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윤하경은 입술을 삐죽이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강현우의 존재조차 잊고 지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서 연락이 오니 본능적으로 불안해졌다. 특히, 그와 만날 때마다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이 더욱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멍하니 고민하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을 보니 ‘온지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윤하경은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쯧, 우리 윤 부대표님. 요즘 너무 바빠서 본인 성도 잊으신 거 아니야?” 온지우의 익숙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은 목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고 지금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돈, 준비 끝났어. 해외로 한 바퀴 돌리고 왔으니까, 흔적 하나도 안 남았어. 카드 번호 줘. 바로 이체해 줄게.” 윤하경은 살짝 멈칫했다. 그제야 이 중요한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마워.” 윤하경은 짧게 생각한 뒤,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기부해.” 윤하경이 처음에 이 돈을 요구한 것은, 그동안 임수연이 윤씨 가문에서 빼돌린 돈을 토해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임수연의 손을 거친 돈은 더럽게 느껴졌다.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 돈을 전부 기부하기로 했다. 차라리 좋은 일에 쓰는 것이, 최소한 덕이라도 쌓는 길이었다.온지우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이내 키득거렸다. “와, 통 크네. 손 한 번 휘둘러서 몇십억을 그냥 내놓는다고? 기부자 이름은?” “익명으로.” 온지우는 한껏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역시 부자야. 근데 내 밥값은 잊으면 안 된다?” “네가 장소와 시간 정해서 보내 줘.” 그녀는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고 다시 의자에 기대어 커다란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야경이 마치 화려한 외투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누구도 모르는 더러운 진실들이 도사
차 안에는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향수 냄새가 감돌고 있었고 이건 강현우의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그와 오래 알고 지내면서 윤하경은 그에게서 언제나 같은 향만을 맡아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코를 스치는 향은 완전히 달랐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이건 여자의 향수 냄새임을 알 수 있었다.달콤하면서도 묘하게 유혹적인 향 하지만 너무 달아서 역겨울 정도였다.순간,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힐끔 바라보았다.‘아마 이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겠지. 젊고 예쁘고 애교 많고...’그렇게 생각하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고 지나갔다.윤하경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자리로 옮겼다. ‘그러면 내가 앉은 이 자리에, 방금까지 다른 여자가 앉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강현우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다가 이 향수를 묻혀 온 걸까?’어느 쪽이든 기분이 몹시 나빴다.이때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윤하경은 이내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저기, 강 대표님.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네요. 시간도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뵙는 게 어떨까요?”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변명을 했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향수 냄새가 가득한 상태에서 도저히 그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강현우 앞에서 아무리 낮은 자세를 취한다 해도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강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두운 눈빛이 그녀를 꿰뚫듯이 바라봤다.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고 강현우는 얕게 웃으며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몸이 안 좋다고?”“네.”“어디가?”강현우의 시선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윤하경은 서둘러 적당한 핑계를 떠올렸다.“그게, 그냥...”윤하경은 원래 거짓말을 잘 못했고 특히, 강현우 앞에서는 더더욱 연기를 못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지막이 덧붙였다.“그냥, 그... 매달 오는 그날이에요.”그
욕실 문을 열자, 강현우는 이미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고 그의 몸에 있던 상처들도 어느새 거의 다 나은 듯 보였다. 언제나처럼, 그는 완벽한 몸매를 자랑했다. 물 위로 드러난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 근육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지금 누구를 유혹하려는 거야.’ 속으로 눈을 굴리면서도, 윤하경의 얼굴에는 한없이 공손한 미소가 떠올랐다. “강 대표님, 제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수건 좀 줘.” 그는 무심하게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손에 들린 수건을 챙겨 그에게 건넸다. 이미 그와 얼마나 많은 밤을 보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남자의 얼굴과 몸은, 누구라도 탐낼 만큼 완벽하다는걸. 그저, 차 안에서 맡았던 그 역한 향수가 아니었더라면...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오늘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어느새 욕조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수건이요.”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손목이 강하게 잡혔고 중심을 잃은 그녀는 그대로 욕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철퍼덕! 욕조가 충분히 커서 두 사람이 들어가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지만 윤하경이 빠져든 순간,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의 몸은 뜨거운 물 속으로 파묻혔고 더욱 뜨거운 어떤 것과 맞닿았다. 윤하경의 손바닥은 본능적으로 그 뜨거운 살결 위에 놓였다. 그러나 그 감촉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강 대표님, 이게 무슨...”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가 고개를 숙였고 윤하경은 순간 숨이 막혔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고 흰 피부는 놀란 기색이 스며들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촉촉한 눈동자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강현우의 눈빛이 서서히 짙어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에 달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읏” 그리고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아파요” 진짜 아팠지만 윤하경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고 마치 투정을 부리는 듯한, 혹은 간절히 애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 대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위로 올라오더니 그녀의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덮었다. ‘거짓말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겠지.’ 윤하경은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받아들여야 했다. 욕조는 고급스러웠고 물 온도도 변함없이 따뜻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정신은 점점 멀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윤하경은 강현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힘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만해요, 제발”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의식을 잃었고 결국 욕조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윤하경은 자신이 안겨 어디론가 옮겨지는 걸 느꼈다. 푹신한 침대에 던져지듯 눕혀졌고 몸을 돌려 웅크리며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며칠 동안 쌓인 피로 그리고 오늘 밤 그가 준 벌로 인해 그녀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다. 강현우는 침대 옆에 서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잠시 후, 코웃음을 치듯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 “참, 별일이네.” 그는 욕실로 향해 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바로 그때 똑똑. “들어와.” 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도 차분했다. 방금 전까지 일어났던 격렬한 사랑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더 생기가 도는 듯한 얼굴이었다. 문이 열리고 우지원이 들어왔다. 그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듯한 시선이 우지원을 향해 날아들었다. 우지원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며 애써 모른 척한 채 보고를 시작했다. “대표님, 아까 그 여자 자백했어요. 둘
윤하경이 눈을 떴을 때, 강현우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에는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눈이 부셔서 자연스럽게 찌푸려진 시선이 이불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제야 아직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몸에 바짝 끌어안으며 얼굴만 살짝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강현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조심스럽게 발끝을 내디디며 침대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마치 도망치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옷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여성복으로 가득 찬 옷장을 보자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 훨씬 많아진 여성 의류들. 분명, 이곳에 오는 ‘여자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이겠지. 그녀의 머릿속에 어젯밤 차 안에서 맡았던 달콤하고 유혹적인 향수 냄새가 다시 떠올랐고 가슴 한구석이 갑갑하게 조여왔다. 쓸데없이 기분이 나빠진 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발끝으로 원피스를 하나 꺼내 들며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 “하, 역시 개 같은 남자야. 몸이 그렇게 좋으면 벽돌이라도 나르지. 겨우 약속 하나 잡아놓고 나를 이렇게 들볶아야 했냐고.” 그러나 그녀가 원피스를 고른 바로 그 순간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현우는 옷장 문 앞에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기대어 있었다. 걸음 소리도 없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녀를 보고 있었다니.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반사적으로 손에 든 원피스를 들고 몸을 가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했지만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혹시나 자신이 방금 뱉은 말을 전부 들었을까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하경은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대충 네가 ‘개 같은 남자’라고 욕할 때쯤?”
‘나를 여기 불러놓고 우아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감상하라는 건가?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테이블 너머의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묘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순간, 강현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 꽤 됐는데 나한테 보고할 건 없어?” “네?” 윤하경은 순간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강현우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나지? 네가 나한테 한빛 그룹을 넘겨달라고 설득할 때 했던 말. 내 투자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지. 지금 네가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건지, 방향은 정해졌나?” “아직요. 그동안 인사와 재무 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회사 내부에 부정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재무 쪽에서도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어요. 이걸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식기를 내려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네가 약속했던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거야.” 윤하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던지는 강현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항상 여유롭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그였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모습은 또 다른 의미로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다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실망하게 않길 바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계를 흘깃 확인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다니. 일과 사생활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도 정도가
“이렇게 여자 대표 코스프레한다고 해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회사에서 누가 실권을 가졌는지 잊지 마.” 윤하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의 말투는 겉으로는 가벼운 농담 같았지만 그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 순간, 보안 팀장이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왔고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윤 대표님,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이 층의 CCTV가 모두 작동을 멈췄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누군가 일부러 조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이 어렵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보안 팀장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한빛 그룹에 새로 부임한 부대표가 그냥 허울뿐인 자리가 아니라는 걸, 그는 최근 며칠 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단 몇 주 만에 회사 내의 부실한 인사 구조를 개편하고 재무 문제를 파헤치고 있었는데 오늘 이런 일이 터졌다. 윤하경이 찾아낸 재무상의 허점들을 꼼꼼히 표시해 둔 자료들이, 어제 퇴근하면서 미처 금고에 넣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순간 윤하경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하필이면 내가 재무 쪽을 조사하고 있을 때, 관련 서류가 사라졌다?’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이제 너무나 분명했다.“혹시 일을 계속 이렇게 대충 했어? 이 층의 CCTV가 고장 났다고 해서 그냥 덮고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말투는 나직했지만 날카로운 압박이 담겨 있었다. 보안 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오후까지 해결해.” 그녀는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덧붙였다. “그게 안 되면 보안팀에서 빈자리가 생길지도 모르겠네.” 보안 팀장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입술을 꾹 닫던 윤하경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동영상 보내주고 퇴근해.”윤하경의 말에 보안 팀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습니다.”보안 팀장은 혹여나 고작 이까짓 증거로 윤하경이 직무 유기라며 자신을 자르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이렇게 넘어갈 줄이야.’인사를 건넨 보안 팀장은 다행이라 여기며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윤하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퇴근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어쩌다 일찍 퇴근해 별장으로 향한 윤하경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언제 돌아온 것인지 임수연이 별장에 있었다. 별장으로 들어선 윤하경은 여유롭게 정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임수연을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윤하경을 보는 임수연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그러나 임수연은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경이 왔니?”윤하경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임수연에게 다가갔다. “아줌마도 오셨네요.”“축하해.”윤하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며칠 동안 밖에서 잘 지내셨어요?”이 말은 사실 임수연을 비꼬는 것이었다. 윤하경의 말에 겨우 짓고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임수연은 어쩌면 이번 일은 윤하경이 몰래 꾸민 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도 임수연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감히 윤하경과 갈등을 빚을 수는 없었다. 임수연이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긴. 집보다 편한 곳이 어디 있다고.”“하지만 이번엔 억울하게 당한 거라 네 아빠가 직접 날 데리러 왔잖니. 게다가 나한테 큰 보석도 사주셨어. 봐봐.”말하며 임수연은 손을 뻗어 윤하경의 눈앞에 흔들어보였다. 잔뜩 올라간 어깨가 곧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는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윤하경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임수연 손에 있는 에메랄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순간 윤하경은 임수
“대표님, 제가 말씀드리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장담해 주실 수 있나요?”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가느다란 하얀 손가락으로 커피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그건 주시연 씨의 대답이 내 마음에 드느냐에 달려 있어요.”주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녀의 얼굴에 다시 깊은 고민이 스쳤고 후회의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 처음부터 그 돈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 사람은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 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처럼 윤하경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그녀는 이를 악물었고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뒤엉켜 혼란스러웠다.윤하경은 손목시계를 흘깃 보며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주시연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대표님, 그 돈은 제가 아니라 윤씨 가문의 사람이 가져갔어요. 저는 뇌물을 받았지만 이 일이 밝혀지면...”윤하경은 주시연의 말투에서 마치 자신을 위협하려는 듯한 뉘앙스를 감지했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 일이 밝혀지고도 누가 주시연 씨에게 돈을 빼돌리라고 했는지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하나뿐이에요. 재무 이사인 주시연 씨가 직권을 남용해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게 될 거예요. 금액도 적지 않잖아요?”윤하경은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감옥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지 않다면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좋겠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날 선 칼날처럼 주시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윤하경이 말한 것이 바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말하면 끔찍하게 망가질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으면 더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다.결국 주시연은 전자를 선택했다.“좋아요.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주시연은 결심을 내리자 한층 차분해졌고 윤하경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하지만 제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렸다.“말해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들어줄게요.”“나중에 최고의 변
윤하경은 그녀를 한 번 돌아보았다.“왜 그래요? 아직 할 말이라도 있어요?”윤하경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주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저기...신고하지 않으시면 안 될까요?”“네?”윤하경은 하얗고 예쁜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반적으로 사람을 해칠 것 같지 않은 온화한 인상을 주었다.“조금 전에는 주시연 씨와는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어요?”주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에 고뇌가 스쳤다.윤하경은 점점 인내심을 잃고 주시연의 손에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그 순간 주시연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강도가 꽤 세서 쿵 하는 소리가 났고 윤하경은 놀랐다.그녀는 돌아서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이러는 거죠?”윤하경은 일부러 묻고 있다는 걸 주시연은 알았다.주시연은 눈을 감았다가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윤 대표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됐어요. 부탁드립니다. 신고하시면 제 인생은 끝이에요.”윤하경은 눈동자를 살짝 굴렸지만 전혀 놀라지 않았다.만약 확신이 없었다면 그녀는 주시연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다만 주시연이 이렇게 빨리 항복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다시 돌아서서 이전에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땅에 앉아 있는 주시연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멍청한 사람과 얘기하는 걸 싫어해요. 주시연 씨가 현명하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주시연은 턱을 살짝 들었다.“일어나세요. 난 다른 사람의 조상님이 되려는 생각이 없어요. 내게 무릎 꿇을 필요 없어요.”주시연은 그녀를 쳐다보았고 잠시 침묵하더니 결국 일어섰다.그녀는 오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상의는 흰색 재킷에 레이스 이너를 매치했다.치마는 무릎을 살짝 가리는 정도의 길이였다.주시연의 몸매를 적당히 드러내며 직장 내 엘리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매우 초라해 보였다.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윤하경 맞은편에 앉아 눈을 살짝 감으며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비록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투였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두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윤하경이 피식 웃어버리며 말했다. “주시연 씨는 회사의 고참 직원이시잖아요. 지금은 제가 시연 씨의 직속 상사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시연 씨와 얘기를 나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아닌가요?”초조한 주시연과 달리 윤하경은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커피를 마시는 윤하경의 시선은 여전히 주시연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시선을 올린 주시연은 윤하경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죠. 윤 대표님께선 뭘 알고 싶으신 거예요?”“회사에 온지 몇 년 되셨어요?”윤하경이 나지막이 물었다. “아마 3, 4년 쯤 된 것 같아요.”“아~”윤하경이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시연 씨는 제가 갑자기 회사 부대표직을 맡은 게 시연 씨의 커리어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세요?”“네... 네?”주시연은 윤하경이 그런 질문을 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멍해진 주시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윤하경에게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전 윤 대표님께서 회사에 오셔서 정말 기뻐요.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윤하경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요?”주시연의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럼요.”잠시 생각하던 주시연이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 오시기 전에 정연 언... 백 팀장님에게서 말씀 많이 들었어요. 대단하신 분이라고.”“젊은 시절 신 대표님의 모습이 있다고 하셨어요. 신 대표님이 이끌던 한빛은 잘 나갔었다고요.”주시연이 입술을 짓이겼다. “대표님께서 부임하신 시간이 길진 않지만 전 대표님 능력을 인정해요.”그 말은 꽤 진심인 것 같았다. 거짓말이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윤하경의 눈빛이 비웃음으로 빛났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그래요?”“그럼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왜 제 사무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
“엄마가 고생해서 이룬 회사를 아빠 손에 무너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잖아요.”윤하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저와 강한 그룹의 관계는...”윤하경이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신비감을 조성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윤수철의 모습에 윤하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직접 강한 그룹에 가서 물어보시는 게 어때요?”말하며 윤하경은 또다시 하품했다. 기지개를 켜자 실크 소재의 잠옷이 어깨에서 흘러내려 백옥처럼 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저 정말 피곤해서 잠 좀 자야겠어요.”“안 돼.”윤수철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이번엔 그가 직설적으로 얘기를 꺼냈다. “회사 장부 조사는 이제 그만해.”“금방 입사해서 아직 회사에 관해서도 제대로 모르잖아. 우리 가족 회사이기도 해.”“장부 조사를 끝내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라도 할 거야?”윤하경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윤수철을 쳐다보았다. “아빠도 저희가 가족이라는 걸 알고 계시긴 하셨네요?”“그럼 그땐 왜 한빛 그룹을 다른 사람에게 줄지언정 저에게 넘기려고 하지 않으셨어요?”윤하경의 뜻은 너무도 분명했다. 받은 것이 있으니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의미였다. ‘그 장부, 내가 끝까지 파줄게.’비록 조사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 문제로 제일 먼저 본색을 드러낸 것이 윤수철이라는 것은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난... 그 사람일 줄 알았는데.’윤하경은 윤수철이 또 다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전에 먼저 서재를 나섰다. 서재 문이 닫히자 윤하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결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회사에 도착한 윤하경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고 황급한 여자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여보세요.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네. 있어요.”윤하경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30분 후, 회사 앞 카페에서 만나죠.”“아, 룸에서요.”말을 마친 윤하경은 상대방이 대답도 하
문을 열고 들어간 윤하경은 윤수철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은 몸은 소파에 기댄 윤하경은 누가 봐도 피곤한 모습이었다. 시선을 올려 그런 윤하경을 본 윤수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버릇없긴.”윤하경이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예절 교육이나 하시려고 부르신 건 아니죠?”“어쩌겠어요. 어릴 때 예절 교육을 해줄 아빠가 없었으니 이렇게 큰 거죠.”“하지만 저도 궁금하네요. 윤하연이 그렇게 돌아올 땐 왜 버릇없다고 뭐라고 하지 않으시는 거예요?”윤하경의 몇 마디에 말에 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그 어떤 말로도 받아칠 수 없었다. 몇 년 사이 윤하경의 말투는 점점 더 삐딱해졌다. 특히 요즘 따라 더 그랬다. 윤하경의 말은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공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윤하경의 모습이 윤수철은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며 윤하경은 바라보던 윤수철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하연이는 네 동생이야. 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좋아하면 어떡해?”“설마 네가 벌인 짓이야?”그 말에 기가 막힌 윤하경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잠깐만요...”“첫 째, 엄마가 낳은 자식은 저 한 명뿐이에요.”“둘 째, 전 모함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요. 제가 한 짓이라고 하시니 전 경찰에 신고해 진실을 밝히는 수밖에 없어요.”윤하경의 휴대폰은 그녀의 방에 있었다. 몸을 일으켜 윤수철의 책상으로 다가간 윤하경이 서재의 전화로 112를 눌렀다. 윤수철이 재빨리 전화를 꺼버리며 윤하경을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이렇게 네 동생이 죽어줘야 속이 시원하겠어?”“...”윤하경은 가끔 윤수철이 뭔가에 쓰인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의심스럽기도 했다. ‘왜 사람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윤하경이 냉소를 지었다. “아빠가 절 안 믿으시는 거잖아요.”윤수철은 윤하경만큼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말싸움으로 그녀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어른이라는 명분으로
방으로 올라간 윤하경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내려왔다. 임수연이 돌아온 별장의 식탁은 또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하경아, 이건 내가 유 집사님께 부탁해서 만든 거야. 많이 먹어.”대체 왜 이렇게 친절하게 구는 것인지 윤하경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윤하경은 아무런 표정 없이 그릇 위에 올려진 불고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곤 임수연이 뻘쭘하든 말든 불고기를 테이블 위로 던져버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이다. 멈칫하던 임수연이 고개를 돌려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윤수철이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줌마가 좋은 마음으로 먹으라고 하는 거잖아. 안 먹는 건 둘째 치고 왜 이렇게 투정이야?”“어릴 때부터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이렇게 사람 성의를 무시하면 돼?”윤하경이 씰룩,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제가 괜히 음식을 낭비했네요. 죄송해요, 아빠.”식탁에 널브러진 고기를 다시 집은 윤하경이 재빨리 불고기를 윤수철의 그릇에 올렸다. “제가 감당하기엔 아줌마 성의가 너무 부담스러워서요, 아빠가 대신 받아줘요.”말하며 윤하경은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윤수철을 바라보았다. ‘날 엿 먹이시려고?’‘누군 못하는 줄 알아?’윤하경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윤하경의 행동에 뻘쭘해진 윤수철이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릇 위에 올려진 불고기를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런 윤수철을 옆에서 지켜보던 임수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보, 하경이는 살이 찔까 봐 먹고 싶지 않은가 봐요. 멋대로 불고기를 준 제 탓이에요.”임수연은 고개를 돌려 유 집사에게 말했다. “밥 한 그릇 새로 가져와요.”숨을 들이쉬며 냄새를 맡던 윤하경이 곧 미간을 찌푸렸다. 예쁜 윤하경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윤하연이
입술을 꾹 닫던 윤하경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동영상 보내주고 퇴근해.”윤하경의 말에 보안 팀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습니다.”보안 팀장은 혹여나 고작 이까짓 증거로 윤하경이 직무 유기라며 자신을 자르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이렇게 넘어갈 줄이야.’인사를 건넨 보안 팀장은 다행이라 여기며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윤하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퇴근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어쩌다 일찍 퇴근해 별장으로 향한 윤하경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언제 돌아온 것인지 임수연이 별장에 있었다. 별장으로 들어선 윤하경은 여유롭게 정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임수연을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윤하경을 보는 임수연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그러나 임수연은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경이 왔니?”윤하경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임수연에게 다가갔다. “아줌마도 오셨네요.”“축하해.”윤하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며칠 동안 밖에서 잘 지내셨어요?”이 말은 사실 임수연을 비꼬는 것이었다. 윤하경의 말에 겨우 짓고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임수연은 어쩌면 이번 일은 윤하경이 몰래 꾸민 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도 임수연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감히 윤하경과 갈등을 빚을 수는 없었다. 임수연이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긴. 집보다 편한 곳이 어디 있다고.”“하지만 이번엔 억울하게 당한 거라 네 아빠가 직접 날 데리러 왔잖니. 게다가 나한테 큰 보석도 사주셨어. 봐봐.”말하며 임수연은 손을 뻗어 윤하경의 눈앞에 흔들어보였다. 잔뜩 올라간 어깨가 곧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는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윤하경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임수연 손에 있는 에메랄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순간 윤하경은 임수
“이렇게 여자 대표 코스프레한다고 해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회사에서 누가 실권을 가졌는지 잊지 마.” 윤하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의 말투는 겉으로는 가벼운 농담 같았지만 그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 순간, 보안 팀장이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왔고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윤 대표님,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이 층의 CCTV가 모두 작동을 멈췄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누군가 일부러 조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이 어렵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보안 팀장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한빛 그룹에 새로 부임한 부대표가 그냥 허울뿐인 자리가 아니라는 걸, 그는 최근 며칠 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단 몇 주 만에 회사 내의 부실한 인사 구조를 개편하고 재무 문제를 파헤치고 있었는데 오늘 이런 일이 터졌다. 윤하경이 찾아낸 재무상의 허점들을 꼼꼼히 표시해 둔 자료들이, 어제 퇴근하면서 미처 금고에 넣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순간 윤하경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하필이면 내가 재무 쪽을 조사하고 있을 때, 관련 서류가 사라졌다?’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이제 너무나 분명했다.“혹시 일을 계속 이렇게 대충 했어? 이 층의 CCTV가 고장 났다고 해서 그냥 덮고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말투는 나직했지만 날카로운 압박이 담겨 있었다. 보안 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오후까지 해결해.” 그녀는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덧붙였다. “그게 안 되면 보안팀에서 빈자리가 생길지도 모르겠네.” 보안 팀장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나를 여기 불러놓고 우아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감상하라는 건가?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테이블 너머의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묘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순간, 강현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 꽤 됐는데 나한테 보고할 건 없어?” “네?” 윤하경은 순간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강현우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나지? 네가 나한테 한빛 그룹을 넘겨달라고 설득할 때 했던 말. 내 투자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지. 지금 네가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건지, 방향은 정해졌나?” “아직요. 그동안 인사와 재무 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회사 내부에 부정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재무 쪽에서도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어요. 이걸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식기를 내려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네가 약속했던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거야.” 윤하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던지는 강현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항상 여유롭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그였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모습은 또 다른 의미로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다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실망하게 않길 바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계를 흘깃 확인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다니. 일과 사생활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도 정도가