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은 서다인이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곳을 찾아다녔다.수원, 그녀의 친정집, 예전에 살던 셋방.그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그녀는 말없이 사라졌다.단 하루 만에 남하준은 수척해졌다.10년 전 백하린이 출국할 때 느꼈던 아픔이 되살아난 것이다.점심나절.남씨 저택에 불청객이 왔다.한 여 변호사가 서다인을 대리하여 두 사람의 이혼에 관해 이야기하러 남하준을 찾아왔다.별장 서재.밖은 햇빛이 밝게 내리쬐고 서재도 넓고 밝았지만 분위기는 어둡고 냉랭하며 보이지 않는 저기압으로 뒤덮여 있었다.변호사는 남하준에게 은행 카드와 이혼 합의서를 건넸다.“제 의뢰인은 이미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어요. 이 카드는 남하준 씨 거죠? 서다인 씨가 쓴 부분은 나눠서 갚을 겁니다.”남하준은 어둡고 쓸쓸한 표정으로 탁자 위의 이혼 합의서를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순간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고 숨 쉬는 것조차 가슴에서 간헐적인 통증을 느꼈다.서다인은 쉽게 이혼을 꺼내지 않기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직접 남하준에게 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벌써 약속을 어기려는 걸까?변호사를 보낼 정도로 그를 만나기 싫었던 걸까?남하준은 괴로운 숨을 깊이 내쉬며 여 변호사를 올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지금 어디 있어요? 직접 만나야겠어요.”“죄송합니다. 제 의뢰인은 당분간 남하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서류에 사인하시고 이혼 절차도 끝나면 당연히 만나게 되실 거예요.”남하준은 입꼬리를 올리고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고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바로 찢었다.변호사는 경악했다.남하준은 찢어진 종이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이혼하고 싶으면 직접 나 찾아오라고 하세요.”변호사는 벌떡 일어서더니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만약 남하준 씨가 서명하지 않으면 제 의뢰인은 이혼 소송을 제기할 겁니다.”남하준의 차가운 눈이 어두워졌고 주먹을 살짝 쥐었다. 온몸에 차갑고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방안을 한기로 가득 채웠다.변호사는 긴장한 듯 침을 삼키고 공손히 목례를
“그럼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이혼하지 않으려는 건데?”서다인은 배가 고팠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 “그 사람 할머님이 날 매우 좋아하셔.”“아, 효심이 지극하네.”두 사람은 조용히 라면을 먹었다.순간, 지우는 달걀을 집어 껍질을 벗기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내 생각에는 말이야. 아무리 서로 죽을 만큼 사랑하는 연인도 결혼 후에는 변하게 돼 있어. 결혼에는 사랑이 아니라 책임감과 정만 있는 거야. 그 사람이 너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중요하지 않아. 너한테 돈만 주면 되지.”서다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지우를 바라보았다.“넌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 이렇게 비관적이야?”“결혼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서 난 평생 결혼하고 싶지 않아. 혼자가 좋은 것 같아.”“나도 너처럼 이혼하면 다시 결혼하지 않을 거야. 우리 같이 고독하게 늙어가자.”“하하, 네가 있는데 왜 고독해?”서다인은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지우는 껍질을 벗긴 달걀을 서다인에게 건네주며 호기심에 물었다.“너 집 나간 지 이틀이 지났는데 네 남편 혹시 여기까지 찾아오는 거 아니야?”서다인은 그녀의 달걀을 받아들고 말했다.“남편은 너에 대해 몰라. 그러니까 여기 찾아올 수 없을 거야.”“하지만 그 사람은 남하준이야. 군전 그룹 수장이라고! 국방 무기를 다루는 사람이란 거 몰라? 그렇게 선진적인 무기도 다루는 사람이 너 하나 못 찾을까?”서다인은 달걀을 깨무는 동작을 멈추더니 순간 당황했다.지우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지우는 휴지를 꺼내 손을 닦고 일어났다.“택배 왔나 보다.”서다인은 마음이 무거워 달걀 한 조각을 깨물고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입구에 있는 지우는 바보같이 몇 초 동안 멍하니 있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입구에 있는 건장하고 꼿꼿한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준수한 외모의 남자는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었고 몸에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분위기가 무서웠다.멋진 검은색 옷
“얘기 좀 해.”남하준의 말투는 온화했고 깊고 검은 눈동자에는 부드러운 빛이 가득했다.서다인은 고개를 떨구었다.“제 변호사가 이미 분명히 말했을 거예요. 더 이상 할 얘기 없어요.”남하준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투가 다소 거칠어졌다.“다시는 이혼하겠다는 말 꺼내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서다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울분에 차서 말했다.“당신도 백하린이랑 인연 끊겠다고 약속했잖아요.”“나 연락한 적 없어.”서다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눈시울이 젖었다. 연락하지도 않는데 그렇게 사랑하다니.그녀가 당장 죽을 것 같았을 때, 머릿속은 온통 이 남자 생각뿐이었지만, 이 남자는 수영할 줄 아는 첫사랑을 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그녀를 챙기지 않았다.그녀는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서다인은 살짝 울먹이며 말했다.“인호 씨가 없었다면 난 이미 저세상 사람이에요.”남하준은 다급하게 말했다.“인호 형이 없었다면 난 두 사람 모두 구했을 거야.”서다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고맙지만, 수영할 줄 아는 백하린이 익사하는 게 그렇게 두려웠어요?”남자는 그녀에게 다가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하린이는 어릴 때부터 부유 공포증 있어서 수영할 줄 몰랐어. 언제 장애를 극복하고 수영까지 배웠는지 나도 몰랐어.”서다인은 뒷걸음질 치며 분개해서 말했다.“나한테 가까이 오지 말아요.”“다인아, 나한테 해명할 기회를 줘. 응?”남하준은 거의 애원하는 식으로 말했다.해명한다고 해서 무엇이 바뀔 수 있을까?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는 매번 백하린을 위해 그녀에게 상처 주고 있었다.서다인은 더 이상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의 진짜 신분은 서다인이 아니었다.억지로 결혼을 유지한다고 해도 그녀의 신분이 밝혀지는 날 무효가 된다.“남하준 씨, 난 당신이랑 법정에 서고 싶지 않아요.”서다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가슴이 막히는 것 같아 괴로
서다인은 몸이 굳어지더니 화가 나서 발버둥 치며 그를 밀쳤다.그러나 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남자는 더 세게 안았다. 두 손으로 그녀를 꽉 껴안고 머리를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파묻고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낮고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인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 응?”서다인은 그의 품에서 울음을 참으며 여전히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다.남하준은 붉게 물든 눈을 천천히 감으며 잠시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예전에는 백하린이 떠났고 지금은 서다인이 이혼하려 한다.한 번으로 부족해서 똑같은 슬픔을 또 한 번 겪고 있다.칼도 맞았고 총알도 맞았지만 육체적인 고통은 사랑의 고통보다 훨씬 덜 고통스러웠다.앞으로 다시는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남하준은 그녀를 부둥켜안고 괴로운 마음을 달래며 물었다.“결혼한 지 거의 반년 동안, 한 번도 나 좋아한 적 없어?”그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지난 반년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매번 고통스러웠고 점점 더 고통스러웠다.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더 이상 미천하게 사랑하고 싶지 않았고 게다가 그는 백하린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평생 그녀의 자리는 없을 것이다.서다인은 코를 훌쩍이며 몸을 곧게 펴고는 차갑게 말했다.“없어요.”남하준은 날카로운 칼날이 가슴을 뚫고 들어와 심장에 꽂히는 것을 느꼈고 송곳이 콕콕 찌르는 통증이 점차 강해졌다.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거친 숨을 크게 내쉬어도 심장의 아픔이 가라앉지 않자 천천히 품 안의 여자를 놓아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는 눈시울을 붉혔지만 목소리는 차분했다.“이미 결정했어?”서다인은 고개를 떨구고 차갑게 말했다.“네, 이미 결정했어요. 이번엔 절대 흔들리지 않아요.”남하준은 천천히 주먹을 쥔 채 점점 더 무거운 숨을 몰아쉬며 여자의 냉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이혼 합의서는?”서다인은 움찔하더니 그의 뜻을 이해하고 방으로 돌아가 새로운 협의서와 펜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았다.남하준은 종
남하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아파트를 나와 류청과 정호의 앞을 지나갈 때,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섬뜩하게 했다.두 사람은 오랜 세월 남하준과 함께 있었지만 지금처럼 무서운 저기압을 본 적이 없어 그의 뒤를 따라가다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놀라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쭈뼛쭈뼛 내려와 그를 차에 태우고 떠났다.차 안 뒷좌석.남하준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침묵을 직혔다.차 안 전체가 극도로 억압적이고 냉엄한 분위기에 휩싸여 숨이 막힐 정도였다.그때 전화벨이 울렸다.조수석의 류청은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가 불청객인 것을 알고 황급히 꺼내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행여나 남하준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웠다.잠시 후 통화를 끊은 류청은 뒷좌석의 남하준을 뒤돌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류청은 지뢰밭에 닿을까 봐 두렵지만 또 보고하고 싶어 한참을 고민하다가 겁에 질려 입을 열었다.“도련님, 하린 아가씨에 관한 거 전부 조사했는데 지금 들으시겠어요?”“응.”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고 한 글자도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류청은 목을 축이며 조심조심 말했다. “M국은 이중 국제 신분을 허락하지 않아요. 그래서 M국에는 백하린이란 사람이 없어요.”남하준은 눈을 번쩍 뜨더니 어두운 눈동자로 물었다.“하린이가 귀화했다는 거야?”류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백하린 씨는 M국 사람도 아니고 백하린이란 이름도 없어요. Z국에서 이름은 백완자 입니다.”남하준은 안색이 더 나빠졌다.“계속해.”류청: “백완자는 14살에 Z국 가장 유명한 학교에 특별 모집에 합격했지만 학교 기숙사에 살지 않았고 수업에 참여한 횟수도 매우 적어 동기들은 거의 그녀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하지만 매번 시험에서는 과목별 1등을 차지했고 각종 상도 많이 받고 대학 시절 다섯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모두 국제 최고 권위의 학술지에 실렸어요.”“순리롭게 졸업했지만 너무 바빠 졸업식도 참석하지 못한 학교의 가
남하준은 정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부모님의 사인을 자세히 조사해 봐. 화장 증명서가 없다면 아직 살아계실지도 몰라.”“그럼 백하린 씨에 대해서는 계속 조사할까요?”“응.”“네!”류청은 공손히 대답했다.“백하린이 발표했던 논문은?”류청은 휴대전화를 꺼내 자료를 열어 그에게 건넸다.남하준은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스크린 속 논문을 보며 깊은 의혹에 휩싸였다.《산화환원반응 구리, 철, 강철 및 유리소의 파생 나노기술 핵심분석 및 연구》《분자 금속 재분리의 합성 및 화학 응용》남하준은 계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논문의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모두 화학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남하준은 차창 가장자리에 팔꿈치를 괴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백하린이랑 할아버지 DNA 샘플을 구해봐. 은밀하게.”류청과 정호는 눈을 마주쳤고 지금 남하준 생각을 완전히 이해했다.“네.”두 사람은 입을 모았다....이튿날 아침.서다인은 어젯밤 괴로워 한숨도 못 잤다. 아침이 되어서야 졸려서 눈을 감았다.이때 다급한 벨 소리가 울렸고 그녀는 힘겹게 휴대전화를 귓가게 갖다 댔다.휴대전화 너머로 시어머니의 긴장하면서도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다인아, 네 친오빠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야?”서다인은 벌떡 일어나 앉더니 곧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아침부터 집에 깡패들이 찾아왔어. 네 오빠가 빚을 졌는데 네가 보증을 섰다고. 네 오빠 대신 돈 갚으라고 소란을 피웠어.”서다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나 급히 옷장을 뒤져 옷을 집어 들었다. “어머니, 집을 담보로 한 적은 없으니까 그 사람들 신경 쓰지 마세요. 계속 소란피우면 경찰에 신고하세요. 제가 지금 당장 갈게요.”허윤미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급하게 올 필요 없다. 이미 다 처리했어.”서다인은 약간 움찔하더니 의아해서 물었다.“이미 처리했다고요?”“그래, 네 오빠 대신 그 돈 갚고 차용증도 돌려받
서지석은 차갑게 웃었다.“다인아, 오빠도 어쩔 수 없었어. 너는 안 도와주지 빚쟁이들은 자꾸 재촉하지. 어쩔 수 없이 내 친여동생이 부잣집에 시집가서 그 정도 돈은 껌이라고 했을 뿐이야.”“그런데 그 방법이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이야. 네 시댁 식구들이 얼마나 호탕한지 단번에 빚 태반을 해결해 줬어.”“네 남편 위신도 대단하더라고. 내 매부가 군전 그룹 수장이고 널 담보로 돈을 빌리겠다고 하니 다들 얼마든지 빌려주겠다고 나서는 거야. 네 남편 위상이 아주 효과가 좋아.”“지금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해.”서지석은 득의양양해서 말했다.“누가 감히 나 건드리면 매제가 나서서 해결해 줄 거니까!”서다인은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었고 온몸에 분노를 억누르고 약간 떨었다. 얼음장 같은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서지석, 이 쓰레기. 감히 다시 한번 남하준 이름 걸고 사기 치고 다니면 너 절대 가만 안 둬.”서지석은 건들건들하며 차갑게 웃었다.“다인아, 나한테만 뭐라고 하지 마. 아빠도 술친구들에게 사위가 남하준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고 있어. 딸이 부잣집에 시집갔는데 엄청 대단하다고.”“네 엄마는 더 말할 것도 없어. 그저께 네 남편한테 울면서 전화해서 손쉽게 2천만 원 받았어. 네 남편 씀씀이 한번 시원시원하네.”서지석은 여전히 기뻐하고 있었지만 서다인은 이미 화가 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이 가족은 시궁창의 더러운 생물처럼 다른 사람에게 달라붙어 피를 빨고 뿌리칠 수 없게 달라붙어 아주 징그러웠다.서다인은 나지막이 호통쳤다.“나 이미 남하준이랑 이혼했으니까 다시는 그 사람 찾아가지 마. 다시는 그 집안에 폐 끼치지 말라고.”서지석은 코웃음을 쳤다.“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을 해? 이혼? 네가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는 이상 왜 이혼하겠어? 넌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그런 집안에 시집 못 가. 너처럼 허영심 많고 재물을 목숨처럼 여기는 애가 이혼은커녕 거마리처럼 붙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그래, 오빠가 알았어. 앞으로 도박 때문에 돈
그 순간,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화가 나고 괴로웠다. 그리고 어떤 여자도 아무 이유 없이 나쁜 것을 배우고 타락하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무슨 일이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그때 왜 고소 안 했어?”서다인은 이런 인간쓰레기를 찢어버리고 싶어 이를 악물었다.지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다인이 엄마도 참 못났지. 자기 자식도 보호하지 못하고 도박 빼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지우는 안경을 쓰고 타자를 계속했다.“넌 성격도 좋고 또 그렇게 돈 많고 권력 있는 남편도 있으니 설령 그 사람들과 혈연관계가 없다고 해도 이번 생은 너한테 달려들어 빨아 먹으려 들 거야.”서다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그녀는 이미 많은 피해를 입었다.남씨 집안까지 이 불량배들에게 얽매이게 되었다.지금 그들과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계속 이렇게 참으면 그녀는 조만간 미쳐버릴 것이다.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이혼 합의서를 받고 자신의 신원을 밝혀야만 이 흡혈귀들을 벗어날 수 있었다.서다인은 한참을 잠잠히 있다가 궁금한 듯 물었다. “지우야, 너 뭐 쓰고 있어?”“알바. 돈 많이 벌어야 네 돈 빨리 갚지.”서다인은 눈을 들어 그녀의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니 글자를 가득 채웠다.“이게 뭔데?”“다른 사람 대신 소설 써주는 거야. 중도에 연재가 중단된 소설인데 대충 써주고 글자 수대로 수당을 줘. 즉 타자가 빠를수록 더 많은 돈을 번다 이거지.”서다인은 마음 아팠다.“그렇게 고생할 필요 없어. 내 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하지만 너도 다른 사람한테 빌린 거라며? 너도 갚아야 하잖아?”서다인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순간, 그녀는 지우 옆에 앉아 무릎을 껴안고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그녀가 타자하는 것을 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지우야, 나도 일거리 좀 줘.”“어떤 기술이 있고 어떤 일을 할 줄 아는데?”지우는 손가락을 날리며 한시도 쉬지 않고 타자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
네모난 식탁에는 여섯 가지 요리에 국 하나, 그리고 디저트와 과일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새우, 게, 생선, 닭, 쇠고기, 야채, 수입산 인삼 비둘기 찜이 있었다.이러한 음식은 그다지 비싸지 않지만 남태준은 명절이나 중요한 날이 아니면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던 남태준이 시선을 돌려 지성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이 맛있는 음식들이 지성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성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엄마, 의사가 상처 완전히 아물기 전에는 담백하고 잘 소화되는 음식을 많이 먹고 기름진 음식은 피하라고 했어요. 아직 이런 음식은 벅차요.”진효연은 야채를 집어 지성의 그릇에 놓았다.“넌 야채 많이 먹어. 이건 충분히 담백해.”지성은 게를 보며 침을 흘렸다. 평소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 그의 집에서 하필 그가 다쳤을 때 해산물을 준비하다니.밥을 먹기도 전에 화가 잔뜩 불렀다.진효연은 집게로 가장 큰 게를 집어 남태준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놓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태준아. 넌 이거 많이 먹어.”“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우를 쳐다봤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국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태준은 진효연이 너무 열정적인 것 같았다.설마 그를 수양아들로 삼아 지우의 오빠로 만들고 싶은 걸까?“혹시 게 뜯는 도구 있어요?”남태준이 식탁을 보며 묻자 진효연은 어리둥절했다.게를 자주 먹지 않으니 게를 먹을 때 전문적인 도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지우는 그릇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가 깨끗한 작은 가위와 커피용 작은 숟가락을 꺼내 남태준에게 건넸다.“대충 이거라도 써요. 우리 집은 게를 먹을 때 그냥 입으로 뜯었어요.”지우가 부드럽게 말하자 남태준은 엷게 웃으며 도구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우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진효연은 남태준에게 해산물을 집어주고 지성에게 닭고기를 집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다들 열심히
지우가 물건을 들고 지성의 방으로 가져갔다.남태준은 신발을 갈아신고 들어가서 그녀의 집안을 둘러봤다.확실히 좀 좁고 낡긴 하지만 깔끔한 편이었다.부엌 맞은 편에 바로 식탁이 있고 식탁 옆에는 거실이 있고 거실 소파도 짧아서 세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텔레비전은 구식이고 냉장고도 작아서 거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비좁아 보였다.“태준이 왔어?”진효연은 음식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활짝 웃으며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앉아. 어서 앉아. 준비 거의 끝나가.”너무 친절하고 다정한 태준이라는 호칭에 남태준은 조금 어리둥절했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제가 뭐 도와드릴까요?”“없어. 없어. 그저 앉아서 차나 마시고 지우와 얘기나 나누면 돼. 부엌일 정도는 나 혼자로 충분하지.”남태준은 또 움찔했다.지우와 얘기를 나누라니. 조금 어리둥절했다.너무 갑작스러운 열정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지성은 부랴부랴 남태준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청한 뒤 녹차 한 잔을 우려낸 뒤 리모컨을 건넸다.“TV 볼래요?”남태준이 다급하게 거절했다.“괜찮아.”지성은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을 누르면서 말했다.“누나는 로맨스 드라마만 좋아해요. 누나가 집에 있으면 내가 리모컨을 차지한 적이 없어요.”남태준이 따뜻하게 웃었다.“그건 직업 때문에 그런 거잖아.”“형도 누나 글 쓰는 거 알아요?”“누나가 경찰의 사랑 이야기를 쓴 적 있는데 아쉽지만 결말은 비극이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책을 출판했어요.”남태준은 방금 찻잔을 들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동작이 뻣뻣해져서 차마 차를 마실 수 없었다.방 안에서 지성의 옷을 챙겨주던 지우가 그의 말을 듣고 노기등등하게 뛰쳐나왔다.“야. 너 그 부질 없는 입 다물어!”남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우를 바라보았다.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하지만 지성에게는 그저 무서울 따름이었다.지성은 긴장한 채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TV를 계속
지우가 휴대전화와 가방을 들고 일어서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래. 그럼 나 간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남태준의 옆을 지나갔다.남태준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고 그녀가 병실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지우는 그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저번에 강제로 그녀의 몸을 가지려고 해서 그녀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요 며칠 동안 그는 끝없는 번뇌와 후회 속에 살았다.그때 지성이 가방을 들고 남태준 앞으로 다가왔다.“형. 가요.”남태준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내가 들게.”지성은 크게 기뻐했고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마워요. 형.”차에 오른 남태준은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잠시 후 지우가 뒤에서 따라오자 남태준은 속도를 줄이고 백미러로 지우가 스쿠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약간 멍해졌다.지성이 그런 남태준의 상태를 눈치채고 말했다.“누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매일 다니는 길이라 아주 익숙해요. 조금 있다가 앞쪽 길목에 도착해서 오솔길로 빠지면 누나가 우리보다 훨씬 빨라요.”남태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지성은 힐끔 남태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사실 우리 누나가 가끔 사납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착하고 어질어요.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사람 잘 챙길 줄 알고 성실하고 선량한 편이에요.”남태준이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알아.”“아주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병에 걸리셨을 때, 난 대학생이었고 누나 혼자 힘으로 이 집안을 지켰어요. 병원비며 빚이며 모두 누나 혼자 짊어졌어요.”남태준이 계속 응대했다.“알아. 지우 좋은 사람인 거.”지성이 궁금해서 물었다.“우리 누나 좋은 사람인 거 알면서 왜 헤어졌어요?”남태준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네 누나가 나 안 좋아해. 별로 느낌이 없대.”지성은 입을 떠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누나 사람 보는 눈은 개나 줘버렸나? 난 또 엄마가 두 사람
‘너 참. 한심하다!’지우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스쿠터를 돌려 힘없이 집 쪽으로 향했다.다음 날.지우는 더 이상 남태준을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 휴대전화를 보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그가 메시지 한 통이라도 보내길 바랐다.그를 찾으러 갈 용기와 핑계가 필요했지만 메시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지성의 퇴원을 앞두고 진효연은 집에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남태준을 부르라고 했지만 지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병원 병실.지성은 옷을 개면서 의자에 앉아있는 지우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물었다.“나 퇴원하는 거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폰만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어?”지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지성을 쏘아보며 나무랐다.“너 이제 움직일 수 있잖아? 옷 몇 벌 개인다고 안 죽어.”“누나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 정말 불쌍하다.”워낙 기분이 안 좋았던 지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괴로워 벌컥 화를 냈다.“누가 너더러 데려가래?”지성과 지우는 어릴 적부터 서로 치고받으면서 커왔고 어린이 된 지금도 자주 다퉜다.지성이 인정사정없이 말했다.“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바로 누나 같은 여자야. 지나가는 남자들 다 홀릴 것 같은 몸매를 지닌 것도 모자라 여자가 상냥하지도 않고 어질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고 사납고 악독하잖아!”지우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래 나 몸매 좋다! 부렵냐? 너처럼 깡마른 자식은 대나무 장대 같은 아내밖에 차려지지 않아!”“너!”지성은 화가 치밀어 상처가 아팠고 어두운 얼굴로 지우를 가리켰다.지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아니다. 너 같은 놈에게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라!”지성은 이를 악물었다.“누나. 말이 너무 심하잖아!”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지우와 지성은 모두 조용해져서 입구 쪽을 보았다문은 열려 있었고 남태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서 그들 남매가 다투는 것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