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클럽 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술병을 맞은 남자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윤하경을 노려보았다.“이 미친년이 감히 나를 쳤어?”윤하경은 그를 흘끗 쳐다보더니,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무대를 내려가려 했지만 남자가 끈질기게 그녀를 붙잡았다.“X발, 사람을 때려놓고 그냥 가려고? 내가 호구로 보여?”중년 남자들은 대체로 이상한 자존심이란 게 있다. 남의 몸을 함부로 더듬을 땐 당연한 듯 굴더니, 정작 맞을 각오는 전혀 하지 않았다.윤하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술에 취한 탓인지 눈이 약간 흐려졌지만 혼자라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주위를 둘러본 뒤, 그녀는 최대한 차분한 척하며 말했다.“이제 놓지 않으면 내 친구가 오면 네가 더 곤란해질 텐데?”사실, 그녀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손에 묻은 피를 쓱 문지르더니 비웃었다.“웃기시네, 허세는.”“나, 너 처음 들어올 때부터 보고 있었어. 혼자였잖아.”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니까, 오늘 밤 나랑 잘 놀아보자고?”순간, 그녀는 도망칠 방법을 고민했다.그때 2층 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자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비록 클럽 조명이 어두웠지만 그녀는 이곳에서도 강현우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2층 VIP석 난간에 기대어 있었고 윤하경은 주저 없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내 남친이 저기 있는데?”남자는 그녀가 가리킨 곳을 힐끗 돌아보고 이내 비웃음을 터뜨렸다.“하! 내가 바보야? 내가 강현우를 몰라? 네가 감히 그 남자를 걸고 넘어가?”그 말에 윤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제발, 나 좀 살려줘.’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보고도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심지어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자리로 들어가 버렸다.윤하경은 순간 얼어붙었다.‘아 맞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게다가, 얼마 전 그를 화나게 했으니,
유 대표는 오늘은 완전히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윤하경에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내밀었다.“오늘은 내 실수였어. 미안하다는 뜻이야. 비밀번호는 000000이야.”하지만 윤하경은 카드를 받지 않고 그저 한쪽에 앉아 숨을 고르며 속으로 생각했다.‘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네. 괜히 나왔어.’그리고 그는 카드를 바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더 이상 말도 못 붙이고 황급히 클럽을 빠져나갔다.추성운이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하경 씨, 어떻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려나?”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성운 씨한테 한 번 신세를 졌네요.”추성운이 혀를 차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2층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윤하경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마침 강현우가 2층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그는 늘 그렇듯 여유롭게 걸음을 내디뎠다. 길고 곧은 다리로 가볍게 계단을 내려와서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클럽을 나가버렸다.그 모습을 보며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추성운을 돌아보며 말했다.“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다음에 필요하면 말해요.”윤하경은 머리가 지끈거려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클럽을 나서자, 바람이 한결 차가웠다. 그런데 문 앞에서 강현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마침 그의 차가 도착했고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윤하경은 몇 초간 고민하다가 결국 그의 차에 타버렸고 순간 강현우의 표정은 썩 기분 좋아 보이지 않았다.“내려.”그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술기운이 살짝 올라 대담해진 윤하경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문을 단단히 닫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아까 왜 저 안 도와줬어요?”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지만 오늘은 꼭 묻고 싶었다.강현우는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냉정할 수 있는 걸까?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윤하경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조차 몰랐다.그저 온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었고 뭔가, 자신을 붙잡아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강현우라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운전기사는 눈치껏 차에서 내렸고 술기운 때문인지 오늘의 윤하경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차 안은 어둡고 조용해서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강현우의 눈빛은 한없이 어두웠다.그렇게 한참을 지나, 완전히 기진맥진해진 윤하경은 결국 정신을 잃듯이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눈이 천천히 뜨고 몸을 살짝 움직이려던 순간, 손끝에 뜨겁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뭐지?’윤하경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바로, 옆에 누운 강현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아직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지만 살짝 찌푸려진 눈썹이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하...”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젯밤, 대체 왜!’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가다듬으려던 찰나,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손가락 틈으로 슬쩍 바라보니, 이미 깨어난 강현우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아침에 막 깬 사람이라고 하기엔, 눈빛이 너무 선명하고 차가웠다.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팔을 머리 뒤로 받친 채 게으르게 물었다.“그 표정은 뭐야? 어제 일은 까먹은 거야?”그녀는 괜히 입을 열면 더 바보 같은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강현우가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어제 먼저 덤빈 건 너였잖아.”윤하경은 이를 악물었다.‘이 남자는 도대체 왜 이렇게 말로 사람을 후려치는 걸까.’“책임지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그녀는 차갑게 한마디 던지고는, 이불을 치켜올리며 자리에서 내려오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스르르. 이불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찰나의 순간, 정적이 흘렀고 뒤에서 강현우의 비웃음이 들려왔다.그녀가 다시 몸을 숙여 이불을 끌어 올리려던 순간 강
“벗어.”강현우의 시선은 그녀의 허벅지 라인에 고정되어 있었고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표정이었다.윤하경은 그를 돌아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아니, 옷 한 벌 가지고 그렇게 아까워할 일인가요?”분명 이 옷이 비싼 건 알지만 강현우 정도 되는 사람이 이걸로 뭐라 할 줄은 몰랐다.“네 옷은 거실에 준비해 뒀어. 직접 가서 입어.”그는 그렇게 말한 뒤, 욕실로 들어갔고 곧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윤하경은 인상을 찌푸렸다.“진짜 너무 깐깐한 거 아니야?”그러면서도 결국 거실로 나가보았다. 거실 한쪽에 옷걸이가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벌의 옷이 걸려 있었다.정장, 원피스, 다양한 스타일의 옷들. 전부 그녀에게 잘 어울릴 법한 것들이었고 게다가 전부 명품 브랜드였다.그녀는 잠시 멍해졌다. 방금까지 그를 짠돌이라고 욕한 게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나?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강현우는 이미 방에서 나와 있었다.“저 먼저 가볼게요.”윤하경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역시 강현우답네。’윤하경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집을 나섰다.회사에 도착하니, 이미 소지연은 출근한 지 한참 된 상태였고 그녀를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우리 대표님, 이제는 예약이라도 해야 만날 수 있는 거야?”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그 말은 또 뭐야. 아이고 우리 지연이 수고했어. 연말에 보너스 챙겨줄게.”“됐어!”소지연은 툴툴거리며 그녀에게 결재 서류를 건넸다. 그러더니 갑자기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하경아, 아까 윤하연이 널 찾으러 왔었어.”윤하경이 서명을 하던 손이 멈췄고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걔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야?”“글쎄, 표정을 보니까 좋은 일은 아니겠더라. 네가 없다고 하니까, 좀 있다가 다시 온대.”소지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또 가족이랑 싸운 거야?”예전 같았으면 이런 일들을 소지연에게 다 털어놓았을
윤하경의 말은 분명히 윤하연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윤하연은 웬만한 말로는 상처받지 않는 타고난 후안무치였다.윤하경은 문이 열리는 순간, 강현우를 보았고 순간적으로 눈빛이 흔들렸다.비록 윤씨 가문이 예전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금이지만 강한 그룹의 이름은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그리고 강현우는 각종 경제지와 미디어에서 다룰 만큼, 이미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그런 남자가 윤하경과 협업을 한다고? 그녀의 작은 회사가 강한 그룹과 거래를 한다고?윤하연은 빠르게 윤하경에게 다가가, 눈물을 머금은 채 손을 꼭 붙잡았다.“언니, 내가 잘못했어. 뭐든 내 잘못이야. 하지만 아빠가 병원에 계셔. 진짜로 언니를 보고 싶어 해. 한 번만... 한 번만 가서 봐주면 안 돼?”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효녀 연기를 펼치는 듯했다.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을 걱정하는 착한 딸처럼 보이려는 것처럼 말이다.그녀가 연기를 잘하는 것은 알지만 만약 그녀의 눈길이 계속 강현우에게 흘깃거리지 않았다면 연출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결국엔 강현우에게 얼굴을 비추고 싶다는 거겠지.’윤하경은 피식 웃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윤하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그녀는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윤하연, 귀머거리야? 내가 지금 일하는 거 안 보여?”순간, 강현우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것이 보였지만 윤하경은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강현우의 비위를 맞추는 게 가족들 신경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그녀는 일부러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말했다.“아니, 너희 가족 셋이서 날 내쫓았잖아? 이제 와서 왜 날 찾는 건데?”윤하경은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보안팀 불러서 내보내. 앞으로 이 사람이 다시 찾아와도 문턱 하나 못 넘기게 해.”윤하연의 눈이 붉어졌다.“언니, 제발 그러지 마.”윤하경은 윤하연의 ‘연기’가 거슬렸지만 애써 고개를 돌리고는 강현우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었다.“죄송해요, 강 대표님. 이쪽으로 가시죠.”소지연
“뭐야?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자기 팀이 전문가라고 떠들더니 결국 이런 허접한 기획안으로 날 속이려는 거예요?”강현우는 길고 날렵한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윤 대표님, 이럴 거예요?”그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 안 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팀원들은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일제히 윤하경의 반응을 살폈다.윤하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손에 쥐고 있던 파일을 살짝 움켜쥐었지만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강 대표님께서 부족한 점이 있다고 느끼신다면 얼마든지 의견을 주시면 됩니다. 최대한 고객의 요구에 맞춰 완벽한 결과를 내도록 하겠습니다.”일에 있어서는, 윤하경은 언제나 진지하고 철저했다. 이 회사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기에 어떤 프로젝트든 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하지만 강현우는 마치 그녀를 일부러 곤란하게 만들려는 듯했다. 그는 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렇게 다 제가 지시해야 한다면 굳이 돈을 들여 당신 팀을 고용할 이유가 없죠. 다음번에는 만족할 만한 기획안을 가져오세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에게 더 이상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일행을 이끌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멀어지는 강현우의 뒷모습을 보며 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소지연은 고객을 배웅하러 나갔고 윤하경은 혼자 회의실에 남아 서 있었다.‘역시, 강현우란 사람은 상대하기 어려워.’이 프로젝트는 그녀와 팀이 밤을 새워 가며 준비한 것이고 기획안의 완성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강현우는 계속 불만족스러워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그녀가 파일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팀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실망감에 빠진 모습에 윤하경은 한숨을 삼키고는 팀원들을 향해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우리가 수없이 고민하고 준비한 프로젝트야.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보완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일단 다들 나가
윤하경이 휴대폰을 들고 내려왔을 때 마침 강현우와 윤하연 사이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이 상황을 감상하기로 했다.윤하연은 늘 청순하고 착한 여동생 이미지를 유지해 왔기에 아마도 이렇게 대놓고 굴욕을 당한 건 처음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강현우 이 남자 꽤 재미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강 대표님...”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윤하연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듯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제가 혹시 강 대표님께 실례되는 행동이라도 한 걸까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하지만 강현우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히 손목시계를 올려다보았다.그 모습만으로도 명백한 불쾌함이 드러났다. 그걸 눈치챈 그의 비서는 곧바로 앞으로 나서서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기요, 계속 길을 막고 계시면 보안팀을 부를 수밖에 없겠어요.”그 말과 함께 비서도 짧게 쓴웃음을 지었는데 그 눈빛엔 은근한 조롱이 서려 있었다.그도 강현우를 따라다니며 여러 부류의 여자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조악한 수작은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그제야 윤하연도 더 이상 버티는 게 무리라는 걸 깨달은 듯 결국 얼굴을 감싸 쥐고 울먹이며 뛰쳐나갔다. 그 모습이 꽤 볼만했다.하지만 강현우는 단 1초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피곤하다는 듯 긴 다리를 뻗어 차에 올라탔고 아무런 감정 없이 조용히 말했다.“출발해.”하지만 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자 창문 밖에서 윤하경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대놓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어쨌든 창문을 내리고 물었다.“또 뭐야?”윤하경은 대답하는 대신 태연하게 차 문을 열고 들어와 버렸다. 운전기사와 비서는 익숙하다는 듯 조용히 차에서 내려 주위를 비워줬다.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다소 짜증 섞인 어조로 물었다.“할 일 없어?”그 말투는 마치‘네가 이렇게 한가한 인간이었나?’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윤하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그 사람을 떠올렸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차분하게 답했다.“아뇨, 그냥 요즘 바빠서요.”전화기 너머, 그 남자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이미 제가 드린 정보가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셨겠죠? 저는 지금 돈이 급합니다. 만약 윤 대표님이 이 거래를 원하지 않는다면... 저도 다른 길을 찾아야겠죠. 하지만 그게 당신이나 저,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은 선택은 아닐 겁니다. 다만 저는 지금 너무 절박하거든요.”최근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으로 인해, 윤하경은 이 남자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다시 연락한 이상,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 결정을 내렸다.“지금 시간 괜찮아요. 만나죠.”“좋아요. 30분 후, 글로벌 센터에서 봅시다.”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짧고 간결하게 약속을 잡으며 전화를 끊었다.윤하경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빠르게 마음을 정리한 뒤 사무실로 향해 차 키를 챙겼다.그 모습을 본 소지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조금 있다가 미팅 있는데 어디 가?“윤하경은 차 키를 돌리며 말했다.“잠깐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 미팅은 내가 돌아와서 다시 진행하자.”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그리고 오늘 점심, 다 같이 맛있는 거 시켜서 먹자. 오늘 오전에 강현우한테 제대로 까였잖아. 우리 팀 분위기도 살릴 겸.”소지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메뉴는 내가 알아서 정할게.”한 시간 후, 글로벌 센터.윤하경이 약속한 카페에 도착했을 때 그 남자는 이미 와 있었다.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온몸을 꽁꽁 싸매진 않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쓴 중년 남성, 그의 입가에는 길게 흉터가 나 있었다.윤하경은 우아하게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한 번 훑어본 뒤 카푸치노를 주문했다.그리고 곧바로 시선을 돌려 그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어떻게 부르면 될까요?“그 남자는 살짝 입술을 씹더니 귀찮다는
“너 대체 우리 윤씨 가문을 온 경성의 웃음거리로 만들 셈이냐?”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손이 허공을 가르며 윤하경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이미 익숙한 듯 가볍게 몸을 틀어 피했고 대신 그녀의 손이 뻗어 윤하연을 거칠게 끌어당겼고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크게 휘둘렀다. “아버지가 묻고 계셔. 넌 윤씨 가문이 경성의 화제가 되길 바라는 거야?” 윤하연은 손바닥이 얼굴에 닿는 순간 충격에 얼어붙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윤수철 또한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화를 터뜨렸다. “내가 너한테 말한 거야!” 그러나 윤하경은 콧방귀를 뀌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니 참 이상하네요? 집안이 창피해지는 게 싫다면 몸을 이렇게 만든 딸이 창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히려 그에 대해 따지고 드는 저를 창피해하시는 거 보면 혹시라도 아빠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건 아니겠죠?”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윤수철의 얼굴을 훑었다. “확실히 검사 한 번 받아보시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윤수철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윤하경의 말에는 반박할 틈이 없었어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유 집사, 당장 이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 그동안 조용히 지켜보던 유 집사가 황급히 나섰다. “하경 씨, 이제 그만 올라가서 쉬세요. 밤이 늦었잖아요.” 윤하경은 굳이 더 붙잡고 싸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가볍게 혀를 차며 뒤돌아서는 순간, 뭔가 미련이 남은 듯 되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싸워볼 의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유 집사의 강한 손길에 이끌려 억지로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윤수철과 윤하연만 남았다. 윤하연은 뺨이 화끈거렸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윤수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빠...” 윤수철은 길게 숨을 내쉬며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한참을 침묵한 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 이 일에 대해 누구든 밖에 나가 입을 놀리면 그땐 봐주지 않겠다.” 그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강압적이었고 잠시나마 ‘집안의 가장’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그러나 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었다. “하연이를 방으로 데려가.” 그리고 다시 윤하경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너는 따라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 윤하경은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빠, 여기서 말하면 안 돼요? 한밤중에 굳이 서재까지 갈 필요 있나요? 내일 회사 출근해야 해서 피곤하거든요.” 그러나 윤수철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서재로 와.”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고 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서재 문을 열었더니 윤수철은 이미 걸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둑한 조명 아래서 더욱 깊어진 주름과 어두운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윤하경은 별로 개의치 않고 소파에 털썩 앉았고 강현우와의 일로 지친 그녀는 다시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빠, 무슨 이야기든 빨리 해요. 저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요.” 그녀가 말하는 태도에 윤수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하연이가 오늘 이런 꼴을 당한 거, 너랑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어?”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 저녁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발짝도 밖에 나간 적이 없어요. 하연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저도 궁금하네요. 아까 그녀가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이 모든 건 원래 네가 당해야 할 일이었다’라고 하더라고요.” 윤하경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끝에 묻어나는 차가운 기운은 숨길 수 없었다. “아빠, 저한테 이게 무슨 의미인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그녀의 말에 윤수철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 역시 윤하연이 어리석고 경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입술을 굳게
윤하경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고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오며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입을 가리며 일부러 하품을 하곤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 한밤중에 왜 이렇게 시끄러워. 사람이 자야 살지.” 갓 잠에서 깬 듯한 살짝 갈라진 목소리.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며 거실을 본 순간, 윤하경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거실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유 집사와 다른 가정부들도 다 깨서 거실에 모여 있었고 윤수철 역시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중심에 서는 완전히 망가진 윤하연 있었다. 옷은 찢겨 제대로 몸을 가리지도 못했고 여기저기 남은 상처들이 말해주듯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대로만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강현우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걸어 내려가며 일부러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연아,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들어오는 것도 이상한데 대체 무슨 꼴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적당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담고 있었지만 그런 태도가 윤하연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힘없이 서 있었지만 눈빛만은 증오로 이글거렸다. “윤하경... 너지? 이거 다 네가 한 짓이지?” 윤하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또 시치미 떼네!” 윤하연은 미칠 듯이 화가 나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떠올릴수록, 윤하경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이거 전부 원래 네가 당해야 할 일이었어!” 그 말에 윤하경은 일부러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슬쩍 윤수철 쪽을 힐끔 보며 코끝을 찡긋했다. “하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거야 알지만... 네가 겪은 일은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다고 나한테 함부로 원망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 그녀의 연기
윤하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바로 소리쳤다.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하지만 남자는 목을 곧추세우며 끝까지 버텼다. “전부 증거가 있어요. 당신이 보낸 계좌 이체 내역도 있고 문자도 남아 있다고.” 그 말에 윤하연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강현우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전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그러나 이미 우지원이 그녀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냉소를 머금으며 강현우에게 폰을 내밀었다. “대표님, 여기 보세요. 이게 윤하연 씨가 보낸 메시지입니다.” 윤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삭제하려고 했는데 그럴 틈도 없이 들켜버렸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강현우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대표님, 저... 저를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뭐든 다 할게요. 원하시는 대로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며 문득 비교했다. ‘똑같이 윤씨 집안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클까? 윤하경이 눈물을 흘릴 때는 그 모습조차 매혹적이었는데...’그러다 불현듯 윤하경이 지난번 침대 위에서 흐느끼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그야말로 유혹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하연의 울음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윤하연은 강현우의 반응을 보고 그가 넘어왔다고 착각하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맞아요! 뭐든지 할게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그 말을 듣자 강현우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방 한쪽에 묶여 있는 남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윤씨 가문에서 이미 돈도 지불했으니 약속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남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면... 우리가 윤하경 씨를 찾아서...” 짝! 우지원이 손을 들어 그중 한 남자의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윤수철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이전에도 윤하연이 밤마다 몰래 남자를 만났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표정이 어두워진 그를 뒤로하고 윤하경은 가볍게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올라갔다.휴대폰을 확인하니 강현우가 보낸 새 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아이고 배짱이 제법 커졌네.]‘???’윤하경은 황당한 얼굴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며 답장을 했다.그러자 곧바로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내가 네 비서야? 어떤 쓰레기든 다 나한테 보내서 처리해달라는 거야?]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역시 강현우는 머리가 비상했고 어떤 일이든 다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후, 침대에 앉아 차분히 메시지를 입력했다.[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굳이 제 체면을 봐서 살살해줄 필요는 없어요.]이번엔 정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어젯밤 그녀를 끔찍한 일에 말려들게 하려 했던 윤하연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어떻게 응징할까 고민하던 차에, 그녀가 스스로 구지호의 행방을 물으러 온 덕분에 좋은 기회가 생겼다.강현우를 이용하면 확실하고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니 정말 일거양득이었다.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아주 독하네.]메시지 뒤에 덧붙은 웃는 이모티콘이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강현우는 짧게 웃으며 꽤 흥미롭다는 듯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곧 방 안을 가득 메운 신음이 그의 기분을 흐트러뜨렸다.“대표님! 제발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제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윤하연이 잔뜩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그녀는 처음엔 구지호를 찾으러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납치당해 끌려오더니 눈앞엔 피투성이가 된 구지호가 정신을 잃은 채 매달려 있었다.공포에 질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문 앞에 서 있던 강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켜서지 않았다.강현우는 윤하연이 너무 시끄
“정신이 나갔으면 정신병원에 가. 여기서 미친 짓 하지 말고. 구지호가 어디 갔는지 나한테 묻지 마. 난 몰라.” 윤하경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오히려 윤하연을 더욱 화나게 했다. “분명히 네가 먼저 그 얘길 꺼냈잖아! 너 분명히 알고 있지? 어젯밤 너 또 지호 오빠랑 있었던 거 아니야? 집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씹고 있는데 네가 꾸민 짓이지?” 윤하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진짜 대단하다. 남을 의심하는 능력 하나는 끝내주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알고 있어. 궁금해?” 윤하연은 이를 악물며 다그쳤다. “장난치지 말고 당장 말해! 지호 오빠 어디 있어?!” 윤하경은 천천히 고개를 갸웃하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아, 근데 말이야. 내가 굳이 네가 원하는 걸 그냥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그녀의 느릿한 말투가 윤하연을 더욱 열받게 했다. “그럼 뭘 원해?” 윤하경은 손톱을 매만지며 여유롭게 말했다. “뭘 받을까 고민 중인데... 네가 무릎 꿇고 정중히 부탁하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윤하경! 적당히 해!” 윤하연이 소리쳤다. 하지만 윤하경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알고 싶으면 무릎 꿇으라고 했잖아. 싫으면 말고. 아, 그리고 가기 전에 내 노트북값부터 보내. 총 600만 원. 계좌 여기야.” 그녀는 계좌 번호를 보여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 윤하연은 치를 떨며 그녀를 노려봤다. 한참을 참았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 조건이 뭐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지호 오빠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건데?” 윤하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너한테 받을 만한 게 뭐가 있겠어. 네 물건은 죄다 더러워서 필요 없고.” 그녀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됐어, 그래도 한집에 사는 정이 있으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어젯밤 지호 오빠가
윤하경은 윤하연을 비웃듯이 쳐다봤다. 역시 상대가 악랄하게 나오면 그에 맞서야 속이 풀리는 법이다.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녀는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유 집사에게 간단한 반찬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하연도 거실로 내려왔고 윤하경의 독이 잔뜩 서린 눈빛을 보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윤하경, 내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너 절대 가만 안 둬. 기다려 봐.”말투만 보면 마치 지금까진 자신이 참아준 것처럼 들렸다.윤하경은 가볍게 눈을 굴리며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그녀가 반응조차 하지 않자, 윤하연은 발을 쾅 내디디며 밖으로 나가버렸다.하지만 윤하경은 그녀가 나가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며 마지막으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조금 더 서둘러. 여긴 상황이 바뀌었어.]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유 집사가 음식을 가져왔다.“하경 씨, 식사하세요.”“고마워요.”윤하경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식사에 집중했다. 사실 아침에 강현우의 집에서 뭘 좀 먹고 싶었지만 그 남자가 또 이상하게 굴어서 제대로 식사할 기회를 놓쳤다.게다가 어젯밤의 ‘운동’에 이어 아침부터 긴장과 감정 소모가 심했으니 속이 비어 있는 게 당연했다.유 집사는 그녀가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이 어두워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경 씨, 방금 전에 하신 일... 혹시라도 회장님이 아시면 어쩌시려고요?”“아시면 뭐요?”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유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걸 알기에 그 따뜻한 마음은 감사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착한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만약 매번 참고 넘어갔다면 지금쯤 그녀의 존재조차 지워졌을 것이다.“그게 아니라, 이따가 하연 씨가 이 일을 회장님께 말하면... 회장님이 또 하경 씨를 나무라실까 봐요.”“그럴 여유가 있을까요?”윤하경은 국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며
윤하경이 윤하연의 방에 도착했을 때, 윤하연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아마도 전날 밤 술을 마시고 온갖 난리를 치느라 지쳤는지, 침대 위에서 돼지처럼 늘어져 자고 있었다.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을 지키다가, 손에 들고 있던 국을 그대로 윤하연의 침대 위로 쏟아버렸다.“아!”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뜨겁진 않지만 식은 국이라도 몸에 닿으면 충분히 따가운 법이다.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의 고통에 윤하연은 침대에서 벌떡 뛰쳐나왔다.몸을 일으킨 그녀는 곧 윤하경이 창가에 서서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두 눈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윤하경! 너 미쳤어?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거야?”윤하경은 윤하연이 평소 흘리는 눈물 연기를 그대로 따라 하듯,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누가 보면 또 나한테 억울한 일 당한 줄 알겠네. 아버지가 우리 보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라고 하셨잖아. 오래 자면 배고플까 봐 직접 국까지 떠서 가져왔는데 아차! 내가 그만 손을 미끄러뜨렸지 뭐야. 실수야, 그런데 네가 왜 이렇게 날 오해하는 거야?”윤하경은 억울한 듯 두 손을 들어 보였지만 윤하연은 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들으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몸이 따갑고 욱신거리는 고통도 신경 쓸 겨를 없이,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서 뛰쳐나와 윤하경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전날 있었던 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고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덤볐다가 오히려 윤하경에게 쉽게 제압당했다.윤하경은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어, 무릎으로 그녀의 등을 눌러 바닥에 깔아버렸다.“윤하경! 당장 놔! 너 죽여버릴 거야!”윤하연은 온몸을 비틀며 반항했지만 힘이 빠져버린 몸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피부가 얼얼하게 따가운 데다, 혹여나 얼굴에 흉터라도 남게 되면 인생이 망한다는 생각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반드시 윤하경을 없애야 했다.하지만 윤하경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뒤로 꺾어 고정한
“상처가 더 심해진 것 같네요.”“그렇지. 그래서 네가 책임져야지.”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젯밤에 네가 너무 날뛰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까진 안 됐을 거야.”윤하경은 말없이 입술을 다물었다.‘꼭 그런 말만 골라서 하네, 진짜.’그녀는 어젯밤의 장면들을 일부러 기억에서 밀어내고 있었는데 강현우가 한마디 꺼내는 순간 그 장면들이 우르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말했다.“상처 제대로 안 처리돼서 그런 거예요. 제가 다시 치료해 드릴게요.”강현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고 윤하경은 조용히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상처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피부는 벌어져 있었고 붉게 부어오른 자국들이 보였다. 오랫동안 방치한 흔적이 역력했고 예전부터 있던 흉터들까지 더해져 그의 등이 보는 사람조차 아찔할 정도였다.윤하경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아내고 약을 바른 뒤, 다시 붕대로 감아 마무리했다. 마치 습관처럼 마지막에 가슴팍에 리본을 묶었는데 그 커다란 가슴 근육 위에 작고 정성스러운 리본이 묘하게도 시선을 끌었다.강현우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귀찮은 기색이 스쳤지만 윤하경이 열심히 리본을 묶는 모습을 보고는 그 불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됐어요.”윤하경은 손을 털며 미소를 지었다.강현우는 말없이 셔츠를 입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그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윤하경은 재빨리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복도를 걷던 중, 끝 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비명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은 구지호가 갇혀 있는 방이었다.그 순간, 강현우의 목소리가 문가 쪽에서 들려왔다.“마음이 쓰이면 말해. 네가 한마디 하면 내가 자비 좀 베풀 수도 있지.”고개를 돌린 윤하경은 문가에 기대 서 있는 강현우를 마주했다. 셔츠 단추를 다 채운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