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인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의 말을 끊었다. “남하준 씨, 됐어요. 모든 게 명확해졌는데 우리도 이제 이 무의미한 결혼생활을 끝내야죠.”의미가 없다고?남하준은 심장이 찢어질 정도로 너무 아팠지만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서다인에게 다가가 책상 위의 이혼 합의서를 들고 펼쳐 보았다.서다인은 검은 펜을 꺼내 그의 앞에 놓고는 무기력하게 말했다.“사인하면 제가 제출할게요. 이제 같이 가정법원 한 번 다녀오면 돼요.”“나 다른 도시로 갈 생각이니 오래 끌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다른 도시로 간다고?정말 그와 깨끗하게 결별하고 싶은 걸까?남하준은 무겁게 이혼 합의서를 펼쳐보았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이 합의서는 불합리해. 다시 만들어.”서다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억울하게 불평했다.“왜 불합리하다는 거죠? 우리 사이에는 아이도 없고 당신 재산은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아요. 모두 당신에게 유리한 조건인데 왜 불만이죠?”남하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다인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그래서 말이 안 되는 거야. 나 남하준이 이혼하고 전 부인한테 한 푼도 안 줬다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다들 나를 어떻게 보겠어?”서다인은 그가 이렇게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길 줄 몰랐다. “그래요. 그냥 조금만 나눠줘요.”남하준은 매우 짜증 나서 서다인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등나무 의자에서 끌어 올렸다. 말투가 극도로 불쾌했다.“그렇게 빨리 이혼하고 싶어?”서다인은 그가 매우 가소롭다고 생각했다.분명히 그는 마음속으로 백하린을 사랑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녀에게 그런 메시지를 보냈다.이혼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둘의 사랑을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서다인은 다급하게 고개를 쳐들고 단호하게 남하준을 바라보며 말했다.“맞아요.”순간 남하준은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동맥이 희미하게 뛰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그때 남하준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서다인의 손을 떼고 휴대폰을 꺼내 모니터를 본 뒤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저쪽에서
휘영청 밝은 달빛이 나뭇가지 끝을 통해 베란다로 쏟아져 들어오고 빛 그림자는 얼룩덜룩하고 희미하고 쓸쓸했다.방안은 캄캄했고 서다인은 뒤척이다가 한밤중에야 잠이 들었다.하지만 편하지 않은 하룻밤이었다.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은 더욱 어지러워져 악몽에 시달리는 듯했다.다섯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서늘한 바람이 불어 피부가 따갑고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다인아! 너무 추워. 엄마 아빠 좀 구해줘!”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오고 희미한 것이 허허벌판의 유령 같아 소름이 끼쳤다.그러나 그녀는 구조 요청을 듣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다인아! 뒤돌아보지 말고 얼른 뛰어! 어서!”그녀는 공포감에 젖어 어둠 속을 질주했고 온몸이 떨렸고 무서운 어둠의 기운이 밀려왔다.갑자기 날카롭고 독살스러운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죽여! 저 여자를 죽이면 재산은 모두 너의 것이야. 얼른 죽여!”악마처럼 음산하고 악랄한 눈빛이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나더니 피범벅이 된 검은 손이 그녀를 향해 뻗쳐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순간 숨이 가빴다.“살려주세요.”서다인은 벌떡 일어나 앉아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마시고는 방의 장식을 보고 나서야 두려움에 떨던 마음이 풀렸다.밖에 아침 햇빛이 찬란했다.알고 보니 악몽을 꾼 것이다.뜻밖에도 부모님이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꿈을 꾸었다.하지만 우습게도 그녀의 부모님은 단지 그녀에게 돈만 요구했다.온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이불을 젖고 침대에서 내려와 깨끗한 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씻었다.30분 후.서다인은 캐주얼 차림으로 방에서 나왔다.그녀가 계단을 내려올 때 희미하게 백하린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녀는 발걸음을 한 번 떼고 소리를 따라 걸어갔다.거실에서는 백하린이 허윤미와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허윤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하린아,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짓 하지 마. 너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네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떡하니.”백하
서다인은 전화를 받아 귓가에 댔다.“여보세요.”맞은편에서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인아, 나 지우. 나 기억해?”서다인은 어리둥절했다.“지우?”거실의 백하린은 어렴풋이 그 이름을 듣고는 얼굴빛을 약간 흐리며 긴장한 듯 귀를 쫑긋 세웠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네 엄마를 통해 네 번호를 받았어.”갑자기 귓가에 있던 서다인의 휴대폰을 누군가가 후려쳤다.그녀는 경악하며 돌아서서 침착한 얼굴로 휴대폰을 빼앗은 사람을 바라보았다.바로 백하린이었다.살짝 긴장한 백하린은 서다인의 휴대폰을 들고 뒤로 물러서더니 손가락으로 화면을 그어 통화를 끊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언니한테 사과하고 싶어. 나랑 하준 오빠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서다인은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백하린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또 무슨 음흉한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지 생각했다.“돌려줘.”서다인은 화를 내며 손을 내밀었다.허윤미도 백하린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하린아, 왜 다인이 휴대폰을 뺏어? 방금 통화 중이었는데 그렇게 뺏으면 어떡해?”백하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긴장한 얼굴로 허윤미를 돌아보며 뻣뻣한 미소를 지었다.“나 그냥 언니한테 사과하고 싶어서요. 하준 오빠가 나를 선택했으니 이 결혼생활도 조만간 끝날 거잖아요. 너무 미안해서요.”서다인은 이 여자가 정말 징그럽다고 생각했다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손을 뻗어 자신의 휴대폰을 되찾았다.백하린은 놀라서 서다인의 휴대폰을 뺏으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의 휴대폰을 뺏어도 중학교 동창이 그녀를 찾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서다인은 휴대폰을 돌려받고 두말없이 거실을 나섰다.백하린 같은 비열하고 파렴치한 인간은 최대한 멀리하고 싶었다.별장을 나온 후, 서다인은 방금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상대방은 곧바로 전화를 받더니 즉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인아, 제발 도와줘. 나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 너한테 연락한 거
서다인은 과일 바구니를 사고 지우가 준 주소를 따라 종양과 병동에 도착했다. 그녀는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키며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서다인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좁은 병실에는 여섯 개의 병상이 있었고, 침대마다 환자들이 누워있었다. 서다인은 누가 지우의 아버지인지 알 수 없었다.그때, 한 여자가 코너에서 나타났다. 검은색 테 안경을 쓰고 있었고 아름다운 외모에 손에는 물병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서다인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유일한 젊은 여자였기에 서다인은 그녀가 지우일 거라고 생각했다. 서다인은 다가가서 미소 지으며 물었다. “지우 씨 맞죠?”지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누구시죠?”“저는 서다인이에요.” 지우는 멍한 눈으로 서다인을 바라보면서 몇 초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서다인은 급히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있는 중년 남자를 보았다. 그는 매우 수척해 보였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 서다인은 작은 목소리로 지우에게 말했다. “불편하지 않으면 우리 밖에서 이야기할까요?”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물병을 내려놓은 후 아버지의 커튼을 잘 닫고 서다인을 따라 병실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은 창가에 서서 멀리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우가 먼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서다인은 또 무슨 속임수를 쓰려는 거예요? 아무나 데려와서 자신인 척하고 또 기억 상실인 척해서 돈 안 갚으려고?”서다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우 씨, 당신이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예전 일은 정말 기억이 안 나요. 3년 전에 기억을 잃었거든요.”지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냉소적으로 웃었다. “머리를 바꿨어?”“의사들은 내가 성형 수술을 했대요.” 지우는 놀라며 서다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어디를 그렇게 많이 고친 거야? 점점 자연스럽고 예뻐졌네. 예전엔 마녀 같은 뾰족한 턱이었는데, 이제는 둥글둥글하고 고등학생 같잖아. 요즘 사람들
서다인은 급히 설명했다. “이혼 문제가 아니라, 잠깐이면 돼요.”“말해봐.” 남자의 목소리는 약간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차가웠다.서다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지우를 바라보았다. 지우는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에 불안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서다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남하준 씨, 당신 카드에서 1억 2000원을 꺼내도 될까요? 제가 빌리는 거예요. 나중에 꼭 갚을게요.”남하준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카드는 당신 거야. 안에 있는 돈 마음대로 써도 되고 갚지 않아도 돼.”이 말에 서다인은 마음이 따뜻해졌다.“고마워요.”남하준이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서다인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 속에 있었다. 서다인은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이때 남하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려운 일이라도 생겼어?”서다인은 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회사 일로 바쁜 그에게 굳이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아니에요,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서다인은 천천히 말했다.“알았어.” 그가 대답했다.“그럼 끊을게요.” 이때 남하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잠깐만.”“네?”남하준은 말하려다 멈추고, 잠시 침묵했다. 잠시 후, 그는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알겠어요.” 서다인은 괜히 마음이 무거워져 얼른 전화를 끊었다. 단 한 통의 전화가 그녀의 마음을 이토록 아프게 하다니...남하준은 유리창 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부서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회의 중간에 절대 전화를 받지 않던 남하준이 왜 이렇게 긴장하며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직원들은 조용히 남하준이 회의를 시작하기를 기다렸다.병원 쪽에서, 서다인은 지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원금과 이자를 포함해 2000만 원을 갚을게요. 그리고 아버지 치료비와 빚 갚는 데 쓸 1억 원을 더 빌려줄게요
서다인이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그녀는 백하린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늦게 돌아왔다. 하지만 백하린은 아직 집에서 가지 않았다.서다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백하린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다인 언니, 돌아왔어?”그 언니라는 말이 서다인에게는 너무나 역겹게 들렸다. 거실에는 남하준의 부모님과 몇몇 형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서다인은 너무 차갑게 대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응이라고 대답했다.이때 허윤미가 서다인을 불렀다. “다인아, 이리 좀 와봐.”서다인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다가갔고, 큰형님 유가영이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백하린도 함께 앉았다.현장의 분위기는 어색했다. 서다인은 시부모님의 난처한 표정과 형님들의 불편한 눈빛을 보며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허윤미가 입을 열기 전에, 서다인이 먼저 말했다. “어머님,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허윤미은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네 아버지가 말하는 게 좋겠어.”남창민은 잠시 멈칫하다가 아내를 째려보며, 유가영에게 말을 넘겼다. “네가 말해라.”유가영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요?”서다인은 그들이 책임을 떠넘기는 것을 보며 좋은 소식이 아님을 직감했다. 아마 또 이혼을 강요하는 것일 것이다. 그녀는 지쳐서 힘없이 말했다. “말씀하세요, 괜찮아요.”모두가 눈빛을 피하고 있을 때, 유가영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동서, 사실은 말이야, 하린 씨가 우울증에 걸렸어. 의사 말로는 중증이어서 감정이 매우 불안정하대.”서다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비웃었다. 백하린의 중증 우울증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다니, 참 놀라운 일이었다. 유가영은 계속 말했다. “집에는 연세 많은 어르신만 계시지. 할머니는 친구들과 자주 여행을 다니고,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으셔도 아직 가업을 관리하시고, 삼촌은 매일 병원 일로 바쁘고. 그래서 하린 씨 혼자 집에 있으면 우울해지기 쉬워...”서다인은 유가영이
서다인은 공부를 하다 갑자기 몇몇 책의 내용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예전에 읽었던 책들인 듯했지만, 다시 보니 기억이 더욱 선명해졌다. 남씨 집안의 가사 도우미들은 깜짝 놀라서 수군거렸다.“사모님 정말 학구열이 대단하신 것 같아. 이 반달 동안 심리학 책만 해도 백 권은 읽은 것 같은데.”“밤에도 불을 켜놓고 공부하시던데, 심리상담사 자격증이라도 따려는 걸까? 심리치료사 되시려는 건가?”“아무튼 정말 열심히 공부하셔. 내가 방에서 청소하는 동안 전혀 눈치 못 채시다가, 물 마시러 나왔을 때 나를 보고 깜짝 놀라셨잖아.”“맞아, 정말 대단해.”서다인은 백하린 같은 여자의 심리를 연구하고 어떻게 반격할지를 고민하는 동안, 백하린이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모든 사람들 눈에 백하린은 착하고 예의 바르며 이해심 많은 여성으로 보였다. 공손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그녀는 시부모님께 마사지도 해드리고 보양식도 챙겨드렸다. 그리고 형님들에게 명품과 고가의 선물을 주었으며 도우미를 도와 집안일까지 함께 해 남 씨 집안 모든 식구들이 그녀를 좋아했다.백하린은 자신을 완벽하게 포장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서다인은 도저히 그녀와 비교될 수 없었다.저녁쯤 서다인은 도우미의 부름에 시큰거리는 눈을 비비며 서재에서 나와 저녁을 먹으려고 내려갔다.부엌에는 백하린이 밥그릇을 놓고 국을 퍼주며 이 집안의 며느리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백하린은 남창민에게 국을 건네며 말했다.“아저씨, 이건 제가 직접 끓인 꽃게 해삼 오골계탕이에요. 한번 맛보세요.”남창민은 기뻐하며 국을 받아들었다. “고맙구나. 아저씨는 네가 요리도 잘하고 국도 이렇게 잘 끓일 줄 몰랐어. 정말 최고의 솜씨다. 어떤 남자가 너를 아내로 맞이할 진 몰라도 행복할 거야.”허윤미도 거들었다. “맞아. 하린이는 정말 현모양처야.”서다인은 고개를 숙이고 국을 마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하린은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서다인을 바
‘짝사랑이란 혼자서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이제야 서다인은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움에 목이 메면서도 마음속에서 수없이 그를 바라보면서도 쳐다보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 아프고 원망스러우며 심지어 미워하면서도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남하준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마음은 긴장과 설렘으로 가득 찼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해야 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려 노력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남하준이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백하린은 환호하며 달려가 “하준 오빠!”라고 외쳤다. 남하준은 피할 새도 없이 그녀의 품에 안겼다.그녀의 손이 그의 허리를 꼭 감싸자 불쾌함이 밀려왔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의 손을 뒤로 돌려 잡아떼어냈지만 백하린은 놓아주지 않았다. “하준 오빠, 정말 보고 싶었어요.”허윤미는 따뜻한 미소로 맞았다. “준아, 왔니? 미리 연락도 없이 와서 깜짝 놀랐어.”남하준은 차분하게 인사를 나누며 모든 사람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다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거실을 둘러보다가 멀리서 밥을 먹고 있는 서다인을 발견했다. 서다인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국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만 고개를 들어도 그와 눈이 마주칠 텐데,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남하준은 그녀의 무관심에 깊은 실망감을 느끼고는 백하린을 밀쳐내며 한숨을 쉬었다.백하린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그의 목에 손을 감고 다가가려 했다. 그때, 류청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를 강하게 끌어냈다. “백하린 씨, 제발 도련님한테 매달리지 마세요. 도련님께서 다치셨어요.”남하준이 다쳤다는 말을 듣자 모두 놀라서 걱정스레 물었다. “어머, 준아. 어디를 다쳤니? 많이 다쳤어? 응?” 현장은 아주 시끄러웠다.서다인도 남하준이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멈칫했다. 마음이 아파왔고 긴장되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그쪽을 바라보았다.그러나 백하린이 그렁그렁한 눈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