람 보는 눈은 개나 줘버렸나? 난 또 엄마가 두 사람
‘너 참. 한심하다!’지우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스쿠터를 돌려 힘없이 집 쪽으로 향했다.다음 날.지우는 더 이상 남태준을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 휴대전화를 보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그가 메시지 한 통이라도 보내길 바랐다.그를 찾으러 갈 용기와 핑계가 필요했지만 메시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지성의 퇴원을 앞두고 진효연은 집에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남태준을 부르라고 했지만 지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병원 병실.지성은 옷을 개면서 의자에 앉아있는 지우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물었다.“나 퇴원하는 거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폰만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어?”지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지성을 쏘아보며 나무랐다.“너 이제 움직일 수 있잖아? 옷 몇 벌 개인다고 안 죽어.”“누나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 정말 불쌍하다.”워낙 기분이 안 좋았던 지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괴로워 벌컥 화를 냈다.“누가 너더러 데려가래?”지성과 지우는 어릴 적부터 서로 치고받으면서 커왔고 어린이 된 지금도 자주 다퉜다.지성이 인정사정없이 말했다.“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바로 누나 같은 여자야. 지나가는 남자들 다 홀릴 것 같은 몸매를 지닌 것도 모자라 여자가 상냥하지도 않고 어질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고 사납고 악독하잖아!”지우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래 나 몸매 좋다! 부렵냐? 너처럼 깡마른 자식은 대나무 장대 같은 아내밖에 차려지지 않아!”“너!”지성은 화가 치밀어 상처가 아팠고 어두운 얼굴로 지우를 가리켰다.지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아니다. 너 같은 놈에게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라!”지성은 이를 악물었다.“누나. 말이 너무 심하잖아!”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지우와 지성은 모두 조용해져서 입구 쪽을 보았다문은 열려 있었고 남태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서 그들 남매가 다투는 것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