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영이 비꼬며 말했다.“다인이가 자기보다 재능있는 게 탐탁지 않은가 보지? 전문가에게 이미 검증 받았어. 이건 지완의 진품이 확실해. 이제 어떡해? 다인이가 몸값이 수십억에 달하는 자선 화가라는 걸 인정해야겠네?”남희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이미 감정했어요.”최서윤은 얼굴빛이 갑자기 변하고 화가 잔뜩 났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서다인은 약간 난처해 보였다.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을 유가영이 이렇게 확신에 차 말하니 너무 부끄러웠다.이때 남하준은 입꼬리를 꼬며 여유로워 보였다.집안의 누군가가 마침내 그의 아내의 장점을 알아주었다.남연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우리 가윤이는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웠어. 뭣도 모르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그려 감히 그림을 수십억 원에 팔아?”유가영이 반박했다.“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려도 그림이 수십억 원에 팔리는데 고모님의 수양딸이 그린 건 얼마나 팔리나 몰라요?”남연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남희준은 어수룩하게 웃으며 그림을 말며 말했다.“지금 대학생이 얼마나 많은데. 대학생 학력으로 취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자기가 그린 그림을 혼자 감상하는 수밖에 없죠.”화가 나서 얼굴이 파랗게 질린 남연희는 갑자기 옆에 피아노가 있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우리 가윤이는 피아노도 칠 줄 알아. 얼마나 잘 친다고!”남연희는 말하면서 피아노 쪽으로 온가윤을 끌고 갔다.“가윤아, 네 실력을 보여줘 봐.”온가윤은 거절하지 않고 거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살짝 허리를 굽히더니 말했다.“그럼 한 곡 올리겠습니다.”말을 마친 후, 그녀는 앉아서 그럭저럭한 피아노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최서윤은 음악 가문 출신이라 음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들으면 들을수록 눈살을 찌푸리며 시큰둥한 기색을 보였다.다른 사람들은 피아노에 대해 잘 알지 못해 곡이 그런대로 듣기 좋고 매끄럽다고 생각했다.연주가 끝나자 남연희는 감격에 겨워 박수를 치며 자화자찬했다. “우리 가윤이 정말 대단해. 피아노
서다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유가영이 다가가 남하준에게 ‘내가 처리할 테니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그리고 서다인을 끌고 정의롭게 말했다.“다인아, 겁먹지 마. 그냥 생일 축하곡이라도 들려주자.”서다인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저 못해요.”유가영은 서다인의 귀에 기대어 중얼거렸다.“걱정하지 마. 피아노에 이미 녹음된 버전이 있어. 그냥 아무렇게나 연주해. 내가 곡을 틀어줄게. 고모님한테 얕보이지 마.”서다인은 피아노 쪽으로 끌려갔고 그녀는 힘없이 남하준을 돌아보았다.하지만 남하준은 꼼짝도 하지 않고 소파에 기대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유가영을 믿고 있었다.기억을 잃은 3년 이래, 서다인은 처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지만 위의 건반 위치가 그렇게 익숙하다는 것을 발견했다.유가영은 피아노로 생일 축하 노래를 몰래 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괜찮아.”최서윤은 그녀의 속임수를 간파한 듯 일어서서 말했다.“잠깐만요.”모두가 최서윤을 쳐다보았다.최서윤은 서다인에게 다가가 피아노 선반에 있는 두툼한 악보를 내밀었다.“여기서 아무 곡이나 골라. 단 생일 축하 연주곡은 안 돼.”말을 마친 후 그녀는 녹화 버튼을 꺼버렸다.유가영은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분개하여 말했다.“동서, 사람을 괴롭혀도 분수가 있지. 다인이가 동서한테 뭐 잘 못 했어? 대체 왜 그래?”최서윤은 오만하게 코웃음을 쳤다.“형님, 제가 언제 다인이를 괴롭혔어요? 그냥 아무 곡이나 연주하라고 했죠. 가장 쉬운 곡을 연주해도 되잖아요.”“그게 괴롭힌 거지!”“그럼 그런 거로 하죠.”두 사람이 다투고 있을 때 서다인은 이미 악보를 뒤지고 있었다.기억을 잃은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악보를 본 것이다.뜻밖에도 음표 하나하나를 다 볼 수 있고 또렷하게 그들의 키를 알고 있었다.그녀는 악보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더니 두 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머리는 텅 비었지만 몸의 근육이 기억하고 있었고 그녀의 손가락은 어느새 악보의 리듬에 따라 움직였다.피아
유가영은 의기양양하게 돌아서서 거실에 있는 남연희를 향해 비웃었다.“고모님은 다인이가 수양딸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우세요?”“난.”남연희는 말문이 막혔다.남하준은 천천히 일어나 피아노 쪽으로 다가가 서다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우리 먼저 방으로 가자.”서다인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그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갔다.유가영은 또 남연희와 말다툼을 했고 최서윤은 화가 나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화가 잔뜩 난 채 소파 앞으로 가서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남영준을 못마땅하게 걷어찼다.“더 듣고 싶어요? 안 일어나고 뭐 해요?”남영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따라갔다.둘째 내외는 서로를 쳐다보며 아직 꿈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했다.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서다인이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그때 남창민이 허윤미에게 속삭였다.“여보, 우리 작은 며느리가 이렇게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네. 우리 엄마의 안목이 좋았던 거야.”허윤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 저도 깜짝 놀랐어요. 유명한 자선 화가일 뿐만 아니라 대단한 피아니스트라니.”남창민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그림이나 음악의 예술적 조예가 이렇게 깊다니. 특히 그림은 명성이 자자한 지완 화가이지만 그런 재능으로 돈을 벌지 않고 단지 취미 생활로 하는 것 같아.”“그럼 다인이가 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을까요?”“글쎄. 하지만 소문에 떠도는 그 끔찍한 흑역사는 틀림없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 같아.”허윤미도 동의하며 분개해서 말했다.“백프로 헛소문이에요. 우리 며느리가 얼마나 재능도 넘치고 얼굴도 예쁜데. 절대 남자에 기대어 돈을 벌 애가 아니에요.”남창민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그래, 앞으로 누가 감히 우리 막내며느리를 욕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방 안.남하준이 문을 닫았다.서다인은 방 안에 서서 남하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여전히 충격에 휩싸여 있
남하준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며 서다인은 호기심에 물었다.“하준 씨, 전에도 권위적인 감정서가 있었는데 왜 계속 내가 서다인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거죠?”남하준의 깊은 눈망울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요리도 못하고 집안일도 못 하는 여자가 피아노를 치고 꽃꽂이 예술을 알고, 차뿐만 아니라 화학 지식, 여러 나라 언어를 알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보는 취미가 있는 여자는 재벌가 딸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절대 빈민가에서 자란 여자는 아니야.”서다인은 그의 말이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문득 남하준은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고 논리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많은 사람이 그녀의 과거를 듣자마자 바로 편견을 갖고 그녀가 분명 풍자적이고 타락한 나쁜 여자일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남하준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를 존중하고 있었다.지금까지 그녀의 과거를 깔보고, 공격하고, 무시한 적이 없었다.서다인의 몸은 살며시 남하준에게로 다가와 고개를 젖히고 일말의 기대와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하준 씨, 만약...”남하준이 고개를 숙였다.“뭐?”서다인은 갑자기 머리가 팽팽해졌고 등에 땀이 나고 용기 내 고백하려고 목소리가 가늘어졌다.“만약 내가 서다인이 아니라면...”남하준은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아니라면?”“그럼... 하준 씨가...”인내심 있게 그녀의 말을 기다리던 남하준은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서다인의 목구멍에 걸린 목소리와 심장 박동은 더욱 강렬해졌고 그녀는 긴장하여 손바닥에서 땀까지 흘렸다.‘그럼 당신이 날 조금 좋아하지 않을까요?’하고 싶은 말이 서다인의 머리를 한 번 스치자 귀뿌리가 뜨거워지고 볼이 붉어졌다.그녀는 결국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하고 다른 말을 했다.“그럼 내 가족을 찾아줄 수 있어요?”남하준의 눈에는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그가 기대했던 물음이 아니었다.자신의 오해에 난감해진 남하준은 뜨거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물론이지.”그
그녀는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한참 울리고 끝날 무렵, 연결되자 반대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더... 더... 더.”“젠장. 이번에도 망했네.”“여보세요! 누구세요?”어머니의 욕설을 듣던 서다인은 가슴이 답답해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나 다인이에요.”진화연의 말투는 순간 부드러워졌다.“아이고, 우리 딸. 요즘 건강은 어때? 그 할망구는 건강하고?”서다인은 가족에게 혼인 신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가족들은 그녀가 수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는 줄 알았다.“다 좋아요.”서다인은 덤덤하게 말했다.진화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휴, 그런데 내 상태가 별로 안 좋아. 하루하루가 다르게 혈압도 높고 혈당도 높아. 최근에는 풍습까지 도져서 밤새도록 잠을 잘 자지 못하여. 네 아빠는 술 퍼마시고 돌아와 날 때리고. 딸아. 엄마는 요즘 너무 힘들단다. 네 철없는 오빠는 빚만 지고 여기저기 숨어다니느라 나한테 한 푼도 주지 않았어.”“풍습이 도져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아파서 난 일을 할 수가 없어.”“너희 아버지는 밤낮없이 술을 마시고 술주정만 하지. 난 어떻게 사니?”“딸아...”서다인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알겠어요. 이따가 생활비 보내드릴게요.”“소중한 딸, 고마워.”진화연은 감격에 겨웠다.“엄마, 나 부탁이 있어요.”“모녀 사이에 부탁이라니. 뭔데 그래?”“나랑 병원에 좀 다녀와요.”진화연은 당황했다.“너 어디 아파?”“엄마, 나...”서다인은 입가에 맴돌았다가 막혔다.진화연은 계속 서다인을 얌전하고 효심이 밝고 상냥하고 이해심이 많게 잘 자랐다고 칭찬하며 그녀를 매우 좋아했다.그런데 갑자기 DNA 재검사를 제안한다면 진화연은 분명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이렇게 착하고 효도하는 딸을 어떻게 날려 보낼 수 있겠는가?서다인은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엄마, 나 면역 질환에 걸린 것 같아요. 의사도 확신이 안 서서 우리 가족이 이 방면의 유전자를 가졌는지 검사하고 치료하겠대요
백씨 가문 별장.남하준의 차가 별장의 정원 밖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는 초조하게 차에서 내려 별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으리으리한 홀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가죽 소파에는 백발이 성성한 두 노인과 그들의 양아들 백인호가 앉아 있었다.“하준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백진은 놀라서 일어섰다.남하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깍듯이 인사했다.“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여은수는 벨벳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내가 하준이에게 오라고 연락했어. 우리 손녀딸이 죽으려고 하는데 당신은 아직도 그렇게 모질어?”백진은 연세 가득한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할망구가 왜 이래? 하준이가 얼마나 바쁜데 애를 귀찮게 해? 그럼 하준이 부인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여은수는 이를 갈며 화냈다.“난 몰라. 난 내 손녀만 잘 살면 돼.”백진은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이 사람이...”남하준은 걱정스레 물었다.“할아버지, 할머니. 하린이 좀 어때요?”백진은 한숨을 내쉬었다.“손목을 몇 번 그어서 피 몇 방울 떨어뜨렸을 뿐이지 죽지 않았어.”여은수는 백진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이 늙은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린이 아직 어려. 잘못하면 천천히 타이르면 되지. 애를 반성하라고 구금하는 것도 모자라 하준이에게 연락하지 못하게 휴대폰까지 빼앗아?”“하린이가 하준이를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어디 쉽게 포기가 되겠어? 당신이 오랫동안 애를 가둬서 우울하게 만들었잖아? 의사도 그랬어. 하린이 심한 우울증이라고! 지금 시도 때도 없이 자살하고 싶어 한다니까.”“이 늙은이, 내 하나뿐인 아들과 며느리가 다 죽었는데 이제 남은 귀한 손녀까지 죽이려고? 대를 끊을 생각이야?”가장자리에 앉은 백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색이 어두웠다.“닥쳐, 인호가 여기 앉아 있는 거 몰라?”여은수가 울먹이며 말했다.“당신이 입양한 자식이지 내 자식 아니야!”백진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말다툼은 이 노파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
두 명의 의사가 황급히 달려들었다.“도련님, 아가씨께서 지금 매우 불안정합니다. 더 이상 자극하시면 안 됩니다. 빨리 안아주시고 위로해 주세요.”남하준은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펑펑 우는 백하린을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순간 손을 뻗어 백하린을 품에 안으며 위로했다.“울지 마. 바보 같은 짓도 하지 말고.”백하린은 남하준의 품에 안겨 흐느끼며 말했다.“오빠 진짜 잊은 거예요?”“내가 외국으로 떠날 때 공항에서 나 배웅해 주면서 나한테 일찍 연애하지 말고, 오빠를 잊지 말고, 커서 꼭 돌아와야 한다고, M국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잖아요.”“평생이 걸려도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했으면서.”“그런데 내가 돌아왔는데 왜 나와 결혼하지 않는 거냐고! 흑흑...”헤어진 아픔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남하준이 당시 얼마나 이 여자를 사랑했는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그는 백하린에게 그 당시의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 설렘도 없고, 두근거림도 없고, 긴장도 없고, 강렬한 충동도 없고, 이끌림도 없고, 남녀 사이의 욕망도 없다.어쩌면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마음가짐과 감정이 변할지도 모른다.또 어쩌면, 그가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는 쓰레기일지도 모른다.남하준은 백하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생을 달래듯 사과했다.“미안해, 하린아.”남하준은 하루 종일 백씨 가문에서 백하린의 곁을 지켰다.저녁이 되자 그는 서다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밤 일이 좀 있어서 집에 안 들어가니까 일찍 쉬어.]서다인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도 여전히 괴로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다음날 점심.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해 어두웠고 공기는 매우 건조하고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웠다.병원 정문에 서서 기다리던 서다인의 마음은 바위처럼 무거웠다.진화연은 병원 현관 기둥에 물렁뼈처럼 기대어 성가신 표정을 지었다.“다인아, 대체 누구를 기다린다는 거야? 얼른 들어가자. 번호표 뽑으려면 줄 서야잖아.”얼마나
서다인은 걸어서 남씨 저택으로 돌아왔고, 두 시간 동안 비를 맞고 방에 들어갔더니 녹초가 되었다.샤워 후 긴 머리를 말리지 않고 맥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잠이 들어야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하루 종일 그녀는 방문을 나서지 않았고 배고픔도 느끼지 않았다.한밤중이 되어서야 그녀는 몸이 뜨겁고 불편함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천천히 깨어나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남하준에게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들었다.마침 그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는 급히 확인했다.[나는 아직도 하린이를 사랑하고 있어.]이 문자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뼈에 사무친 아픔.눈물이 둑이 무너지는 홍수처럼 끊임없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낀 서다인은 서둘러 휴대폰을 내려 머리를 높이 쳐들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그녀는 심호흡하며 참았다.그러나 숨결은 칼을 찬 것처럼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통증이 그녀를 더욱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들었다.목이 따가워나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한참을 추스른 후에야 서다인은 울음을 참으며 눈물을 닦았다. 휴대폰을 들고 답장했다.[알겠어요. 언제 가정법원에 갈 수 있는지 알려줘요.”남하준: [난 이혼하든 안 하든 괜찮아. 네 뜻에 달렸어.]서다인은 이 말을 보고 마음이 싸늘해졌다.이혼하든 안 하든 괜찮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일까?그녀의 뜻에 달렸다니?‘나쁜 놈, 내 감정 따위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거야? 내 청춘을 이 희망 없는 결혼에 낭비하는 게 아니었어.’서다인은 침대에서 내려와 약을 찾으려고 휴대폰을 껐다.그녀가 막 침대에서 내려왔을 때 머리가 어지럽고 두 발이 나른해지며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넘어졌다.“아!”두 손을 바닥에 세게 문지르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온몸에 퍼졌고 그녀는 찬 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온몸에 힘이 없고 뼈가 쑤시는 것을 느꼈다.몸의 고통은 그녀의 마음의 1만분의 1도 안 되었다.큰 무력감과 박탈감을 느꼈다.그녀
유승아는 조금 경악했다.“서연이도 있었네?”그러자 백건이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다음 달 결혼에 대해 아주머니가 너무 재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너와 의논하려고 왔어.”남서연은 괜히 애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승아는 남서연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서연아, 나 건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너...”남서연은 급히 말했다.“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전 먼저 가볼게요.”그녀가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백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너 갈 필요 없어. 여기서 들어.”남서연은 경악했고 유승아는 얼굴이 굳어지며 난처한 태도로 말했다. “건아, 그건 좀 아니지. 우리 두 사람 얘기야. 서연이는 외부인이고.”백건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외부인이 아니라 내 아내야.”남서연은 깜짝 놀랐고 유승아는 더욱 경악했다.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백건을 바라보았다.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말에 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벌써 그의 아내가 되는 건가?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두 사람... 만나기로 한 거야?”남서연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자 백건이 또박또박 대답했다.“응. 몇 분 전에 결혼까지 약속했어.”유승아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짐짓 대범한 척 말했다.“축하해.”“소파에 가서 앉아서 말해.”백건은 남서연의 손을 잡고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유승아도 따라가 앉더니 침울하게 숨을 푹 내쉬었다.“우리 집 쪽 친척들은 이미 청첩장을 받았어. 다들 축하 전화를 걸어오고 있어. 오늘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나를 찾아오셔서 결혼식은 반드시 거행될 거라고 하셨어. 어떻게든 너를 잡아서 교회에 묶어둘 테니까 안심하고 너의 신부가 되라고 하셨어.”백건이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유승아는 남서연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생각해? 오랫동안 네 여자친구였으니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잖아.”백건은 서둘러 남서연을 바라보며 나지
그녀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사진은 무엇일까?여자 사진?남서연은 기분이 가라앉아 말했다.“나 먼저 돌아갈게요.”그러자 백건이 그녀에게 다가갔다.“나랑 같이 집에 가서 어른들께 상황을 설명해 드리자.”“안돼요.”남서연은 긴장감에 못 이겨 안절부절했다.“일단 아직은 안돼요. 내가 먼저 가서 가족들 생각을 알아보고 다시 결정해요.”“어떤 상황이든, 어떤 결과든, 나 혼자 감당할 거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서두르지 말고 우리 천천히 얘기해요. 내가 우리 가족들 설득하고 오빠는 오빠 가족들 설득해요. 네?”백건은 여전히 변수가 있을까 봐 걱정했다.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행동해 남서연을 놀라게 해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그래. 네 말대로 해.”남서연은 그가 덮은 앨범을 가리키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덤덤하게 물었다.“누구 사진이에요?”백건은 고개를 돌려 협탁을 보더니 마음이 찔려 말했다.“내 사진이야.”그건 백건이 전에 몰래 찍었던 남서연의 사진이었다.결혼 후에만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가 한 모든 것들이 오랫동안 계획한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어머니의 강력한 방해를 무릅쓰고 그는 강력한 권한을 동원하여 인사팀을 통해 남서연의 면접을 합격시키고 그녀를 ND에 무사히 입사하게 했다.또 직권을 이용하여 남서연을 데리고 해외 출장을 갔다. 그 목적은 바로 남서연을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만든 다음 그 기회를 빌려 잠자리를 갖고 그녀를 임신시키는 것이었다.두 차례의 성관계에도 보호조치를 하지 않은 것도 그녀를 임신시키기 위함이었다.그는 감히 남서연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남서연이 그를 비열하다고, 수단이 더럽다고, 파렴치하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결혼하고 나서 다시 그녀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천천히 용서를 빌어야 했다.남서연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백건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발이 미끄러질까 봐 보호했다. 남서연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호하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서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녀는 초롱초롱한 큰 눈으로 물끄러미 백건을 바라보며 머리가 하얘졌다.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백건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 큰 유혹이었다.그녀가 당황하고 있을 때, 백건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왼쪽 무릎을 그녀 앞에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놀란 그녀는 소파에 붙으며 경악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뜨거운 눈빛으로 부드럽게 말했는데 매우 절실해 보였다.“서연아, 나와 결혼해줘. 응?”‘지금 아이를 위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한 거야?’남서연은 아주 기뻤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괴롭고 불안했다.“두 집안 어른들 모두 찬성하지 않을 거예요.”“너만 원한다면 그런 것들은 전부 내가 알아서 해.”남서연은 차마 배 속의 아이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가족 모두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현실 생활에서 많은 부부가 선을 보고 결혼하니 먼저 결혼하고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결혼 후에 그녀가 잘 보인다면 백건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남서연은 멋진 미래를 상상하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감격에 겨워 붉어진 눈시울이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어지러운 숨결로 소파에 앉더니 남서연을 덥석 품에 끌어안았다.남자의 동작은 절박했고 강렬한 포옹에 그녀는 몸이 아팠다.남서연은 그의 등 뒤에 두 손을 널어놓고 턱을 그의 어깨에 괴고는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았다.귓가에 남자의 무거운 호흡과 함께 약간 울먹이는 쉰 목소리가 들렸다.“고마워. 서연아. 정말 고마워. 반드시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가 될게.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최선을 다해서 네게 가장 행복한 미래를 줄게.”남서연은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다.다만, 앞으로 어떻게 가족을 대해야 할까?아이 때문에 결혼하게 되면 백건은 앞으로 후회하지 않을까?
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슬픈 듯 중얼거렸다.“나 임신했어요.”백건은 심장이 움찔했고 온몸은 걷잡을 수 없이 흥분했다. 그는 제자리에서 거의 뛰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났다. 가슴의 흥분을 터뜨리기 위해 미친 듯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서연이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고? 나 아빠가 되는 거야? 서연이 아이의 아빠? 이거 지금 꿈 아니지?’그는 갑작스러운 행복을 애써 눌렀다.남서연은 그의 반응에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니 남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등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이 남자가 대체 어떤 마음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그녀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까?그녀처럼 망연자실할까?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남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책임지라고 찾아온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다만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에 오빠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요. 만약 수술하게 되면 나와 함께 가줘요.”백건은 무거운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순식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그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얼굴빛은 굳어졌고 말투는 엄숙했다.“뭐? 수술한다고?”남서연은 주눅이 들어 쳐다보며 말했다.“네. 혼전 임신은 안 돼요.”가족들이 만약 그녀가 혼전임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반드시 백건을 때려죽일 것이다.숨이 가빠진 백건은 두 손을 꼭 잡았고 엄숙한 말투에 약간의 온기를 더해 부드럽게 달랬다.“서연아, 아이는 포기할 수 없어. 내게 책임질 기회를 줄 수 없어? 나 좋은 아빠가 될게.”남서연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백건을 바라보며 멍해졌다.그녀의 생각과 달랐다.그녀는 백건이 그녀보다 더 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아이의 존재가 그를 위험하게 만들 테니까.백건은 긴장된 듯 입술을 오므리고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그리고 너만 괜찮다면 나... 좋은 남편이 될 수도 있어.”남자는 주먹을 문지르며 가늘게 떨릴 정도로 긴장했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남서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시주를 기
남서연은 복잡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저예요.”백건은 숨이 거칠고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말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다.그는 남서연이 무슨 일로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몰라 계속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지금... 시간 있어요?”남서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쭈뼛쭈뼛 물었다.백건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있어.”“잠깐 만나서 얘기할래요?”“좋아.”백건이 곧바로 대답하더니 또 물었다.“어디서 볼래? 데리러 갈게.”남서연이 생각해보니 밖에는 보는 눈이 많아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데리러 올 필요 없어요. 내가 오빠 집으로 갈게요. 반 시간이면 도착해요.”“좋아.”남서연은 전화를 끊고 일어서서 마스크를 쓰고 공중화장실을 나섰다.한편, 공항 가는 차에 타고 있던 백건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명령했다.“차 돌려서 집으로 가.”“대표님, 비행기 시간 이미 다 됐어요.”백건은 정색해서 말했다.“이번 행사 취소하고 바로 집으로 가.”하현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그 전화를 들으니 아마 남서연일 것이다.백건에게 새 시즌 발표회는 취소할 수도 있고 연기할 수도 있고 없어도 되는 일이다.그러나 남서연을 만날 어떤 기회도 그는 놓칠 수 없었다.하현우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30분 후.남서연은 산 중턱 별장에 와서 막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하현우가 이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공손히 인사했다.“서연 아가씨,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남서연은 살짝 놀랐다가 하현우인 걸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경치가 아름다운 화원의 앞마당을 지나 웅장한 큰 집으로 들어갔다.문은 열려 있고 백건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어 우아하고 멋스러우며 준수한 매력을 자랑했다.남자는 그윽한 눈동자로 남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를 다시 만난 남서연은 마음이 혼란스럽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음속에 토끼 한 마리가 숨
백건은 당황해서 화를 내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하현우는 침을 삼키고 목숨을 걸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 여자가 대표님과 관계를 맺은 후 연락을 끊었다면 아마도 대표님의 돈과 권력 때문에 감히 저항하지 못했을 거예요. 진짜 대표님께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백건은 화를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아니, 돈과 권력이 부족한 여자가 아니야.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하현우는 경악하더니 속으로 크게 흥분했다.‘뭐야? 대표님 설마 서연 아가씨와 잔 거야? 대단하네!’‘목숨을 걸고 남씨 가문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목숨을 바칠 정도로 위대한 사랑이라니.’하현우는 은근히 충고했다.“대표님, 어떤 여자들은 성격이 순하고 마음씨가 착해서 아무리 권위 있는 집에서 자라도 담은 작아요. 어려서부터 너무 잘 보호 받으며 자라서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거절할 줄도, 반항할 줄도 모르죠. 그래서 도망을 치죠.”백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심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거절하지 않으면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일방적으로 남서연에게 상처를 준 걸까?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해 일방적인 행위를 가한 그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아닌가?백건은 눈을 감았고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남서연은 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두 번의 잠자리로 인해 계속 괴로워하지 않았다.백건은 어쨌든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자였으니 아무리 쓰레기일지라도, 이미 일어난 이상 좋은 추억으로 여기기로 했다.그녀의 짝사랑도 욕망을 만족시킨 셈이었다.만약 백건이 그녀와 사귀고 싶지 않으면서 계속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여다혜가 말한 대로 그녀는 더 이상 타락해서는 안 되었다.남자는 여자와 달리 사랑이 없어도 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그녀는 백건의 전화를 받지 않고 그의 메시지에도 답장하지 않기 시작했다.그 후 백건은 포기하고 그녀를 찾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도 접촉이 많지 않았으니 남서연은 일
“남서연 씨는요?”직원이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서연 씨는 방금 가방을 챙겨 나갔습니다.”백건은 군말 없이 급히 몸을 돌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남서연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몇 번 울리더니 끊겼다.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남서연이 다시 끊었다.세 번 연속 시도한 후 결국 포기했다.백건이 1층 로비까지 쫓아갔지만 이미 남서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풀이 죽어 위층으로 몸을 돌렸다.종일 그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날이 저물자 창밖의 네온사인이 유리창에 비쳐 창 앞의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창문을 마주하고 하늘가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눈 밑은 번화한 경치였지만 그의 마음속은 황폐했다.그는 남서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하현우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미 10시예요. 퇴근 안 하세요?”백건은 침묵했다.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뒤덮어 섬뜩하여 그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하현우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이미 몰래 저녁을 먹었지만 집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무리 야근 수당이 있어도 또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는 내키지 않았다.하현우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대표님,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제가 도와드려요?”백건은 말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나갔다.하현우는 급히 옆으로 피했고 등이 뻣뻣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백건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는 쪼뼛쭈뼛 따라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고 깊고 어두운 눈으로 창밖 거리의 야경을 바라보았다.차를 몰던 하현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추측했다.“대표님, 혹시 서연 아가씨와 연락이 안 되세요?”고개를 돌려 하현우를 보는 백건의 눈빛은 차갑고 굳어 있었다.하현우는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더니 등
[좀 바빠요.][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응?][서연아, 처음에 너도 거절하지 않았잖아? 왜 이제와서 이래? 이거 무슨 뜻이야?][기다릴 테니 내려와. 아니면 내가 올라간다?]남서연은 백건이 보낸 몇 개의 메시지를 보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마음이 더욱 불안해져 여다혜를 돌아보았다.여다혜는 연애경험이 비교적 풍부해서 거의 감정 전문가인 셈이었다.남서연은 의자를 옮겨 여다혜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다혜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여다혜는 책상 위에 엎드려 졸면서 중얼거렸다.“말해.”“내 친구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를 계속 짝사랑했어. 근데 그 남자는 계속 그 친구에게 차가웠고 만날 때마다 일부러 숨었어. 마치 싫어하는 것처럼.”“나중에 내 친구가 커서 그 남자가 먼저 접근했고 아무 이유 없이 두 번이나 잤어. 그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여다혜는 번쩍 튕겨 일어나 앉더니 깜짝 놀라며 입을 가리고 남서연을 끔벅끔벅 바라보았다.“왜 그래?”남서연이 묻자 여다혜는 비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서연아, 너 나쁜 남자 만났구나.”“내가 아니라 내 친구라고.”“그래그래. 네 친구.”여다혜는 서둘러 말을 바꾸고 슬픈 듯 입을 납작하게 하고는 눈에는 동정이 가득했다.“네 친구 나쁜 남자 만난 거야. 정말 너무해. 대체 어느 개자식이야?”남서연은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 숨을 몰아쉬었다.“무슨 말이야?”여다혜는 그녀의 말을 바탕으로 분석했다.“네 친구는 커서 예쁜 여자가 된 게 틀림없어. 그래서 그 남자가 혹한 거지. 어렸을 때부터 네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자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 남자는 하반신으로 고민하는 수컷이니까.”남서연은 얼굴이 희끗희끗해지며 축 처져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차디찬 손을 맞잡고 위로했다.“서연아, 네 친구는 감정에 무지하고 세상 물정에 어둡고 순진해서 남자한테 속았을 거야.”“그런... 사람 아니야.”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해명했다.“그
끝난 후, 너무 수줍은 남서연은 백건이 어찌할 수 없는 틈을 타 재빨리 자신의 옷을 챙겨 입고 거의 도망가듯 뛰쳐나갔다.“서연아...”백건은 옷을 챙겨 입지 못해 따라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사무실을 뛰쳐나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숨을 헐떡였다.그녀가 디자인 부서로 돌아왔을 때 여다혜는 급히 걸어가서 책상을 두 손으로 받치고 그녀의 붉어진 얼굴과 약간 불그스름한 입술을 보았다.“서연아,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너 점심 먹었어?”남서연은 마음이 켕겨 감히 여다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먹었어. 혼자 먹었어.”“식당에서 너 못 봤는데? 그리고 평소에는 30분이면 다 먹더니 오늘은 왜 한 시간이나 걸렸어?”“나... 구내식당이 아니라 밖에서... 멀리 가서 먹었어.”여다혜는 불쾌해하며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왜 좋은 곳에 나는 안 데리고 갔어?”남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귓가에 있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다음에. 다음에 꼭 데리고 갈게.”여다혜가 깜짝 놀라 외쳤다.“너 움직이지 마.”남서연은 경악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여다혜는 그녀의 긴 머리를 쓸어올리고 귓불 뒤 목덜미에 닿는 위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물었다.“너 목에 왜 빨간 자국이 있어? 마크 같아.”“무슨 마크?”“키스 마크!”크게 당황한 남서연은 황급히 긴 머리를 풀어 목을 가리고는 화난 척 말했다.“함부로 말하지 마. 그냥... 긁은 거야. 모기한테 물려서 난 자국이야.”모기에 물린 것인지, 키스 마크인지 여다혜는 경험자로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더군다나 남서연은 지금 볼이 붉어지고 눈 밑에는 수줍음이 가득했다.여다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서연아, 너 정말 우리 오빠 안 좋아해?”“안 좋아해. 자꾸 엮지 마.”남서연이 나지막이 말하자 여다혜는 어깨를 으쓱하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돌아가서 희망이 없다고 오빠에게 말할게. 네 생각하지 말고 빨리 다른 여자 만나라고.”남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