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어설픈 한국어는 듣기에도 거북했다.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벽 쪽으로 최대한 몸을 피했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조차 없었다. 이미 등은 차가운 벽에 딱 붙어 있었고 눈앞의 남자들은 거칠고도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그만 좀 도망쳐. 도망쳐봤자 어차피 다 똑같아. 말을 잘 들으면 덜 고생할 수도 있잖아.”한 남자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다가오더니 그녀의 셔츠 단추에 손을 댔다. 그는 죽은 듯 가만히 있는 윤하경이 시시했는지, 잠시 망설이더니 발에 묶여 있던 끈을 풀었다. 그러고는 입을 막고 있던 천 조각도 걷어냈다.오랫동안 막혀 있었던 입, 턱이 아파서 금방이라도 빠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윤하경은 아픔을 억지로 참고 입을 열었다.“그만해.”낮고 단호한 목소리에 두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예상 밖의 침착함을 보자 두 남자는 금방 헛웃음을 터뜨리며 낄낄댔다.“오, 성깔 좀 있네? 하지만 우린 그런 거 안 통하거든. 아껴둬 이따가 소리 지르라고.”한 남자의 손이 그녀의 목선까지 올라오면서 끔찍한 기운이 전해졌다.“잠깐만.”윤하경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10억 줄게.”남자의 손이 멈췄다.“뭐라고?”“10억. 나 보내주면 줄게. 넌 알잖아. 이런 짓 해서 버는 돈이 얼마 안 되는 거. 하지만 10억이면 얘기가 다르지 않아?”그녀는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차분하게 유지했다. 지금 이 순간, 이들에겐 돈이 목적일 거란 사실에 희망을 걸었고 어쩌면 윤하연과는 단순히 일회성 거래였을지도 모른다.남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짧은 침묵을 나눴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고 금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하하하! 돈? 얘가 우리를 뭐로 보고 그러는 거야? 우리가 그런 거 몰라서 여기까지 왔겠냐? 지금 당장 우리가 더 원하는 게 뭔지 몰라?”남자 중 하나가 징그럽게 웃으며 손을 다시 그녀의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윤하경은 온몸이 떨렸다.예전에 이사장의 손에 이끌려 바다에 빠졌을 때도 이렇게까지 절망스럽진 않았다.
어제, 윤하연에게 끌려갔을 때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오늘, 흉악한 인간쓰레기들 손에 떨어져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끝내 울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강현우 앞에서 윤하경은 눈물이 끊기지 않았다.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확 벗겨냈다.“이제 와서 무서운 거야?”갑작스레 밝아진 시야에 눈이 따가울 정도였고 윤하경은 더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했고 갑자기 강현우 품에 파고들었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요.”강현우는 고개를 숙여, 자기 품에 안긴 그녀의 부스스한 머리를 내려다봤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정작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윤하경을 안고 차에 태웠고 곧바로 민진혁에게 말했다.“돌아가자.”차 안에서 윤하경은 겨우 정신을 추스르며 옷을 다시 챙겨 입었고 긴장과 두려움 때문인지 단추를 채우는 손이 자꾸 떨렸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그녀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그녀 옷의 단추를 채워주었다.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올려다봤다. 촉촉이 젖은 눈망울이 그를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버려진 강아지처럼 안쓰러웠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코웃음을 흘리듯 말했다.“그 눈빛, 나한텐 안 통해. 돌아가서 따질 게 산더미야.”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지만 그 안엔 분명 고압적인 권위가 담겨 있었지만 윤하경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녀는 다시 강현우의 품에 얼굴을 묻고는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뭐든 다.”그녀는 얼굴을 들지도 않고 그의 익숙한 향기를 들이마시며 그제야 겨우 안정을 찾은 듯했다.강현우는 그녀의 옷깃을 움켜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하... 진작에 네가 이렇게 멍청할 줄 알았으면 그때 바다에서 그냥 상어 밥으로 던질 걸 그랬다.”이젠 조금 안정된 윤하경은 오히려 덤덤하게 말했고 무서울 게 없어
유진호는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사람이었기에 강현우가 누구를 찾는지 단번에 알아챘고 바로 웃으며 말했다.“사람 있어요, 있습니다.”그렇게 말하곤 곧장 밖으로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자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망이었다. 어젯밤 강현우가 쏜 총에 맞은 다리는 아직도 그대로였고 붕대 하나 감겨 있지 않은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윤하연은 이미 겁에 질려 울었는지 얼굴에 화장은 엉망이었고 꼴은 길바닥에서 주워 온 부랑자 같았다.그녀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강 대표님, 제발...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요...”강현우는 그 울음 섞인 목소리가 시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유진호는 그 눈치를 재빨리 읽고 곧바로 부하에게 고개로 지시해 윤하연의 입을 막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향해 알랑거리며 말했다.“강 대표님, 저도 이 여자한테 속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말을 하면서 그는 윤하연을 향해 거침없이 발길질을 날렸고 입이 틀어막힌 윤하연은 신음밖에 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유진호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강 대표님, 이 일은... 여기서 정리하는 걸로 하면 어떻겠습니까?”사실 유진호가 이러는 이유는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강현우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만 알아보면 누구든 경계심이 생길 터였다.그는 절대 무시당하는 걸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강현우는 차가운 눈으로 유진호를 쳐다보더니 서슴없이 말했다.“이제 꺼져.”유진호는 확답을 받지 못한 채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민진혁이 뒤에서 유진호의 옷깃을 낚아채 밖으로 끌고 나갔다.문이 닫힌 뒤, 유진호는 불안한 표정으로 민진혁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저기, 혹시 강 대표님은 지금 좀 풀리신 겁니까?”민진혁은 그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계속 여기 서 있고 싶으면 남아. 그게 아니라면 당장 꺼져.”그
윤하경은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바짝 마른 입술을 본능적으로 핥았고 그런 그녀의 작은 동작에 강현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저... 그게요...”조심스레 입을 연 윤하경은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그땐 너무 급했어요. 하연이가 도망갈까 봐 무서웠고... 설마...”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이었다.“설마 걔가 현지 사람들과 짜고 저를 팔아넘기려고 할 줄은 몰랐죠...”“설마?” 강현우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안 왔으면 지금쯤 네 몸 위로 몇 놈이 올라탔을지도 모르겠는데?”그 말에 윤하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잔인한 말이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솔직히 말해, 강현우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그녀는 이미 그 지옥을 겪었을지도 모른다.순간, 윤하경의 눈빛이 흐려졌다.“그럴 일 없었을 거예요.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전 차라리 죽었을 겁니다.”“...”그 말을 내뱉는 순간, 그녀의 턱에서 짜릿한 통증이 번졌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켠 윤하경은 눈을 맞추며 낮고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아파요...”강현우의 손끝은 거칠었고 그녀의 피부는 유난히 예민했기에 그 손아귀는 유독 아프게 느껴졌다.“죽고 싶어?” 강현우의 눈빛은 싸늘했고 짧은 한마디조차 이를 악물고 내뱉는 듯했다.그 말에 겁을 먹은 윤하경은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옷깃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고 피가 스며든 붕대가 그대로 드러났다.강현우는 그 붉게 물든 붕대를 본 순간, 미세하게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녀의 턱을 놓아주었다.자유로워진 윤하경은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고 아픈 턱을 조심스레 문지르며 눈망울을 치켜들었다. 눈에 그렁그렁 맺힌 물기, 억울함이 잔뜩 어린 얼굴이었다.누가 봐도 불쌍했지만 그 모습은 도리어 사람을 더 자극했다.강현우는 잠시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문밖으로 나갔다가 의료 키트를 들고 돌아왔다.조용히 상자를 열고는 능숙하게 소독약과 붕대를 꺼내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벗어.”“네?”
“걔가 여기 있어요?”윤하경은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녀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강현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강현우의 눈빛이 순간 깊어지자 윤하경이 놀라 뒷걸음질 쳤고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는 더욱 진하게 키스했다.하지만 이번 키스엔 평소처럼 거침없는 이기심도, 가끔 비치는 따뜻함도 없었다.그저 숨통을 조일 듯한 압도적인 지배만이 가득했고 거친 호흡 사이로 그녀의 모든 공기를 빼앗기려는 듯 지독하게 탐욕스러웠다.윤하경은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정신이 하얘질 정도로 몰아붙이던 키스는, 그가 그녀의 입술을 세게 깨문 뒤에야 멈췄다.아픔에 고개를 움찔한 윤하경은 눈을 치켜올려 강현우를 바라봤고 두 눈 가득 억울함이 고여 있었다.강현우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날 쳐다보는 거 보니까... 아직 부족했나 봐?”“...”윤하경은 말이 막혔다.무언가 말을 돌리려 입을 열기도 전에, 강현우는 다시 턱을 잡아 올렸고 이번엔 아까보다 부드러웠다.“이건 그냥 이자야. 돌아가서 제대로 결산하자.”그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듣는 사람의 등골이 오싹할 만큼 차가웠다.윤하경은 조용히 입을 열려다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강현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민진혁이 피범벅이 된 얼굴의 윤하연을 끌고 들어왔다.비록 요즘 윤하경이 강현우 곁에서 웬만한 잔혹한 장면은 다 봐왔지만 윤하연의 붕대도 없이 피로 얼룩진 허벅지를 보는 순간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다리는... 무슨 일이 있었어요?”강현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내가 쐈어.”그가 길게 뻗은 다리를 교차시키며 앉는 모습은 여느 때처럼 품위 넘쳤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너무나도 무심하고 냉정했다.총을 쏴 다리를 꿰뚫는 일이 그에겐 그저 일상적인 일처럼 느껴졌다.하지만 윤하경은 무섭지 않았다. 그가 윤하연에게 총을 쏜 이유,
잠시 침묵이 흘렀고 윤하경은 시큰둥한 얼굴로 침대에 드러눕더니 민진혁을 향해 말했다.“민진혁 씨, 현우 씨가 평소 이런 사람들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죠? 그대로 하세요. 전 좀 피곤해서요. 잠깐 쉬고 싶어요.”민진혁은 멍하니 서 있다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지금 윤하경 말투, 딱 강현우 같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강현우를 바라봤고 강현우는 가볍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민진혁은 눈치껏 윤하연을 다시 끌고 나갔고 윤하연은 순간 얼이 빠졌다.다시 민진혁에게 팔을 잡혀 끌려 나가는 그 순간, 다리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와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문밖.민진혁은 그녀를 바닥에 내던졌고 윤하연은 고통에 찬 얼굴로 흙빛이 되었다.그가 허리춤에서 작고 날카로운 칼을 꺼내는 걸 본 순간, 윤하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오, 오지 마세요...”그녀는 온몸으로 뒷걸음질 치며 떨기 시작했고 민진혁은 무표정하게 몸을 숙였다.“괜찮아요. 저 솜씨 좋아요. 정신 멀쩡할 때 이 하나씩 뽑는 건 자신 있어요. 안 아파요. 진짜예요.”그의 미소는 말끔하고 온화했지만 윤하연의 눈엔 완전한 악마로만 보였다.“안 돼요... 제발요. 뭐든지 할게요. 살려만 주세요...”윤하연은 울먹이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보세요, 저도 괜찮잖아요. 마음에 들게 해드릴게요... 제발요...”민진혁은 당황한 듯 시선을 돌렸다.“옷 입으세요.”하지만 윤하연은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그에게 달라붙어 껴안으려 하며 입을 맞추려 들었다. 민진혁은 지금껏 강현우 곁에서 온갖 진귀한 장면을 다 겪었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덤벼드는 여자는 처음이었다.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게진 그는 도망치듯 문을 닫고는 다시 강현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강현우는 소파에 앉아 윤하경을 바라보다, 급하게 들어오는 민진혁을 보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뭐야, 왜 그렇게 부산스러워?”민진혁은 우물쭈물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대표님... 혹시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안 될까요?”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윤하경은 살짝 웃었고 표정에 장난기 어린 기색이 떠올랐다.“그걸 어찌 ‘수작’이라 하시겠어요?”그녀는 몸을 일으켜 강현우 옆에 조심스레 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현우 씨,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지금 그녀에겐 믿고 쓸 사람이 없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도, 강현우뿐이었다.이번 일로 크게 당한 뒤라, 더는 무턱대고 나섰다가 또다시 팔려 가는 일이 생기면 정말 되돌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차라리 처음부터 강현우에게 부탁하는 편이 나았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입꼬리에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이제 와서 부탁? 그럼 한번 들어보자. 어떻게 부탁할 건데?”그 말에 윤하경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의 눈빛을 보니 분명히 뭔가 꿍꿍이가 섞여 있었다.무례하거나 곤란한 요구일 가능성도 컸고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윤하경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침대로 돌아가려 했지만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순간 중심을 잃은 윤하경의 몸은 그대로 그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이건 분명, 고의였다.몸을 빼내려는 순간, 그녀는 강현우의 깊고 눈동자와 마주쳤다.“이게 지금 부탁하러 온 사람의 태도야?”강현우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정말이지, 눈곱만큼도 성의가 없네.”그는 윤하경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손가락에 감으며 천천히 굴렸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그의 조금 거친 손끝에 감기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묘하게 관능적이었다.“자, 말해봐. 이번처럼 말 안 듣는 사람은 어떻게 벌을 줘야 할까?”강현우는 나른하게 중얼거렸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윤하경은 알아챘다. 슬슬 이쯤이면 화도 풀렸겠거니 했는데 괜히 먼저 다가가서 불쏘시개가 된 셈이었다.속으론 후회했지만 겉으로는 억울한 표정으로 변명했다.“그땐 정말 급해서요...”윤하경은 강현우가 왜 화난 건지 알았다.그는 통제력과 주도권을 놓는 걸 싫어하는데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제멋대로 움직였다.그러다
강현우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윤하경은 방금 전까지 축 처져 있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현우 씨, 혹시... 임수연 아줌마를 찾아주실 수 있으세요? 전...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야 해요.”강현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못 해줄 것도 없지.”이 말은, 조건이 있다는 뜻이었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결심하듯 말했다.“조건이 뭐든... 임수연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면 전부 다 받아들이겠어요.”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묘하게 짙은 장난기가 떠올랐고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그래? 정말이지?”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이에요.”임수연을 반드시 잡아 엄마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고 그것만 이룰 수 있다면 다른 건 다 감수할 수 있었다.그리고 강현우란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늘 위험하고 차갑지만 지금껏 그녀에게 해코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가 설마 자기 목숨을 노리거나 자신을 어디에 팔아넘길 리는 없다고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그렇게 생각하자, 강현우와 조건을 두고 거래하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그녀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며 웃음을 감추지 않고 입꼬리를 더욱 올렸다.“좋아. 나중에 딴말 없기야.”그 순간, 왠지 모르게 윤하경의 등골에 싸한 느낌이 스쳤다.그의 말투는 분명 가볍지만 그 속엔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섞여 있었고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가볍게 잡아, 무릎 위에서 내려놓자 그녀는 마치 가벼운 인형처럼 휙 들어 올려졌다.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결국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강현우가 방을 나가며 문을 닫자, 윤하경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침대에 다시 앉았다.몸은 지쳐 있었지만 막상 누워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고 눈을 감는 순간, 머릿속에는 오늘 강현우가 눈가리개를 걷어주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그 찰나의 순간, 세상이 밝아졌고 강현우가 마치, 지옥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
“아...”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며 따끔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고개를 들어 앞을 막아선 배경빈을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쳐다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제가 안 막았으면 지금쯤 계단 굴러갔을걸요?”윤하경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바로 앞에 계단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놓고 걷고 있었으니 정말 자칫하면 사고 날 뻔했다.물론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억지를 부렸다.“누가 넘어진다고 했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일은 여기까지면 됐고요. 이제 퇴근해도 돼요.”그러자 배경빈은 방금 계약서가 담긴 클리어 파일을 흔들며 말했다.“윤 대표님, 저 방금 계약 따낸 거잖아요. 이렇게 빨리 손절하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왕이면 축하 겸 한 끼쯤은 사줘야죠?”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돈 없어요.”배경빈은 되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괜찮아요. 전 있어요. 제가 쏠게요.”“됐거든요?”윤하경은 거절했지만 배경빈은 들은 체도 않고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애초부터 기분이 어수선했던 터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배경빈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윤하경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차는 빠르게 도심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한 대형 포장마차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윤하경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예약이 어려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여긴 왜요? 예약 안 했으면 못 들어갈 텐데.”그녀는 돌아서려 했지만 배경빈이 손목을 붙잡았다.“가긴 왜 가요. 자리 예약돼 있어요. 올라가요.”“아까까지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언제 예약을...?”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고 창가 쪽 자리에 자리를 잡은 배경빈은 턱을 괴고 윤하경을 바라보며 웃었다.“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오늘은 제가 사는
오후 무렵, 윤수철이 회사에 들렀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부녀 사이엔 차가운 기류가 흘렀고 오늘 오전 그가 회사에 없었던 걸 보면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분명 윤하연을 구하려고 발을 뻗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 얼굴에 가득한 어두운 기색을 보니 결과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얌전히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아버지.”그런데 윤수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윤하경을 쏘아보며 그대로 지나쳤다.그의 어깨가 스치듯 지나는 순간, 윤하경은 분명히 그가 억눌러 뱉은 듯한 콧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층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배경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까는 일하겠다고 그 난리더니 아직 퇴근도 안 했는데 벌써 도망치려는 거예요?”배경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슬기 비서님이 말씀하시길, 대표님이 곧 외부 미팅 있으시다고 해서 제가 같이 가라고 하더라고요.”“...”‘우슬기, 눈치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문제야.’배경빈은 그녀가 뭔가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넘어갔고 오히려 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대표님 비서잖아요. 고객 미팅에 동행하는 거, 아주 타당한 업무 아닌가요?”강현우가 독처럼 위험하고 치명적인 존재라면 배경빈은 그저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는 상대의 날을 무장 해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윤하경은 지금도 제대로 화를 내기 어려웠다.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왔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배경빈이 먼저 문을 열고 탑승해 버렸다.“대표님 같은 분이 직접 운전하실 순 없죠.”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모실게요.”차는 강현우가 선물한,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고급 세단이었다.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배경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장난을 치겠어요. 요즘 일이 끊겨서 정식으로 밥벌이할 직장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귀사에서 비서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어쩌다 보니 덜컥 붙었어요. 이 정도면 인연 아닌가요?”윤하경은 거의 눈이 뒤집힐 뻔했다.“배씨 집안 둘째 아들이 밥벌이 걱정이라니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으세요? 우리 회사는 그렇게 귀한 몸을 담을 공간과 자격이 없어요.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배웅은 생략할게요.”하지만 배경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어요. 특별한 사유 없이는 해고도 불가일 텐데요.”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꼭 강력 접착제 같았고 윤하경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대체 무슨 꿍꿍인데요? 배지훈 씨한테 들키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배지훈’의 이름을 꺼내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배경빈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요.”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 좋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 멀쩡한 디자인 일을 두고 왜 갑자기 여기서 비서 일을 하겠다는 건지, 이건 배씨 가문 체면에도 안 맞는 일인데 말이다.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배지훈에게 연락해서 이 사람 데려가라고 해야 하나...’그런데 막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배경빈이 휙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로챘다.“형한테는 말하지 마세요.”결국 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고 그의 집요함 앞에선 아무리 단호해도 소용없었다.그리고 배경빈은 고개를 숙이고 또 특유의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치 받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 눈빛에 약해지더니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여긴 진짜로 배경빈 씨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디자이너잖아요. 디자인 일에 집중해야지, 왜 여기서 비서를 하겠다는 거예요?”배경빈은 가볍게 웃었다.“최근 의뢰받은 디자인 건이 취소돼서요. 덕분에 일이 싹 끊겼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밤중에 도대체 누가 강현우에게 전화를 걸어온 걸까 싶었지만 자신이 그걸 묻는 건 선을 넘는 일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강현우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그가 떠난 자리엔 먹다 만 음식만 남아 있었고 윤하경은 수저를 다시 집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문득 송시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여자가 있어요.”그게 설마, 진짜 자신은 아닌 걸까?윤하경은 입맛이 뚝 떨어진 채로 두세 입 더 억지로 먹고는 식당을 나섰다.그리고 그날 밤, 강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백정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렇게 오래 회사를 비우시면 곤란하잖아요.”그 말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오늘 회사 좀 다녀올게요.]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윤하경은 문득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굳이 이런 걸 보고해야 하나...’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 우슬기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뭐가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요즘 이상할 정도로 영업팀 쪽에 일이 몰리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강한 그룹 관련 회사들이고 사전에 대표님께 다 연락드렸다고 하던데요.”“나한테?”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우슬기를 바라봤다.“아, 네.”당황스러움을 감춘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알았어. 시간 내서 볼게. 먼저 나가 봐.”우슬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고 윤하경은 손에 든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현우가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고?’생각해 보면 요즘 윤수철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 성격에 자신이 회사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으면 진작에 문제 삼았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었다.‘다 강현우 때문이구나.’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눌러 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강현
“자. 자자.”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고 어딘가 명령 같아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체온은 마치 그 성격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가까이 있을수록 숨이 막힐 듯한 뜨거움에, 윤하경은 몸을 조금 떼어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허리에 둔 팔은 단단히 그녀를 감고 있었다.“저, 우리... 그게 어떻게 된 건지...”윤하경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 이후의 기억이 아예 비어 있었다.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다음은 통째로 사라졌다.그 말에 강현우는 눈을 뜨고 비웃듯 웃었다.“왜? 어제는 그렇게 덮치더니 끝나니까 모르는 척이야?”그 조롱 가득한 말에 윤하경은 화들짝 돌아보며 외쳤다.“그럴 리가요!”‘설마 내가 먼저?’하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게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 방 안은 어둑했고 강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강현우는 다시 코웃음 쳤다.“어제 그렇게 들이대 놓고 지금 와서 모른 척? 기억 안 나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얘기해줄까? 네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따라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의도가 뻔히 느껴지는 그 손길에 윤하경은 다급히 그의 손을 막았다.몸은 이미 온통 쑤시고 아팠고 지금 또 한 번 겪을 자신은 없었다.“저... 저 배고파요.”윤하경은 작은 목소리로 애교 섞인 말투를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술만 들이켰으니 속이 허기질 만도 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아슬아슬하게 멈춘 손을 거두며 이불 밖으로 나갔다.그가 조명을 켜고 옷을 챙겨 입는 사이, 윤하경은 침대 속에 몸을 꼭 숨긴 채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 했다.“배고프다며.”“아, 네!”윤하경은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회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는데도, 다부진 어깨와 선명한 팔근육
“너무 많아...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휘청거리다시피 일어서려 했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감당 안 돼?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되는데?”윤하경은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술기운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눈앞의 강현우조차 흐릿하게 느껴져 마치 꿈속 같았다.윤하경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아, 진짜네. 현우 씨 맞구나.”술이 겁 많은 사람도 용감하게 만든다더니 지금의 윤하경은 평소 강현우 앞에서 보이던 위축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히려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꼬집고 뺨을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근데 왜 이렇게 여러 명이지...”윤하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말과 함께 흐르는 달큼한 숨결이 강현우의 목덜미에 닿자,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그 순간, 주저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갑작스러운 키스에 윤하경의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듯 멍해졌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착시키고는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서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된다는 건데?”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술에 취한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순하고 약해 보였다.“모르겠어...”그녀의 대답에 강현우는 코끝으로 그녀의 코를 슬쩍 스치듯 웃었다.“그럼 제대로 느껴보면 알겠네.”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그녀를 덮쳤고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지배적으로 변해갔다.평소에도 강현우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저항해 본 적 없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생각은 흐릿해졌고 몸은 이미 그가 이끄는 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그녀는 점점 더 나른하게 무너져갔다.“응...”작은 신음이 그녀 입에서
“정말 우연이네요.”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거절했다.“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귀한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오건우는 가볍게 웃었다.“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우리 협력 관계잖아요. 같이 타시죠, 마침 협력 얘기도 좀 나눌 수 있겠고요.”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예전에 오건우와 마주쳤을 때 강현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괜찮아요, 사람 오기로 했어요.”그냥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검은 벤츠 한 대가 멈춰 섰고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용천수의 얼굴이 나타났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제가 모시러 오라고 하셨습니다.”그 말과 함께, 그는 오건우를 힐끔 도발하듯 바라봤고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웃음기까지 섞인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가 나타난 게 의외였는지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오건우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보시다시피, 정말 일이 생겼네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협력 관계인 만큼, 괜히 틀어질 필요도 없었다. 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오건우 옆을 지나 용천수의 차에 탔다.차에 오르자마자 용천수는 액셀을 밟아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오건우는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시가 아주 철저하군.”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차를 돌렸다.차 안.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아 표정이 꽤 차가웠다.“왜 당신이죠?”용천수에 대한 인상은 좋을 수가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남자였고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했지만, 불쾌감은 숨기기 어려웠다.운전대를 쥔 용천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없이 손에 힘을 주며 한마디 했다.“고마워요.”“뭐라고요?”목소리가 낮아 처음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이번엔 더 또렷하게 말했다.“고맙다고요. 당신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윤하경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윤하연이 그 짓 당했을 땐 그렇게 분노하시지도 않더니요? 설마... 진짜 딸이라도 되는 거예요?”장난으로 던진 말에 윤수철의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고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이성을 잃은 듯 고함쳤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지금!”“헛소리?”윤하경은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지금 아버지 표정 보세요. 꼭 꼬리를 밟힌 고양이 같잖아요.”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며 분노만 삭일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억지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하경아, 하연이는 아직 어리잖니. 실수할 수도 있지. 한 번의 기회쯤은 줘야 하지 않겠냐.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매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어?”그는 어딘가 감정이 담긴 듯 말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억지로 말을 이었다.“우리 둘 다 세상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너희 자매뿐이야. 이런 걸로 평생 원수로 남는 건, 너무 안타깝잖니. 하연이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했는데 네가 이러면 걔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진심을 담은 척하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듯 웃어버렸다.“푸하하...”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긴 했지만 그 웃음 속엔 조롱과 냉소가 섞여 있어 윤수철조차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윤하경은 웃음을 멈추고 이제야 진지한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봤다.“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하경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줄 알고 얼굴에 희미하게 희망을 띄웠다.“하경아, 혹시 강현우에게 한마디만 해줄 수 있겠어? 그 사람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해서..”“...”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이란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길 향해 ‘남자한테 몸을 팔았다’고 쏘아붙이더니 이제는 그 상대에게 가서 부탁 좀 해달라니.“하하하하...”윤하경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